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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수기] 시베리아 찬바람속에서 11년 인생살이
작성일
2021.02.01

[우수상 - 체험수기 부문]


시베리아 찬바람속에서 11년 인생살이


리 삼 민 / 중국


금년 음력설부터 꼬박 석 달 동안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집 안에 갇혀 있다가 이젠 나와서 활동해도 된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게이트볼 친구들이 대련시 로후탄 해변 가에 모이기로 약정했다. 백화가 만발하는 5월의 해변 가자연 경치는 완전히 새 모습을 드러냈다. 산기슭에 피어난 꽃들이 산들거리는 봄바람에 해쭉해쭉 웃어주고 티 없이 깨끗한 바다 위에선 갈매기들이 훨훨 날아예면서 오서 오라 길손들을 반긴다. 이른 아침인데도 시민들과 미국,캐나다, 러시아 등 여러 나라들에서 찾아온 유람객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바닷가를 산책하고 있다. 문득 알아들을 수 있는 러시아어가 나의 발목을 잡았다. “드와스지, 더부라 우드람(안녕하세요? 아침 인사드립니다.)”“그그제나? (요즘 장사 어때요?)” 키꼴이 후리후리한 러시아인들의 활달한 성격 그대로 마중 나온 중국 쪽 회사 왕 사장과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 러시안들을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노 라니 장장 11년 동안 러시아 시베리아 찬바람 속에서 인생을 갈고닦은 잊을 수 없는 사연들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첫 풍랑

1978년 11월, 중국공산당 제11기 3중 전원회의가 열린 후 중국의 시장경제는 서서히 대문을 열기 시작했다. 잠에서 깨어난 중국인들이 먼저 농촌 호도거리 생산책임제를 실시하고 도시와 농촌에서 개체 기업, 상점, 음식점들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때 내가 살던 흑룡강성 동녕현은 러시아와 강하나를 사이 둔 병강오지였는데 밤이면 러시아 마을에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1990년 중러 외교 관계가 회복되면서 고요하던 중러 변경은 들끓기 시작했다. 중국동녕해관이 우리 마을 동쪽에 새로 세워지고 유람객들과 상품들을 실어 나르는 수많은 버스와 트럭들이 매일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때 나는 동녕현에서 국가공무원으로 있었다. 그때 내 한 달 월급 고작 60위안이었고 직장 일의 필요로 시골로의 외출이 잦았다. 임무를 가지고 시골 농촌에 하향을 내려가면 높이 앉은 사람들이 이래라 저래라 지시만 내리는 것이 불만스러워 그 불만을 속임 없이 토로하고 올라오면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내가 하향 임무를 완수 못 했다고 호통질을 하였다. 그런 “두병간부”질을 계속 하는 것이 나는 지겨웠다. 그리하여 1992년 3월에 물결따라 비실비실 떠내려가는 물고기처럼 러시아로 떠나게 되었다. 문을 열면 보이는 건 첩첩산중이요, 들리는 건 새소리 뿐인 변강오지에서 40년 살아온 내가 버스를 타고 강을 건너 뽈따보카 러시아 세관을 통과한 후 시베리아 찬바람을 헤치고 나갈 때 나의 시야에 안겨 오는 풍경은 우물 안의 개구리가 뛰쳐나와 바깥 세상을 구경하듯이 모든 것이 생소했다. 끝없이 펼쳐진 들판에 십여 세대씩 모여 사는 옛 꼴호즈 농장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살고 꿩 무리들이 먹이를 찾고 있는 길가엔 쓰다 버린 낡은 뜨락또르와콤파인들이 널려있었다. 더욱 나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던 것은 소련 공산당이 갓 해체된 사회 환경이였다. 우수리스크시 중심에 세워졌던 레닌 동상이 하룻밤 사이에 송두리째 던져버려 졌고 나라 국기가 바뀌어졌으며 우즈베키스탄, 백러시아, 아제르바이잔 등 가맹공화국들이 갈라져 나가다 보니 서로보는 척도 하지 않았다. 50여 개의 우수리스크시 복장, 신발, 식품 국영기업들이 모두 문을 닫다 보니 시장엔 온통 중국 상품이고 헬레브(찐빵)를 사는 시민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광경이 비일비재였다. 사회 치안은 더욱 험악했다. 경찰들의 월급이 적다 보니 쩍하면 중국인들의 호주머니를 털어 제 안속을 차렸고 제일 무서운 것이 후리칸(깡패 무리)이였다. 그들은 중국인들의 숙소를 들이치고 밤이면 길을 막고 돈을 빼앗았다.내가 우수리스크시에서 철물 장사를 시작하던 어느 날 밤이었다. 이튿날 아침 8시(러시아 시간으로 아침 6시)에 철물 한 트럭을 중국으로 보내겠으니 빨리 돈을 가져오라는 전화가 왔기에 나는 이미 준비했던 5000달러를 품속에 넣고 내가 주숙하던 니커와호와 125번 호텔을 떠났다. 택시를 잡아타고 나꼴라이 사장 집에 거의 당도하여 골목을 빠져나가는데 난데없이 두 강도가 불쑥 뛰쳐나와 시퍼런 칼을 나의 가슴에 들이대면서 돈을 내놓으라고 을러멨다. 난생 처음 이런 봉변을 당하다 보니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품속에 넣은 돈이 거덜 나는 날이면 나는 끝장이다. 아니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이렇게 생각을 바꾼 나는 굽석거리면서 돈을 꺼내는 척하다가 벼락같이 두 놈이 선 사이로 빠져나갔다. 깡패들과 이삼 미터 공간이 있으니 나는 이리저리 피할 수 있었다. 바로 이때 승용차 한 대가 이곳을 지나가다가 내가 봉변당한 장면을 보고 큰 스패너를 들고 차에서 내렸다. 체구가 웅장한 러시아 사나이가 나서자 두 젊은 깡패들은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았다. 나는 목숨을 건져준 러시아 운전수의 두 손을 잡고 “스바시바. 스바시바!”(대단히 감사합니다)라고 연신 감사를 드렸다. 운전수는 찬찬히 나를 뜯어보더니 “당신 고려 사람 아니요?” 라고 묻는 것이었다. “옳습니다. 중국에서 온 조선 사람입니다.” 너무나 고마워 나는 당장 200달러를 운전수의 손에 쥐어주었더니 그는 허허 웃으면서 “난 돈 때문에 당신을 구해준 것이 아니오. 저 앞에 우리 집이 있으니 그리로 가서 차 한잔마시기오”라고 말했다. 그 고려인의 이름은 박 엘렉세이라고 부르는데 나는 그의 집에 가서 고추에다 감자소고기국밥을 먹으면서 그 가정의 피눈물 겨운 역사를 들었다.“나의 고향은 함경남도 오매리오. 지난 세기 20년대에 일본 놈들이 조선을 침략하고 하도 못살게 굴어 중국 연변을 거쳐 우수리스크에서 100여 리 떨어진 깊은 산골에 숨어 살았소. 초막을 짓고 황무지를 일구어 쌀밥이나 먹을 만했는데 후에 스탈린 시대에 일본 특무들과 우리 고려인들을 가려내기 어렵다면서 하룻밤 사이에 우리 마을 100여 명 고려 사람들을 강제로 기차 짐바구니에 싣고 멀고 먼 우즈베키스탄으로 가다가 허허벌판에 우리들을 버렸댔소. 휴~ 그때 고생은 말도 마오. 물이 없어 웅덩이에 고인 물을 마셨고 식량이 없어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겨우 목숨을 건져냈소. 그래도 우린 그때 ‘우리는 한 핏줄이다. 힘을 모아 난관을 이겨나가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괭이로 버들 뿌리를 파내고 강물을 막아 백 헥타르 논을 풀었소. 자네도 우리와 한 가족과 같으니 여긴 중국과 다르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리고 여기가 여관보다 안전하니 저 사랑채에서 먹고 자오. 집세는 여관비 절반만 내오.” 적이 격동된 박 알렉세이 머리칼이 파르르 떨리었다. 언어 소통이 전혀 안 되고 하마터면 깡패들에게 목돈을 털릴 뻔했던 나는 그날 밤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 이튿날부터 나는 아진(하나), 드와(둘), 드리(셋), 와크잔(기차역)…… 하는 식으로 러시아어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피눈물 겨운 장사

구소련이 금방 해체된 후 루블이 시세가 급하강하여 원래 1루블이 1위안하던 것이 한 달 사이에 50루블 주어야 1위안을 바꿀 수 있었고 물가도 날마다 높아졌다. 그처럼 흥성하던 철물 장사도 막을 내리고 우수리스크 시장의 소상품, 복장 장사도 러시아 소비 인구가 적다 보니 하강선을 그었다. 어느 날, 통역이 나를 찾아와 지금 구리 장사가 돈을 버니 빨리 시작하라고 했다. 따져보니 물건값, 교통비, 해관세를 물고도 한 트럭(17톤)에 만 위안을 벌 수 있었다. 그런데 구릿값 17만 위안을 선불해야 한다고 한다. 구리를 신시베리아에 가서 실어 온다는 것이었다. 당시 17만 위안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고 사기당하면 그 책임을 누가 지냐고 통역에서 따지고 들었더니 통역은 걱정 말라며 나를 데리고 소개하는 사람의 집을 찾아갔다. ‘유라’라고 부르는 사장은 자기 명함장과 집 서류를 내놓으면서 만약 일을 성사시키지 못하면 이 집을 내놓겠다는 것이었다. 통역하고 재삼 토의한 후 나는 뭉칫돈을 그 자리에 소개인에게 건네주고 사인까지 받았다. 사흘 후 통역이 신시베리아에서 이미 구리를 발송했다는 통지서를 나한테 가져다주면서 이제 사흘 후면 구리가 우수리스크에 도착한다고 알려 주었다. 그런데 웬걸, 사흘, 나흘, 한 주가 지나도 소식이 없었고 통역은 자기도 잘 모르겠다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후끈 달아오른 나는 통역을 데리고 유라 사장네 집을 찾아가니 집은 텅텅 비어있었다. 이웃집에 물어보니 이 집은 셋집이고 유라는 어제 밤차로 모스크바에 갔다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유라의 명함장, 집문서,구리 발송표 모두가 가짜였다. 내가 준 뭉칫돈은 유라가 챙겨가지고 도망친 게 분명했다. 하나님 맙소사! 낯설고 물선 이국땅, 온 나라가 산산 흩어지고 사회 치안이 엉망이 된 러시아 이 넓은 땅 어디 가서 나의 돈을 찾는단 말인가. 땅을 치며 통곡해도 응대가 없고 하늘을 우러러 하소연해도 나를 외면했다. 빈털터리가 된 나는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아내가 하는 말이 숱한 빚꾼들이 우리 집에 찾아와 못살게 굴면서 내가건너가기만 하면 당장 김치움에 가두겠다고 벼르고 있으니 죽어도 건너오지 말라는 것이었다. 하늘이 노랗고 앞이 캄캄했다. 절망의 낭떠러지에서 나는 그만 굳어져 버렸다.

지금의 나는 초나라 시인 굴원이 “세상이 온통 흐려져 있는데 나 혼자 맑고 깨끗하였기에, 사람들 모두가 욕망에 눈멀었는데 나 혼자 맑은 정신이었기에 반대파의 비방으로 쫓겨났구나”를 외치며 멱라강에 몸을 던지고 만 신세가 되었다. 돈지갑이 거덜이 나다 보니 가끔 시장에서 중국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여기저기서 비난의 목소리가 비수처럼 나의 가슴을 찔렀다. “책상머리에 앉아있던 사람이 무슨 장사를 한다고? 국가에서 주는 월급이나 타먹고 살 거지……” 나는 40대 나이에 독수공방하는 그리운 아내와 대학에서 식비마저 떨어져 안달복달하는 둘째 딸을 생각하노라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내가 음식을 전폐하고 한숨만 토하던 어느 날 밤, 80세 언덕을 넘어선 주인집 올랴 할머니가 조용히 나의 방으로 건너오셨다. “세르게이(나의 이름을 중국말로 부르기 어려워 주인집에서는 나의 이름을 세르게이라고 불렀음.) 작년까지만 해도 사과를 꺼삐딴(급이 있는 사람)들만 먹고 우리 같은 백성들은 구경도 못 했소. 이제부터 중국의 과일과 채소를 무역할 수 있다오. 우리 둘째 딸이 울라디보스토크에서 무역 회사를 차렸소. 거기로 가서 중국의 과일과 채소를 날라다 팔아보오. 돈이 없으면 내가 전화할 테니 우리 딸이 도와줄게요. 할머니의 말씀은 절망의 낭떠러지에서 맴돌고 있던 나에게 힘과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 이튿날, 나는 울라디보스토크에 가서 할머니의 둘째 딸 마리나를 찾았다. 그녀는 무역 수속, 까마스(20톤 물건을 실을수 있는 트럭), 창고를 알선해 주고 중국에서 사과, 배, 귤, 양배추, 양파 등 과일과 채소를 실어 오라고 알려 주면서 까레니나 1호 창고를 알려 주었다. 일자리와 자금이 풀렸으나 숙소와 통역이 문제였다. 여관에 들자니 비용이 엄청나서 창고 사람을 찾아 쓰다 버린 허술한 창고를 손질하여 거기서 먹고자라고 했다. 오랫동안 비어있던 허술한 창고이기에 난방 공급이 안 되어 난로를 지펴야 했고 물도 백여 미터 밖에서 길어 와야 했다. 밤낮 이틀 동안 틈난 벽 구멍을 막고 문을 손질하고 장작을 패서 불을 피워 저녁을 대충 요기한 후 잠자리에 들었다. 밤 12시가 되었을까, 곤히 잠든 나는 갑자기 얼굴이 선뜩선뜩해져 손으로 만져보니 커다란 쥐들이 나의 얼굴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후다닥 깨어난 나는 전등을 켜고 살펴보니 세 마리 큰 쥐들이 한쪽 구석에 쌓아 놓은 쌀이며 감자, 무를 사정없이 갉아 먹고 있었다. 너무도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 곁에 누운 통역과 어떻게 하겠냐고 물었더니 “이런 집이라도 돈을 내지 않고 창고와 가까우니 참고 견딥시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새벽이 되니 난로 불이 꺼져 길어 온 물이 꽁꽁 얼었고 채소도 쥐들이 몽땅 쏠아 버렸기에 아침도 굶어야 했다. 성탄절이 코앞에 닥쳤기에 우리는 부랴부랴 준비를 다그치고 울라디보스토크에서 처음으로 “동방 과일, 채소 도매시장” 간판을 내걸었다. 러시안들은 성탄절과 신정을 중국의 구정처럼 성대히 치른다. 12월 23일, 러시아 극동지구에서 제일 큰 도시인 울라디보스토크 까레니나 1호 도매시장에다 처음으로 20톤의 과일과 채소를 부렸더니 하루도 안 되는 사이에다 팔리어 해관세, 수수료, 교통비 등 비용을 다 갚고도 순수익 6000 위안이 남았다. 나는 감옥에서 풀려나온 사람마냥 안도의 숨을 쉬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하지만 장사의 길은 하나 또 하나의 걸림돌이 나의 길을 막았다. 중국 목단강에서 18톤의 과일과 채소를 트럭에다 싣고 중국 수분화 해관, 러시아커와스키노와 울라디보스토크 해관 검사를 마치고 우리 창고까지 도착하려면 적어도 300킬로미터, 15시간 이상 달려야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 있다. 그런데 겨울이면 과일이 자칫하면 얼고 여름이면 썩을까 봐 가슴을 조여야 하고 빨라야 새벽 1시 넘어서야 짐을 부린다. 짐을 부리는 러시안들이 모자라면 할 수 없이 우리가 두 팔을 걷고 나서야 했고 아침 4시(러시아 시간으로 아침 6시)면 창고로 나가야 했다. 더욱 골치 아픈 일은 그 무슨 여권 검사요, 위생 검사요, 안전 검사요 하면서 중국 사람들을 못살게 굴었다. 한 번은 금방 들어온 과일을 다 부리고 아침 식사도 못한 채 창고로 나와 물건을 파는데 두 경찰이 내 앞에 서서 여권을 검사한 후 포도를 맛보자고 청을 들었다. 물건 사러 온 사람들이 많았기에 나는 카운터에 올려놓은 포도 상자를 가리키며 “옜다. 노유이 윈나그레. 모르나 바브로브”(새로 들어온 포도인데 맛보시오)라고 말했다. 그런데 얼마 후 그 경찰은 무작정 나를 끌고 자기 차에 앉으라고 협박했다. 내가 “여권도 문제없고 시간이 없소”라고 대꾸했더니 다른 한 경찰이 나를 자기들의 차에 싣고 허름한 건축 공지로 갔다. 그곳은 시공하다 중단한 건축 현장이기에 아주 음침한 곳이었다. 경찰 셋은 나를 차에서 끌어내리기 바쁘게 발길로 차고 주먹을 안기면서 “어째서 새 상자의 포도를 내놓지 않고 먹다 남은 포도를 우리에게 주었어?”라고 줄 욕을 퍼붓는 것이었다. 내가 여러 번으로 해명했지만 경찰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몰매를 들이대던 경찰들은 피투성이 된 나를 팽개치고 가버렸다. 한식경이 지나 정신을 겨우 차린 나는 창고에 전화를 걸어 마리나에게 당장 오라고 통지했다. 얼마 후 달려온 마리나에게 신고 했더니 그는 한숨만 지으면서 “여기는 중국과 달라요. 경찰에 신고해도 소용없어요. 참으세요”라고 했다.길은 좁고 사람이 많게 되면 언제나 경쟁을 동반하게 된다. 내가 울라디보스토크에서 돈을 잘 번다는 소문이 퍼지자 우수리스크에서 온 백여 명의 아제르바이잔, 베트남, 중국 장사꾼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장사꾼들은 돈에 혈안이 되어 서로 물건 값을 낮추어 고객들을 자기 앞으로 끌고 가고 과일 상자 밑에 비싼 공업품을 깔아 밀수 장사를 하는가 하면 베트남 사람들은 루블과 달러의 환율을 속여 중국 사람들의 돈지갑을 후려냈다. 한 번은 나와 단동시에서 온 왕 씨가 동시에 과일을 차에서 부리고 사과를 도매하는데 그가 파는 사과값이 나보다 훨씬 쌌다. 파는 값이 싸니 나의 물건을 사러 온 고객들이 슬그머니 그에게로 쏠리었다. 하도 이상하여 내가 건너다보았더니 세수도 안 하고 허술하게 옷차림을 한 두 손님이 왕 씨 앞에 다가가서 “워드까 예시?”(소주 팔아요?)하고 묻는 것이었다. 왕 씨는 손님의 행동과 옷차림을 보고 “예시, 예시”(있고 말고요)하면서 창고 구석에 둔 중국에서 들여온 소주 두 상자를 꺼냈다. 바로 그 찰나, 두 손님은 품에서 경찰증을 꺼내 보이면서 과일 상자 밑에 깔아 건너온 소주 50상자를 당장 몰수하고 밀수죄로 벌금 만 위안을 안기고 감옥으로 붙잡아 갔다. 해관세 받으러왔던 마리나는 이 광경을 목격하고 나에게 “돈을 벌어도 깨끗하게 벌어야해요”라고 일깨워 주는 것이었다.


농장을 꾸리다

사랑과 베풂은 국경이 없어도 음식 문화와 풍속 습관은 나라와 지역이 서로 다르다. 러시안들은 고기와 우유, 차와 빵을 즐겨 먹고 채소는 주로 감자, 양파, 토마토와 오이다. 세계에서 국토 면적이 1위를 차지하고 러시아 대부분 지역은 기후가 차기에 과일은 주로 미국, 캐나다 등 해외에서 수입했고 1990년 이후에는 중국산 과일을 주로 수입한다. 해마다 가을철이면 집집마다 그 이듬해 여름까지 먹을 감자를 움에다 저장하며 오이는 가란 스끼라고 하는 단 한 가지 품종의 오이를 먹는데 극동 지구에서 가장 큰 온실이알죠무(지명)에 있다. 러시안들은 감자를 매끼마다 먹는데 소고기탕에다 넣거나 삶은 다음 으깨서 간을 맞춘 다음 헬레브 아니면 베리맨(물만두)과 섞어 먹는다. 어느 날, 마리나가 나를 찾아와 울라디보스토크시 가까운 도에다 땅을 얻어줄 테니 농장을 꾸려 거기서 나오는 채소를 과일과 섞어서 팔아보라고 했다. 농사, 특히는 채소를 심어본 적 없는 나에게 있어서 농장을 꾸린다는 것은 퍽이나 힘에 부치는 일이였다. 짬을 내서 마리나와 함께 밭에 가보니 나의 마음은 확 끌려들었다. 땅은 3만 평쯤 되고 비옥했는데 위치는산 아래에 있었다. 그리고 산에는 고사리가 낫으로 벨 정도로 많았고 산 아래로 자그마한 강이 흐르고 오랫동안 묵은 밭은 쑥대가 무성했다. 나는 과일 도매 시장을 계속하는 한편 농장을 꾸리기로 결심했다. 이를 위해 나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구정 전으로 20명의 노무 일꾼들의 여권과 출국 준비를 끝내고 예전에 생산대장 일을 했던 류 씨를 총 인솔자로 초빙했다.농장을 하기 위한 준비로 나는 또 러시아에서 작은 경운기 한 대를 사고 중국에서 비닐판막, 비료와 살충제 등 생산 물자를 러시아로 날라갔다. 준비가 다 되었으니 달러가 수북이 쌓여 들 것 같아서 기쁘기만 했다. 하지만 풀기 어려운 애로가 하나 둘 씩 앞을 가로막았다.청명이 지난 후 땅을 갈아 번지고 비닐하우스 받침대를 세우고 땅을 고르는데 어느 하루 러시안 두 명이 경찰을 앞세우고 나를 찾아왔다. 그들은이 땅은 자기네 땅인데 왜 허락도 없이 농장을 꾸리냐며 따지고 들었다. 내가 마리나에게 전화를 걸어 빨리 와서 이 문제를 해결하라고 했다. 한 시간후 마리나가 자가용을 몰고 와서 그들에게 해명했다. 첫째, 원래 이 땅은 옛꼴호즈 농장 땅인데 10여 년 버린 땅이라는 것. 둘째, 중국 사람들의 여권은 모두 합법적이고 나라 법률을 어기지 않았다는 것. 셋째, 마리나가 사전에 울라디보스토크시 시청 해당 부문을 찾아 승인까지 받았기에 빈틈없다고 했다. 하지만 경찰은 나의 여권을 돌려주지 않았으며 자기들이 옛 꼴호즈 농장 주인이기에 안 된다고 잡아뗐다. 마리나가 시청으로 같이 가자고 해도 그들은 들은 척도 안 했다. 뜨거운 가마 위에서 맴돌아 치는 개미마냥 바질바질 속이 타 들어 가는 사람은 바로 나였다. 농장에서 일할 노동력들을러시아로 입국시키기 위해 수속을 하느라고 이미 10여만 위안을 밀어 넣은 마당에 지금은 경찰이 나의 여권을 돌려주지 않으니 한 치 발자국도 움직일수 없었다. 나와 마리나, 류 대장은 꼬박 사흘 동안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합의하여 결국 밭 주인이 시내로 들어가는 길수리, 임시 일군 모집과 운수 차량을 해결해 주기로 하고 가을에 총 수입 중 20프로를 밭 주인에게 주는 것으로 계약을 했다.그다음 애로는 오이 종자였다. 오이 종자를 온실에서 싹 띄워야 했는데 오이 종자를 살 수가 없었다. 가란스끼오이 종자는 알죠누시에 가야 살 수 있었는데 온실 사장을 찾아갔더니 자기들도 모자라니 종자가 없다고 잡아뗐다. 속담에 “동행업자 서로 원수”라고 하듯이 후에 알고 보니 알죠무 온실의 오이 절반은 울라디보스토크시에서 판다는 것이었다. 내가 그 오이를 재배하면 자기들의 장사에 영향이 미치는 건 뻔한 사실이었다. 내가 오이 종자 때문에 안달복달할 때 마리나가 찾아와 한국 사람한테서 그 오이 종자들을 샀다고 알려 주었다. 값도 알죠무 온실에서 파는 값보다 훨씬 쌌다. 오이 종자를 온실에서 싹 틔워 비닐하우스에 옮길 때쯤, 또 새로운 애로에 부딪쳤다. 이 오이 품종에는 절대로 화학비료를 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중국의 『손자병법』에 “길을 가다가 막히면 고집스레 옛 길을 택하지 말고 새 길을 바꾸어 가라”는 말이 있다. 나는 여러 곳을 찾아다니며 물었더니 하바류스크에서 농장을 꾸리는 하북성 왕 씨가 조용히 나를 불러 오이 포기에다 삶은 콩 다섯 알씩 파묻으면 오이가 잘 자라고 맛도 좋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 하였더니 과연 큼직큼직한 오이들이 주렁주렁 달리고 오이 맛도 아주 좋았다.그때 나는 오이가 나오는 족족 나의 창고로 날라다 팔았는데 중국산 과일과 함께 아주 잘 팔렸다. 이외에도 2만 평 되는 밭에다 감자, 무, 양배추,당근 등 채소를 심은 후 움에 저장하였다가 밭 주인이 보내주는 트럭에다 싣고 울라디보스토크에 200여 개 되는 식품 상점과 시장에 팔아 톡톡히 수입을 올렸다. 그때 나는 모든 지출을 빼고도 순수입 6만여 위안을 벌었다.비록 울라디보스토크 과일, 채소 도매상들이 백여 명 부쩍 늘었지만 나는 당시 채소와 중국산 과일과 채소를 함께 팔았기에 자리매김은 갈수록 튼튼했다. 기회는 언제나 준비된 사람에게 차려지는 법이다.


가는 정 오는 정

나는 장사 시간이 길어질수록 부를 쌓아가는 비결은 가는 정, 오는 정으로 인간성을 지키는 데 있다는 것임을 뼈저리게 느꼈다. 다른 장사꾼들은 값을 낮추고 복장이나 소상품 같은 것을 차 밑에 실어 들이는 수단으로 돈을 긁어모으려고 했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철부지 아이들이 엄마와 같이 창고에 들어와서 빨간 사과를 보고 먹고 싶어 손가락을 빨 때 나는 서슴없이 먹음직한 사과를 아이 손에 쥐여 주었으며 생활 형편이 어려운 장사꾼들이 외상으로 상품을 달라고 할 때에도 사기당할까 봐 우려할 때가 많았지만 주저하지 않았다. 한 번은 바레와 시장에서 과일을 파는 따냐가 아침 일찍 물건 사러 우리 창고로 왔었다. 사과 40상자를 차에 싣고 뒷걸음하는데 그만 지나가는 다른 짐차가 따냐의 다리를 쳤다. 사고를 친 그 남자 운전수도 내가 잘 아는 친구였다. 따냐의 남편은 폐암으로 죽음을 앞둔 시한부고 아이들도 모두 학교에 다니다 보니 치료 비용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여인을 병원으로 실어갈 사람도 없었다. 나는 하던 일을 창고 일꾼들에게 맡기고 바로 택시를 불러 병원으로 향했다. 따냐의 한 달간 치료비와 약값이 중국 돈으로 6000 위안은 되었는데 그 돈을 모두 내가 물어주었다. 퇴원하는 날 따냐는 너무도 감사해 “발쑈이 스바시바, 지베 노체니 호르소 첼로이크!”(마음씨 좋은 사람, 대단히 감사합니다)며 연신 감사를 표했다. 따냐가 퇴원한 후 이 일이 입소문으로 퍼지자 갈수록 많은 장사꾼들과 러시아 친구들이 우리 창고를 찾았다. 그리고 따냐도 그 은정을 잊지 못하겠다면서 성탄절 때면 색다른 음식이나 기념품들을 싸들고 나와 함께 즐거운 성탄절을 보내곤 했다.해와 달이 바뀌어 시베리아 찬바람 속에서 나는 장장 11년 장사를 했다.그 사이 나는 피나는 노력으로 어깨를 누르던 20만 위안의 빚더미를 허물어버렸고 둘째 딸의 4년 대학 학비를 대주었으며 시내에다 아파트까지 장만했다.“깊이 잠든 정원은 고요해 산들바람 속삭이네/ 아름다워라 내 맘 이끄는 황홀한 이 밤이여” 러시아 아가씨의 노랫소리가 나의 심금을 울린다. 어쩌면 수백 년 대를 이어 부르는 우리 민족의 “아리랑”처럼 “모스크바 교외의 밤”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러시아 온 나라 경제가 침체되고 코로나19가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도 흔들림 없이 러시안들은 삶의 저 언덕을 향해 줄달음 치고 있다. 장장 11년 시베리아 찬바람 속에서 인생을 갈고닦은 러시아가 사무치게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