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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단편소설] 이본을 모르면서
작성일
2021.02.01

[우수상 - 단편소설 부문]


이본을 모르면서


양 해 숙 / 독일



이본과 만나기로 한 곳은 은행의 표식이 가득한 프랑크푸르트 금융지구의 한 건물이었다.

반차를 쓴다더니 여기가 이본이 일하는 덴가 보네.

나는 두 아이와 로비에서 이본을 기다리고 있었다. 점심시간 로비는 회사원으로 붐볐다. 옆으로, 앞으로 사람들이 스쳐갔다. 세련되고 당당한 젊은사람들. 청바지와 패딩 점퍼의 내 차림이 불편했다. 다른 데서 만나자고 할걸 그랬나. 아이들과 맞잡은 손이 축축했다. 건물 안쪽에서 이본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우리를 보곤 반갑게 손을 흔드는 이본에게 우리도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내가 이본을 처음 만난 건 2주 전, 고흐 특별전이 열리는 슈테델 미술관 앞이었다. 관람에 동행한 미사모(미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회원들 사이에 낯선 얼굴이 있었다. 나는 호기심이 들어 먼저 인사했다. 전 정소영이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전 이본이에요. 우리는 가볍게 인사했고, 사람이 여럿 모인 자리인 만큼, 서로에게 집중하지 않았다. 나는 새살대는 이들 사이에서 이본이 드물게 말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온언순사에 여유 있는 태도가 또래의 젊은이와 달랐다. 호감을 사려 호들갑을 떨지도, 불필요한 긴장감을 내보이며 상대를 탐색하려는 모습도 아니었다. 그녀에겐 자연스러운 편안함이 있었다. 그런 건 조금 부러웠다.

수다로 추위를 녹이며 줄을 선 지 한 시간가량 되었을 때, 가방 속 핸드폰이 울렸다. 우줄라였다. 번개 문자에 갑작스레 집을 나온 터라 전화를 받는 것이 꺼려졌다. 망설이다 결국엔 통화 버튼을 눌렀다.

노엘이 계속 운다. 루이는 계속 짜증을 내네. 엄마가 보고 싶다고. 관심을 돌리려 해봐도 쉽지가 않아. 아이들 마음에 큰 상실감이 남을 것 같다. 가급적 빨리…… 집에 오라는 소리였다.

13시 50분. 집을 나선 지 두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다. 먼저 갈게요. 나는 평정을 가장하고,꼭 누군가가 아닌, 허공에 말했다. 아직 입장도 못 했는데, 애들이 울 수도 있지, 아빠는 뭐 한데, 소영 씨가 육아를 전담하고 살았구나, 애들 버릇이 잘못 들었네, 오랜만에 외출한 사람에게 전화는 왜 했담, 그것도 시어머니가. 위로인지 질책인지 모를 말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커피 한잔하실래요?

이본이었다.


나는 그렇게 만난 지 한 시간 된 이본의 집에 가게 되었다. 집은 말 그대로 엎어지면 코 닿을 데였다. 나는 주방 구석에 놓인 작은 탁자에 앉아, 이본이 커피콩을 갈고 전기 포트로 물을 끓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향긋한 커피 두 잔이 식탁에 놓였다.

“우유 있어요? 전 진한 커피는 잘 못 마셔서요.”

“두유하고 라이스 밀크만 있는데 괜찮아요?”

“좋아요. 그런데 이본 씬 베지테리언인가 봐요?”

“네. 식물인간이에요.”

하마터면 마시던 커피를 뿜을 뻔했다. 다행히 뿜지는 않고 사레만 걸렸다.

“어머! 괜찮으세요?”

나는 캑캑댔다. 이본이 나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네……이제……괜찮아요. 흐……흠. 그런데 식물인간……이세요?”

“네.”

우려와 의문이 교차된 눈을 하고 이본이 말했다. 한국인의 얼굴을 가졌다해서 모두 한국인인 건 아닌데, 잠깐 헷갈렸다.

“식물인간이 채식주의자가 되긴 좀 어려울 것 같은데.”

나는 설명했고, 이본은 주의 깊게 들었다.

“어릴 때부터 독일에 살아서 한국말이 서툴러요.”

이본은 일곱 살 때 아버지를 따라 독일에 온 이래, 줄곧 베를린에서 성장했다고 했다. 아버지는 아, 베, 체부터 시작해 생명공학을 전공으로 박사까지 마친 분인데, 공부하는 아버지를 둔 탓에 생활은 소박했지만 나름 행복했다고. 가족들은 모두 베를린에 살고 있으며, 본인은 석사를 마치고 오래전부터 눈여겨 봐두었던 회사에 자리를 얻어 6개월 전에 프랑크푸르트로 이사를 왔다고 했다. 독일에 사는 한국인의 경우의 수를 카테고리 별로 나눈다면 이, 삼 위에 오를 전형적인 젊은 교포 이야기였다.

이본은 많이 배운 아빠를 두었구나. 이런 애들이 대체로 인성도 좋더라고.

나의 오랜 믿음이었다.

“고흐 특별전 말고 다음엔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에 가보는 건 어때요?”

자리에서 일어나는 나에게 이본이 물었을 때, 나는 그러자고 애매하게 약속했는데, 그때 나는 그녀가 빈말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잘 몰랐다.


이삼일이 지나기도 전에, 암스테르담 따위는 내 기억에서 까맣게 사라지고 없었다. 아니, 이본이 여행을 제안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했으니,기억할 대상 자체가 없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옳으려나.

「저는 21일 또는 29일에 가능한데, 혹시 시간이 되시나요?」

밥숟가락을 놓고 이본의 메시지를 들여다보았다. 무슨 말이지? 한참을 골똘한 후에야 암스테르담 운운했던 것이 떠올랐다. 얼굴만 한 번 봤을 뿐인 낯선 사람과 여행이라고?, 이본이라면 못할 것도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번갈아들었다. 나는 선뜻 답장하지 못하고, 밥을 마저 먹었다.

그나저나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본 적이 언제였더라? 도스토옙스키는 수용소에라도 갔으니 몇 년 동안이나 혼자 있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절망했다지만, 나는 죽음의 집에 살지도 않는데, 왜 혼자일 수 없는 거야? 독박 육아도 안 해본 도스토옙스키가 뭘 안다고!

요즘 종종 울컥한다. 나는 이본에게 문자를 보냈다. 남편과 일정을 조율해서 확답을 주겠노라고, 꼭 같이 가자고.

늦저녁에 나는 라스에게 이본과 여행에 대해 이야기했다.

“여행 좋지. 애들 봐주곤 싶은데 내가 시간이 안 돼서 말이야.”

라스는 언제나 돕고 싶지만, 시간이 없었다. 사정이 많았다. 우리의 대화는 주제는 다를지언정 결론은 동일했다. 결국엔 내가 포기하는 것이다.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나는 듣기가 싫었다.

“여하간…… 안 된다는 거잖아? 알아들었어. 나 먼저 잘게.”

침대에 누워 이본에게 문자를 보냈다.

「미술관 여행은 어려울 듯.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네. 미안해요.」

바로 답장이 왔다.

「아이들과 같이 눈썰매장에 가는 건 어때요? 올겨울이 지나기 전에.」

아이들과 같이? 그렇다면 어디든 갈 수 있지. 나는 그녀의 제안이 반갑고 고마웠다. 뜻이 맞은 나와 이본은 문자를 주고받으며 숙소와 눈썰매장 등을 예약했다. 오랜만의 여행이라 신이 났다. 우줄라의 문자를 받기 전까지는.

「일기예보를 보았니? 이 주에 큰 눈이 온다던데. 폭설에 덮인 고속도로를운전하는 건 현명하지 못한 생각이야. 큰 사고가 날 수도 있고. 여행을 취소한다면, 내가 몇 시간 정도 아이들을 봐줄 수 있어. 슈바르츠발트…… 별로야.」

부엌에서 물을 한 잔 따라 마셨다. 폭설, 사고, 현명, 별로 등의 단어가 머릿속에 되풀이되었다. 어릴 적 엄마가 하던 말, ‘내 속에 천불이 난다’는 뜻을 알 것만 같았다. 만일 그녀의 계획이, 처음부터 내 기분을 망치게 해 궁극적으로 여행을 취소하게 하려는 거였다면, 반은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다른 건 몰라도 기분 하나는 확실히 더러웠다.

내가 가고 만다. 기필코.


이본과 아이들을 태우고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붉은 선을 따라 남쪽으로 차를 몰았다. 하늘은 먹구름으로 찌뿌둥하다, 사나운 비를 내리다, 흩어지는 눈으로 가득하다, 다시 빗줄기를 뿌리는 등 야단을 떨었다. 슈투트가르트를 지날 즈음에는 앞차가 튕겨내는 빗물이 얼마나 센지 와이퍼는 하나마나일 정도였다. 변화무쌍한 날씨에 내 마음도 걱정과 안도 사이에서 널을 뛰었다. 백미러로 흘긋 보니 아이들은 어느새 잠이 들어있었다, 이본은 메일을 쓰는지 손가락을 바삐 움직이다 잠깐 골똘하더니 곧이어 다시 뭔가를 적고는 한참이 지난 뒤에야 핸드폰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바쁘네요. 우리 만난 데가 이본 씨 일하는 곳이에요? 대개 좋아 보이던데.”

“네, M 은행이요. 들어보셨어요?”

“아니요, 잘 모르겠는데요.”

“개인 고객은 없는 은행이라 생소하실 거예요.”

“이본 씨는 거기서 무슨 일을 하세요?”

“음… 회사 정보도 모으고, 투자 상품도 만들고 파는, 뭐 그런 재미없는 일이요.”

피차 재미없는 일투성이구나.

“그렇군요. 그렇게 좋은 회사도 다니시고 공부를 잘했나 봐요.”

“글쎄요. 공부는 잘할 때도, 못할 때도 있었죠. 그런데 잘했다 한들 그게 자랑거리인지는 모르겠어요. 동양인이 공부 잘하면 열등감 때문이라고, 그저 내세울 게 공부 하나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거든요.”

심상한 말투.

“차별…… 뭐 그런 건가요?”

“열등감도 있고, 내세울 게 없는 사람인 것도 맞고, 그래서 좀 더 열심히 살아보려 노력한 것도 있고. 그래서 차별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제대로 본 건지, 잘 모르겠네요.”

그러면서 웃는다. 그녀가 웃으니까, 열등감도 없어 보이고, 내세울 것도 많은데 겸손해 보이기까지 한다.

다시 이본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는 전화로도 뭔가를 만들고 파나 보다. 나는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독일로 이주하기 전 한국에 있을 땐 나도 직장에 다녔다. 일과 여가, 익숙한 친구와 가족에 둘러싸인 편안한 시절이었다. 균형 잡힌 생활은 다소 무료(無聊)하다. 그래서 변화를 원했다. 교환 연구원으로 한국을 방문한 라스가 과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와 나에게 서류를 내밀었을 때, 행정실 앞 복도에서 커피 한잔하자는 제안해 왔을 때, 나는 나의 삶에 찾아온 변화를 직관했고, 그것이 그리 달갑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일 년 남짓의 연애 후 결혼했다. 그리고 또 일 년 남짓의 한국에서의 신혼 생활을 마치곤 라스를 따라 독일로 왔다. 이국에서의 결혼 생활은 나에겐 별로 재미가 없다. 독일에막 정착했을 땐 유라시아 대륙의 맞은편 끝자락에 자리한 나의 소도시와는 판이한 북유럽의 판타지에 살짝 취하기도 했지만, 첫아이가 태어나 육아에치인 이후론 이마저도 나와 무관한 세상이 되어버렸다. 라스와 나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 우리는 여전히 누구의 모국어도 아닌 영어로 대화를 하고, 공유하는 친구도 없으며, 서로의 음식은 싫어하고, 책에서 찾아낸 좋은 구절을 나누지 못해 쩔쩔맨다. 흥미도 열정도 없는 수업에 앉아있던 학생이 결국엔 책상에 엎드려 자버리는 것과 꼭 같은 모양으로, 나는 독일에서 엎드린 채로 이 수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목적지를 10Km 정도 앞두고 슈바르츠발트에 들어섰다. 길은 구불구불했고, 도로 옆은 침엽수로 빼곡했다. 한참을 미끄러져 내리다 폭이 좁은 샛길로 빠졌다. 오가는 차는 드물어졌고, 구부러진 전나무가 만들어내는 음영으로 길은 어두웠다.

주차장은 텅 비어있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맑고 차가운 공기가 폐 속으로 훅 들어왔다. 흰색과 푸른색의 페인트가 발라진 목재 건물이 있었다. 낡았지만, 항시 관리하는 듯 깨끗하고 단정했다. 숲 속 어딘가에서 시작되었을 개울은 가로등 불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며 건물의 한 곁을 지났다. 격자무늬의 덧창 안에서 흘러나오는 노란 불빛이 보였다. 얼른 그 속에 들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따듯하고 포근한 색이었다. 우리는 서둘러 현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백발을 양 갈래로 곱게 땋아 늘인 주인 할머니가 숙소를 안내해 주었다. 아파트형 숙소엔 방이 두 개나 되었는데, 큰 방에는 더블 침대와 폭이 좁은 옷장이, 작은 방에는 두 개의 이층 침대와 아까 본 것과 같은 모양의 옷장이 있었다. 아이들은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ㄱ자로 놓인 이층 침대를 발견하고는, 상하좌우로 뛰어다녔다. 주방에는 타원형의 식탁과 붙박이 벤치가 있었다. 주인 할머니와 이본이 이야기하는 동안, 나는 벤치에 앉았다. 따뜻했다. 돌아보니, 벤치 뒤에 숨은 라디에이터가 훈훈한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 식탁에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쌓여 있을까? 나는 이곳에 앉아 각자의 방식대로 특별한 시간을 보냈을 이들을 생각하며, 반질반질한 식탁의 얼굴을 살며시 쓰다듬어보았다.

주인 할머니에게서 넉넉한 양의 이불보와 베갯잇을 받았다. 이본이 이불보를 씌웠고, 나는 짐을 날랐다. 저녁은 간편식으로 때웠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사위가 어두워졌다. 장시간 운전으로 피곤하기도 했던 터라, 우리는 내일을 기약하기로 하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커튼 틈 사이로 스며든 여명에 눈이 떠졌다. 아이들은 곤히 자고 있었다.나는 커튼을 조금 열었다. 이토록 하얀 세상이라니! 밤새 내린 눈이 온 세상을 하얗게 지워버렸다.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였다. 하늘엔 이모든 일의 주범이었을 눈보라는 자취를 감추고, 대신 눈송이만 폴폴댔다.

부엌으로 나와 커피를 끓였다. 커피를 마시며 눈 덮인 나무를 보았다. 가는 나뭇가지에 혼연히 앉아있던 까마귀 한 마리가 푸드덕하며 눈을 털고 날아갔다.

“엄마. 여기 있었어?”

암막이 없어서인지 예상외로 아이들이 일찍 일어났다. 내가 코코아를 끓이는 동안, 아이들은 창에 코를 대고 하얗게 변해 버린 세상을 구경했다. 잠시 후, 이본이 긴 머리를 틀어 올린 모습으로 방에서 나왔다.

“구텐 모르겐. 다들 일찍 일어났네요.”

“이본, 봤어? 눈이 엄청 많아.”

“그러네. 눈이 정말 많다. 눈사람 여러 개 만들 수 있겠는걸.”

우리는 코코아와 커피를 마시며 한담을 나누었다. 일정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이런 날씨에 눈썰매장은 개장하지 않을 것 같아. 아이들은 실망했지만, 이본은 꼭 가보고 싶다고 말했던 것과 다르게, 별 관심이 없었다. 나는이본이 실망할까 봐 노심초사했는데, 의연한 이본을 보고 마음이 편해졌다.우리는 설국이 된 슈바르츠발트를 배경 삼아 사진을 찍었다. 아이들의 장난스러운 얼굴과 너무 웃어 감긴 듯 보이는 내 눈과 이본의 자연스럽게 올라간 입꼬리가 사진에 담겼다. 핸드폰 속의 사진을 들여다보던 루이가 입으로 ‘스으읍’ 소리를 냈다.

“왜?”

루이가 사진 속 이본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젠…… 예뻤는데.”


호텔 뒷마당의 눈밭을 밟았다. 발밑에서 뽀드득뽀드득 소리가 났다. 하얀이불 같은 눈 위에 모양과 크기가 다른 발자국이 만들어졌다. 제대로 된 눈을 보는 건 올해 들어 처음이다. 신이 난 두 아이가 아무 데나 주저앉아 눈을 모으기 시작했다. 노엘이 제법 큰 눈덩이를 던지며 먼저 눈싸움을 걸어왔다. 성심성의껏 대응해줬다. 눈썰매장에 못 가는 게 꼭 내 잘못은 아니지만나는 눈덩이를 던지고 소리를 지르며 어그러진 여행을 만회하려 노력했다.아이들은 눈덩이를 맞으면서도 깔깔댔다. 웃음이 고함으로 바뀐 건 순간이었다. 루이가 ‘꺅’, ‘악’ 하며 울고불고했다. 눈덩이로 뺨을 맞은 것이다.귀에도 눈이 들어갔는지 손가락을 귀에 집어넣으려 야단이었다.

“엄마! 이본이 내 얼굴에 눈 던졌어! 이본 나빠!”

루이가 고자질했다. 나는 아이의 빨개진 귓불을 덥혀 주었다.

“미안해. 근데 원래 눈싸움은 얼굴에 던지는 거야……에요.”

이본이 루이와 날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당황한 듯했다.

“애들하고 눈싸움할 땐 얼굴에 눈 던지면 안 되죠.”

나는 우는 루이를 달래며 충고했다.

“아니…… 눈싸움은 원래 얼굴에 맞히는 거죠.”

“괜찮아요. 이본 씨한테 뭐라 하는 거 아니에요. 실수할 수도 있죠. 근데 애들하고 눈싸움할 땐 얼굴 맞추는 거 아니라고. 기억해 둬요. 나중에 또 실수하면 안 되니까.”

“아니…… 눈싸움은 원래 어린애들이 하죠. 원래 얼굴에 맞추는 거고.”

“아이, 이본 씨. 괜찮아요, 괜찮아. 나 애들이 운다고 속 좁게 구는 그런 사람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정말 얼굴에 맞추는 게 눈싸움인데……”

“아이, 괜찮다니까.”

이본은 루이가 헛간 옆 똬리를 틀고 앉은 고양이를 발견하곤 눈싸움 따위는 잊어버린 지 한참이 지난 때까지도 계속 중얼거렸다.

“축구는 축구 골대에, 농구는 농구 골대에 공을 넣어야 하듯이, 눈싸움은 얼굴에 눈을 맞추는 게임인 거. 진짠데.”

이 친구 참 근성 있네. 우리는 한참 동안 ‘아니, 그게 아니라’, ‘괜찮아요, 괜찮아’를 돌림노래 부르듯 했다.

나는 벤치에 앉아 화기애애해 보이는 사진을 골라, 「바로 지금 슈바르츠 발트에서」라는 캡션을 덧붙여 라스에게 보냈다. ‘읽음’ 표시가 나타났고,곧이어 라스의 전화가 걸려왔다. 요지는, 눈이 너무 많이 온 것 같으니 눈썰매장은 가지 마라, 애당초 운전대를 잡을 생각도 마라, 아이들을 잘 봐야한다, 아니, 그러지 말고, 내일부터 당분간 강의가 없으니 직접 가겠다, 숙소에서 꼼짝 말고 기다리고 있으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것이 남편의 관심과 사랑인가, 불신과 간섭인가를 헤아려보았다. 불쑥불쑥 고개를 내미는 이 갑갑한 기분은 옳은가, 그른가.

“아직 이른 시간이라 제설이 되지 않은 것뿐이야. 곧 좋아지겠지. 알았어…… 나도 잘해…… 알아서 잘한다고. 쓸데없는 걱정할 거면 전화 끊어.”

나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말이 길어질수록 기분은 반드시 나빠지니까.


호텔 뒤편 개울 길을 따라 걷다 숲으로 향하는 오솔길을 찾았다. 길이 넓고 경사도 적당해, 걷는 데 무리가 없어 보였다.

“멀리 가는 게 아니라면 괜찮을 것 같은데요. 한번 가볼까요?”

어차피 달리 갈 데도 없다. 혼자라면 아이 둘을 데리고 절대 저런 데에 가지 않겠지만, 이본도 있으니 괜찮겠지, 라고 생각했던 것이 나의 오산이었다.

이 날씬한 젊은 아가씨는 운동신경이 많이 부족했는데, 특히 하체가 여간 부실한 게 아니었다. 아이들도 수월히 오르는 길인데, 왜 그리 혼자 미끄러지는지. 똑딱. 이본의 몸의 절반이 눈 깜짝할 사이에 내려앉다 다시 올라온다. 발목을 접질린 줄 알고 깜짝 놀랐는데, 이본이 시치미를 뗐다. 민망해하는 것 같아 못 본 체하고 걸음을 옮기는데 얼마 가지 않아 프러포즈라도 하려는지 한쪽 무릎을 땅에 꿇고 한 손으론 덤불을 잡고 있다. 머리카락엔 덤불에서 날아온 눈가루가 얹혀 있다. 너의 청혼을 받아줄게. 나는 이본의 손을 잡아 그녀를 일으켜주었다. 다시 이본이 큰 돌을 밟아 미끄러졌다. 보다 못한 노엘이 나섰다.

“정말 안 되겠네. 나 잡아.”

잘난 척 해봤자 꼬맹이. 나는 루이를 노엘에게 맡기고, 이본의 손을 잡았다. 우리는 손을 잡고 걸었다. 어른이 되어, 이렇게 친구의 손을 잡고 걸어본적이 있었던가? 영 어색하고 쑥스러운 것을 보니, 확실히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 나는 걸으면서, 우리 그때 그랬지, 정말 웃겼지, 하며 수다를 떠는 일을 상상해 보았다. 우리의 우정이 길게 갔으면 하는 소원을 담은 그런 생각을.

얼마쯤 오르자 너른 터가 나왔다. 산행객을 위한 벤치도 있었다.

“앞에 길은 좁고 가파른 것 같으니, 여기까지만 하고 다시 내려가요.”

“그럼 여기에서 주먹밥 먹고 갈까요?”

이본이 벤치에 엉덩이 끝만 걸쳐 앉더니 가방에서 루이 얼굴만큼 큰 주먹밥을 꺼냈다.

“주먹밥이 있어요?”

“간식으로 먹으려고 숙소에서 나오기 전에 햇반 데워서 몇 개 만들어 왔

어요.”

아침부터 논 탓에 배가 고팠다.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주먹밥을 손에 들었다.

“맛이 있을진 모르겠지만, 맛있게 드세요. 구텐 아페티트.”

“구텐 아페티트.”

먹어본 중에 제일 맛있는 주먹밥이었다. 우리는 너나없이 모두 엄지를 들어 이본의 공을 치하했다. 산속의 피크닉이 한창인데, 아직 몇 입 베어 먹지않은 주먹밥 위에 하얀 소금이 떨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눈이었다.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얼른 가방을 고쳐 메고 산에서 내려갔다. 내가 루이의, 이본이 노엘의 손을 잡았다. 내리막길에서 조심하느라 속도가 나지 않았다. 반면에 눈의 걸음은 신속하고 맹렬했다. 눈은 곧 눈보라로 바뀌었다.

“으기 내 여프에 깍 바터.”

이본의 목소리에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이본은 한 손엔 노엘을 다른 한 손엔 주먹밥을 쥐고, 입에는 주먹밥을 양껏 밀어 넣은 모습이었다. 이본이 노엘을 살뜰하게도 챙겼다.

“이기 음마 으페 딱 브터 가자.”

그래, 눈보라가 몰아쳐도 밥은 먹을 수 있지. 나는 주머니에 넣어뒀던 주먹밥을 꺼냈다. 입으로 랩을 조금 벗기고 주먹밥을 한입 크게 베어 먹었다. 루이도 한입 먹였다.

“이폰 씨. 근이 뜩 마자스요.”

내가 소리쳤다.

“므라고요?”

이본이 되물었다. 그녀의 얼굴엔 머리카락이 젖은 미역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나는 한 입 더 먹었다.

“즈먹븝이 느무 마시따고요.”


밤이 다 되도록 눈은 계속됐다. 더는 낭만적이라고 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정상적인 여행은 글렀다. 이곳에서 나가기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오래 생각했지만, 차마 밖으로 꺼내지 못한 그 말을 꺼냈다.

“이본 씨만 괜찮다면, 라스를 불러도 될까요?”

라스는 14시 25분에 토트나우 역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했다. 이본이 주인 할머니에게 부탁했다. 주인 할머니는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30분 후, 낡은 픽업트럭이 호텔 뒷마당으로 들어왔다. 바퀴엔 일전에 헬싱키 근방의 한갓진 마을을 지날 때 보았던 스파이크가 달린 스노체인이 감겨 있었다. 말총머리에 검은 티셔츠를 입은 남자가 차에서 내

렸다. 우리는 주인 할머니를 따라 응접실로 들어갔다. 따뜻한 과일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실례한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 아이들의 뒤를 쫓아가, 이건 만지는 거 아니야, 달리면 안 돼, 조용히 말해야지, 등의 잔소리를 하며 어른들의 대화에서 슬며시 빠졌다. 비단 독일어 때문이 아니라,나는 낯선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것이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그에 반해 이본은 누구와도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나는 그녀가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며 사람들을 웃게 만들고,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본이 할머니의 작은 주방에서 끓인 물을 가져와 찻주전자에 물을 붓는 걸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녀는 진짜 어른이구나.


내가 아이들과 숙소에 남고, 이본이 말총머리 아저씨와 기차역에 라스를 마중하기로 했다.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음에도 눈길이라 운행이 쉽지 않은 모양이다. 픽업트럭이 떠난 지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은 것을 보고 나는 그렇게 추측했다. 두 시간이 지났다. 노엘과 루이는 만화영화를 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창밖을 넘어 보았다. 설마 사고가 난 건 아니겠지? 말총머리는 여기 토박인데, 무슨 일이 있으리라고? 라스를 못 만났나? 나는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울리다 음성안내 메시지가 나와 핸드폰을 껐다. ‘딩동’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라스와 이본이 나타났다. 아이들이 ‘아빠!’ 하며 라스에게 뛰어들었다. 환영 인사 한번 요란했다. 짧고 충분한 반가움을 표시한 아이들이 라스를 현관에 남겨두고 만화영화 앞으로 되돌아갔다.

“소영, 잘 지냈어?”

라스가 희미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그 미소가 조금만 더했다면 나를 비웃는다 생각했을 것이다.

“보시다시피.”

라스와 나는 가볍게 서로의 목을 안아 인사했다. 이본이 라스의 등 뒤에 멀뚱히 서있었다. 나는 서둘러 서로를 소개하려 했지만, 둘은 기차역에서 이미 인사를 나누었다며 사양했다. 라스가 현관 밖에 놓아둔 커다란 장바구니를 부엌으로 들였다. 호텔로 들어오는 샛길만 빼고, 큰길은 이미 제설이 되어 주행에는 문제가 없었다고, 시간이 지체된 건 슈퍼마켓에 들렀다 왔기 때문이라고 이본이 설명했다. 나는 수납장에 식료품을 정리했다. 통밀빵, 알고 이산(産) 저지방 우유, 유기비료만 먹여 만든 고다 치즈, 할랄 표식이 붙은 깡통 음식들, 안남미가 있었다. 채식주의자를 위한 슬라이스 햄을 발견했을땐, 세상에 이런 것도 있구나 싶어 신기했다. 귀리 뮤즐리를 찬장에 넣을 땐 내가 좋아하는 콘플레이크는 왜 안 사 왔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콘플레이크보다 건강 염려증이 몸에 더 해로운 거 아닌가? 하나같이 입맛이 돌지 않는 음식뿐이다. 슈퍼마켓에는 이본도 같이 갔으니 대놓고 라스를 타박할 수는 없다. 나는 짜증이 새어 나오지 않게 노력하며 최대한 온유한 목소리로 말했다.

“간식이 없네? 아이들 먹을 것도 사 왔어야지.”

라스에게 한 말인데, 이본이 곁다리를 들었다.

“애들 간식은 여기 있어요.”

이본이 냉장고 속에 밀어 넣었던 머리를 꺼내 들며 봉지 두 개를 흔들어 보였다.

“짜잔! 어린이를 위한 미니 당근과 미니 오이!”

이본이 생긋 웃었다. 노엘과 루이가 만화영화에서 눈을 떼고 이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이스’라고 말하는 라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빵과 치즈, 햄과 과일 슬라이스를 식탁에 올리고, 커피와 우유를 따랐다.

오랜만에 풍성한 식탁이 차려졌다. 점심도 저녁도 아닌 애매한 시간이었지만, 모두 맛있게 먹었다. 라스와 이본의 대화는 제법 활기찼다. 그들이 대화를 즐기는 것이 나에게는 다행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내가 나의 친구들과 있을 땐, 라스는 대화에서 시나브로 소외되곤 했다. 라스가 그의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타인과 대

화를 하며, 서로의 눈치를 봤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를 피곤하게 했고, 가끔은 정체가 애매한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켜 공연한 말싸움을 하기도 했다. 나의 지인인 이본이 라스와 대화를 하니, 나는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어 마음이 편했다. 열띤 목소리에 비해 표정은 심각하지 않은 걸 보니, 둘은 무겁지 않은 주제를 놓고 토론 중인 듯했다. 식탁 위 할로겐램프가 만들어낸 노란 불빛이 그들의 얼굴 위에서 일렁였다. 그 명암을 가만히 바라보는데 라스가 문득 나에게 눈썹을 들어 올려 보였다. 나는 미소로 대꾸했다.

Alles in Ordnung. Everything is fine. 모든 게 나쁘지 않은 저녁이다.


다음 날엔 눈이 내리지 않았다. 라스가 운전을 하고, 차로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호텔 앞 샛길은 여전히 눈으로 덮여 있었다. 여러 차례를 시도한 후 우리는 한길로 접어들었다. 노엘이 며칠 만에 밖에 나오는 거냐며 손가락을 꼽았다. 나는 가만히 노엘의 손을 잡았다. 300미터 앞 왼쪽에 티티호(湖)가 있음을 알리는 표지판이 나왔다. 며칠 동안 숲만 봤으니, 호수도 좀 보자는 어설픈 나의 주장에 모두가 순순히 동의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호수 공원으로 들어갔다. 호수는 확 트인 데다, 아무도 없어, 서늘한 분위기가 났다. 우리는 연안을 따라 걸었다. 노엘이 작은 돌멩이 하나를 호수에 던졌다. 돌멩이는 연안에서 멀지 않은 수면에 떨어져 여러 개의 작은 동심원을 만들고 물속으로 사라졌다. 루이는 자갈을 한 주먹 쥐어 던졌다. 자갈이 호수 표면에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나도 동그란 돌멩이 하나를 던졌다. 나의 돌멩이는 조금 더 먼 곳에 떨어져 그만큼 더 큰 지름을 갖는 동심원들을 만들어냈다. 조금씩 커지던 원들은 물가에 닿아서는 이내 사라졌다.

아이들이 눈 덮인 기구 몇 개가 놓인 놀이터를 발견했다. 노엘이 시소에 올랐고, 루이는 키보다 높은 시소에 오르지 못해 낑낑댔다. 이본이 루이를 시소에 앉혀 주었다. 나와 라스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이본이 혼자서 아이들을 보는 것 같아 눈치가 보여. 내가 가봐야 하지 않을까?”

“내버려 둬. 아이들이 좋아하는데.”

나는 엉덩이를 다시 벤치 끝에 놓으며, 눈으로만 아이들을 쫓았다.

“학교는 어떻게 하고 온 거야?”

“시험 기간이라 주말까진 강의가 없어. 대신 다음 주부턴 바빠지겠지.”

다음 주가 영영 오지 않았으면 좋겠네, 라는 말을 나는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내일 집으로 갈 계획이었는데. 괜찮아? 라스, 넌 어제야 왔잖아.”

“아, 그렇지 않아도 내일 가는 길에 보덴호(湖)에 들를까 하는데. 이본이랑은 얘기했어. 소영, 너도 괜찮지?”

“어…… 그래, 좋아.”

어제 그런 얘기도 했구나. 내 허락이 필요한 일도 아니니, 까맣게 잊었나보다. 라스는 내가 연관된 일을 나에게 알려주지 않을 때가 많다. 나는 라스의 그런 습관이 싫다. 나는 나 자신이 내일 어디에 있게 될지도 모르는 채로 살기는 싫은 것이다. 어디를 갈 땐 미리 말해 주면 좋을 텐데. 한소리를 하려다 나는 이내 입을 다물어버리고 만다. 나는 내가 하게 될 말과 라스가 하게 될 말을 모두 알고 있고, 그건 라스도 마찬가지일 거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라스와 나 사이에 짧은 정적이 흘렀다. 이본이 멀리서 우리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그때, 루이가 높이 뜬 시소에서 일어섰다. 나는 깜짝 놀라 벤치에서 일어났다. 라스가 내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이본이 실수 없이 애들을 볼 거야.”

라스는 자세도, 표정도 편안했다. 나는 여전히 미심쩍었다.

“애도 안 키워 본 아가씨가 하면 뭘 얼마나 잘하겠어?”

“딱 보면 알아. 뭘 하든 철두철미할 스타일이야.”

그는 확신했다.


그날 밤, 마침 잠도 오지 않는 그 밤에 나는 라스의 말을 곱씹었다. 딱 보면 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저런 애들’의 ‘애들’은 대체 어떤 애를 말하는 걸까? 라스는 나를 두고도 딱 보고 알았을까? 어쩌면, 우리는 딱 보고 알지 못한 탓에 아직도 서로를 전혀 알지 못한 채 사는 건 아닐까. 나는 남편의 간섭과 잔소리가 그가 나를 충분히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수년간 노력했지만 나는 얻을 수 없었던 그 신뢰를 이본은 어떻게 가질 수 있었을까? 라스의 코 고는 소리가 오늘 밤 유난히 야속하다.


다음 날은 청명했다. 우리는 길을 떠나기 위해 아침 일찍 짐을 꾸렸다. 주인 할머니에게 이본이 작은 선물을, 라스가 감사 인사를 건넸다. 나는 ‘땡큐’라고 말했다.

동쪽으로 향했다. 겨울의 알프스를 배경으로 한 보덴호를 보기는 나도 처음이다. 햇살이 좋으니, 도톰한 무릎 담요를 덮고 야외의 테라스에 앉아 평화로운 경관과 향긋한 커피를 즐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따듯한 커피가 차가운 몸을 녹이며 기분까지 나른해지는 상상을 하다 설핏 잠이 들었다. 라디오에선 알지 못할 전문가들의 대담이 한창이었다. 단조의 목소리가 자장가가 따로 없었다. 드문드문 남편과 친구의 목소리도 들렸다. 전문가 못지않은 베이스 소리.

“아…… 이 독일 사람들.”

나는 중얼거리며 다시 잠에 빠졌다.


뻑뻑해진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깼을 때, 나는 호수 한가운데 있었다. 사방에 차들이 줄과 열을 맞춰 선 것이 보였다. 우리는 모두 여객선에 실려 보덴호의 서편에서 동편으로 넘어가는 중이었다. 나는 안전띠를 풀고 황급히 차에서 내렸다. 이리저리 미로 속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나는 2층으로 올라갔다. 라스가 난간에 기댄 채로 의자에 앉아있고, 두 아이는 그의 다리 위에 하나씩 걸쳐있었다. 이본은 그 앞에 서있었다. 등을 돌리고 선 탓에 이본의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라스는 이본을 보고, 웃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하고 있었다. 아이들도 거들 말이 있는지 톤을 높여 떠들어댔다. 나는 그들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도록, 멀찍이 떨어진 곳에 앉았다. 고개를 외틀어 보덴호 너머를 바라보았다. 햇빛을 받은 알프스의 설봉이 반짝반짝 빛났다.

산란하는 빛이 가득한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그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 익숙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편안한 분위기의 사진이 핸드폰 속으로 들어왔다. 나는 멋진 사진을 남편과 친구와 공유했다. 채팅창에 덩그러니 놓인 사진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니, 부끄러워졌다. 사진을 지웠지만, 「사진이 삭제됨」이라는 흔적이 남았다.

방송이 나오자, 사람들이 차로, 갑판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라스가 멀리서 나를 보고, ‘와이피’하는 입 모양을 해 보였다. 아이들이 나에게 달려왔다. 기분이 좋아 보여, 다행이었다.

늦겨울 보덴호는 산책하고 커피와 맥주를 즐기고 따스한 햇볕을 즐기는 이들로 북적였다. 우리는 비교적 한산해 보이는 카페에 앉았다. 주위를 뛰어다니던 아이들이 내 소매를 잡아 끌었다. 도착한 곳은 길 한쪽에 놓인 팝콘을 뽑는 자판기였다. 우리는 팝콘을 하나 뽑아 들고 갈매기가 모여 있는 덱에 섰다. 난간 앞에 ‘보덴호의 생물’이라는 안내 표지판이 있었다.

「미소갈매기. 보덴호에 서식. 붉은 부리. 그 울음이 사람이 웃는 소리와 비슷해 웃는 갈매기로 불린다.」

루이가 팝콘을 든 손을 길게 뻗자 수 마리의 갈매기가 몰려들었다. 새들은 선뜻 달려들지 못하고 손끝에서 파닥거린다. 가까이, 좀 더 가까이 와봐. 엄마, 갈매기는 겁쟁이들이야. 기다림에 지친 아이들이 팝콘을 공중으로 던져주자, 소심한 갈매기들이 그제야 공중에 뜬 먹이를 낚아채 간다. 그들은 우아하거나 노련하지 않다. 새들은 찰나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여러 번 부리를 움직이고 나서야 그것을 간신히 입에 문다. 그리고 다시 주위를 맴돌이 친다. 사방엔 웃는 갈매기의 울음소리가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