아름다운 영웅 '김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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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외동포 김영옥!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 참전한 그는 이탈리아, 프랑스, 한국 정부로부터 최고무공훈장을 수여받았습니다.

프랑스 최고무공훈장인 레지옹도뇌르 서훈(2003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모란장(2003년)과 최고무공훈장 추서(2006년), 미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영웅 16인 선정(2011)의 기록을 갖고 있습니다. 2011년에는 우리나라 초등학교 5학년 국어교과서에 그의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그의 일생을 담은 책이 한우성 저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2005. 12, 북스토리)입니다.

김영옥의 부모는 조선이 일제에 강점당한 1910년대에 미국으로 건너왔고, 김영옥은 미국에서 태어났습니다. 미국 이민 2세대에 해당합니다. 그의 아버지 김순권은 세 번의 시도 끝에 밀항에 성공하여 로스엔젤레스에 안착했습니다(75쪽).

영어를 할 줄 알았던 그의 부모는 편의점을 인수해 돈을 모았고, 그 돈으로 아버지는 독립운동 자금을 댔습니다. 아버지 김순권은 대한인 동지회 회원이었습니다. 술과 친구를 좋아했던 아버지는 회원들을 집으로 불러들여 술 대접하기를 좋아했고, 그 때문에 어머니 노라 고는 고생을 해야 했다고 합니다(75쪽 이하).

김영옥은 1919년 4남 1녀 중 둘째, 아들로는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미국에서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그는 조지아 주 포트 배닝에 있는 육군장교후보생학교를 졸업하고 미육군 장교의 길을 걸었고, 최종적으로는 1972년 육군 대령으로 예편했습니다(573쪽).

그는 제2차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와 프랑스 전선에서 싸웠고, 심한 부상으로 종전 이후에 예편을 했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자원입대를 했고, 한국전을 치렀습니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 최전방 대대장으로 복무하면서 수많은 무공을 세웠습니다.

예편 후에는 한국전쟁 때 입었던 부상의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으며 비교적 큰 수술만 40번 정도 받아야 했다고 합니다(574쪽).

부상의 후유증을 이겨낸 그는 사회적 약자를 수호하는 일, 재미한인사회를 위한 봉사, 재미일본인사회를 위한 봉사, 1999년 캘리포니아 주의회의 일본군 위안부 사과와 배상을 촉구하는 규탄 결의안을 성사시키기 위한 막후 활동 등을 했습니다(574~585쪽).

1999년 AP통신이 한국전쟁 초기 노근리에서 미군이 한국인 피난민을 대량 학살했다는 요지의 보도를 하면서 세계를 흔들었을 때, 클린턴 대통령은 미국 국방부가 노근리 사건 진상 조사를 하도록 했고, 그 때 김영옥은 ‘외부전문가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했습니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이 로마 해방전에서 승리하는 결정적 실마리를 만들어낸 사람이 바로 김영옥이었습니다. 이 때 연합군은 물론이고 독일군도 상대방의 포로를 잡는 일에 집중했지만, 그 돌파구를 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김영옥이 속한 100대대에서도 포로 생포가 발등의 불이었습니다. 대대 정보참모였기 때문에 포로 생포는 근본적으로 자신이 해결해야 하는 임무라고 생각했던 그는 대대장 고든 싱글스 중령을 찾아갔습니다.

“저를 보내 주시면 포로를 잡아오겠습니다.”
“미친 소리!”
“반드시 살아오겠습니다.”(58쪽).

그의 작전은 작전 교범을 ‘뒤집어 읽는 것‘이었습니다. 표현을 달리하면 그 누구도 흉내내기 어려운 창의적인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분대나 소대, 심지어 중대까지 동원됐는데 그 자체가 틀린 것이다. 병력이 많으면 눈에 띄기 쉽고 소음도 많고 기동력도 떨어질 뿐 아니라 실패했을 때 피해도 커진다. 결론은 간단하다. 극소수로 백주에 침투하는 것이다. 밤에 주인 없는 땅을 지나 적당한 장소에 매복해 있다가 낮에 적진에서 움직인다면 승산이 있다.”(58, 59쪽).

그는 지도 읽기(독도법)의 귀재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지도를 보면 지형을 그대로 머릿속에 그릴 수 있었다. 이 능력은 산야에서 전투를 이끌어야 하는 보병 장교에게는 천혜의 선물이었다. 게다가 영옥은 어떤 사물을 보면 그 모습이 마치 카메라로 찍은 것처럼 머릿속에 남곤 했다.”(60쪽).

김영옥은 결국 독일군을 포로로 잡아왔고, 이에 힘입어 ‘버팔로 작전’이 전개되었다고 합니다.

“영옥이 포로를 잡아온 다음 날, 사단장 라이더 장군이 영옥을 만나기 위해 일부러 대대본부를 방문했다. 라이더 장군은 영옥을 불러 공훈을 치하하고 영옥이 잡아온 포로에게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연합군이 곧 총공격을 개시할 것이라고 귀띔했다. 라이더 장군이 말한 총공격이란 ‘버팔로 작전’이었다. 5월 23일 여명과 함께 시작된 버팔로 작전으로 연합군은 로마를 지키는 독일군의 마지막 저항을 분쇄하고 6월 4일 드디어 로마에 입성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개시되기 바로 이틀 전이었다.”(74쪽).

이 책을 쓴 한우성은 김영옥의 인간 됨됨이를 다양한 각도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이렇습니다.

“영옥은 상황 판단이 매우 빨랐고 결코 자신의 영광을 위해 부하를 희생시키지 않았다. 항상 부하의 안전을 먼저 챙겼고 그 때문에 종종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하기도 했다. 최일선에서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병사들은 본능적으로 이를 느낄 수 있었다. 전장이라는 극한상황에 처하면 가면은 저절로 벗겨지게 마련이었다.”(157쪽).

이러한 설명을 뒷받침하는 일화들은 이 책에 셀 수 없이 많이 나옵니다. 전투에서 공적을 올려 그것을 승진의 기회로 삼기 위해 무모하고 위험한 전투를 감행하고, 그로 인하여 부하들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당하는 사례들을 읽을 때마다, 저는 인간의 탐욕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습다.

이와 관련해서는 “한국전쟁을 악용하는 미군 장교들”(532쪽 이하)이라는 제목으로 상세하게 기술되고 있습니다.

한국전에 참전한 김영옥은 부대원들과 함께 전쟁 고아들에게 고아원을 연결해 주고, 서울 용산 삼각지 근처에 있던 경천애인사에 있는 고아들을 지원해 주는 일을 했습니다. 경천애인사는 ‘18번 고아원’으로 불렸다고 합니다(525쪽).

김영옥의 이야기가 우리 한국인들에게 자세하게 알려지게 된 데는 이 책을 쓴 한우성의 각고의 노력이 결정적인 것이었습니다.

한우성은 김영옥과의 인터뷰 기록을 정리하는 것은 기본이고, 김영옥이 목숨을 걸고 전투를 벌였던 역사의 현장들을 찾아가 관계자들을 만났고, 그들의 기억을 되살려 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감동적인 것은 프랑스 보쥬 산맥에 있는 비퐁텐 마을 이야기입니다.

한우성이 그 마을을 찾아가 마을 사람들에게 2차 대전 때 그곳에서 싸운 ‘꼴로넬 김(김 대령)’을 아느냐고 물었을 때 ‘그렇다’고 대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당시 계급은 대위 아니었나. 그렇다면 혹시 ......?’ 하면서 “2차대전 때 이곳에서 싸웠던 ‘까삐뗀 김(김 대위)’이라는 동양계 미군을 취재하러 왔다”고 하자, 할머니 한 분이 갑자기 나지막이 탄성을 지르면서 ”아, 까삐뗀 김!“이라고 했습니다. ”그를 아십니까?“라고 묻자 ”나도 어릴 때부터 그 이름을 듣고 자랐지.“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36, 37쪽).

이 상황을 한우성은 이렇게 정리해 놓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취재에서는 그의 부대조차 기억하는 사람을 만날 수 없어 이제는 시간이 너무 흘렀으려니 하면서 프랑스 취재에 나섰던 내게 그들의 기억은 벅찬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에게 자유를 찾아준 사람으로 기억하는 전쟁영웅 ‘까삐뗀 김’을 일본계로 알고 있었다.
브뤼에르에서 불과 수 킬로미터 떨어진 비퐁텐이라는 좀 더 작은 마을은 당시 나치 치하에서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 피를 흘렸던 연합군 장병 전체에 대한 감사의 상징으로 마을 성당의 현관 옆에 그의 이름을 넣은 작은 동판을 새겨 두고 있었다.“(37쪽).

저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 김영옥이라는 이름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역사에 대한 저 자신의 무지가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을 부끄럽게 경험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저의 가슴은 김영옥 대령 그 분에 대한 죄송한 마음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이 책은 인간 김영옥의 삶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꾸민 책입니다. ‘어떻게 이런 책을 쓸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이 책을 쓴 한우성 그 분에 대해서도 경외감이 듭니다.



[출처 : 김승환 전북교육감 페이스북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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