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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수기] 이대일 / 2 대 1 : 어느 입양인의 기록
작성일
2021.12.24

입양수기 - 가작


이대일 / 2 대 1 : 어느 입양인의 기록


Eric McDaniel [미국]



특별한 이야기를 가진 아이를 소개하고 싶다. 두 개의 가족, 두 개의 세계, 그로 인 한 수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아이다. ‘2 대 1’. 한국어로 발음하면 이대일이다. 이것이 아이의 이름이다. 이대일. 바로 내 이름이다.
한국 이름은 이대일이지만 미국 이름은 에릭 맥대니얼이다. 1986년생이며 한국계 미국인 입양인이다. 입양인은 대부분 정확한 출생일을 모른다. 버림받은 우리와 관련 된 서류나 기록은 없는 경우가 많다. 입양기관은 호적에 가짜로 출생일을 등록한다. ‘버림받은 고아의 족보’를 만드는 셈이다.
태어난 곳은 인천인데 워낙 시골이라서 친부모님도 나를 어디서 낳았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1980년대 한국은 산업화와 인플레이션이 심각했다. 한국은 전쟁 이후 빠르게 성장한 경제 국가였다. 그 과정에서 많은 가정이 재정적으로나 정신적으 로 피폐해졌다. 한부모 가정이나 가난한 집에서 어떻게 아이를 부양하겠는가? 한국 은 부모와 아이에게 더 나은 삶의 기회를 제공할 해결책을 발견했다. 해외 입양이다.
나는 4살 때까지 엄마, 아빠와 함께 살았다. 당시 46세였던 아버지의 별명은 ‘나이트 클럽 대왕’이었다. 깡패 사촌들에게 듣기로는 지역에서 매우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고 한다. 아버지가 어떤 일을 하는지 궁금하면 얼굴만 봐도 알 수 있다. 여기저기 금 이 간 얼굴, 둥근 눈가에 깊이 패인 주름과 거친 피부에는 모두가 함구하는 미지의 험 난한 과거가 담겨 있다. 가끔 아버지를 보면 과거를 후회하는 듯한 애잔한 눈길로 창 밖을 바라보는 무심한 시선을 볼 수 있다.
나를 가졌을 당시 어머니는 20세였다. 나는 차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아버지는 “아 이 이름은 이대일로 한다”고 하셨다. 대일은 ‘큰 사람’이라는 뜻인데 ‘2 대 1’이라는 의 미도 있다. 특히 나에게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두 세계. 두 가족. 두 문화. 두 이름에 릭 맥대니얼과 이대일. 사람은 1명인데 이름은 2개다. 이제부터 설명하겠다.
세계 어느 문화권이든 20년 나이차가 평범한 일은 아니다. 금기시되기도 한다. 결 혼도 안한 미혼이라면 한국 사회에서 색안경을 끼고 본다. 가족에게 버림받고 의절하 거나 주변 사람과 사회로부터 외면당한다. 그래서 한부모가 되거나 혼외자가 있는 집 안은 그 사실을 숨기고 가장 손쉬운 해결책으로 입양을 선택한다.
내가 태어날 무렵 아버지는 한물간 깡패로서 치열한 경쟁과 나이, 산업화에 밀려 모든 걸 잃고 인천에서 허드렛일을 하셨다. 한때 비서였던 어머니도 구직에 애를 먹 었고 집에 거의 없었다. 나는 언제나 혼자였다.
한국과의 추억을 떠올리면 단순한 추억 그 이상이다. 마치 폴라로이드 사진 같다. 내 모든 오감이 추억의 사진에 담겨있다. 눈을 감으면 그때의 모습, 냄새, 촉감, 소 리, 맛이 또렷이 기억난다. 고아원에 있을 때도 모든 기억이 내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다. 내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다. 아무도 신뢰하지 못한 나에게 과거의 기억은 나를 사람들로부터 지켜주는 도구였다. 한편 그 기억들은 나 자신과 한국 부모님, 버림받 은 것에 대한 증오심을 부추겼다.
돌이켜 보면 나는 배불리 먹은 기억이 없다.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는 끊임없이 싸 우셨다. 언제나 공기 중에 소주 냄새가 났다. 녹색 유리병이 산산조각 나고 깨진 파편 이 바닥에서 반짝였다. 찰싹하고 몸이 부딪치는 소리, 심장을 후벼 파는 거친 말이 떠 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말에 담긴 증오의 공기가 스프레이병에서 분사된 것처럼 공기를 채웠다.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심하게 울었던 기억이 있다. 내 울음소리가 벽을 타고 울렸 다. 나는 두 사람이 싸움을 멈추도록 있는 힘껏 울었다. 싸우는 부모님을 말리다가 맞 아서 나가 떨어지기도 했다. 차디찬 바닥에서 축축한 소주 냄새가 났다. 바닥에 쓰러 진 채 울면서 벽을 보면 서로에게 주먹질하는 그림자가 보였다. 차갑고 끈적거리는 얼굴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자욱한 담배연기로 숨쉬기가 어려웠다.
내 인생을 완전히 바꾼 평생 최악의 날이 찾아왔다. 엄마, 아빠는 만취한 상태로 싸 우면서 집에 돌아왔다. 술병이 깨지고 방바닥이 흔들리고 비명소리가 들렸다. 나는 맞을까봐 겁나서 몸을 웅크렸다. 그날 밤 모든 것이 달라졌다. 부모님은 서로 치고 받 으며 격렬하게 싸웠다. 온갖 물건이 깨지고 부서졌다.
갑자기 비명소리가 났다. 어머니가 고통과 공포 속에 얼굴을 찡그리며 몸을 숙였 다. 그 뒤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무도 없었다. 그 날 내 인생 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게 내가 어머니를 본 마지막 날이었다. 어머니는 부산으로 가버렸고 나만 아버지 집에 남았다. 상심한 나는 문을 보며 어머니가 돌아오기를 울면서 기다렸다. 어머니 는 돌아오지 않았다.
내 삶이 완전히 바뀌는 순간이 찾아왔다. 아버지가 여행을 가자고 하셨다. 음성은 부드러웠지만 더듬는 모습이 부자연스러웠다. 외롭고 축축한 집보다는 낫겠지 싶어 서 집을 나섰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우리는 어느 사무실에 도착했다. 기다란 흰색 책 상과 큰 소파가 놓여있었다. 아버지와 낯선 아줌마가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소파에 누워 있었다. 아버지는 부드럽게 말씀했다. “대일아, 누워서 눈 좀 붙여라. 좀 걸릴 거야.” 배고프고 지치고 지루한 세 살은 잠이 많다. 나는 깊이 잠 들었다.
어느 아주머니가 가만히 나를 깨웠다. “아버지는 너를 두고 가셨어. 걱정하지 마 라. 우리가 잘 보살펴 줄 테니까. 앞으로는 여기가 네 집이다.” 순간 온몸에 전기가 찌릿하고 몸이 굳어버렸다. 포탄의 충격 같은 굉음과 반향으로 정신이 혼미했다. 두려움이 심장을 관통했다. 가장 큰 공포는 버림받았다는 사실이었다. 거리를 좁혀오는 사자무리를 피해 전력으로 도망치다가 기진맥진한 영양처럼 무력감이 찾아왔다. 버 림받았다는 감정이 내 마지막 행복까지 갉아먹는 동안 그렇게 그냥 누워있었다.
식사는 하루에 한두 번 나왔다. 작은 그릇에 담긴 국과 밥이 전부였다. 종종 바닐라 웨하스나 크래커를 먹는 날도 있었다. 나는 낯선 환경 때문인지 고아원에서 매우 조 용한 아이였다.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곳이 싫었다. 각지고 무미건조한 지루한 곳이었다. 아무도 웃거나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말이 많거나 시 킨 일을 안 하면 손목이나 종아리를 맞았다. 귀를 꼬집고 잡아당기고 지혈대를 고정 하듯 비틀었다. 고아원의 일상이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길이 보이지 않 았다. 사는 게 죽도록 싫었다.
매일 하는 일과 중에 더러운 변기 청소가 있었는데 할 때마다 그렇게 싫을 수가 없 었다. 내가 매일 해야 하는 일이었다. 화장실을 재빨리 효율적으로 청소하지 않으면 귀를 잡아당기고 소리를 질렀다. 3살이라 일반 변기를 쓸 수 없던 나는 화장실에 가 기 힘든 병원 환자들이 사용하는 조그만 알루미늄 통을 변기대용으로 사용했다.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최악의 고아원 기억 중 하나다. 내 전용 변기는 모두가 생활하는 숙소 문가 오른편에 놓여 있었다. 아무나 볼 수 있는 곳에 있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대소변을 해결해야 했다. 자주 눈물이 났다. 하지만 시키는 대로 하지 않 으면 혼이 났다.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갑갑했다. 허기와 학대에 시달린 나는 당혹스 럽고 수치스럽고 우울하고 증오심으로 가득했다.
평범한 어느 날 아침이었다. 이상한 아저씨와 여자아이가 왔다. 차분히 걷는 두 사 람에게서 아우라가 느껴졌다. 따스한 주홍빛 광채가 뿜어 나오는 듯했다. 여유가 넘 치고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내 쪽으로 걸어오는 두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들 을 감싼 따스한 빛에 홀린 기분이었다. 키가 큰 남자는 갈색 트렌치코트에 마술사 모 자와 검은 안경을 쓰고 있었다. 하얀 얼굴에 번쩍이는 하얀 이로 웃는 모습이 눈에 들 어왔다. 옆에 있는 딸은 나와 비슷해 보였다. 아이는 상냥하고 부드럽고 미소가 예뻤다. 선생님은 나에게 저 사람들과 같이 가야 한다고 하셨다. 나는 어디가 되었든 무조 건 따라갈 태세였다. 그때는 몰랐지만 이 사람은 내 입양을 담당한 변호사로 내 인생 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다음 기억은 난생 처음 탄 비행기이다. 정말 끔찍했다. 기압 때문에 귀가 무척 아팠 다. 나는 소리지르며 울어 댔다. 중이염까지 생겼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시간이 지 나고 지진이라도 난 듯 덜컹거리더니 어느 새 비행기가 지상에 있었다. 기압이 정상 으로 돌아오자 뻥 뚫리는 소리와 함께 먹먹했던 귀가 나아졌다. 비행기에서 내리자 드디어 땅에 도착했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었다. 하지만 뭔가 다르다는 걸 감지하자 순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공항은 낯선 광경과 소리로 가득했다. 미국에 온 것이다.
공항에서 걸어가는데 불안이 엄습했다. 사방을 둘러보니 하나같이 달랐다. 나이 많 은 사람, 어린 사람, 뚱뚱한 사람, 마른 사람, 흰 피부, 갈색 피부, 검은 피부 등. 여기 는 미국이었다. 충격 때문에 순간 몸이 얼어붙었다. 천천히 곁눈질을 했다. 변호사 아 저씨는 나를 잡고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웃고 있는 아줌마와 아저씨, 히죽히죽 웃고 있는 나랑 비슷해 보이는 사내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몇 마디 나눈 뒤에 변호사는 나를 들어서 아버지 품에 안겼다. 순간 공포가 온 몸을 감싸고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발버둥치고 소리치며 목이 터져라 울었다. 이 생명 체들은 대체 누구인지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나처럼 생긴 아이가 손에 사탕을 들고 달려왔다. 페즈 캔디였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사탕을 먹고 싶어할 거라 생각했는지 사탕을 주었다. 나는 잠시 울음을 멈추고 아이가 손에 쥔 걸 보았다. 그게 뭔지 알 턱이 없었다. 겁에 질린 나는 아이 손을 발로 찼다. 사탕이 바닥에 떨어지자 아이도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는 “쟤, 돌려보내, 돌려보내란 말이야! 너 한국 가!”라 고 소리쳤다. 나처럼 한국계 미국인 입양인인 우리 형이었다. 곧이어 변호사와 딸이 자리를 떠났다.
미국 아버지는 내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큼직한 팔로 안으셨다. 아무리 발버둥쳐 도 허약한 내 힘으로는 속수무책이었다. 아버지는 나를 운전석 옆자리에 태워서 어머 니 무릎에 앉혔다. 시동소리가 들렸다. 어머니는 앞자리 사물함에서 갈색 가죽 커버의 사진첩을 꺼내셨다. 나는 울면서도 사진첩에 시선을 고정했다. 어머니는 사진첩 을 펼쳐서 사진을 보여주셨다. 첫번째 사진은 집이었다. 두번째 사진에는 미국 어머 니가 형과 웃고 있었다. 세번째 사진에는 미국 아버지가 형과 웃고 있었다. 네번째 사 진에는 세 식구가 식탁에서 웃고 있었다. 다음 사진에는 침대가 있었다. 그 뒤에 내가 어떻게 했을까? 앞으로 벌어질 일을 깨달은 나는 금세 곯아떨어졌다. 내가 그토록 꿈 꿔왔던 가족이었다. 사진에서 사랑이 느껴졌다. 이제 나에게도 가정이 생겼다. 가족. 삶. 두 번째 기회. 그러나 새로운 가족은 새로운 책임을 의미한다는 걸 나중에 깨달았다.
1990년대 미주리 주 인디펜던스에서 한국인 입양인으로 사는 것은 쉽지 않았다. 초등학교에서 제일 먼저 부딪친 문제는 언어였다. 미국에 도착해서 6개월 동안 벙어 리 상태였다. 내가 처음으로 한 말이 “사랑해요 엄마”라서 어머니가 무척 기뻐하셨 다.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진짜다.
새로운 삶과 함께 새로운 세계의 경험이 찾아왔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진짜 문제 가 생겼다. 학교에 가는 버스에서 주로 백인 아이들이 괴롭혔다. 매일 스쿨버스에서 아이들이 눈을 잡아당겨서 내 눈모양을 놀렸고 쓰레기를 던지고 침을 뱉었다. 처음에 는 고아원 출신의 본능이 발동했다. 맞불 작전으로 나갔다. 나를 놀릴 때마다 죽도록 싸웠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나보다 덩치가 큰 아이와 싸워봐야 상대가 안 되고 눈물 만 났다. 한국 아버지와 싸우는 힘 없는 어린 꼬마처럼 느껴졌다.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미움과 공포만 쌓여갔다. 버스에서 내리면 크고 푸른 눈의 짧은 금발머리 어 머니가 활짝 웃으며 기다리셨다. 어머니를 보면 아무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내가 사랑받고 있으며 안전하다는 확신 속에 어머니 품으로 달려가 안겼다.
내 과거 때문인지 내가 당하는 일을 사실대로 말하기가 어려웠다. 집에 온 아들의 셔츠에 묻은 침얼룩과 얼굴의 눈물자국을 보고 어머니가 “에릭, 무슨 일인지 말해줄 래?”라고 물어보셨다. 대답할 수 없었다. 어머니를 걱정시키고 슬프게 하고 싶지 않 았다. 몇 달 동안 버스에서 온갖 정신적 고문과 인종차별을 당한 끝에 나는 차별에 맞 서 싸우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깨달았다. 한국에서의 일들을 생각하니 버스에 서 나를 괴롭히는 아이들이 느끼는 반감이 이해되었다. 아이들은 나를 모르기 때문에 미워한 것이다. 아버지가 나를 학대하는 이유를 몰라서 증오심만 생겼던 기억이 떠올 랐다. 사람들에 대한 분노를 촉발하는 촉매제가 바로 증오심이었다. 나 자신에게 이 렇게 물었다. “그 사람들도 똑같은 문제를 겪어서 그런 게 아닐까?” 다행히도 학급환 경은 괜찮았다. 다양한 아이들이 수업을 들었다. 스페인계, 아프리카계 미국인, 조금 씩 다른 백인들이 수업에 참여했다. 우리는 함께 놀고 공부했다. 이런 생각을 한 끝에 나를 괴롭힌 아이들의 분노에 친절로 맞서기로 했다. 나에게 두 번째 기회가 주어졌 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느꼈던 그 감정을 떠올렸다. 나는 친절을 무기로 사용하기로 했다. 그 아이들과 피부색이 같은 아이들 중에 나를 진심으로 좋아한 아이들도 있었 기 때문에 더욱 용기를 냈다.
나는 당당히 고개 들고 버스를 타서 나를 괴롭히던 아이들 옆에 앉았다. 고개를 끄 덕이고 미소를 짓고는 그들을 무시했다. 아이들은 나를 괴롭히고 화를 부추기려고 안 간힘을 썼지만 분노로 응수하지 않았다.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사흘쯤 그렇게 인종차별에 맞서싸웠더니 괴롭힘이 끝났다.
사춘기 아들에게 미국 아버지는 중서부의 교훈 2가지를 알려주셨다. “아들아, 좋은 일은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아들아, 인생은 불공평한 거니까 이겨내라.”
두 교훈은 깊은 울림을 주었다. 한국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경험을 통해 인생이 불 공평하다는 걸 이미 경험했다. 원하는 걸 얻으려면 행동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도 알았다. 버림받고 입양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쉬운 해결책을 택해서 사람 들에게 손가락질하고 세상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바라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행 히도 나는 사랑 넘치는 가정에 입양되었다. 우리 가족은 내가 한국에서 경험했던 가 족, 사람, 인간의 개념과는 모든 면에서 정반대인 가치관과 도덕성을 가르쳐주었다. 그 시절 나는 모두의 부정적인 생각, 편견, 증오, 무지를 내 기쁨의 연료로 사용했다. 고아원에서 증오가 무엇인지 이미 경험했기 때문에 증오의 실체를 알고 있었다. 미국 에서 미국 가족과 살게 된 나는 증오심을 존중했다. 참된 기쁨을 깨닫기 위해 증오심 을 포용했다.
그렇게 성장하여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는 한국인 정체성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어 느 정도였냐 하면 고등학교와 대학교 시절 치노(Chino, 중국인)라는 별명을 그냥 받 아들였다. 15살 때 우리 형 아담을 따라 쿠바에 갔을 때 처음 치노라는 별명이 생겼 다. 형이 속한 팀이 쿠바에서 초청경기를 하게 되었다. 미국인은 공산국 쿠바에 가는 것이 금지되었던 시절이다. 우리는 정부의 허가를 받아서 가게 되었다. 미국 정부의 힘과 피델 카스트로 덕분에 우리는 하바나로 향했다. 현지인들은 우리 형제를 ‘치노’ 라고 불렀다. ‘아시아인’으로 통하는 단어였다.
팀과 함께 미국 인디펜던스에 돌아왔다. 백인 친구들이 계속 ‘치노’라고 부르는 것 이 썩 맘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대로 두었다. 친구들은 “브로, 스페인어로 아시아인을 말하는 단어잖아”라고 했다. 나도 수긍하며 그냥 흘러가게 놔뒀다. 내 안에 더 이상 한국의 뿌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솔직히 내 행동은 한국의 뿌리 를 무시했다. 고등학교에서 반장을 하던 2년 동안 친구들은 에릭 맥대니얼이라는 미 국 이름이나 이대일이라는 한국 이름보다 ‘치노’라고 더 많이 불렀다. 한국인의 정체 성을 존중하거나 고수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다. 실수였다. 나는 어떻게 내 정체성 을 찾고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을까?
내 모든 관심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야구에 집중되어 있었다. 고아원 아이였던 이대일처럼 가난하게 생을 마치지 않으려면 성적도 중요했다. 나는 야구선수 장학금 을 받아서 학비를 거의 내지 않아도 되었다. 좌완과 우완이 가능한 양완투수로서 유 일한 한국계 미국인 유망주였다. 야구를 향한 사랑 때문에 나는 꿈을 이루기 위해 더 열심히 노력했다. 나 스스로를 아시아인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잘 몰랐고 상관없었다. 그러다가 예상하지 못한 커브볼이 날아왔다. 아버지가 암 진단을 받으신 것이다.
존경하는 분이 아프다는 사실에 나는 극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수많은 전액장학금 기 회를 미루고 아버지와 함께 있기 위해 캔사스시티로 돌아왔다. 우울증에 압도된 나는 학업에 집중하기 위해 야구를 그만두었다. 평생 처음으로 고아원 시절의 아이처럼 길 을 잃고 상처받은 느낌이 들었다.
대학교에서 처음으로 진정한 한국인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나에게 한국 음식과 문화를 알려주었다. 함께 한국 영화나 드라마를 봤다. 드라마 ‘천국의 계단’을 보고 극중 배우처럼 머리를 길렀다. 조금씩 한국에 가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생겼다. 미국 부모 님께 입양 서류를 보여 달라고 말씀드렸다. 서류를 통해 이복 형제자매가 있다는 걸 알았다. 아버지는 같지만 어머니는 다른 형제들이었다. 폴라로이드 사진 같은 순간들 이 종종 떠올랐다. 나는 돌아가야 했다. 더 알고 싶었다.
지금부터 13년 전인 2008년, 나는 차를 팔고 재무 업무를 그만두고 새로운 목표를 위해 짐을 쌌다. 한국 아버지와 어머니, 이복 형제자매를 찾는 것이다.
한국에 온 나는 입양기관을 통해 친가족 찾기를 신청했다. 친부모를 찾을 가능성이 10퍼센트 미만이라고 들었지만 편지와 사진을 기관에 보냈다. 기관에서는 우리 부모 님에게 전보를 보냈다. 2009년에도 전보를 쓰는 사람들이 있었다.
운이 좋게도 두 분 모두 찾았다. 아버지는 온갖 감정이 들었던 모양이다. 나는 잘 지낸다고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우리의 관계를 재건할 생각이라고 말씀드렸다. 나와 아버지 모두 그럴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절대 부끄러워하실 필요없다고 거듭 강조했 다. 얼마나 힘든 결정이었는지 충분히 이해하며 백 퍼센트 용서했다고 말했다. 누구 나 ‘두 번째 기회’를 가질 자격이 있으며 아버지와 우리 가족을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 다고도 말했다. 너무 힘든 시기라서 아버지 혼자 나를 부양하기는 역부족이었고 작은 집에서 죽는 것 외에 유일한 해결책이 입양이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내가 삶에서 두 번째 기회를 얻었듯이 우리 한국 가족과 나도 관계를 되살릴 두 번째 기회를 누릴 자격이 있었다.
어머니와도 동일한 방식으로 소통했다. 어머니는 당황해서 그런지 훨씬 감정적으 로 반응하셨다. 나는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고 과거에서 교훈을 배우면 된다고 했 다.
내가 누구인지 확인할 두 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알고 보니 내가 태어난 달은 4월 이 아니라 2월이었다. LA에 고모와 사촌이 살고 있다고 했다. 내가 미국에 사는 동안 그들도 미국에 있었던 것이다. 입양기관을 통해 이복 형제자매가 프랑스로 입양되었 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내 가족과 뿌리, 나 자신에 대해 알게 된 매우 소중한 기회를 얻었지만 과거의 모든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는 않았다. 안타깝게도 어머니는 아버지가 휘두른 칼 때문 에 집을 떠난 것이었다. 어머니는 현재 알코올 중독에서 회복 중이셨다. 폭력배 출신 인 아버지는 오랜 세월 사람들을 괴롭히고 속여왔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될수록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형제자매를 찾고 싶었다. 반드시 알아야만 했다. 더욱 성장하고 싶었다. 나는 한국 아버지와 다른 사람이다. 한국 아버 지를 보면 증오심으로 불탔던 내가 보였다. 내 형제자매에게 그들과 피를 나눈 가족 중 누군가가 그들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했다.
그러자면 그들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다. 우선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했다. 어머 니와 아버지를 완전히 용서했다는 걸 행동으로 보였다. 매년 추석과 명절에 아버지를 찾아갔다. 내 이복형제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라도 얻어서 꼭 찾고 싶었다. 그러나 아 버지는 이 문제만 꺼내면 무조건 모른다고 하셨다. 계속 거짓말하고 뭔가를 숨기셨 다. 아무리 노력해도 꿈쩍하지 않으셨다. 나는 그저 기다리면서 한국에서의 삶을 이 어나갔다.
한국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새로운 문이 열렸다. 가족을 찾았고 내가 한국에 대해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가 무엇을 해야 즐거운지를 알게 되었다. 12년 동안 다양한 일 을 하고 많은 사업을 시도하고 다양한 인간관계를 맺고 많은 걸 경험했다. 심지어 한 국 음식점까지 개업했다.
나는 행사기획자가 되었다. 내 형제들이 나를 찾기 쉽도록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네트워크를 넓혔다. 내 평생의 사랑이자 열정인 야구가 삶에 다시 찾아왔다. 한국의 독립야구단 ‘저니맨’에서 선수로 뛰면서 코치까지 맡는 행운을 얻었다. 국내거 주 외국인을 위한 잡지 ‘그루브코리아’ 2018년 4월호에 내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작년 추석에는 아버지와 같이 사는 분과 함께 인천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거실에서 TV를 보며 대화하던 중에 갑자기 아버지가 부인에게 TV장 서랍에서 뭔가를 꺼내 오 라고 손짓하셨다. 내 형제자매의 생일이 적힌 사진이었다. 12년간 기다리고 회유한 끝에 마침내 필요한 정보를 주셨다. 아버지로부터 정보를 얻기 위해 설득하는 과정에 서 세세한 부분까지 통역해준 친구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드디어 꼭 필요한 정보를 입수했다.
그동안 나는 전 세계에서 온 입양인들을 많이 만났다. 각종 온라인 입양인 그룹을 찾아서 입양인 커뮤니티에 가입했다. 모든 SNS그룹을 취합해서 사진과 정보를 올렸 다. SNS에 내 이복형제 정보를 올리고 한달 뒤에 메시지를 하나 받았다.
내 누나가 입양인들 이야기가 궁금하여 페이스북에서 입양인을 검색해보았다. 우 연히 내가 올린 사진과 생일이 담긴 글을 보게 되었고 충격을 받았다. 12월 중순에 우 리는 처음 영상통화를 했다. 누나는 한국어나 영어를 못하고 프랑스어만 했다. 누나 의 아들인 내 조카가 영어를 잘 해서 중간에서 통역해 주었다.
내가 누나와 형을 찾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설명하고 누나에게 사랑한다고 두 번 다시 누나를 잃어버리지 않겠다고 조카를 통해 전했다. 이제는 그 누구도 누나 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고도 말했다.
인내와 끈기로 버틴 끝에 마침내 형제들에게 동생이 있다는 사실을 알릴 수 있었 다. 내가 그들을 찾고 있었다는 것도 알렸다. 우리는 형제로 다시 연결되었다. 그들이 누구이고 그들의 가족이 누구인지도 알려줄 기회를 얻었다. 이제는 내가 한국어를 어 느 정도 할 수 있고 전체 프로세스를 알고 있기 때문에 형제들이 생모를 찾도록 도와 주고 어머니와 첫 영상통화를 할 때 통역해 주었다.
이 글은 한 입양인의 경험에 대한 기록으로 시작했지만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나는 프랑스에 가서 우리 형과 누나를 만나고 난생처음 그들을 꼭 껴안아주어야 한다.
그 동안 종종 내 앞에 두가지 세계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를 버렸던 한국과 나 에게 차별의 시련을 주었던 미국이다. 하지만 두 세계에서 겪은 모든 어려움과 고통 은 최고의 사람이 되겠다는 강한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나는 입양인이자 디아스포라 로서 두 문화에 속했다는 점이 자랑스럽고 미국 부모님과 한국 부모님에게 감사드린 다. 나는 모든 시련을 이겨냈고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
당신이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든, 가족의 상황이나 문화적 정체성의 위기로 길을 잃고 혼란스럽고 절망적이고 외롭더라도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충분히 극복할 수 있 다. 모든 문제와 시련, 어두운 현실과 증오를 넘어 훨씬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나 는 운이 좋았지만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당신도 할 수 있다. 두 번째 기회에 노력과 열정을 쏟아부어 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