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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입양수기]입양에 대하여
작성일
2021.12.24

입양수기 - 가작


입양에 대하여


Jess Barish [미국]


나이가 들면서 엄마와 나는 종종 농담을 나누었다.
‘내가 실수로 생긴 아이였다는 말은 못 할 걸요’라고 내가 말하면 ‘그래 너를 샀던 영수증이 아직 있지’라고 엄마가 대답했다.


나는 입양됐고, 내 기억에 나는 항상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부모님은 한국의 서울 어딘가에 내 다른 부모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내가 의심할 여지 없이 자 신들의 딸이라고 안심시켜주는 거창한 폭로나 진지한 대화를 한 적이 없다. 내가 여 자라거나 뉴저지에 살고 있다는 것만큼이나 그저 사실일 뿐이었다. 아빠가 내 입양에 대해 어떻게 설명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엄마의 설명만큼은 확실히 기억 한다. 그것이 엄마와 내가 가진 유산이다.


너는 내 뱃속이 아니라 마음에서 자랐단다. 한국에서 다른 여인의 뱃속에서 컸지만 넌 항상 내 아이였어. 그녀의 몸속에서 자란 것처럼 내 안에서도 자랐단다. 그리고 네 가 태어났고, 나와 함께하고 내 딸이 되려고 비행기를 타고 멀리 왔지.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가 아마 다섯 살 즈음이었을 것이다. 내 가장 오래된 기억 중 하나로 남아있고, 지금의 나를 만들고 나 자신에 대해 받아들이게 한 중요한 기 억이다.
어떤 가족에서 태어날지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세상으로 나올 때 아기들이 줄을 서서 부모를 선택하는 것도 아니다. 내 경우에는 이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 은 것이 두 번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현재의 삶이나 가질 수 있었던 삶이 아닌 많 은 다른 경우의 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1980년대 한국의 주요 수출 품목 중 하나였다. 수백 명의 아기들이 해외로 날 아가 전 세계로 보내졌다. 내가 어떻게 그들 중 하나가 됐을까? 나는 한국의 문화에 서 외면당한 미혼모의 아이였을 수도 있고, 한국의 가족이 너무 가난해서 날 키울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전쟁으로부터의 회복과 빠른 산업화는 한국에 격동의 시간을 가 져왔다. 내가 “계획했던” 아이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나는 태어났을 것이다. 당 시 한국법은 산모나 태아의 건강이 우려되는 경우에만 낙태를 허용했다. 상황이 좋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낙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987년 5월 7일, 나는 뉴어크리버티 공항에 도착했다. 나의 부모님 콜린과 제프리 바리쉬는 양쪽 조부모님을 비롯한 이모, 고모, 삼촌, 사촌들과 함께 나를 초조히 기다 리고 있었다. 아일랜드 가톨릭계인 엄마 쪽 가족과 동유럽 유대인인 아빠 쪽 가족들 이었다. 엄마는 이날, 아기를 안고 게이트를 들어오는 모든 여자의 팔을 쳐다보고 있 었다고 했다. 몇 달간 꿈꾸어오던, 그녀의 삶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내가 도착하자 엄 마는 한시도 자신의 품에서 날 놓지 않았다. “네가 나타나자마자 알아봤지. 소중한 네 얼굴의 모든 걸 기억하고 있었단다”라고 엄마는 말했다.
하지만 내 친가족은 날 사랑하지 않았을 거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일어난 일이 아 니기에 나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아는 것은 엄마가 나를 간절히 원했고 엄 마의 삶에서 그 어떤 것보다 날 아꼈다는 것이다. 내가 이것을 알고 있는 이유는 엄마 가 거의 매일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24살 때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야 엄마가 아 이를 가질 수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궁 내에 투여된 DEA라고 불리는 약물 때문이거나 DEA의 영향일 수 있는 20대 시절 앓았던 어떤 유형의 생식기 암으로 인해 생식 능력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요인이었지만 어쨌든 지금의 삶으로 나를 이끈 사건이 다. 물론 나는 다른 경우의 수를 고려해본 적이 있다. 엄마에게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축복이 내려졌다면 나는 바리쉬 가족에 입양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가족에게 갔을까? 나는 어디에 있게 되었을까? 나는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엄마의 온라인 부고에 달린 댓글을 읽으면서 소름 돋는 깨달음을 얻었다. 자신을 엄마가 발리스 파크 플레이스 카지노에서 칵테일 웨이트리스였던 시절부터 동료이 자 친구였다고 밝힌 한 여인이 조의를 표했다. 별달리 눈에 띄는 말은 없었지만, 스 크롤을 더 아래로 내리자 이 여인은 엄마가 “입양을 고려하도록” 했다고 말하고 있었 다. 언짢았다고 말한다면 이에 대한 내 감정을 가볍게 표현한 말이겠다. 물론 여인은 좋은 의도로 한 말일 테지만, 내 존재에 대해 거슬리고 부적절한 발언을 한 것을 읽는 것이 싫었다. 그 말은 엄마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입양만이 엄마가 되기 위해 받 아들여야 했던 방법이었음을 나타냈다. 엄마가 이 여자와 친구가 되지 않았다면? 엄 마 스스로 입양의 기회를 고려하거나 발견했을까? 내 운명을 결정한 많은 요소가 있 었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졌다. 또한 나는 항상 입양을 하고 싶었다고 말했던 엄마 에게도 “전통적으로” 가족을 만들고 싶어 했던 때가 있었으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를 엄마의 삶의 일부로 꿈꾸지 않았던 때가 있었던 것이다.
내가 친부모를 찾고 싶은지를 묻는 경우가 많다. 오랜 친구나 새로운 친구, 나를 알 아가고 있는 남자친구 및 가장 불안하게도 가족들까지, 모든 이들이 이 질문을 한다. 이 질문을 가장 먼저 한 사람은 주디 이모였던 것 같다. 내 기억 속 그 대화에서 우리 는 캐롤 이모 집 거실의 소파에 나란히 앉아있었다. 그 질문은 유도된 것이 아니라 그 저 특정 맥락 없이 나왔다. 주디 이모가 조용히 물었다. “친부모를 찾고 싶어질 것 같 니?” 그 질문을 받았을 때 아무런 망설임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니요. 한국은 가보고 싶지만, 가족을 찾고 싶진 않아요. 이모가 내 가족이에요. 우리 엄마가 내 엄 마고요.”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내 대답은 입에서 바로 흘러나왔고, 내가 한 말에 대해 솔직하게 생각해본 것은 그 이후였다. 나는 내 말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고 가장 진실한 부분은 우리 엄마 를 내 엄마로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엄마를 “날 입양한 엄마”라고 구분 지은 적 이 없다. 나를 낳아준 여인이 “생물학적” 엄마라는 개별적 호칭으로 불린다. “엄마”라 는 칭호가 여전히 붙지만, 그녀를 내 엄마로 정의하지 않는다. 이 친밀한 대화를 나눴 던 어린 나이에도 나는 생물학적 명칭과 상관없이 엄마라는 존재를 정의하는 자질과 행동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몇 년 후 엄마와 나는 같은 대화를 나눴다. 나는 엄마의 침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 다. 침대에서 TV를 보거나 책을 읽었다. 숙제를 하기도 했다. 그때 나는 창문 근처의 내 자리에서 대학 수업 리포트를 써야 할 시간에 아마 온라인 쇼핑을 하고 있었을 것 이다. 엄마가 우리의 편안한 침묵을 깨고 물었다. “네 한국의 가족을 찾고 싶니?” 나 는 이모에게 대답했던 말을 똑같이 했다.
“나는 아무도 찾을 마음이 없어요. 그저 한국에 가서 내가 온 곳을 보고 싶을 뿐이 에요.” 라고 내가 말했다. 엄마는 만족스러워 보이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엄 마는 미소지었고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엄마가 내 엄마예요. 나를 낳아준 사람은 내 엄마가 아니에요. 그냥 날 낳은 사람일 뿐이에요.” 나는 이렇게 덧붙여야 한다고 생 각했다. 그리고 엄마도 이 말을 듣고 싶었거나 들어야 했을 것이다. 엄마는 내게 다른 엄마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무언가를 그리워하고 있다고 느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엄마의 마음 한 쪽에 늘 있었을 것이고, 그 대상은 바로 나의 또 다 른 엄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또 다른 엄마를 그리워한 적이 없다.
내가 친부모가 누군지 모르고, 그들이 나를 포기했다는 사실을 한 번도 부끄러워해 본 적이 없다. 또한 정상적인 상황의 사람들보다 사랑을 덜 받았다고 느껴본 적도 없 다. 하지만 무엇이 “정상적”인가?
엄마와 아빠는 우리 가족을 정상적으로 대했다. 그들은 가족을 이루고 싶었던 사람 들이고 그저 다른 방식을 택했을 뿐이다. 그에 필요한 모든 생각과 준비, 감정들은 같 았다. 임신을 경험한 가족들과 똑같은 바람과 기다림의 시간도 있었다. 우리 엄마도 출산을 앞둔 사람과 똑같은 기대감과 두려움, 순수한 기쁨을 경험했다. 이것이 우리 엄마가 내게 말해준 것이고 엄마는 거짓말에 약하다. 그래서 나는 엄마가 지어낸 얘 기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신원 오인
그날 우리는 종일 볼일을 보았고,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아빠는 엄마를 만나기 전 사귀었던 한국 여인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6살의 나에게는 그 여인이 굉장히 이국적으로 느껴졌다. 그 여인은 아빠에게 한국 음식을 접하게 해주었고, 한국어를 말하기까지 했다. 이는 내가 모르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마치 동화를 듣는 것 같았고, 그 여인은 동화 속 공주처럼 느껴졌다.
내 정체성은 한국인도, 심지어는 아시아인도 아니었다. 그저 입양되었다는 사실이 인간으로서의 나를 대변한다고 생각했다. 한국인이나 아시아계 미국인이라는 정체성 이 내 가족의 정체성이 아니었으므로 내가 그 정체성을 대표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 다. 나는 내 가족과 같은 백인이었으나 참고 주석이 붙었다. 부모님은 내가 입양되었 다는 사실을 숨기려 하거나 내가 스스로 깨닫도록 두지 않았다. 다른 인종의 책임감 있고 사려 깊은 입양 부모들이 하는 것처럼, 부모님은 내가 부모님과 다르지만 그것 이 우리 가족을 특별하게 만든다는 것을 열정적으로 확신 시켜 주었다.
아빠 쪽 유대교 전통이 내게 위임된 혈통의 한 부분이었다. 나는 유대교 회당에 나 갔고, 욤 키푸르 때는 단식을 했으며, 하누카 때는 라트카를 먹었고, 내 성년의례 때 토라 문구를 읽었다. 엄마의 아일랜드인 혈통에서는, 가톨릭교 명절들과 누군가의 약 혼, 결혼, 출산 축하 파티, 출산, 세례, 견진 성사 및 누군가가 죽어갈 때 혹은 사망했 을 때 모든 친척이 모이는 자리에 참석했다.  
대부분이 미국인 첫 세대인 아시아인 친구들이나 동급생들과 비교하면 내 가족은 수수께끼였다. 마찬가지로, 나 역시 같은 디아스포라였지만 내가 그 가족에 속한 모 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들은 나를 집으로 초대해 정중히 대했지만, 종종 소통에서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내 필리핀, 중국, 한국 친구들의 부모님들은 나를 의구심과 동정, 실망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마치 내가 집 안으로 들어갈 때 신발을 벗지 않고, 음식을 먹을 때 기본적으로 포크와 나이프를 쓰므로 젓가락은 재미 삼아 사용하며, (내가 원하지 않는다면) 멋진 한국 남자를 만날 필요가 없고, 또한 의사나 변호사, 엔 지니어가 될 의무가 없다는 것을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현재의 내가 미묘한 차별이라고 인식하는 행동으로 내 삶을 어지럽힌 사람들이 많 았다. 그 대표적인 예는 다음과 같다.


1. 중학교 때 대리 교사 한 명이 출석 확인 시간에 내 이름을 불렀고, 내가 손을 들 자 의문의 시선을 보냈다. 왜 '바리쉬'라는 성을 갖고 있지? 그는 내 반 친구들 앞 에서 물었다. 반 친구 중에는 그 이유를 아는 아이들도 있었고 모르는 아이들도 있었다.
2. 진심을 담아 나에게 ‘곤니치와’라고 인사했던 직장 동료가 있었다. 그는 그날 내 게 직장에서 더 환영받는 느낌을 주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만족스러워 보였다.  
3. 가끔 내가 억양이 전혀 없이 영어를 잘하는 것에 대해 칭찬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 마지막으로 내게 칭찬을 보냈던 사람은 델리에서 일하던 남자로, 상을 주 듯 내게 샌드위치를 건넸다. 나는 그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내가 뉴저지에서 컸 기 때문에 영어를 잘하는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4. 내가 9살 때 부모님이 이혼하신 후, 주중은 엄마와 함께 보냈고 주말은 아빠와 보냈다. 아빠는 할머니의 작은 집으로 들어가 살고 있었다. 우리는 함께 TV를 많 이 시청했다. 할머니는 CBS에서 방영해주는 프로그램은 뭐든지 좋아하셨는데, 보통은 <닥터 퀸>이었다. 어느 토요일 밤, 가라데에 대한 이야기로 보이는 한 영 화의 트레일러가 나왔다. 평소와 같이 의자에 길게 기대앉아있던 아빠가 몸을 일 으키며 물었다. 저 사람이 누군지 아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건 브루스 리에 대한 영화란다. 70년대에 쿵푸나 가라데 같은 영화를 많이 찍었던 사람이야. 브 루스 리를 모른다니 놀랍구나.
브루스 리는 70년대의 대스타였고, 당연히 나는 그가 누군지 몰랐다. 하지만 그 사 실을 간과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사람임이 분명했다. 그다음 주 토요일에 할머니 집 에 머물 때 비디오 가게로 향하게 되었다. 아빠는 마초처럼 거들먹거리며 비디오 가 게 점원에게 어떤 브루스 리 영화들이 있는지 물었다. 가게에는 딱 한 편이 있었고 나 는 그게 어떤 영화였는지 모르겠지만 그날 밤 <닥터 퀸>을 보는 계획은 취소되었다.  
얼마나 빠른지 보이니? 아빠는 계속해서 물었고, 이는 마치 영화를 보는데 포함된 과정 같았다. 우리는 내가 본 적 없던 가장 창의적이고 빠른 방법으로 사람들을 때리 고 발로 차는 광경을 함께 시청했다.
결국 우리는 <드래곤: 브루스 리 스토리>를 보러 갔다. 극적이면서도 그가 백인 여 성과 결혼한 것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일 뿐이었다. 브루스 리에 몰입했던 시간 이후, 아빠는 우리 회당에서 주일 학교 수업 직후 열리는 가라데 수업에 나를 등록시켰다. 내가 아시아 문화를 접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 했던 아빠의 다른 시도들로는 옥 장신 구 선물하기, 중국인 직장동료들에게 날 소개해주기 등이 있었다.  
어렸을 때, 내가 가진 배경은 복잡하고, 나 자신이 가진 것과 부모님에게서 온 것들 로 짜 맞추어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이것뿐이었다. 내가 누군지 알 수 있는 모든 사실과 기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의문을 품은 적도 없다. 하 지만 이 증거는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거나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닌 사람이다. 많은 사람은 내가 교외 지역에서 자란 다른 백인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컸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타인들은 그들의 추측, 고정관념 및 편견 을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드러낸다.


어릴 때 주로 어떤 음식을 먹었나요? 그가 테이블 건너편에서 날 바라보며 물었다. 내가 할 말이 무엇이든 이미 관심이 있었다.
파스타를 많이 먹었죠 라고 내가 대답했다. 국수말이죠?
아니요, 파스타요 내가 반복했다.
그는 진심으로 혼란스러워 보였고, 나는 그에게 날 설명해야 할 필요를 못 느꼈다. 이 남자는 아마도 내가 그의 가족이 가끔씩 사먹던 형편없는 테이크아웃 음식을 먹
고 컸다고 상상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나를 보면서 이 첫 데이트가 잘 풀리면 차이나 타운이나 플러싱에 있는 최고 레스토랑보다 더 나은 음식을 내가 집에서 요리해 줄 것이라고 상상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에게 보여주었던 불쾌감의 표시는 가장 크게 불쾌함을 표시했던 순간 상위 5위 안에 든다.
보통은 어떤 생각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기분은 안다. 마치 내 가 존재하는 방식으로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기분이 든다. 사람들의 기대가 얼마나 당혹스럽든, 내가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기분이다. 압박감이라는 느낌이 내가 묘사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기분이다. 딱 한 가지 의문점은 있다. 이 경우, 잘못 된 정체성을 가진 것은 그들인가, 나인가?


다리
6학년 때, 처음으로 매력적인 다리가 어떻게 생긴 것인지 알게 된 때를 기억한다. 반에서 가장 예쁜 아이로 칭송받던 켈시라는 아이가 가늘고 긴 다리를 갖고 있었다. 같은 학년의 거의 모든 여자아이가 나보다 컸지만 켈시는 특히나 컸다. 긴 다리 때문 이었다. 거의 키의 반이었다. 하지만 굵기는 내 다리의 반이었다. 서로 나란한 책상에 앉았을 때 이 사실을 알아차렸다. 내 허벅지는 켈시의 허벅지보다 훨씬 더 넓게 퍼져 서 마치 살이 의자에서 흘러내리는 것 같았는데, 켈시의 허벅지는 단단히 의자에 잘 놓여있었다. 난 이 차이에 감탄했고 집착하게 되었다. 곧 이 집착은  성가신 질투가 되었다.
다른 아시아 소녀들은 가느다란 나뭇가지 같은 다리를 가지고 있지만 나는 나무 둥 치 같은 다리를 가졌다는 도움 되지 않는 과도한 의식이 나를 휩쓸었다. 내 베트남 친 구 제니도 켈시같은 다리를 갖고 있었다. 제니도 나와 같은 아시아인인데 왜 내 다리 는 저렇지 않지? 아기였을 때 래리 삼촌은(그에게 신의 축복이 있기를) 나를 “작은 스 모 선수”라고 불렀다. 내 다리가 워낙 통통하고 튼튼해서 힘 좋고 뚱뚱한 일본 스모 선수의 다리를 닮았다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의 별명이라는 매력이 사라지고 난 후, 나는 친부모로부터 돌연변이 유전자를 물려받았다고 생각했다. 나는 한국에서 입양 되었고, 내 입양 가족은 엄마 쪽 아일랜드 혈통과 아빠 쪽 동유럽계 혈통이 혼합되어 있었다.
사춘기로 접어드는 것은 여러모로 고문이었다. 얼굴에는 피부가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고, 여름에 첫 생리를 했는데 수영을 하러 가기 위해 탐폰을 사용할 줄 몰랐고, 브래지어 착용도 적응이 안 돼서 힘들었다. 내 외모에 대한 인식은 호르몬의 영향을 받아 증폭되어, 바지를 사는 것은 그중에서도 가장 비참하고 굴욕적인 경험이었다. 탈의실에서 벌어지는 나의 위기 상황에 대해 엄마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도움이 되 지 않았다.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모녀가 아니므로 체형에 있어서 공통점이 없었다.
‘네 몸매가 얼마나 귀여운데’라고 엄마는 말했었다. 나는 이를 엄마의 망상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땅딸막했고, 전통적인 관점에서 비율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나는 체 구가 작았지만 마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허리가 아니라 허벅지에 맞는 바지를 찾 아야 했고, 그래서 보통 엉덩이 쪽이 축쳐져 보기 좋지 않았다. 또한 발에 감길 정도 로 긴 길이가 아닌 바지를 찾는 것도 힘들었다. 탈의실 안 거울을 들여다볼 때면 눈물 을 흘리며 거울에 머리를 부딪치고 싶었다. 처음으로 나와 닮지 않았고 몸에 대한 당 혹감을 공유하지 못하는 엄마가 있다는 것에 대한 좌절과 복잡한 심경을 느꼈다. 내 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받고 그 말을 듣고 싶었던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아마도 엄마 는 나의 이러한 면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한 번도 우리를 '생물학적 엄마'와 '입양 딸'로 보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다른 모녀들과 같은 모녀 사이였다. 다행히도 내가 엄마와 닮지 않았다는 생각 에 몰두하지 않았고, 가족 중 누구와도 닮지 않았다는 생각에도 마찬가지였다. 엄마 는 변함없는 긍정의 불빛이었다. 내 친구들의 엄마들은 친구들이 찬장에서 늘 감자 칩을 가져다 먹기 때문에 허벅지 살이 찌는 거라고 말했다. 우리 엄마는 내 보기 좋은 “체조 선수 같은 다리”가 부럽다고 말했다. 내가 엄마의 가늘고 긴 다리가 부럽다고 말할 때면 엄마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시카, 네가 가진 것에 감사하렴. 그것이 진정으로 너라는 사람을 만들고, 그것이 바로 아름다움이란다.
내가 내 몸과 맺어온 관계는 나와 엄마의 관계를 따르지 못했다. 우리가 각자 품고 있는 몸에 대한  감정이 사랑이건 미움이건 간에 몸은 내가 “가족”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과 나는 다르다는 깨달음을 남긴 잃어버린 연결고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