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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단편소설] 혜선의 집
작성일
2021.01.27

[대상 - 단편소설 부문]


혜선의 집


김 수 연 / 캐나다



왁자한 웃음소리에 잠이 깬 것 같은데 눈을 떠보니 사방은 정적이었다.

혜선은 한기를 느끼며 잠결에 밀어낸 이불을 끌어당겼다. 손마디에 힘이 실리지 않아 이불이 툭 떨어져 나갔다.

“여보, 여보.”

혜선은 진석을 불렀다. 방 밖으로 밀고 나가지 못하는 소리가 공허했다. 이 사람이 어딜 나갔나. 혜선은 몸을 옆으로 돌려 누우며 진석을 기다렸다. 아래층에서 인기척이 들렸지만 소리가 가까워지지는 않았다. 혜선은 팔을 짚고 일어났다. 통증이 팔을 타고 가슴까지 이어졌다.

간밤에도 두어 번 통증에 눈을 떴다. 젖꼭지의 끝과 위장의 끝, 심장의 끝과 자궁의 끝, 모든 장기의 끝부분에 몰려드는 통증은 날카롭고 악의적이었다. 혜선은 종종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자신을 깨운 것이 통증이었는지, 통증을 느끼는 꿈이었는지를 생각했다. 잠옷 속으로 손을 넣어 배를 이리저리 문질러보며 통증의 실체를 찾았다. 몸의 정중앙에 길게 그어진 오돌토돌하고 불규칙한 돌기들을 하나하나 만져보며 그것들이 단단히 닫혀 있는지를 확인하곤 했다.


계단이 아득했다. 혜선은 손때로 반들반들해진 핸드레일을 잡고 발을 아래로 내딛었다.

‘이 집은 계단이 현관을 향해 일직선으로 뻗어 복이 고이질 않을 거다.’

친정어머니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미국 생활 십 년 만에 산 첫 번째 집이었고, 어머니가 미국을 방문한 것도 처음이었다. 어머니의 표정은 말보다 더 불길했다. 그럼에도 성에 차지 않는 듯 온몸으로 혜선의 불안을 자극했다.

일이 풀리지 않을 때마다 그 말이 떠올랐다. 고등학생이던 둘째가 계단에 서 미끄러져 발목뼈가 몇 조각으로 깨졌을 때도, 진석이 앞마당 잔디를 깎다가 돌이 튀어 옆집 할머니의 머리를 다치게 했을 때도, 그 일로 재판을 받게 되었을 때도, 이 층 안방의 비데가 터져 아래층이 물바다가 되었을 때도, 큰 아이가 의사고시를 두 번이나 떨어졌을 때도 어머니의 예언은 저주가 되어 불쑥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런 날이면 집은 들판의 천막같이 허술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혜선은 그 집을 떠나지 않았다. 대신 가파른 계단에 우두커니 앉아 현관문 위에 뚫린 창으로 해가 기우는 것을 보며 가족 중 누군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아이들은 이 집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했으며, 직장을 찾아 멀리 떠나거나 결혼을 했다. 뿔뿔이 흩어진 아이들은 크리스마스가 오면 어김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가져온 선물을 트리 아래에 놓고, 등과 오너먼트를 트리에 매달았다. 오너먼트는 아이들이 유치원 때 만든 조잡한 장식부터 어른이 되어 혜선에게 선물한 값나가는 크리스털 엔젤까지 혜선의 시간이 집약적으로 담겨 있었다. 혜선은 오너먼트를 트리에 매다는 시간이 일 년 중 제일 좋았다. 한 해가 저무는 시간이었고, 새해가 시작되기 직전의 시간이기도 했다. 벽난로에 불을 지피고 트리 앞에 모여 카드놀이를 하며 달콤한 코코아를 나눠 마시다 보면, 문득 이 모든 선택이 옳았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혜선은 계단의 중간쯤에 멈춰 서서 계단과 현관을 비추는 시시티브이 카메라를 쳐다보았다. 아이들 중 누군가는 이 모습을 보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들은 환자를 진료하는 사이사이 짬이 날 때마다 그것을 들여다본다고 말했다. 어쩌면 딸은 뉴욕의 번잡한 거리를 피해 사무실에서 혼자 샌드위치를 먹으며, 혜선이 느리게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지도 몰랐다. 혜선은 한때 아이들의 우주였던 자신이 이제는 아이들의 아이가 되어가는 것이 아닐까 의심했다. 만약 그런 시간이 온다면 이 계단을 굴러서라도 생을 마치고 말리라는 의지가 있었지만, 이즈음 혜선은 순한 아이처럼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남은 가족에 대한 도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현관에는 끈이 없는 하얀 남자 운동화와 굽이 낮고 낡은 페라가모 구두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진석과 여자의 신발이었다. 어제도 그제도 현관에는 둘의 신발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혜선의 신발은 모두 신발장에 있을 것이었다. 혜선은 지난 봄 퇴원을 한 후로, 한 달에 한 번 병원에 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외출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허물어져 가는 것보다, 허물어져 가는 것을 보이는 게 더 견딜 수 없었다. 친구는 물론 목사님이나 권사님의 기도 방문도 거절했다.

혜선은 많은 시간을 혼자서 방에 머물렀다. 양털 실내화를 신고 방에 딸린 화장실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전부인 날도 많았다. 몇 주 전부터는 아이 들의 성화에 못 이겨 하루에 한 번 계단을 내려와 우두커니 식탁에 앉아있거나, 뒤뜰에 난 창을 열고 마당을 바라보기도 했다. 햇살이 좋은 날에는 데크에 앉아 진석이 정원 일을 하는 걸 지켜보기도 했지만, 옆집 마당에서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면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혜선은 침대에 누워 잠을 자거나, 잠을 청했다. 방안을 느리게 걸어 다니 기도했다.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지만 열망도 나란히 사그라들어 그리 아쉬울 것도 없었다. 진석과 혜선은 하루 종일 한집에 있었으나 정작 함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혜선은 침대에서 시시티브이의 화면을 통해 진석 이 식탁에서 혼자 밥을 먹는 것과 거실에서 한국 드라마를 보는 것, 드라마를 보다가 꾸벅꾸벅 조는 것을 보았다. 자다 깨서 시간을 확인하고 혜선의 약을 챙겨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을 볼 때도 있었다. 혜선은 간혹 화면 속 진석을 보다가 눈에는 보이지만 손에는 닿지 않는 강한 단절감을 느끼곤 했는데, 죽음 이후의 세계가 그럴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혜선은 현관을 지나 화장실 옆 세탁실로 들어갔다. 속옷을 세탁기에 던져 넣고, 반쯤 채워진 세탁기의 버튼을 눌렀다. 찔끔찔끔 새는 소변 때문에 팬티는 자주 젖었다. 여자는, 혜선이 시도 때도 없이 세탁기를 돌리는 바람에 하루에도 몇 번씩 세탁을 해야 한다며 툴툴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혜선은 여자에게 사정을 설명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여자가 상황을 모르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부엌 식탁에서 진석이 삶아낸 돼지고기와 갓 무쳐낸 겉절이를 먹고 있었다. 여자는 고무장갑을 낀 채 고춧가루를 뿌려가며 갓과 무채를 섞어 김치를 버무렸다. 아일랜드 위에는 혜선이 수년 전 선창가 어선에서 사서 삭인 새우젓이 통째 나와 있었다. 한동안 혜선의 눈에조차 보이지 않던 새우젓을 여자는 어떻게 찾아냈을까, 혜선은 의아했다.

“내려왔어? 좀 앉아.”

진석이 입가에 묻은 붉은 고춧물을 손으로 훔치며 의자를 빼냈다.

“물 좀 줘요.”

혜선은 여자가 버티고 선 부엌 쪽을 보며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말했다. 진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자의 살찐 엉덩이 뒤쪽으로 돌아가서 커피포트에 정수기 물을 받았다.

“미지근은 해야지? 너무 차가우면 안 되니까.”

진석은 아직도 입에 남아있는 음식을 쩝쩝 소리 나게 씹으며 말했다.

“입 좀 닦아. 더럽게.”

김치를 통에 옮겨 담던 여자는 혜선과 눈이 부딪히자, 급히 고개를 숙였다. 혜선은 신경질적으로 갈라진 자신의 목소리가 거슬렸다. 기운 없고 고집 센 노인의 목소리. 혜선은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눕고 싶었다. 하지만 당장은 계단을 밟고 올라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혜선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뒤뜰에는 여름이 고요하게 저물고 있었다. 진석이 여름 내내 뜰을 기어 다니며 토끼풀을 뜯어내고, 민들레를 파냈다. 좁고 깊게 내린 뿌리를 파내기 위해 낡은 포크를 구부려 작은 갈퀴를 만 들었다. 손톱 아래는 늘 시커먼 풀물이 들어있었다. 덕분에 잔디는 잡초 없이 새파랬다. 작약이 진 자리 옆으로 노란 국화가 피고 있었다. 사과나무에 는 제법 튼실한 사과가 매달렸다. 이사를 들어오던 그해 진석이 라일락과 함께 심은 나무였다.

“지난봄에 라일락이 피었던가?”

혜선은 데크 한쪽에 포개져 있는 빈 화분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번에는 안 피었어. 겨울이 춥지 않으면 꽃이 잘 안 핀다지 않았나, 당신이?”

혜선은 선뜻 그런 말한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지난겨울이라. 혜선은 지난 겨울이 까마득했다.

“제가 가져다 드릴게요. 식사 마저 하세요, 사장님.”

포트 옆에 서서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진석을 돌아보며 여자가 말했다. 여자의 소리가 사뭇 다정했다. 혜선은 뻘건 김치에 눈길을 주다 거뒀다. 보 기만 해도 속이 쓰려왔다.

“사모님 드실 건 백김치로 준비해 뒀어요.”

여자가 혜선의 속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혜선은 여자가 예사내기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자가 가져다 준 물은 너무 뜨거웠다. 혜선은 물이 식기를 기다려 한 모 금 마셨다. 물이 마른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진석이 고기에 김치를 둘둘 말아 우적우적 씹더니 맥주를 들이켰다. 그는 여전히 젊은 남자처럼 먹고 마셨다. 혜선은 그의 에너지가 경이로웠다. 몇 해 전 그는 가벼운 뇌졸중을 앓았다. 그 후유증으로 왼쪽에 미미한 마비가 왔다. 혜선이 앓아 눕자 그에게 새삼 생기가 감돌았다. 목소리가 커졌고, 몸놀림은 더 활기찼다. 혜선은 그의 생기가 묘하게 거슬렸다. 그녀는 종종 그 생기의 정체에 대해 생각했다. 혜선 이 병들기 전 그는 집안의 환자였고 이제는 환자를 돌보는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했다.

혜선은 진석 앞에 놓인 접시를 보다 얼굴을 찡그렸다. 푸른 바탕에 금테 가 둘린 웨지우드 접시에 돼지기름이 엉겨 붙고 있었다. 김치에서 흘러나온 붉은 물이 허연 기름에 섞여 영롱한 푸른빛을 엉망으로 더럽혔다. 혜선은 자 신이 아끼던 접시가 싸구려 접시가 된 것만 같았다.


“그럼 사용하지 말라고 하지 그랬어요? 내가 해요?”

영상통화 속의 딸은 그래서 용건이 뭐냐는 투였다. 전화기에 대고 말을 하면서도 눈은 컴퓨터 모니터를 향해 있고 손으로 연신 뭔가 타이핑했다. 뉴욕은 밤 열 시는 되었을 텐데 딸은 아직 사무실인 모양이었다. “

지금이 몇 신데 아직 집에 안 갔어? 저녁은 먹고 하는 거야?”

“난 엄마가 그런 것에 신경 쓰지 말았으면 좋겠지만요.”

“무슨 말이니 그게? 엄마가 그것도 못 물어?”

“아니 아니, 내 말은.”

딸은 한숨을 내뱉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접시 말이야. 엄마가 정 싫으면 내가 이야기할게. 근데요. 엄마! 엄마!”

딸은 정색을 하고 혜선을 불렀다.

“듣고 있다.”

“알죠? 더 이상은 안 돼요. 나 좀 살려줘 엄마. 사람 구하기가 얼마나 어렵다고요.”

“내 말은, 그 여자가 요리하는 사람 맞냐는 거지. 요리연구가라는 사람이 접시 사용도 제대로 못한다는 게 넌 이상하지 않아? 한국에서 뭘 했다는 거, 그거 다 믿으면 못 써.”

화면 속에서 사라진 딸아이가 커피 잔을 들고 다시 나타났다.

“밥이 맛있어서 살이 오른다던데, 아빠는.”

“늙어서 무슨 맛이나 알까.”

“엄마, 이번이 네 번째야. 남이 엄마 마음 같을 수가 있나 어디. 그러니 빨리 기운 차려서 예전처럼 엄마가 해. 그럼 되지. 자꾸 이상한 데다 기운 빼지 말라니까. 웨지우드든, 로얄 코펜하겐이든 이제 그런 것들 얻다 써요? 난 안 가질 거야. 며느리 주려고?”

혜선은 종료 버튼을 꾹 눌렀다. 화면은 다시 검어졌다. 혜선은 손으로 얼 굴 만져보다가 손거울에 얼굴을 비춰보았다. 움푹 팬 볼과 광대뼈까지 내려 온 다크서클. 누가 봐도 확연한 환자의 얼굴이었다.

“말기만 아니면 요즘 암은 불치병이 아니에요. 기저질환도 없고, 전이도 없고, 예후도 좋고.”

아들은 의사라는 것을 앞세워 자신 있게 말했다. 가족들은 혜선을 설득하려다 스스로 최면에 걸린 것처럼 확고하게 혜선의 완치를 단언했다. 하지만 혜선은 그 최면에 합류할 수가 없었다. 하루하루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몸 과 마음으로 느꼈다. 근육이 다 빠져 헐거워진 살가죽이, 계단을 오르내리기 도 힘겨운 체력이 그것을 증명했다.

“지금 몇 시간이야?”

혜선은 다섯 살 딸아이의 문장을 떠올렸다. 한쪽 눈을 안대로 가린 아이는 눈을 찡그리고 몸을 앞뒤로 흔들며 그렇게 묻곤 했다. 대답 대신 빙그레 웃기만 하는 혜선의 손을 잡아 끌고 시계 앞으로 가 손가락으로 시계를 가리 켰다. 지금이 몇 시냐고 묻는 것이기도 하고, 몇 시간이나 남았냐고 묻는 것 이기도 했다. 아이는 시계를 볼 줄 몰랐고, 시간의 개념도 없었다. 어쩌면 아이는 대답하는 엄마의 표정에서 견뎌야 할 시간의 양을 가늠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의사는 잘 움직이지 않는 아이의 한쪽 눈을 레이지 아이(lazy eye)라고 불렀다. 아이의 두 눈은 같은 곳으로 향하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는 눈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 잘 보이는 눈은 안대로 가려야 했다. 아이는 움직이지 않는 한쪽 눈으로 티브이를 보다가 지치면 두 눈을 모두 꼭 감고 잠들어 버렸다. 두 눈을 모두 감아버리면 안대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혜선은 알았지만, 깊은 수면 속으로 도망가 버린 아이를 보면 이상하게 안도감이 들었다.


몸의 모든 것이 가늘어지고 얇아졌지만 발톱은 두꺼워졌다. 혜선은 화석처럼 단단해진 발톱을 잘라내려 손톱깎이에 힘을 주었다. 두 손으로 꽉 눌러도 팔만 파르르 떨릴 뿐, 손톱깎이의 입은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게다가 제대로 굽어지지 않는 허리 때문에 발까지의 거리가 더 멀어졌다. 혜선은 세 번째 여자를 떠올렸다. 세 번째 여자는 혜선의 손발톱을 세심하게 관리했다. 여자가 떠난 후 발톱을 자를 엄두가 나지 않아 내버려 두었더니, 발톱이 길어 나면서 휘어져 이불은 물론 제 살도 할퀴었다.

혜선은 손톱깎이에 힘을 주면서, 오후 내내 떠오르지 않는 주민번호 뒷자리를 기억해 내려 애를 쓰고 있었다. 노래를 부르듯 리듬을 타며 숫자를 하나씩 불렀다. 사, 팔, 공, 삼, 일, 칠, 이, 팔. 거기서 덜컥, 깜깜해졌다. 아주 오랫동안 사용할 일이 없었지만, 혜선은 주문을 외듯 자신의 주민번호를 떠 올려보곤 했었다. 그게 하루아침에 기억나지 않았다. 어찌나 깜깜한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지워진 것 같았다. 지워진 것 같은 느낌은 기억나지 않을 때와는 다른 종류의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결코 복원되지 않을, 완전한 파괴의 느낌. 혜선은 거기서 벗어나려 기를 쓰고 숫자들을 떠올렸다.

지난밤에는 자다 깨서 현관 번호를 외워보았다. 왜 하필 그때 그게 떠올랐는지는 알 수 없었다. 외출에서 돌아오는 꿈을 꾸었을 수도 있었다. 현관문을 열지 못해 안달하다가 잠에서 깬 건지도 몰랐다. 현관 번호는 고작 네 자리인데 1334인지 1344인지 자신이 없었다. 확인하지 않고서는 다시 잠들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혜선은 잠옷 바람에 슬금슬금 계단을 내려갔다. 옆방 에서 진석이 코 고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지하의 여자는 죽은 듯 기척이 없었다. 혜선은 현관문을 열어둔 채 문밖으로 나갔다. 가로등에 의지해 삐, 삐, 삐, 삐, 숫자를 눌렀다. 키패드에 번호를 입력하는 소리가 깊은 밤 동네에 쩡쩡 울리는 듯했지만 잠금장치는 쉬이 풀리지가 않았다. 혜선은 다리에 힘을 주고 서서 몇 번이고 번호를 눌렀다. 이것저것 더 눌러보다가 1134를 눌렀을 때, 삐리리, 경쾌한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풀렸다. 그제야 혜선은 어둠 속 에서 빙그레 웃었다.

혜선은 발톱 깎기를 포기하고 옷을 입은 채 화장실 변기 위에 앉았다. 휴지통에 발을 올리고 뜨거운 수건으로 발마사지를 했다. 세 번째 여자가 그랬듯이 발가락 관절을 살살 주물러 풀고 발바닥을 꾹꾹 눌러보았다. 손끝의 힘이 좀처럼 발에 닿지 않았다. 혜선은 휴지통을 밀어 두고 세숫대야에 뜨거운 물을 받아 발을 담갔다. 아들이 데려온 세 번째 여자는 베트남 출신이었다. 여자의 손톱에는 짙은 선홍색의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고 그 위로 반짝이는 보석이 여러 개 박혀 있었다. 혜선은 불안한 눈빛으로 여자의 손톱을 쳐다보았다.

“손톱을 칠하지 않으면 빨가벗은 것 같다니까 어떡해. 엄마가 좀 이해해 줘요.”

아들은 혜선의 손을 잡고 달래듯 말했다.

“너무 화려하지 않니? 남의 집 드나들 사람이.”

“두 번째 아주머니는 음흉하고 어두워서 싫다 하셨잖아요, 어머니.”

아들은 이 상황에 대한 혜선의 책임을 환기시키려는 듯 매몰찼다.

그 이야기라면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

혜선은 아들의 시선을 피해 얼굴을 돌렸다. 살아온 경험과 몸에 축적된 예감을 간단히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이들이 자신의 말을 병든 늙은이의 앙탈쯤으로 치부하는 것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이미 죽은 사람처럼 입을 꾹 닫고 있을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이것은 아직 남아있는 자신의 삶에 관한 일이었다.

“이번에는 너무 밝아서 싫다는 말인가요?”

“환자는 나야. 함께 지내야 하는 사람도 나고.”

“어머니! 아버지 생각도 하셔야죠. 저희들 생각은 왜 안 하시나요?”

아들은 그 말을 끝으로 휑하니 제 집으로 떠났다.

세 번째 여자는 밝고 싹싹했다. 중학생 아들을 혼자 키우며 사는 씩씩한 여자이기도 했다. 화학약품 알레르기 때문에 십 년을 일했던 네일샵을 그만 두고 전업을 준비하는 중이라고 여자는 말했다. 여자는 연신 관절이 비틀어 진 오른손 검지와 약지를 왼손으로 꾹꾹 눌렀다. 매니큐어가 지워진 여자의 손은 나이에 비해 험했다. 콧소리가 많이 섞인 베트남 억양의 영어는 알아듣기 쉽지 않았지만, 여자의 손은 많은 것을 말했다.

여자의 손끝은 다부졌다. 여자는 제 집으로 돌아가기 전 뜨거운 수건을 몇 개씩 갈아가며 혜선의 발을 닦아주었다. 자신의 허벅지에 혜선의 발을 올려놓고 부드러운 크림을 발라가며 종아리를 밀듯 닦아내듯 위아래로 문질렀다. 밤마다 아리던 종아리 속 깊은 근육에도 그녀의 손끝은 정확히 가 닿았다. 발바닥의 어느 부분을 한동안 꾹 누르고 있으면 전류가 흐르듯 등까지 따뜻해졌다. 혜선은 오랫동안 잊고 있던 편안하고 관능적인 손길 아래서 짧고 깊은 단잠에 빠지곤 했다.


요리연구가였다는 네 번째 여자는 기어이 중국 마트까지 가서 냉동 전복을 사왔다. 재료 욕심이 많은 여자였다. 여자는 마트에 가기 위해 혜선의 차를 운전했다. 혜선은 여자에게 자동차 열쇠를 내어 주었다. 아들 내외나 딸을 귀찮게 하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여자의 차가 차고로 들어오면 진석이 자동차 트렁크를 열고 여자가 사 온 식료품을 부엌으로 옮겼다. 혜선은 소리로 그것을 짐작했고, 때론 시시티브이로 그 광경을 지켜보기도 했다.

안방 침대로 죽을 들고 온 여자는 재료가 한국 거랑 달라 맛이 잘 나지 않는다며, 혜선의 표정을 살폈다.

“어때? 괜찮지? 먹을 만하지?”

혜선이 죽을 삼키기도 전에 진석이 먼저 설레발을 쳤다. 죽에서는 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혜선은 얼굴을 찌푸리지 않으려 애를 썼다.

“수고했어요. 맛있어요.”

“따로 멸치 육수를 진하게 내서 끓였어요. 동치미 국물이랑 같이 드세요.”

비린내가 목젖을 건드렸다.

“이제 내려가 보세요. 당신도 내려가. 성가셔.”

바다에서 건진 건 예외 없이 비린내가, 고기에서는 피 냄새가, 곰탕에서는 고약한 기름 냄새가 났다. 산 것들의 감칠맛 뒤에 가려져 있던 역한 냄새가 일제히 튀어나왔다. 건강할 때는 느끼지 못했던 맛이었고, 건강한 이들은 이해하지 못할 맛이었다. 혜선은 호흡을 참으며 천천히 죽을 씹고 삼켰다. 죽 그릇을 비운 후에는 먹은 걸 토해 내지 않으려 생강 캔디를 꺼내 물었다.

진석이 빈 그릇을 아래로 가져다 놓고 돌아왔다. 몇 걸음이라도 같이 걷자고 혜선을 일으켜 세웠다. 혜선은 기운이 없다며 손사래를 치다가 진석의 팔을 잡고 일어나 방 안을 걷기 시작했다. 진석이 왼쪽을 짚을 때마다 나무 막대가 바닥에 부딪히듯, 둔탁한 반동이 혜선에게로 전해졌다. 혜선은 진석의 팔을 쓰다듬었다. 건장했던 진석의 몸은 전체가 균등하게 쪼그라들었다. 오십 년을 함께 살았는데 남편의 늙은 몸이 생경했다. 의심 없이 기대고 산 지난 시간들을 되새기다 보면 늙는다는 것이 갑자기 들이닥친 사고 같았다.

“사장님, 식사 준비 다 됐어요.”

여자가 노크를 했다.

“내려가서 저녁 먹어요.”

혜선은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당신 좋아하는 거 할 시간이네.”

진석이 라디오 채널을 클래식으로 맞춰두고, 마치 멀리 떠나는 사람처럼 혜선의 뺨을 손으로 어루만지더니 방을 나갔다. 음악 사이사이 여자의 웃음 소리가 섞여 들었다. 웃음소리는 사각사각 신경을 긁었다. 진석과 여자는 혜선의 방 바로 아래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 층과 일 층 사이의 간극이 혜선을 천 리 밖으로 밀어냈다. 혜선은 밀려나지 않으려 음악에 집중했다. 하지만 어느새 음악을 놓치고 여자의 목소리만을 찾고 있었다. 라디오의 볼륨을 더 높이고 눈을 감았다. 지금 몇 시간이야. 다섯 살 딸아이의 질문이 또 떠올랐다. 어린 딸을 안고 계단을 쿵쿵 오르내리던, 거짓말처럼 젊고 바빴던 그녀도 떠올랐다.

세 번째 여자가 엎드려 진석의 발을 씻어줄 때, 소파에 기대 입을 해죽 벌리고 널브러져 있던 진석의 표정. 미끌거리던 생기와 불완전한 관능에 취해 어수선하던 사타구니를 혜선은 분명히 보았다. 여자는 진석의 가랑이 사이에서 고개를 숙이고 발가락 하나하나의 관절을 손가락으로 비비고, 혀로 핥듯 발바닥을 쓸었다. 그때 진석은 눈을 감고 있었던가. 그의 닫힌 눈 속에는 뭐가 있었을까. 연민과 배신감이 너울처럼 넘실거렸다. 네 번째 여자의 웃음 소리가 그 너울에 실려 왔다.


 아들은 지낼 데가 마땅치 않다는 네 번째 여자에게 오히려 잘됐다며 지하에 욕실 딸린 방을 내주었다. 밤늦게라도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돕겠다는 여자는 혜선이 보기에도 믿음직한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혜선이 더 이상 토를 달 수 없었던 것은 그 여자가 흡족해서는 아니었다. 세 번째 여자를 보내며 벌어진 소동에 다들 얼마간 마음이 다쳐있었고, 혜선이 더이상 까다롭게 굴다간 아들도 딸도 모두 멀어져 버릴 것 같아 조바심이 났다.

‘엄마가 그 여자에게 물을 뿌린 건 고소를 해도 할 말이 없는 거야.’

딸은 혜선의 행동이 얼마나 위험한 짓이었는지 두고두고 말했다. 이런 엄마가 너무 낯설어 제 엄마 같지 않다는 말도 했다. 딸아이에게 그런 말을 듣고 있는 혜선도 스스로가 낯설었다. 혜선은 그날, 마시다 만 컵의 물을 진석 과 여자에게 뿌렸다. 할 수만 있다면 한 동이의 물이라도 쏟아 붓고 싶었다. 혜선은 그 길로 이 층 안방으로 올라가 옷장 이불 사이로 팔을 휘저어 가며 보석 주머니를 찾았다. 새파랗게 젊은 여자가 다 늙은 남자를 구워삶을 때에는 재물 말고 다른 동기가 뭐가 있을까. 그나마 있는 것 다 퍼주고 나면 저 어리숙한 늙은이 혼자 어떻게 살까. 딸보다도 더 어린년을. 혜선의 앙다문 이빨 사이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혜선은 이불 더미에서 찾아낸 보석 주머니를 바닥에 탈탈 털었다. 이제는 헐거워져 끼지 못하는 것들이지만, 젊었을 때는 아까워 보기만 했던 것들이었다. 결혼반지와 웨딩 밴드는 그대로였다. 친정어머니가 물려준 바둑알만 한 산호 목걸이도 있었다. 나머지는 보석이랄 것도 없는 액세서리들이 대부 분이었다. 그러다가 사파이어 반지를 떠올렸다. 딸 셀리를 낳고 만들었던 셀리의 탄생석. 바닷속 같은 푸른 사파이어의 사각 테두리에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혀 있던 반지였다. 그 반지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혜선은 자신의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쾌감과 닥쳐올 것에 대한 불길함을 동시에 느꼈다.

“아무래도 치매가 온 것 같다. 네 아버지 말이야.”

소동을 듣고 아들은 한걸음에 달려왔다.

“어머니, 정말 노망이라도 나셨어요?”

“요즘 네 아버지가 이상해.”

“발마사지는 제가 부탁한 거예요. 발에 자극을 주면 아버지 회복에 도움이 되지 않겠어요? 요즘 부쩍 마비가 더 심해진 거 안 보이세요?”

“치매 검사를 해봐라.”

“아버지의 인지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어요. 제가 의사예요.”

“사파이어 반지가 없어졌어. 그걸 여자에게 줬지 싶다. 그걸 준 이유야 짐작이 간다만 입에 담고 싶지 않다. 치매가 아니라면 네 아버지가 미친 거야?”

“사파이어 반지요? 엄마가 그런 게 있었어요?”

“오래되긴 했지만 멀쩡한 반지야.”

“글쎄요. 값나가는 패물은 이민 초기에 다 팔아치웠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그건 팔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그 반지를 여자에게 줬다고 어떻게 확신하죠? 어머니가 기억을 못 하고 계실 수도 있는 거잖아요.”

“지금 반지 이야기하는 게 아니야. 네 아버지 건강에 대한 이야기다.”

“어머니, 이렇게 아버지 몰아붙이시면 정말 나빠질 수도 있어요.”

“돈도 많이 없앤 눈치야. 얼마 있지도 않은 재산을 그렇게 탕진하고 나면 그게 다 네 짐이 될 거야. 나야 가면 그만이지만.”

“신경안정제는 챙겨 드시고 계시죠?”

“난 우울하지 않아. 생각이 많을 뿐이지.”

자신도 사파이어 반지를 본 적이 없다는 딸은 정 그렇게 의심이 되면 경찰에 신고를 해주겠냐고 오히려 되물었다. 진석이 절대로 그럴 리 없다는 전제가 깔린 말이었다.

“저에게 물려주려 했던 반지라면서요. 그럼 제가 받은 셈 칠게요. 제발 이제 그만하세요.”

딸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딸의 울음을 보자 그토록 확고했던 사파이어 반지에 대한 기억이 흔들렸다. 세 번째 여자가 떠나고 한동안 사람을 구하지 못했다. 딸은 뉴욕에서 온 라인으로 시애틀의 음식점에 배달을 시켜 진석의 끼니를 챙겼고, 며느리는 죽상으로 일주일에 한두 번 집에 들러 가져온 식료품을 냉장고에 넣고 문을 탁, 소리 나게 닫았다.

“이 사람도 싫다, 저 사람도 싫다 하시면 두 분 다 요양 병원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어요. 알렉스도 요즘 말이 아니에요. 매일 술을 마셔요. 애들도 슬금슬금 아빠 눈치를 봐요. 불쌍한 내 아이들! 알렉스가 어떤 사람인가요? 그건 어머니가 더 잘 알지 않나요? 그에게는 가족이 전부예요. 그런데 지금 집안 꼴 좀 보세요. 엊그제 아버님은 여섯 시간씩이나 걸어서 옛날에 살던 도시로 가 길을 잃었어요. 지쳐서 벤치에서 잠이 들었다고요. 경찰한테 그 전화를 받고 알렉스가…….”

“그러니 치매가 온 거라고 몇 번을 말했니? 그건 치매의 흔한 증세야. 알 만 한 애가 왜 그래?”

“알렉스는 아버님이 쇼크 상태라고 하더군요.”

“내가 아버지한테 못할 짓이라도 한 듯 말하는구나.”

“그 여자는 자격증을 가진 발마사지사예요. 손발을 만지는 게 그 사람 직업이라구요.”

며느리의 얼굴에는 짜증과 실망이 숨김없이 드러났다. 이제 그녀에게 혜선은 그런 것들을 굳이 숨길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된 것이었다. 며느리는 곧 격멸과 무시를 노골적으로 드러낼 태세였다. 그것만은 겪고 싶지 않았다. 혜선은 방으로 돌아와 문을 꼭 닫아걸었다.

백인 며느리를 얻게 되었다고 했을 때 혜선을 애석하게 바라보던 친구들도 있었다. 하지만 혜선은 정말 괜찮았다. 며느리와 쓸데없는 기 싸움하지 않아도 되니 더 좋다고 농담처럼 말하기도 했다. 크게 보태주진 않았지만 짐을 지운 적도 없었다. 혈육처럼 애틋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남이라고 여겨본 적도 없었다. 자신의 고단함을 훈장처럼 흔들며 그들에게 보상을 요구한 적도 없었다. 혜선은 지금껏 자신의 방식으로 살아냈듯, 남은 시간을 자신이 알고 있는 안전한 방식으로 견디어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 누구도 위협하고 싶지 않았는데 어느새 모두를 위협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인가. 혜선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방안을 서성였다.

들릴 듯 말 듯 속삭이는 소리, 커졌다 작아지는 웃음소리, 딸그락딸그락 수저가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 싱크대에 물이 흐르는 소리까지 유난히 많은 소리가 벽을 타고 혜선의 방으로 올라오는 날이 있었다. 그런 날이면 혜선은 전화기를 켜서 화면 속 그들을 봤다.

진석이 밥을 먹는 식탁에 여자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 여자가 있을 것이었다. 여자가 테이블에 국그릇을 가져다 놓고 맞은편에 앉았다. 그릇 속에는 붉은 고깃국물이 가득했다. 진석의 말에 여자가 고개를 젖히고 깔깔 웃었다. 페로몬을 뿜어내는 과잉된 몸짓과 웃음. 그는 혜선의 식탁에서 그러했듯, 부지런히 젓가락질을 하며 여자의 수고에 답했다. 나물을 집어 먹고, 국을 떠먹었다. 찬사도 아끼지 않을 것이었다. 여자는 이미 반쯤 먹어버린 가자미를 뒤집어 가시를 발랐다. 발라낸 생선살을 진석이 입으로 가져갔다. 진석이 위층에 누워 있는 혜선을 완전히 잊어버린 듯했다. 혜선은 소리라도 질러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진석이 다른 여자가 만든 음식을 저렇게 잘 먹는 것이 이상했다. 둘은 이 전부터 이미 아는 사이가 아니었을까. 혜선이 잠든 사이 진석은 조용조용 계 단을 밟고 지하로 내려가 숨겨둔 사파이어 반지를 제물로 바치고, 저 포동포동하고 탄력 있는 젖가슴에 얼굴을 묻은 건 아닐까. 신경안정제를 삼키고 잠든 날은 모든 것이 깜깜해졌는데, 혜선이 잠든 사이 어떤 일이 일어나도 알 수가 없었을 것인데. 혜선은 폭주하는 상상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한편에서는 망상이라고 스스로를 꾸짖고, 한편으로는 이 모든 것이 너무 완벽하게 들어맞는다고 부추겼다. 혜선은 생각을 멈추기 위해 머리를 흔들어보지 만 오히려 생각은 혜선의 머리를 벗어나 목을 조여왔다. 혜선은 분열을 견딜 수가 없었다. 침대에서 내려와 손으로 화장실 물을 받아 약을 삼켰다. 거울에 비춰진 자신을 낯설게 바라보다 흐트러진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겼다. 어서 빨리 안전한 곳으로 도망가고 싶었다. 혜선은 약을 한 알 더 삼켰다.


혜선이 열 시가 넘어 잠에서 깨어났다. 전날 밤 약을 두 알이나 먹어서인지 정신이 맑지 않았고 머리가 무거웠다. 혜선은 약간의 어지러움을 느끼며 방을 나왔다. 그때 여자는 진석의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사장님 방 청소 좀 하느라고요.”

여자의 손에 물수건이 들려 있긴 했지만 혜선은 그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모님 내려가 있는 동안 방 정리할게요. 화장실도 치워야 하고.”

혜선은 여자를 말리고 싶었지만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다.

“여보! 여보!”

혜선은 몸을 돌려 진석을 찾았다.

“사장님 없어요.”

여자의 얼굴에 묘한 웃음기가 스쳤다. 혜선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여자는 몸을 돌려 혜선이 방금 나온 방으로 향했다. 혜선이 여자를 돌아보며 계 단을 밟았을 때 중심을 잃고 휘청하며 주저앉았다. 여자가 혜선에게로 급히 뛰어왔다. 혜선은 돌진하는 여자가 자신을 계단 아래로 밀어버릴 것만 같았다. 혜선은 몸을 움츠리고 핸드레일을 꼭 잡았다.

“제가 잡아드릴게요 사모님.”

“노! 노! 난 괜찮아요.”

혜선의 말이 너무 단호해서인지 여자가 멈칫했다.

“여보! 여보!”

혜선은 다시 진석을 불렀다.

“사장님 병원에 갔잖아요. 집에 아무도 없어요.”

진석이 없다면 집에는 여자와 혜선뿐일 것이다. 그 당연한 사실을 여자는 혜선에게 다시 한 번 주지시켰다. 혜선은 구조를 요청하듯 시시티브이를 쳐 다보았다.

“혼자 할 수 있어요. 다가오지 말아요.”

혜선은 중얼거렸다. 여자는 꿈쩍 않고 혜선의 옆에 버티고 서있었다.

“무슨 고집이 그리 세요. 이러다 넘어지면 어쩌려고요. 여럿 고생시키지 말고 제발 날 잡아요.”

여자는 혜선의 팔을 잡았다.

“이러지 마. 저리 비켜! 돈 터치 미. 오케이? 돈 터치 미.”

혜선이 소리치며 거칠게 몸을 흔들었다. 혜선의 기세에 여자가 몇 계단을 뒷걸음치더니 그대로 뒤로 꼬꾸라졌다. 비명과 동시에 계단이 무너질 듯 울렸다. 혜선이 고개를 들어 보니 여자는 현관 신발 옆에 널브러져 있었다. 혜선은 계단을 내려와 여자에게 몇 걸음 다가갔다. 여자는 얼굴을 찡그리고 얕은 신음 소리를 냈다. 피가 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혜선은 다가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하고 여자를 쳐다보다가 잠옷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냈다.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깊은 밤 집 앞에 자동차가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혜선은 시시티브이 화면을 켰다. 검정 BMW 운전석에서 아들이 내려 뒷좌석 문을 열었다. 여자가 아들의 부축을 받으며 차에서 내렸다. 여자는 목발을 짚고 느리게 걸었다. 목발을 짚은 폼이 어설펐지만 상태가 그리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현관문의 키패드가 삑, 삑, 삑, 삑 울렸다.

혜선은 전화기를 끄고 진석의 옆에 누웠다. 둘이 나란히 누운 게 얼마 만 인가. 혜선이 많이 놀랐을 거라며 진석은 저녁 내내 혜선의 방을 떠나지 않았다. 진석은 늦은 밤까지 혜선이 잠이 들기를 기다리다, 침대 끝에 몸을 누이더니 먼저 잠이 들어버렸다. 혜선은 돌아누운 그의 등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 진석이 잠결에 몸을 돌려 혜선을 팔로 감았다. 그의 가슴이 혜선의 얼굴에 닿았다. 그의 심장 소리가 쩡쩡 혜선의 귀에 울렸다.

“여보, 여보. 지금 몇 시나 되었을까. 밤이 아주 깊은 것 같은데.”

혜선은 들릴 듯 말 듯 진석을 부르다, 입을 크게 벌리고 하품을 했다. 자동차가 아득히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혜선은 눈을 꼭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