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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수기] 아이들과 독일에서 산다는 것
작성일
2021.02.01

[가작 - 체험수기 부문]


아이들과 독일에서 산다는 것


박 에 스 터 / 독일


한국을 떠나던 날, 만 두 살이었던 큰아들은 공항에 배웅 나온 할머니 손을 쉽게 놓지 못했다. 내 품에 안겨 있던 6개월밖에 안 된 작은아들은 중이염으로 고열치레 중이라 축 늘어져 있었다. 그날은 결혼도 하고 아들도 둘이나 낳아 엄마가 된 다 큰 딸내미가 독일 가서 살겠다고 떠나는 날이었다.아마도 우리 엄마의 눈에는 다 큰 내가 안쓰러운 어린애로 보였을 것이다.게다가 언제 다시 보게 될지 모를 눈에 밟히는 손주까지 보내야 했으니, 애가 애를 데리고 잘 살려나 싶었을 것이다. 공항에서는 배웅 나온 가족들이나 떠나는 우리나, 누구 하나 홀가분하게 뒤돌아설 수 없는 가슴 저린 신파를 찍는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하필 왜 먼 독일이고, 하필 왜 저 손주 녀석은 지금 아프고 난리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걱정스런 눈빛으로 쳐다보는아빠 엄마의 눈빛에 맺고 끊는 확실한 인사라는 게 있을 리가 만무하였다.같이 울다 웃던 낯으로 비행기 시간에 쫓겨 헤어지고, 서로 안 보이는 구석에서 마음이 아려 찔끔찔끔 눈물을 찍어댄 게 인사라면 나름 인사였다.

“엄마, 내가 길을 잃어버렸는데 혹시 알려줄 수 있을까?”“응 그럼. 어디 가는 길인데?”“두 개인데…… 공항 가는 길하고 한국 가는 길.”

떠나는 마음은 무거웠어도 막상 독일에 도착하니 말도, 지나가는 사람들눈빛도 낯선 땅에서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겨우 마트에 가서 입맛에 맞는 먹거리를 살 수 있을 정도로 적응되자 뜬금없이 큰아들이 길을 잃어버렸다며 길을 찾는다. 공항 가는 길이랑 한국 가는 길을 찾으면 한국에 두고온 할머니, 할아버지, 이모, 삼촌 만나러 갈 수 있다고. 둘이 대화를 주고받다가 꾸역꾸역 우겨 넣어둔 마음이 터져 나왔다. 이게 향수병이구나. 남편이학교에 가고 나면 셋이 부둥켜안고 울다 웃다 그렇게 첫 해가 갔다.

“엄마, 배고파!”“엄마, 똥 쌌어!”“엄마, 책 읽어줘!”

독일도 유치원 자리 받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별반 다를 게 없다는데 이런 것까지 같을 줄이야…… 낯선 집, 낯선 동네,낯선 나라에서 적응할 것도 많은데 어쩔 수 없이 아이 둘을 일 년 넘게 옆에끼고 있어야만 했다. 남편이 저녁에 집에 올 때까지 두 녀석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삼시 세끼만 무사히 해 먹인다고 하루가 쉽게 가는 것은 아니었다.밥해주면 똥 싸고, 똥 싸면 씻겨 줘야 하고, 씻겨 주면 놀아줘야 하고, 그러면 또 배고프다 하고. 이 사이클을 대여섯 번 반복하면 하루가 지나갔다. 다음날도 똑같았다. 할아버지, 할머니, 이모, 삼촌 그 누구도 만날 수 없는 곳에서 엄마만 찾는 두 녀석은 나에게 좋으면서 싫은 존재이기도 했다. 정말다행히도 내가 아이들을 마냥 싫어하게 되진 않았는데, 그건 아파트 이웃들때문이었다.우리가 사는 아파트에는 좋은 이웃들이 많았다. 오가다 마주칠 때면 웃는 얼굴로 인사해 주고, 크리스마스와 부활절 같은 독일 명절 때마다 꼬박꼬박 아이들에게 작은 선물을 전해 주신 친절한 독일 할아버지, 할머니들.그분들 중 나에게는 엄마 같은 분이 계셨다. 우리 엄마와 비슷한 연배이시면서 한국에서 오신 한국 아주머니! 젊었을 때 공부하기 위해 독일에 왔다가 독일인 남편을 만나 이곳에 살게 되셨는데, 우리가 운 좋게도 그 앞집에살게 되었다. 독일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고, 독일 말을 할 줄 모르던 나에게 독일을 이해할 수 있게 큰 도움을 주신 분이 앞집 아주머니다. 독일에서 어떤 행동이 예의에 어긋나는지, 한국과 다른 문화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등 내가 겪어보지 못해 몰랐던 것들도 아주머니 덕에 알게 되었다. 그렇게넷이서 매일같이 만나 장을 보러 가고, 산책하고, 밥을 먹고, 놀이터를 다니면서 독일에서도 정을 쌓을 식구가 생겼다. 아이들도 앞집 할머니, 할아버지라 부르며 앞집 식구들을 잘 따랐다. 그래서 감사하게도 내가 아이들과 붙어있어야만 했던 그 시간을 화만 내지 않고 잘 보낼 수 있었다.

“(파스타를 이틀 연달아 먹은 아들) 엄마, 이거 또 해주실 거예요?”“아니, 이제 재료가 없어. 왜. 더 먹고 싶어?”“아니요, 다행이다. 휴.”

어느 정도 독일 생활에 적응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제일 변하지 않는 것은한식만 좋아하는 식구들 입맛이었다. 유치원도 안 가는 불효자들의 입맛은어찌나 까다로운지 요구하는 메뉴도 다양했다. 주로 한국에서 먹던 음식들을 해달라고 했는데, 할머니 입맛이라 그런가 식혜를 찾을 때도 있었다. 떡집에서 몇 천 원만 주면 얼음 동동 식혜를 사먹을 수 있는데…… 아, 여긴없다. 먹고 싶은 음식들이 생각나는 건 아들들뿐이 아니었다. 남편과 나도이따금 사무치게 먹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아무리 전화해도 배달 오지 않는음식들, 문득문득 떠오르는 음식들의 잔상과 상상 속 냄새만으로 군침을꼴딱 삼키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이 타향살이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우린 왜 기본적인 욕구도 채우지 못하고 살아야만 하는가! 등 떠밀려서, 누가 시켜서 온 타향살이도 아니고 우리가 선택해서 온 것인데 못 먹는 아쉬움도 모자라 억울한 마음마저 들었다. 그러다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엄마에게 물어보고 인터넷도 뒤져가며 엿기름을 가라앉혀 전기밥솥에 식혜를 만들고 있는 내 모습이 낯설면서 대견했다.어릴 때 명절을 맞아 식구들이 할머니 댁에 몰려들기 하루 전날이면 할머니는 꼭 밤에 집에서 가장 큰 전기밥솥에 가득 식혜를 만드셨다. 그땐 어려 손을 보탤 수도 없어 식혜 하던 할머니 모습을 바라만 봤었는데, 식혜 하는 법을 배우지도 않은 내가 식혜를 하고 있자니 ‘밥알이 잘 떴나’ 하며 밥솥을 열어보던 할머니 생각이 났다. 식혜를 만들 수 있게 되자 그리웠던 음식들을 하나하나 해볼 자신이 생겼다. 그렇게 어깨너머로 본 할머니의 주걱질을 떠올리며 묵을 쑤고, 김장할 때 손만 보탰던 기억을 더듬어 김치를 담갔다. 한국이었다면 전화 한 통으로 시켜 먹을 수 있는 짬뽕을 무려 세 시간이나 걸려 만들었을 때의 기쁨, 맛은 2%가 아니라 200% 부족하지만 기억과비슷하게 양념 통닭 냄새와 맛을 흉내 냈을 때의 성취감은 먹겠다는 ‘집착’과 고생을 동반한 ‘궁상맞음’ 그 사이 어딘가에서 왔다 갔다 했다. 먹고 싶은 게 떠오르면 뭐든지 손수 만들어야 하는, 사람을 굉장히 능동적으로 만드는 게 타향살이였다.

“엄마, 왜 이렇게 못생긴 표정을 해요? 힘들어요?”“엄마, 전 어른이 되는 광선을 쏴서 빨리 할아버지가 되고 싶어요. 저세상구경가려구요.”

유치원에 가지 못해도 아이들은 쑥쑥 컸다. 엄마의 표정을 살필 줄도 알고 감정도 읽을 줄 알았으며 가끔 웃긴 말도 했다. 아기였던 둘째도 어버버하지만 제법 그럴듯하게 말을 할 줄 알게 됐다. 그러던 중 좋은 소식이 한꺼번에 왔다. 첫째는 유치원에, 둘째는 어린이집에 다니게 됐다는 목 빠지게 기다려 왔던 소식과 기다리지 않았는데 찾아온 셋째 임신 소식. 아이 둘을 나라에 맡기고 이제 좀 편해지려나 했더니 또 시작이다. 셋째도 아들이었다. 목소리가 엄청 크다는 아들 셋 엄마가 내가 될 줄이야. 남편은 돈 못버는 학생인데 애 셋을 무슨 돈으로 키우지. 안 그래도 아들 셋이라 한숨이나오는데 더 큰 걱정이 앞섰다. 감사하게도 독일에는 우리처럼 힘들고 어려운 사정인 사람들이 출산할 때 금전적인 면뿐 아니라 여러 방면으로 도와주는 기관이 있었다. 담당자와 면담을 하면서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 같이 궁리하고 출산지원금을 받는 절차를 밟으면서 남편과 나는 독일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우리는 독일 정부에서 주는 장학금으로 먹고살고 있었는데 셋째가 태어났다고 장학금을 더 올려줬다. 여기저기서 배려해 주고 도와준 덕분에 셋째가 태어나고 늘어난 살림을 감당할 수 있었다. 독일에 학문을 배우러 왔는데, 같이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다고 남편과 둘이 얘기를나눌 정도로 고마웠다. 자기 밥그릇은 가지고 태어난다더니 우리 집 셋째가딱 그 먹을 걱정 없이 태어난 것 같았다.

“아빠, 오늘은 학교 안 가요?”“응, 아빠 이제 학교 안 가도 돼.”“그럼 어디 가요? 우린 유치원 가는데.”

셋째를 낳고 정신없이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남편은 졸업하고 6개월에걸친 백수 생활을 해야만 했다. 가장의 무게가 유난히도 무거웠을 텐데 내가같이 짊어져 주지 못해 미안한 시간이었다. 유치원에 아이 둘을 보내고 날이좋으면 유모차를 끌고 셋이 집 근처 공원에서 산책을 했다. 날은 눈부시고좋았지만 답답한 마음이 무거워서 편히 갈 곳이 공원밖에 없었다. 볕이 잘드는 잔디밭에서 돗자리 깔고 신발 벗고 누워 이런저런 걱정을 하다가 마지막엔 ‘지금 상황도 감사하지’라고 마무리 짓는 게 매일의 대화였다. 어른들의 힘든 시간과 상관없이 감사하게도 아이 둘은 유치원에 잘 적응해 엄마보다 빨리 독일어를 배워갔다. 걱정거리는 산더미였지만, 감사할 것들도 넘쳐났다. 다행히 남편은 두 계절 만에 그 시간을 끝내고 작은 설계 회사에서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식구가 많다며 보통 받는 초봉보다 훨씬 더 받고 시작해 이번에도 아이들 덕을 봤다. 또 감사할 일이다. 독일에 올 때 큰 꿈을 품고 왔지만 정작 살다 보니 작은 꿈도 큰 꿈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이 바뀐다. 회사에 갔다가 저녁에 일찍 퇴근한 남편과 매일 같이하는 저녁밥, 낯선 독일 말이 힘들 텐데도 유치원에 잘 적응해 준 아이들, 외식보다는 시간은 오래 걸릴지라도 집에서 함께해 먹는 별식, 한두 마디씩 말하기 시작하는셋째가 뜬금없이 하는 엄마! 아빠!, 가족이 함께하는 산책. 소소한 일상의행복이 쌓아져 이뤄내는 인생의 큰 꿈을 놓치지 않게 되어 좋다. 이렇게 타향살이가 익숙해져 간다.

“(어렵게 한인 마트에서 구해 온 비비빅을 냉동실에 몰래 숨겨 놓았는데큰아들이 꺼내먹는 걸 보고 갑자기 나도 모르게 화가 나 소리를 질렀다.) 그거 내 건데!!! 먹지 마!!!”“엄마, 왜 화내요? 음…… 너무 먹고 싶은 거면 그럴 수 있어요.”

큰아들은 늘 어른 같다. 어떨 땐 엄마 같지 않은 나보다 더. 내가 정말 정말 정말 아껴둔 비비빅을 꺼내 한 입 베어 문 아들을 보고 불같이 화를 내는걸 본 남편이 엄마 맞냐고 웃긴다고 했다. 어른 같은 큰아들이 상황을 파악하고는 이해한다며 위로를 전했다. 자기도 아껴둔 걸 누가 실수로라도 먹으면 속상할 것 같다고 하면서. 상황이 이렇게 되면 부끄러움은 내 몫이다. 나이가 몇인데, 애를 몇이나 낳았는데 아직도 아이스께끼 앞에서…… 그것도아들이 먹는 걸 보고…… 으이그. 그렇게 곧잘 날 부끄럽게 만드는 큰아이가 학교에 입학했다. 대견하기도 하고 벅차기도 하고 외롭기도 했다. 이 좋은 날 남들은 다 할머니 할아버지랑 오는데, 우리 아빠 엄마도 첫 손주 입학식인데 얼마나 보고 싶으실까. 외로울까 봐 그러셨는지 앞집 아주머니께서선물도 주시고 입학식에도 같이 가주셨다. 멀리 있는 가족보다 가까이 있는이웃사촌이 낫다고 아이의 첫돌마다, 생일마다, 일이 있을 때마다 챙겨주시고 축하해 주시는 마음이 고마웠다.아이들이 학교, 유치원 다니면서 독일 말을 제법 할 줄 알게 되고 잘 적응해줘서 한숨 돌릴 법도 한데 아직 내 고생이 끝나려면 멀었나 보다. 이번에는 넷째 임신이다. 넷째는 아들이 아니고 딸이라는 소식에 기쁜 마음으로 출산을 기다리는 중에 전치태반인 걸 알게 됐다. 게다가 세 번의 제왕절개 수술 이력이 있으니 고위험 산모로 분류되어 출산 전 한 달을 입원해야했다. 한 달 동안 엄마가 없는 세 놈을 돌봐주시기 위해 보고 싶었던 엄마가 부랴부랴 한국에서 오셨다. 아이들은 할머니 사랑 듬뿍 받으며 엄마 없는 생활도 의젓하게 잘 해냈고, 나도 위험한 상황을 맞지 않고 무사히 네 번째 제왕절개를 해내어 딸을 품에 안을 수 있었다. 퇴원하고 온 지 얼마 안된 것 같은데 아껴두고 싶었던 시간이 금방 흘러 어느새 엄마와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옆에 있을 땐 귀한 줄 모르고, 옆에 없을 땐 보고 싶은 엄마와 자식 사이인지라…… 새 식구 맞는다는 핑계로 잠시 엄마와 티격태격하며 지낸 짧은 동거가 끝나고, 엄마는 다시 하늘을 날아 제집으로 슝 가버리셨다.정신을 차리고 나니 내 옆엔 득실득실 남자만 넷, 안으면 바스러질 것같이작은 딸아이가 하나. 이렇게 엄마 없이 머나먼 독일에서 애 넷 키우는 외로운 애미 신세가 됐다.

“세상에서 제일 큰 가락은?”“엄지발가락!”

일주일에 한 번, 이런 유치한 대화를 하며 네 아이들을 앉혀 놓고 손과발을 만져볼 기회가 온다. 바로 손, 발톱 합쳐 총 80개를 깎아야 하는 매주돌아오는 그 시간! 이때를 핑계 삼아 아이들의 손발을 그 옛날 용의검사하듯 살펴보게 되는데. 큰놈 둘은 겨울에 장갑도 안 끼고 얼마나 신나게 놀았는지 손이 거칠거칠 다 텄고, 막내 두 녀석 손과 발은 아직 말랑말랑 애기티가 난다. 아이들이 금방 커서 스스로 손, 발톱 자를 수 있는 날이 오면 엄마가 만지지도 못하게 하겠지, 라고 생각하며 매주 기쁘게 주중행사를 치르고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애들 뒤꽁무니 쫓아다니며 5분만 앉아있어달라 사정사정해야 하고, 어쩔 땐 정신없는 엄마 덕에 주중행사를 치르지 못한 애들이 손톱 밑 흙을 벗 삼아 귀신처럼 다닐 때도 적지 않다. 휴, 귀찮다.그냥 내 손, 발톱만 자르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애 넷을 키우자니 정신도 없고 체력도 딸리고 다 힘들다.

“(한국 가는 비행기 안) 엄마, 벌써 비행기 추락해요?”“아니, 추. 락. 아니고 착. 륙. 하거든?”

한국말을 잘하는 것 같다가도 이상한 포인트에서 실수하는 아이들. 웃긴다. 아이의 말과 달리 우리 식구들 태운 비행기는 감사하게도 추락 아니고 착륙해서 무사히 고향 방문을 할 수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방문한 한국인데 아이 방학 일정에 맞추다 보니 너무 짧아서 보고 싶은 사람들 맘껏 보지 못하고, 먹고 싶은 것들 맘껏 다 먹고 오지 못해 아쉬웠다. 그나마 한 가지 위안 삼는 건 친정집에서 오롯이 이기적인 딸로 살다 왔다는 것. 아침에나 대신 누군가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며 밥해 주는 소리를 뒹굴뒹굴 누워서듣기, 네 아이 중 어느 한 놈이 아침 일찍 일어나 밥 달라고 해도 나 대신 줄사람이 있으니 또 뒹굴뒹굴 누워있기, 독일에서 매일같이 하루에 두 번씩 돌려대던 빨래 양이 줄진 않았을 텐데 빨래 통에 넣어두기만 하면 마법처럼 깨끗하게 빨려 착착 개켜져 쌓여 있던 옷들을 보며 감탄하기, 먹고 싶다고 말만 하면 만들어주거나 배달 오거나 스스로 요리되어 내 앞에 짠하게 놓여있는 마술 보기. 나도 엄마 딸일 때 이러고 살았을 텐데…… 내 애들 엄마로살다 딸 대접 받아보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우리 가족의 한국 방문 일정이 정해지자, 아빠, 엄마는 봄에 밭에다 참외를 잔뜩 심으셨다. 독일에는 한국 과일과 비슷한 것들이 대충 다 있지만 딱두 가지, 한국 참외와 포도는 우리 식구들이 늘 그리워하는 과일인 걸 아시기에. 그렇게 할아버지, 할머니가 키우신 참외 넝쿨이 우거진 밭에서 아이들은 참외를 바로 따서 칼로 쓱쓱 깎아 먹는 맛을 깨닫고 무척 좋아했다. 부지런한 둘째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할아버지를 쫓아 밭에 가서 제법 농사꾼처럼 참외 수확도 해왔다. 정신없이 짐을 싸는 한국 일정의 마지막 날에도 아빠는 참외를 따 오셨다. 그 참외들을 옷 사이사이에 깨지지 않게 잘박아 넣었는데 독일에 와서 짐을 풀다 보니 짐은 다 내가 쌌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참외가 한 알씩 툭툭 튀어나왔다. 안 그래도 한국에 다녀올 때마다 고향 떠나 사는 설움에 마음이 좋지 않은데 이놈의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참외가 짐 푸느라 바빠 죽겠는데 자꾸 방해한다. 참외를 볼 때마다 애들도 엉엉, 나도 엉엉. 몇 알 되지도 않으면서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요물이 따로 없었다.한국에 있는 동안 마당 한켠 내내 널려 있던 고추는 마지막 날 부모님이눈물 콧물 흘려가며 하나하나 닦으시더니 방앗간에 가서 한 봉지 고춧가루로 만들어주셨다. 시골에 사시는 시할머니는 이제 이게 본인이 담가 주는 마지막 고추장일 거라며 묵직한 고추장 한 통을 싸주셨다. 점점 어려지고 있는 우리 할머니는 나한테 하루에도 몇 번씩 ‘애가 몇이여’를 물으시고 넷이라고 대답하면 엄청 잘했다고 칭찬해 주셨다. 독일 산다고 하니 남편은 외국 사람이냐고도 물으셨다. 오래된 동네 친구들은 독일에서 살다 온 촌년을 데려다 어제도 만나고 오늘도 만난 것처럼 밥도 해주고 놀아도 주고 잠도 재워줬다. 아이들은 다양한 버전의 (왕, 친, 외, 이모, 작은) 할머니들, 할아버지들, 이모들, 이모부들, 삼촌들, 사촌들을 만나 신나게 놀고 사랑받고비비다 왔다. 그렇게 사랑 듬뿍 받다가 돌아오니…… 분명 이 글을 쓰며 내가 누워있는 여기, 독일이 우리 집인데 딴 곳에 내 집이 있는 기분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게, 마음을 두고 왔단 말로도 쓸 수 있을 것 같다.

“(셋째 왈) 엄마, 형아들은 한국에서 태어났죠?”“응. 너랑 동생은 독일에서 태어났어.”“왜요? 우린 왜 한국으로 안 가요? 난 한국이 더 좋은데.”

2012년 9월 21일 8년 전 9월. 아이 둘을 업고 끌고 독일 땅을 처음 밟았다. 그렇게 시작된 타향살이는…… 라고 쓰고 싶지만, 독일에 도착하자마자 시차 적응도 안 된 채 타향살이를 말 그대로 시. 작. 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만 했던 일 처리 중 가장 중요했던 건 바로 비자청 방문이었다. 비자를 얻기 위해서는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만 했다. 일단 증빙해야 할 서류만 산더미일 뿐만 아니라 비자 담당자를 만나기 위해 아침 일찍, 아니 새벽부터 서둘러 가야만 했다. 서류 준비야 남편이 주 담당이니 난 그저 애들 챙겨서 나가기만 하면 됐는데도 그게 참 힘들었다. 비자청 여는 시간에 맞춰 가지 않으면 늘어선 줄 끄트머리에 서서 오랜 시간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꼭두새벽부터 애들을 깨워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일찍 서둘러야 했다. 9월은 서머타임이 막 끝났을 때라 비자청에 도착해서 동이 틀 때도 있었다. 비자를 연장하기 위해 매번 같은 시기에 와야 하는 걸 뒤늦게 깨닫고 ‘왜 우린 날씨 좋은여름에 독일에 오지 않았을까, 그럼 비자청에 오는 날도 아침 해가 일찍 뜨는 따뜻한 여름이었을 텐데!’라며 갈 때마다 같은 후회를 했다.처음 독일 생활을 시작할 때 남편은 독일에서 주는 장학금 수혜자였기 때문에 학생 시절에 우리 가족이 비자를 받는 것은 다행히 별 어려움이 없었다. 그래도 독일이라는 나라에 거주할 수 있는 허가를 얻길 바라는 외국인이 가득한 비자청에 가는 기분은(나도 그 사이에 서있는 외국인이었지만) 텃세 부리는 마름에게 굽신굽신 허리 굽히러 가는 소작농 같아서 기분이 썩좋지는 않았다. 나도 우리나라 한국에선 비자 없이 살 수 있는데! 억울한 기분도 들고. 한편으로는 한국에 살 때 길에서 마주치는 외국인들에게 친절하게대하지 않았던 것-딱히 무시하지도 않았지만-을 무척 후회했다. 내가 그들 입장이 되어보니 시선 하나로 할 수 있는 말이 참 많다는 걸 이제야 알겠다.우리가 독일에 온 그 계절, 가을이 되면 일 년에 한 번 혹은 이 년에 한 번씩 그 일을 하러 비자청에 가야만 했다. 남편은 처음엔 학생 나부랭이, 백수를거쳐 드디어 독일에 세금 내는 회사원이 되었다. 직장 생활 몇 년 차에 남편이드디어 영주권을 얻고 나니 동반 비자를 가진 우리의 입지도 조금씩 안정을찾았다. 가을이 오는 그때마다 비자청에 가는 부담감도 조금씩 줄어들었다.재작년 가을, 아직 동반 비자 신분인 아이들과 내 비자를 위해 몇 년 만에비자청에 가야만 했다. 이번에 아이들은 데려올 필요 없다고 했다. 아이들을데려오지 않아도 된다 해서 그런가, 이젠 비자가 거절될 일이 없어서 그런가.이번엔 한결 가벼운 손과 마음으로 간만에 시내 나들이 나가는 기분으로 넷째 하나만 있는 척, 오붓하게 셋이 비자청에 다녀왔다. 서머타임이 막 끝난가을 아침 하늘은 여전히 어둡고 추웠지만, 전혀 힘들지 않았다. 여권에 비자 딱지 하나씩 붙여 주는 건데도 두 시간쯤 기다려-제출한 여권만 다섯 개이니, 독일에서 이 정도 일처리 속도는 감사한 편이다-비자를 받아냈다. 하지만 기다리는 시간은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았고, 감히 비자청에서 커피 한잔 하는 여유도 부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날이 꼭 비자를 선물로 받는, 때마다 꼭 돌아오는 생일이란 생각도 했다. 비자 받는 생일이 꼬박꼬박 일 년마다, 잦은 주기로 돌아와 힘들었을 때도 있었지만, 독일에 머무는 시간이길어질수록 생일이 돌아오는 주기도 점점 길어지고 있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생일이 더디 온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물리적 생일에 내 지난 세월을 생각하며 낳아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는 것처럼, 비자를 받는 생일날이 되면 어김없이 독일에 온 첫날이 생각나고 우리의 지난 타향살이가 큰 탈 없이(물론 산 넘어 산인 일상이지만) 잘 흘러가고있음에 감사하게 된다. 2018년 가을, 이렇게 비자를 감사히 받는 생일이 무사히 지나갔다.

“(2012년에……) 우리 나이 들면 어디서 살까?”“한국 가서 늙어야지!”“(2020년에……) 우리 나이 들면 어디서 살까?”“글쎄, 아이들이 여기 산다고 하면…… 보고 싶어서 한국 가서 살 수 있을까?”

남편의 대학원 합격증 한 장에 의지해 가족, 친구들 떠나 지구 반 바퀴를돌아 먼 이사를 하고 한 해 두 해 지내다 보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학생 시절도 지나 남편은 번듯한 건축사가 되었다. 나는 셋째도 충분한데 분에 넘치는 예쁜 넷째도 있다. 지나간 시간을 되짚어 보니 지금까지 우리에게 닥쳤던난관들이 눈앞에 스쳐 지나가며 괜스레 마라톤에서 1코스 완주한 것 같은뿌듯함이 든다. 이만큼 오기까지 어쩔 수 없이 지나온 힘들었던 시절과 우리를 서럽게 했던 여러 가지 상황들…… 지나고 나니 좋았던 일도 안 좋았던일도 모두 감사할 따름이다.가끔 나는 남편과 나이 들면 어느 나라에서 살아야 할지 얘기한다. 독일생활 초기에는 ‘무조건 한국에 돌아간다!’였지만, 지금은 대답이 좀 다르다.어디에서 살게 되든 간에 우리 가족이 함께인 곳으로, 우리 가족이 행복하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살 수 있는 곳에서 살게 되는 걸 먼저 생각하게 된다. 물론 한국에 계신 부모님과 가족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 한켠이 아리다. 내 집은 여기 독일인데 지구 반 바퀴 돌아 내 집이 또 있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