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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글짓기(중고등)] 집은 내 마음 속에 있다
작성일
2021.02.04

[장려상 - 청소년글짓기 부문]


집은 내 마음 속에 있다


윤 에 스 더 / 감비아


나의 도시락을 호기심으로 바라보던 친구들, 친구들과 밖에서 놀려면 부 모님의 픽업 시간에 맞추기 위해 한 주 전에 허락받기, 개를 키우기 위해서는 매일 산책과 배변을 치운다고 책임진다고 약속하기, 주말에만 허락된 TV 시청 때문에 토요일은 새벽 5시부터 남동생과 함께 만화 보기, 바쁜 부모님 의 학교 행사 참여는 아주 최소한의 범주 내에서 이것이 바로 이민 가족에 서 자란 나의 아동기 일상이다.

나는 삼중 언어자다. 공립 유치원 때부터 이중 언어(불어/영어) 학교를 다 녔고, 집에서는 부모님들과 항상 한국말을 했다. 덕분에 각 언어를 넘나들며 말하곤 하는데, 프렝글리쉬, 코렌치, 그리고 내가 자주 쓰는 콩글리쉬가 그 예다. 콩글리쉬는 보통 한국계 친구들과 만날 때 쓴다. 예를 들어, 한국말을 하지만, “you know what I mean?” 혹은 “like” 같은 영어 추임새를 넣는 다.

나는 전형적인 한국인 2세다. 1세 이민자인 부모님을 통해 북미에서 태어 나고 자랐다. 한 번도 한국에서 살아본 적이 없지만, 부모님의 문화와 경험 들이 나의 성장기에 영향을 주었다. 가족이 함께 봤던 한국 방송 혹은 엄마 의 손맛이 담긴 한국 음식은 나의 어린 시절의 추억이다. 따뜻하고 찰진 흰 밥에 칼칼한 김치찌개는 아마도 나의 영원한 단골 메뉴가 될 것이다.

나는 미국의 매사추세츠에서 태어났다. 이후 만 네 살이 되던 때, 나의 가 족은 개나다의 온타리오로 이사를 했다. 다민족 도시인 토론토에서 자랄 때 는 나의 정체성을 따로 세울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나는 눈에 띄게 다른 존재가 아니었다. 대부분 나의 친구들은 이민 자녀들이었다. 나처 럼 그들의 부모 역시 부족한 영어로 말하고, 가정 규율은 엄격했다. 우리는 우리만의 공감대를 형성했다. 나의 소속감은 분명했다. 왜냐하면, 내가 속한 도시에서 한국은 꽤 비중 있는 문화권이었고, 교회와 학교에서 본받을 만한 한국인들도 있었다.


중학교 3학년 때, 모든 것이 바뀌었다.

열네 살이 되던 때, 나의 가족은 감비아로 이사를 했다. 그때는 마치 다양 성은 조금도 용납할 수 없는 세상 속에 떨어진 것 같았다. 서아프리카에 위 치한 이 작은 나라에서 어린아이 포함 45여 명의 한국인들이 살고, 한국 가 게는 전혀 없다. 익숙한 환경과 오랜 친구들과의 이별뿐만 아니라, 즐겨 먹 던 한국 음식들과도 멀어졌다. 내가 속했던 사회에서 나오고, 나의 정체성 도 뺏긴 보답인 양 그토록 원하던 개를 두 마리나 얻었다. 감비아 학교에서 는 아시안이 없었고 내 동생과 나만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길을 걷다 보면, “어, 거기 중국인!”이라고 자주 듣는데, 그때마다 “나는 중국인 아니에요. 한국인이에요.” 라고 틈만 나면 말하고 다녔다. 덕분에 학교 친구들과 그 부모님들은 나를 한국인 여학생으로 인식했다. 당시 나는 레바논과 감비아 학생들로 가득한 곳에서 갇혀 있는 듯했고, 내게 주어진 관심이 버거웠다.

내 또래 다른 선교사 자녀들은 옆 나라 세네갈 기숙학교로 갔다. 불어권, 부유한 사업가 자녀들만이 내 곁에 있는 친구들이었다. 살고 있는 집, 사 는 방식, 대화 방식, 그리고 행동 방식 면에서 그들과 나는 너무 달랐다. 그 들이 부모님으로부터 끊임없이 받는 선물들과 방학마다 다니는 멋진 여행 은 내겐 늘 문화 충격이었다. 그들과 나 사이에는 어떤 연결점도 없었다. 때 문에 우리의 우정은 얕고 피상적이었다. 내게는 엄마가 제일 친한 친구였고, 두 마리의 개들이 위로자였다. 당시에 알지 못했지만, 감비아에서 보냈던 지 난 2년 동안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 소속감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정체성을 찾으려는 나의 바람은 한인 비중이 크고 미국인 비중은 더 큰 Dakar Academy 선교사 자녀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빛을 얻었다. 그렇 다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분명한 답을 쉽게 찾을 수 있었을까? 아니었다. 그곳에서 한국인 1세 친구들과 나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곧 깨달 았다. 같은 한국인데, 우리는 다른 문화 속에서 성장했다. 그들은 종종 나에 게 “너는 한국인이 아니야. 미국인이야”라고 장난삼아 놀리곤 했다. 어린 시 절 읽던 책부터 놀이까지 우리의 공통점은 아주 적었다. 심지어 한국에서 5 년간 사셨던 기숙사 사감이신 아론 선생님마저 “너 정말 한국인이야?”라고 농담 삼아 물으셨다. 그럴 때엔 보통 웃고 말았지만, 왠지 나는 한국인이 되 기엔 뭔가 충분치 않은 듯했다.

그렇다고 나의 미국인 정체성이 확실한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대부분 의 나의 삶은 캐나다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미국 역사와 전통들을 배울 때는 나에게 어떤 연결 고리나 강한 끌림이 없었다. 내가 만일 Dakar Academy 기숙사에 있지 않았다면, 나는 결코 수퍼볼을 시청한다거나 미국 50개 주의 이름과 위치를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잠깐, 캔사스와 알캔사스가 있다고? 장난하나?” 미국 역사 시험을 공부하면서 나는 당황스러워 이런 혼잣말이 나왔다.

더구나 법적으로 혹은 문화적으로도 캐나다인도 아니다. 그 나라에서 내 가 아는 것은 토론토가 전부이다. 비록 서부 캐나다인 친구 아일리와 내가 하키와 메이플 시럽으로 공감대를 형성하지만, 토론토의 다양성은 진정한 캐나다 전통과는 거리가 멀었다. 정말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사실 나는 캐나다 국가를 거의 잊었다. 지난 십 년 넘게, 매일 학교에서 영어와 불어로 불렀건만, 나는 겨우 몇 음절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중얼거린다.

나는 딜레마에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이 질문을 다른 친구들에게 물었을 때, 장-찰스라는 친한 친구가 말 하기를 “넌 그냥 너야. 너는 에스더야”라는 우스운 답변을 들려줬다. 당시에 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생각하면 할수록 나는 그 말이 의미심장 했다. 나를 대표할 만한 국가들 사이에서 어느 한 가지를 골라야 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경험했던 다양한 문화들이 나를 한국 사람으로서 자격 미달로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걸 왜 몰랐을까?

나의 복잡한 아동기, 혼란스러운 국적은 외향적인 나로 만들어갔다. 예를 들어,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는 데 좀처럼 불편하지 않다. 그리고 인종, 나 이, 성별과 상관없이 그들을 알아가는 과정이 즐거웠다. 이런 경험들이 모두 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란 것을 깨닫자, 내가 훗날 어떤 일을 하고 싶어 하 는지 찾는 데도 도움을 얻게 되었다. 여러 언어를 구사하고, 사람들과의 네 트워킹을 좋아하고, 비교적 많은 나라에서 살아본 경험들이 국제관계학과 어울려 보였다. 내 인생 가운데 일련의 경험들이 때로는 상실감과 혼동을 주 었지만, 나의 진정한 정체성을 발견하도록 했다: 나의 흥미, 나의 장점 그리 고 나의 열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