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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글짓기(중고등)] 가을비의 사랑법
작성일
2021.02.01

[최우수상 - 청소년글짓기 부문]


가을비의 사랑법


김 미 혜 / 중국


얼어있던 바람결이 헤실헤실 풀어진다. 아물아물 피어나는 아지랑이가 아니어도 봄이 오는 걸 알 수 있었다. 세상이 아무리 암울하고 절망스러워도자연은 그 스스로의 근면함으로 계절을 풀어내고 찬란한 햇볕은 그 따스함으로 차가움을 품는다. 나는 이런 따스함이 좋았고 이런 봄의 사랑법을 사랑했었다.
아빠의 사업 때문에 나는 엄마 배 속에서 자고 있을 때 바다를 건너 중국이란 대륙에 안착했다. 기억이 가물가물한 어린 시절 장면을 굳이 떠올려 보자면 항상 퇴근하시고 피로로 가득 찌든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오시던 아빠를 천진난만하게 쳐다보는 나를, 아빠는 한걸음에 달려와 안아주셨다. 그것도 매일을 힘든 기색 하나 내지 않으시고. 나는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참좋았다. “삐삐삐빅-”하며 숫자를 입력한 후 열리는 문 뒤로 하루도 빼먹지않고 웃으며 들어오시는 아빠가 계셨기에. 아빠는 항상 칭얼대는 딸아이를데리고 놀다가 엄마가 마법처럼 순식간에 한 상 차린 밥상 앞에 둘러앉아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며 먹는 저녁밥이 행복의 맛이라고 하셨다. 이런 소소한 행복들을 누릴 수 있어 참 행복하다고 하셨다.
쓸쓸한 가을이 다가오기 전 여름의 무성함이 절정에 달하듯, 만개한 꽃들사이에 기대어 순진무구한 웃음꽃을 피우던 어린아이의 행복도 절정에 달했었다. 언제나 그렇듯, 슬픔은 늘 갑작스레 이별을 타고 찾아와 버린다.벅차도록 한 몸에 사랑을 주시던 아빠는, 언제나 큰 나무처럼 의지했고 버팀목이 돼주셨던 아빠는, 가을비 내리던 밤 생계를 유지하러 모국으로 돌아가셨다.
가을은 늘 가슴 한구석 시리게 느닷없이 찾아온다. 느닷없이 찾아오는 가을처럼 가을비도 느닷없이 찾아오곤 한다. 흐드러지게 폈던 여름이 지고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가 씁쓸한 가을이 온다는 걸 알려 주고야 만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빨간 딱지는 붙여지지 않았지만, 자꾸만 날아오는 종이 쪼가리들은 어린 나도 아빠가 하시던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아빠의 빈자리가 이토록 클 줄은. 타국에서 아빠 없이엄마와 단둘이 살아간다는 건 그리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었다. 엄마와 나는오랜 시간을 중국에서 살아왔기에 중국어를 능통할 수 있어 언어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외로움이 문제였다. 가을비가 내리는 날 아빠가 떠나셔서일까. 가을비가 내리는 날이면 마음이 싱숭생숭해지고 엄마도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밤들이 많아졌다.
늘 함께일 것만 같았던 익숙한 지난 시절을 뒤로한 채, 한 해 또 한 해 다가오는 쓸쓸한 가을을, 한 번 또 한 번 내리는 씁쓸한 가을비를 우리는 몸도 마음도 멀리서 느끼며 맞이했다. 그래도 죽으란 법은 없다는 걸까. 사람은 적응하는 동물인가 보다. 늘 느닷없이 내리는 가을비도 한 번 또 한 번맞다 보니 가을비도 슬픔과 외로움 대신 추억으로 내리는 듯했다. 가을비가추적추적 내리는 날엔 항상 엄마가 커다란 우산을 들고 씌워 주셨다.
가을이 지나 겨울이 오고 봄이 오고 여름이 다가오는 이걸 몇 번이나 반복했을 때쯤, 스마트폰이 보편화되었다. 신비로운 과학은 장거리 전화로만겨우 아빠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과거에서 클릭 몇 번 만에 아빠와 바로옆에서 이야기하는 것 같은 영상 통화라는 것도 할 수 있게 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고 흘러간 시간 속에 너무 많은 걸 흘려보낸 걸까, 거리가 멀어져 마음도 멀어져 버린 걸까, 영상 통화 횟수도 점점 줄어들었다. 그러던 중 경제가 점차 나아져 아빠가 있는 한국 땅을 밟을 수 있게 됐다. 여행 목적으로 모국에 돌아온 것이긴 하지만 설렘은 감출 수 없었다. 마침 내리는 가을비가 어찌 반가운지 깡총깡총 아빠를 향해 뛰어갔다. 이젠 가을비가 그리움의 대명사가 아닌 재회의 기쁨으로 남을 것 같았다. 물론 그땐 가을비가 차마 처참한 이별로 될 줄은 몰랐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게 틀린 말은 아니었나 보다. 아빠는 여전히다정다감한 아빠였지만 더 이상 다정다감한 남편은 아니었다. 아빠는 홀로너무 오랜 세월을 보내서였을까, 나한텐 여전히 웃는 얼굴을 한 나를 든든하게 지켜주는 나무였지만, 엄마한텐 아니었다. 해서는 안 될 짓을 해버렸다.잠깐 편의점에 갔다 온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나 보다. 엄마 몸에 시퍼렇게생겨버린 멍들, 유리에 맞아 생긴 상처들, 깨져 있는 욕실 거울과 굴러다니는소주병들, 그리고 그 사이에 누워 자고 있는 아빠의 손엔 먹다 남은 소주병이 쥐여 있었다.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숨죽여 울고 있는 엄마의 눈엔 절망,슬픔 그리고 배신감이 서려 있었던 것 같다. 난 가을비 내리는 밤, 창문 밖을바라보는 엄마의 눈이 제일 슬픈 눈이라고 생각했었다.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를 보기 전까진 말이다. 나는 내 앞에 누워있는 아빠를 보고 처음으로 낯설음을 느꼈다. 다리가 풀려 픽 넘어졌고 귀에서 자꾸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머릿속엔 아무 생각이 나질 않았다. 엄마는 내손을 잡고 집을 나와 무작정 걸었다. “후두두둑-” 애석하게도 가을비가 또처참하게 내렸다. 우산도 없이 걷다 보니 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차가운물이 빗물인지 눈물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비가 내릴 때의 특유한 눅눅함그리고 찝찝하고 축축한 흙냄새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비에 푹 젖은 내 옷에서 나는 건지 길옆 하수구에서 풍기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집을 빠져나와 한참을 걷다가 하수구에서 풍기는 게 아니라 내 옷에서 나는 냄새란걸 알았을 때쯤 엄마 친구 집에 도착했고 그 후 며칠 동안 신세를 지며 지냈다. 아빠 집으로 가고 싶었지만 그날 밤 아빠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처음 내린 가을비는 아빠를 한국으로 돌아가게 했고 두 번째 내린 가을비는 완전한 이별을 타고 내렸다. 엄마와 아빠가 같이 보낸 긴 세월이 무색할정도로 이별은 쉽고 간단했다. 나 알게 모르게 두 분이서 쌓여 왔던 게 폭발했나 보다. 언성이 높은 통화 몇 번 만에 끝나버렸다. 서류 몇 장만이 이걸 증명하듯 자꾸만 눈에 밟힌다. 그렇게 내가 중2 때 내린 가을비는 행복을앗아갔다. 외할머니도 중국에 계신지라 나와 엄마는 중국으로 돌아왔다. 똑같은 공간, 똑같은 집이었지만 아빠와의 거리가 더 멀어져서일까, 낯설게 느껴졌다. 엄마는 뭐가 그리 미안한 건지 늘 나한테 미안하다고 했다.
가을비는 외투보다 마음을 먼저 적신다. 가을비가 적시기 전에 눈물이 먼저 적시는 것 같다. 그렇게 몰래 마음을 적셔가던 중 아빠한테서 연락이 왔다. 길고 긴 메시지였다. 딸한테 못난 아빠가 되어서 미안하다고, 아빠가 천번이고 만 번이고 미안하다고, 이 못난 아빠를 용서해 줄 순 없냐고…… 글자 사이로 아빠의 참회하는 모습이 배어있는 것 같았다.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며 고뇌하시면서 나에게 보낼 문자를 작성하는 아빠의 모습이 배어있었다. 아빠를 향한 그리움도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말았다. 정신 차려보니 액정엔 이미 내 볼을 타고 내려온 눈물로 가득 찼다.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에 꾹꾹 참으며 누적해 왔던 그리움이 터지고 말았다.
세상에는 말없이 오고 가는 것이 많다.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싹들이 봄이 왔단 걸 알려 주듯이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가 가을이 오고 있음을 알려 준다. 기약 없이 떠나가는 시절도 마음의 만남을 기약할 수 없는 얼굴도기약 없이 내리는 가을비처럼 느껴진다. 시간이 또 흐르고 아빠의 모습이 가을비처럼 아른해져 갈 때쯤, 난 아빠 보러 다시 한국 땅을 밟았다. 몇 년 못본 사이에 저 분이 내 아빠가 맞나 싶을 정도로 달라지셨다. 손에 커다란 우산을 꼭 쥐고 날 데리러 공항에 오셨다. 그 옛날 옷도 멋있게 입고 다니고아이돌과 견주어 보아도 전혀 지지 않는 잘생김 가득한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일하시느라 바빠 옷에 신경 쓸 여념이 없으신 것 같았고 잘생긴 얼굴엔 견뎌온 삶의 무게가 담겨 있는 듯한 주름이 새겨있었다. 날 바라보며 웃는 얼굴은 여전했고 내 손을 감싸는 따뜻한 기운도 여전했다. 한 손엔 캐리어를 끌고 한 손엔 아빠의 따스한 손을 잡고, 아빠의 다른 한 손이 들고 있는 우산을 쓰고 가을비를 가로지르며 집을 향해 걸었던 그날 밤이 잊히지않는다.
늦게나마 바라본다. 아빠만의 사랑을 담아 내리는 가을비를. 만물이 약동하고 새살이 돋아나는 봄도 아니고, 흐드러지게 꽃이 피는 여름도 아니고, 대지에 흰옷을 입히는 낭만의 겨울도 아닌 씁쓸한 가을에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지만 난 알고 있다. 쓸쓸하게 내리는 듯한 가을비가 아빠만의 사랑법이란 걸.
아빠는 한국에 나는 타국에, 멀리 떨어져 있지만 아빠 딸은 꿋꿋이 바르게 자라고 있다. 눈물을 머금은 떨림에 나뭇잎까지 애달프게 흔들리는 가을비의 사랑법을 터득해 가면서.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를 사랑해 가며.
얼어있던 바람결이 풀리지 않아도 세상이 아무리 암울하고 절망스러워도아빠 사랑이 담긴 가을비는 가을비만의 찬란함으로 나를 품에 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