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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동포 성공시대] (24) '이주여성의 맏언니' 안순화 씨
다문화 지원단체 '생각나무 BB센터' 상임대표…소외된 이웃 위한 헌신 외길 '서울시 명예의 전당' 조선족 유일 입성 "다문화 자녀 이중언어 인재로 키울 것" (서울=연합뉴스) 신유리 기자 = 서울 지하철 시청역에서 지하통로를 걷다 보면 '서울시 명예의 전당'이 나온다. 소외 이웃을 돕는 데 헌신한 시민 10명을 선정해 동판 부조상을 나란히 새겨넣은 공간으로 지난달 제막했다. 100명이 넘는 후보 가운데 꼼꼼한 심사를 거쳐 '서울의 얼굴'로 뽑힌 시민 중에는 결혼이주여성도 한 명 포함됐다. 조선족 출신인 안순화(51) 씨. 그는 지난 25일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명예의 전당'에 내 얼굴이 새겨진 걸 보니 뿌듯했다"면서도 "지금까지 한 일보다 앞으로 할 일이 더 많다는 생각에 오히려 책임감이 커졌다"며 말문을 열었다. 안 씨는 올해로 11년째 결혼이주여성의 서울살이를 돕는 '맏언니'이자 한국 사회에 건강한 다문화 정책을 제안하는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흔히 말하는 '성공'으로 보기엔 돈을 많이 번 것도, 고위직에 오른 것도 아니지만 안씨가 걸어온 길을 보면 맨손으로 시작해 화려한 수상 경력을 쌓은 '반전 드라마'가 펼쳐진다. 실제로 그가 한국에 처음 온 2003년 서울은 말 그대로 '낯선 땅'일 뿐이었다. 한국말도 거의 하지 못했고, 아는 사람도 한국인 남편 말고는 없었다. "고향인 중국 하얼빈에서 한족 학교에 다녔거든요. 어릴 때부터 중국말만 하면서 컸죠. 부모님은 늘 '민족의 말'을 배우라고 강조하셨지만 그냥 흘려들었어요. 그땐 한국인과 결혼해 한국에 가서 살게 될 줄 꿈에도 몰랐으니까요." 다문화 지원 단체인 '생각나무 BB센터' 안순화(51) 대표. 안 씨는 오로지 독학으로 한국어를 깨우쳤다. 닥치는 대로 TV 드라마를 보면서 회화를 배우고, 길에서 나눠주는 광고 전단을 따라 쓰며 글자를 익혔다. 이때 "언어의 소중함을 온몸으로 깨달았다"고 한다. 2006년 여성부 이주여성긴급지원센터에서 중국어 상담원으로 일하기 시작한 것도 당시 경험이 계기가 됐다. "그땐 한국에 온 결혼이주여성 중에 한국어 교실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도 많았어요. 저하고 비슷한 상황인 거죠. '후배'인 이주여성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어서 중한(中韓)사전을 들춰가며 통번역에 매달렸습니다. 언어의 장벽에 부딪혀 남편이나 시댁과 불화를 겪어야 한다면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그가 본격적으로 이중언어 강사로 활동을 시작한 것은 2009년이다. 이주여성 4명과 함께 매주 토요일 공부방을 연 것을 모태로 '생각나무 BB센터'를 세웠다. 7년째인 올해 강사는 20여 명, 누적 회원은 1천여 명에 달하는 눈부신 성장을 거뒀다. "처음엔 다문화 가정 자녀에게 '엄마 나라의 말'을 가르치자는 생각에서 출발했죠. 아이들이 엄마의 모국어와 한국어를 동시에 구사해 한국 사회에서 이중언어 인재로 성장할 수 있으니까요. 또 엄마의 모국을 이해하게 되면서 사춘기에 겪을 정체성 고민도 줄어들 수 있고요. 공부방에 다녀간 아이들이 엄마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모습을 볼 때마다 큰 보람을 느낍니다." '생각나무 BB센터'는 '이중언어와 이중문화를 토대로 풍성한 생각이 열리는 나무'를 뜻한다고 한다. 단체명의 BB는 'Bilingual'(이중언어)과 'Bicultural'(이중문화)의 이니셜이다. 안 씨는 상임대표로 센터를 이끌며 이중언어 교재 개발, 여성 창업 지원, 다문화 인식 개선 교육, 글로벌 전통문화 공연 등을 아우르는 단체로 키웠다. 11년째 한 길을 걷는 안 씨의 뚝심은 각계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2014년 이주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서울시 봉사상' 대상을 받은 것을 포함해 2013년 'LG와 함께하는 동아 다문화상', 2015년 '세계인의 날' 법무부 장관상 등 민관을 넘나드는 수상 목록을 쌓았다. 하지만 봉사에 대한 욕심 때문에 정작 자신의 시간을 갖지 못해 모든 걸 그만두고 싶은 적도 많았다고 한다. "하루에 두세 시간을 잘 때도 잦았어요. 낮에는 다문화 강연을 하고, 밤에는 여성가족부 다문화가족위원회, 서울시 외국인주민대표자회의, 선거연수원의 외국인 선거 강의 등을 준비하느라 뜬눈으로 보내는 날도 많죠. 중국에서 대학 시절 경영학을 전공했는데, 가끔은 '이렇게 무역업을 했으면 벌써 부자가 됐을 텐데' 하는 생각도 해요." 안 씨는 그러면서도 "한국에 와서 돈보다도 사람을 얻었다고 생각한다"면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센터로 찾아오는 다문화 이웃들을 보면 '이 공간을 어떻게 해서든 지켜야겠다'고 다짐한다"고 덧붙였다. 이날 안 씨를 만나러 찾아간 중화동의 센터 사무실에서는 중국, 동남아 출신 이주여성들의 발길이 북적였다. 이들은 책상에 앉아 한국어를 공부하기도 했고,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안 씨는 "센터 운영비를 회원들의 자발적 회비로 충당하는 터라 매달 월세를 내기에도 빠듯한 상황"이라며 "한국 사회에서 다문화 이주민이 할 수 있는 역할이 무궁무진한 만큼 각계에서도 관심을 보내주시기를 부탁한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센터를 나서는데 문틈 사이로 안 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국어를 배우러 온 이주여성의 질문에 답을 하는 듯했다. "이 문장 말이죠? '괜찮습니다'. 발음이 어렵죠? '괜.찮.습.니.다'" newglass@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6/11/28 07:00 송고
2016.11.28
하모니카 연주자 전제덕, 한국인 첫 '호너 아티스트' 선정
시각장애 딛고 세계적 연주자 반열 올라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하모니카 연주자 전제덕(42)이 한국인 최초로 '호너(HOHNER) 아티스트'로 선정됐다. 소속사 JNH뮤직은 "전제덕이 독일에 본사를 둔 세계적인 하모니카 브랜드 호너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 공식 아티스트로 선정됐다"며 "이는 하모니카 연주자에게 최고의 영예"라고 25일 밝혔다. 전제덕을 공식 아티스트로 발표한 호너 홈페이지 [JNH뮤직 제공] 그간 호너 아티스트로는 벨기에의 '재즈 하모니카 장인' 투츠 틸레망, '클래식 하모니카의 전설' 토미 레일리를 비롯해 밥 딜런, 비틀스의 존 레넌 등 팝스타가 선정됐으며 이들의 시그니처 모델이 판매됐다. 호너는 홈페이지에 전제덕의 사진과 프로필을 올리고 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선정 소식을 알렸다. 전제덕은 호너 하모니카의 국내 수입사인 코스모스악기의 추천으로 심사를 받았으며, 이로써 데뷔 12년 만에 세계적인 하모니카 연주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전제덕은 시각장애를 극복하고 한국 대표 하모니카 연주자가 된 입지전적 뮤지션이다. 2004년 첫 앨범을 내면서 '하모니카 붐'을 일으켰고 이듬해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최우수 재즈&크로스오버' 부문을 수상했다. 2013년에는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대통령 표창도 받았다. 지금껏 총 4장의 앨범을 냈으며 2012년 5월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단독 공연을 열기도 했다. 하모니카 연주자 전제덕 [JNH뮤직 제공] 소속사는 경사를 맞은 전제덕이 정신적 스승이던 투츠 틸레망을 위한 헌정 공연을 12월 30일 오후 8시 성수아트홀에서 개최한다고 밝혔다. 틸레망은 올해 8월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사물놀이 연주자이던 전제덕은 1996년 라디오 방송에서 우연히 틸레망의 연주를 듣고 깊은 감동을 받아 하모니카와 인연을 맺었다. 이후 스승도 악보도 없이 틸레망의 음반을 교본 삼아 청음에만 의지한 채 재즈 하모니카를 독학으로 터득했다. 2004년 틸레망의 내한 공연 때 직접 찾아가 만난 인연도 있다. 전제덕은 이번 공연에서 틸레망의 대표곡 '블루젯'(Bluesette)을 비롯해 '이프 유 고 어웨이'(If you go away), '더 데이즈 오브 와인 앤드 로지즈'(The days of wine and roses) 등을 연주한다. 또 자신의 곡과 재즈와 팝 넘버를 선사한다. 관람료 4만4천~5만5천원. mimi@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6/11/25 13:53 송고
2016.11.25
[사람들] '2016 해외봉사상' 박관태씨 "나누는 삶, 지금 시작하세요"
KOICA 중장기자문단 의사로 몽골서 인술 펼쳐…15년간 20개국서 활동 (서울=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돈 좀 벌고 상황이 나아지면 그때부터 나누며 살겠다고 하면 평생 나눔의 삶은 불가능합니다. 나눌 것이 없어도, 삶이 힘들어도 지금 나누는 삶을 시작하십시오." '2016 해외봉사상' 국무총리상 수상자인 박관태(46) 씨는 22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대뜸 "나눔의 삶은 곧 행복한 삶이기에 즉시 실천하라"는 제안부터 던졌다. 정부 무상원조 전담기관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중장기 자문단 외과의사인 그는 현재 몽골국립의과대에서 긴급구호와 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지난 2001년 KOICA 국제협력 의사로 몽골에서 첫 봉사를 시작한 이후 7년은 몽골, 8년은 한국에 있으면서 아이티, 캄보디아, 네팔, 케냐, 짐바브웨, 마다가스카르 등 20여 개국에 나가 인술을 펼쳤다. KOICA가 '국제개발협력의 날'(11월 25일)을 맞아 선정·시상하는 '해외봉사상'의 영예를 안은 것은 그러한 공로를 인정받은 덕분이다. 박 씨는 "봉사를 하기 위해 해외에 나오는 것을 걱정하고 염려하는 청년들이 많다. 그것은 아마도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이겠지만 어디서든 삶은 살아지게 마련"이라며 "평생 나누고 도우며 살다 보면 여유와 행복에 대한 기준이 달라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해외봉사상은 15년 동안 한 번도 여름 휴가를 가지 않은 데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해요. 한국에 거주할 때도 휴가를 내고 매년 5∼6회 해외 봉사를 다녔으니까요. 요즘 SBS가 방송하는 '정글의 법칙'에 나올 만한 오지, 긴급구호 현장 등을 찾아가 복강경 수술을 하고, 장기 이식을 했습니다." '2016 해외봉사상' 국무총리상 받은 박관태 몽골국립의과대 외과 의사. 의사로서의 안락한 삶을 뿌리치고 봉사에 온 열정을 쏟아붓게 된 이유를 물었더니 그는 29살의 나이에 악성 임파종으로 세상을 먼저 떠난 친구를 떠올렸다. 졸업 후에 같이 해외 의료 봉사를 하기로 약속했고, 그것을 위해 각자 내과·외과 의사가 돼 함께 몽골로 가자며 준비했던 친구다. 둘은 고려대 의대에 입학해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함께 밟았다. 그러나 친구는 "함께 못 가서 미안하다. 내 몫까지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갑작스럽게 하늘나라로 갔고, 박 씨는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술에 빠져 살던 삶을 정리하고 전문의가 되자마자 몽골로 날아갔다. 친구의 몫까지 열심히 하겠다며 밟은 몽골 땅에서 그는 2년 6개월 동안 무려 3천 건이 넘는 수술을 했다. 손목에 무리가 와 석고붕대를 하고 다닐 만큼 외과 의사로서 최선을 다해 봉사했다. 4년을 몽골에서 보내고 2005년 귀국한 박 씨는 서울 아산병원 외과 펠로우를 하면서도 몽골에서의 복강경 수술 경험을 바탕으로 개도국에 복강경 수술을 어떻게 적용하고 또 의료진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지를 연구하고 실천했다. 10개국에 복강경을 설치해 주고 수술법을 전수했다. 2010년 아이티 지진 당시 그는 고려대 의료원 긴급구호팀 부단장을 맡아 출국했다. 민간 의료팀으로는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여진과 시신이 뒹구는 지옥과 같은 현실을 경험했다. 그에게 평생 감동으로 남을만한 기억도 아이티 지진현장에서 일어났다. 다국적 의료캠프에서 구호 활동을 벌이던 어느 날 새벽, 그는 캠프를 주도하는 컨트롤타워로부터 긴급 SOS를 받았다.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산모의 제왕절개 수술을 해야 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서울에 있던 산부의과 의사인 아내의 도움을 받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왕절개 수술을 한 그는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그 아이를 엄마에게 전달할 때의 감격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의 순간이었다"고 기억했다. 이 수술 이후 그는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전 세계를 지구촌으로, 이웃으로 품게 됐다"고 말한다. 곧바로 의료봉사팀을 꾸려 달려갔고, 모두 7차례 아이티를 찾았다. 아프리카 오지에서 의료봉사활동을 펼치는 박관태씨. 마다가스카르에서 만난 9살짜리 아이도 지금까지 눈에 선하다. 그 아이는 혀가 자라서 7년간 입을 벌리고 살았고, 혓바닥에 파리가 앉을 정도여서 친구들로부터 괴물이라고 놀림을 받았다. 대인기피증이 심한 상태의 그를 한국에 데려와 수술해줬더니 귀국하기 전 그림을 그려 선물을 하던 그 아이의 선한 눈빛은 나눔을 실천하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혈관외과와 신장이식을 전공한 그는 장기 이식 전문의다. 그래서 날이면 날마다 혈액투석이 필요한 말기 신장병 환자들을 보게 된다. 투석을 위한 혈관을 만들어주고, 장기 이식 상담을 하는 것이 일상인데 몽골은 혈액투석 시설이 턱없이 부족하다. 1천여 대의 투석기가 필요하지만, 현재 200대도 안 되는 투석기가 운영되고 있다. '파김치'(Dr. Park은 몽골어로 팍임치)라는 별칭처럼 파김치가 될 때까지 환자를 돌보는 그는 2년여의 악전고투 끝에 지난 8월 말 비영리 혈액투석 전문병원인 '아가페기독병원'을 세웠다. 그는 이 병원을 100병상 규모의 종합병원으로 확장하는 꿈과 의과대학 설립도 계획하고 있다. 몽골에 봉사를 다녀온 후 2013년 외과 의사로 두 번째 봉사 활동에 나선 그는 "기쁘고 즐겁게 하면 길게 갈 수 있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면 더 잘할 수 있다"며 "남은 인생을 지극히 작은 자들, 내가 도울 수 있고 돌봐야 할 환자들을 도우며 살 것이다. 그것이 더 재미있고 즐겁기 때문"이라며 활짝 웃었다. 몽골 등 10개국에 복강경 수술을 전파한 박관태 씨 ghwang@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6/11/22 10:50 송고
2016.11.22
[중국동포 성공시대] (23) 현대미술 작가 최헌기 씨
조선족 최초 중국국립미술관 초대전, 광저우 'G20 정상회의' 전시 한·중 공립미술관 작품 소장…"경계인의 삶이 영감 불어넣는 힘" 강원도 양양에 '中 예술인 마을' 추진, "한중 예술교류의 메카로" (서울=연합뉴스) 강성철 기자 =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에 중국 현대미술을 이끄는 중견작가 10여 명이 참여하는 '중국 예술인 마을'이 조성된다. 3만3천㎡의 대지에 개인 작업실, 조각공원, 아트호텔, 전시관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이 프로젝트를 주도하는 이는 중국 현대미술계가 인정하는 조선족 작가 최헌기(54) 씨다. 베이징의 중국국립미술관, 서울·부산 시립미술관, 성곡미술관 등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공은 충분히 확인된다. 한국 작가의 중국 진출을 돕거나 중국 작가의 한국 전시에도 힘을 써온 그는 18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하나의 작품을 만든다는 심정으로 중국 예술인 마을 조성에 심혈을 쏟고 있다"며 "창작 활동과 전시 등을 통해 양국 미술계가 활발히 교류하는 대표적 공간으로 만들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지난해 대지를 매입했고, 양양군은 진입도로 확장·포장과 각종 인허가 승인 등 행정 절차를 지원했다. 현재 설계도가 마무리 단계로 내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건물 공사를 시작해 연말에 완공할 예정이다. 100억 원 규모의 공사로 10명이 절반을 모았고, 아트호텔 건축회사가 나머지를 부담한다. 최 씨는 "1차로 입주하겠다는 작가들은 중국 미술계를 대표하는 베이징 중앙미술학원, 톈진미술대, 노신미술대 교수로 국제무대에서 활약하는 인사"라며 "이들의 창작 활동과 작품을 보기 위해 찾아오는 중국 관광객만으로도 마을 내 호텔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반인에게 개방하는 마을이라면 접근성도 중요한데 도시가 아닌 강원도 산골에 조성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마음이 맞는 예술가들이 한곳에 모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자극과 격려가 됩니다. 전국을 돌며 후보지를 물색했는데 양양에는 중국 불교문화의 영향으로 세워진 낙산사라는 사찰도 있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고대에는 불교가 전해졌다면 이번에는 중국 미술이 알려질 차례라는 생각이 들었죠." 최헌기 작가가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답리 산39번지 일대 3만3천㎡ 대지에 조성 중인 '중국 예술인 마을' 조감도 그는 1차 공사가 마무리되면 대지를 더 매입해 중국 작가의 입주를 늘릴 계획이다. 지린성 안투현의 백두산 자락 오지마을 출신인 그가 그림과 인연을 맺은 것은 초등학교 시절이다. 문화대혁명의 여파로 대학교수 자리에서 쫓겨나 시골학교로 부임한 조선족 화가 전동수로부터 소질을 인정받아 소묘·크로키·해부학 등 미술의 기초를 배우면서 화가의 꿈을 키운 그는 1982년 연변대 미술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 기성작가 들이 참여하는 연변미술대전에서 대상을 받으며 두각을 나타냈고, 졸업 후 중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중국예총 산하 화가로도 활동했다. 현대미술을 본격적으로 배우려고 29살에 중국 최고 권위의 미술대학인 베이징 중앙미술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했고 그때부터 주류 미술계로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2년 뒤 졸업과 동시에 중국국립미술관에서 열린 그의 초대전은 당시 미술계의 큰 화제가 됐다. "보수적인 국립미술관이 30대 초반의 신예 작가를 위해 초대전을 열어준 것 자체가 파격이었죠. 조선족 화가가 초대된 것도 처음이었습니다. 난해하다는 현대미술로 인정을 받은 것이라서 큰 힘이 됐습니다." 최 씨는 베이징에서 유학했던 한국인 화가의 초청으로 1997년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 입국 심사에서 간첩으로 오해를 받아 엄격한 신원조회를 거치면서 중국과 한국에서 경계인 취급을 받는 조선족의 현실을 실감했다. 상식과 표준으로부터의 탈피를 작품에 반영해왔다는 그는 "중국 내 소수민족으로 살아왔고 모국에서도 이방인 취급을 받아온 삶이 내 작품의 근간"이라며 "기존의 질서를 부인해 새로움을 모색하는 시도를 꾸준히 해왔다"고 소개했다. 최 씨는 회화, 조각, 설치미술 등 여러 방면에서 작품활동을 벌이고 있다. 중국과 한국에서 10번의 개인전을 열었고, 부산과 광주의 비엔날레에도 참가했다. 2002년에는 재외동포재단초청 장학생으로 선발돼 홍익대학원에서 미술 석사과정을 전공했고, 그 이후로 양국을 오가며 작품활동을 펼쳐오다 지난해부터는 아예 거주지를 한국으로 옮겼다. 중국 항저우의 'G20 정상회의' 회담장에 전시된 최헌기 작가의 현대 추상 미술 작품 '광초(狂草) 100호' . 지난해 3월 서울 성곡미술관이 그의 대표작인 '자화상 시리즈'와 초서(草書)를 근간으로 했다는 '광초(狂草) 기법'의 작품을 전시해 주목을 받았다. 지난 9월에는 중국 항저우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회담장에 그가 그린 '광초 100호'가 내걸렸다. 이후 회담장은 'G20 기념관'으로 지정됐고 '광초 100호'도 상설 전시되고 있다. 작품이 얼마에 팔리는지 묻자 최 씨는 "거의 팔지 않아 잘 모르지만 6년 전에 중국인 미술 애호가가 2억 원에 한 작품을 구매해 간 적이 있다"고 귀띔했다. 중국 예술인 마을 대지 근처에 임시 숙소를 짓고 창작 활동을 하는 그는 내년 초 중국 작가의 한국 전시를 주선하기 위해 종종 서울로 나들이를 한다. 베이징 유학 시절부터 양국 미술 교류에 앞장서 온 덕분에 그는 미술계 마당발로 통한다. 최 씨는 "문화예술 분야에서 조선족이라는 것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실력"이라며 "개혁개방 이후 경제적으로 성공한 조선족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이제는 예술 분야로의 도전도 늘어나야 한다"고 후배들의 분발을 촉구했다.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경계인의 삶이 예술에서는 창작의 영감을 불어넣는 큰 힘이 됩니다. 조선족이라는 정체성을 피하지 말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서 자신감을 가지면 무엇이든 될 수 있습니다." wakaru@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6/11/21 07:00 송고
2016.11.21
[중국동포 성공시대] (22) 전춘화 홍익대 상경학부 교수
중국어·중국문화 강의하며 양국 교류 위해 동아리 '공명' 창립 다문화 인식개선에도 앞장…"정체성 확고하고 열정 있다면 반드시 성공" (서울=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홍익대 세종캠퍼스에는 모두 217명의 교수가 있다. 중국동포(조선족)도 2명 있는데 한 명이 전춘화(여·40) 상경학부 교수다. 그는 전공과목으로 '중국학개론', '중국지역전문가 세미나', '비즈니스 중국어'를, 교양학부 학생들에게 '초급 중국어'를 가르친다. 2009년부터 8년째 홍익대 강단을 지키는 전 교수는 11일 연합뉴스 기획시리즈 '중국동포 성공시대'의 22번째 초대석에 앉게 된 데 대해 "성공이요? 부끄럽습니다. 저보다 더 훌륭한 분이 많을 텐데…"라고 겸연쩍어하면서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저는 교포(조선족)라는 사실을 숨기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말문을 열었다. 이어 "교포이기 때문에 한국에 와서 교수도 하고 있다. 교포들이 한국에서 당당히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고 열정을 갖고 산다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자신의 사연을 털어놨다. 전춘화 홍익대 상경학부 교수 헤이룽장(黑龍江)성 지시(鷄西)시 출신인 그는 한족학교를 다닌 후 지린(吉林)성 옌지(延吉)시에 있는 연변대 영문과에 입학해 졸업했다. 2003년 같은 대학 중문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한 뒤 곧바로 외국학부 영어 교수로 채용돼 강단에 섰다. 2006년 지인의 소개로 옌지에서 농산물 무역회사를 운영하던 한국인 남편과 만나 결혼했다. 3년간 그곳에서 교수로 일하며 가정을 꾸렸던 그는 남편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2009년 삶의 터전을 한국으로 옮겼다. 입국전 그는 연변대 교수 경력을 인정받아 홍익대 상경학부 교수로 미리 채용됐다. 하지만 한국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조선족학교에 다니지 않아 한국말이 어눌한 데다 시부모를 모시는 한국문화도 잘 몰랐기 때문이다. "시어머니 말씀에 중국식으로 '응'하고 반말로 대답해 야단을 맞기 일쑤였어요. 중국 음식에 길든 탓에 전라도 출신인 시부모 입맛을 맞추는 일도 여간 힘들지 않았지요. 남편의 사업이 어려워져 혼자 번 월급으로 시부모, 시동생을 포함한 여섯 식솔의 생계를 유지해야 했어요." 쉽지는 않았지만 특별히 내색하지 않고 한국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가족과의 소통을 위해 한국말을 배우러 동네 도서관을 찾아 다녔고, 독서모임도 쫓아다녔다. 끼니마다 시부모를 위해 전라도 음식을 장만해 별도로 상위에 올렸다. 전 교수의 삶의 무대는 크게 대학과 다문화 가정으로 나뉜다. 대학에서는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가르친다. 그는 강의를 하면서 한 나라의 문화와 언어를 익히는 데 수업시간만 갖고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2012년 캠퍼스 안에 동아리 '공명'(共鳴·함께 어울림)을 만들어 지도하고 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어울려야 더 효율적으로 언어를 배우고 문화를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대학 내 중국인 유학생과 상경학부에서 중국어를 배우는 한국 학생이 서로 소통하면서 윈윈(Win-Win)할 수 있었으면 하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현재 임원진을 포함해 60명이며, 4년 동안 600명이 넘는 학생이 동아리 활동을 했다. 포털사이트 네이버 카페 '야호중국통'을 방문하면 공명의 모든 활동을 공유할 수 있다. 노인학교, 초등학교 등을 찾아가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가르치는 활동으로 공명은 2014년 교육부가 수여하는 교육기부 분야 대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매년 50명의 유학생을 중국 선양의 동북대학에 보내고 있다. 중국을 알아야 시야가 넓어질 수 있다고 생각해 유학을 적극 권장하는 것이다. 동북대 안에 '공명 중국지부'를 만들어 활동하도록 나서주기도 했다. 올해 동북대학 설립 94년만에 외국 유학생 동아리로는 처음으로 공식 인정을 받았다. "중국인 유학생에게는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한국 학생에게는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배우도록 하는 것은 물론 취업에서 창업까지 기회를 제공하는 동아리로 발전한 것을 보면 흐뭇합니다. 제가 강의 시간 외 2∼3시간씩 투자해 유학생 관리, 해외단기 어학연수 등의 업무를 보는 이유입니다." 지난 3월에는 취업을 앞둔 대학 3, 4학년생의 중국 진출을 돕기 위해 공명 산하에 '공명블록'도 만들었다. 또 최근에는 대학 내 중국 유학생들을 규합해 '중국유학생회'도 창립해 지도교수를 맡고 있다. 중국인 유학생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을 개선하고 그들이 중국에서 한국을 가장 잘 알릴 수 있는 인재라는 것을 홍보하기 위해서다. 다문화협동조합 '다모' 이사장인 전춘화 교수 대학 밖에서는 다문화 가족의 권익활동에 나선다. 딸(10살) 아이를 키우면서 이중언어교실을 개설하고, 나아가 같은 처지의 엄마들과 어울려 활동하면서 자연스럽게 '다문화'에 관심을 뒀다. 그는 지난 4월 중국, 몽고, 타이, 미얀마 등 4개국 9명의 다문화가정 여성이 모여 만든 다문화협동조합 '다모'(다문화, 다양한 어머니(母)들의 힘을 모아 성장한다는 뜻)의 이사장을 맡고 있다. 다모는 국가별 다문화 이해 교육 콘텐츠 개발과 외국어 문화 강사의 양성·파견, 공연·전시·체험 프로그램, 분야별 전문 통·번역 서비스를 원스톱으로 제공하고 있다. 조합 내 '다모예술단'은 주말마다 경기도와 성남시 행사에 참여해 몽골, 중국, 태국, 미얀마 등의 전통춤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전 교수는 결혼이주여성들이 한국어와 문화에 서툴지만 훌륭한 이력을 가진 인재가 많다고 자랑한다. 그러면서 그들이 능력을 발휘해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나아가 한국사회에 도움을 줄 길을 한국사회가 만들어 줘야 한다고 강조한다. "앞으로도 주위 사람들에게 항상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교수로서는 지식 전달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사회진출에 조언을 해주고 싶고, 다모 이사장으로서는 교포사회와 다문화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더 힘을 보탤 생각입니다. 아이에게는 자랑스러운 엄마이자 인생 멘토가 되고 싶습니다." ghwang@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6/11/14 07:00 송고
2016.11.14
[중국동포 성공시대] (21) 김용선 한중무역협회장
10여개 직함으로 조선족사회 헌신하는 '네트워크의 허브' 'K-뷰티' 中 수출에도 앞장…"재한동포특별법 제정해야" 20대 총선땐 비례대표 물망…"급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김용선 한중무역협회 회장이 4일 서울 구로동의 협회 사무실에서 인터뷰에 응했다.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한중무역협회 회장, 중국동포한마음협회 회장, KC동반성장기획단 이사장, 한중경영신문사 사장, 한중창업경영협회 자문위원장, 재한동포위원회 수석부위원장, 서울시 서남권민관협의체 사회문화분과위원장, 중국재한교민협회총회 이사, 연변주 주한차세대사업위원회 고문, 서울시 외국인주민·다문화가족지원협의회 위원, 한국외국어대 글로벌문화콘텐츠학과 외래교수…. 전직을 빼고 현재 직함만 꼽아도 열 손가락이 모자란다. 이쯤 되면 '재한 중국동포 사회의 마당발'을 넘어 '국내 조선족 네트워크의 허브'로 불릴 만하다. 지난 4일 서울 구로동의 한중무역협회 사무실에서 만난 김용선(39) 회장은 "자리에 욕심내는 성격은 아닌데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는 데다 동포 문제 해결에 매달리다 보니 이런저런 단체에 많이 관여하게 됐다"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저는 2004년 9월 유학생으로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학생회장을 맡은 경험은 있지만 학생 신분이어서 동포 모임을 이끌 처지는 아니었죠. 그런데 그해 중국동포들의 추석 망향제에 참여했다가 '목소리가 좋으니 망향문을 낭독하라'는 권유를 받고 수천 명 앞에서 망향문을 읽었죠. 이중의 디아스포라를 겪고 있는 서글픈 현실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고 모인 사람이 모두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부터 조선족의 권익 옹호나 사회봉사에 앞장서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김용선 한중무역협회 회장은 재외동포법을 전면 시행하고 재한동포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회장은 중국 지린(吉林)성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 룽징(龍井)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3·1 운동이 일어난 1919년 10월 15살의 나이로 만주로 건너왔다. 룽징에서 조선족 초중고를 다니고 옌볜조선족자치주 옌지(延吉)시의 옌볜대 역사학과를 졸업하다 보니 주변에 중국인이 많지 않아 중국어를 쓸 일도 별로 없었다고 한다. 옌볜대 대학원에도 진학해 석사학위를 땄다. 전공이 한국사여서 자연스럽게 한국 유학을 꿈꿨다. 재외동포재단 초청 장학생으로 뽑혀 서강대 사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았다. "제가 책상 앞에 앉아 연구할 체질은 아닌 것 같더군요. 추석 망향제에 참석한 것이 계기가 돼 한국 사회에 적응도 못한 상태에서 2005년부터 2년간 재한조선족유학생네트워크(KCN) 회장을 맡았죠. 당시에는 불법체류자가 많아 유학생 모임 말고는 이렇다 할 동포단체가 없는 형편이어서 KCN이 NGO 역할까지 했죠. 클로버 봉사단을 만들어 나눔과 봉사에 나섰습니다." 서울 광진구 노인복지센터에서 치매 노인을 돌봐주는가 하면 가리봉동에서 중국동포를 대상으로 컴퓨터 교육을 했다. 중국동포들이 가장 고맙게 여긴 것은 화상채팅 방법을 가르쳐준 것. 중국에 3개월 된 아기를 남겨둔 체 한국에 돈 벌려고 나온 한 아주머니는 13년 동안 전화나 편지로만 딸과 안부를 주고받다가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하는 감격을 누리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체류 자격이나 지위가 불안정한 중국동포 취업자가 많다 보니 임금체불이나 성추행 등 부당한 일을 겪어도 항의조차 못하는 형편이었다. 한국의 법과 제도를 몰라 손해를 보기도 하고, 한국의 기초생활질서에 익숙지 못해 주변 사람의 손가락질을 받는 일도 잦았다. 각종 법률 지식과 기초생활질서 등을 알려주기 위해 2007년 한중법률신문을 창간했다. 전국을 발로 뛰며 중국상가 주소록을 펴내기도 했다. 돈을 벌려고 한 일은 아니었지만 집까지 날릴 정도로 돈을 많이 까먹었다. 2011년부터 2년간 중국동포타운신문 편집국장을 지내며 2012년 한중창업아카데미와 한중창업경영협회를 만든 데 이어 2013년에는 한중무역협회를 발족하고 한중경영신문을 창간했다. 2012년 한국외대 대학원 글로벌문화콘텐츠학과에도 진학해 박사과정을 다시 밟았다. 서강대에서는 박사과정을 수료만 하고 논문을 쓰지 못했는데, 지금은 서울 대림동 중국동포타운을 주제로 논문을 쓰고 있다. 2013년엔 사업도 새로 시작했다. 공동 창업한 4명 이름의 영문 머리글자를 따 법인명을 LMLK라고 지었다. 물류 배송, 국제전화 무료 애플리케이션 보급과 함께 'K-뷰티' 기술 전수도 한다. 중국 저장(浙江)성 저우산(舟山)시의 한 대학에 올 9월 미용학과를 개설, 커리큘럼을 짜주고 강사를 파견했다. 인근에 성형 전문병원을 짓고 있으며 미용학원도 문을 열었다. 김용선 회장은 중국동포한마음협회도 이끌며 권익 옹호와 사회봉사에 나서고 있다. 논문 쓰랴, 사업하랴 짬이 없을 텐데도 동포단체 활동에는 손을 떼지 못하고 있다. 미국이나 유럽에 살던 재외동포에게는 동포 비자(F-4)를 내주는데도 중국 출신에게는 전문직 등으로 자격을 제한하고 있고, 어쩌다 중국동포가 강력범죄에 연루된 것을 두고 중국동포를 위험인물처럼 여기는 등 차별이나 냉대의 시선이 좀처럼 바뀌지 않아 할 일이 많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F-4 비자 발급 제한을 없애면 국내 노동시장이 영향을 받는다는데, 이제 한국에 더 들어올 중국동포도 별로 없습니다. 또 외국인의 범죄율이 내국인보다 훨씬 낮은데도 외국인이 겁난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외국인 중에서도 중국 출신의 범죄율은 8위입니다. 중국동포 숫자가 많다 보니 보도되는 범죄 건수가 많을 뿐이죠. 실제로 중국동포를 겪어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죠. 신분이 불안정하기 때문에 추방될까 봐 오히려 조심스럽게 행동하거든요. 건물 주인들도 외국인은 월세를 꼬박꼬박 내니 더 좋아합니다." 화제가 중국동포들의 처우에 이르자 그의 어조가 빨라지고 언성이 높아졌다. 다문화가족이나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지원책은 있는데도 중국동포는 관련 법이 없고, 예산도 없고, 담당 부처가 없고, 담당관이 없는 '4무 그룹'이라고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사단법인을 만들려고 해도 등록을 받아줄 주무 부처가 없다. 그는 이제는 미룰 핑계가 없는 만큼 단서 조항을 달지 말고 재외동포법을 전면 시행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또 해외에 나가 있는 동포뿐 아니라 한국에 들어온 동포를 위해 재한동포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한국에 가장 바라는 게 뭔지 아십니까? 외국인등록증과 외국국적동포 국내거소신고증에 이름을 우리가 부르는 대로 적어 달라는 겁니다. 우리는 중국에 살 때도 국가가 발급하는 신분증에 우리식 발음대로 이름을 써왔는데, 정작 모국에서는 왜 이름을 중국식으로 써야 합니까?" 그는 2014년 아들과 함께 한국 국적을 얻어 한국식 이름으로 적힌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았다. 2006년 그와 결혼한 이선란 경북대 경북해양과학연구소 연구교수는 올해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그가 애정을 쏟는 일 가운데 하나는 중국동포를 상대로 한 역사교육이다. 행정자치부 도움을 받아 지난해 '재한 중국동포 역사교육 문화 탐방'을 시작했다. 중국동포는 전 세계 어느 지역 동포보다 한민족 고유의 언어와 문화 전통을 잘 지켜왔지만 한국 역사는 제대로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만 19세 이상에게 1박 2일, 당일 두 가지로 나눠 교육하는데 학생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연령층이나 직업이 다양하다고 한다. 지난해 500명의 수료생을 배출했고 올해도 10월까지 참가자가 300명에 이른다. 김 회장은 지난 4월 20대 총선을 앞두고 비례대표 국회의원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19대 총선에서 필리핀 출신의 결혼이주여성 이자스민 씨가 금배지를 달았기 때문에 중국동포 국회의원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부풀렸지만 무산되고 말았다. "이제는 중국동포 국회의원이 나올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묻자 "급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면서 "능력과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하게 되면 되레 역풍이 불 수도 있다"고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heeyong@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6/11/07 07:00 송고
2016.11.07
발레리나 박세은, 파리오페라발레 제1무용수 승급
한국 발레리나 최초의 '프리미에 당쇠르' (서울=연합뉴스) 권수현 기자 = 세계 최정상의 발레단인 '파리오페라발레'(BOP)에서 활약 중인 박세은(27)이 한국 발레리나로는 처음으로 두 번째로 높은 등급인 제1무용수로 승급했다. 파리오페라발레는 5일(현지시간) 공식 트위터를 통해 박세은이 내부 시험을 거쳐 쉬제(Sujet·솔리스트급)에서 1급, 혹은 제1무용수로 번역될 수 있는 '프리미에 당쇠르(Premier danseur)로 한 단계 승급하게 됐다고 밝혔다. 1669년 설립된 세계 최고(最古) 발레단인 파리오페라발레는 영국 로열발레단, 미국 아메리칸발레시어터와 더불어 세계 최정상의 발레단으로 꼽힌다. 한국인이 파리오페라발레에서 프리미에 당쇠르가 된 것은 박세은이 최초다. 박세은에 앞서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를 지낸 김용걸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2000년 아시아인 남성으로는 처음 이 발레단에 입단해 쉬제로 은퇴한 바 있다. 파리오페라발레 단원은 카드리유(Quadrille·군무)-코리페(Coryphees·군무의 리더)-쉬제(Sujet·군무와 주역을 오가는 솔리스트)-프리미에 당쇠르(Premier danseur·주역급)-에투왈(Etoile·수석무용수에 해당하는 최고 스타 무용수) 등 모두 5개 등급으로 나뉜다. 박세은은 2012년 6월 한국인으로는 김용걸에 이어 두 번째로, 한국 여성 무용수로는 처음으로 이 발레단에 입단했다. 이후 입단 6개월만인 2013년 1월 코리페로, 같은 해 11월 쉬제로 각각 승급하는 등 눈에 띄는 성장세를 보였다. 2014년 11월에는 '라 수르스'(La Source·샘)에서 주역 '나일라' 역할을 맡아 아시아인으로는 최초로 파리오페라발레의 전막 발레 작품에서 주역을 맡았으며 이후 '백조의 호수', '라바야데르' 등에서 주역으로 활약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출신인 그는 2010년 불가리아 바르나 콩쿠르 금상을 비롯해 2006년 미국 IBC(잭슨 콩쿠르)에서 금상 없는 은상, 2007년 로잔 콩쿠르에서 1위에 입상하는 등 세계 주요 발레 콩쿠르를 휩쓸며 '콩쿠르의 여왕'으로 불렸다. 로잔 콩쿠르 입상 특전으로 아메리칸발레시어터의 세컨드 컴퍼니인 ABT 스튜디오 컴퍼니(ABT Ⅱ)에서 1년여간 활동했으며, 국립발레단 등을 거쳐 파리오페라발레에 진출했다. 발레리나 박세은 [연합뉴스 자료사진] inishmore@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6/11/06 12:18 송고
2016.11.07
[중국동포 성공시대] (20) '대림동 터줏대감' 김성학 씨
2002년 대림동에 '연변냉면' 개업…'조선족 타운' 선견지명 적중 식당 손님들 보며 웨딩홀 진출 '촉' 발휘…사업장 4곳으로 늘려 "조선족에 대한 부정적 인식, 자주 소통하다 보면 해소될 것" (서울=연합뉴스) 신유리 기자 = "연변냉면이라고 하면 좀 낯설죠? 평양냉면도, 중국냉면도 아니고…. 실은 제 나름대로 석 달을 고민해서 지은 간판입니다. 중국동포(조선족)에겐 고향의 맛을 떠올리게 하고, 한국인 손님에겐 연변 요리를 소개하겠다는 뜻이죠. 이 정도면 고유한 브랜드로 봐도 되지 않겠습니까?" 서울 영등포구 대림역 근처에는 14년 동안 한자리에서 연변 전통요리를 선보여온 음식점이 있다. 조선족 3세인 김성학(59) 대표가 2002년 차린 '연변냉면'이다. 28일 찾아간 연변냉면 본점에서 김 대표는 "한국으로 건너와 숱한 굴곡을 겪으며 이 자리까지 왔지만 대단한 성공담으로 봐도 될지 모르겠다"며 조심스럽게 인터뷰에 응했다. 서울 대림동 '연변냉면' 김성학 대표 그도 그럴 것이 김 대표는 고향인 중국 지린성을 떠나 38살이던 1995년 한국으로 건너오면서 인생의 항로가 확 바뀌었다. "중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10년 넘게 공무원으로 일하다 한국으로 파견됐습니다. 그때가 한중 수교(1992년) 직후라 연변 당국이 서울 주재 사무소를 세웠거든요. 사무소 대표로 부임해 중국 동포의 출입국 문제를 돕고, 한국 기업의 연변 투자를 유치하는 업무를 맡았죠. 당시 조선족 입국 초창기라 불법 체류, 인권 탄압 등으로 진통이 많았어요. 밤낮없이 일하느라 힘들었지만 그만큼 보람도 컸습니다." 그의 한국 생활이 '제 2막'으로 접어든 것은 우연한 계기에서였다. '코리안 드림'을 품고 온 중국 동포가 점점 늘어나지만 막상 이들이 향수를 달랠만한 공간은 없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 것이다. 김 대표는 곧장 시장 조사에 착수해 2001년 동대문구 장안동에 연변냉면 1호점을 차렸다. 하지만 평생 공직자로 살아온 그에게 음식 장사란 녹록지 않았다. "처음엔 눈앞이 깜깜했죠. 고기는 어디서 떼어오는지, 채소는 어디서 배달받는지 하나도 몰랐거든요. 너무 힘들 땐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나' 하는 후회도 했습니다. 그래도 매일 같이 동대문을 돌며 전단을 뿌리고, 연변식 순대를 만들어 포장마차에 납품도 했죠. 단속은 왜 그리 자주 나오는지….(웃음) 이래저래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고생 끝에 낙이 오는 법. '연변냉면에 가면 고향의 맛을 볼 수 있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점차 매출이 늘었다. 김 대표는 여세를 몰아 2002년 연변냉면 2호점을 냈다. 심사숙고 끝에 선정한 입지는 다름 아닌 대림역 인근. 지금은 대림동이 '조선족 타운'을 방불케 하는 중국 동포의 밀집지가 됐지만 2000년대 초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왜 하필 대림동을 택했느냐'고 물었다. "발품을 팔아보니 대림동에 월세방이 밀집했더라고요. 대중교통도 편리해 보였죠. 조만간 조선족이 몰려올 동네라는 판단에 과감하게 대림역 코앞에 2호점을 차렸습니다. 실제로 얼마 뒤 중국 동포가 너도나도 대림동에 터를 잡아 '조선족 타운'이 형성됐고, 그제야 양 꼬치, 중화요리 전문점도 줄줄이 들어섰죠. 저희 연변냉면은 일찌감치 자리를 닦은 덕택에 경쟁에서 선점 효과를 봤습니다." 김 대표가 2004년부터는 장안동 지점을 접고 대림동에 '올인'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2003∼2005년 사이에 경기 안산, 서울 남산·명동 등에도 잠시 분점을 냈다가 가망이 없다고 판단되자 즉시 철수했다. 대신 대림역 인근에 연변냉면 2호점, 연변웨딩홀 1·2호점을 차례로 열고 사업을 확장했다. 신사업으로 웨딩홀에 진출한 데도 김 대표 나름의 '촉'이 있었다고 한다. "식당에 찾아오는 손님을 보니 하나둘씩 결혼식을 하고, 돌잔치를 열고, 회갑연을 열더라고요. 중국 동포들이 한국에 정착하는 시대가 된 겁니다. 이들을 겨냥한 것이 웨딩홀 사업이죠. 예식 진행, 상차림, 연회장 인테리어, 의상 등을 가급적 조선족 전통 풍습대로 서비스해요. 가능하면 중국에서 하던 대로 잔치를 치르고 싶어하는 동포가 많거든요. 한국에서는 뷔페를 많이 차리지만 중국 동포는 원탁에 한상차림을 선호하는 식이죠." 김 대표가 현재 대림역 사업장 4곳에서 맞는 손님은 하루에 많게는 수백 명에 달한다. 15년 전 주방장을 포함해 직원 6명으로 시작한 사업이 이제는 수십 명의 일터가 됐다. 그래서인지 김 대표는 중국 동포가 한국 사회의 이웃으로 정착하도록 돕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다. 그는 2014년부터 중국동포연합중앙회 초대 회장을 맡아 한국 사회와 중국 동포를 잇고 있으며, 올해로 3년째 3만∼4만 명이 모이는 '중국동포 민속문화 축제'도 열고 있다. 연변 전통요리가 한국인 입맛에도 잘 맞을까. 이날 맛본 연변냉면 한 그릇에는 낯설게도 수박 조각과 메추리알이 동동 떠 있었다. 육수는 매콤하고 면은 쫄깃해 함흥냉면과 평양냉면의 중간쯤, 물냉면과 비빔냉면의 중간쯤 되는 맛이었다. 식탁에 마주 앉은 김 대표가 한마디를 건넸다. "연변냉면이 처음엔 좀 새롭죠? 하지만 몇 젓가락 들다 보면 금방 '이 맛이구나' 하실 겁니다. 제가 보기엔 중국 동포가 마치 연변냉면 같아요.(웃음) 한국인이 보기에 처음엔 문화적 차이가 크겠죠. 부정적 인식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요. 하지만 자주 소통하다 보면 어느새 가깝게 느껴질 때가 올 겁니다." 서울 대림동 '연변냉면' 김성학 대표 newglass@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6/10/31 07:00 송고
2016.10.31
[중국동포 성공시대] (19) '中 1위여행사' 한국대표 김성수 씨
서울 부임 3년 만에 매출 10배로 늘려…18개 해외지사 중 실적 1위 '고품격 여행' 집중, 직원에겐 "최선 다해 섬기면 지갑 저절로 열린다" 고선지 언급하며 '한중 우호' 부각…"유커 한국관광 최소 10년 더 간다" (서울=연합뉴스) 강성철 기자 = 중국 국경절 연휴였던 지난 1일부터 7일 사이 해외여행에 나선 유커(遊客·중국인 관광객)가 가장 많이 찾은 나라는 한국이다. 2015년 600만 명의 유커가 방한한 데 이어 올해도 사드 배치 결정의 여파가 있지만 지난해 숫자를 무난이 넘길 것으로 여행업계는 예상한다. 경복궁을 비롯한 고궁과 명동, 광화문 등 서울 시내시내 곳곳은 유커로 넘쳐난다. 한국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 숫자에서 유커가 일본인을 제치고 1위에 올라선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다. 유커를 빼놓고는 더이상 관광을 논할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최근에는 유커들의 여행 스타일이 단체에서 개인으로 바뀌는 추세다. 지난해 절반이 넘는 330만 명이 가이드 없이 한국 관광을 즐겼다. 이런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해 트렌드를 리드하고 있는 여행사가 있다. 중국에서 여행업 분야 1위를 고수하는 중국여행사(CTS)의 한국지사인 한국중국여행사다. 한국중국여행사를 이끄는 이는 한중 간 여행업계의 마당발로 불리는 중국동포(조선족) 김성수(50) 대표다. 그는 2011년 지사 대표로 부임해 3년 만에 매출을 10배로 늘려 100억 원을 달성했고 직원도 5명에서 40명으로 확충했다. 21일 서울 중구 다동의 여행사 사무실에서 만난 김 대표는 "공격적으로 영업하면 매출을 더 늘릴 수 있지만 중국 국영기업이기에 보수적으로 내실을 다지는 데 집중하고 있다"며 말문을 열었다. 이 회사가 지난해 유치한 유커의 숫자는 뜻밖에도 3만 명. 한국을 찾은 전체 유커의 5%에 불과했다. 너무 적은 것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고품격 여행 상품에만 주력하고 있다"며 "중국 정부 인사나 국영기업 임직원의 한국 방한 시 숙박과 교통편의 제공 등 의전에도 신경을 쓰기 때문에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저가·덤핑 여행 상품은 결국 여행사와 고객 모두에 손해"라며 "값을 제대로 받고 대신에 성심성의껏 서비스를 제공하는 게 단골을 확보하는 지름길"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중국여행사는 18개 해외 지사 중 영업실적 1위(2013∼2014년)를 올리며 우수지사로 2년 연속 선정됐다. 지난해에는 메르스 여파로 매출이 80억 원으로 다소 줄었고, 올해도 사드 영향은 있지만 최소 지난해 수준은 유지할 것으로 김 대표는 기대한다. 랴오닝성 선양시가 고향인 김 대표는 선양조선족제2중학교를 나와 베이징제2외국어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했다. 졸업하던 1989년은 천안문사태의 여파로 베이징에서 취업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운 좋게 국영기업인 초상국국제여행사에 입사했다. 한국어와 일본어에 능통해 홍콩을 경유해 들어오는 양국 관광객을 모두 상대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받은 덕분이다. 2002년 한일월드컵 개최를 계기로 한국을 찾는 중국인이 늘어나면서 국내 관광뿐만 아니라 해외관광도 맡게 됐다. 2008년에는 회사가 중국여행사에 흡수되면서 북한을 포함해 한반도에서 중국을 찾는 관광객과 중국에서 한반도를 방문하는 여행객 모두를 상대하는 총책임자로 발탁됐다가 2011년 한국지사 대표로 발령받아 본격적인 한국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여행업 분야의 국영기업에 근무하는 조선족 가운데 '가장 출세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데 대해 "우리말과 문화를 잘 안다는 것도 발탁 사유 가운데 하나지만 입사 이래로 조선족이라는 것을 내세우지 않고 실력으로만 평가받으려 노력한 덕분"이라고 말했다. 김 대표는 유커에 대한 한국 관광업계의 태도에 따끔한 충고를 건넸다. 단체 관광으로 한국을 찾는 유커의 대부분이 첫 방문자인데 이들의 재방문율이 낮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은 인구 대국이라 해외 여행객이 늘었다 해도 아직 소수입니다. 그러다 보니 생애 첫 해외 관광지로 지리적으로 가까운 한국을 선택합니다. 문제는 너무 저가 상품으로 고객을 유치한 여행사들이 손해를 만회하려 쇼핑에 치중하고 심지어 가이드가 구매를 강권하기도 해 불평이 쏟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재방문율이 낮은 거죠. 이는 양국 우호 관계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국가적인 손해입니다." 현재 유커 유치에 나서는 300여 개 여행사 중 자격을 갖춘 곳은 100여 개에 불과하다. 무자격 여행사가 난립하다 보니 출혈경쟁이 심각할 수 밖에 없다. 올해 초 문화체육관광부가 자격 미달 업체 70여 곳을 퇴출했지만 업계를 정화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김 대표는 "이러다가는 유커들이 떠나 여행업계가 공멸할 수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가 회사 직원을 뽑는 첫 번째 조건은 품성이다. 서비스업의 특성상 고객의 다양한 요구에 짜증 내지 않고 응대하려면 때로는 희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공항 마중과 배웅에는 반드시 양복을 입게 합니다. 매출이 덜 나와도 좋으니 서비스에 최선을 다하라고 주문하고 고객 응대 매뉴얼을 만들어서 숙지시킵니다. 덕분에 지금까지 고객의 클레임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정식 직원은 아니지만 회사 소속으로 활동하는 50명의 가이드 교육에도 심혈을 기울인다. 김 대표가 가이드에게 입버릇처럼 하는 말은 "매출은 인격에서 나온다"이다. 여기에는 "절대 구매를 강요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섬기면 자연스럽게 지갑이 열린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역사 속에 등장하는 한중 교류의 영웅 이야기를 많이 전하라는 주문도 빼놓지 않는다. 예로 드는 인물은 고구려 출신으로 당나라의 서역 원정에서 큰 공을 세운 고선지 장군이나 신라시대 해상왕으로 불리며 한중일 교류에 이바지한 장보고다. "유커들에게 양국의 우호 관계는 역사적으로도 오래됐다는 것을 알리고 있습니다. 한일관계는 침략사가 대부분이지만 한중간에는 교류사가 더 많을 정도로 친근한 이웃이라는 것입니다. 가이드의 한마디에 친한파가 될 수도 반한감정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민간외교관이라는 사명감을 갖는 게 중요합니다." 김 대표는 화교가 중심인 재한중국상회 부회장이며 중국 국적자로는 유일하게 한국여행업협회 이사를 맡고 있다. 또 한국연예제작자협회의 대외정책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폭넓은 인맥을 활용해 한류 합작 드라마나 아이돌 콘서트 추진 등 한류의 중국 진출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 한국중국여행사의 한국 증시 상장을 위해 차근차근 준비 중이라는 그는 "한중 관계는 서로 필요로 하는 부분이 많아 일시적으로 주춤할 수 있어도 장기적으로는 교류와 협력이 늘어날 것"이라며 "유커의 한국 방문 붐도 최소 10년은 지속할 것이라서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wakaru@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6/10/24 07:00 송고
2016.10.24
[사람들] '代 이은 인권운동' 재일동포 김창호 변호사
"日, 인권선진국 되려면 인종차별금지법 만들고 교육해야" (서울=연합뉴스) 강성철 기자 = "일본에는 재일동포처럼 정주 외국인뿐만 아니라 내국인인 아이누족(홋카이도 소수민족), 부락민(백정 등 천민출신) 등에 대한 차별도 존재합니다. 인종차별금지법을 만들고 학교에서 인권교육을 제대로 펼쳐야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인권선진국이 될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 인권운동을 펼치는 재일동포 김창호(32) 변호사는 18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에서 가장 차별을 많이 받는 외국인은 재일동포지만 우리 문제로 국한하면 안 된다"며 "일본 내 모든 외국인과 연대하고 주변국의 시민단체, 국제 인권단체 등의 지지를 얻어야 일본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재외동포재단 주최로 서울과 광주 등에서 17부터 21일까지 열리는 '2016 세계한인차세대대회'에 참가 중인 그는 일본 최초의 외국인 변호사로 인권운동에 앞장섰던 고(故) 김경득 변호사의 장남이다. 선친은 1976년 사법시험에 합격했으나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불허된 사법연수원 입소를 투쟁으로 쟁취해 1979년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이후 2005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강제징용된 재일동포의 전후 보상문제, 국민연금 청구 소송, 지문날인을 포함하는 외국인등록법 폐지 문제 등에 앞장서 재일동포의 '인권지킴이'로 불렸다. 김 변호사는 소송을 통해 피해자의 권리를 찾아준 아버지와 달리 시민단체와 연계하고 국제사회의 지지를 통해 일본 사회 전반의 인권 개선에 힘쓰고 있다. 도쿄의 J&K법률사무소 소속이면서도 국제 인권 NGO인 '휴먼라잇나우(Human Rights Now)'와 일본 내 외국인 인권신장 운동을 벌이는 '외국인인권법연락회', 재일동포의 권리를 대변해온 재일코리안변호사협회(LAZAK)의 활동에 집중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김 변호사는 2014년에 LAZAK 대표로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자유권규약위원회'와 '인종차별철폐위원회'에 참석해 일본의 인권 상황을 소개해 위원회로부터 일본 정부가 재일 한국인에 대한 '헤이트 스피치'를 규제하지 않는 것에 우려 표명과 적절한 조치의 필요성에 대한 권고 결정을 끌어냈다. 국제사회의 압박으로 일본 정부가 지난 6월에 발효한 혐한시위대책법(일본 외 출신자에 대한 부당한 차별적 언동의 해소를 향한 대응 추진에 관한 법)에 대해 그는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법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지적했다. 차별적 언동을 용인하지 않는다는 선언적 의미는 있지만 실효성이 약하다는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 차별을 억제할 규제나 처벌 조항이 없다"면서 "가령 인종차별 단체가 공공장소에서 집회·시위를 할 경우 사용허가 여부에 대해 구체적 명시가 없고, 인종차별 금지를 어겼을 경우에 대한 제재도 없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한 보완책으로 김 변호사는 "중앙정부의 시행령 또는 지자체의 조례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인종차별금지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도쿄대 법학과 출신으로 2006년에 사법시험에 합격한 그는 사법연수원을 마치고 2008년 일본 법무법인 3위인 모리하마다에 들어갔다가 재일동포를 향한 헤이트 스피치를 목격한 후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으려고 2012년 퇴사했다. 이후 미국 시카고대 로스쿨에 입학해 지난해 법무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일본으로 돌아와 인권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최근에는 LAZAK가 인권 침해 사례 등을 담아 발간한 '일본재판에 나타난 재일코리안'의 미국 출판을 추진 중이다. 그는 휴먼라잇나우를 통해 일본 내 이슬람권 이주자에 대한 차별 소송을 맡기도 하고, 유니클로 등 동남아시아에 진출한 일본 기업의 현지인 인권 침해 사례에 대한 보고서를 만들어 언론에 배포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지난해 유엔인권고등판무관실에서 추진한 사회적 소수자의 인권에 관한 연구에 3개월간 참여했던 김 변호사는 "인권운동이 제대로 성과를 거두려면 국제 인권단체와의 연대나 유엔 로비활동이 중요하다는 것을 실감했다"며 "우선 한·미·일 시민단체와 연계해 일본의 인권 개선에 앞장서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wakaru@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6/10/19 16:42 송고
201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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