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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수기] 어느 한국계 독일 입양인의 여행
작성일
2021.12.24

입양수기 - 가작


어느 한국계 독일 입양인의 여행


Marcel Kyu Schuppert [독일]



내 이름은 마르셀 규 슈퍼트이다. 나는 그래픽디자이너, 관광매니저, 뮤지션이다. 1984년 10월에 ‘컬러풀 도시’ 대구에서 태어나서 몇 달 후 입양되었다. 여러 도시를 거쳐 서울 도착하여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독일 남서부에 위치한 바덴-뷔르템베르 크주의 주도 슈투트가르트에 도착했다. 한국 이름은 오영규이다.
한국을 떠날 때는 몸이 많이 아팠다. 독일에 도착하자마자 양부모님은 나를 병원에 데려가셨다. 폐 수술을 받은 흉터가 아직 남아있다. 독일에서의 첫 출발은 좋지 않았 다. 어머니는 내가 매우 불안정하고 많이 울었다고 한다. 다행스럽게도 좋은 사람들 의 보살핌 속에 행복하게 자랐다. 내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이 글은 한국 출신 입양인이 성장하는 과정과 2016년 가을 처음으로 한국에 와서 내가 태어난 대구를 방문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1. 성장의 시간
우리 집에는 바닥에 뒹굴며 놀기를 좋아하는 털북숭이 반려견 에피가 있었다. 누나 는 2명으로 미리암과 미카엘라이다. 터키에서 입양된 미카엘라 누나는 나보다 먼저 왔다. 우리 형 마틴은 내가 항상 우러러본 존경의 대상이다.
알파벳 M으로 시작하는 이름의 4남매를 둔 우리 부모님은 기젤라 슈퍼트, 라이너 슈퍼트이다. 마음이 하늘 같이 넓은 분들이라 우리가 진짜 가족이라는 사실을 의심해 본 어린 시절, 주변에 한국 출신 아이가 있었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내 어린 자아는 절 대 아니라고 강하게 부정할 것이다. 나는 도시 전체에서 유일하게 아시아인으로 보이 는 아이였다. 솔직히 말하면 나 말고도 있었지만 슈투트가르트 전역에 퍼져 있었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유학 등 여러 목적으로 온 한국인이 많아져서 한국 문 화와 음식이 전파되었다. 케이팝과 케이팝 파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이를테 면 칼라 클럽 같은 곳이 있다. 한국은 요즘 핫하다. 한국 문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을 위한 여러 정기 모임이 있는데 나도 참여하고 있다.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보면 입양 문제나 내가 태어난 한국에 대해 생각한 적이 없다. 내가 있는 곳이 집이고 행복했기 때문이다. 물론 학교에 가면 아이들이 어디에서 왔 느냐, 부모님은 어디 분들이냐고 물었다. 별일 아니지만 같은 질문을 계속 받으니까 슬슬 짜증이 났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 대해서는 언제나 똑같이 대답했다.
내 외모가 내 삶이나 사람들이 대하는 방식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을까?
내 생각에 독일인 다수는 동아시아인을 좋아한다. 일단 예의바르고 똑똑한 것으로 유명하다. 내 경우에는 사람들이 대부분 열린 마음으로 친근하게 대해주었는데 일부 동정의 시선도 있었던 것 같다. 그들 눈에는 내가 흥미로워 보이고 어딘지 이국적이 었나 보다. 물론 정반대 경우도 있었다. 인종차별은 세계 공통의 문제다. 나도 몇 번 인종차별을 당했는데 아주 심각하지는 않았다. 두 세번쯤 되지만 별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세계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고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의 문제일 뿐이다. 수줍은 아이였지만 학교에서 친구들을 쉽게 사귀는 편이었다. 축구를 잘하는 것이
독일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내가 어딘가 조금 다르다는 걸 일찌감치 깨달았 다.
학창시절은 흥미진진했다. 나는 제멋대로고 장난기 많은 골칫거리였다. 그렇다고 구제불능까지는 아니고 재미를 추구하는 편이었다. 문제는 하필이면 내가 놀린 대상 이 담임선생님이라는 것이다. 어머니가 영어 선생님이었는데 아들과 같은 학교에 있기가 편하지 않으셨던 모양이다. 나는 스위스 국경 인근의 사립기숙학교로 보내졌다. 보덴호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교정이 위치한 덕분에 풍경이 끝내줬다. 학창시절을 생각하면 많은 추억이 떠오른다. 아무 근심걱정 없는 시간이었다. 어리고 창의적인  소년은 그리기와 음악과 축구를 좋아했다.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라면 무엇이든 좋았다.


2. 여행의 시작
청소년기까지 나는 항상 독일인이라고 생각했고 독일인처럼 행동했다. 특히 영국 에 살 때는 좋은 의미로 뼛속까지 독일인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한국인으로 보이는 외모가 좋았다.
앞서도 말했지만 나는 항상 어딘지 다르다는 느낌이 있었다. 무엇이 다를까? 입양 되었다는 사실? 남들과 다른 외모? 하나씩 정리해보자.
내 입양 문제에 처음 직면한 때는 2016년이었다. 아버지께서 한국에 함께 가면 어 떻겠냐고 하시며 한국 여행에 초대하셨다.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궁금했다. 한국방문 전문기관을 통해 방문 일정을 계획했 다. 32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내 평생 가장 흥미롭고 감동적이고 심오한 여행 이 될 게 분명했다. 모든 준비가 끝나서 갈 때까지 몇 달이 걸렸다.
당시 나는 런던에 살았고 아버지와 동거인 울라는 슈투트가르트에 있었다. 나는 도 쿄에서 며칠 지내고 서울에 있는 호텔에서 만나기로 했다. 인천에 도착해서 서울로 가는 길이 흥분되었다. ‘와, 내가 여기서 태어났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논 이 보였는데 점차 집이 늘어나더니 결국 서울의 중심 명동에 도착했다. 높은 빌딩들 을 보니 숨이 멎는 듯했다. 이제 어떻게 하나? 한국어는 잘 못하지만 방향감각이 괜 찮아서 아벤트리호텔까지 몇 블록을 걸어 잘 찾아갔다. 마침내 아버지와 울라와 반갑 게 재회했다.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서 두 사람을 보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우 리는 한국이라는 환상적인 나라에 도착해서 샅샅이 탐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일단 은 잠부터 보충했다.
다음 날 세계 반대편에 있는 나라에서 여행을 시작했다. 단팥이 든 물고기 모양 간 식을 먹었는데 맛도 좋고 독일식 와플이 떠올랐다. 북쪽으로 걸어서 서울 여행의 하 이라이트 중 하나인 경복궁에 도착했다. 한복이라는 전통 의상을 입은 여자들이 많았 다. 한복이 예뻤다.
명동과 도심에 흐르는 실개천을 보고 N서울타워가 있는 남산으로 향했다. 케이블 카를 타고 올라가서 이 거대한 도시의 광경을 사진으로 남겼다. 한강 반대편에 있는 롯데월드 타워를 보니 런던의 더 샤드가 떠올랐다. 저녁에는 런던에서 같이 일했던 한국인 친구 르네를 만났다. 르네의 안내로 강남에 있는 최고급 식당에서 내 평생 가 장 놀랍고 다양한 음식을 먹었다. 서빙카트에 담긴 40-50개 작은 접시에 각종 음식 이 담겨 있었다. 김치, 빈대떡, 온갖 해산물 말고도 일일이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많 았다. 맛도 일품이었지만 현지인이 소개해준 특별한 경험이라 더 의미 있는 시간이었 다.
배불리 먹고 행복한 상태로 아벤트리호텔에 돌아왔다. 첫날 일정 끝.
다음 날 1984년에 내 입양을 처리한 홀트아동복지회를 방문했다. 우리가 만난 젊 은 여성의 이름은 지영이었다. 내 입양과 관련하여 남아 있는 자료에 대한 설명을 듣 고나서 모든 서류와 정보를 건네받았다.
자료가 많지 않아서 별로 볼 게 없었다. 당시 아기들을 수용했던 방을 구경했다. 마 지막으로 태극기와 한국지도, 목걸이를 선물로 받았다. 기분 좋은 호의였다.
홀트 건물 주변을 걷는데 36년 전 내가 여기 있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너 무 비현실적인 일로 느껴져서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기분은 괜찮았 다. 우리는 택시를 타고 서울 관광을 계속했다. 현대 건축물과 전통 사찰, 한옥이 뒤 섞인 서울의 풍경에 우리는 할 말을 잃었다. 북촌한옥마을과 인사동도 둘러보았다. 아쉽게도 홍대나 이태원 같은 인기 장소는 나중에 들어서 가보지 못했다. 다음에 가 볼 생각이다.
이 활기찬 도시는 많은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잘 돌 아가는 듯했다. 우리는 생선과 신선한 채소, 고추가 곁들여진 한국 음식을 먹었다. 먹 편하도록 눈앞에서 식당 주인이 가위로 음식을 잘라주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체중이 줄었다.
여행 4일째 우리는 지방으로 여행을 계속했다.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최종 목적 지인 항구도시 부산 방향으로 향했다. 부산에 가는 길에 내가 태어난 도시 대구를 포 함하여 여러 도시를 방문하는 일정을 계획했다.
첫 번째 기착지는 대전이었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몇 시간 교외를 달려 속리산국 립공원에 도착했다. 여기서 처음으로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한국 문화에 점점 빠져드는 과정에서 이 모든 것이 내 뿌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직 내 뿌리에 대해 아는 게 없었지만 갑자기 눈물이 났다. 그 동안 한국과 무관하다고 생각했던 나이기에 기분이 묘했다. 그 순간 뭔가를 분명히 느꼈다.
내 친부모가 누구인지 아직 몰랐지만 순간적으로 감정에 압도되어 느꼈던 감정을 아버지와 울라에게 남김없이 털어놓았다. 얼마 후에 감정을 추스르고 다시 즐겁게 남 을 일정을 소화했다. 거대한 금불상과 아름다운 사찰을 보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 했다.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에는 등산객과 가족 방문객이 많았다.
하루 종일 걸었던 탓에 매우 피곤했다. 드디어 대구로 가는 내일의 여정을 위해 이 쯤에서 하루를 정리했다.


3.과거로의 여행
우리는 속리산 근처에서 하룻밤 묵고 다음 날 새벽 기차에 올랐다. 기차역에서 대 구라고 적힌 표지판을 보았다. 갑자기 흥분되면서도 긴장되었다. 네이버와 유튜브로 만 접한 대구였다. 도심으로 가는 차창 밖으로 대구만이 아니라 한국 도시에서 일반 적으로 보이는 아파트 단지가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와 울라는 호텔에 묵고 나는 몇 블록 떨어진 한국 민박에 묵기로 했다. 앞으로 벌어질 일에 마음이 설렜다.
처음 아침식사로 먹은 밥과 생선도 맛있게 먹었다. 독일과 유사하지만 완전히 대조 적인 것들이 재미있었다. 예를 들어 아침에 다 같이 둘러앉아 식사하는 것은 같지만 접시에 담긴 음식은 전혀 달랐다.
가족들과 대화를 나누고 아버지와 울라를 만나 대구 중심에 위치한 백합 어린이집 에 갔다.
나는 여전히 어린이집에 근무하는 테레사 수녀님과의 만남을 몇 달 전에 예약했다. 원래 고아원이었던 이곳에서 나는 생후 처음 몇 달을 지냈다. 나는 대구 동촌의 놀이 터에서 발견되어 인근 파출소로 전달되었다. 우리는 즐거운 대화를 나눴다. 테레사 수녀님과 어린이집 수녀님들이 우리를 위해 노래까지 불러 주셨다. 테레사 수녀님의 안내로 공간을 둘러보았다. 내가 갓난아기일 때 여기서 두 달을 보냈다는 사실이 믿 어지지 않았다. 지금은 어린이집으로 운영되어 아이들이 교실에서 놀고 있었다. 우리 일행을 본 아이들은 아버지와 울라에게 관심을 보였다. 유럽에서 온 낯선 사람들이 신기했나 보다. 특히 우리 아버지를 좋아했다.
우리는 큰 굴뚝을 지나 작은 교회를 방문했다. 테레사 수녀님은 우리가 와서 좋으 신지 대구 이곳저곳을 보여주셨다. 또 다른 교회와 여러 유적지도 보여주셨다. 제대 로 환영받는 느낌이었다.
다음 날 동촌역에서 수녀님과 만났다. 내가 발견된 놀이터에서 가장 가까운 역이었 다. 우리는 놀이터를 향해 걸었다. 평생 처음 내가 발견된 곳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 했다.
바닥이 녹색과 빨간색 격자무늬로 만들어진 놀이터로 SOS 어린이마을 건물 앞에 있었다. 테레사 수녀님은 어린이마을에 일하는 사회복지사와의 만남을 주선하셨다. 놀랍게도 내가 발견되었을 당시 인근 파출소에서 근무했던 경찰관도 오셨다. 조 선생 님이라는 전직 경찰관은 현재 블루베리 농장을 운영하고 계셨다.
이분들과의 만남은 내 평생 가장 초현실적이고 감동적인 경험이 될 것이다. 아름답 지만 혼란스러웠다.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하는기분이었다. 안타깝게도 내 사건에 대한 자료는 남아있지 않았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폐기한다고 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생 모에 대한 단서도 찾지 못했다. 말문이 막혀서 거의 말을 하지 못했다. 그저 주위를 보며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느라 바빴다.
우리는 파출소에 가서 현직 경찰관과도 대화했는데 역시나 내 사건과 관련된 문서나 정보가 없다는 말을 들었다. 우리는 다같이 사진 찍고 헤어졌다. 조 선생님과도 포 옹했다. 나를 만나려고 먼 걸음을 하신 분이었다. 절대 잊지 못할 만남이었다.
우리는 오리배가 떠 있는 동촌 강변을 따라 걸었다.
테레사 수녀님, SOS 어린이마을 사회복지사와 함께 동화사를 구경했다. 내 과거와 연결된 누군가가 곁에 있다니 무척 놀라운 경험이었다.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해 이야 기하고 많이 웃었다. 83타워에서 해가 지는 대구의 경관을 즐겼다. 수녀님은 이틀 동 안 거의 모든 걸 보여주셨다. 우리는 행복감과 만족감 속에 잠이 들었다.
대구에 온 지 나흘이 지났지만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마지막 날 은 혼자서 여행하기로 했다. 엔제리너스에서 카푸치노를 마시고 멋진 스카이레일을 타고 달성공원 동물원에 갔다. 내가 태어나고 4년 뒤인 1988년에 올림픽이 열린 대구 스타디움도 가보았다. 지금은 대구FC의 홈구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내가 대구에서 자랐다면 오늘날 이 경기장에서 뛰었을지도 모른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녁에 시내를 걸어 다니다가 약령시장에서 아버지와 울라와 우연히 마주쳤다. 이 발소에 간 우리는 나이 지긋한 부인과 대화하게 되었다. 부인은 우리를 만나서 기분 이 좋았는지 직접 안내해 주겠다고 했다. 우리는 그분 차를 타고 15-20분쯤 달려 서 문시장에 도착했다. 도심에 위치한 시끌벅적한 시장에는 대구 최고의 길거리 음식과 한국 전통의상 등 없는 게 없었다. 우리는 다양한 음식을 시도했다. 방금 만든 음식의 좋은 냄새가 진동하고 온갖 맛집이 즐비한 활기 넘치는 곳이었다.
눈에 보이는 대로 흡수하고 대구의 모든 걸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나를 낳은 어머 니와 당시 상황에 대한 질문이 머리에 가득했다. 내 과거와 대면해본 적이 없어서 더 욱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내가 본 모든 것이 좋았다. 사람들, 생전 처음 보는 것들,  H&M이나 맥도널드처럼 익숙한 것도 좋았다. 모두가 하나 같이 소중했다. 완전히 새 로운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고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다음날 아침에 떠나야 했다. 모두와 작별해야 하는 시간이 되 었다. 나는 숙소를 나와 동대구역으로 갔다. 기분이 이상했다. 이렇게 빨리 떠나야 하 는가? 더 알고 싶은 게 많았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가야 했다. 이 아름답고 특별한 도시에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나를 환영해준 대구와 작별하며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4. 여행의 끝
이번 여행에서 가장 중요하고 감동적인 도시는 분명 대구였다. 이제부터는 편하게 관광지를 보며 문화를 즐길 시간이었다. 그러기에 가장 좋은 장소는 한국 문화의 중 심지 경주였다. 우리는 불국사 등 유적지에 가고 시내에 있는 어시장도 방문했다. 한 국의 과거를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탄 나에게 최적의 도시였 다. 우리는 경주에서 이틀 있다가 다음 도시로 향했다.
서울에 가서 독일로 떠나기 전 마지막 여행지는 부산이었다.
한국 제2의 도시 부산은 지금까지 본 도시들과 완전히 달랐다. 거대하고 역동적이 고 산업적인 느낌이 많았다. 항만도 있지만 해운대나 자갈치시장도 있었다. 산문어를 먹을 기회는 없었지만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었다. 택시에서 하마터면 지갑을 잃어버 릴 뻔했는데 재빨리 달려서 떠나는 택시를 붙잡았다.
부산이 마음에 들었다. 그동안 가본 도시들은 산 사이에 있었는데 부산은 바다와 맞닿아 있다는 점이 좋았다. 독일 북부에 있는 항구도시 함부르크가 떠올랐다.
가볼 곳이 굉장히 많았다. 나는 전망대에서 보는 경관을 좋아해서 부산타워에 갔 다. 다이아몬드브릿지로 불리는 광안대교를 비롯해서 부산의 명소가 한눈에 들어왔 다. 우리는 흩어져서 각자 도시를 탐험해 보기로 했다.
그날 저녁 나와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울라는 잠시 산책하러 나가고 없었다. 우리는 그때까지 경험한 일에 대해 대화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그 동안의 모든 자극과 상황이 나에게 쉽지 않다는 것을 감지하셨다. 어릴 때 누군가를 잃어버 리는 상실감에 대해 알고 계셨다.
나는 아버지가 울면서 그 모든 감정을 표현하는 모습을 처음 봤다. 그 날 아버지는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나를 껴안고 자신이 잘못한 일에 대해 사과하셨다.
내 생각에 아버지는 아무 잘못이 없었다. 아버지와 우리 가족은 내 인생 최고의 선물이었다. 걱정 없이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보냈고 늘 필요한 것보다 넘치게 받았다. 아버지는 입양인의 심경을 잘 이해하셨던 것 같다.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서 완전히 다른 사람들과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면 많은 걸 버려야 했다. 나는 이 모든 상 황이 괜찮았지만 아버지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되었다. 분에 넘치는 보살핌을 받은 사 람으로서 입양 자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서울로 돌아가는 차에서 우리는 별로 말이 없었다. 지난 14일의 여행을 되돌아보면 모두에게 좋은 시간이었다. 우리가 본 모든 풍경, 그 모든 감동의 시간, 함께 나눈 경 험까지 전부 좋았다.
우리는 서울에서 마지막 하루를 보냈다. 떠날 채비를 하며 별 다른 일을 하지 않았 다. 다음 날 버스를 타고 인천공항에 가서 포옹하고 작별 인사를 나눴다. 두 분은 슈 투트가르트로 나는 런던으로 향했다. 이렇게 이번 여행은 끝이 났다.
서울을 출발한 항공기는 추운 모스크바에 경유한 후 런던까지 총 12시간을 비행했 다. 기분 좋은 여행이었다. 여자친구 조가 있는 영국에 돌아와서 좋았다. 흥분되었다. 웨일즈 출신인 조와는 언어교환으로 만났다. 여자친구와 기쁘게 재회하고는 한국 여 행에 대해 빠짐없이 전했다. 베이징, 도쿄, 서울, 서울에서 부산, 다시 런던에 오기까 지의 모든 여정을 들려주었다.
런던에 돌아왔지만 한국은 여전히 내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많은 걸 경험했기 때문 에 충분히 흡수할 시간이 필요했다. 다시 생각해 봐도 참 좋았다. 평생 기억에 남을 경험이었다. 런던에 돌아오자마자 한국 지도를 거실에 걸었다. 런던에는 한국 식당이 많이 있다. 내가 사는 핀스버리파크역 근처 코너에도 한국 식당이 있다. 나는 여자친 구와 영국에서 처음으로 비빔밥을 먹었다.
2019년에 런던에서 독일로 돌아온 나는 한글 수업에 등록했다. 다음 여행에 써먹 을 기본적인 단어를 배우기 위해 언어교환도 시작했다. 한국인도 많이 알게 되었고 온라인 요리수업도 들었다.
독일에 사는 한국 입양인을 위한 단체인 한국독일입양인협회(KAD)를 알게 되었 다. 여기서는 사람들이 모이는 행사를 개최한다. 2019년 처음 본에서 열린 한국인 모임에 참여했다. 굉장한 시간이었다. 독일 전역에서 온 한국 입양인들이 한데 모였다. 대부분이 40대로 상당수가 출생 가족을 찾고 있거나 찾아본 경험이 있었다. 그들의 입양 이야기나 입양에 대한 생각을 듣는 것도 흥미로웠다.
재미있고 신나는 행사였다. 독일의 케이팝 댄서들, 킥복싱 수업, 성대한 한식 뷔페 와 더불어 저녁에는 노래방 순서가 있었다. 정범구 주독일대사님이 참석자들 앞에서 첫 곡을 부르기도 했다.
여러 입양인과 비슷한 이야기를 나누며 동지애를 느꼈다. 물론 사람마다 상황이 다 르지만 한국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었다. 모두가 연결된 모습이 보기 좋았다. 함께 연 대하는 좋은 공동체였다. 우리는 김밥을 만들고 기분 좋은 시간을 보냈다. 심각한 대 화는 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어느 날 문득 한국 여행이 나를 바꿨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 다. 정확히 무엇이 달라졌는지 모르지만 여러 질문이 떠올랐다. 나 자신과 한국에 대 한 질문들, 한국이 나라는 사람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어떤 연결고 리가 있는지 더 알고 싶었고 궁금증이 떠나지 않았다.
나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나는 독일인인가? 한국인인가? 나는 어디에 속 했는가? 나에게 대답해야 하는 질문들이었다.


5. 한국인 또는 독일인
2016년 가을 한국에 가서 훌륭한 분들을 많이 만났다. 테레사 수녀님, 내 친구 르 네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한국의 분위기와 사람들은 내가 유럽에서 경험한 것과 완 전히 달랐다. 나는 내 정체성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했다. 입양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짧은 시간 집중적인 여행을 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질문이 떠오른다. 나는 독일인인가? 한국인인가? 아니면 그 중간인가? 비율로 따지면 어느 정도일까?
서울의 분위기도 좋았고 한국이 전체적으로 조화롭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람들은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모습이었다. 지금까지도 매우 인상적인 부분이다. 물론 낯 을 가리고 조심스러워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모든 특성이 내 성격의 일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게 한국적인 측면이지 않을까? 그럴 수도 있겠다.
솔직히 말해 독일에서 한국은 여전히 미지의 나라이다. 물론 케이팝 문화와 방탄 소년단(BTS), 싸이 같은 아티스트 덕분에 최근 들어 많이 알려지긴 했지만 한국이라 는 나라 자체는 여전히 이국적인 곳이다. 싸이가 유럽 전역에서 공연을 많이 하고 사 람들이 강남스타일 플래시몹에 몰두한 적도 있다. 싸이는 한국을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내가 생각하는 한국인은 협조적이고 배려심 많고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다. 독 일인이 그렇지 않다는 말은 아니지만 조금 다르다. 독일인은 훨씬 직설적이고 직접적 인 편이라서 차갑게 보이기도 한다. 워낙 인정사정 없는 사회라 그럴 수도 있다. 말하 고 보니 독일인들에게 미안하다.
한편으로는 비슷한 점이 많다. 내가 말하는 유사점이란 조직적이고 구조적이라는 측면이다. 모든 일에서 효율성과 정확성을 중시한다. 한국과 독일 모두 경제대국으로 서 삼성, 현대, LG, 메르세데스-벤츠, 포르쉐, 아디다스 같은 유명브랜드를 보유하 고 있다. 양국 모두 전쟁 이후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뤘다. 어쩌면 이 부분에서 한국이 조금 앞설지도 모른다. 날씨와 기후도 비슷하다.
독일인은 자신을 해결해야 할 문젯거리로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생 각하듯이 그렇게 진부하고 유머감각 없는 사람들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특히 서울 시내에서, 사람들이 우리에게 먼저 와서 인사를 건넸다. 유럽에서 온 백인들을 많이 만나지 못해서 그런지 우리와 적극 소통했다. 내 경우에 는 한국어로 말을 걸었다가 영어로 대답하니까 깜짝 놀랐다. 재미있었다.
생각해 보면 내가 보고 경험한 모든 것과 문화가 이미 내 일부였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은 분명 내 일부이다. 내 고향이다. 그 모든 시간이 흘렀지만 내 DNA의 일부이 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특정할 수는 없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는 점점호기심이 생겼다. 한국에 대해 더 탐구하고 싶은 것이 많다. 이 환상적인 나라에 대해 더 알고 싶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더 깊이 문화를 탐구하고 길거리 음식을 이것저것 먹어보고 군중 속에 섞이고 싶다. 그날을 간절히 고대한다.
나는 한국인일까 독일인일까? 양쪽 모두 조금씩 섞인 것 같다. 입양인 대부분이 비 슷한 감정일 것이다. 두 세계가 일정 부분 섞여 있다. 분명히 연결되어 있다. 정도가 강하거나 약할 뿐이다. 그 연결고리는 분명히 존재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나는 독일인처럼 행동하고 느끼지만 한국인의 특성이 분명히 존재한다. 확실히 말할 수 있 다.
중요한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한국이 내 일부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 일부를 나 는 좋아하고 소중히 생각한다. 해산물을 사랑하고 불고기, 치킨, 잡채를 좋아하며 삼 성 제품에 집착하는 것도 그 일부일 것이다. 나는 대구에서 독일까지 모든 기억을 가 져왔고 앞으로도 간직할 것이다.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두 세계 사이에 속한 사람 으로 행동하는 내가 자랑스럽다.
나는 더 알기 위해 돌아갈 것이다. 일단 지금은 나에게 주어졌던 시간에 대해 감사 하고 기쁠 따름이다.
나는 한국계 독일 입양인이다. 이것이 내 인생의 한 챕터이다.


6. 글을 마치며
무엇보다도 우리 가족에게 감사하고 싶다.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 형제들과 모든 가족에게 감사한다. 좋을 때나 힘들 때나 언제나 나를 지지해준 사람들에게도 감사한 다. 특별히 이번 여행에 나를 초대하여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해준 아버지와 울라에 게 감사한다. 좋은 동행이 되어 주었다.
여행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대구 거리와 시내, 동화사, 동촌, SOS어린이마을, 파출소까지 대구 곳곳을 안내해 준 테레사 수녀님과 샬트르 성바오로수녀회 수녀님들에게 감사하고 싶다. 내 친구 르 네, 우리를 만나려고 블루베리 농장에서 대구까지 오신 조 선생님에게 감사한다. 서 울, 속리산, 대구, 경주, 부산 등 한국 곳곳에서 만난 친절한 사람들에게 감사드린다. 모두가 우리의 추억 속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언젠가 백합어린이집에 반드시 돌아 갈 것이다. 독일에서의 모든 경험을 모아 이야기 꾸러미를 풀어놓을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내 이야기를 읽고 있는 당신에게 감사한다. 귀한 시간을 내어 내 글을 읽어 주어서 글쓴이로서 무척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