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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체험수기] 슬기로운 이방인 생활
작성일
2021.02.01

[대상 - 체험수기 부문]


슬기로운 이방인 생활


김 진 아 / 프랑스


집 근처 슈퍼는 문을 닫은 저녁.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가까이 있는 아랍 가게에 들렀다. 물건도 많지 않고 가격도 일반 슈퍼보다 비싸지만, 시간이 시간이라 선택권이 없었다. 프랑스에서 자정을 넘어서까지 문을 여는 곳은 이런 곳밖에 없다. 일하는 사람은 인도에서 온 삼 형제들이었지만 언제부터인가 으레 이렇게 늦게까지 하는 동네의 작은 슈퍼들을 아랍가게 혹은 아랍 슈퍼라 불렀다.

같은 학교의 한국인 친구와 전화를 하며 싸구려 와인과 간단한 요깃거리를 샀다. 밖으로 나오니 한 프랑스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왠지 그가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가볍게 목례를 하고 습관적인 저녁인사를 건네려 할 때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가 너무 얇고 희미해 한 발짝 더 다가가야 했는데, 그의 푸른색 셔츠에선 아주 오래전 할머니집의 살짝 콤콤한 냄새가 났다. 그는 자신의 아내가 한국인이라고 말하고곧바로 얼마 전에 죽었다고도 덧붙였다. 이사를 하려고 하는데 그녀가 남긴짐 중에 한국어로 된 책이 많아 혹시 받아 갈 생각이 없느냐는 거였다. 홀린듯 그 자리에서 전화번호를 주고 헤어졌는데 그 사라질 듯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웅웅, 귀에 남아 울리는 듯했다.

집으로 돌아와서 한참을 고민했다. 현대인으로 응당 떠오르는 의구심, 불안감. 혹여 이상한 사람이 아닐까, 봇짐을 들어달라고 부탁한 할머니를 따라가다 납치를 당했다던 한국의 유명한 괴담처럼 어디론가 잡혀가는 것은아닐까 하고도 생각했다. 이상하게 무섭지는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주소와 현관 코드, 찾아오는 길, 방문 가능한 시간이 빼곡히 적힌 긴 메시지가 도착하자, 나는 망설임 없이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른 날 약속을 잡아보려고 했지만 서로 시간이 맞지 않아 오늘 밤도 괜찮으냐 그가 물었다. 지금 본인은 다른 곳에 있지만, 그 집으로 바로 돌아가겠다고, 이사를준비하고 있어 집에 살고 있지는 않지만 돌아갈 때까지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조금은 다급하게, 거듭 말했다.

약속 시간은 10시 30분. 그에 맞춰 10시 20분쯤 집을 나섰다. 남은 10분이 무색하게 그와 그의 아내였을 사람의 집과 내 집은 겨우 한 블록 정도 떨어져 있었다. 항상 누가 이런 곳에 살고 있을까 궁금증을 자아내는 고풍스러운 오스만 양식의 아파트였다. 코드를 누르고 들어가자 로비에서부터 난방이 훈훈하게 틀어져 있었다. 불 켜는 스위치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아 결국 난간을 더듬거리며 단단한 대리석 계단을 올랐다. 어두운 복도 사이로빛이 보였다. 할아버지가 빼꼼히 커다란 문을 열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내가 앞으로 도착하자 말없이 살짝 비켜주었다. 현관에서 이어진 복도를 지나 불 켜진 거실은 상상 이상으로 넓었다. 나무로 된 마룻바닥과 벽 장식,조명들은 오래되어 편안한 느낌을 주었는데 바닥에는 이삿짐 박스들과 아직 채 정리되지 못한 짐들이 여기저기 쌓여 있었다. 붙박이 책장에는 몇 권의프랑스어 책들과 몇 장의 사진이 있었고, 중앙 벽난로 위엔 커다란 거울이있었는데 그 앞엔 크고 작은 청동 조각들이 가득 장식되어 있었다. 물끄러미 조각들을 바라보자 그는 자신의 아내가 아티스트였고, 검정 조각들이 그녀의 작품임을 설명해 주었다. 조각 작품을 주로 만들었던 그녀의 이름은 경애, 라고 했다. 경애. 그 두 글자만은 또렷이 한국어로 발음되었다.

할아버지는, 자신이 알파벳 읽듯 한글을 읽을 수 있지만, 의미를 이해하지못해 한국어로 적힌 그녀의 책을 가능하면 다 가져가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원한다면 몇 번이고 책을 가지러 와도 된다고 하는 그의 말처럼, 거실 한편에 널브러진 열댓 개의 박스들 속에 책들이 아주 많이 담겨 있었다. 종교서적과 소설, 시집, 언론 잡지, 교육서, 세월에 갈변한 오랜 책들부터 최근출판된 베스트셀러까지. 한 번 쓱 훑어보니 온갖 장르의 책들이 무작위로담겨 있어 상자 하나하나를 뒤적여 볼 수밖에 없었다. 박경리의 『토지』 같은대하소설도 한 권은 이쪽 상자에 다른 두 권은 저쪽 상자에 흩어져 있었다.그녀는 다독가였던 게 틀림없다. 상자를 들추며 한 권 한 권 고르는 나를 할아버지는 거실 구석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한참을 아무 말 없이 나를바라보던 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와 경애 씨의 30년간의 결혼 생활, 상하이에서 공부했던 한국어보다중국어를 더 잘한다는 그들의 딸들의 이야기. 작고 건조하게 풀어내는 목소리에 그 시간의 흐름이 묵직하게 퍼져왔다. 왜 이사를 결정했냐는 나의 질문에 혼자 살기에는 너무 넓지 않냐며 슬쩍 웃어 보이는 그를 보면서, 이제는만날 수 없는 이의 자취를 본인의 손으로 정리해 나가는 기분은 어떨지 생각했다. 감히 상상해 보건대 읽지도 못하는 그녀의 책들을 그는 마냥 버릴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아내와 동향인 사람을 찾아 그 동포에게 유품과 같은 그녀의 책들을 전달하려 했을 것이고, 우연히 아랍 슈퍼에서 들려오는 한국어를 듣고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 할아버지의 마음이 따뜻하고아렸다. 참 조용히도 슬펐다. 다시 우리는 말이 없었다. 직접 가져간 가방도부족해 비닐봉지에 가득 책을 담고서 다시 찾아와도 된다며 거듭 강조하던그를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비가 가득 쏟아졌다.

축축이 내려앉은 공기로 낡은 책에서는 기억의 냄새가 나는 듯 했다.

한여름 밤의 꿈결 같은 일이었다. 프랑스에 온 지 10년이 다 되어갈 즈음이다. 예술과 문화의 나라에서 직접 미술사를 공부해 보겠다는 열정 가득했던 스물 초반의 나는 이제 마냥 어리다고 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 프랑스에 자리 잡은 한인 분들에게 명함도 내밀기 힘든 짧은 세월일지도 모르지만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은 나를 많이 바꿔놓았다. 시간이 흐르면서도 바뀌지않는 건, 프랑스는 여전히 나에게 멀고도 골치 아픈 나라라는 점이다.

‘프랑스는, 얼굴은 엄청 예쁜데, 성격은 엄청 더러운 애인 같아. 화가 울컥 나서 소리를 지르려고 돌아본 그 예쁜 얼굴 때문에 마음이 녹아버리거든.’ 프랑스 생활 7년 차였던, 어학 시절부터 동고동락해 온 친구가 밤의 루브르를 함께 걸으며 했던 말이다. 밤의 하늘은 맑았고 관광객은 많지 않았던 날로 기억한다. 마침 오른쪽 멀리 보이는 에펠탑이 정각이 되어 수백의하얀 전구들이 반짝거렸다. 말 그대로 더럽게도 예뻤다. 이 말을 남기고 그녀는 더는 예쁜 얼굴 뜯어먹고는 못살겠다며 짐을 싸서 한국으로 귀국했지만, 그녀가 했던 이 말만큼은 그 위트와 공감이 섞여 내 마음속에 남아있다.딱 그 정도의 거리였다. 미우면서 고운 애증의 나라.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뒤통수까지 세게 맞고서야 처음 환상에 젖어있던 프랑스에 대한 콩깍지가 벗겨지기 시작했다. 이 나라는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 한 일들이 버젓이 일어나는 곳이다. 지하 방역으로 도망 나온 쥐들이 우리 집에 둥지를 틀어 그들과의 불편한 동침도 해보고, 재수 옴 붙었다던 옴이 얼마나 지독한지 알게 되었다. 은행, 보험 같은 행정 처리는 끔찍이도 느리고, 어떤 일이든한 번에 처리되는 게 없다. 병원 한번 찾아가려면 몇 주를 각오하고 예약을한다. 오매불망 기다리던 택배는 집에 사람이 없었다며 다시 돌아가는 경우가 허다하고, 인터넷 설치는 3주가 걸린다. 포기를 배운다. 이는 나이를 들어가며 자연스러운 단계이겠지만 연고 없는 타국에서는 더욱 서글프고 처절한 느낌이 든다.

외국인의 삶은 증명의 연속이다. 매년 내가 지난 한 해를 어떻게 보냈는지다음 해에는 어떤 삶을 살아갈지를 서류로 제시하고 그것을 뒷받침할 경제적 여유가 있는지도 확인되어야 한다. 자국민이 아닌 외국인을 받아주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가로 국가는 정당성을 요구한다. 당연한 이치이지만 적응되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이다. 프랑스에서의 체류증 갱신은 거의 전쟁터에 나가는 것과 같다. 체류증에 명시된 기간이 끝나기 2개월 전에는 연장 신청을 해야 하지만, 파리를 제외한 다른 구역은 인터넷 예약시스템이 엉망이다. 이 때문에 파리로 이사 오기로 결정했을 정도였는데, 예약할 수 없으니무조건 일찍 도착해 번호표를 받아야 한다. 문제는 엄청난 경쟁자의 수. 그날 담당자를 만날 수 있는 안전한 번호를 받기 위해서는 적어도 아침 6시쯤은 도착해 있어야 했다. 해도 뜨지 않은 추운 새벽에는 언제나 먼저 도착한사람들이 가득했다. 그들과 함께 오들오들 떨면서 기다리다 9시 30분이 되면 무장한 경찰이 나와 문을 열고 방문 목적과 서류를 간단히 확인한다. 건물에 들어가서 번호표를 받고 또다시 내 번호가 불리기를 전광판을 보며 오매불망 기다린다. 오후 2시쯤, 내 차례가 되면 후다닥 창구로 달려가 담당자에게 서류들을 내민다. 하루에 수백 명의 유학생, 이민자, 불법 체류자를 만나는 프랑스인 담당자들은 대다수 굉장히 불친절하다. 분명 말도 통하지 않는 사람이 부지기수로 그들 역시 답답할 터이다. 그중에서도 까탈스러운 사람을 만나 심기를 건드리면 바로 서류가 부족하다며 쫓겨날 수도 있어 그앞에서는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웃음기 없는 사람들 앞에서 화가 나도 웃었다. 불어가 많이 어눌하던 처음 몇 년간은 세상 그리 서러울 수가 없었다.

우리는 왜 이방인의 삶을 고집할까. 일 때문에, 공부를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서, 자신만의 꿈과 이유를 품고 타국에 도착한 사람들은 아무리그 목표가 뚜렷하다 해도 낯선 토양에 적응하기는 쉽지 않다. 말은 잘 통하지 않고 어디를 가던 고향을 떠나온 외국인, 이방인이라는 신분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학교나 직장에 소속되어 있지만, 무언가 붕 떠있다는 느낌이다. 문화적, 의식의 차이가 벽을 만든다. 나 역시 10년의 세월이 흘렀어도여전히 프랑스어가 어렵고 지나가는 어린아이의 유려한 말솜씨를 보고 좌절할 때도 있다. 크리스마스에 초대받은 친구의 집에서 웃고 떠드는 그와그 가족들을 보면서 즐겁지만 쓸쓸함을 느낀다. 수없이 많은 와인 병을 비웠지만, 비가 오면 떠오르는 것은 막걸리요, 상사에게 와장창 깨진 날이면소주가 그립다. 여전히 샹송보다는 한국 가요를 즐겨 듣고 심지어 요즘은트로트가 그렇게 심금을 울릴 수가 없다. 프랑스는 결코 나의 모국이 될수 없다.

한 번쯤은 얼굴을 비추라는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기는 척 표를 끊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나는 처음 여행을 하는 사람처럼 묘하게 들떠있었다. 잠이 오지 않아 괜히 이런저런 영화를 틀었다 끄기를 반복하는데 가슴이 간지러웠다. 할머니의 품, 시끄러운 친구들, 대학로 앞의 순대볶음과나의 취향으로 가득한 내 방 따위의 그리움들 때문이었다. 인천공항에 도착해 부산으로 가기 위해 경유를 해야 했는데, 겸사겸사 하룻밤 정도 친구의얼굴을 보고 가지 싶어 성남에 있는 친구 집으로 향했다. 중학교 시절 공부를 지지리도 못했던 나와 내 친구들을 우리 어머니는 모지리 클럽이라 불렀는데 모지리 클럽에서 가장 먼저 시집을 가서 서울로 상경한 친구였다. 집에도착하자마자 위층에 살고 계신 친구의 시어머님께 인사를 드리고 내려왔다. 안면이 있던 동갑내기 남편은 오랜만에 두 사람끼리 회포를 풀라며 밖으로 나가주자 더욱 신난 우리는 짜장면과 치킨을 배달시키고 맥주 캔을 땄다. 친구에게 한 잔 따라주려니 친구가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임신 3주 차라고. 초음파 사진을 보고 괜스레 눈물을 훔치는 나의 등을 친구가 한 번짝 때리더니 구수한 사투리로 말했다.

“근데, 엄마가 계속 고양이 내보내라 한다이가. 아 한테 고양이 안 좋다고, 고양이 있으면 아 떨어질 수도 있고, 털 때문에 아 건강 안 좋을 수도 있다고. 근데 우째 그라노. 야도 내 새낀데 우째 그라냔 말이다.”

나의 친구는 남편의 어머니를 엄마라고 불렀다. 자기 아들을 따라 타지에 올라온 그녀를 시어머니도 딸이라고 부르며 살갑게 대해 주셨다. 첫아이의 기쁜 소식과 함께 아이 낳는 집에 털 짐승은 액운을 불러올 수도 있다고내쫓으라는 엄마와 자신의 늙은 고양이를 지켜내려는 딸의 실랑이가 이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서울이 아직도 낯설고 외롭다고 했다. 부산보다 몇 배나 넓은 이곳은 사람들도 몇 배나 바쁘다고. 시댁을 제외하고는 사람 만날 일이 없고, 다니는 직장도 사무적인 분위기라 고양이까지 없으면 자신은 쓸쓸해 죽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프랑스에 있는 동안 한국어 말주변도 떨어졌는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던 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녀의 등을 짝 소리 나게 때렸다.

다음 날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서울역으로 갔다. 핸드폰으로 표를 예약하려 했지만, 본인 인증을 위해서는 한국의 휴대폰 번호가 필요했다. 생각지도못했던 복병이었다. 한국의 전화번호가 없는 나는 나를 인증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역에서 가장 가까운 시간으로 직접 표를 사야 했다. 창구는 사람들로 꽤나 붐비고 있었고 비교적 한산한 티켓 판매기로 갔다. 버튼을 누르려는데 누군가가 바짝 나에게 다가왔다. 소매치긴가 싶어 깜짝 놀라 돌아보니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성이 급하게 돈을 내밀고 있었다. 7분 뒤에 출발하는 기차를 꼭 타야 하는데 현금밖에 없어 기계에서 표를 사지를 못 한다고, 자신이 현금을 줄 테니 내 카드로 대신 사달라는 것이었다. 다급한 그의 말투는 파리에서 들었던 북한 식당 종업원의 연변 사투리를 떠올렸다. 그의 얼굴에서 떨어지는 땀방울과 내미는 오만 원권은 무언가 절박해 나는 부산이 아니라 구미로 가는 표를 끊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여전히귀에 익숙지 않은 억양으로 잔돈은 되었다며 표를 낚아채 급히 달려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기에 저리도 바쁠까. 4분 남짓의 시간 동안 그는 자신의 기차를 찾아 몸을 잘 실었기를, 그리하여 어떤 사연인지 몰라도 구미에 무사히 도착하였기를 바라면서 다시 한 번 표를 끊었다.

부산역에 도착하자 부모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차하는 사람들 속에서 나를 발견한 두 사람의 얼굴에 꽃이 폈다. 내 기억보다 조금 마르고 조금 더 주름진 손을 붙잡고 차에 탔다. 엄마는 보조석 대신 뒷좌석에 앉아 집에 도착할 때까지 나의 손을 놓지 않았다. 한번 울기 시작하면 차 안이 눈물바다가 될 것 같아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래된 도시 고속도로를 타고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했다. 산턱 중간중간에는 아파트들이 불뚝 솟아있고 벽면에는 황제 같은 이름이 대문짝만하게 적혀 있었다. 높다란 건물들이 답답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처럼 고 몇 년간 낮은 건물에 눈이 익어버린 모양이다. 집에 도착해 우리 어여쁜 할머니를만나고 아버지와 공항에서 사 온 와인을 마셨다. 술 한잔에 얼굴이 벌게지는 엄마도 이날은 함께 마셨다. 프랑스에 있을 때도 자주 연락드린다고 생각했건만 새벽까지 질문이 쏟아졌다. 와인 한 병으로 얼큰하게 취했다. 가성비 좋은 밤이었다. 원래의 내 방은 다른 짐으로 가득했지만 잘 정돈되어 있었다. 부모님은 여전히 부지런했다. 퇴직하신 아버지는 아침 일찍부터 등산을 하러 가고, 엄마는 시에서 운영하는 카페에 시니어 바리스타로 채용되어일주일에 세 번 출근했다. 손님이 없어도 너무 없다며 걱정하는 그녀의 얼굴은 생기가 넘쳤다. 두 사람의 삶은 마치 정해진 듯 규칙적이었고 함께 혹은각자의 리듬에 맞춰 흘러가고 있었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면 집이 텅 비어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느릿하게 외출준비를 하고 나서면 엘리베이터를 탄다. 계단을 이용할 필요가 없음에 기뻐하다 친구를 만나러 가기 위해 탄 지하철의 쾌적함에 감탄했다. 새삼 너무편안하여 어색할 지경이었다. 친구와 부산대학교 근처 예전에 자주 가던 허름한 순대볶음 집을 찾았지만 귀여운 버블티 가게로 바뀌어 있었다. 거리에는 지나다니는 사람이 아주 적었다. 분명 새벽까지도 북적거리는 거리였는데, 라고 중얼거리자 이제는 경성대학교 앞이 대세야 라고 친구가 대답했다.20년 넘게 살아왔던 이곳이 이상하게 낯설었다.

한국에서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나는 살이 쪘다. 그동안 걷지 않고많이 먹었다. 가서는 살 좀 빼라는 엄마의 목소리가 울먹였다. 영원히 헤어지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러냐 핀잔을 하며 함께 울었다. 공항 검색대에서 기다리는 동안 자동문이 열릴 때마다 부모님이 보였다. 잠깐씩 열리는 공간 사이로 내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그들은 그곳에 서있었을 것이다.

비행기 안에서 문득 얼굴도 모르는 경애 씨가 떠올랐다. 언젠가 서로 지나쳤을 지도 모르는 경애라는 이름의 사람. 누군가의 딸이었을 경애 씨. 할아버지의 아내였을 경애 씨. 두 딸의 엄마였을 경애 씨. 한국에서 태어나8999km 떨어진 프랑스에서의 삶을 택한 경애 씨. 그녀는 본인이 고향이 아닌 곳에서 눈을 감으리라 예상했을까. 가족의 품에서 조금은 덜 외로웠을까. 경애 씨의 죽음은 세상 모든 이방인의 삶을 생각하게 했다. 단어의 기원처럼 다른 나라의 사람이 아닌 나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수없이 많은 이방인들. 수많은 문들 뒤로 내가 아닌 타인의 삶들이 있다. 이방인으로서 우리는 집주인의 허락이 있어야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경험하고, 나누게 될 것이다. 나도, 경애씨도, 고양이를 껴안고 울던 모지리클럽의 친구도, 14,200원을 나에게 남긴 이름 모를 아저씨도, 내가 없는 집에서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는 나의 부모님 모두 각자의 길을 따라 그선택의 무게를 견디면서 살아가는 이방인이다.

드디어 7시간 늦은 세상에 도착했다. 택시를 타고 돌아와 여행용 가방을 끌고 낑낑대며 5층의 계단을 올랐다. 열쇠로 문을 여니 습기에 내려앉은 먼지 가득한 공기가 나를 맞이했다. 다녀왔어, 라고 아무도 없는 집에 인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