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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단편소설] 어시스턴트
작성일
2021.02.01

[가작 - 단편소설 부문]


어시스턴트


황 모 과 / 일본


1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 지옥을 착실하게 견딘다. 성실한 사람만이암순응되지 않는 어둠 속에서 환하게 적응한다. 시차는 없지만 서울보다 한시간 먼저 해가 저무는 곳 도쿄. 바깥 시간이 체감되지 않았던 그 도시의 골방에서 배운 이야기다.

아침마다 만성 빈혈에 시달리고 있었다. 나는 삐걱거리는 계단을 소리 죽여 밟으며 2층 숙소에서 1층 화실로 내려왔다. 2층짜리 단독주택이라지만 땅콩집 같은 구조다. 호러 영화 속 효과음처럼 매번 계단이 삐걱거렸다.

“호민 씨, 그거 좋은 아이디어네요.”

호민 씨가 아침부터 자리에서 우산을 펼친 채, 우비를 입고 우산 안에 들어가 일하고 있었다. 우산 속에서 이어폰까지 끼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을신경 쓰지 않고 아늑하게 일에 집중할 수 있어 보였다. 그를 일부러 칭찬했다. 만화가 화실로 쓰는 다다미 여덟 장 크기 거실 겸 부엌이 세 사람이 일하기에 사무치게 좁다는 점만 무시할 수 있다면 말이다.

“야, 어깨 찔리잖아. 접어.”

호민 씨와 나보다 한 살 많은 경모 님이 신경질을 냈다. 어젯밤 선생님의히스테리 때문에 영혼이 갈기갈기 찢긴 뒤, 그의 이성에 간신히 매달려 있던 안전핀이 빠진 상태였다. 오늘 아침, 경모 님은 시한폭탄이 달린 조끼를 입고 담배를 입에 문 형국이었다. 그러자 호민 씨가 평소답지 않게 고음을 빽쏟았다.

“폭우가 온다고요!”

호민 씨의 이성이 유체이탈을 선언했다. 북향으로 난 창문을 통해서도 해가 떠오른 사실을 알 수 있는 법이다. 심신 건전한 인생과 일찍이 단교한 처지이다 보니 나는 그에게 다가가 뜨겁게 환영 인사를 건네며 포옹해 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원고를 들고 작업실로 내려온 김 선생님이 호민 씨를 보더니 깔보듯 말했다.

“호민 씨, 자기 스토리 주인공 코스프레하는 거예요? 작가가 자기 스토리에 너무 심취하면 객관성을 잃어요. 조심해요.”

호민 씨 콘티를 본 적이 있다. 콘티란 만화 원고에 착수하기 전, 장면 배치와 말 칸 및 대사를 적어놓는 만화 제작용 스토리보드를 말한다. 편집자와 함께 콘티를 보며 작업 내용을 조율한다. 그의 만화에는 비현실적인 이미지가 넘쳤다. 전반적으로 우울한 분위기가 풍풍 흘러나오는 만화였다. 김선생님은 그의 기행을 통상적인 걸로 취급했다. 독창성 예술성을 지향하는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는 마음의 병 따위 작가성이라고 거뜬히 포장될 수 있다.

나도 화실 분위기를 부드럽게 할 생각으로 한마디 보탰다.

“원래 그런 건 세상에 발표한 뒤에 팬이 해줘야 제맛이잖아요. 호민 씨가그 콘티로 신인상 받으면 제가 시상식에서 우비 보이 코스프레하고 꽃다발 건넬게요.”

그러자 호민 씨가 물 풍선 던지듯 울분을 폭발시켰다.

“도대체 다들 무슨 소릴 하는 거죠? 이렇게 비가 내리는데 원고가 다 젖잖아요!”

고슴도치 가시 같은 그의 적의가 사방에 튀었다. 경모 님이 이어폰으로귀를 틀어막았다. 선생님은 얼마 전부터 어시스턴트 셋이 빚어내고 있는 화실의 기이한 풍경을 남 일처럼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작가라면 이상한 환상을 볼 깜냥은 있어야죠. 남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보는 게 작가니까. 칭송합니다.”

그는 자기 방으로 올라가면서 나직이 말했다.

“미친놈들.”

애써 위로하려던 말이 호민 씨 마음에 가닿지 못하고 튕겨 나왔다. 일그러진 것을 보고 반듯한 것인 양 둘러댔는데, 맥없이 쪼그라들고 말았다. 민망함을 감추며 세 명은 서로 얼굴을 피했다. 아무것에도 반응하지 않겠다는듯, 조용히 이어폰을 낀 경모 님의 옆얼굴이 변변찮아 보였다. 이 아침에 소속된 세 사람이 기어이 외로운 그림자 속으로 고개를 파묻었다. 눈물이 뚝떨어졌다. 실내가 물속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호민 씨의 우산을 빌리고 싶었다.

2

10년 전, 일본에 대해 몇 가지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편견이기도 했고 기대이기도 했으며 이미 패배한 한국에서의 삶을 잊고 싶어 한국 아닌 것에 대한 막연한 긍정이기도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사전 조사가 부족했던탓에 오해한 것이었다. 시작이 반절쯤의 완성이라는 잠언을 믿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착각은 다음과 같다.

1. 최저임금을 받아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

2. 개인의 삶과 프라이버시가 보장된다.

3. 평생을 걸고 파시즘과 싸워온 양식 있는 윗물이 있다.

4. 풀뿌리 수준에서의 예술과 문학, 패러디와 제멋이 있다.

이 전제가 모두 오해였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잠언은 다음과 같이 바뀌었다.


1. 전 세계 어디서 살든 최저임금만 받아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

2. 집단과 유리된 채 프라이버시만 보장된 삶은 사회적 죽음에 가깝다.

3. 그나마 옳은 말이라도 하던 분들은 이미 돌아가셨거나 곧 돌아가실예정이다.

4. 제멋이 항상 예술인 것은 아니다.

어쨌든 자기 비하와 불합리를 삼키려다 소화불량에 걸린 삶은 10년쯤 지나니 난치병이 되고 있었다. 예술가의 자질은 아직도 꿈속에서만 생기로울뿐이었다.

딱 10년 전이었다. 한국의 중견 만화가 김 모 작가가 일본에서 만화가로새 출발한다며 도쿄 화실에서 함께 일할 동지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올렸다.우연히 공고를 본 게 인생 최대의 실수였다. 나는 자존감이 높고 이성적이고아픈 걸 못 견디는 성미라, 쇳조각 같은 불합리가 뱃속에서 염증을 일으켜도기도하며 참아내는 인간인 줄 그때는 몰랐다.

나는 스무 살이었고 김 작가는 서른 살이었다. 나이 60과 70의 노인의 차이를 구분하기는 힘들지만, 사회에서 이미 실적을 이룬 사람과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사람은 천지 차이였다. 그는 하느님처럼 보였다.

“아무 발자국이 없는 길, 가장 먼저 걷겠습니다. 그 길을 함께할 전우를찾습니다.”

그의 구인 광고 글엔 힘이 있었다. 정치가나 혁명가의 문장과 비슷했다. 나같은 평범한 소시민이 보아도 마음이 뜨거워지는 명문이었다.

“멋지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상상하며 눈부신 희망에 아득해지는 것, 그게 이야기가 가진 힘이었다. 그리고 작가는 때로 그 힘을 자기를 포장하기 위해 거침없이 휘두르곤 한다. 그땐 미처 몰랐다.

나는 마음이 뜨거워지는 바람에 그의 일본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이 무급이라는 것과 체류 비자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식사와 주거 문제 등 새록새록 샘솟는 의문점도 모두 미시적인 일로 취급하고말았다. 공고를 작성한 자의 의도대로였다.

당시 나는 보습 학원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며 아껴 모은 돈으로 일본 어학연수를 떠나려 준비 중이었다. 나는 그에게 메일을 보냈다. 도쿄에서 어학원을 다니면서 그의 사무실에서 어시스턴트로 일하고 싶다고, 오전 시간에는 학업 때문에 근무하진 못하지만, 꼭 받아달라고 사정했다. 만화가가 되는 건 고등학교 시절부터 품었던 꿈이었다. 메일을 쓰며 나는 그 어떤 고생도 각오했다.

그리고 면접을 보러 간 날, 하느님처럼 보이던 그는 묵시록 보여 주듯 자신의 원고를 보여 줬다. 그러더니 말했다.

“내 선에는 조금 특별한 능력이 있어요. 약간의 트릭이지요. 선의 강약과사람의 시선을 연구했어요. 페이지에서 가장 도드라지게 보이는 메인 선에시선의 흐름을 계산해 넣는 거예요. 사람들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유도하는기술입니다. 유리 씨가 나와 함께 딱 1년만 동지로 일한다면 스스로 터득하게 될 거에요.”

그의 원고는 엄청나게 밀도가 높았다. 독자들은 땅바닥을 파듯 ‘들이판’원고라고 표현하곤 했는데, 선의 개수만 세어봐도 도대체 공들인 시간이 짐작 가지 않을 정도였다.

트릭을 이야기하는 그의 말은 허풍임이 분명했지만, 매력적인 거짓말이었다. 하느님인지 마법사인지 그의 등 뒤를 아우라가 에워싸는 것 같았다.

“서브리미널인가요?”

나의 물음에 그는 대답 없이 빙긋 웃었다. 애매한 미소는 그를 신비하게만들었고 그 미소는 10년의 내 삶까지 바보로 만들고 말았다.

3

도쿄 다이토구에서 보낸 첫 3개월은 아주 바빴다. 낯선 곳에서 완벽하게문맹이 되었다. 눈앞에 간판을 보고도 정보를 인지하지 못했다. 현지인의 당연지사 앞에서 몰상식한 존재가 되자 신분마저 격하된 기분이었다. 한국에서 살 때도 존중받는 삶은 아니었지만, 일본인들이 아시아인들을 바라보는시선에는 조금 당황했다. 일본인은 예의 바른 줄로만 알았는데 예상치 못했던 각종 멸시 속에서 지냈다. 외국어는 현지에서 차근차근 배우면 된다고 여겼고 밑바닥을 경험하는 것도 작가로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첫 한 달을 더럽고 좁고 비싼 기숙사에서 머물렀다. 그다음엔 다다미 넉 장 반 크기의 방(약 2.25평)에서 다른 유학생과 함께 지냈다. 노숙자가 아닌 게 어디냐고 생각했다. 이 정도 고난은 어릴 때 봤던 위인전에선 한두 줄 묘사에 불과한 광경이라 여겼다.

당시 호민 씨와 경민 님은 상황이 더 나빴다. 입국 후 사업자등록을 낸뒤 노동 비자를 처리해 주겠다는 김 작가의 말만 믿고 관광 비자로 입국했다. 하지만, 3개월마다 한 번씩 한국에 다녀와야 했다. 자격 외 노동, 즉 불법 노동이었고 그들의 여행에는 강제 추방 리스크가 항상 따라다녔다. 법적으로 우리의 업무는 노동이 아니라 교육(문하생)이었기에 김 작가 입장에선위법 행위는 아니었다. 그 덕에 구두로 약속되었던 체류 보장 등은 깡그리무시되었고, 두 사람은 비자 때문에 김 작가의 작업실 밖을 벗어나는 것 자체를 상상하지 못하게 되었다. 수익이 없기에 외출도 삼갔고 결국, 작업실은세계의 전부가 되어버렸다.

내겐 1년짜리 취학 비자(학생 비자 전 단계이며 자격 외 활동 허가라는 이름으로 주 28시간의 아르바이트 수입이 허용된다)가 있었고 1년 후에는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취득했기 때문에 호민 씨, 경민 님보다는 자유로울 수있었다. 비자에 관심 없는 고용주인 김 작가 화실에서 일할 때 이건 정말 중요한 문제였다. 하지만 나도 둘과 똑같이 김 작가의 골방에 머물렀다. 부득이함보다 자발성이 더 부끄러운 선택이 되기도 한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김 작가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보수를 일절 지급하지 않았다. 우리에게당연한 권리였던 거주(집단생활)를 보장했다는 것과 부실한 식사, 그러니까숙식 제공이란 경비가 김 작가에게는 우리에게 이미 지급한 월급이었다. 경제적으로 나락에 떨어지는 것은 순간이었다. 정서적 고립도 심각했다. 그보다 매일 닥치는 절실한 문제는 배고픔이었다.

호민 씨가 몰래 감춰둔 초코바를 경모 님이 훔쳐 먹은 게 들통난 이후로,둘은 말도 섞지 않았다. 초코바를 숨겨 놓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도 호민씨에게 정말 어마어마한 배신감을 느꼈다.

미식 문화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 중 하나인 일본에 와서 배고픔에시달리다니. 한국에서 살 때, 나는 먹는 것을 찾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떡볶이 김밥 컵밥 같은 것으로 때웠다. 양질의 식사를 스스로 해결하는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그나마 한국에선 엄마의 김치가 있었고 값싼 식사가 있었다. 안일했던 습관 때문에 뒤늦게 도쿄 한복판에서 무인도 서바이벌 같은생존법을 체득해야 했다. 한국의 친구에게 연락해 몇 번 송금도 받았다. 돈이 들어오면 싸구려 ‘하나마루’ 우동 곱빼기를 허겁지겁 먹었고, 배가 부르고 난 뒤에야 내 신세가 처량해 울었다. 식욕이 없다는 표현을 지금도 싫어한다. 굶어본 사람은 절대로 말하지 않는 표현이다.

2년 동안 나는 만화 원고에 톤만 붙였다. 선은 만지지도 못했다. 김 작가가 말했던 서브리미널 효과를 일으키는 선의 정체는 영영 알 수 없었다.

배고픔과 함께 견딜 수 없는 건 그의 폭언이었다. 그는 말로 상대를 폭행했다. 무례하고 폭압적이었다.

그는 프로 선배로서 우리의 스토리를 봐주었고, 그때마다 문하생들의작업물과 인생을 싸잡아 모욕했다. 그게 그에겐 지독한 희열을 주는 것 같았다.

“내가 이런 내용을 몇 개나 봤을 것 같아? 넌 네가 무척 특별하다고 착각하며 살아왔겠지. 그러니 자기가 싸놓은 똥을 보고도 특별한 똥이라고 말하는 거야.”

나는 울지 않으려고 간신히 버텼다.

내 스토리에 더 확신이 있었다면, 반박할 용기가 있었다면, 베테랑을 놀라게 할 재능이 있었다면, 내 몫의 식사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었다면. 그가함부로 처박은 진흙탕 속에서 와신상담이라는 사자성어를 떠올리지 않아도되었을 텐데. 모멸감을 지우기 위해 나는 그의 말을 진짜로 만들겠다고, 내똥을 특별하게 빛나는 똥으로 만들겠다고 각오했다.

달도 없는 밤, 창문 없는 방에선 아침이 밝아오는지 알 수 없었다. 참지말고 뛰쳐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아침 해처럼 떠오르려 했지만, 나는 애써 뜨지 못하게 했다. 우는 소리, 코 푸는 소리가 새어나갈까 봐 벽장에 들어가 얼굴을 파묻었다. 방 밖 복도에서 조용히 계단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언제든 나는 떠날 수 있다. 나는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다. 그 건강한 혼잣말이 노예 증후군의 시작이 되었다.

4

마감 직전, 김 작가는 배고픈 좀비처럼 물어뜯을 것을 찾아다니며 폭언을쏟았다. 어처구니없게도, 마감 전에 예민해지는 자신의 태도를 두고 그는 오히려 프로답다고 여겼다. 격주간지에 작품을 연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 달에 두 번, 우리는 그의 롤러코스터 위에서 생명 벨트도 없이 추락해야 했다.

내게는 못생겼다거나 섹스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우롱이 공공연했다. 느닷없는 폭언에 무너지는 마음을 애써 수습하며 무뎌지는 방법을 익혔다. 김작가가 선호하는 AV 얘기에도 농담하며 맞장구를 칠 정도로 공허한 깜냥만 늘어갔다.

학교 선생님이 날짜에 맞춰 대충 주번 정하듯, 그의 폭언은 폭탄 돌리기처럼 랜덤하게 먹잇감을 간택했다. 세 명의 어시스턴트들은 매일 사형수처럼초조하게 그 날의 형 집행 선고를 기다렸다. 어느 날 호민 씨가 미세먼지만큼 고운 가루가 되도록 그의 맷돌 같은 혀에 짓찧기였다. 당혹스럽게도 그순간 그는 나를 피자 도우처럼 공중에 띄웠다. 얼마 후 내가 슬래셔 영화의엑스트라처럼 난도질당했다. 그 순간 경민 님이 그의 면도칼 같은 입술 위에서 찬사를 들었다.

그가 우리 콘티를 인질로 삼지 않았다면 조금 더 빨리 모욕을 떨쳤을지도모른다. 그는 우리 콘티를 전문 번역자에게 맡겨 일어로 번역해 담당 편집자에게 넘겼다고 말했다. 나 같은 아마추어가 직접 실행하려면 월급 이상의 비용이 드는 일이었다. 나는 평생 남의 눈치 따위 보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점점 그의 비위를 맞추게 됐다. 처음엔, 먹지도 않을 거면서 재미로 쥐를 사냥하는 고양이의 잠을 깨우지 않으려는 마음이었고, 다음엔 인질로 잡힌 딸의생사 때문에 범인에게 사정하는 엄마의 마음이었다. 폭군에게 아부하는 간신도 볼모 잡힌 게 있었겠다 싶었다. 오로지 그를 통해 작가로 데뷔할 수 있다는 희망이 우리를 부조리극의 배우로 살게 했다.

산소 없는 행성에서 기우제 지내듯 하염없이 무릎 꿇고 기다렸다. 일본 편집자의 피드백은 매번 한두 달이 걸리며, 월간지의 특징상 한 달에 한 번 있는 편집회의에 올려야 하는데, 타이밍이 안 맞으면 석 달도 기다려야 한다는 게 김 작가의 설명이었다.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그는 그게 싫으면번역도 통역도 없는 상태로 발품을 팔아보라고 말했다. 부도덕한 브로커들이 우글거릴 거라고 했다. 인터넷에 공개된 편집부 전화번호로 전화를 해봐야 권한도 없는 신인 편집자가 만나러 나와 교육받은 것을 앵무새처럼 읊다돌려보낸다는 이야기도 들려줬다. 현실적인 이야기였다. 혼자 도전할 용기가없었다기보단, 김 작가가 이미 닦아놓은 고속도로에 올라타는 것이 가장 빠르고 현명한 길로 느껴졌다. 그가 우리 콘티를 자기 서랍에만 넣어둔 채 우리를 기만했다면 다 소용없는 일이지만.

대본도 엔딩도 모른 채, 우리는 주어진 역할극을 연기했다. 세 어시스턴트들은 그가 만든 무대 위에서 꽤 괜찮은 배우들이었다.

가끔 우리 콘티를 추켜세운 것도 그의 의도였다. 김 작가의 모든 행동이자발적 복종을 초래한 건 나중에야 깨닫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안 즈음, 우리는 각자 깊은 좌절에 빠져있었고, 셋은 서로를 너무나 경멸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 티브이 속 불행한 사람을 보며 ‘어떻게 저러고 사니’라며 혀를차지 않는다. 지옥 불 속에서 사이비 과학을 굳게 신앙하고 있는 사람도 나름의 이유는 있다는 걸 실감했으니까.

그 당시, 어둠의 심연 속에 내 머리를 처박고 천천히 나를 고문했던 것들은 실은 아주 아름다운 말들이었다. 준비, 학습, 집중, 겸손, 인내, 고통 속에 싹틔우는 창작열… 매일 다이어리에 필사하고 싶은 것들이었다. 창작이놀다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전혀 거짓말은 아니지만,누군가가 다른 이의 노동과 열정과 선의를 악용하기 위해 언급된 말이라면,그것은 창작의 씨앗이 아니다. 그냥 사기의 구실이다.

작업실 상황이 밖에 알려질 리 없는 김 작가는 여유롭게 한국과 일본에서꽤 승승장구했다. 출판사에서 주최한 연말 파티에 다녀온 뒤 유명한 일본작가와 나란히 사진도 찍었다. 그 사진은 대단히 효과적인, 권력 과시의 도구가 되었다. 그의 SNS엔 민족주의자들이 따라다녔다. 그는 자신의 활동을한국인의 저력이라 외쳤고 댓글을 다는 사람은 한국 사람이라는 동질감에자랑스러워했다. 그날 이후, 나는 해외에서 성공한 사람과 같은 국적이라서덩달아 으쓱해지는 마음은 품지 않게 됐다.

2년이 흘렀고 김 작가는 한 번도 관심을 보인 적 없는 비자 취득을 위해무언가 해야 했다. 사무실을 나가겠다고 말했다. 그날부터 싸늘한 고드름이머리 위로 쏟아졌다. 내가 밖에서 그를 험담할까 두려웠던 모양이었다. 조금이라도 작업실에서의 일화를 언급할 경우, 어떤 보복이 가해질지 그의 세 치혀 위에서 아포칼립스적 예언이 널뛰었다.

“지옥은 중도 포기한 놈들이 자기 인생을 환불해 달라고 아우성치는 곳이지.”

그의 근사한 말은 정확하게 나의 자괴감을 증폭시켰다.

얼마 안 있어, 호민 씨와 경모 님은 입국 심사 중 잦은 관광 비자 갱신이발각되어 공항에서 추방당했다. 향후 일본에서 활동할 기회까지 박탈당한셈이었는데 둘은 그저 뒤돌아보고 싶지 않다며 기운 빠진 목소리로 시원해했다. 2년 만에 팀이 해체된 뒤, 그가 새로운 어린양 세 명을 모아 비겁한 패턴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나는 귀를 막았다.

5

운 좋게 나는 일본인 만화가 사무실로 전직했다. 처음으로 150만 원 수준의 월급을 받고 감격했다. 1년짜리 비자를 받아 매년 갱신할 수 있었고 여전히 빈곤했지만 김 작가 사무실에서 받았던 모멸과 모욕은 꿈에서만 만나게됐다. 그 모멸을 떨치는 데에 또 다른 수년이 세 배 네 배로 필요하단 걸 알았다면 견뎌선 안 되는 거였다.

김 작가 사무실보단 조금 낫다고 할 수도 있지만, 만화가 어시스턴트라는 직업 자체가 전위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꿈을 좇는 사람들의 세계, 꿈을말하지 않으면 추방되는 세계였다. 미묘한 불확실성 아래에서 모두가 고된노동을 감내는 세계. 계약서보다 자기 암시와 잠언이 지배하는 세계였다. 꿈따위 이야기하지 말고 비종교적으로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새록새록 커갔다.

나를 비롯해 화실에서 만났던 사람들, 그중에서도 오래 일을 지속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선생님’이라 불릴 미래를 꿈꿨던 늙은 드리머(dreamer)다. 데뷔하지 못한 채 창작 현장에 붙박여 사는 불법 체류자 같은 존재였다. 다른 생계 수단을 갖추지 못해 업계에서 추방될 것을 두려워하는 난민 같았다. 타국에서 노동하는 우리는 관광객과는 신분이 다르다. 어느 나라 어느 장소에 있다 해도 노동을 돈으로 바꾸지 않으면서 편안히 자족하는 삶은 상상할 수 없는 존재니까. 몸뚱이가 유일한 자원인 노예선 탑승자니까.

짧은 업무 일수에 집중된 철야 작업이 마감이라는 시계 위에서 회전했다.적은 수입으로 생계를 면피해야 했다. 한 달 단위 생계는 서울의 2호선처럼,도쿄의 ‘야마노테 선’처럼 국적 불문 순환했다. 평형감각을 잃은 삶의 달팽이관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어지럼증만 일으켰다. 한국을 떠났던 즈음, 내가 꿈에 그렸던 미래는 피가 흥건한 참치 해체 쇼처럼 선연했다. 지금 내 꿈은 참치 캔 속 고인 기름처럼 탁하기만 하다.

하지만 과거를 회상하기엔 일렀다. 아직 할 일이 남아있었다.

김 작가의 화실을 나와 체류 3년 차부터 출판사를 직접 찾아다녔다. ‘모치코미’라고 부르는데, 자기 원고를 들고 가 출판사에 개별 영업을 하는 일이다. 편집자들의 냉대는 우아해서 더 교묘했다. 실제로 편집자를 직접 만나보니 김 작가의 말이 완전 거짓말은 아니었다. 권한 없는 신인 편집자들은 자신의 독해력을 자랑하며 악담만 쏟고 돌려보냈다. 대등하게 이야기를나눴던 편집자를 딱 한 명 만났는데, 편집회의 후에 거절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회사에서 잘릴 날이 다가오자 온몸이 가려워지는 이야기, 지구 밖 행성에서 만난 외계인과 소통이 안 되는 이야기 등, 36페이지에 기승전결을 계산해구겨 넣은 단편 스토리는 초라하게 식어갔다. 단 한 번도 발표할 지면을 얻지 못했다.

“너무 평이해요. 그림도 개성이 없고. 우리는 팔리는 이야기를 찾고 있어요. ‘원피스’ 알죠?”

내 삶은 예측 불가한데, 내가 만든 스토리는 너무 뻔해 예측 가능한 게 문제였다.

실력을 높여야 했고, 영업 활로도 찾아야 했다. 브로커들을 통해 원고를보내기도 했다. 이즈음, 현지 매니지먼트 업계도 엿봤다. 재일 동포 모 씨가일어를 못 하고 디테일을 잘 챙기지 않는 순진한 한국 작가의 원고료를 가로챘다는 소문도 들었다. 대량으로 작품을 찍어내야 하는 신생 잡지가 한국작가를 찾는다는 소문을 듣고 노크하기도 했다. 편집부의 하청 업체인 디자인 회사 사장은 직접 만나보니 지독한 혐한주의자였다. 그즈음 웹툰이 급성장해 일본 시장 진출을 노리던 한국 작가들이 모두 귀국했다. 매니지먼트담당자들도 다른 업계로 이동했다. 나는 남겨졌다. 비루한 청춘의 일시적인배경이라 여겼던 밑바닥 인생은 내 삶의 단단한 배후가 되었다.

날이 갈수록 남의 나라에 와서까지 점점 도태되는 맛만 봤다. 만화를 찍어내는 소프트웨어가 그려내는 인물이 내 그림보다 훨씬 좋았다. 번역기 성능이 날로 향상해 10년 거주자인 나보다 번역 품질이 월등했다. 소설 쓰는AI가 만든 글을 읽어보니 인간의 퇴보, 아니 창작자의 소멸이 예감됐다. 매체 자체는 더욱 젊어지고 상업화되었고 젊고 보수적인 독자에 맞춰 더욱 선정성을 띠고 있었다. 나는 나이만 먹고 아무 실적도 내지 못했다. 놓친 게 너무 많다는 억울함만 세월만큼 쌓였다. 나처럼 재능 없는 사람은 어느 나라에 살았더라도, 어떤 업계에 몸담았더라도 실패했을 거라는 자괴감이 따라다녔다. 양질의 식사를 스스로 해결하는 능력은 아직도 갖추지 못했다. 삶의의욕이 없자 식욕도 없어졌다. 피부병이 늘 따라다녔다.

나는 그동안 만들었던 콘티와 원고를 상자에 넣어 벽장 깊은 곳에 구겨넣었다. 일본 체류 10년 차, 창작을 내 삶과 관계없는 과거로 떠나보내며 혼자 송별회를 했다.

그 후 만화가 화실을 떠났고 파견 회사에 등록했다. 게임 회사에서 일한번역 일과 웹 이벤트 기획 일을 시작했다. 인생을 걸 업무가 아니다 보니 부담이 없었고 월급은 훨씬 올랐다. 온몸을 덮었던 피부병도 점점 가라앉았다.거울을 보고 조금 꾸밀 때마다 김 작가가 나를 보고 성적 매력이 없다고 말한 것을 떠올리는 횟수도 조금씩 줄여 나갔다.

점심시간엔 신주쿠 오피스 건물 사이 공원에서 점심을 먹었고 퇴근길에태국 요릿집에 들러 동료와 회사 사람을 욕하며 수다를 떨었다. 보증금을모았고, 동물을 키울 수 있는 대신 보증금 및 사례금이 두 배가 드는 월세원룸으로 이사했다. 고양이 보호 단체에 들러 쥐처럼 못생겼지만, 성격은 강아지처럼 까불거리는 까만 고양이를 한 마리 입양했다. 만화는 읽지 않게되었고 꿈을 좇는 이야기에 감동하지 않게 되었으며, 시시하고 뻔한 얘기에 잘 울던 습관도 버렸다.

근근한 하루살이가 모였을 뿐인데 10년 넘는 시간을 훌쩍 이루었다. 별혜택도 없는 포인트를 차곡차곡 적립한 기분으로 영주권을 받았다. 영구한거주 허가. 영원히 익숙해지지 않는 타국에서 앞으로도 영구히 하루살이가이어질 거였다. 10년쯤 지나면 대성공까진 아닐지라도, 적어도 목표했던 삶의길 한복판일 거라 믿었는데,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 퇴근길 한복판 지하철 인파 속에 서서 상심한 마음을 나직한 한숨으로 바꿔 토해냈다.

어떤 직업을 갖든, 어느 나라에 살든,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건 너무 큰 욕심이었을까. 모국어도, 감수성도 통하지 않는 남의나라에서 무언가 새로운 삶을 꿈꾼 게 부주의했던 걸까. 명쾌한 답 대신, 웅덩이에서 수영하는 법을 배워갔다.

6

호민 씨가 도쿄로 관광을 온다고 메시지를 주었다. 담담하게 근황을 물을 정도로 우리 상처는 아물어 있었다.

호민 씨는 김 작가보다는 상식적이지만 괴짜로 유명한 한국 만화가를 견디며 서울에서 어시스턴트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경모 님은 피규어 도매업자로 변신했는데 김 작가처럼 성질이 더러워졌다고 한다. 호민 씨가 채팅창에 얼굴을 잔뜩 찡그린 스티커를 날리며 전했다. 김 작가는 그 후로도 승승장구한 모양이었다. 최근 그의 신작은 일본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 공중파를 탔다.

“어디 가고 싶어?

”옛 친구를 위해 주말을 모두 사용하기로 했다.

“흉가 체험이라고 알아? 거기 가보고 싶어. 나 옛날부터 일본 호러 좋아했거든.”

호민 씨가 유튜브에서 봤다며 폐건물에서 공포 체험을 하는 곳에 가보고싶다고 말했다. 별것 아닌 걸 상품으로 만드는 일본 문화에 혀를 내둘렀다.만화가 화실에서 모욕당한 공포 체험은 차마 엔터테인먼트가 되지 못하는데말이다.

호민 씨와 오랜만에 만나니 마냥 반가웠다. 서로가 초라해 애처롭던 마음도 사라지고 없었다. 그도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지 않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신주쿠에서 지하철을 타고 20분쯤 이동했다. 도심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곳인데 급격히 시골 냄새가 풍기는 동네에 내렸다. 우리는 역에서 흉가 체험가이드를 만나 해당 장소까지 걸어갔다.

“공포 부동산 나가모토라고 합니다. 오늘 내람하실 물건은 ‘이유 있는’집이라 상당히 월세가 쌉니다. 고려하시고 둘러보십시오.”

가이드가 건조하게 말했다. ‘공포 부동산’이라는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면 진짜 부동산 업자로 착각할 뻔했다. 가이드는 능숙한 연기자인지, 정말부동산 업자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지난 10년간 나도 그랬다. 작가 지망생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작가라면 으레 그래야 하는 애티튜드를 연기했는데, 연기하다 보니 이미 그 존재가 된 것 같은 착각 속에 살았다.

이 체험에는 설정이 있었다. 체험 안내 가이드는 부동산 업자였고 방문하게 될 집은 살인 사건이 벌어진 흉물이라 집값이 폭락했다는 설정을 옷 입고있었다. 인터넷 예약 사이트에서 봤던 설명에 의하면 부동산 업자는 집에 도착한 뒤 원 집주인에게 살해당할 예정이었다. 웹 사이트엔 그의 연기에 놀라지 말라는 주의사항이 빨간 글씨로 크게 적혀 있었다.

“야, 잠시 후에 이 사람 죽는대.”

호민 씨가 웃었다. 나는 호민 씨가 평범하게 웃는 얼굴을 보니 좋았다.

“우리 이 사람의 미래를 알고 있는 거잖아. 왠지 불쌍하다.”

어쩐지 저승사자가 된 기분이었다. 시간 여행을 와서 미래를 아는 것 같은기분도 들었다. 우리 인생도 이 체험처럼 누가 예고 좀 해줬으면 좋았을걸.

“근데 이 사람 진짜 쓰러질 때 우리 어떡해야 해? 구급차 안 부르는 게양심에 찔리지 않을까?”

“짜고 하는 건데 그렇게 애매한 연출을 하겠어?”

우리가 한국어로 이야기하는 사이, 천천히 30분을 걸어 흉가에 도착했다.분위기를 잡으려는 건지 일부러 숲이 우거진 한적하고 스산한 신사를 통과했고 인적이 드문 골목도 걸었다. 우연히 까마귀 시체를 보았는데 연출인지 실제인지 애매했다. 멀리서 누군가의 웃음 섞인 비명도 들렸다. 그것도 이흉가 체험 이벤트 회사가 어딘가에 스피커를 틀어놓은 건지, 아니면 진짜 비명인지 알쏭달쏭했다.

마침 내리기 시작한 비가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호민 씨가 우산을 갖고 있지 않아서 우리는 같은 우산 속에 들어갔다. 비가 점점 더 거세져 폭우가 되고 있었다.

호민 씨가 가방을 가슴 앞으로 돌려 끌어안았다. 원고가 들어있나 싶어,피식 웃음이 나왔다. 우리를 한없이 절망에 잠기게 했던 갑작스러운 인생의폭우도 지나갔다. 10년 전 작업실에서 그가 만난 비를 막아주지 못한 게 이제야 미안해졌다. 그때 내 인생의 우산은 너무 너덜너덜했다. 어딘가 김 작가의 만행을 고발하는 글이라도 올릴걸. 그 이후에 우리의 전철을 밟았을 새로운 희생양들에게도 미안할 따름이었다.

대낮이라는 걸 잊을 정도로 흉가는 어둠침침했다. 빗소리 때문에 분위기는 더욱 고조됐다.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집 안을 둘러봤다. 김 작가 화실로쓰던 집과 묘하게 비슷한 구조였다. 좁고 삐걱거리는 계단을 올랐을 때 나는 김 작가가 작업실로 내려오던 소리를 떠올렸다.

그리고, 우리가 2층에 올라선 순간이었다. 등 뒤, 1층에 머물렀던 가이드가 비명을 질렀다.

“으악!”

나는 호민 씨의 얼굴을 바라봤다.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소름 끼치는 비명이었다. 덜컥 겁이 났다. 저 비명은 정말 연기일까?

“어떡해! 내려가 봐야 하는 거 아냐?”

“흉가 들어온 이후 연출에 대해선 사이트에 언급 없어?”

“없어.”

눈 딱 감고 흉가 이벤트를 즐기는 게 입장권 5천 엔을 구매한 자의 태도였으나, 나는 돈 낸 것도 잊고 겁먹고 말았다. 그때, 가이드의 목소리가 아닌낯선 중년 남자의 호령 소리가 들렸다.

“누구야! 누가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온 거야!”

창문에 창살이 없었다면 그대로 뛰어내렸을 것이다. 도망칠 곳을 찾다가허둥지둥 벽장으로 들어갔다. 여유롭게 웃던 호민 씨도 내가 겁먹은 것을 보고 조금 당황한 표정을 보였다.

“어떡해, 무서워!”

벽장 안에서 호민 씨의 팔을 잡았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세게 꽉 잡았고 호민 씨가 아프다는 말도 없이 내 어깨를 살짝 끌어안았다.

끼익 끼익, 계단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2층으로 뛰어 올라오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나와! 다 죽여버리겠어!”

나는 호민 씨 귀에 속삭였다.

“진짜 같아. 무서워!”

“다 연기야. 짜고 치는 거야. 돈 냈잖아.”

호민 씨의 목소리도 조금 떨렸다.

나는 그만 벽장 속에서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흑흑, 호민 씨. 이거 무서워.”

드르륵, 벽장문이 거칠게 열렸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미친놈들!”

다 허물어진 흉가를 자기 세계 삼고 있는 남자. 당당히 돈 낸 소비자를 침입자로 취급하는 억센 남자. 남자를 보자마자 나는 그만 큰소리로 외치고말았다.

“하지 마세요! 연기라고 해도 그만 하세요! 나갈래요! 엉엉엉!”

너무 크게 우는 바람에 놀랐는지, 살인자를 연기했던 아저씨가 목소리 톤을 바꾸었다.

“알았어요. 그만할게요. 이제 나오세요.”

부동산 업자 역을 하던 연기자도 심장께에 칼에 찔린 소품을 매달고 2층으로 올라왔다. 연기자가 머리를 긁으며 사무적으로 말했다.

“중도에 포기해도 환불 안 돼요.”

우리는 두 사람이 끓여준 녹차도 사양하고 밖으로 나왔다. 비는 그쳐 있었다.

그제야 안심이 됐다. 역으로 돌아오는 길, 뒤늦게 민망함이 몰려왔고 호민 씨도 웃었다.

“미안해. 돈도 5만 원씩이나 냈는데.”

“아냐, 진짜 리얼했어. 나도 중간에 좀 철렁하더라고. 하여튼, 일본 사람들 이상한 데에 디테일이 강하다니까.”

용의주도하게 준비한 스토리로 독자를 끌고 와서 보기 좋게 뒤통수를 치는 것, 독자의 시선의 흐름까지 계산하는 마법, 10년간 창작 업계에 몸담고도터득하지 못했다. 그리곤 누군가가 준비한 트릭 앞에서 속수무책 무너졌다.

작가가 되지 못한 이유를 오늘 증명한 것만 같아서 부끄러웠다.

우리는 역 근처 390엔 균일 안주 체인 술집에서 술을 마셨다. 호민 씨는내일 아침에 서울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앞으로도 일본에서 계속 살 거야? 만화 일은 더 안 할 거야?”

당연히 답이 준비되어 있어야 할 질문인데 아무것도 답할 수 없었다.

어떻게 사는가 하는 문제에 답할 수 없기에 어디서 살지를 고민한다. 사는 곳에 따라 삶의 방식도 정해지곤 하니까. 한국에서 살면 주택 부금 같은걸 고민하고 일본에서 살면 월세를 고민하는 거다. 어디서 사느냐가 어떻게사는가를 규정하는 건 아닐까. 삶에 어떻게 임해야 할지 모르니까 직업을 갖는 건 아닐까. 만화가로 사는 삶과 만화를 즐겨 읽는 직장인으로 사는 삶은그래서 완전히 다른 것 아닐까. 자신의 개성이 뭔지 말할 수 없으니 서로 국적이 뭐냐고 ‘웨얼 아 유 프롬’을 묻는 건 아닐까.

성공한 후일담이 아닌 실패의 맛, 현재 진행형인 실패의 맛은 지독하다. 390엔짜리 안주로는 텁텁함이 가시지 않았다. 10년이 지났는데도 그의 삶을 뜨겁게 안아주지 못했다. 고장 난 사람끼리는 가끔 만나는 게 낫다. 그래도 벽장에서 그가 어깨를 안아줬을 때, 살인자를 연기한 사람에게 그러지 말라고 내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환불은 안 되지만 후회는 남지 않았다.

7

꿈을 품었던 세상은 애매한 환상과 폭력, 자기 합리화의 색깔로 도배되었다. 나는 꿈을 품은 모든 이가 성공하는 건 아니라는 단순한 사실을 인정한뒤, 리얼한 세상으로 넘어왔다. 그러자 리얼한 세상이 때때로 더 환상적인색채로 도배되는 걸 보았다.

도쿄에 머물고 있던 사이, 후쿠시마가 쓰나미와 원전으로 처참한 고통에잠겼다. 서둘러 봉합하려는 듯 원주민들의 귀환이 떠밀듯 집행되었다. 쓰나미로 돌아가신 피해자보다 그 이후 재난 자살자들의 숫자가 사망자 그래프를 추월했다. 수상한 혐오가 일상적으로 만연했다. 신주쿠 거리 한복판엔 매일 밤낮 타자에 대한 증오가 전시되었다. 일본인은 지적이고 예의 바른 선진국의 지성인이라 믿었는데, 독재자를 계속 소환해 낸 결과 자신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줄도 모른 채 거리에서 쓰러졌다. 절망마저 썩어 괴멸해 가는 한사회의 후퇴를 보았다. 불만이 있으면 떠나라며 선진국 국민들은 예의를 갖춰 비국민의 따귀를 때렸다. 심지어 귀화한 일본인에게도 ‘웨얼 아 유 프롬’을 물어 혈통까지 확인했다.

그 사이 한국에선, 꼼꼼하게 국고를 털어 세금을 자기 주머니로 옮긴 사기꾼과, 젊은이들에게 중동으로, 해외로 가라더니 애들을 수장시킨 무책임한 가짜 엄마가 한 시대를 거덜냈다. 그 후, 겨울 광장을 수백만 촛불로 뒤덮은 환상적 민주주의도 펼쳐졌다.

특수성을 강조하다가 섬나라 민족성만 핑계 대던 자발적 갈라파고스 일본. 격정과 집단 지성 사이를 유유히 널뛰기하는 한국. 두 나라에 판타지 빛폭우가 쏟아지는 걸 보았다.

나는 어리석은 삶을 내 삶으로 직접 살아본 적이 있어서 어리석은 세상을흉보진 않았다. 나는 바보 같은 세상을 나 자신을 연민하듯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 딱히 소속된 곳이 없어 목소리를 내기도 애매했다. 외국에 사는건 미지근한 달관을 세 끼 식사처럼 퍼먹는 일일지도 모른다.

엄마 칠순 잔치 때문에 서울에 다녀왔다. 여행객처럼 서울에 들러 엄마가호스트인 에어비앤비 숙소에서 머물다가 하네다 공항으로 돌아왔다. 기다리던 사람들이 누군가를 환영하고 도착한 사람이 따듯하게 환영받는 풍경을바라봤다. 사진을 찍어 재회를 기념하는 모습 사이로 홀로 빠져나왔다. 내가 착륙한 지루한 이곳은 여전히 누군가의 일생일대의 여행지이며 꿈을 품고 있는 미래다. 아직 내 여행은 도착하지 않았고, 평생 정착할 곳도 결심하지 않았기에, 이곳은 내게도 여전히 유효한 경유지다.

까만 고양이 한 마리와 지내고 있는 작은 원룸 같은 하찮은 것만 남았다.

일본이 아니었더라도, 어떤 분야에서 10년 동안 인생을 버텼다면 자연히 따라왔을 소소한 보상일지도 모르지만, 잘 견딘 덕에 타인의 모욕을 헤치고나를 지킨 무탈한 하루를 선물 받았다고 생각했다.

여행을 떠나는 순간, 종착역에서 만날 풍경을 그린다. 낯선 곳에서 처음보는 사람과 사랑에 빠질지도 모른다. 새로운 이웃이, 익숙하지 않은 문화가 내게 선사해 줄 위로와 깨달음이 있겠지. 메모리를 빵빵하게 채울 사진과다이어리에 적을 감상, 산뜻한 해시태그를 기대하니 다시 가슴이 뛰었다.

막상 도착지에 와보니 중요한 발견은 경유지에 존재했던 것 같다. 어딘가 다른 공항을 경유할 정도로 멀지 않은 서울과 도쿄, 두 도시를 오가며 깨달았다.

무심코 놓친 많은 것들을 경유지에 흘리고 왔다는 것을, 어쩌면 공중에 흩어지고 말았다는 것을, 다만 내 삶으로 그곳을 통과해 왔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