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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수기] 한국 햄버그
작성일
2021.02.01

[우수상 - 체험수기 부문]


한국 햄버그


방 종 석 / 아르헨티나


1998년 2월 14일 부산 김해공항 출국장. 아직은 찬 공기가 2월의 겨울끝자락을 잡고 낙동강 강바람의 냉기를 뽐내고 있었다. 잠시 후면 지구 반대편으로 떠날 사람과 또 그 가족을 보내야 하는 사람들이 말없이 서로의손을 잡고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많이 아쉬워하는 얼굴의 어른들과는 다르게 작은아들 또래 아이들은 두꺼운 겨울옷을 입고도 땀이 날 정도로 이리저리 공항 대합실을 쫓아다니며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내가 꼭 2 주 전인 1월 31일 자로 다니던 은행에서 희망퇴직을 하였고 그 길로 우리 가족이 나선 이민의 출발선에 서있는 순간이다. 당시 불어탁친 금융위기로 철 밥통에 고임금이라던 은행도 구조 조정이 불가피한 분위기였기에 미리 준비를 했던 것이다.
‘잘 있어라’, ‘잘 가라’ 몇 마디뿐, 서로 간의 긴 이별이 시작되었다. 우리 네 식구는 별 말없이 비행기에 올라 아내와 내가 나란히 앉고 바로 뒷좌석에 두 아들이 앉았다. 미련이 남아있듯이 비행기도 활주로를 길게 천천히움직이더니 곧바로 무거운 동체를 쳐들고 구름을 뚫고 이륙하였다. 잠시 등받이에 온몸을 의지한 채 눈을 감았다. 어젯밤 마신 술 탓인지 머릿속에 그려진 이민 생활의 그림은 그렇게 선명하지 못했다.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준비가 소홀했던 수험생 기분이었다. 비행기가 평형을 잡고 구름 위에 올라서자마자 뒷자리에 앉아있던 두 아들 쪽이 심상치 않게 조용했다. 작은아들이 갑자기 훌쩍거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엉엉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이웃해 있던 승객들이 작은아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 큰아들은 한 손으로 동생 등을 토닥거리며 한마디 건넨다. “와 우노, 우리 식구 잘될라꼬가는데 우지마라.” 그러는 큰놈의 눈에도 이미 눈물이 꽉 차있었다. 비행기는 아직도 대한민국의 상공에 떠있었지만 아주 긴 이별을 예감했다. 얼마나 더 잘되기 위하여 저렇게 울며불며 이 나라를 떠나는지 잠시 머릿속이 까맣게 되었다.
2월 14일 한국을 떠난 비행기는 미국과 브라질을 거쳐 거의 하루 반나절만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이민에 성공한 동서 집은 까삐딸(Capital, 부에노스특별시)에 있었고 크고 넓었다. 당분간 동서 집을 임시 거처로 지내기로 했다. 가방을 풀어 꼭 필요한 일부 물건만 꺼내어 더부살이 생활이 시작되었다. 처음 몇 날은 시차적응 관계로, 미래에 대한 복잡한 머리로, 밤낮이 바뀌어가며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당장 급했던 것은말을 배워야 했다. 일단 아이들 공부를 위하여 가정교사를 통해 스페인어개인 교습을 시켰으며 나도 어깨 너머로 한마디씩 익혀 나갔다. 처음에는 내가 제일 빨랐고 그리고 큰아이가 빨랐는데 갈수록 작은아들이 더 빠르게 적응해 갔다. 아이들 공부를 미룰 수가 없어 도착 며칠 만에 초등학생 작은아들을 인근 공립학교에 전학을 시켰다. 때마침 학기가 시작되는 시기에 공립이기 때문에 아무 말 한마디 못하는 아들의 입학을 받아준 것이다. 선생이“네 이름이 뭐냐?”고 스페인어로 물었지만 아이는 울음으로 대신할 뿐이었다. 대부분의 한인들은 자녀를 사립학교에 등록시키지만 이미 그때에는 사립을 찾기가 쉽지 않은 상태였다. 중학생이던 큰아이의 등록은 쉽지 않았다.아르헨티나에는 초등학교(7년제)부터 낙제 제도가 있어 매 학년마다 학교에등록 수속을 해야 했다. 그때는 이미 사립학교 대부분이 정원이 찬 상태였다. 큰아이는 이웃을 대동하여 여러 군데를 다니다 겨우 크지 않은 사립 중학교(5년제)에 등록을 시켰다. 날이 갈수록 작은아이는 한마디씩 배워가며적응하는 듯했으니 큰아이는 많이 힘들어했다.
그렇게 정착 준비를 조금씩 하고 있는 중에 동서의 지인이 운영하는 소매옷 가게 계산대를 좀 봐달라는 요청이 왔다. 주인 부부가 한국 다녀올 동안카운터를 한국 사람이 좀 봐주면 좋겠다는 것이다. 말도 배울 겸 우리 부부는 250킬로 남짓 거리의 그 가게로 갔다. 기본적인 인사말인 올라(hola, 만날 때 인사), 짜우(chau, 헤어질 때 인사)도 모르면서 가게 계산대에 앉아 금고지기를 했다. 고객 응대나 판매는 현지 고용된 직원들이 하고 우리 부부는 돈만 계산했다. 처음 접한 지방의 소매 가게는 상당히 큰 매장 규모였고판매 종업원을 여러 명 고용하고 있었다. 거의 한 달 가까이 가게를 봐주면서 꼭 필요한 숫자는 많이 배울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어떤 일을 해야할지 결정하지 않은 우리 부부는 소매 가게로 ‘돈 벌 수 있겠다’는 생각을하게 되었다.
거의 한 달 가까이 평생 처음 해보는 ‘옷 장사’ 경험을 하고 다시 까삐딸로 돌아왔다. 그날 저녁 두 아이들은 잠을 자고 있었고, 우리 부부는 내일부터 닥칠 또 낯선 일을 의논하며 잠을 설치고 있을 때였다. 큰아들이 몸을뒤척이면서 큰 소리로 잠꼬대를 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우리 부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냥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나는 한국 햄버거가 더 맛있다”라는 잠꼬대를 들었기 때문이다. 인상을 쓰고 몸을 뒤틀며 고통스럽게 내뱉은 말은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지구 반대편에서 또 부모없이 한 달 가까이 이모 집에서 두 형제가 마음고생을 많이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아들을 조용히 불러서 물어봤다. “요즈음 힘드냐?” 돌아오는 아들의 답은 예상했던 것이다.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다 말을 하고하물며 개나 돼지도 말하는데 나만 말을 못해서 답답했어요”라는 것이었다.게다가 우리가 없는 동안 동서네 아이들과 작은아들이 서로 부딪치며 충돌도 있었다는 이야기도 같이 들려줬다. 한마디로 억장이 무너졌다. 쉽게 있을수 있는 집주인과 더부살이로 얹혀사는 입장 차의 설움이었다. 중 3학년으로 이민을 와서 학업에 대한 충격과 동생들이 다투는 모습을 보고 많이 힘들어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을 떠난 지 한 달여 만에 동서가 운영하는 공장에서 비숙련공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쉽지 않은 적응이었지만 어차피 항구를 떠났으니 도착항의 등대를 찾아야만 했다. 단추 기계 앞에 앉아 단추도 달고 완제품의 마지막 공정인 다림질도 하면서 그렇게 꿈을 키우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민 끝에 이미 준비되어 있던 동서네 다림질 공장을 조금 더 확장하여 내가 맡기로했다. 이민 가이드가 되어줄 것으로 믿었던 동서가 별말이 없어 빨리 분리하여 나오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동서네 제품뿐만 아니라 다른 이웃의 제품도받아 일을 하기 시작했다. 전날 작업한 것을 옷걸이에 가지런히 걸어 이튿날 가게 문 열기 시작하는 새벽에 납품을 하여야 했다. 손수레에 싣고 시장을 누비며 의뢰했던 가게로 납품했다. 손수레를 끌고 상가를 돌며 납품하는것이 좀 쑥스럽긴 했지만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만나는사람마다 나의 과거 이력을 알고는 ‘잘 왔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거의 없었다. ‘왜 좋은 직장 치우고 장돌뱅이 하러 왔느냐’는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이미 경제가 어려운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큰 비전도 목표도 없이 그냥 동서네 가게 공장일 도우면서 내 사업이라고 막 시작한 다림질 공장에 겨우 익숙해져 가는 4월 어느 날 우리에게 또하나의 시험대가 주어졌다. 살고 있던 까삐딸에서 80km 떨어진 지방 소도시 사라떼(zarate)로 이사를 하게 된 것이다. 동서의 아는 사람이 소매 가게로 돈을 많이 벌었고 조만간 캐나다로 이민을 간다 하니 ‘그 가게를 인수할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아무 생각도 없었고 더욱이 지방으로 떠나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이가 40이 넘어 내 맘대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수없는 내가 답답하기도 했지만 낯선 땅에서는 초보일 수밖에 없었다. 현지의사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았던 내 탓일 뿐이었다. 우리 네 식구는 이민 올때 1인당 각자 두 개씩 가지고 온 이민 가방 여덟 개를 다시 대충 꾸려서 동서가 소개해 준 그분의 승합차에 싣고 사라떼로 향했다. 한국에서 아르헨티나로 오던 여정보다 더 먼 느낌으로 또다시 난민의 길로 떠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날 저녁 지구 반대편에서 처음으로 우리 네 식구만 둘러앉아 저녁식사를 했지만 뇌리에는 딱히 누구에게 할 것도 없이 원망과 자책뿐이었다. 아내도 친정 식구를 따라 이민 온 것에 대하여 약간은 불편해할 것 같았다. 혹시나 세월이 더 흘러 누구한테든 원망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우리 부부는 약속을 했다. 생활이 아무리 힘들어도 ‘누구 때문에 이민 왔다’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아직 현지 사정도 말도 잘 모르는 상황이라 모든 것이 그분 가족들의 힘으로 준비해 나갔다. 집을 대충 정리하고 아내는 그분이 하는 옷 가게에 점원으로 취직을 했다. 일단 수입이 필요했다. 몇 개월 전만 해도 전업주부이자 은행원의 아내로 살았는데, 현지 점원 유니폼을 입고 일하는 모습을 쳐다보는 것은 나에게 힘든 일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가족은 애당초 캐나다로 이민 갈 생각이 없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 사람 좋아하고 어울려 살던 우리 부부는 아는 사람이라고는 그분 한 집뿐인데 버티기쉽지 않았다. 정확한 표현은 거기에 살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한국에서 노동운동을 함께했던 노총위원장한테 그 상황을 담은 편지까지 쓰기도 했었다. 짧지만 서너 달 만에 뭔가 첫 단추가 잘못된 것 같아 그 상황을 벗어나고자 하는 발버둥이었다. 그때서야 이민 대차대조표를 살펴본 것이었다. 무엇이 득이고 무엇이 실인지 조금씩 보였다. 저녁에 두 아들을 불러놓고 가족회의를 했다. “우리 식구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겠다. 할머니도 보고 싶고 고모들도 보고 싶다”라고 했다. 이때 큰아들은 “아빠가 가자고 하시면가야지요”라고 했지만 작은아들은 대답이 달랐다. “할머니도 고모도 여기로 오시면 되지 왜 우리가 가야 돼요?”라는 말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작은아들은 벌써 말도 좀 배워가고 현지 적응이 형보다 빨랐던 것이다.만약 내가 하던 일이 한국에 나가서 다시 할 수 있었다면 바로 U턴했을 것이다. 은행이 아니더라도 딱히 다른 일을 할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내는 가게 점원으로 나는 간간히 그 집 가게 허드렛일을 도우며 대책 없는생활을 했다. 아이들의 학교도 영주권이 없어 사립학교에 정규 학생이 아닌학년 졸업 인정이 안 되는 청강생으로 등록하였다.
이민 생활에 있어 영주권 취득과 아이들 학교 전학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다른 나라보다 불법체류에 대한 통제가 덜한 아르헨티나이지만 생계나학업을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영주권이다. 처음 이민을 마음먹었을 때 확인차 다짐을 하듯이 물어본 것이 바로 이런 문제였다. ‘영주권 취득하는 데 어려움이 없는가?’, ‘내가 할 일이 있느냐?’, ‘애들 학교는 문제가없는가?’ 이 세 가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이미 정착하여 살고 있는 사람들의 대답은 ‘아무 문제 없다’였다. 닥쳐보니 막상 쉬운 것이 하나도 없었다.
생계를 위한 할 일도, 애들 학교 전학도, 영주권 취득도 쉬운 것은 없었다.
영주권 신청 과정을 생각하면 아찔하다. 아르헨티나가 원칙적으로 이민국가이긴 하지만 한국에서 신청하고 수속을 밟아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 관광비자로 입국하여 불법체류 기간 중에 취업이민 수속을 밟는다. 그러는 과정에는 브로커가 있기 마련이다. 나도 유령 회사에 취직한 것으로 가짜 접수되어 있음을 뒤에 알고 브로커와 싸우기도 했다. 그러나 불법 의뢰를 한처지라 현지의 사법부에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결국 또 다른 현지인 브로커 변호사를 통하여 임시 거주 허가서를 겨우 받을 수 있었다. 임시 거주 허가서를 가지고 1개월씩 허가서에 연장 허가 서명을 받아야 했다. 새벽 4시면전 가족이 일어나서 이민청으로 가서 줄을 서있어야 하는 고생을 했다. 그러기를 1년이 지나고 1년 기한 임시 영주권을 받았고 2번의 갱신 후 영구 영주권을 받게 되었다. 그래도 우리 가족은 수월하게 영주권을 취득한 셈이다.그래서 아르헨티나에서는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다’는 냉소적인말들을 자주 한다. 영주권 브로커 사기를 당한 경험은 이웃에서 쉽게 들을수 있다.
지방 생활에 익숙해질 즈음인 그해 9월 한국에서 어머니가 오셨다. 외아들 식구를 지구 반대쪽에 보내놓고 편히 지냈을 리가 없었다. 어머니가 오시는 날까지도 차가 없어서 승합차 레미스(자가용 영업)를 대절해서 모실 수밖에 없었다. 공항에 도착 시간이 저녁이고 사라떼까지 달리는 고속도로 주위에는 깜깜한 암흑이었다. 간간히 울어대는 방울뱀 소리만 분위기를 더 적막하게 만들었다. 어머니가 우리 집에 도착하자마자 대충 훑어보시더니 “왜왔느냐?”시며 눈물을 보이셨다. 급하게 얻은 볼품없는 집도 그렇지만 차가운 타일 바닥에 제대로 된 침대도 없이 매트리스만 놓고 살고 있는 모습을보시고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은행에 중견 간부로 일하며 크진 않지만해운대에 위치한 롯데 아파트에 살며 부족함이 없었던 시절에 무슨 더 큰영화를 볼 것처럼 이민을 나섰던 내가 어머니 앞에서 마냥 죄송스럽고 초라해 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두어 달 후 가게 점원 일을 그만두고 소매 가게를 준비하자는 결정을 했다. 시외버스를 타고 인근 도시로 가게 장소를 물색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주위의 위성도시는 대충 다 훑어보았다. 너무 멀리 나갔다가 돌아오는버스를 놓쳐 까삐딸로 바로 가는 직행 버스를 타고 고속도로 요금소에 내려 집을 찾아간 적도 있었다. 까삐딸에서 사라떼 사이의 가게를 물색하려 걸어서 매일 수십 킬로는 걸어 다녀도 보았다. 그러나 이민 초보자가 객지에서새로운 가게를 얻는다는 것이 결국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라떼에서 어머니의 적적함도 달래드릴 겸 우리 식구는 매주 일요일이면 까삐딸에 가서 절(조계종 한마음 선원 부에노스아이레스 지원)에도 가고 한국 식료품 가게에서일주일 먹을 장도 보곤 했다.
지방에서 더 이상 희망이 없어 다시 까삐딸로 나올 준비를 했다. 지방의큰 소매 가게에 대한 미련을 접고 한인촌 가까운 곳에 작은 옷 가게를 준비했다. 어차피 시간이 더 흘러도 동서와의 관계가 원만하게 진행되기는 쉽지않겠다는 생각에 독자적으로 다른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가게를 계약하고 이민 선배들의 도움으로 미장일도 하고 용접 일도 하면서 인테리어를했다. 사라떼와 까삐딸 간의 거리를 매일 오갈 수가 없어서 공사 중인 가게에서 매트리스 하나에 잠을 자고 주말에는 식구들이 있는 사라떼로 가곤 했다. 그때 준비 중인 가게와 가까운 거리에 있던 동서네 집에 들르지 않는 것을 보고 지인들이 의아해 했지만 특별한 이유도 없이 서로 멀어져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전에 충분히 준비를 하지 못했던 내 탓이었고 결국 ‘잘못된이민’이었음을 느꼈다.
그렇게나마 어렵게 작은 소매 가게를 오픈하여 한국을 떠난 지 거의 10개월 만에 수중에 내 사업이라고 시작한 수입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가게가안정되면서 7개월 남짓 지방 생활을 접고 가게 근처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가게와 집, 그리고 한인 타운이 그리 멀지 않아 좀 안정되는 듯했다. 그러나 작은 소매 가게에 두 부부가 매달려 있을 수는 없었다. 당시 스웨터가 유행이라 가게는 아내한테 전적으로 맡기고 부산 출신의 지인 형님과 수동 스웨터 편직기를 구입하여 동업을 시작했다. 처음에 원사를 10킬로 사서 옷을만들기 시작했고 생각보다 판매도 괜찮아 점차 그 양을 늘려 나갔다. 편직기에 이어 스웨터 봉제 기계까지 들여 가내공업이지만 재미가 쏠쏠했다.
그러나 그런 재미가 나에게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그동안 사이가 소원했던 동서가 미국으로 재이민 간다고 당시 운영 중이던 가게와 생산 공장을인수하라는 것이다. 물론 고생하는 동생을 배려한 처형의 권유로 성사된 것이었다. 오래 고민하지 않고 하던 스웨터 공장 일체는 동업자 형님한테 물려주고 동서 공장을 인수하였다. 작은 자본으로 계약을 하고 한 달 정도 경영을 같이하며 동서가 미국으로 떠날 때까지 원단 등 자재구입 비용을 포함한부채를 함께 떠안고 인수하기로 했다. 처음 일을 시작할 때 재단 기계를 놓고 막걸리 뿌려가며 약식으로 고사까지 지냈다. 그때 옆에서 보고 계시던 어머니의 마음은 ‘이제 돈 벌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시작한 의류 생산 도매는 내가 급성간염을 앓을 때까지 결국 버릴 수없었던 계륵이 되었다. 한참 어려울 때에 아내가 한 말이 아직도 소름 끼칠정도로 머리에 맴돌곤 한다. ‘아침에 눈뜨기가 무섭다’는 이야기를 할 때에는 정말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부끄럽기까지 했다. 당시의 경기 침체를 대변하는 ‘내년보다 낫다’는 유행어가 한인들 사이에 입에서 돌았다.
더욱이 가게를 인수하고 정신없어할 때 날벼락 같은 일이 아르헨티나에서벌어졌다. 인수 후 두 달 만에 금융 파동이 왔다. 한국에서 피해서 온 IMF를 다시 지구 반대편에서 만난 것이다. 고정 환율이 깨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3년간의 아르헨티나는 정말 어려운 시기였다. 페소의 평가 절하가 나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이민 올 때 최고 환율 1,810원으로 환전해 와서 1:1로가게를 인수했는데 다시 페소 평가 절하는 설상가상이었다. 더욱이 특별한패션 감각이나 사업에 재주가 없었던 내 탓으로 사업은 제자리걸음이었다.계절이 끝나고 사업 손익계산서를 정산해 보면 남는 장사가 아닌 초기 자본잠식해 가는 손해 보는 장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법 크게 운영을 했고매출도 올렸지만 결국 돈을 벌어서 가게 월세에 모두 충당한 것뿐이었다. 그러나 달리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에 3년마다 재계약을 하는 가게를4번 갱신했으니까 12년은 꼬박 버틴 셈이다.
그렇게 힘든 가게를 재계약을 두 번 갱신 했을 즈음 작은아들은 중학교를마치고 부에노스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다. 부에노스 대학은 국립으로 학비는 전액 무료였다. 그런데 2학년 때 갑자기 한국에서 연기를 전공하고 싶다고 했다. 고민 끝에 허락을 했고 결국 단국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입학을 했다. 그때부터 매 학기마다 등록금과 자취하는 생활비를 보내야 했다. 아들한테 직접 이야기는 못 하지만 가게에 재투자할 여력이 없어도 학비는 보내야 하는 처지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당시에 우리가 너무 힘들어하는것을 보고 아들의 한 한기 등록금을 대납해 준 지인도 있다.
나날이 힘겹게 겨우겨우 사업을 해나가는 동안에 몸은 살이 빠지고 갈수록 일상이 힘들 정도로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가게 문을 열고는 가게 뒤편공터에 안락의자를 펴고 누워서 시간을 보냈다. 당시에는 가입한 의료보험도 없어 건강관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검사도 제때 하지 못했고 B형 간염보균이라 쉽게 피곤해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매달 한인 의사가 있는 개인 병원에서 혈액검사를 하고 관리를 해나갔다. 그러던 중 급기야 검사 결과를 본 의사가 빨리 보호자 오게 하라고 했다. 아내가 가게 문을 급히 닫고친구의 차를 타고 왔고 나는 긴급 국립병원에 이송되었다. 그 국립병원에근무하는 간 전문의가 한인 개인 병원에 와서 매월 한 번씩 나를 진료해 왔기 때문에 그쪽으로 보낸 것이다. 소식을 듣고 아는 지인들은 거의 다 문병오고 난리가 아니었다. 그때 이미 나는 동포 사회에 유명 인사였기 때문에나의 입원 사실은 큰 뉴스가 되었다. 응급실 침대에 누워있을 때 급하게 달려온 몇몇 지인들은 황달에 노랗게 된 내 몸을 보고 많이 울기도 했다. 물론감고 있는 내 눈에도 하염없이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훗날 들은 이야기지만 당시 상황은 많은 사람들이 ‘상당히 힘들겠다’는 이야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 아내는 병원 안에 있는 작은 기도실에서 ‘성모님을 쳐다보니 웃고 계시더라’면서 나를 위로해 줬다. 밤이면 보호자도 없이 희미한 창문만 보며 서러운 나날을 보냈다.
국립 무료 병원이라 오래 있을 수는 없어서 열흘 만에 퇴원하였다. 급성간염은 편하게 쉬면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면 된다고 했다. 최선을 다하여의사의 지시에 따랐고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렇게 두어달이 지나는 중에 가게는 폐업을 하게 되었다. 그 많은 물건과 기자재를 정리하는데 단 한 번도 나가보지 못했다. 재고를 싸게 팔아 정리하는 가운데에서도 인간들의 목에 찬 욕심에 가슴 아파해야만 했다. 외상으로 물건을가져가서 금액을 자르고 주는 사람도 있고 현지인에게 팔아주겠다며 물건을부쳐주고는 수금 건에 관해서는 무책임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면서 가게정리라는 힘든 일을 아내와 아들이 모두 마무리하였다. 정리하고 남은 것은아무것도 없었다. 평소에 가게 할 때에는 하루에 옷 한 벌만 팔아도 평생 먹고 산다고 했는데 정리하고 나니 빈손이었다. 몸은 편하게 누워있지만 가족에게 미안한 생각만 있을 뿐 도울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마냥 드러누워 있을 수는 없었다. 적자 경영이라도 매일 현금을 만지다가 그마저 끊기고는 매일의 생활이 문제가 되었다. 한국에 있는 동생들에게 손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인들에게 조금씩 융통해서 생활을 해나갔다.
몸이 대충 회복될 즈음 지인이 한인이 경영하는 의류 생산 공장에 취직을알선해 주었다. 서로가 사정을 잘 아는 사이라 바로 출근했다. 회사에서 내가 하는 일은 특정된 것은 없었다. 제품 운반을 위한 운전부터 정리 정돈에청소까지 눈에 보이는 모든 일은 다 해야 하는 위치였다. 특별히 나의 전력을 아는 사장의 지시로 중요한 재무 관리까지 대충 훑어보는 업무도 간간히주어졌다. 나에게 주어진 직위는 소속된 부서는 없지만 그냥 ‘부장’이었다.
아내는 아침이면 평생 한 번도 해보지 않던 남편의 도시락을 싸고 나는 큰불편 없이 열심히 일을 했다. 경영에는 재주가 없었지만 시키는 일은 참 열심히 했다는 생각이 든다. 한 번은 그 공장이 교포 사회에서 성공한 기업이라신임 대사가 방문하게 되었다. 회사 사장이 밖에서 공장으로 전화를 해서 대사가 방문하니 나 보고 불편하면 잠시 밖에 나갔다 오라는 전갈을 보냈다.그때 나는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남미서부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었다. 사장은 동포 사회에 대표 단체인 민주평통과 주재 공관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 사장의 깊은 배려로 대사 방문 시간 동안에 밖에 나가서 피해 있는 중에 온갖 생각이다 들었다. 그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15기에 이어 16기 협의회장 4년의 임기를 마치고 17기에는 남미 최초 상임위원까지 하고 국민훈장 석류장을 전수받는 영광도 누리게 되었다.
나는 그렇게 공장 생활을 시작했지만 큰아들이 하는 일이 없어졌다. 새롭게 시작할 자본이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아르헨티나에는 젊은이들은 전문인이 아니면 거의 대부분이 의류 관련 일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자영업이 아니면 남의 공장이나 가게에 고용되어 직원으로 일할 수밖에 없다. 그때 마침 재외국민 초청 고국 문화체험 팀에 추천이 되었다. 한인 사물놀이 팀장으로 열심히 봉사한 것을 인정받은 것이다. 그동안 마음고생에 힘든 생활을 보낸 것 같아 조금이라도 쉬었으면 하는 생각에 잘 다녀오라고했다. 부모의 결정에 따라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이민 사회에서 힘들어하는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들의 또 다른 인생의 전환점이 될 줄은 당시만 해도 몰랐다.
큰아들이 한국 나가 있을 때 작은아들이 대학을 마치고 군에 입대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즈음 조국 방문 행사를 마치고 들어와야 할 큰아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동생 입대 일자에 자기도 동반 입대하겠다는 것이다. 재외국민 자원입대에 관해 구체적으로 미리 확인했고 많이 알고 있었다. 재외영주권자이기 때문에 군 복무가 의무는 아니지만 아들이 그렇게 말하는 마음속에는 한국에 살고 싶어 하는 숨은 뜻이 있었다. 아르헨티나에 있을 때집안일에 깊이 관여하지 않았고 한국으로 떠나기 전 내가 아프고 가게를 정리할 즈음, 제일 어려운 시기에 겪은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던 터라 그 마음을 이해할 것 같았다. 그래서 큰 고민 없이 그렇게 하라고 힘을 실어줬다.
두 아들이 논산 신병교육대에 입소하던 날, 두 형제를 훈련소 안으로 들여다 보내고 막내 여동생은 집에 와서 대성통곡을 하고 울었다는 이야기를뒤에 들었다. 그러나 두 형제는 훈병 84번 85번으로 침상도 옆자리에서 같은 중대 소속으로 훈련을 무사히 잘 마쳤다. 나이가 24살 28살로 늦은 입대가 버틸 수 있는 힘이 된 것이다. 신병 훈련을 모두 마치고 작은아들은 훈련소 조교로 남게 되었다. 큰아들은 부산 태종대 부대로 배치받았다. 큰아들은 당시 중대장과 같은 또래로 서로 배려하면서 잘 지냈고 논산 훈련소조교 작은아들은 신년 초 육군참모총장과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를 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당시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사무처 소식지에 두 아들의입영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하여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일간지를 도배를 하기도 했다. 부모를 떠나서 군 복무 20개월을 무사히 마치고 만기제대를 할 때까지 부모로서 한 일은 단 한 차례 작은아들 면회가 전부였다.
두 아들이 아무 문제 없이 대한민국 육군 현역병으로 잘 복무하고 있을때, 부부만 남은 아르헨티나에서는 또 다른 변화를 시도하였다. 힘들게 시작한 나의 공장 생활도 1년 만에 그만두었다. 공장에서 받는 월급으로는 우리 부부의 생활도 쉽지 않았고, 내 몸도 점차 회복이 되었기 때문에 다른 일을 찾아야 했다. 그동안 아내가 집에서 혼자 하던 하청 일의 규모를 키워서같이 하기로 하였다. 나보다는 아내의 친화력이 도움이 되어 점점 규모도 커지고, 좋은 거래처를 확보하는 바람에 꾸준히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번듯하게 큰 가게를 할 때보다 아내의 얼굴에는 늘 웃음이 가시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큰 욕심 없이 먹고살고 운동하고 여행 즐기며 약간의 여유를 만들어 노후를 준비하면 되겠다 싶었다.
지난해 12월 28일부터 3주 정도 우리 부부는 한국에 다녀왔다. 그동안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막내 여동생 부부의 지극한 효성 덕분에 불효에 대한 큰 부담 없이 살아왔다. 그러나 지난해 서울에 사는 아들이 부산에 할머니를 뵈러 가서 우연히 보내준 사진 속의 어머니 모습은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걸어가시는 어머니가 손자의 부축을 받으면서 오른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계셨다. 순간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생애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가능하면 다른 일보다는 어머니 곁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연로하신 홀어머니가 한국에 계시고 두 아들이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 살고있는데 그 식구들과 지구 정반대에서 우리 부부가 살고 있다. 머리가 복잡하다. 마음은 어디에서도 편하지 않다. 올 초 마지막 뵐 때는 이제 돌아가면언제 다시 뵐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르헨티나는 갑자기 3월부터 강제 이동 제한을 하기 시작했다. 인터넷미사 드리고 하루하루 기도하는 심정으로 버티고 있다. 이민 22년이 넘어강산이 두 번 바뀔 수 있는 긴 시간에 이렇게 생생한 이민 체험의 파노라마를 그려 낼 수 있다는 것으로 위로를 삶는다. 부산상고 졸업과 부산은행 입행, 그리고 노동운동과 위원장, IMF와 이민, 순간순간 잘되려는 극적인 변신이었지만 가족과 더불어 사는 소박한 삶보다 더 잘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이제야 느낀다. 이 기간이 후회하지 않을 새로운 이민에 대한 대차대조표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기회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