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Main page
  2. 재외동포 광장
  3. 재외동포문학
  4. 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체험수기] 자아 정체성, 동포3세 이야기
작성일
2021.02.01

[가작 - 체험수기 부문]


자아 정체성, 동포3세 이야기


차 바 실 리 / 카자흐스탄


 1. 소련 시절

나는 카자흐스탄 동포 3세이다. 우리 할아버지 고향이 어디신지 잘 모른다. 외할아버지의 고향은 강원도 양양이다. 1920년생이신 우리 큰아버지는할아버지의 고향에 대한 많은 것을 아셨을 것이다. 그러나 1937년의 스탈린의 강제이주 공포에 관한 기억이 생생했기 때문에 조국과, 할아버지의 고향에 대한 질문들을 무시하시거나 “더 이상 묻지 마라!”라고 하셨다.둘째 큰아버지는 할아버지가 한글로 작성하신 가족에 대한 기록들을 보유하고 계셨는데 40년 전에 집에 화재가 나서 고향과 관련된 귀중한 모든기록들이 불타 버렸고, 화재 이후로 둘째 큰아버지가 돌아가셨다.우리 할머니도 한반도에서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하기 전 고향을 기억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강제이주를 당하신 분들에게 눈앞에는 그 당시 무서운장면들이 생생하게 기억나서 조국에 대한 이야기는 금기였다.셋째 큰아버지는 “연해주에서 우리 아버지는 조그마한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고 계셨다. 부자도 아니었는데 러시아 연해주에서 카자흐스탄으로 도착하자 아버지가 고발 없이 체포되었다. 그 후 할아버지에 대한 소식이 끊겼다”라고 말하셨다.거의 모든 고려인들은 1937년 강제이주에 관한 비슷한 비극적인 가족 스토리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원주민인 카자흐 민족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았으면 낯선 땅에서 생존하기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1930년대 중반에 유목 생활을 하는 카자흐 사람들은 몇 년 계속 가뭄을 당해 매우 어렵게생활하고 있었다. 먹이가 많이 부족해서 소, 양, 말들이 많이 죽었고, 가축들을 키우며, 고기를 주식으로 먹는 유목민들도 식량이 떨어져 많이 사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자흐 사람들은 머나먼 극동에서 카자흐스탄까지강제이주를 당하고, 카자흐 언어도 러시아어도 모르는 채 낯선 고려인들에게 먹을 것과 집을 나누어주고, 적응할 수 있도록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당시 우리 부모님은 어린 나이였다. 매우 가난한 어린 시절에다가 몇 년후 2차 대전이 일어났다. 그때 제대로 먹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농업 집단들이 독일군과 싸우는 소련군의 전쟁으로 군량미를 확보해야 하기 때문에 아이들까지 수확을 도와야 했다. 부모님의 이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이러한 어려운 생활을 하신 우리 부모님은 최선을 다해서 대학에 입학하셨다. 어머니는 러시아에서 공업대를 나오셨고, 아버지는 알마티 국립사범대학을 졸업하셨다. 대학을 마치고, 알마티로 돌아와 어머님이 몇 십 년 동안기계/장비 제작 연구소에서 근무하셨고, 아버지는 오랫동안 전문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셨다. 우리 부모님은 형과 나에게 “너희들은 우리보다 행복하게잘 살아야 한다. 우리가 물론 너희들이 잘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지만,너희들도 나름대로 노력해서 열심히 살아야 한다”라고 늘 하신 말씀이었다.알다시피 카자흐스탄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합(소련)에 소속된130여 소수민족이 사는 다민족 공화국이었다. 우리가 태어난 1970년대는소련에서 ‘가장 부유한 시기’라고 부른다. 그 당시 잘되는 소련의 이데올로기는 ‘곧 공산주의가 될 것이고, 우리 국민은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소비에트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절대적으로 믿고있었다.나도 공산주의 시대가 된 후 ‘소수민족’이란 개념이 사라질 것이고, 오직‘소련 사람’이 남을 것을 믿었다. 근데 초중학교에 다녔을 때 여름 캠프에서 자기 언어를 쓰는 지방 애들을 보면, ‘조금 있으면 과거에서 올라온 이런무식한 민족 습관이 반드시 없어질 거고, 다들 위대한 레닌이 쓴 러시아 말만 쓸 것이다’라고 생각했다.또한, 이러한 사고방식을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쳐주신 담임선생님이형성시켰다. 우리 담임선생님이 역사와 사회학을 매우 재미있게 가르쳐주셨기 때문에 우리 반 절반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인문대 역사학과로 입학하기로 했다.하지만 우리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몇 년 후 우리 머릿속에 소비에트 멘탈리티를 든든하게 심어주신 유태인 담임선생님이 갑작스럽게 이스라엘로이민 가셨다. 이 소식을 들은 우리 모두는 배신감을 느꼈고, 엄청난 충격을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인기가 많은 카자흐스탄 국립대학교 역사학과로 많은 고등학교 동창들이 입학 원서를 냈다.합격하기가 매우 어려운 역사학과 입학시험에 점수 미달로 내가 군대에갈 준비를 하게 되었다.


2. 군대

1988년 여름에 내가 군에 입대했다. 어느 날 우리 소대 사령관이 나를 포함한 몇 명 병사를 부대 바깥으로 일하러 데리고 갔다. 작업장에 가는 길에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령관은 서울 88올림픽을 보러 대원들과 잠시 자기 집에 들렀다. 경기를 보면서 사령관은 갑자기 나를 보면서 “차 병사, 너 한인이지?” 물었다.“네! 그렇습니다!” 내가 대답했다.“저기 운동장에서 한국 관객들이 뭐라고 외치지, 들고 있는 포스터에 뭐라고 써있지?” 소령관이 물었다.“잘 모릅니다!” 대답했다.“너 정말 모르냐? 그럼 너 한국어를 모르는 한인이냐?” 물어보면서, 소령관이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 순간 정말 부끄러웠다. 그 전에는 내가 한인인 줄 알면 다들 “한인들은 부지런하고, 똑똑하다”라고 했지만 “모국어를아느냐?” 묻지를 않았다.또 한인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에서 온 군대 동료가나보고 “너 정말 한인이냐? 그럼 소련 군대에서 뭐해? 혹시 남한 스파이가아니냐?” 질문까지 했다.이렇게 군대에서 자기 민족어를 몰라서 생긴 부끄러운 일 때문에 모국어를 꼭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가지며, 군대를 제대했다.


3. 카자흐스탄 동포들의 모국어 상실

현재 3~4세 동포는 모국어를 잘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기 성씨를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원인은 고려인들은 한반도에서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한다음으로 러시아 정부가 정착한 고려인들을 조사할 때 러시아식으로 많은성씨를 기록한 것이다. 김씨, 박씨, 이씨는 문제가 없었는데 정씨, 전씨와 천씨를 ‘텐’씨로 기록했고, 차씨와 채씨를 ‘짜이’ 또는 ‘쯔하이’로 기록했다.내 성은 러시아식으로 ‘짜이Tsay’라고 한다. 성씨를 정확히 알기 위해 내가 알마티에 계신 박일(1911~2001) 유명 철학 및 한국학 박사(정용희 작가의 제자, 최고의 전통 시조와 한국의 현대시 번역가, 한국 애국자)님에게 내성씨를 정해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직접 만나지 못해 박일 박사님은 전화로 약 1시간 동안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자네 성은 차씨고, 본은 연안이다”라고 결정을 내리셨다. 이렇게 내가 가장 중요한 것인 성씨를 알아냈다. “이제 모국어를 열심히 배워야겠다” 굳게 마음을 먹었다.여기선 카자흐스탄 동포는 왜 모국어를 잘 못하고 그렇게 빨리 잃어버렸는지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원인은 여러 가지 있다. 이는 다음과 같다.구소련 시대 때는 강제이주를 당한 많은 소수민족들(체첸인, 터키인, 독일인 등) 중에서 고려인들이 자기 민족 언어, 문화를 빠른 시기에 잃어버렸다.1920~30년대 러시아 극동의 고려인 사회는 나름대로의 관습과 전통을형성하였고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잠재력을 축적한 인간 공동체였다. 연해주의 땅을 자기의 새 고향으로 생각했던 한인들은 열심히 일할 뿐만아니라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따라서 민족문화와 언어가 발전하였고, 민족 인텔리층이 견고하게 형성되었다. 고려말로 된 신문, 잡지가발행되었고, 고려말 출판사, 극장, 사범대학, 사범학교, 기술전문학교, 문화계몽시설 등이 있었다.1937년에 소련 정부는 대중매체를 통하여 극동의 일본 간첩 문제에 마치고려인들이 적극 개입한 것으로 보도를 했고, 그로 인해 고려인들은 강제적으로 카자흐스탄과 중앙아시아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거의 10만 명이 강제이주를 당하였다. 이렇게 해서 카자흐스탄 고려인의역사가 시작된 것이다.그때부터 고려인들은 소련 정부의 러시아어화 민족교육정책에 따라 러시아어를 배우게 되었고, 자기 민족 언어, 민족 문화를 잃어버리기 시작했다.소련 정부의 박해와 강제이주의 결과 한인은 교육, 문화, 언어 분야에 있어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정부 지시에 따라 100여 개 한인학교, 고려사범대학이 폐쇄되었다. 한인들의 모국어 교육은 완전히 러시아어화 되었다.1950~60년대에 카자흐스탄 정부는 고려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의 학교들에서 고려말 교육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그 이유는 고려인들이 넓은영토에 흩어진 것, 주와 구역 교육부의 무책임과 무관심, 고려말과 러시아어를 동시에 구사하는 자격 있는 교사들의 부족, 교재와 사전의 부족 등을 들수 있다. 그러나 당시 일부 고려 사람 중에서는 스스로 민족 언어 공부를 그만두자고 제안한 사람도 있었다. 학부모들은 언어의 실용적 면에 치우쳐서‘러시아어를 배워야 먹고, 입고 살 수 있다. 한글을 배워선 생계를 유지할수 없다’고 했다.1970년대 초반에 소련연방정부는 소련에서 발전된 사회주의가 실현되었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우리 국가에 러시아 사람, 우크라이나 사람, 어느 민족 사람이라는 개념이 곧 없어질 것이고 모든 국민들은 소련 사람이라고 부를 것이다’ 및 ‘민족 간 친화와 융합’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이에 따른 새로운 교육 프로그램으로 인해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비러시아인 아동들을 위한 러시아어 예비반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고려말을 배우려고 하는 학생 수가 급속히 줄어들었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 상황가운데 고려인들은 모국어를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었다.또한, 거주 이전을 제한하는 제도가 폐지되자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이 도시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 당시 농촌에서의 생활이 극히 어려웠고, 농촌 교육이 도시에 비해 많이 낙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자연히 고려인 젊은이들은 큰 도시에 가서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게 되었다.그 당시 고려인은 소수민족 가운데 이미 교육 수준이 높은 민족으로 인정을 받았고, 선진적 러시아 문화와의 접촉 결과로 고려인 학자, 엔지니어, 의사, 예술가 등 민족 인재가 배출된 것이었다.


4. 한반도 첫 방문 및 한국어 배우기

1990년도에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 군대 친구와 함께 알마티 통신대학에입학했다. 대학에 다니면서 한인 교회와 알마티 고려문화센터에서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1992년도에 교회 목사님이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단체를 만들어서 2주간 한국에 보내셨다. 그때 내가 처음으로 해외로 나가면서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 당시 ‘알마티~서울’ 직항이 없어 모스크바에서비행기를 갈아타고 서울에 도착했다.나는 무척 피곤했지만 행복했다. 나는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았고, 한국말도 제대로 못했지만 그동안 텔레비전에서만 본 한국은 전혀 낯설지 않았다. 특히 한국 음식이 입에 매우 잘 맞았다.이 조국의 방문은 내 인생을 완전히 바꾸었다. 나는 알마티로 돌아온 후앞으로 내 삶을 한국어와 한국과의 연결하기로 했다. 그 후로 나에게 별로잘 어울리지 않은 알마티 통신대학을 그만두었고, 알마티 국립대학교에서새로 열린 한국어과를 입학했다.알마티 국립대학의 한국어과라고 불렀지만 우리 반 담당 교수는 북한에서 온 김봉삼 교수님이었다. 그러나 후배들에게 한국 교수님이 한국어를 가르치셨다. 재미있는 것은 대학 내에서 북한 교수님과 한국 교수님이 서로를만나지 않도록 노력하며, 우연히 만나면 인사만 하고 대화를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의가 끝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같이 맥주 한잔이나 식사를 같이 하면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1990년대 초반까지는 카자흐스탄 수도였던 알마티에서 북한 사람, 유학생들을 흔히 만날 수 있었다. 1991년 말에 카자흐스탄이 소련으로부터 독립하자 카자흐스탄으로 한국 사람 즉, 목사, 한국어 강사, 러시아어를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당시 고려인 동포들은 북한사람이든 남한 사람이든 크게 구분하지 않고, 같은 민족으로 받아들였다.1학년을 마치면서 김봉삼 교수님은 어느 날 “조선에 가고 싶은 학생들은손 들어봐!”라고 하셨다. 나와 포함한 몇 명 학생들은 “북한을 방문할 수있는 기회를 놓치지 못할 것이다”고 생각하면서 손을 들었다. 이렇게 나는친구들과 함께 1993년 여름에 북한을 방문하게 되었다. 북한에 약 10일을있었는데 숙박을 평양에서 했고, 묘향산, 백두산 등에 다녀왔다.북한의 여러 곳을 방문한 중에 아름다운 자연을 제외하고, 가장 인상적인것은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외국 지도자들이 김일성에게 기증한 선물의 박물관이었다. 이 박물관은 산속 깊은 곳의 커다란 동굴에 있었다. 엄청난 공간 안에 순금으로 만든 각종 사이즈의 김일성의 동상, 보석으로 제작한 다양한 선물들 및 기타 많은 최고 비싼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나는 이것을 구경하면서, “야~, 일부만 팔고 북한 국민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더 하나의 인상적인 것은 모범 유치원을 방문한 것이었다. 우리 동포 대학생들 앞에서 조그마한 아이들은 땀을 퍽 퍽 흘리면서 노래도 잘 부르고,춤도 잘 추었다. 아이들이 준비한 공연을 본 다음에 유치원생들은 우리에게유치원 건물을 안내해 주었다. 각각 학생들을 유치원생 한 명씩 손을 잡고구경시켜주었다. 내 손을 키가 작은 5~6살짜리 여자애가 잡았다. 유치원 안내 기간 동안 이 꼬마가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구경을 마치고 우리가 다음 곳으로 이동해야 하는데 이 꼬마가 내 손을 놓지 않았다. 나는 이 조그마한 여자애의 슬픈 큰 눈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4년간의 한국어과 재학 시절은 금방 지나갔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직장에 다니셨고, 나는 유치원에 다니지 않아 할머님과 함께 있었다. 러시아말을 전혀 모르신 우리 할머님은 고려말(함경북도 사투리와 비슷함)만 쓰셨다. 이로 인해 내가 고려말을 어느 정도 할 줄 알았기 때문에 대학교 공부는 재미있으면서 그리 어렵지가 않았다. 내가 한국어과를 우등생으로 졸업했다.


5. 한국 어학연수와 유학 시절

대학 재학 중에 나는 다니던 알마티 한국교육원을 통하여 1~2주간 여름모국 방문 프로그램으로 여러 번 한국에 다녀왔다. 대학을 졸업하자 내가 3개월 단기간 어학 연수하러 국제교육진흥원으로 갔다. 한국어과를 이미 졸업했기 때문에 고급반으로 들어갔다. 우리 반에 유럽, 중국, 남미에서 온 재외동포들이 있어 다들 한국말을 잘하기 때문에 재미있었다. 초급반에 한국말을 아예 못하거나 조금밖에 못하는 동포들이 있었다. 모든 연수생들은 같은 기숙사에서 숙박했고, 한 식당에서 식사를 해서 서로 얼굴을 알고 있었다.수업 중에 한국어 외 한국 문화, 한국 역사가 있었다. 특히 문화, 역사 수업 시간에 선생님들은 항상 연수생들에게 “여러분은 각국 나라에서 왔지만‘우리나라, 우리 문화, 우리 역사’를 말할 때 현재 거주국이나 거주국의 문화와 역사를 염두에 두지 마시오. ‘우리나라’는 한국, ‘우리 문화’는 한국문화, ‘우리 역사’는 한국 역사인 것을 기억하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같은동포로서 반만 년의 풍부한 역사, 한강의 기적을 자랑해야 합니다”라고 하셨다. 초급반 선생님들도 똑같이 교육을 받았다. 초급반 연수생 중에 미국입양동포 한 명이 있었다. 내가 그 친구의 이름을 기억 못 하지만 순수 미국이름을 가진 것을 기억한다. 다시 말하면 한국인의 외모지만 이름이 ‘토미존슨’이었다. 토미는 한국말을 한마디도 못했다.연수 코스 시작 약 2주일 후부터 토미는 갑자기 말라빠졌고, 불안한 걸음으로 걷기 시작하며, 어리둥절해졌다. 그 후는 수업 시간이나 밥 먹는 시간에 보이지 않았다. 토미는 기숙사 방에서 외출하지 않고, 깊은 우울증에빠져 입맛도 떨어지고, 잠도 제대로 못 잤을 것이다. 물어보니까 토미는 심각한 혼란에 빠졌다. 그동안 미국인인 줄 알았던 토미는 한국에 와서 본인이 미국사람이 아니라 한인인 줄 알게 되었다. 토미의 머릿속에는 ‘미국인과한인’ 간에 엄청난 정신 싸움이 일어났을 것이다…… 토미가 어떻게 되었는지 결과를 잘 모른다. 나는 3개월 어학 코스를 밟은 후 먼저 귀국했고, 토미는 3개월 더 남아있었다.상기 단기 어학연수를 수료한 후 나는 다니던 알마티 한국교육원으로 한국어 교사로 입사했다. 약 1년을 한국어를 열심히 가르친 후 1997년도에 재외동포재단이 실시한 초청장학생 프로그램에 반드시 참여하기로 했다. 나는필기시험과 인터뷰에 합격하여 선발되었다. 이렇게 한국에서 유학하고 싶은내 꿈이 이루어졌다.유학 시절 때 많은 것을 보고, 배울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많은 경험을겪고 얻었다. 1997년 9월에 한국에 도착한 몇 달 후 경제 위기가 터졌다. 그때 나라가 부도가 날 위험 앞에서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헌신적이고, 애국심이 넘치는지 직접 볼 수가 있었다.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행사와 운동 중에 ‘금 모으기’는 제일 대단한 운동이었다. 그동안 장롱 속에 소중하게 보관했던 돌 반지, 행운의 열쇠, 기타 금 액세서리를 모아 가치가 떨어지는 원화로 환전하려고 하는 시민들이 은행에서 줄 서있는 모습은 외국에서 온 사람들을 매우 감동시켰다. 나는 학생으로서 금이나 외화를 보유하지 않았지만 보편적 애국 분위기에 따라 한국을 조금이라도 돕기 위해‘Made in Korea’ 상품만 샀다. IMF 시대가 일어난 후 1998년 초에 미국영화 아카데미 수상을 많이 한 ‘타이타닉’이 전 세계에서 대개봉했다. 당시한국 사람들은 두 가지로 나뉜 것을 보았다. 한 사람들은 할리우드 영화를반드시 보아야 한다고 했고, 또 다른 사람들은 영화의 상영으로 인해 발생된 자금은 외환으로 미국으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나중에 타이타닉의 사본을 보면 되지”라고 결심했다.내 첫 기숙사의 룸메이트가 여자 친구랑 상영관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 2년간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룸메이트가 총 3명이 바뀌었다. 모두 한국 사람이었다. 여자 친구와 함께 ‘타이타닉’을 보았던 첫 룸메이트는 내가 동포인것을 알고, “재외동포는 모두 배신자이다. 조국이 어려울 때 나라를 버리고,외국으로 도망간 배신자들이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놀라며, 큰 충격을받았다. 그동안 여러 가지 원인으로 한인들은 흩어져 많은 나라에서 살고있지만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공업대에서 재학 중인 두 번째 룸메이트는 공부만 열심히 해서 매일 아침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기숙사로 돌아오고 그랬다. 기숙사에서 몇 시간 잠만잤기 때문에 이야기를 나눌 시간도 별로 없었다. 동포인 나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나보다 3살 많은 박사 과정을 밟는 세 번째 룸메이트는 “모든 동포는 우리와 같은 민족이다. 일제시대 때 당신의 조상들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다른나라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또한, 이국땅으로 이주한 후 조국으로돌아오지 못해서 우리나라의 잘못이다. 우리 정부가 그 당시 잘 해주지 못해 죄송하다”라고 한 말을 듣고 나는 매우 감동했고, 감사했다.그 후 유학 중에 만났던 한국 사람들은 크게 상기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대략적으로 계산하면 ‘동포는 배신자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전체의약20%였다. ‘동포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다’라고 하는 비중은 약 30%였고, 전체의 약 50%는 ‘동포는 우리와 같은 민족이다’라고 생각했다.우리 지도 교수님은 구소련 동포들의 역사를 조금 알고 계셨다. 자기 뿌리를 잃어버려 족보를 보유하지 않은 것도 아시고, 나를 도우려고 하셨다.서울에 있는 ‘연안 차씨’의 사무실 겸 자료와 기록 보관소의 주소를 찾아내고 알려주셨다. 내가 그 사무실을 어렵게 찾았다. 사무실에 계시는 어르신 두 분이 내게 물으셨다. “자네 할아버지의 한국 성함이 뭐예요?” 나는“잘 모르겠습니다” 대답했다. 그분들은 “할아버지의 고향이 어디였는지 알아요?” 나는 똑같이 “잘 모르겠습니다” 대답했다. 어르신들은 “그럼 못 도와주겠소. 둘 중에 하나라도 알면 찾아볼 수 있는데, 할아버지의 성함과 고향을 모르면 자네 뿌리를 찾기가 불가능하다”라고 하셨다. 매우 안타깝게도한국에서 뿌리를 꼭 찾아야 한다는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6. ‘노르웨이 교포’

한국을 방문한 외국 사람들이 내국민으로부터 항상 받는 질문들은 “외국어디서 왔어요? 그 나라는 어디 있어요? 거긴 어때요?” 등이다. 유학 시절때 나도 그런 질문들을 많이 받았다. 카자흐스탄에서 왔다고 하면, ‘스탄’을 듣자 한 사람들은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이고, 또 다른 사람들은 “아, 카레이스키!”라고 했다. 나는 속으로 “카자흐스탄은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사이에 있는 조그마한 나라가 아니라 러시아와 중국하고 붙은 세계에서9번째 큰 국가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런 태도를 보고 내가 카자흐스탄 친구하고 장난으로 ‘국적을 바꾸어야겠다’고 했다. ‘새로운 국적’을 정할 때 한국 사람들이 자세히 잘 모르는 부자 나라여야 했다. 미국, 영국, 일본, 독일을 한국 사람들이 잘 알기 때문에 안 되었다. 고민하다가 우리는 북유럽에소재한 노르웨이를 선택했다.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노르웨이는 유럽에 있지만 일반 사람들은 그 나라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한다. 보통 노르웨이이라고 하면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은 바이킹, 석유, 참치이다. 또한, 석유를 생산하는 나라는 잘 산다는 고정 관념이 있다. 노르웨이어를 잘 아는 사람들은 드물기 때문에 러시아어를 하면 “이 언어는 노르웨이어다”라고 말할 수있었다.‘새로운 국적’을 선택하고 나서 이제 노르웨이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얻어야 했다. 그전에는 노르웨이어라고 하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바이킹(Vikings), 트롤(troll), 탐험가 아문센(Roald Amundsen), 탐험가 헤위에르달(Thor Heyerdahl), 화가 뭉크(Edvard Munch), 작곡가 그리그(EdvardGrieg) 그리고 록그룹인 아하(A-ha)였다. 인터넷을 통하여 우리는 이 나라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제 ‘새로운 거주국’에 대해 많은 지식을 얻은 다음에 나와 친구는 밖에 나가면 ‘우린 노르웨이 교포이다’ 단단하게 말할 수가있었다.다음 주말에 친구하고 외국인들이 즐겨 찾아가는 서울 명동으로 놀러 갔다. 한 옷 가게에서 우리가 하는 러시아어를 들은 종업원은 어디서 오셨냐구 물었다. 우리는 유럽 억양을 흉내면서 한국말로 “저희는 노르웨이에서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가게 종업원은 기념으로 노르웨이의 동전을 달라고 했다. 우리는 미안하지만 동전이 다 떨어졌다고 말했다. 다른 가게의 직원은 우리가 ‘노르웨이 교포’인 것 알고, 본인이 록그룹 아하의 팬인데 갑자기 그룹 리더의 이름이 생각이 안 나서 상기해 달라고 부탁했다.점심시간에 밥 먹으러 한 식당에 갔다. 식사 중에 우리 러시아어 대화를열심히 듣고 있는 약간 술에 취한 옆 테이블 아저씨들은 “너희들은 어디서왔냐? 몽골에서?” 물었다. 우리는 “아닙니다. 저희들은 노르웨이에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노르웨이’란 말을 들은 후 얼굴 표정까지 달라진 아저씨들은 “그러셨군요! 멀리서 오셨네요!” 매우 친절하게 말했다.어느 날 밤늦은 시간에 기숙사가 문을 닫기 전에 내가 기숙사로 빨리 가려고 바빴다. 택시를 타고 가는 중에 친구하고 통화하면서 지갑을 꺼냈다.지갑에 돈이 얼마 되지 않아 택시 기사에게 “아저씨, 가까운 지하철역까지만데려다주세요!”라고 말했다. 택시 기사는 “방금 쓴 언어가 뭐예요? 물어보았는데 내가 습관적으로 “노르웨이어”라고 대답했다. “노르웨이 교포군요!”하면서 택시 아저씨가 나를 기숙사까지 데려다주셨다. 나는 거짓말을 해서너무 부끄러웠지만 매우 고마웠다.현재 물론 한국 사람들은 카자흐스탄과 카자흐스탄 동포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 대한민국과 카자흐스탄은 1992년에 외교를 수립했다. 그동안 양국은 다양한 분야에서 깊은 관계를 맺었고, 대한민국과 카자흐스탄의 국민이 상호이해를 넓히기 위해 여러 가지 많은 문화-스포츠 행사들을 진행했다. 뿐만 아니라 한국 방송국들이 여러 차례로 카자흐스탄에 와서 다큐멘터리, 특집, 쇼 프로그램 등을 많이 촬영했고, 국내에서 많이 방송했다.


- 마지막으로 -

현재 카자흐스탄은 중앙아시아 내 한국의 최대 교역을 보유하고, 다양한분야의 중요한 협력 파트너이다. 28년 동안 양국 대통령들은 국빈 방문을많이 하셨고, 무역-투자, 환경, 인프라-건설, 과학기술, 교육-문화, IT 등다양한 분야에서 포괄적 협력을 확대하여, 강화해 나가기를 노력하고 있다.카자흐스탄은 1991년에 독립했다. 1998년에 대통령 지시로 수도를 알마티에서 북쪽 누르술탄(전 명칭: 아스타나)으로 옮겼다. 대한민국 대통령들은카자흐스탄 국빈 방문할 때 수도에만 가셨다. 그러나 지난해 4월에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3개국 방문의 마지막 국가로 카자흐스탄을 방문 중인 문재인 대통령님은 수도에서 진행될 정상회담을 앞서 4월21일에 현지 고려인 동포 약 4만 명이 거주하는 경제 문화 중심 도시인 알마티에서 고려인 300여 명을 초청해 동포간담회를 개최하셨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카자흐스탄 최대 도시 알마티를 방문하는 것은 문 대통령님이 처음이었다. 문재인 대통령님이 동포 간담회에서 하신 인사말 중에 다음 말씀이있으셨다. “…… 저는 오늘 우리가 하나의 뿌리를 가지고 있음을 다시 한번 깊이 실감하고 있습니다…… 카자흐스탄의 광활한 초원 위에는 독립운동의 별들이 높이 떠있습니다. ‘백마 탄 장군’으로 불린 항일명장 김경천 장군,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 한글학자이자 임시정부에 참여했던 계봉우 지사, 연해주 독립군부대에서 활약한 황운정 지사는우리 역사의 지평에 저물지 않은 별이 되었습니다…… 1세대의 개척정신, 근면과 성실을 지켜온 후손들은 ‘고려인’이라는 이름을 더욱 강하고, 자랑스러운 이름으로 만든 주역들입니다. 카자흐스탄 사회로부터 인정받고 존경받고 있는 동포 여러분 모두가 영웅입니다. 우리는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눠온 민족입니다. 불모지에 볍씨를 뿌려 논을 만들고, 학교를 세워 보란 듯이 아이들을 길러낸 민족입니다.”간담회에 참석한 고려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카자흐스탄 동포들은 문재인대통령님의 말씀을 듣고 깊은 감동을 받으며, 자랑스러워했다. 고려인들은당시 여러 가지 비극적인 역사적 상황, 개관적 원인으로 인해 이국땅에 가서살아야했다. 카자흐스탄 동포들은 조국을 버린 배신자들이 아니라 일본으로부터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며, 한국과 카자흐스탄 간에 우의와 협력을다지는 중요한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나는 아침마다 집 근처 공원에서 운동을 한다. 얼마 전에 공원 운동장에서 한 카자흐인 할아버지를 만났다. 할아버지는 지금 몇 시냐고 물어보고,“자네 어느 민족 사람이냐?”라고 물으셨다. 나는 한인이라고 대답했다. 카자흐인 할아버지는 “자네는 대단한 민족의 아들이다”라고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