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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30대 한인 여성 '2016 영 리더'에 선정
美 비영리재단 '아시아소사이어티' 24개국 32명 뽑아…한국인 3명 포함 (서울=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캐나다 토론토 출신의 30대 한인 여성이 '2016 영 리더'(2016 Class of Young Leaders)에 뽑혔다. 미국과 아시아의 이해 증진을 목적으로 1956년 창설된 비영리재단 '아시아소사이어티'는 미국 최대 규모 아시아계법률권익단체인 '아시안아메리칸 정의진흥협회'(AAAJ)에서 지역담당 디렉터로 활동하는 실비아 김(한국이름 서나경·33) 변호사를 '올해의 영 리더'로 선정했다. 아시아소사이어티는 김 변호사를 비롯해 아시아·태평양지역 24개 국가에서 유능하고 젊은 지도자 32명을 선정했다. 30일 현재 홈페이지(http://asiasociety.org)에서 명단을 확인할 수 있다. 선정 인물 가운데는 이재욱 전남일보 사장과 저탄소 경제발전과 기후변화 의제를 관리하는 '글로벌발전자문단'(GDA) 설립자인 막달레나 설(여) 씨 등 한국인 2명도 포함돼 있다. 록펠러 3세가 설립한 이 재단은 미국 뉴욕에 본사를 두고 있으며, 한국·홍콩·인도·호주 등지에 10개 지부를 거느리고 있다. 김 변호사는 토론토에서 영화도매상 '비디오앤미'를 운영하는 서동헌·김혜숙 씨 부부 사이에 태어났다. 부모 모두 북한 출신이어서 자연스럽게 탈북자에 관심을 뒀고, 토론토의 탈북자 인권단체인 '한보이스'를 설립하는 데 참여했다. 아시아소사이어티는 북한 주민의 인권 개선에 앞장서는 그의 공로를 인정해 이번에 '2016 영 리더'에 포함했다. 유럽북한인권협회 정책 자문위원으로도 활동하는 김 변호사는 "북한 정권의 인권 유린을 중단시키는 것이 모든 사람의 의무"라고 믿고 있다. 아시아소사이어티는 오는 12월 8∼10일 서울에서 시상식을 겸한 총회를 연다. '2016 영 리더'(2016 Class of Young Leaders)에 뽑힌 실비아 김 변호사. ghwang@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6/08/30 16:55 송고
2016.08.31
중국동포 성공시대 - ⑪ 클래식 아코디언 대가 주석용 씨
국제콩쿠르 우승한 실력파, 예술의 전당 독주 등 수백 회 공연 "다양한 음색 아코디언, '딴따라 악기' 아닌 '원맨 교향악단'" 제자들도 각종 국내대회 석권 "세계적 연주가 키우는 게 목표" (서울=연합뉴스) 강성철 기자 = "아코디언은 카바레나 밤무대에서만 들을 수 있는 소위 '딴따라 악기'가 아닙니다. 외국에서는 '원맨 교향악단'으로 불릴 정도로 클래식 분야에서 독보적 위치가 있죠. 재즈나 탱고 음악 등 연주 분야도 무궁무진한 게 아코디언의 매력입니다." 아코디언 연주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주석용(35) 씨는 국내 연주가 중에 유일하게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할 정도로 클래식 아코디언 분야에서 독보적인 연주가다. 조선족 출신인 그는 초등학교 시절 아코디언에 입문해 중국 연변대학 예술학과에서 클래식 아코디언을 전공했다. 고등학생 때 중국 아코디언 전국대회에서 2차례 대상, 2002년 베이징세계클래식아코디언콩쿠르에서 은상, 2005년 동남아시아아코디언콩쿠르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로, 2005년부터 한국에서 연주회와 강습 등을 통해 아코디언 확산에 앞장서고 있다. 지난 26일 부천의 연습실에서 만난 주 씨는 인터뷰에 앞서 귀에 익은 클래식 음악부터 들려줬다. 연주곡은 파블로 사라사테의 '치고이너바이젠'. 애잔하면서도 격정적인 멜로디로 바이올린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는 곡인데,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아코디언이란 악기로도 손색없는 감동이 밀려오는 게 신비롭게 느껴졌다. 연주를 마친 주 씨는 "풍금처럼 공기를 불어넣어 코드와 건반을 통해 연주하는 아코디언은 모든 악기의 소리를 낼 수 있다 보니 역설적으로 오케스트라에 편성되지 않았다"면서 "그런데도 독주와 협주 등 클래식 연주곡이 피아노곡처럼 많은 게 아코디언"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유럽에서는 일찍부터 클래식·현대음악·팝 등 장르 구분 없이 대중적 인기를 누려온 아코디언에 대한 붐이 최근 한국에서도 일고 있다며 반겼다.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를 거쳐 얼마 전까지는 색소폰이 인기였는데 지금은 아코디언이 대세입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급속도로 퍼지고 있어서 지방 중소도시마다 아코디언 동호회가 만들어지고 있죠. 우리 정서에 맞는 감성 악기라서 중장년과 노년층을 중심으로 배우는 사람이 늘어나 동호인만 어림잡아 1만여 명에 이를 정도입니다." 중국은 한국보다 아코디언이 많이 보급돼 있고 세계적인 연주가도 배출하고 있다. 주 씨가 처음 아코디언을 접한 건 초등학교 1학년 음악시간 때였다고 한다. "중국은 사범대생에게 아코디언을 가르칩니다. 초등학교의 경우 피아노나 풍금 대신 반주 악기로 아코디언을 쓸 정도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아코디언에 익숙해져 있는 데다 전공을 개설한 대학도 많고 공쿠르도 종종 열릴 만큼 인기가 있습니다." 이후 아코디언을 손에 달고 살았다는 그는 수시로 전문 연주가를 찾아다니며 배움을 청한 끝에 고교 시절 이미 '차세대 아코디언 연주가'의 반열에 올라섰다. 주 씨는 고교에 이어 대학 시절에도 국제대회서 입상하면서 악단 입단 제의도 받았지만 좀 더 큰 무대에 도전하려 아코디언의 본고장으로 불리는 독일 유학을 준비했다. 그러던 중 2005년 국제콩쿠르에서 최우수상을 받게 돼 KBS의 방송 프로그램인 '예술극장'에 출연할 기회가 생겼다. 이어 고양시 어울림누리극장과 서울시 서초구민회관에서 독주회도 열게 되면서 행선지가 한국으로 바뀌게 됐다. 당시 한국에서 아코디언은 인기 있는 악기도 아니었고 공연 기회도 많지 않았다. 그런데도 주저 없이 한국에 남게 된 이유에 대해 그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음악적 실험에 대한 자유로운 분위기"를 언급했다. "아코디언에 대한 인식은 낮았지만 클래식에 대한 한국 관객의 수준이 무척 높더군요. 더욱이 여러 악기와의 합주나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등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하는 개방된 문화는 제게 충격이었죠. 클래식에만 매달려온 제 음악의 세계를 넓힐 기회다 싶었습니다." 당시 주 씨의 뒷바라지를 위해 한국으로 건너와 일하던 아버지가 "조선족으로 한민족의 문화와 예술을 본격적으로 접해보는 것이 너의 정체성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며 격려해준 것도 한국행을 결정하는데 한몫했다. 한국에서 적극적으로 연주활동에 나선 그는 예술의전당, 세종문화회관, 남산 예술극장 등에서 독주 및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에 나섰고, 지방 순회공연도 다녔다. 아코디언을 알릴 수 있다면 장소를 가리지 않고 지금까지 수백 회의 크고 작은 무대에 섰다. 시장통이나 공터에서 약장수가 부는 것 정도로 알고 있는 아코디언의 참 매력을 전하고 싶어서였다. "큰 무대에서 찬사를 받는 최고의 연주가가 되는 것만이 목표였는데 한국에 와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냥 무대 자체를 즐길 수 있게 됐고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해서도 배웠죠. 관객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기 위해 가요나 재즈도 연주하게 됐고 공연 사례비를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일도 늘어났습니다. 주변에서는 중국에 있을 때보다 제 음악의 빛깔이 더 다채로워졌다고 합니다." 독일 유학에 대한 미련은 없느냐는 질문에 주 씨는 "독일서 공부했다면 중국으로 돌아와 악단의 수석이 되거나 대학교수가 되었겠지만 후회하지 않는다"며 "덕분에 정체성도 확실해졌고 음악적인 성취도 다양해졌다"고 만족해 했다. 그동안 후학 양성에도 힘썼고 가르친 제자만도 500여 명에 이른다. 대한민국 아코디언콩쿠르의 학생부와 일반부에 상위 입상자를 매년 배출하고 있으며, 2014년부터 대구TBC 방송이 주최해 온 생활음악경연대회서는 아코디언 부문 3회 연속 대상을 휩쓸기도 했다. 지난해 그는 제자들에게 더 많은 연주 기회를 만들어 주려고 9명의 아코디어니스트로 구성된 '호연 앙상블' 연주단을 만들었고, 올해 봄 안동과 대구에서 열린 자신의 공연에 합주자로 내세우기도 했다. 올가을에 대구시립교향악단과 협연을 준비 중인 주 씨의 꿈은 세계클래식아코디언콩쿠르에서 한국인 입상자를 키워내는 일이다. "세계대회는 70여 개국에서 연주가들이 도전하는 꿈의 무대인데 아직 한국인 참가자가 없습니다. 최근의 붐에 힘입어 경희대와 중앙대 실용음악과에 아코디언 전공이 생기는 등 저변이 점점 넓어지고 있어서 전망은 밝습니다. 피아노나 바이올린처럼 세계무대에서 활약하는 한국인 아코디어니스트가 나올 때까지 미력하나마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wakaru@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6/08/29 07:00 송고
2016.08.29
시드니 코리안가든건립추진위 송석준 위원장
한국 정부·기업에 지원 호소…"후손에 긍지, 현지인에겐 한국문화 메카" (서울=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호주 시드니에 세워질 '한국문화예술의전당'과 '한국정원'은 한인 후손에게는 정체성 확립과 함께 자긍심을 심어주고, 현지인에게는 한국의 문화를 알려주는 메카가 될 것입니다. 관심과 지지를 부탁합니다." 2013∼2015년 시드니 한인회장을 지낸 송석준(62) 시드니 코리안가든건립추진위원장이 한국정원 건립의 당위성과 역할을 강조하면서 한국 정부와 기업의 적극적인 지원을 호소했다. 한국 정부와 국회, 지자체 등을 찾아 협조를 당부하려고 방한한 송 위원장은 24일 연합뉴스 기자와 만나 "건립 예정지(3만3천㎡)의 주인인 연방정부가 100만 호주달러를 지원하기로 약속한 것이 한국정원 건립에 전환점이 됐다"며 "이제부터는 한국 정부의 지지를 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달 초 방한에 앞서 시드니총영사관(총영사 윤상수)을 찾아가 추진 계획안을 전달하고, 한국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참여를 요청했다. 방한 후에는 20일 동안 윤상현 새누리당 의원, 이재휘 더불어민주당 국제국장, 김교흥 국회의장 비서실장 등 국회 관계자들과 서울시 관계자, 김선갑 서울시 시의원, 순천시 관계자 등을 차례로 만났다. 시드니가 속한 뉴사우스웨일스(NSW)주 정부와 자매결연 관계인 서울시는 그동안 전 세계 7곳에 '서울정원'을 만들었다. 순천시 역시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를 개최하면서 정원 건립의 노하우를 쌓았다. "시드니 주변에 중국은 2개, 일본은 5개의 정원을 각각 건립해 자국의 문화를 알리고 있어요. 한인 인구밀도 전 세계 8위인 시드니에 한국정원이 없다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다. 반드시 우리가 해내야 할 역사적 과업입니다. 국민 여러분도 함께 지지해 주십시오." 추진위가 밝힌 자료에 따르면, 한국정원 건립 예정지는 시드니 올림픽 파크와 인접해 있고, 한인 밀집지역인 스트라스필드, 이스트우드, 리드콤 등 3곳의 한중간이다. 한국정원 건립에는 총 500억의 예산이 들어간다. 먼저 '한국문화예술의전당'을 건립하고, 나중에 '한국정원'을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추진위는 한국문화예술의전당 건립비로 200억 원을 책정했다. 6층 규모의 본관과 3층 규모 부속건물로 구성된다. 본관에는 소매점, 식당, 카폐, 600∼800석 규모의 다목적 공연장, 한국문화원, 한인명예의전당, 한국 전통문화 전시장, 가평전투 기념관, 한인회와 각종 한인단체 사무실 등이 입주할 계획이다. 부속건물에는 실내 체육시설, 탁아소, 노인복지시설 등이 들어선다. 추진위는 건립비를 모금으로 충당하고, 양국 정부와 기업 등의 지원도 받겠다는 계획이다. 기금을 내면 한인명예의 전당에 동상, 흉상, 초상화, 동판, 공덕비, 명예의 묘지조성 등 여러 형태로 혜택을 제공할 방침이다. 호주동포들의 한국정원 건립 추진은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송 위원장과 백승국 현 시드니한인회장을 중심으로 하는 한인사회는 2011년 "한류가 세계를 휩쓰는 시대에 한인 12만 명의 시드니에 한국정원이 없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며 십시일반 기금을 모아 '코리안가든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추진위원들은 그동안 NSW 주정부 등을 찾아가 한국정원 건립의 필요성 등을 설명했다. 또 스트라스필드의 한인 시장인 옥상두 씨는 추진위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며 연방정부를 설득했다. 그 결과, 지난 6월 줄리 비숍 연방 외교부 장관은 한국정원 건립 예정지를 직접 방문해 "자유국민연립 정부가 연임에 성공하면 100만 달러를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지원금은 친한파 의원인 크레이그 론디 하원의원이 연방 재무부를 설득해 마련한 것이다. 연방정부의 지원 약속에 힘입어 추진위의 한국정원 건립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하자 송 위원장은 곧바로 고국을 방문해 건립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앞으로 5년 내 한국정원 건립을 마무리 짓는다는 계획을 세우고 열심히 뛰고 있다"며 "곧 조디 맥케이(여) NSW 주의원과 다시 방한해 관계자들을 만나 도움을 끌어낼 것"이라고 말했다. 경북 김천고, 동아대 무역학과를 졸업한 송 위원장은 국제상사 수출부에 근무하다가 시드니에 이민, 1986년 퀸즐랜드대 경영대학원 2년 과정을 수료했다. 시드니 시티 한인상우회장과 재호한인상공인연합회 무역분과 위원장 등을 지냈다. 송석준 시드니 코리안가든건립추진위원장. 한국문화예술의전당 조감도. ghwang@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6/08/24 11:07 송고
2016.08.26
美 한인여성 대모 설자 워닉 "모두가 기적이라고 하죠"
대한부인회 운영 노인돌봄센터 12곳서 1천300명 고용 (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1970년대 미국 워싱턴주 터코마에 있던 한국 여성들의 작은 친목모임이 이제는 12곳의 카운티와 시에 사무소를 두고 1천300명을 고용하는 대형 복지기관으로 탈바꿈했습니다. 모두가 기적이라고 말하죠." 미국 워싱턴주에서 40여년간 대한부인회를 이끌어온 설자 워닉(74) 씨는 21일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대한부인회가 성장해온 과정을 이렇게 들려줬다. 그는 오는 24∼26일 제주에서 열리는 제16회 세계한민족여성네트워크 대회에 발제자로 초청돼 모국을 찾았다. 미국에서 대한부인회가 한국인의 위상을 높이는 단체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워닉 씨의 일생을 바친 헌신 덕분이었다. 그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달 우리 정부가 주는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워닉 씨가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간 것은 1976년이다. 앞서 그는 한국에 미군 장교로 왔다가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무역회사 직원으로 온 미국인과 사랑에 빠져 1968년 결혼을 했다. 그는 당시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영어교육을 전공하는 엘리트 여성이었던 데다 국제결혼을 백안시했던 시대 분위기 속에서 집안의 반대가 극심했지만, 남편의 지극 정성이 통해 결국 결혼에 성공했다. 한국에서 두 딸을 낳고 10년 가까이 살았지만, 워닉 씨의 부모님이 세상을 뜨자 남편은 미국행을 제안했다. 미국 워싱턴주 대한부인회 자문이사인 설자 워닉 씨. 미국의 명문 유대인 집안 출신인 남편의 설득에 넘어가 이민을 택했지만, 그는 처음 밟은 미국 땅에서 적지않은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그는 우선 미국 사회에 대해 배워야겠다는 마음으로 인근 초등학교에서 무급으로 보조교사 일을 시작했고, 이후 시애틀에 있는 대학교에서 정식 코스를 밟아 20개월 만에 미국 교사 자격증을 땄다. 정식 교사가 된 그는 다시 학교 바깥으로 눈을 돌렸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미국에서 어려움을 겪는 한인 여성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대한부인회가 이미 있긴 했어요. 그런데 매달 한 번 만나서 밥 먹고 향수나 달래는 친목단체였죠. 거기서 내가 그랬습니다. 이런 모임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어려운 동포 여성들을 돕는 일을 하자고요. 그 지역에 큰 미군 기지가 두 개나 있어서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까지 미군과 결혼한 한국 여자들이 많이 들어왔거든요. 그런데 이들이 영어도 잘 못하고 서구 문화에도 무지하니까 미국 남편들이 깔보고 폭력을 휘둘렀어요. 이들이 폭력을 당할 때마다 통역해주고 돕는 일로 시작해 대한부인회가 봉사단체로 거듭나게 됐습니다." 단체의 활동 폭과 지원 대상이 넓어지면서 회원들의 사비를 털거나 떡, 김치를 팔아 모금하는 형식으로는 비용을 감당할 수 없게 됐다.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고민을 하다 보니까 한인 여성들도 다 미국 시민이니 뭔가 구제하는 방법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마침 내가 80년대 초에 터코마 카운티 복지국에 이사로 들어가게 돼 6년간 일했습니다. 거기서 미국에 다양한 복지기금, 보조금(grant)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워닉 씨는 카운티 당국에 노인 복지 보조금을 신청해 3만5천 달러를 처음으로 받았다. 그 돈으로 대한부인회에서 지역 노인들을 대상으로 무료 급식을 시작했고, 가난한 노인들이 의료 서비스를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추가로 15만 달러를 받아내 간병 서비스까지 확대했다. 그렇게 노인 간병 서비스는 대한부인회의 최대 복지사업이 됐다. 현재 대한부인회가 12곳에서 운영하는 노인 돌봄 센터는 300여명의 직원과 1천여명의 간병인을 고용하고 있다. 워닉 씨는 80년대 초부터 14년간 워싱턴 주지사의 아시안 자문위원으로도 일했다.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1995년에는 저소득층 노인을 위한 아파트 건축 사업에 보조금 지원을 신청해 연방 정부에서 220만 달러를 따내기도 했다. "그 사업을 시작할 때 같이 일하는 대한부인회 이사들도 나한테 미쳤다고 했어요. 나는 밑져야 본전 아니겠냐고 생각했죠. 사실 남을 위해서 일하다 보면 그런 용기가 생겨요. 그 정도의 보조금을 신청하려면 엄청난 분량의 서류를 써내야 하는데, 정말 고생스러웠지만 결국 해냈죠. 내 평생 그때가 최고로 기분이 좋았습니다. 아파트는 대부분 자식을 따라 미국에 와 어렵게 사는 한국인 노인들에게 분양했어요." 그는 자녀들도 훌륭하게 키워내 세간의 관심을 받았다. 맏딸인 안젤라 워닉 씨는 세계 최초의 아시아계 유대교 랍비가 돼 뉴욕에서 가장 큰 유대교회를 이끌고 있다. 둘째 딸은 줄리아드 음대 대학원에서 비올라를 전공하고 현재 유명한 음대인 코번 스쿨에서 교수로 있다. "아이들에게 '너는 코리안-주이시-아메리칸(Korean-Jewish-American)이다. 세 가지 문화에서 좋은 걸 다 배우고 배울 가치가 없는 건 버려라. 너만의 특별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습니다. 다행히도 애들이 그렇게 커 줬어요. 특히 맏딸은 순수 유대인 혈통이 아닌데도 신념을 갖고 랍비가 돼 유대교의 개혁과 혁신을 이끌고 있다는 점에 참 자랑스럽습니다." 미국 사회에서 소수 민족으로서 한국인의 입지를 넓히고 다문화 가치를 실현하는 데 몸 바쳐온 그는 한국 사회 역시 다문화에 더 마음을 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은 순수혈통을 너무 따지는 경향이 있는데, 지금은 시대가 그렇지 않잖아요. 세계가 변하고 있고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됩니다. 한국이 저출산, 초고령사회로 가면서 나라의 동력이 약해지고 있는데, 좋든 싫든 이민자를 받아들여야죠. 지금부터 다문화정책을 제대로 세워서 그들을 순조롭게 받아들이고 소화해야 합니다. 다문화정책으로는 '샐러드 볼(Salad Bowl)'이 많이 얘기되는데, 미국에서 한국인이 매운 고추로 들어가 맛을 내면서 다른 채소,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과 어울린다면 한국에 오는 이민자들도 자기 고유의 문화를 지키면서 잘 섞이도록 도와야 합니다." mina@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6/08/21 09:05 송고
2016.08.22
중국동포 성공시대 - ⑩ '여성 1호 출입국 전문 행정사' 이미옥 씨
과수원집 며느리→맞벌이 주부→행정사…제1회 시험서 48대1 경쟁 뚫어 고졸 출신에 조선족 유일…대전서 행정사무소 운영하며 억대 매출 올려 휴대전화 저장 고객만 8천명…"이제 지식·경험 나누는 삶 살고 싶다" (서울=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지난 2013년 6월 28일 치러진 제1회 행정사(行政士) 시험에는 전국 6개 지역에서 1만3천여 명이 응시했다. 결혼이주여성인 중국동포(조선족) 이미옥(43) 씨도 부푼 꿈을 안고 도전했다. 그는 일반행정사 부문 1차 시험 합격자 2천584명에 포함됐고, 3개월여 뒤에 치러진 2차 시험도 무난히 통과해 최종 269명에 들었다. 결혼이주여성으로는 유일한 합격자였다. 이 씨의 합격은 그가 고졸 출신인 데다 한국으로 시집와 맞벌이를 하며 아이를 키우는 주부였다는 점에서 특히 남달랐다. 이 씨는 중국에서 성장해 한국 생활과 법률 지식이 한참 떨어질 수밖에 없는데도 민법(총칙), 행정법, 행정학 개론(이상 1차 시험), 민법(계약), 행정절차론, 사무관리론, 행정사실무법(이상 2차 시험) 등 어려운 과목을 공부해 48대1의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합격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자격 취득 이후 그의 이름 앞에는 '대한민국 여성 1호 출입국전문 행정사'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중국·베트남·캄보디아·몽골 등의 국가에서 살다 한국에 온 이주민들의 출입국만 전문으로 취급하는 여성 행정사는 그가 처음이다. 이 씨의 일터는 대전광역시 중구 중촌동에 있는 대전출입국관리사무소 바로 앞에 있는 '대지합동행정사무소'. 지난 19일 기자와 만나기 위해 서울역까지 바쁜 시간을 쪼개 상경한 이 씨는 인터뷰 취지를 설명하자 "저 말고도 성공한 분들이 많이 있는데…"라고 겸손해하면서 조심스레 명함을 내밀었다. '대표 행정사 이미옥'이라는 명함 뒷면에는 '국제결혼, 부모·자녀·친지 등 초청, 국적·영주권·이중국적 등 신청대행, 입양 및 중국 면허증 갱신, 유전자 검사 대행, 친족 관계 공증서·위탁서 대행, 번역·공증·인증'이라고 적혀 있었다. 1시간 넘게 한중 양국에서의 삶을 털어놓으면서 보여준 그의 이미지는 외유내강(外柔內剛) 그 자체였다. '여성 1호 출입국전문 행정사' 이미옥 씨.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무링(穆稜)시에서 태어나 자란 이 씨는 고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상하이에 있는 한국 회사에 취직했다. 어려서부터 조부모의 고향인 한국을 동경하던 그에게는 더없는 축복이었다. 2년 차 새내기 시절에 거래처 직원으로 만난 한국인 남자와 교제 끝에 결혼해 1996년 한국으로 시집을 왔다. "시댁은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에서 조금 떨어진 시골이었지만 과수원을 운영하는 부자였죠. 솔직히 처음에는 '먹고 사는 데는 부족함이 없겠구나'라고 생각해 좋았습니다. 그러나 과수원집 맏며느리 역할은 녹록지 않았어요. 시아버지가 워낙에 깐깐하셨고, 시동생 5명과 함께 사는 일이 만만치 않더라고요. 과수원 인부들을 위해 하루 5끼니를 챙겨야 하니까, 눈뜨면 밥하고, 설거지 하고 청소하는 것이 전부였답니다." 대가족 맏며느리 역할이 힘에 부친다고 느낄 때쯤 남편과 시아버지를 설득하기 시작했고, 우여곡절 끝에 경기도 성남시에 월세 단칸방을 얻어 독립했다. 하지만 분가를 반대한 시댁으로부터 한 푼도 지원받지 못해 당장 먹고 사는 것이 시급했다. 무역회사에 다니는 남편 몰래 4살인 딸과 2살인 아들을 집에 두고 여행 가이드 자격증시험 학원에 다녔다. 가이드를 하면 돈을 만질 수 있다는 지인의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때는 아이들 유치원 보낼 돈마저 없었어요. 공부하면서도 늘 아이들 걱정뿐이었죠. 전철역까지 항상 뛰어다녔고, 전철 안에서는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시험공부를 했어요. 점심은 호떡 하나로 때웠죠. 하루는 집에 들어가니 딸 아이가 동생 머리에 12가지 물감을 모두 쏟아 붓고 난장판을 만들었더라고요. 그날 아이들을 끌어안고 정말 많이 울었어요." 이 씨는 3개월 만에 가이드 자격증을 취득했다. 하지만 가이드 업무가 며칠씩 집을 비워야 하는 일이라 어린 자녀를 두고 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그만두고 서울 명동에 있는 번역회사에 취직했다. 이곳에서는 중국 동포들의 출입국 행정업무를 취급했다. 당시는 행정사가 하는 일을 대부분 번역회사가 맡아 할 때였다. 그는 회사에 출근한 지 한 달 만에 모든 업무를 척척 알아서 했다. 그러자 회사 사장은 "3년간 이직하지 않고 퇴사해도 같은 업종에 종사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쓰라고 요구했다. 뭔가 이상하고 부당하다고 판단한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2002년 '대지번역'이란 상호를 내고 집에서 인터넷으로 그동안 배웠던 번역 업무를 시작했다. "결혼서류 번역, 초청, 공증 관련 서류대행 등 매일 20∼30건씩 처리했어요. 당시 불법체류 합법화, 여권 연장 등 업무가 쇄도하면서 광화문 교보빌딩에 있던 주한 중국영사관(지금은 명동으로 이사)을 내 집 드나들듯 다녔죠. 아예 영사관 휴게실에 테이블을 놓고, 직원 3명과 함께 업무를 했을 정도였어요." 업무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면서 서울 종로에 사무실을 냈고, 2005년에는 대전에도 사무실을 오픈하는 등 사세를 확장했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번역사무소가 생기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결국 2007년 서울 사무실을 정리하고 대전에 정착했다. "경쟁이 치열하기 전까지 돈도 많이 벌었어요. 나름 이 업계에서는 잘한다는 소문이 났기 때문이었죠. 좀 과장해 돈을 긁어 담았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남편의 사업이 잘 안 돼 날리기도 많이 날렸죠." 정부는 퇴직 공무원들이 독점하던 행정사 자격시험에 대한 위헌 결정이 나자 2012년 법을 개정해 일반인도 시험을 통해 행정사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했다. 제1회 행정사 시험 소식은 이 씨에게도 희소식이었다. 하지만 제시된 시험 과목을 보고는 눈앞이 캄캄했다. 지금까지 그 어디에서도 배워본 적이 없는 학문이었다. "오후 4시까지 사무실 업무를 마치고는 KTX를 타고 서울로 왔어요. 수업이 끝나면 밤 11시 30분 막차를 타고 대전으로 돌아왔죠. 그렇게 7개월을 서울과 대전을 오가는 강행군을 했어요. 시험 몇 개월을 앞두고는 아예 서울에 거처를 마련해 살았죠. 매일 하루 3시간씩 자고 공부했어요. 거의 모든 과목을 외웠던 것 같아요. 나중에는 환각·환청이 들릴 정도였어요." 결혼이주여성으로는 유일하게 행정사 시험에 합격한 그는 현재 직원 4명의 월급을 주면서 억대의 매출을 올린다. 세금도 "착실히 내고" 있다고 했다. 자격증 취득 이후의 변화는 한마디로 "당당해진 것"이다. 과거 번역사무소가 하던 일을 지금은 행정사가 아니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저와 만난 고객은 10만 명이 훨씬 넘습니다. 몇 번 거래를 했거나 손님을 알선해 주는 핸드폰 저장 고객만도 8천 명 정도입니다. 남들은 번듯한 사무실을 내고 억대를 벌어들이다고 해서 성공했다고 말하지만 저는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중국동포들을 위해 제가 가진 지식과 경험을 나누고, 그들이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싶은데, 바쁘다는 핑계로 그 일을 못하고 있어요. 앞으로는 그 일을 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그는 매년 행정자치부 초청으로 행정사 시험 합격자들을 상대로 출입국 업무 관련 강의를 진행한다. 이 씨에게는 자랑이 있다. 악착스럽게 살던 시절 늘 희망이고, 힘의 원천이던 딸이 하버드대 리더십전형에 수석으로 뽑혔다. 오는 9월 입학을 앞둔 딸은 오바마 대통령상을 받는 장학생으로 선발됐다고 한다. ghwang@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6/08/22 07:00 송고
2016.08.22
[인터뷰] 윤호일 화우 대표 "개방은 로펌업계 새로운 성장계기"
외국로펌 경쟁보다 협력 유지가 중요…디스커버리 등 국제업무 강화해야 (서울=연합뉴스) 임순현 기자 = "법률시장 개방은 국내 로펌과 외국 로펌의 협력과 경쟁을 부추겨 우리 로펌과 법조계의 윤리의식과 서비스 품질, 전문성을 높이는 발전의 계기가 될 것입니다" 법률시장 개방은 위기가 아니라 기회라고 주장하는 로펌 대표가 있다. 바로 글로벌 대형로펌을 추구하는 법무법인 화우의 윤호일(73·사법시험 4회) 대표변호사다. 윤호일 법무법인 화우 대표변호사 윤 대표는 국내 법조인의 해외 진출이 드물었던 1973년 당시 세계 최대 로펌인 베이커앤맥킨지(Baker & McKenzie)에 입사해 6년 만에 파트너로 승진하는 등 뛰어난 국제감각을 보유한 '1세대 국제중재소송 전문가'라는 평가를 받는다. 1989년 귀국해 화우의 전신(前身)인 법무법인 우방을 설립했다. 19일 서울 삼성동에 위치한 화우 사무실에서 윤 대표를 만나 법률시장 개방의 긍정적인 전망과 우리 로펌의 대비방안을 들었다. 윤 대표는 법률시장 개방이 우리 법조계의 선진화와 세계화를 이룰 기회라고 평가했다. 그는 "우리나라는 경제와 기업 분야에선 선진화와 세계화가 순조롭게 이뤄지고 있지만 법률 분야는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라며 "법률시장 개방은 법률수요를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까지 획기적으로 증대시키고, '법의 지배' 수준도 함께 상승시켜 법조계가 선진화·세계화를 이루는데 지렛대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0~30년 간 비약적으로 발전해 온 로펌업계의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것이라는 평가도 내놓았다. 윤 대표는 우리 로펌 변호사들의 우수성이 영미로펌 변호사들과 비교해 전혀 뒤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는 "역사는 짧지만 국내 로펌은 전문화와 대형화를 수월하게 이뤄냈고, 우수 인재 영입과 교육에 신경쓰면서 영미 로펌 못지않은 높은 수준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됐다. 법률시장 개방으로 그동안 국내에서 힘을 기른 화우와 같은 로펌들이 세계무대에서 대형 영미 로펌들과 당당히 경쟁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화우는 특히 외국 로펌과의 전략적 협력관계에 공을 들이고 있다. 협업으로 국제무대에서 국내 로펌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윤 대표는 "베이커앤맥킨지에서 일할 때 인연을 맺었거나 화우를 설립한 후 인연을 맺은 외국 로펌들과 지속적인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우리 기업의 해외 사건(아웃바운드)이나 외국 기업의 국내 사건(인바운드)을 서로 소개해 주거나 공동으로 처리하면서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협업과정에서 소속 변호사들도 자연스럽게 국제적 감각을 익히게 돼 일석이조라는 설명도 곁들였다. 당분간 국내 및 외국 로펌이 국내 사건 수임으로 경쟁할 일도 없어 협력관계는 더욱 공고해질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외국 로펌들은 한국 기업의 국내 사건에서 당분간 마땅한 역할을 못할 것"이라며 "외국 기업의 국내 사건도 외국 로펌을 통해 국내 로펌을 선임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므로 당분간은 경쟁보다 협력관계가 우선시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윤 대표는 이 과도기에 국내 로펌이 외국 기업의 국내 사건에서 고품질 서비스를 제공할 능력을 증명하는 것이 향후 무한경쟁에서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는 길이라고 봤다. 그는 "중·단기적으로 외국 기업의 국내 사건에 관해 외국 로펌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될 가능성이 크다"며 "그동안 국내 로펌은 외국 기업에 어필할 수 있도록 능력을 증진시키는 것이 과제"라고 말했다. 특히 외국 기업이 국내에서 주로 겪는 공정거래나 금융규제, 지식재산권, 조세, 노동 등의 분야에서 역량을 쌓는 게 중요하다고 진단했다. 나아가 국내기업의 해외 투자 및 분쟁 사건도 업무 역량을 확보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윤 대표는 영미권의 '디스커버리' 제도에도 국내 로펌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제도는 소송 개시 전에 원고가 피고에게 소송 관련 문서를 요구할 경우 관련 문서를 빠짐없이 내도록 하는 영미권의 '증거개시' 절차다. 그는 "미국 내 소송에선 국내와 달리 디스커버리 제도에 따라 엄격한 증거제출이 요구되는데, 이에 익숙하지 못한 국내 기업들이 비용과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가 많다"며 "관련 문서에는 영업비밀이 포함되는 경우가 많아 비밀유지가 엄격히 요청된다. 국내 로펌이 완벽히 파악하고 있어야 안전하고 효율적인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화우는 디스커버리 관련 역량 강화에 힘을 쏟고 있다. 지난해 8월에는 '화우 디스커버리센터'를 열어 전문적인 서비스를 제공할 토대를 만들었다. 윤 대표는 "미국과 일본의 기업이 각각 자국에서 SK하이닉스를 상대로 낸 영업비밀 침해소송에서 화우가 좋은 결과를 낸 것도 꾸준히 이 분야 능력을 키워온 덕분"이라고 말했다. 법조계의 신뢰 회복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윤 대표는 "세계적인 로펌으로 발돋움하려면 사회적 역할과 사명을 제대로 인식하고 수행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화우는 '윤리적이고 민주적이며 최고의 법률서비스를 제공하는 글로벌 로펌'을 비전으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hyun@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6/08/21 08:15 송고
2016.08.22
중국동포 성공시대 - ⑨ 신영증권 펀드매니저 권덕문 씨
뛰어난 주식운용 실적으로 주변 부러움 사는 '미다스의 손' "한국인 1% 다르면 차별, 중국인 1% 같으면 동질성 강조" "글로벌 국가로 가려면 국적·민족 구분하는 태도 버려야"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한국의 맨해튼'이라고 불리는 서울 여의도 증권가. 고층빌딩이 즐비한 가운데 사무실마다 숫자가 빽빽이 적힌 시세표와 각종 시황을 나타내는 꺾은선그래프가 붙어 있다. 중국동포(조선족) 권덕문(33) 신영증권 책임운용역(과장)이 근무하는 곳이다. '자본주의의 꽃'이라는 증권업계와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 변방 출신 조선족의 조합이 다소 어색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는 이미 이곳 생활 10년째를 맞는 어엿한 증권맨이다. 12일 사무실 앞에서 만난 그는 외모도 훤칠하고 옷차림도 세련돼 미리 알지 못했다면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으로 착각할 만했다. "회사에서도 제가 중국 사람이라는 걸 모르는 분이 많아요. 말을 주고받다 보면 사투리가 섞여 있어 조선족이 아니냐고 물어봅니다. 처음 왔을 때는 지금보다 훨씬 어수룩해 보였을 겁니다. 또 학생 시절 중국에서 왔다고 하면 '먼 데서 와서 힘든 일 하느라 고생이 많다'며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기 일쑤였죠." 중국동포 가운데 국내 증권업계에서 애널리스트로 일하는 사람은 일부 있지만 주식운용을 담당하는 사람은 그가 사실상 처음이고 지금도 거의 없다고 한다. 2007년 12월 입사한 이래 고객자산운용부에서 같은 일을 해오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권덕문 신영증권 책임운용역은 12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동포 청소년들에게 자존감을 잃지 말 것을 당부했다. 2016. 8. 16 권 과장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일제강점기 때 만주로 이주한 동포 3세. 외할아버지는 1930년대 항일운동을 하러 만주로 떠났다가 고향에 남겨둔 처자식과 생이별하고 그곳에서 다시 결혼했다고 한다. "지난해 여름 개봉한 영화 '암살'을 재미있게 봤어요. 거기서 여주인공 안옥윤 역을 맡은 배우 전지현이 "난 만주로 돌아갈 거야'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저희 부장께서 '너희 할머니 얘기 아니냐'고 제게 농담 삼아 묻더군요. 사실은 제 외할아버지의 얘기와 비슷해요. 영화에서는 '만주에 사는 우리 사람들은 집이 망가져 비가 새도 수리하지 않고 그냥 산다. 독립이 되면 금방 돌아갈 텐데 그까짓 것 뭐하러 고치냐'라는 대사도 등장하죠. 외할아버지는 너무 일찍 돌아가셔서 얼굴도 뵙지 못했는데, 그분을 포함한 선조들의 고달픈 인생이 생각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권 과장은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哈爾濱) 근교 우창(五常)시에서 태어났다가 5세 때 부모를 따라 지린(吉林)성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 옌지(延吉)로 옮겨 그곳에서 초중고교를 다녔다. 남들보다 2년 일찍 초등학교에 들어갔는데도 공부를 잘해 칭찬을 많이 받았고, 체격도 또래보다 커 별 걱정이 없었다고 한다. 어릴 적 물리학에 취미를 붙였다가 나중에는 사업가에 뜻을 두고 베이징(北京)공업대로 진학해 경영학을 전공했다. 졸업 무렵에는 부모의 제안을 받아들여 서울 유학을 결심했다. "대학 4학년 때 인턴으로 일하던 베이징전력공사에서 저를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그때는 뭐든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 입사하려고 했죠. 그러나 대학교수로 일하던 부모님께서 보시기에는 많이 부족해 보였나 봐요. 늘 저보고 '산 넘어 산이 있고, 사람 밖에 사람이 있다'고 하셨는데, 이전까지는 그 의미를 몰랐죠. 더 넓은 세상을 보라는 권유에 따라 고민 끝에 서울대 경영대학원에 지원해 운 좋게 합격했습니다." 2005년 9월 시작한 서울 생활은 모든 것이 낯설었다. 문화와 관습도 다르고, 같은 말을 쓰는데도 뉘앙스에 차이가 있어 오해를 빚는 경우도 있었다. 한동안 남들 눈에 어떻게 비칠지 몰라 주변의 눈치만 살폈다고 한다. 그래서 공부에 더 몰두했다. 도서관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하다가 새벽을 맞는 일도 잦았다. "기자 생활을 하셨던 분과 프로젝트를 함께하던 중 '기자질을 하기가 어땠냐'고 물었다가 한동안 사이가 불편한 적이 있었죠. 한국에서는 '도둑질'처럼 나쁜 뜻에 '질'이라는 말을 붙인다는 걸 나중에 알았습니다. 오해를 사다 보니 말을 더 조심하게 되고 행동도 위축되더군요." 한국 생활을 익히는 데 더 보탬이 된 것은 동아리 활동과 아르바이트였다. 뭔가 동료와 어울리는 일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경영대학원의 DBM(Database Marketing)연구회에 들어갔다가 덜컥 부회장이 됐다. 외국인 회원은 혼자였는데 성실한 태도가 돋보였던 것이다. 여기서 한국적 인간관계를 많이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공부하느라 여념이 없는 가운데서도 부모 신세를 지지 않으려 아르바이트도 닥치는 대로 했다. 번역이나 통역은 물론 인턴 생활도 하고 중국기업 취업 희망자를 대상으로 면접 코치도 했다. 그러다가 자신의 적성에는 금융이나 컨설팅 쪽이 맞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마침 신영증권에서 중국 전문가로 키울 사람을 뽑는다고 해서 지원했다. "채용이 결정돼 2007년 12월부터 일하다가 비자 문제 때문에 정식 입사는 이듬해 2월에야 이뤄졌습니다. 유학생(D-2)비자에서 외국인취업(E-7)비자로 바꾸기 위해 금융감독원의 면접을 보는데 '한국 청년들도 일자리가 없는데 왜 외국 사람을 취업시켜야 하느냐'고 물어 당황했습니다." 지금은 2012년 도입된 재외동포(F-4) 비자를 갖고 있어 갱신만 하면 제한 없이 체류할 수 있게 됐다. 직장에서도 뛰어난 주식운용 실적으로 주변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고 한다. 2년 전에는 여의도 중국인 모임에서 만난 한족 출신의 LG화학 여직원과 결혼도 했다. "회사도 저를 가족처럼 대해주고 도시 생활이 쾌적하고 편리해 만족스럽습니다. 당초 2∼3년 있다가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눌러앉게 됐네요. 술이나 담배도 하지 않고 돌아다니기도 좋아하지 않는 성격입니다. 사는 곳도 지금까지 서울대 근처를 벗어나 본 적이 없어요. 대신 운동은 좋아해 축구나 농구를 즐기고, 요즘은 집 근처 체육관에서 복싱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그도 한국 생활에 불만이 없지 않다. 각종 사이트에 가입할 때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하라고 하는데 외국인은 뒷자리가 5나 6으로 시작돼 거부당하기 일쑤라는 것. 투자자산운용사(펀드매니저) 자격증 시험을 보기 위해 인터넷 동영상 사이트에 가입하려고 했다가 결국 실패해 사이트 회사를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그것 말고도 한국이 글로벌 국가로 한 발짝 더 나아가려면 외국인, 다문화 자녀, 재외동포 등을 자꾸 구분하려는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조언한다. "2006년 정부 관련 기관이 각국 재외동포를 초청해 펼치는 답사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말도 잘 통하지 않고 문화도 각기 달랐는데, 오히려 다 같은 동포라는 공통점을 발견해 교감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회사 주선으로 한 달 반 동안 연수 생활을 한 미국 뉴욕의 헤지펀드 회사에서도 국적이나 민족을 따지지 않더군요. 한국 사람들은 99%가 같아도 1%만 다르면 차별한다고 합니다. 중국은 99%가 달라도 1%만 같으면 동질성을 내세우거든요. 국적이나 민족보다 정서적 유대감이 소통에는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이나 한국의 조선족 청소년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하자 "아직 그런 위치에 오르지 못했다"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자존감을 잃지 말고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남과 같아서는 남을 앞설 수 없습니다. 자기만의 통찰력과 일관성을 지녀야죠. 그러려면 사고의 폭을 넓혀야 합니다. 제가 일하는 분야에서도 한 가지 시각만 가져서는 제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한국과 중국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구글링을 통해 다른 나라에서는 어떻게 보는지 따진 뒤 최종 판단을 내립니다. 그런 점에서 이중언어와 이중문화라는 장점을 잘 살리는 게 중요합니다."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12일 만난 권덕문 신영증권 책임운용역은 "주가의 등락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길게 보라"고 조언했다. 2016. 8. 16 투자자에게 좋은 정보나 요긴한 도움말을 부탁하자 "개인투자는 권하지 않는다"면서 "어차피 투자전문회사보다 정보를 빨리 알 수 없는 만큼 주가의 등락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길게 보라"고 조언했다. 한국과 중국의 증시 전망에 관해서는 "둘 다 그리 밝지 않지만 그 가운데서도 좋은 기업이 있으니 이를 발굴하는 게 관건"이라고 말했다. heeyong@yna.co.kr
2016.08.16
중국동포 성공시대 - ⑧ 한의·중의 접목 노현숙 한의사
조선족 출신 한의사 1호, "중국 임상경험이 진료에 도움" 침술의 대가로 환자 차트 6만개…"보약보다 치료에 집중" 안산시 우수납세자…소득 질문엔 "연간 세금 1억원 납부" (서울=연합뉴스) 강성철 기자 = 경기도 안산시에 척추·관절·불임·소아과 진료로 명성을 날리는 조선족 한의사가 있다. 전국에서 환자들이 몰린다는 노현숙한의원의 원장인 노현숙(50) 씨가 그 주인공. 조선족 출신으로는 국내 한의사 자격을 처음으로 취득한 인물이다. 기자가 찾아간 6일은 토요일인데도 환자로 북적거렸다. 한의원에 있을 때는 환자에만 집중하려고 휴대폰도 꺼놓고 일절 다른 일을 하지 않는다기에 진료 업무가 끝나기를 기다려 인터뷰를 진행했다. 첫 번째 질문으로 하루에 진료하는 환자가 몇 명이냐를 택했다. 환자 숫자로 명성을 가늠해볼 요량이었다. "평균 150여 명이 찾아옵니다. 부원장과 둘이서 온종일 진료와 치료를 병행하니까 쉴 틈이 없어요. 2003년 개원해서 지금까지 축적한 환자 차트가 6만 개에 이릅니다." 노 원장은 "환자 중에 조선족이나 한족은 15%가 안 되며, 나머지 대부분은 치료를 받았던 조선족의 소개나 입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한국사람"이라고 했다. 조선족 3세로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아청(阿城)시 해동촌 출신인 노 원장은 "중학교 2학년 때 유행성출혈열로 아버지를 잃고서 병을 고치는 의사가 결심했다"며 꿈을 이루기 위해 도전했던 지난 시절을 들려줬다. 어릴 적 살던 해동촌은 전기도 잘 안 들어오던 깡촌으로 고등학교를 진학하는 학생조차 별로 없던 마을이다. 그런 곳에서 대학 진학을 꿈꾸기는 쉽지 않았지만 그는 악착같이 공부에 매달렸다. 덕분에 줄곧 우등을 놓치지 않았고 1985년 하얼빈 중의대에 합격했다. "동네에서 잔치가 벌어졌죠. 처음 대학 합격자가 나왔는데 그것도 시 단위에서 한 명 정도 뽑는 의대생이 됐다고 모두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었습니다. 당시나 지금이나 중국에서 의사는 굉장히 존경받는 직업이거든요." 노 원장은 중국 전통의학인 중의과 졸업 후 아성 시립병원에서 5년간 의사로 근무했다. 아청시 소수민족위원으로도 활동하며 조선족 돕기에도 앞장섰던 그는 1996년 한국인 남편을 만나 한국으로 이주했다. 중국에서 남부러울 것 없는 의사로 살다가 기득권을 버리고 한국에 온 이유를 그는 "고향인 경상남도 함양군 유림면 국계리를 잊지 말고 꼭 찾아가 보라던 선친의 당부 때문"이라고 털어놨다. "일제 강점기에 조부모와 함께 만주로 이주한 선친은 늘 고향을 그리워하셨죠. 언젠가는 돌아가겠다는 마음이어서 경상도 말과 생활습관을 지키고 사셨어요. 그래서 1990년 의사로 발령을 받자마자 족보를 들고 선친의 고향을 찾았습니다. 조부모가 살던 집도 그대로 남아있었고 친척분들도 만났죠. 어찌나 반겨주시던지 3개월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그때 고국의 따스함과 고향의 정을 흠뻑 느꼈기에 남편을 만났을 때 한국행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중국에서 취득한 소아전문의 겸 침구의사 자격이 한국에서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는 서른 살에 늦깎이 공부를 시작했다. 1997년 연세대 의대와 세명대 한의대에 동시 합격했는데 경험도 살리고 고국의 한의학도 배워보고 싶어 세명대를 선택했다. 한국에서의 대학 생활이 쉽지는 않았다. 전공 위주로 가르치는 중국과 달리 교양도 익혀야 했고 교육환경도 달랐다. 띠동갑인 어린 학생들과의 경쟁도 만만치 않았기에 공부에만 매달렸다. "6년간 수업 외에 유일하게 참여한 학과 행사가 졸업여행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중국에서 온 간첩 아니냐는 의심도 받았죠(웃음). 동기들에게 중국어와 한자를 가르치면서 친해졌고 교수님도 중국에서 의사로 지낸 경력을 존중해주어서 힘이 됐습니다." 노현숙 한의원의 한의사와 간호사 2003년 졸업과 동시에 한의사 국가고시에 합격한 그는 남편의 고향인 안산에 한의원을 개원했고, 공부도 계속 이어가서 2008년에는 세명대에서 한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노 원장은 "병원 문을 연 이래로 가장 신경 쓴 것이 환자에게 신뢰를 받는 것"이라며 "마음가짐도 중요하지만 실력이 우선이란 생각에 공부를 계속했고 지금도 학회 세미나 등에 꾸준히 참가하고 있다"고 했다. 한의원이 돈을 버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보약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그의 병원에는 치료를 위해 찾는 환자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다 보니 노 원장은 약 제조를 위해 밤늦게까지 약재실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한의사들이 모여 침술을 연구하는 도침학회의 회장이기도 한 그는 침을 잘 놓는 한의사로도 유명하다. 환자의 90%가 침 맞으러 올 정도란다. 그가 사용하는 침술은 체침·평형침·섬유침·도침·약침 등 5가지다. "침을 놓는 방법은 20여 가지가 넘습니다. 각각의 장단점이 있죠. 도침학회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한의사들이 모여 침술에 대한 경험과 의견을 나눕니다. 환자의 상태와 체질에 따라 침술을 달리할 필요도 있거든요." 그는 대한여한의사회와 경기도한의사협회 이사로 국내와 해외 의료 봉사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안산시한의사협회 부회장으로 10년간 지역에서 다문화가정과 경로당 등을 찾아다니며 무료 진료 봉사를 펼치기도 했다. 한의원을 찾는 환자 중에 형편이 어려운 이에게는 치료비를 덜 받기도 한다. 중국에서 의사로 재직할 때 환자의 재정을 고려해 치료해 본 적이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사람이 먼저'란 생각이 배어 있어서다. "침놓는 값을 아예 저렴하게 받았더니 다른 한의원에서 고발이 들어오더라고요. 선의로 하는 일이라도 업계가 정한 룰을 지키는 게 더불어 사는 길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할인제도를 도입해서 환자 부담을 줄여드리고 있습니다." 노현숙 원장이 건강을 위한 생활속 실천법인 양생법(養生法) 전문가를 초청해 환자들에게 자기 몸 관리법을 전하고 있다. 그는 중국에서 의사로 활동했던 인맥을 활용해 중의 전문의를 자비로 초청해 한의사를 대상으로 강연회를 종종 열고 있다. 중의학과 한의학 간 교류가 의술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서다. "중국은 전통의학에 대한 투자가 한국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적극적입니다. 국립중의과학원의 연구원이 4천700여 명인 데다 중의 병원만도 3천600여 개 있어서 연구와 임상이 자연스럽게 이뤄지고 있죠. 과거처럼 무시하지 말고 중국의 앞선 부분은 우리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한의학이 발전할수록 그 혜택은 국민이 누리는거니까요." 한국에서 한의사로 활동하는데 제일 어려운 점을 묻자 그는 "중국과 달리 환자에만 집중하지 못하고 경영도 해야 하는 일"이라고 대답했다. 그의 한의원에는 본인을 포함해 부원장과 간호사 8명 등 10명이 근무하고 있다. 노 원장은 "급여를 주고 약재를 사들이고 수시로 인테리어를 손보는 등 할 일이 많지만 책임감도 느껴지고 그만큼 보람도 크다"며 활짝 웃었다. 모든 것을 투명하게 운영한다는 노 원장은 지난해 안산세무서 명예 민원봉사실장에 위촉됐고 지난 3월에는 안산시 우수납세자로 선정돼 표창을 받기도 했다. 본인 몫으로 가져가는 수익이 얼마냐는 질문에 그는 "소득세 등 납부하는 세금이 연간 1억 원 정도"라는 말로 답변을 대신했다. 은퇴할 때까지 10만 명 이상 환자를 돌볼 계획이라는 노 원장은 자신을 받아준 한국에 조금이라도 기여를 하려고 지난해부터 체질에 따른 침법을 알리는 책을 쓰고 있다. 노 원장은 이 책에서 한중 양국에서 의술을 펼치며 쌓은 경험뿐만 아니라 중국 침술의 최신 동향도 소개할 작정이다. "인생의 전반기 30년은 중국에서 보냈고 한국생활도 20년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양국에서 의사로 살면서 존중받고 보람되게 살 수 있는 축복을 누리고 있으니 보답하는 건 당연한 일이죠. 앞으로는 중의학을 한국에 소개하고 서로 교류하는 데 미력하나마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wakaru@yna.co.kr
2016.08.08
중국동포 성공시대 - ⑦ '희망을 던진다' 프로야구 투수 주권
조선족 최초 프로야구 데뷔, 무사사구 완봉으로 첫승… KBO 사상 처음 "꿈을 이루려면 실천 중요…힘든 시기 와도 차근차근 하던 일 해야" (수원=연합뉴스) 신유리 기자 = "이렇게 재밌는 운동이 있었다니!" 중국에서 온 11살 소년은 한국에서 난생처음 야구라는 운동을 해보고는 깜짝 놀랐다. 학교 운동장에서 조그마한 공 하나를 던지고, 치고, 받는 게 그토록 재미있을 줄은 몰랐다. 야구는 단숨에 소년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그날부터 야구 하나만 바라보고 살았다"는 소년은 9년 뒤 한국 프로야구 선수로 데뷔해 마운드에 섰다. 중국동포 출신 최초다. 올해 2년 차인 케이티 위즈 투수 주권(21·2007년 귀화)의 얘기다. 그는 지난 29일 수원 케이티 위즈파크에서 연합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10년 전 학교 운동장에서 야구를 처음 했던 순간이 지금도 기억난다"면서 "야구공으로 하는 모든 게 재밌고 신기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키 181㎝에 다부진 어깨, 차분한 말투가 '차세대 에이스'의 포스를 풍겼지만, 어쩌다 '빵 터지는' 유머를 던질 때는 스물한 살 청년다운 발랄함이 엿보였다. 주권은 올해 한국프로야구(KBO) 시즌에서 대기록을 세웠다. 지난 5월 27일 넥센과의 경기에서 선발로 나와 무사사구 완봉승을 거둔 것. 완봉승은 투수가 1회에 등판해 9회까지 마운드를 지키며 상대 팀에 한점도 내주지 않은 승리를 말한다. 더구나 주권은 볼넷과 몸에 맞는 볼이 한 개도 없이 상대 타선을 꽁꽁 묶는 무사사구로 완봉승을 따냈다. KBO 역사상 프로 첫 승을 무사사구 완봉으로 장식한 선수는 주권이 처음이다. 창단 2년 차 막내 구단인 케이티에 첫 완봉승을 안겨준 겹경사이기도 했다. "상상도 못했던 일이죠. 제가 그날 완봉승을 하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요?(웃음) 너무 기뻐서 밤에 잠도 잘 안 오더라고요. 지금도 믿기지 않습니다. 얼떨결에 완봉을 한 것 같아요." 케이티 '첫 완봉승' 주권 투수 (수원=연합뉴스) 프로야구 케이티 위즈의 선발 투수 주권(21)이 지난 5월 27일 넥센과의 경기에서 무사사구 완봉승을 거둔 장면. (연합뉴스 자료사진) 완봉승을 기점으로 주권에게는 달라진 게 많다. "마운드에 설 때 여유가 생기고 자신감도 붙었다. 경기 운영 능력도 올라간 것 같다"는 게 본인의 설명이다. 진기록을 줄줄이 세우며 '특급 신인' '차세대 에이스'라는 수식어를 얻게 됐지만 그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21살 청년치고는 적지 않은 굴곡을 겪었다. 1995년 중국 지린성(吉林省)에서 태어난 그는 한국에 먼저 온 어머니를 따라 2005년 입국했다. 어린 마음에도 걱정이 앞섰다. 낯선 동네, 어색한 말투, 새로운 친구, 주변의 어색한 시선 등 열 살 소년으로서 부딪히고 극복해야 할 게 너무 많았다. 하지만 청주 우암초등학교에 다니던 이듬해 우연히 야구를 접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중국에서는 축구를 했거든요. 한국에 와 학교에서 생전 처음 야구를 해봤죠. 그렇게 재밌는 운동이 있는 줄 몰랐어요.(웃음) 처음엔 취미로만 하려고 했는데 일주일 만에 '야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 길로 어머님께 말씀드렸어요. 야구선수가 되고 싶다고. 어머님은 식당에서 힘들게 일하셨거든요. 그러면서도 부족함 없이 제 뒷바라지를 해주셨죠." 주권은 우연을 행운으로 만들었다. 타고난 신체 조건과 운동 능력, '연습벌레'로 불릴 정도로 성실함을 갖춰 청주중, 청주고 야구부에서 에이스로 이름을 날렸다. 2014년 고졸 유망주로 꼽히던 그는 케이티로부터 '우선 지명' 선수로 발탁돼 KBO 마운드에 섰다. 중국동포 출신이 한국 프로야구 선수가 된 건 그가 처음이다. "살면서 가장 기뻤던 순간을 꼽자면 그때 같아요. 한국에 와서 야구 하나만 바라보고 살았거든요. 학교 수업도 빠지면서 훈련했죠. 어머님도 고생이 많으신데 만약 야구로 실패하면 어쩌지 싶기도 했어요. 근데 우선지명으로 입단이 결정된 순간 하늘을 날 것 같았죠. '아, 내가 한국에 와서 성공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기쁨도 잠시, 또다시 시련이 닥쳤다. 어깨 통증으로 데뷔 1년 차에 혹독한 신고식을 치른 것. 지난해 시즌에서 그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오른 1군 자리에서 중도에 내려와 재활 훈련을 받아야 했다. "어깨가 왜 아플까 연구를 많이 했어요. 당시에 한 달 정도 중국 고향 집에 다녀오느라 훈련을 쉬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결론 내렸죠. '아 나는 공을 안 던지면 몸이 아픈 사람이구나' 하고요.(웃음)" '코리안 드림'을 꿈꾸는 중국 동포 청년을 위해 조언을 청했다. 인터뷰 내내 막힘 없이 답변을 이어가던 그가 이때만큼은 잠시 숨을 골랐다. "꿈을 이루려면 실천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힘든 시기가 와도 차근차근 하던 걸 해야죠. 시련은 어차피 스스로 극복해야 하거든요. 누구의 도움에도 의지하지 않고 내 힘으로요. 그래야 또 다른 시련이 와도 버틸 수 있죠." 주권은 올시즌 제대로 날개를 펼쳤다. 정규리그 후반기에 돌입한 1일 현재 4승 4패 평균자책점 5.34를 기록 중이다. "5승 달성, 10승 달성처럼 당장 눈앞에 보이는 목표를 내세우기보다는 꾸준하고 성실하게 훈련해 오랫동안 마운드에 서고 싶어요. 앞으로도 몸이 아픈 데가 없도록 해 마음껏 공을 던지고 싶습니다." 주권은 인터뷰를 마치자마자 "훈련시간에 늦으면 안된다"며 서둘러 달려나갔다. 아침나절 소나기를 호되게 맞은 그라운드의 잔디가 어느새 짙푸른 색을 되찾고 있었다. 케이티 '첫 완봉승' 주권 투수 (수원=연합뉴스) 프로야구 케이티 위즈 선발 투수 주권(21)이 29일 수원 케이티 위즈파크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2016.8.1. (케이티 위즈 제공) newglass@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6/08/01 07:00 송고
2016.08.01
[인터뷰] 이원조 DLA파이퍼 대표 "한국로펌과 경쟁 아닌 상생"
이원조 DLA파이퍼 대표 "한국로펌과 경쟁 아닌 상생" "외국로펌 함께 아시아중재시장 교두보 마련"…브렉시트·아프리카 대응 연구 (서울=연합뉴스) 임순현 기자 = "해외에서 종합병원을 한다고 한국에서도 종합병원을 할 것이라는 생각은 오산입니다. 외국로펌들은 특정 전문진료 과목에만 집중할 것입니다." 26개 외국법자문법률사무소(국내 진출 외국로펌 한국사무소)의 협의체인 '외국법자문법률사무소협회'의 수장을 맡은 이원조(62) 디엘에이파이퍼(DLA Piper) 서울사무소 대표는 국내에 진출한 외국로펌과 한국 토종로펌의 차이를 이같이 비유했다. 29일 서울 중구 을지로2가 미래에셋타워에 위치한 디엘에이파이퍼 사무실에서 이 대표를 만나 외국로펌의 한국 법률시장 개방 대책에 관한 의견을 들었다. 이 대표는 외국로펌들이 국내 대형로펌들과 '규모의 경쟁'을 벌이기 위해 한국에 진출한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는 "외국로펌들이 다양한 법률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한국에 온 게 아니다. 해외로 진출하는 한국기업들의 해외업무 및 소송·중재를 돕고, 한국에 진출하는 외국기업에 최상의 자문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법률시장 3단계 개방 이후부터 가능한 국내로펌과의 합작은 주로 중소형 로펌들이 파트너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는 "한국의 대형 로펌을 합작 파트너로 염두에 두고 있는 외국로펌은 없는 것으로 안다. 기업자문이나 기업합병, 국제중재 분야 등이 외국로펌이 주로 관심을 가진 분야이고 이런 전문분야를 특화한 한국의 중소형 로펌(부티크 로펌)들이 합작 파트너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대표는 "최근 대형로펌 소속 변호사들이 기존 로펌에서 나와 이런 전문분야의 로펌을 차리는 사례가 많다고 들었다"고 부연했다. 그가 예상하는 향후 로펌업계의 구도는 결국 '경쟁'이 아닌 '상생'이다. 그는 외국로펌의 한국 법조시장 진출을 잘 활용하면 한국 법률서비스의 질적 성장에 상당한 기여를 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이 대표는 "영화 시장을 봐도 개방으로 인해 한국 영화의 경쟁력이 오히려 살아났다. 법률시장 개방이 과연 한국 기업들에게 유리한지 불리한지를 침착하게 따져봐야 한다"며 "법률시장의 '파이 쪼개기'가 아닌 새로운 경쟁력 수혈로 인해 '양과 질의 성장'이 기대되는 상황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로스쿨 제도 도입 후 크게 늘어나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는 국내 변호사들에게도 영역을 넓힐 수 있는 기회"라고 강조했다. 향후 중국이나 일본과 벌일 해외 법률사건 수임경쟁에서 외국로펌은 한국로펌의 든든한 우군이 될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그는 "일본은 법률시장을 완전히 개방했다. 외국로펌도 송무업무를 할 수가 있다. 중국은 법률로는 외국로펌의 중국 내 업무수행을 금지하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제약을 두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이 국제중재 시장의 아시아 허브 역할을 하고 싶다면 이들 나라와 경쟁할 수밖에 없다"며 "이 경쟁에서 유리한 입장이 되기 위해서는 외국로펌이 경쟁상대가 아닌 함께 싸울 수 있는 아군이 되는 것이 좋다"고 그는 강조했다. 이 대표는 디엘에이파이퍼의 진짜 경쟁 상대는 함께 한국에 진출한 외국로펌들과 서울에 사무소를 두지 않고 한국 기업을 공략하는 외국로펌들이라고 말한다. 한국에 진출한 26개 외국로펌 중 21곳이 미국 국적의 로펌이다. 세계적 수준의 외국로펌들이 좁은 한국 법률시장에서 공통의사건수임을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 대표는 이 같은 경쟁구도 속에서 디엘에이파이퍼가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은 차별화 전략이라고 봤다. 요즘 가장 많은 관심을 두고 있는 분야는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와 관련된 법률 이슈의 선점이다. 브렉시트 이후 새로 체결해야 할 한국-영국 자유무역협정(FTA)도 연구하고 있다. 그는 "이른바 '브렉시트(Brexit)'는 한국 기업과 외국 기업의 관심이 매우 큰 분야다. 유럽 및 영국의 관점에서 브렉시트에 따른 법률 이슈가 무엇일지 세세하게 연구를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또 "이 사안은 미국과 영국 두 곳에 본사를 두고 있는 디엘에이파이퍼가 강점을 보일 수 있는 분야다. 이달 중순 국내 모 기업의 전 세계 법인장을 모아두고 브렉시트 관련 특강을 한 것도 이러한 전문성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프리카와 관련된 세계 최고의 법률 전문성도 적극적으로 홍보해 나갈 방침이다. 이 대표는 "지난해 10월 한국수출입은행, 대한상공회의소와 공동으로 알제리와 이집트, 케냐 등 아프리카 주요 9개국에 대한 투자 및 진출에 대한 세미나를 개최해 아프리카에 대한 우리 로펌의 전문성을 적극 알렸다"고 소개했다. 그는 "디엘에이파이퍼는 전 세계 어느 로펌보다 아프리카에 대한 전문성을 갖고 있고, 올해 현지 사무소를 연 카사블랑카 등 여러 주요국가에 협력 로펌체계를 갖추고 있다"고 설명했다. 디엘에이파이퍼는 전 세계 30개국에 90개 이상의 현지사무소를 둔 국제적인 로펌이다. 소속 변호사 수만 4천명이 넘는 초대형 로펌이다. 작년 한해 매출만 25억 달러(한화 약 2조8천억원)를 달성하는 등 세계 '톱클래스' 로펌의 위용을 드러냈다. 이 대표는 1977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미시간주립대 대학원과 샌프란시스코대 로스쿨을 졸업한 후 현지 대형 로펌에서 오래 근무했다. 1997년 귀국해 한국IBM 법률고문 및 부사장으로 일했고, 김앤장법률사무소를 거쳐 2008년 디엘에이파이퍼 동경사무소에서 활동했다. 2012년부터 서울사무소 총괄대표직을 맡고 있다.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남편이다. hyun@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6.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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