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Main page
  2. 재외동포 광장
  3. 재외동포문학
  4. 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단편소설] 내가 차버린 공
작성일
2021.02.01

[가작 - 단편소설 부문]


내가 차버린 공


리 동 렬 / 중국


방 출입문은 고급스러운 향나무로 제작했다. 문 안쪽 중앙 상단에는 연꼴 사각형 사진 액자를 걸어놓아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흔들거렸다. 내가대여섯 살 나던 해에 아빠와 함께 찍은 흑백사진이 그 속에서 희미하게 웃고 있다. 사십 대 후반의 아빠는 내 방을 드나들 때마다 그 사진을 보며 살집 좋은 얼굴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 사진은 네가 유치원에 입학하던날 기념으로 남긴 것이다.’ 이튿날 아빤 한국 왔고, 내가 일부러 흑백사진으로 남겼지. 오랜 세월을 보낸 사진처럼 소중히 남기고 싶어서. 아빠가 신나게 설명을 했다.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동화 같은 얘기를 하나 보다.

아빠는 2년 전에 공사 현장에서 일하다가 부러뜨린 앞니 두 대를 임플란트로 대체했다. 나를 볼 때마다 뭔가 은근히 바라는 것 같은 눈길이 솔직히부담스럽다. 그게 뭔가를 알 것 같기도 하고 딱히 모를 것 같기도 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 가짜 이빨에 저도 모르게 눈길이 갔다. 가짜가 진짜보다좋아 보였다. 한국은 돈만 쓰면 얼굴뿐만 아니라 몸뚱어리의 어떤 부위라도뜯어고칠 수 있다고, 진짜보다 더 예쁘게 성형할 수 있단다.

노크 소리도 없이 방문이 열렸다. 나는 이상한 동작을 연출하다가 멈추고는 화를 내려고 했다. 아빠의 흰 이가 보였다. 임플란트 가짜 이빨. 아빠의발이 내 엉덩이에 올라왔다가 미끄러져 내렸다. 둔탁한 느낌이다. 아빠는 말대신 발을 자주 사용했다. 어릴 적부터 축구를 좋아해서 생긴 버릇이란다.

연초에 중국에서 인천공항으로 입국하는 나를 마중했을 때도 아빠의 발은나의 엉덩이에서 미끄러져 내렸었다. 술독을 받아 빨개진 아빠의 코끝이 두어 번 실룩거렸다.

“이놈, 그새 많이 컸구나. 살은 좀 빼시지, 히히……이젠 우리 같이 살자.공부 잘해야 한다. 한국어도 잘 배우고, 중국에서 조선어를 배웠으니 한국어도 같은 우리말이다, 겁날 것 없다” 하고 신나게 사상 교육을 했다.

오랜만에 만나 서먹서먹해하고 있는 나를 끌어안았다가 풀고 어깨를 잡고 흔들기도 하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었다. “우리 욱이, 중국어 잘하지,영어도 잘하지, 한국어도 잘하지……이러면 대한민국 어딜 가도 엄지 척 빼들고 인정해 줄 게다. 이게 우리 조선족의 우세지. 이제부터 아빤 널 위해 올인할게” 하고 큰 손바닥을 펼쳐 나의 여린 등을 마구 두드렸었다.

“이거 왜 이래? 정말 간 떨어지겠다” 하고 나는 별로 안 좋은 기색을 내보였다. 상대방이 좋은 뜻으로 접근을 해도 내가 싫으면 싫다.

할매는 애칭 하나를 선물했다. 냉혈동물! 그게 애칭이라면 말이다.

“요 게으름뱅이야, 빨리 일어나 학교 가야지, 빨리……여든에 허리 꼬부라진 할미가 밥상 차려놓고 깨우는데도 안 일어나고, 말해도 대답을 안 하고, 니 점점 바보 되나? 감정도 없는 냉혈동물이가?……빨리 일어나 밥 후딱 먹고 학교 안 가겠나?” 할매는, 이제는 늙었다. 여러 대 빠진 이 사이로말이 급하게 새고 있었다.

솔직히 어른들은 시름 백번 놓아도 좋다. 요즘 애들은 속궁리가 따로 있다. 나로 말하면, 아침에 학교 갈 때 저녁에 설치해 놓은 폰 알람이 울리면학교 상학 전 30분 시간 때가 된다. 일어나서 세수하고 칫솔질하고 밥을 먹으면 15분이 소요되고, 옷을 입고 가방을 찾아 메면 5분, 아파트 층계를 내려서 느직느직 길을 걸어도 10분이면 교실에 도착할 수가 있다. 급해할 게뭔가. 할매한테 설명을 몇 번이나 해도 이튿날이면 똑같이 꾸지람을 한다.

“니 바보 아이가? 냉혈동물이가?……” 마이동풍(馬耳東風)이란 성구를 배운 적이 있다. 나는 내 방식대로 행동한다. 단지, 말이 적고 느린 것만은 사실이다. 그냥 그렇게 생겨먹었다. 바보란 말은 너무했다. 냉혈동물이란 말도누가 생각하기 나름이다.

방문에 기대선 아빠는 입귀를 약간 실룩거렸다. 화를 내는 것 같기도, 괜히 폼을 잡는 것 같기도 하다. 방 안에 켜놓은 TV는 제멋에 좋아 돌아가고있다. 한국과 중국 대표팀이 축구 경기를 하고 있다. 축구공이 선수들의 발끝에서 요리조리 요술을 부리거나, 또는 골문을 뚫으려고 시도할 때면 내심장은 오그라든다. 그러다가 축구공이 문전으로 날아 꽂히면 심장이 산산조각이 난다. 조각났던 것이 다시 뭉쳐져서 함성을 내지른다. 나의 입과 팔과 다리가 요상한 동작을 지속적으로 연출한다. 평소에 그런 동작 좀 해보라면서 돈을 주어도 절대 못할 것 같다. 완전 마술이다. 그러나 아무리 격동이 되어도 입 밖으로 소리가 터져나가지 않는다.

아빠가 리모컨을 빼앗아 소리 볼륨을 조절했다. “이놈이? 뽈은 좀 차는거냐? 흐흐, 소리 좀 낮추실까?”

분홍색 잠옷을 걸친 여자가 아빠 등 뒤에 숨어있다가 아빠의 팔소매를잡았다. 상큼한 향수 내가 내 신경을 자극했다. 방 안이 갑자기 좁아졌다.갑갑하고 어색해졌다.

내가 오기 전 아빠와 삼 년을 같이 산 대림동 현지 여자라고 한다. 며칠전 이사를 할 때 처음 봤고, 이제 며칠째 낯을 익혀 왔지만 나는 여자가 어떻게 생겼는지에 관심이 없다. 키는 큰 편, 몸매는 여위었고, 머리는 파마를했다. 얼굴에 박혀 있을 오관은 그런대로 박혀 있다. 목소리는 가늘다. 이만하면 대단한 관찰이다. 이쯤이면 사람 보는 눈은 있는 셈이다.

“네 새엄마다. 잘 지내라.” 새집으로 이사하는 날 아침 아빠가 나를 끌어당겨서 마주 세워놓았다.

새엄마는 “학생……반가워요” 했다. 아빠가 정색해서 호칭을 고쳐주었다.

“학생 아니고 이름은 욱이, 우리 아들!” 새엄마가 가만히 웃었다. “응, 그래요. 네가 욱이구나. 반가워, 우리 아들” 하고 다가와서 나를 안아주었다.

새엄마의 포옹은 참새처럼 가벼웠다. 두 팔을 풀면 참새처럼 포르르 날아갈 것 같은 느낌이다. 사람 사이 이런 느낌이 있을 수 있나 싶었다. 은근히근심을 했었는데 전혀 부담이 없으니 힐링하는 기분이다. 그동안 할매는 내가 매일 입는 옷이나 먹는 밥과 같은 존재였고, 아빠나 엄마는 내가 어릴 때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그리움 같은 것은 별로 없었다. 언젠가 내가 의지해야할 것 같은 존재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할매는 소비돈을 줄 때면 매번 “아껴쓰라, 엄마 아빠가 뼈빠지게 번 돈인데” 하고 잔소리를 했다. 인이 지겹도록박힌 기분이었다.

새엄마의 목소리는 가늘고 여리다. “여보, 됐어요. TV 소리 저만하면 돼요. 자러 가요 우리…아 참, 학생, 아니 아들……한 가지 알고 싶은 게 있는데……한국과 중국이 축구를 하면 누가 이겼으면 좋겠어?”

아빠가 괜히 화를 냈다. “유치하네, 아직도 그런 것 알고 싶어요? 누가 한국 사람 아니라 할까 봐?”

“아니, 그냥……우리 아들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 알아야지……이젠 한국에서 같이 살아야 하니까. 한민족, 한 핏줄인데…….”

“제발 그런 것 들먹이지 마시구, 왜 다들 내 편 네 편 하며 꼭 알고 싶어서안달이지? 왜 항상 사람을 줄 세워놓고 싶어 하시지?……애가 이제 중국서왔는데, 걔가 어느 쪽이 이겼으면 하겠소?” 아빠는, 그 한마디는 줏대 있게잘 쏘아붙였다. 방문 소리가 꽤 크게 났다. 내일 아침 일찍 일하러 가야 한단다.

“그래요, 일찍 자요, 학생” 하고 새엄마가 나가다 말고 “아 참” 하더니“이것” 하고 주머니에서 뭔가 꺼내 손을 내밀었다. 몽골한 것이 내 손에 쥐어졌다. 빨간 공, 아기 장난감 같았다. 어릴 적 내가 갖고 놀던 공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공이 왜 새엄마한테 있는 걸까?……아마도 할매가 나의 짐에 몰래 그것을 넣어 보냈을 거고, 트렁크를 정리하다가 새엄마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게 뭐지? 하고 웃었을 거고, 아빠는 괜히 신이 나서 공에대한 얘기를 했을 거고……순간 나는 새엄마의 눈이 놀라듯 커지는 것을 보았다. 에잇, 숫구멍에서 피가 거꾸로 솟아올랐다.

나는 빨간 고무공을 잡고 내밀 듯 말 듯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한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서있다.

나의 손목에는 아빠가 선물해 준 스위스산 뚜르비옹 시계가 채워져 있다.아빠는 내가 온다기에 새 아파트를 구입했노라고 은근히 귀띔을 해주었다.나의 방에는 새 책들로 삐까삐까하게 채워진 책궤가 있고, 새로 산 컴퓨터와고급 브랜드 책상과 삼성 29인치 텔레비전 등이 폼 잡고 놓여 있다. 그래서나는 새엄마의 얼굴에 비추어진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게걸스레 먹어서좀 비대해진 몸뚱이며, 살집 흔들거리는 얼굴이며, 독을 쏘는 두 눈은 영락없이 깡패상일 게다. 순간 나는 아무렇게나 공을 던져버렸다. 빨간 공은 벽을 맞고 툭탁거리며 튀다가 공교롭게도 책궤에 정렬된 책 사이에 날아가 꽂혔다. 히틀러가 쓴 『나의 투쟁』이란 책과 성경 책 사이 벌어져 있는 틈을 찾아 정확히 박혔다.

나는 TV와 전등을 껐다. 침대 위에 올라 이불을 뒤집어썼다.

나는 이불 속에서 삼성전자 갤럭시S20 5G를 펼쳤다. 위챗 영상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울리고 있으나 받지 않는다. “이 노친네, 제발 좀” 하고 두덜거렸다.

할매는 초저녁부터 곯아떨어진 것 같다. 할매의 등은 몇 년 사이 90도로굽어졌다. 침대에 기어 올라가면 다리를 꼬부리고 누워 고양이처럼 가릉거리며 코골이를 했다. 힘없이 벌어진 턱에서 ‘하하’ 하는 숨소리를 뿜어냈다.

“니두 빨리 자거라. 내일 아빠 니 데리러 온다는데, 자거라. 이게 몇 해 만이냐? 네 엄마도 서울 있다는데 왜 전화 한 통 없노? 모진 년이. 지 새끼 안보고 싶은가 보지. 애새끼 출세시키겠다고 돈 벌러 간 년이……자거라” 하고 할매의 넋두리는 최근 몇 년 사이 듣기 귀찮게 부쩍 늘었다.

나는 화풀이하듯 게임 놀던 폰을 던져버리곤 했다. 냉장고에서 콜라와 햄버거를 꺼내 먹기 시작한다. 햄버거 셋에 콜라 두 병을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운다. 트림이 목구멍에서 기어오른다. 배에 가득 차는 포만감이 좋다. 누가곁에 없어도 좋다. 가끔 어른들이 애가 외로워 어쩌겠느냐고 하지만 나는괜찮다. 햄버거와 콜라, 게임을 할 수 있는 폰만 있으면 된다. 친구들과 싸움질을 하다가 몇 대 얻어맞은 후에는 남몰래 종합격투기도 배웠다. 한밤중에 나가 느티나무를 상대로 치고 박고 어쩌고 하며 열정을 불태웠다.

아무튼 사람 생각 안 하는 게 행복이다. 그런데 할매가 그냥 내 마음을쥐고 흔든다. 네 아빠, 네 엄마 어쩌고저쩌고하며 구시렁거렸다. 얌전하게 있는 애를 못살게 군다.

할매는 내가 자는 꼴도 못 본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몸을 새우처럼 웅크려서 자면 편한데 그 꼴을 못 본다. 이불을 끌어당겨 내리면서 고함을 지른다. “니는 왜 잠을 그 따위로 자노? 이불 뒤집어쓰고 자면 숨 막혀 어떻게사노?” 한다. 나는 “남이사, 잠두 내 맘대로 못 자노?” 하고 다시 이불을머리 위로 끌어당겨 올린다.

아마도 다섯 살인지 여섯 살인지 딱히 기억에 없다. 유치원은 가지 않고도랑가에서 흙장난을 하다가 도랑물에 빠져 물병아리가 됐고, 할매는 회초리를 들고 나의 엉덩이와 다리 정강이를 사정없이 내리쳤었다.

“이 원수야, 이 원수야……지 새끼 지 기르지, 와 날 이렇게 고생시키누?니 애비 에미 따라 한국 가거라. 돈 잘 벌고 잘살고 있다는데……왜 지 새낀못 데리고 가고 이 늙은 어미만 고생시키노?” 하고 입에 거품을 물었다.

나는 울지 않고 이를 앙다물고 할매를 노려보았다. “저 독한 것이? 이놈이” 하고 할매는 또 회초리를 들었다.

그날도 이불을 뒤집어썼다. 핏자국이 얼룩진 다리와 엉덩이가 아리고 아파 왔었다.

“에그, 우리 손주 많이 아팠지? 어디 좀 보자.” 할매가 이불을 잡아 내리면 나는 끌어당겨 올렸다. 그러기를 반복했다. 할매는 나를 이기지 못한다.

땅이 꺼지는 한숨 소리가 들렸다. 꺼칠한 손이 이불 속으로 들어와서 내 손에 무언가를 쥐어주었다. 몽골거리는 작은 공, 할매의 주글거리는 젖통을 쥐고 자던 나는 그때부터 공을 품에 안고 자는 버릇이 생겼다.

공은 내 소통의 도구였다. 그놈으로 친구 뒤통수를 정확히 맞출 수가 있고, 벽에 튕기며 날아다니는 꼴을 보고 즐기기도 했고, 길을 가면서 차거나뿌리기도 했다. 꼬마 뚱보가 작은 공을 좇는 꼴이 우습다고 뒤에서 놀려대면 애들과 엉켜 붙어 싸움질도 곧잘 했다.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는 항상 불룩한 게 솟아있었다. 손으로 쓰다듬으면 온기가 살아났다. 가슴에 엉켜있던이름 모를 불안들이 슬그머니 풀리는 것 같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나는 수업할 때면 자면서 강의 듣는 버릇이 생겼다. 선생님들이 가끔 교편으로 내 뒤통수를 때렸다.

“일어나, 버릇없이. 아무리 머리가 좋다고 해도 들을 것은 들어야지” 하고 선생님이 한숨을 짓든 말든 강의가 시작되면 잠이 왔다. 참을 수 없이 쏟아졌다. 그래도 시험을 보면 절대 낙제는 하지 않았다.

“욱이 이눔, 참 머리는 좋은데, 공부 잘하면 북경대학도 가겠는데 아깝네,아까워요” 하고 젊은 여 담임선생님이 나의 엉덩이를 오른손으로 두드려주며 안타까워했다.

한 개 반급에 대여섯 명의 친구들이 모여 공부를 하니 창문으로 기어드는오후의 느슨한 햇빛처럼 모두가 게을러져 있었다. 선생님이 애써 가르치려고해도 애들은 잘 따르지 않았다. 나처럼 잠을 자지 않으면 몰래 그림책을 보고 폰 게임을 하고 솔락거리며 장난질을 했다. 방과 후면 온 운동장을 뛰어다니며 술래잡기를 하고 열심히 볼을 찼고, 또 약 올리는 수탉에 성난 누렁이 싸움질을 하면서 땀투성이가 되어 자랐다.

나의 공이 수난을 맞은 시기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어느 날 잘못 던진 공이 불행히도 교실 창문으로 날아가서 유리창을 박살냈었다. 정든 공과 이별하는 순간이었다…….

새엄마가 “학생, 주방에 밥상 차려놓았으니 먹어요” 하고는 옷을 갈아입고 외출을 한다. 나는 7층 아파트 창문에서 새엄마가 까만 핸드백을 들고한들거리며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분홍색 스카프가 눈길을 끌었다.

엊저녁 오랜만에 친엄마가 보내온 문자를 본 기억이 생각났다. ‘욱아, 내일 오후 시간 돼?’ 나는 응하고 답했다.

새엄마 앞에 스무 살 남짓한 처녀 애가 걸어가고 있다. 뒤를 두어 번 돌아본다. 새엄마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 아침 햇빛이 그녀들 머리 위에 밝게쏟아지고 있다. 나는 둘 사이에 공을 던졌다. 빨간 공이 눈부신 햇빛을 머금고 새엄마의 이마를 맞추었다. 공은 다시 튕겨 올라서 처녀 애의 뒤통수를맞춘다. 나는 손뼉을 치며 웃었다. 물론 진짜 생긴 일이 아니다. 그랬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했다.

처녀 애의 목에서 나부끼는 스카프도 분홍색이다.

처녀 애의 얼굴은 조그맣고 눈은 크다. 작고 예쁜 입술에 빨간 립스틱을진하게 발랐다.

이사하는 전날에 아파트 근처에서 나는 깡통 하나를 차서 날린 적이 있었다. 무심결에 차버렸었다. 길에 버려진 빈 콜라 캔이었다. 그놈은 멋진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누군가의 엉덩이를 맞췄고, 그 누군가가 돌아서더니 입에 꼈던 흰 마스크를 잽싸게 내렸다. 그때 본 얼굴이 그렇게 생겼다.

“너니? 왜 그래?” 힐문하는 처녀 애의 목소리가 카랑했다. 나는 대답 없이 그녀만 바라봤다. 나는 입에 푸른빛이 감도는 의료용 마스크를 꼈었다.아빠는 보건용 KF94를 끼라고 매번 강조를 했다. KF94는 입자 0.4㎛를94% 이상 걸러준다고, 의료용 마스크는 안전성도 떨어지고 티가 난다고 누누이 설명했다. 티가 난다는 것은 내가 어디에서 왔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본다는 뉘앙스다. 한국 사람들은 주로 KF94를 끼니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숨쉬기 편하고 내가 좋으면 그만이다. 의료용 마스크를 꼈기에 내 마음은 한결 안정돼 있었다.

“너, 중국서 왔구나, 그지?” 처녀 애의 목소리가 한결 누그러들었다. “다신 그러지 마. 다 큰 애가 깡통이나 차고 다니고, 길을 무단 횡단하고, 침 아무 데나 뱉어버리고……그러면 안 돼, 알았지?” 처녀 애는 누나처럼 가만가만 교육을 했다. 내가 침을 뱉은 것, 무단 횡단한 것도 알고 있었다. 듣기 싫지는 않았다. “그러면 정말 안 되지. 알았어요” 하고, 나는 대답했다. 오랜만에 내 목소리가 들렸다. 비록 모깃소리만큼 작았지만.

처녀 애는 자기 이름을 구름이라고 알려 주었다. 하늘의 구름이란 구름,떠도는 구름. 윤 씨니 윤구름. 처녀 애는 말말 간에 나를 알고 있다는 뉘앙스를 주었다. “또 보자, 우리” 하며 굿바이를 했다. 손가락이 긴 그녀의 오른쪽 손목이 가볍게 돌면서 오른손이 보기 좋게 핑글거렸다. 나는 덤덤해서그 모양을 바라보았다. 초면인데, 괜찮은 여자 애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주머니 안이 따뜻해졌다. 불룩하게 솟아나는 게 있다. 물론 이것도 상상이다.

2호선 전철 홍대 입구 5번 출구. 나의 눈에는 또 버려진 콜라 캔 깡통이보였다. 할매 말대로라면 똥개 눈에 똥만 보인다. 아무튼 이상했다. 깨끗한환경에 위생 청결이 잘 되어있는 대한민국에 웬 깡통일까? 그런데 그 깡통이 하필이면 내 눈에 띄니 신기할 따름이다.

발이 근질거렸다. 겨우 참았다.

웬 여자가 달려와서 나를 덥석 끌어안았다. “욱이야, 엄마다” 하고 나의볼이며 손등에 눈물을 쏟았다. 무슨 여자가 힘이 그리 센지 모르겠다. 느닷없이 큼직한 바위 하나 안은 것 같다. 배가 쿨룩거렸다. 손가락을 꼽아보면엄마를 못 본 지도 5년 하고 두 달이 더 됐다.

그날 내가 인천공항에 내려 입국 심사를 받고 검역대를 통과해서 나오자아빠하고 새엄마가 마중 나와 있었다. 아빠가 나를 보더니 버릇처럼 엉덩이를 찼었고, 새엄마가 예쁘게 또는 낯설게 웃었고, 어쩌구려 정신없이 우리는아빠 자가용에 올라탔다. 자가용은 엄청 고급스럽고 멋져 보였다. 아빠가예쁘게 또는 낯설어 보이게 흰 이를 드러냈다.

“올해 초에 바꿨다. 2020 벤츠 GLC클래스 브랜드지. 세금 내고 수속 다끝내고 해서 9천만 원쯤 들었다. 한번 폼 나게 살아 보자꾸나. 그동안 돈 버느라 널 챙겨주지 못해 정말 미안하다. 이제부터 아빠가 해줄 건 다 해줄게.그저 공부만 잘해라. 여긴 열여덟 살이면 성인이니 명년엔 운전면허도 따고,대학만 가거라. 그러면 아빠가 자가용 하나 빼줄게” 하고 아빠는 고무풍선에 바람을 한껏 불어넣었다. 배가 터질 것 같았다.

아빠는 명년에 할매를 모셔 오겠다고 한다. 절대 안 될 소리를 한다. ‘괜한걱정 말아라. 내가 왜 여기 편한 고향을 놔두고 너네 남조선에 가서 살겠니?난 여기서 살기가 편하다’ 하고 말할 게 뻔하다. 할매는 고집불통이시다.

아빠는 “어른들의 일은 좀 복잡하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렇고 그렇지 않느냐. 니도 이만큼 컸으니 이해해라” 하고 은근슬쩍 동정심을 사려고 했다.나는 앞좌석에 앉았고 새엄마는 뒷좌석에 앉았다. 마침 내 어깨에 가볍게닿아와 톡톡거리는 손가락이 있었다. 고운 바람결같이 스치듯 말듯.

이때 코미디 같은 구경거리가 생겼다. 웬 여자가 허둥지둥 공항 출입문을향해 달려가다가 넘어졌고, 급히 일어나서 엉덩이를 털며 엉거주춤해서 뒤를 돌아보더니 후딱 ‘뒤로 돌앗’을 했다. 버스가 다니는 길 건널목 신호등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단 횡단을 해서 쫓아왔다. 허우적거리며 팔을 흔들어보였다. 아마도 급해서 말이 나오지 않는 모양. 승용차 차 문은 내려져 있었고, 나는 어리둥절해서 관중석에 앉아 코미디 영화를 보듯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다음 아빠를 돌아보았다. 아빠는 굳은 얼굴을 해서 승용차에 시동을걸었다. 빠르게 운전을 해서 자리를 떴다. 여자는 그 자리에 망석처럼 굳어지고, 차츰 멀어져 갔었다. 여자는 아빠보다 나이 더 먹어 보였다. 파란 바지에 빨간 외투를 걸쳤고 남자처럼 상고머리를 했다. 목에 두른 금 목걸이가 유난히 내 눈에 띄었다. 줄이 굵어 요란해 보였다. 나는 그 여자를 알 것같았다. 아빠도 알아본 것이고, 중요한 것은 내 손에 운전대가 잡혀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아무려나 아빠의 차를 타고 가면 될 것이다.

나는 겨우 여자의 모진 팔에서 풀려 나왔다. 내 볼을 만지려는 손을 슬쩍 밀쳐 버렸다. 나의 곁으로는 형님 누나 나이 또래의 젊은이들이 물밀듯이오갔다. “웬 상봉이래?” 하고 흘끔거리며 쳐다봐서 창피했고 짜증이 났다.“조선족 같은데?” “걔들 아직도 이산가족이 많은가 봐.” “아마도, 그렇지?불쌍해.” 선글라스를 끼고 단발머리를 곱게 한 대학생 같아 보이는 두 여자애가 지하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면서 소곤거렸다. 캐득거렸다. 손이슬그머니오른쪽 주머니로 내려갔다.

쌕쌕거리는 여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미안해, 그날 내가 좀 늦어서 제대로 마중을 못했네. 그놈은 그래도 양심이 있어서 니 전화번호는 찍어 보냈더라. 쯧쯧, 내가 나쁜 년이지. 미안해, 우리 아들!”

마을버스가 미궁 같은 골목들을 빠져나갔다. 3층 빌라 앞에서 우리는 멈춰 섰다. “네 아빠 집보단 못하지? 2층이야.”

벽돌로 지은 건물이 꽤 낡기는 했지만 밖으로 널찍한 베란다를 빼서 스타일이 있어 보였다. 방문을 열면 바로 주방이자 거실이고 양쪽으로 큰방 하나 작은방 하나가 있다. 큰방은 부부 침실일 게다. 나는 작은 방문을 슬그머니 열어보았다. 아담하고 작은 침대 하나쯤은 놓여 있을 듯싶다. 옷장이며 옷걸이이며 화장대 같은 것들이 잘 정렬돼 있었다.

여자가 옷깃을 잡아당겼다. “얘, 거긴 보지 마. 바빠서 거두지 못했다, 미안해.”

작은 상이 차려지고 사과이며 배며 오렌지이며 하는 과일들이 나왔다. 이것저것 집어주며 “먹어, 좀 먹어봐” 한다.

갑자기 목이 말랐다. “저, 미안한데요, 맥주 없어? 캔 맥주 하나 먹어도돼?” 하고 용기를 내서 말했다.

“너, 술 하니?” 여자가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여자를 뜯어보았다. 그리 뚱뚱해 보이지 않았고, 못생기지도 않았다. 큰 눈에 상고머리를 해서 오히려 정신이 나 보였다. 그 풀어진 눈빛이 기억에 어슴푸레 떠올랐다.

“아니, 술 못해. 그저 목이 컬컬해 한 모금 마시고 싶어서.” 나는 정말 술을 못한다. 여자는 냉장고에서 콜라 캔을 하나 가져왔다. 나는 시원한 캔을따서 단숨에 들이켰다. 빈 통은 손으로 우그러뜨려 상 밑에 내려놓았다. 게으른 트림이 목구멍에서 기어 올라왔다. 불현듯 햄버거 생각이 나고 할매 생각이 났다. 창문가에 놓인 화분에 이름 모를 꽃들이 곱게 피어있다. 낯선 꽃들, 꽃들이 화사해 더 낯설어 보였다.

“우리 아들 수줍음 많이 타는구나. 괜찮아, 괜찮아, 처음이니까 다 그래.나도 한국에 와서 적응하는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니? 살다 보면 이런 일저런 일 다 겪고, 그러다 보면 철이 들고 어른이 되는 거야.” 여자는 넋두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런데는? 나는 야릇한 표정을 짓고 넌지시 여자를바라보았다. 여자는 어른들이 자식들한테 늘 하는 버릇대로 한국에 와서 고생 고생하던 얘기를 풀어놓았다. 고깃집이며 횟집이며 건설 현장이며 모텔이며 사우나이며 안 다니는 데 없었노란다. 고약한 사장님을 만나 월급 안 줘서 울며불며 매달려 받아낸 일도 부지기수였노란다. 한국 나온다고 외상 빚갚느라고 몇 년 전까지 허리띠 졸라매며 고생했단다.

“네 대학 학자금 번다고 열심히 일했는데 아직도 요 모양 요 꼴이구나.창피해서……. 그러다가 저 양반을 만났지. 정말 좋은 사람이야.” 여자는 벽에 걸린 사진 액자를 가리켰다. 오십은 넘어 보이는 남자가 여자의 어깨에손을 얹고 희미하게 웃고 있다. 뒤로는 갈매기가 날고 있고 바다가 보였다.

“아빤 나쁜 사람이야. 이태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더니 마음이 변했는지 나와 말도 하지 않더라. 어느 날 예쁜 여자를 데리고 나타났지. 정말 죽고 싶었는데, 죽으면 안 되지, 하고 돌아보니 평소 뒤에서 날 돌봐주던 사장님이 눈에 띄었다. 내가 출근하고 있는 식당 맞은편에서 옷 장사를 하고 있는 김 사장님이시다…….” 나는 왜 이 여자의 얘기를 다 들어줘야지 하고 짜증 섞인 표정을 지었다. 아빠가 새엄마를 먼저 찾았는지 엄마가 새아빠를 먼저 찾았는지 나는 듣고도 헷갈렸다.

“암튼 생각해 보면 내가 나쁜 년이지, 나쁜 년이다……” “요즘 어른들 다나빠요. 큭큭.” “네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구나…….” 여자는 내가 대학 공부하는 데 드는 학자금은 이미 마련해 놓았으니 아빠가 돈이 없다고 하면자기가 대주겠노라고 했다.

자식에 대한 어른들의 보상 심리는 정말 위대하다. 내가 엄마라고 부르지않았는데도 여자는 뼈아프게 번 돈을 달갑게 내놓으려고 한다. 나를 조심스러워하며 어른 취급을 해서 조금 마음에 들었다.

여자는 쿠쿠 밥솥에 쌀을 안치고 상을 차린 다음 휴대용 가스레인지에불고기 판을 올리고 두툼하게 잘라놓은 소고기를 올려놓았다. 최상급 한우라고, 맛있으니 실컷 먹으라고, 한국 사람들도 일 년에 한두 번 먹기 어렵다고, 엄마한테 자주 놀러 오면 대한민국의 맛있는 음식들을 골라서 죄다 사주겠노라고, 네가 이제 다 커서 왔으니 이젠 시름이 놓인다고, 부모님들이고생한 보람 이제 빛을 볼 때가 된 것 같다고 늘어놓았다.

나는 한우를 게걸스레 먹었고, 여자는 구워서 끊임없이 집어 주었다. 불판에 한우가 반쯤 익도록 구워지면 지글거리면서 불그스름한 피가 고기 밖으로 배어 나온다. 피 맛에, 고기 맛에, 이런 맛은 처음이다.

내가 핏빛이 벌건 불고기를 맛나게 씹을 때마다 여자의 입은 용케도 찬스에 맞춰 벙긋거렸다.

여자는 집에서 자고 가라는 말은 안 했다.

엄마한테 자주 놀러 오라고 곱씹기만 했다.

아빠와 엄마는 자기들의 수요에 의해 나를 분할했고, 어느 한쪽에다 양육권을 귀속시켰고, 자식 스스로의 어떤 수요에 따라 양쪽을 왔다 갔다 할수 있도록 특혜를 베풀어주었다. 나쁠 건 없었다. 이 좋은 여건이 나쁘다면내가 나쁜 놈이다!

전철역을 빠져나오는데 입안에서는 한우의 감미로운 맛이 그냥 군침 돌게 했다. 저녁 노을빛이 행인들의 이마에서 곱게 부서지고 있었다. 무언가발에 걸려 차이는 게 있다. 방정맞게 콜라 캔 깡통이다.

순간, 노인 한 분이 눈앞에서 어정거렸다. 땅을 핥기라도 할 듯 굽어진 허리가 할매를 닮았었다.

우리 할매는 절대 못 말렸다. 심한 고뿔에 걸렸다고 한여름에도 겨울 내복이며 솜옷을 입혀서, 겨울 털모자를 꾹 눌러 씌워서 나를 병원에 데려갔었다. 찬바람 맞으면 안 된단다. 몸이 시루에서 갓 찐 빵처럼 뜨끈해 있었고속에서 불이 홧홧 일었다. 병원에 도착해서 링거주사를 맞을 때 할매가 나를 품에 안고 재우며 자장가를 불러주었다. “자장자장 우리 아기, 꼬꼬닭아우지 마라, 우리 아기 잠을 깰라. 멍멍 개야 짖지 마라, 우리 아기 잠을 깰라. 자장 자장 자장……” 열이 차츰 내리자 나의 눈꺼풀도 무겁게 처져 내렸었다. 몸이 녹고 있었다. 햇빛을 받은 하얀 눈이 스르르 녹듯이, 녹아서 깃털이 되 듯이, 바람에 가볍게 나부끼고, 새처럼 날고, 꽃이 보이고, 끝 간 데없이 하늘이 파랗게 펼쳐지고……그런데 어쩐 영문인지, 어느 순간 할매의 품을 파고들며 젖을 빨고 있는 내가 보였다. 창피했지만, 기억에 오래 남는 꿈이었다. 나와 할매는 운명 공동체 같아 보였다, 어른들이 요즘 말하고 있는.

오랜만에 눈이 따끔거렸다.

새엄마가 아빠 무릎을 베고 누워 흰 팩을 붙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빠는 비스듬히 누워 티브이를 보다가 “왔니, 밥은 먹고?” 하고 묻는다. 그 여자한테 갔다가 온 줄 안다. 당연히 밥은 먹을 거라고 판단한 모양. 아빠는나를 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둘은 나의 행방에 대해 이미 정보를 나누었다는 눈치다. 그러시든지 말든지.

새엄마가 얼굴에서 팩을 뗐다. “학생”, 하다가 “이 버릇 봐, 아들” 하고일어났다. 화장실에 들어가 세면을 한 후 크림을 바르고 향수를 뿌렸다. 마주 앉으니 좋은 냄새가 났다.

“우리 계속해 볼까? 나, 이래 봐도 대학에서 국어국문과 전공했다. 우리한국어는 세계에서 제일 우수한 어종의 하나이지. 자부심을 갖고 배워야 해,나도 이제부터 대한민국 사람이다 하고……한국어는 형태상으로는 교착어이고, 계통적으로는 알타이 어족에 속한다고 보면 된다” 하고 새엄마는 빠른 어조로 해석을 했다.

아빠가 커피를 타서 두 잔 갖고 들어왔다. 고마운 표정을 짓고 새엄마를바라본다. “얘는 중국에서 한글을 배웠으니 빠를 거야. 한국어에 외래어가많아 혼란스러울 수 있으나 부지런히 배우고 익히면 금방 적응할 수가 있지.” “여보, 내 임무는 얘가 한국어능력시험 3급까지 따게 하는 것, 고기까지예요” 하고 생긋거렸다.

아빠가 내 머리를 어루만졌다. “그래요, 거기까지면 됐지. 나머진 자기가알아서 해야지. 열일곱이면 자립을 해야지, 자기 길은 자기가 알아서 가야해. 대한민국에선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공부 안되면 나하고 현장 가서 노가다나 해야 한다, 알았지?” 아빠는 두 눈을 무섭게 부릅떴다.

새엄마는 또 “학생” 하고 불렀다.

한국어는 쉽게 배워지지 않았다. 별로 흥취가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 아파트 근처에서 분홍색 스카프를 본 것은 역시 저녁 무렵이었다.

얼굴은 조그맣고 눈은 크고 작고 예쁜 입술에 빨간 립스틱을 진하게 바른그 처녀 애였다.

전철 2호선 대림역 5번 출구와 우리 아파트와의 거리는 300미터쯤. 코로나19 때문에 학교 정상 수업도 안 되고, 그렇다고 학교 가고 싶은 마음은꼬물 만치도 없었다. 집 근처 피시방도 문을 닫았고 게임 오락실도 개업을안 했다.

의료용 마스크를 쓰고 나는 전철을 타고 서울 곳곳을 누볐다. 취미 하나생겼다. 2호선 전철을 타서 돌고 돌면 제자리로 돌아온다. 나는 그 많은 사람들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 다들 하나같이 마스크로 입을 가리고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앉아있었다.

어느 시각부터 배가 고팠다. 전철은 두 바퀴인지 세 바퀴인지 돌고 돌았다. 경로석에 앉은 나는 내가 아니었다. 속이 메슥거렸다. 사람들 입에 가린마스크가 볼록볼록 불어났다. 동그스름한 공처럼 돼갔다. 색상도 흰색, 노란색, 까만색, 이렇게 제각각이었다. 오른손 엄지로 꼭꼭 눌러놓으면 폭폭터질 것 같았다. 오른손을 칼처럼 펴서 가로로 날을 세워 날려 보고 싶어졌다. 희한했다. 이 사람들은 왜 입에 공을 물고 있는지 모르겠다…….

물론 나는 별 탈 없이 대림역에서 하차를 했다.

그때 왼쪽 가슴이 느닷없이 투덕거렸다. 분홍색 스카프가 내 앞에서 웃고있었다. 참말 눈이 커서 사랑스러웠다.

“네 얼굴을 보니 배가 무척 고팠겠구나, 우리 저기 갈까? GS25에 가서 라면 먹자. 나도 배고픈데……너 신라면 좋아하니?”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따라갔다.

봉지를 뜯고 소스를 넣은 다음 더운물을 부었다. 냄새가 기가 막히게 좋았다. 한우보다 더 맛있었다. “천천히 먹어.” 분홍색 스카프가 말했다. “내 이름은 구름이야. 아, 맞다. 전번에 얘기했지. 이번엔 하늘의 구름이 아니구, 땅위의 구름……흐흐. 넌 욱이 맞지?” 내 얼굴이 부드럽게 펴지는 것 같았다.

그녀가 어디 가서 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순종하여따라갔다. 한참 걷다가 그녀는 다리가 아프다며 길가에 놓인 의자에 앉아좀 쉬자고 했다. 그녀와 등을 비스듬히 돌리고 앉자 그녀가 입을 비쭉했다.

자기 등을 내 등에 맡겨 왔다. 내 몸이 가볍게 떨렸다. 온몸이 녹아내리는것 같았다. 그녀가 자세를 바로잡고 왼팔로 부드럽게 내 어깨를 감쌌다. 다른 한 손으로 굳어진 내 손을 잡았다. 손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나는 완전 멍청해 있었다.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뛰었고 얼굴이 화끈거렸다.왜……이래요? 이 말도 못 했다. 정말 싫지 않았다.

“윤구름은 말이야, 니가 남 같지 않아서 그래. 내 동생 같아. 아니, 내 동생이지. 니네 새엄마, 나하고 무슨 관계인지 알고 있니?” 나는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의 상상 속의 얼굴보다 더 예뻤다. 참, 나한테도이런 누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차피 내 누나가 될 것 같았다.정말 굿이다!

“네 새엄만 말이다. 우리, 이모야.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나는 아빠도엄마도 없거든. 아빠는 사업 말아먹고 몇 년 전에 아예 종적을 감추었고, 엄만 그해에 딴 남자 만나 시집가버렸지. 지금 난 내 혼자 살고 있다. 가끔 외로울 때면 울 이모를 찾아가기도 하지, 네 새엄마 말이다. 그러니 우리 사이도 뭐가 되긴 되지? 흐흐.” 그녀가 나오지 않는 웃음을 불쌍하게 지어 보였다. 나는 그녀한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하고 싶어졌다. 그런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현재 모 화장품 회사 판매원이라고 말했다. 화장품 브랜드가 얼마나 좋은가를 누누이 설명했고, 판매 수익이 얼마나 높은가도 자랑했다. 스스로 독립해서 남 보란 듯 잘사는 것이 자기 인생의 최고 목표란다. 그러면서 예쁜 손으로 내 볼을 쓰다듬어 주었다. 오랫동안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내 눈가에서는 뜨거운 것이 조금 흘러내렸다.

마침 그녀의 폰이 울렸다. “네, 네, 금방 찾아드릴게요……지금 다리가 아파서 쉬고 있어요. 좀 있다가 금방 찾아 전해드릴게요.”

그녀는 내 앞에 부은 듯한 발을 내보였다.

“네가 심부름 좀 해줄래? 널 믿으니까 말인데, 돈 좀 찾아주라. 통장 줄테니 저기 은행에 가서 돈 좀 찾아주렴. 수고비는 내가 두둑이 줄게. 찾을때는 통장도 카드 쓰는 것과 똑같애요.” 그녀가 차근차근 설명하자 나는 아빠한테서 ATM 기계에서 카드나 통장으로 돈 찾는 법을 배웠노라고 했다.

아빠가 혹시 모르니, 하고 세세히 가르쳐준 적이 있다. 나를 믿어주는 것만으로 고마울 따름이다.

우리와 한 삼십 미터 떨어진 곳에 우리은행이 있었다. 나는 ATM 기계로그녀가 알려준 비번을 넣고 돈을 찾기 시작했다. 5만 원권으로 백만 원씩,일곱 번을 찾았다. 그녀가 수고비 백만 원을 주겠다고 한다. 그녀만 따라다니면 아빠한테 손 안 내밀고도 소비돈은 푼히 벌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나도 떳떳해질 수가 있고 사람 구실 좀 하고 다닐 것 같았다.

ATM 기계에서 돈을 찾아 가방에 넣고 나서는데 누군가가 길목을 막아섰다. 50대쯤 보이는 아저씨였다. 곁에는 윤구름의 손목을 잡은 또 한 명의 나이 든 아저씨가 장승처럼 서있었다.

“이봐, 너, 그 가방 이래 내고 우리 따라가자. 순순히, 경찰서에 가서 다불어라. 안 그러면 너희들 감방에 처넣을 거다. 인생 한번 폭삭 썩어봐라.”사복 경찰들이었다. 나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뭐가 뭔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어쨌거나 감방에는 절대 갈 수 없었다.

분홍색 스카프가 눈물을 흘리며 애처롭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서그런 담이 생겼는지 몰랐다. 순간 나는 오른발로 아저씨의 사타구니를 걷어찼다. 아저씨는 ‘억’하고 앞을 거머쥐며 꼬꾸라졌다. 동작이 연발 나갔었다.윤구름을 잡고 있던 아저씨도 폭삭 꼬꾸라졌다. 돌려차기가 아주 정확했다.달밤에 혼자서 자유 격투기를 연마한 보람이 있었다. 전혀 상상을 못 했던지두 아저씨는 속수무책으로 당한 듯싶었다.

우리는 손을 잡고 뛰기 시작했다. 잘 뛰지를 못했지만 이 골목 저 골목을찾아 죽기 살기로 뛰고 또 뛰었다.

어디가 어딘지 모를 골목에서 잠깐 멈춰 섰다.

윤구름이 내 목을 끌어안고 쌕쌕거렸다. “고마워, 네가 날 살렸구나. 넌,내 동생이다. 잊지 않을게.”

그녀의 숨소리는 정말 달콤했다. 나의 손도 어느새 그녀의 허리를 껴안는모양새가 됐다. 난생처음 나는 내가 모를 동작을 하고 있었다.

“넌, 이런 일 하지 마……내가 잘못 생각한 것 같아. 공부 잘하고, 좋은사람이 되거라. 알았지?” 그녀가 다짐을 거듭했다. 나의 볼에는 그녀의 붉은입술 낙인이 뜨겁게 찍혀졌었다. 손에도 5만 원권 한 묶음이 쥐어졌다.

우리는 다시 손을 잡고 뛰기 시작했다.

윤구름의 손은 정말 느낌이 좋았다. 힘이 없고 약한 것 같은데 나를 끌고뛰니까 마술 같은 손이었다. 어디까지고 따라가고 싶어졌다. 갑자기 새엄마가 윤구름의 이모가 아닌 친엄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다른 세상이 열리고 있는 것 같았다.

집에 들어오자 나는 방문부터 닫아걸었다. 꼼작하지 않고 벽에 기댄 채눈을 감고 앉아있었다.

손목에 찬 스위스산 뚜르비옹 시계 초침 소리는 내 심장에 붙어서 똑딱거렸다. 아빠가 말해 주었다. “이놈 진품은 세계에서 값이 제일 비싸다. 지속적인 회전을 통해 시계에 가해지는 중력의 영향을 상쇄시키지. 1분마다 일정하게 회전해 손목의 움직임이나 위치에 관계없이 중력의 영향을 균일하게 받도록 설계됐는데 진품은 한화 6억 원쯤 한다…….” 중력의 영향을 균일하게받도록 설계됐다? 그 말이 뭔지 잘 모르지만, 지금 내 심장이 왜 이리 뛰고있는지는 알고 싶다. 그래서 이게 진품이란 말인가 아니란 말인가?

윤구름의 얼굴이 눈앞에서 얼른거렸다. 사타구니 가운데 그놈이 염치없이 살아나고 있었다. 사춘가가 다 지나간 것 같은데 또 아닌 것 같기도했다.

아빠가 방문을 두드렸다.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욱아, 잠자니? 문은 왜 잠갔지? 할매가……휴.” 안 좋은 느낌이 내 심장의 시계 소리를 멈춰 세웠다.

할매가 왜? 나는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놀라지 말거라. 할매가 오늘 저녁 8시에 운명하셨다는구나……방금 이웃집 재호 아저씨한테서 전화 왔더라. 코로나 땜에 비행기도 뜨지 않으니이걸 어떡하면 좋지? 아침에 은행 가서 재호 아저씨한테 돈을 좀 보내야겠다……” 아빠는 걱정이 태산이다. 별로 슬퍼하지는 않는 목소리다.

할매, 하고 나는 사타구니에 얼굴을 파묻었다. 할매가 두 발을 오므리고누워서 입을 반쯤 벌린 채 코를 곤다. ‘나 여기가 편하다. 내가 왜 니네 남조선 가서 살겠니?……’ 웃기는 할매가 괜히 죽었다고 웃기고 있었다.

한밤중에 내가 등을 새우처럼 꼬부리고 잠을 자는데 누군가가 나타나서이불을 끌어당겨 내렸다. 간 떨어질 뻔했다. “니 바보 아이가? 냉혈동물이가?……잠을 왜 이 따위로 자노?”

할매는 죽었다면서도 나를 못살게 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