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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수기] My Adopted Mother Tongue 나의 양모국어 (養母國語)
작성일
2021.12.24

입양수기 - 대상(번역)


My Adopted Mother Tongue

나의 양모국어 (養母國語)


Spencer Lee Lenfield [미국]


1.
단순히 유창하거나 문법적으로 정확한 것만이 아닌, 우아한 한국어로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때때로 궁금하다. 내가 영어에서 느끼는 것과 같은 수준의 의미, 어원, 리듬의 미묘한 차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다면. 6년 동안 배우려 애썼던, 내 얼굴과 DNA에 일치하는 언어지만, 여전히 너무나 자주 내가 닿지 못하는 곳에 있는 언어에서 말이다. 조지프 콘래드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제2외국어인 영어로 글을 쓰는 법을 배운 것으로 유명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들을 영문학에서 가장 우아한 작가 중 한 명으로 손꼽을 것이다. 리이윈과 구오 샤오루는 성인이 되어 영어를 배웠지만, 오늘날 아름다운 글을 쓰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줌파 라히리는 첫 작품을 영어로 썼지만, 지금은 이탈리아어로 쓴다. 사뮈엘 베케트는 스스로 말하길 “스타일 없이” 쓸 수 있도록 프랑스어로 글을 썼다고 한다. 인식적으로는, 뛰어난 작품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단지 어려울 뿐이다.
아름다운 한국어를 쓰고 싶다는 것이 언제, 그리고 왜 이토록 절실한 꿈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스물다섯 살에 한국어 수업을 듣기 시작하기 전까지 한국어를 거의 알지 못했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인종적으로 한국인이지만, 생후 3개월에 입양되어서 자라는 동안 한국어를 전혀 알지 못했다. 대학에서 한국어를 공부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을 때, 글을 쓴다는 목표를 염두에 두지는 않았다. 언젠가 친가족을 만나면 한국어로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은 있었던 것 같다. 또한 한국 문학을 읽고 싶었다. 실용적이고 회화적인 수준의 한국어에 만족했을 수도 있다. 지금껏 이 목표마저도 때때로 벅차게 느껴진다. (뉴스 방송과 중얼거리는 나이 든 택시 기사들과의 대화는 여전히 내 언어 실력에 좌절감을 안겨준다.)
한 언어로 아름다운 글을 쓴다는 것은 덧없는 메모나 신문에서부터 가장 위대한 소설과 시에 이르기까지, 그 언어의 모든 사용자 및 문학과 깊은 교감을 이루는 일이다. 나는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공부했고, 교수님은 우리가 그 언어들로 글을 쓰도록 가르쳤다. 의사소통에서의 유용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해당 언어를 구성해 보는 것이 그 작동 방식을 내면화하고 관용구와 의미의 음영들에 대한 진정한 감수성을 배웠다는 것을 나타내주기 때문이었다. 아름다운 한국어를 쓰는 것은 단순히 문법을 이해했다는 것이 아니라 문맥, 사용역 및 어조를 이해했다는 뜻이다. 담화 및 활자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시와 산문에 대한 문맥적 기억을 의미한다. 내가 한국으로 가서 영어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고 해도, 30년 된 나의 고집스러울 정도로 유연하지 못하고 경직된 뇌로 이것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꿈을 꾼다. 대부분의 입양인이나 한국계 미국인들에게는 이 언어의 문제가 전혀 집착(그것도 건강하지 않은)이 되지 않지만, 나에게는 그렇다.
나는 거의 모든 한국인에 대해 비이성적인 질투를 느낀다. 한국어 원어민들의 유창한 언어 실력이 부럽다. 한국계 미국인들의 자연스러운 억양과 어조가 부럽다(적어도 나보다는 더 자연스럽다). 이중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의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자유롭게 넘나드는 능력이 부럽다. TV 프로그램 <비정상회담>에 나오는 사람들이나 박노자(블라디미르 티호노프)와 같은 재능 있는 한국어 학습자들이 부럽다. 한국어를 조금밖에 못 하거나 아예 하지 못하는 것에 그저 만족하는 입양인이나 한국계 미국인들이 부럽다. 한국에서 한국어를 아주 조금 말하는 것만으로도 칭찬을 받는 외국인 친구들이 부럽다. 한국어와 전혀 관련 없이 다른 목표와 관심이 있는 이들이 부럽다. 이러한 감정들이 부정적이고 비합리적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어쨌든 나는 그런 감정들을 가지고 있다.   내가 내일 아침 일어났을 때 갑자기 한국어를 완벽히 말하고 쓸 수 있다고 해도 세상에 바뀌는 것은 없을 것이다. 질병을 치료하거나 전쟁을 끝내는 등 내 삶을 제외한 다른 이의 삶을 향상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내 경력을 걸고 아마 내 인생을 거기에 바쳤을 것이다. 놀랍게도 나는 한국 문학과 한국계 미국인 문학 사이의 번역 및 개작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있다. 내가 어떤 식으로든 속해있고, 적어도 옆에 함께 하고 있거나 항상 거리감과 이질감을 느끼는 두 그룹이다. 내가 처음부터 계획했던 삶은 아니다. 6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한국어를 알기 훨씬 전부터, 한국어는 항상 내 삶에 존재해왔고, 내 초기 기억들에 마저 존재한다. 이를 내 한국어의 선사 시대라고 생각한다.


2.
부모님은 나를 입양하면서 한국어를 조금 배워보려 했다. 두 분은 오렌지색과 네이비색 판지 상자에 담긴 <한국어를 배워봅시다!>라는 제목의 카세트테이프 어학 프로그램을 구매했다. 손으로 쓰고 등사한 한국어 글씨체와 함께 타자로 친 것 같은 어구들이 적혀있는 소책자가 함께 들어있었다. 카세트는 한국어의 기본 글자를 먼저 안내한 다음 여러 구절을 반복해서 따라 하도록 했다. 소책자는 구식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을 따르고 있었고, O와 U에 그 기능을 이해하기 어려운, 엄두조차 나지 않는 기호들이 있었다. 나는 여러 번 카세트를 들어보려 했지만 포기했다.
내가 어렸을 적에 아버지께서는 어머니와 함께 가신 캠핑에서 만났던 한국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정도로 한국어 구절을 능숙하게 구사한 것 같다. 이 때문에 당시에는 아버지가 진짜로 한국어를 하실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저 몇 마디였을 것임을 깨달았다. “안녕히 계십시오”. 내 백인 친구가 한국말을 아주 조금이라도, 심지어 억센 억양으로 말할 때도 한국인들이 자주 보여주는 흥분을 떠올린다. “와! 우리말을 알아요”. 1991년에 미시간 시골을 여행하던 한국인들이 그저 “안녕하세요?”라도 말할 수 있는 백인 남자를 마주치는 일이 얼마나 드문 일이었을까 생각해 본다. 그들이 놀랬을 만도 하다. “대박. 신기해요.”(내가 한국말을 한다면 그 누구도 이런 반응을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일을 하는 사람은 삶에서 새로운 언어 능력을 키울 시간이 많지 않으며, 결국 아버지도 익혔던 한국어 구절들을 잊어버리셨다. 부모님은 우리를 부양하기 위해 힘든 일을 오랜 시간 일했다. 두 분 다 성인이 되어 새로운 언어를 배운 적이 없고, 대학에도 가지 않았다. 6년간의 혼신의 노력과 세계 최고의 학술 자료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전히 말하기 애먹는 언어를 그들이 배우지 않았다고 해서 비난하지 않는다. 그래도 가끔 집에서 내 백인 부모님과 함께 “안녕하세요?”나 “감사합니다”를 쓰면서 자랐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 한국어가 유창해졌을 가능성은 없지만, 그랬다면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은 든다.
한국 아이를 입양한 부모 중 한국어를 회화 수준까지 익힌 사람을 실제로 본 적이 없다. 이해한다. 한국어는 어려운 언어다. 최근까지 대부분의 미국인에게는 한국어를 배울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었다. 미국인(그리고 호주인과 영국인까지)은 다른 언어를 말하는 것을 싫어하기로 악명이 높다. 상업과 교육에 있어 세계에서 가장 우세한 언어를 쓰는 데서 나오는 안일함이겠다. 미국인은 새 언어를 익히는 것이 “보통의” 사람들이 할 수 있거나 해야 하는 일이 아닌, 공연 음악가나 전문 운동선수가 되는 것과 같은 특별한 재능을 요구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미국인이 영어권 국가에 한 번도 발을 들여본 적 없는 “보통” 사람들이 주로 경제적인 이유로 영어 학습에 수십 년을 바친다는 사실과 그 전체 교육 시스템이 영어를 표준 교과 과정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미국인들이 어디로든 휴가를 떠날 수 있고(아니면 한 국가를 침공할 수 있고) 그곳에서 영어를 쓰는 사람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오만함이 싫다.
최고의 입양 부모는 아이를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고 말한다. 내가 무정한 것일수 있겠지만,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의 아이가 속했던 문화의 언어를 배우는 사람이 왜 그렇게 적은지 종종 의아하다. 아마도 문화와 언어가 분리될 수 있다는 너무나 미국적인 믿음 때문일 것이다. 이는 한국의 예술, 음식 및 책을 충분히 접할 수 있으면 한 사람의 삶에서 그 언어의 부재를 만회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즉, 이탈리아 혈통으로 이탈리아어를 말하지 않고도 이탈리아 문화를 자랑스러워하는 것, 이란 혈통이지만 페르시아어를 쓰지 않는 것, 중국에 뿌리를 두고 중국 음식을 먹지만 실제로 중국어를 쓰지는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두 상실감을 경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이 모든 믿음이 사실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이민자 출신의 배경을 가진 많은 백인 미국인들도 이를 사실로 믿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어머니와 아버지와 고모는 집에서 독일어를 쓰며 자랐고, 최근까지도 독일어로 크리스마스 예배를 드리는 교회를 다니셨다. 어머니의 절친한 친구의 남편분도 독일어를 쓰며 자랐고, 여전히 독일어를 조금 기억하고 있지만 상실감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처럼 오직 영어만 쓰고 자란 경우에는 문화가 언어와 얼마나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떡볶이”를 먹고 이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만약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영원한 이방인으로 낙인찍히는 것이다.
몇 년 후 한국어를 배운 뒤, 나는 많은 한국인이 한국계 미국인에 대해 한국말을 거의 할 줄 모르고 한국 문화를 거의 모르거나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번은 한국 문학을 영어로 옮기는 재능 있는 번역가를 본 적 있는데, 외교부에서 일하는 부모 밑에서 국제적으로 성장한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트위터에 한국계 미국인은 한국어를 배우는 데 관심이 없다고 불평했다. 나는 이에 화가 났지만, 왜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해한다. “이 정도면 넌 웬만한 한국계 미국인들보다 한국말을 더 잘 할 거야”라고 한 한국인 친구가 내게 말한 적 있다. 나는 항상 한국계 미국인의 유창한 한국말을 목표로 했기에 이를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또한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최근 부업으로 편집자로 일하면서 4명의 저명한 한국계 미국인 작가들의 그룹 인터뷰를 출판하는 일을 보조했다. 그 중 한 명이 한국어를 전혀 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많은 한국인이 우리를 외계인처럼 볼 만도 하다.


3.
1990년대 초 내가 입양되었을 무렵 미국의 국제 입양기관들에서는, 1953년 한국 전쟁이 끝나고 한국으로부터 입양이 시작된 후 수십 년 동안 그래왔던 것과는 달리 입양 자녀를 미국 문화에 동화시키는 일에 더 이상 집중하지 말라고 입양 부모들에게 말했다. “다문화주의”를 기념하는 시대에 사회복지사들은 대신 새로운 부모들이 입양 자녀의 출신을 기리고 이를 가족생활에 통합하기를 장려했다.
하지만 입양 가족이 입양 자녀의 문화유산을 재구성하는 데 사용할 책과 기타 자료들은 어린 자녀들이 이해하기에는 힘들었고, 그 범위와 품질이 매우 다양했다. 30년 후, 한국 문화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전 세계적으로 널리 퍼졌지만, 1990년에 대부분의 미국인은 한국에 대해 시트콤 <매시>에서 본 것이 다였다. 보통의 사람들은 인터넷이 뭔지도 아직 모를 때였다. 결과적으로 우리에게는 소수의 전문 출판사들에서 나온 책과 비디오가 다였다. 일부는 입양 자녀와 그 가족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더욱이, 오래전 사라진 조선 시대의 전통, 전후 생활에 대한 사회학적 일반화, 그리고 양국 정부가 원했던 부지런하고, 위생적이며, 현대화된 후기 냉전 동맹국의 모습 등 실제로는 당시에 단 한순간도 존재하지 않았던 한국을 그리고 있었다.
내 입양 기관에서는 <한국 엿보기>라는 제목의 17쪽짜리 팸플릿을 프린터 용지에 복사해서 보내왔다. 간략한 한국 역사, 요리법 및 한국 문화의 여러 측면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대중 매체” 면에서는 “한국의 텔레비전 수가 1.7 가구당 한 대로 증가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택” 면에서는 귀족적인 “한옥” 설립을 묘사하는 데 전체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었다. “한국식으로”라는 제목의 그림책은 (이제 내가 알게 된 바로는) 1780년경 한국의 일상생활 특징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내 어린 시절, 내가 인정하는 것보다 더 오랫동안 나는 한국이란 여전히 빨래판에 두드려 빨래를 하고, 높은 벽 너머로 소년들을 보기 위해 소녀들은 그네에 올라서며, 남자들이 A자 모양의 지게에 무거운 것들을 지고 다니는 나라라고 생각했었다. “돌”이라고 불리는 첫 번째 생일 의식에 대한 설명을 읽고 나서는 나는 돌을 지내지 않아 미래가 없을 것이라 걱정했다.
또한 나는 세종대왕이 한글 창제를 의뢰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한글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전혀 몰랐다. 책 중 하나에는 대략 이러한 표가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의 설명은 없어서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어떤 소리인지도 전혀 모른 채 종이에 따라 적던 기억이 난다. “이게 한국어야”라고 나 스스로에게 말했다. 한국말은 선이었고, 정렬이었으며, 가시적이었지만 형언할 수 없었다.
입양 안내 책자에는 한국어-영어 용어집도 있었다(아마도 한국말을 하고 있을 만큼 나이를 먹은 자녀를 입양하는 부모를 위해). 이제 나는 한국어를 알고, 거기에 제시된 발음은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Don’t be afraid (It’s OK)  기엔차나
I am happy  깊버
Do you want to go to the potty?  빈소칼레?
Do you want some more?   더 줄 카?
It’s time to go to bed 잘 시가니야


한국말을 하는 네 살짜리 아이가 미국에 도착해서 이를 유일한 도구로 가지고 있는 두 명의 미국 어른과 의사소통을 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가? 이 음차에서는 한국어가 선교사들이 완전히 잘못 듣고 잘못 발음한 많은 미국 원주민들의 언어처럼 보인다. 칼라마주, 매사추세츠, 기치거미와 같이 나라의 풍경과 문화적 상상력에 산재해 있는 지명 같다. 중년의 미국인이 한국 아기에게 계속해서 질문하는 모습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더(the) 주얼(jewel) 카? 주얼(jewel)카우(cow)? 주얼 카우(jewel cow)?”
우리 집에도 한국 문화가 부분적으로 존재했다. 입양 기관에서 나와 여동생에게 밝은 색의 “매듭” 장식을 보냈었는데, 내가 무슨 뜻인지 알아내기 위해 수십 년을 보낸 한자가 새겨져 있었다. 또한 유아용 한복도 보냈는데, 우리는 금세 자라 맞지 않았지만 일종의 상징으로 간직했다. 부모님은 한국 콜라병도 갖고 있었지만 절대 열지 않았다. 옆에 “코카콜라”라고 한글로 씌어있는 병이었다. 크고 작은 사이즈의 한국 국기도 있었다. 아버지는 목공에 소질이 있으셔서 우리가 윷놀이를 할 수 있도록 윷을 만들어 주시기도 했다. 둥근 막대기를 납작한 면으로 던져 몇 칸을 움직일지 결정하는 보드게임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켄다마를 주기도 했다. 양쪽이 컵 모양으로 깎인 핸들에 끈으로 묶인 나무 공이 달린 것인데, 지금은 한국이 아니라 일본 것인 줄 알고 있지만 어릴 때는 한국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나에게는 삼태극의 원색 삼중 소용돌이가 있는 작은북이 있었다. 당시에도 한국의 어린이들이 진짜 그런 것을 연주하는지, 아니면 자신을 한국인이라 믿는 입양아들만 연주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던 것을 기억한다.

한국말을 하는 네 살짜리 아이가 미국에 도착해서 이를 유일한 도구로 가지고 있는 두 명의 미국 어른과 의사소통을 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가? 이 음차에서는 한국어가 선교사들이 완전히 잘못 듣고 잘못 발음한 많은 미국 원주민들의 언어처럼 보인다. 칼라마주, 매사추세츠, 기치거미와 같이 나라의 풍경과 문화적 상상력에 산재해 있는 지명 같다. 중년의 미국인이 한국 아기에게 계속해서 질문하는 모습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더(the) 주얼(jewel) 카? 주얼(jewel)카우(cow)? 주얼 카우(jewel cow)?”
우리 집에도 한국 문화가 부분적으로 존재했다. 입양 기관에서 나와 여동생에게 밝은 색의 “매듭” 장식을 보냈었는데, 내가 무슨 뜻인지 알아내기 위해 수십 년을 보낸 한자가 새겨져 있었다. 또한 유아용 한복도 보냈는데, 우리는 금세 자라 맞지 않았지만 일종의 상징으로 간직했다. 부모님은 한국 콜라병도 갖고 있었지만 절대 열지 않았다. 옆에 “코카콜라”라고 한글로 씌어있는 병이었다. 크고 작은 사이즈의 한국 국기도 있었다. 아버지는 목공에 소질이 있으셔서 우리가 윷놀이를 할 수 있도록 윷을 만들어 주시기도 했다. 둥근 막대기를 납작한 면으로 던져 몇 칸을 움직일지 결정하는 보드게임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켄다마를 주기도 했다. 양쪽이 컵 모양으로 깎인 핸들에 끈으로 묶인 나무 공이 달린 것인데, 지금은 한국이 아니라 일본 것인 줄 알고 있지만 어릴 때는 한국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나에게는 삼태극의 원색 삼중 소용돌이가 있는 작은북이 있었다. 당시에도 한국의 어린이들이 진짜 그런 것을 연주하는지, 아니면 자신을 한국인이라 믿는 입양아들만 연주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던 것을 기억한다.
내 방에는 한국 지도가 있었다. 내가 상상만 할 수 있었던 도시, 산, 지역, 강, 고속도로, 섬의 이름들로 가득 차 있었다. 지도 하단에 위치한 제주도는 내가 어렸을 때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부분이었고, 그런 섬에서 사는 것은 어떨까 궁금했다. 나는 제주도가 뉴요커지 만화에서 보던 무인도와 같은 모습일 것이라 상상하고는 했다. 한 사람이 살기에 충분한 공간과 야자수가 있는 풍경이었다. 서울은 내가 태어난 도시의 이름으로 알아보았다. 북한에 너무 가까운 거 아닌가? 지역 이름들은  머릿속에 흐릿하게 남아있다. 왜 다 “남도” 아니면 “북도”로 끝나는 걸까? 당시에 나는 “남”과 “북”이라는 단어를 배우게 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지도 상단에 있는 비무장 지대는 부모님이 말씀하신 남한과 북한의 경계선으로 합의에 따라 아무도 가지 못하는, 특히 군인들이 가지 못하는 곳이었다. 한동안 나는 비무장 지대가 사람들이 날 혼자 내버려 둘 수 있는 곳이라 생각해서 (내 여동생을 포함한) 다른 어린아이들에게 명령조로 말하고는 했다. “거기 가면 안 돼. 비무장 지대야.” 그들은 대부분 미취학 아동으로 비무장 지대가 무엇인지 몰랐기에 당연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한반도의 남쪽 끝부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 여동생이 태어난 곳인 진주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여동생 입양 기관에서는 진주가 어촌이라고 했고, 주일학교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고기를 잡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나는 진주를 그물을 들고 위험한 나무배에 탄 사람들로 가득한 일종의 한국의 갈릴리라고 상상했다. 검은 수염에 푸른 띠를 두른 한국인 예수가 진주와 제주도 사이 남해의 파도 위를 걷는 모습을 상상했다.
국가, 문화 혹은 언어의 차이를 직접 경험한 적 없는 어린아이들은 그 차이가 무엇인지 인식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수년 동안 나는 주변의 다른 모든 사람(대부분은 백인)과 대조되는 한국인이기 때문에 나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한국 물건과 책이 나를 다른 사람들과 구별 지었고, 그렇게 내 한국인으로서의 특성을 구성했다. 어린 시절 상상으로 구성한 한국과 실제 한국 사이에 간격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산타의 작업장과 실제 북극의 차이를 어린아이가 상상하지 못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러한 오해를 인식하는 것은 그저 그것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과 나 사이에 어떤 격차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4.
7학년 때 처음으로 새로운 언어를 진지한 방식으로 배울 기회가 생겼다. 교장 선생님은 내가 영어 수업을 지루해 하는 것을 알고 대신 일주일에 이틀 라틴어를 가르쳐 주겠다고 하셨다(그녀는 수십 년 전에 대학에서 고전을 전공했다). 나는 라틴어를 좋아하게 되었다. 책에 있는 모든 동사의 기본 부분을 암기했고, 어형 변화와 활용의 세세한 차이점들에 숙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서 최대한 빨리 앞서 공부해 나갔다. 아직 친구들과 역할 놀이를 할 만큼 어렸고, <해리 포터> 소설이 여전히 몇 년에 한 번씩 나오는 상황에서, 젓가락과 카셀 라틴어 사전을 “마법서”처럼 들고서 마당을 뛰어다녔다. 나는 크리스마스 캐럴의 제목을 퀴즈 게임으로 열성적으로 번역했고, 짜증 내는 부모님에게 영어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맞혀보도록 했다(In media nocteclaravenit. Gaudiummundo. Gelidus, nivisvir.) 8학년에 올라가서는 라틴어 수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 교장 선생님이 바빠졌고 대신 가르쳐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2단계 교과서와 <아이네이스> 및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인쇄물로 계속해서 공부하려 했고, 반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다.
비슷한 시기에 나는 또한 이탈리아어와 일본어에 대한 집착을 조금씩 키워가고 있었다. 동네의 작은 공립 도서관에 두 언어의 입문 교과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스위스의 이탈리아어 지역에 있는 멋진 기숙학교에서 장학금을 받는 한 소녀에 관한 소설 <블루머빌리티 Bloomability>를 읽었고, 내가 좋아했던 닌텐도 비디오 게임은 모두 영어로 나오기 전 일본어로 나왔다. 둘 중 어느 것도 그다지 잘하지 못했지만, 아예 하지 않은 것보다는 나았다. 중학교 졸업 후 여름 동안 프랑스어 수업을 들었는데, 고등학교 1학년 때 배울 수업을 미리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어와 스페인어는 우리 지역 고등학교에서 제공하는 유일한 언어 수업이었다.  
성인이 된 지금의 나는 중학교에 가기 전까지 내가 언어를 배우는데 그렇게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는 것에 다소 분개한다. 또한 좋은 한국어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는 사실에도 분개한다. 지역 대학들에는 한국어 강좌가 없었다(여전히 그렇다). 한참 후에야 나는 한국 입양아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여름 캠프가 미네소타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어쨌든 부모님은 그러한 프로그램의 등록금을 대줄 여유가 없었다. 우리에겐 전화 접속 인터넷이 있었지만, 그 지역에 사는 한국 가정들과는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주변에 한국어를 가르쳐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나는 한국어를 배울 기회가 전혀 없었다. 전 세계 독학자들의 꿈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언어 실력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과 해당 언어를 공유해야 한다는 것을 평생의 언어학습에서 배웠다.
8학년 때 엄마는 미시간 호숫가의 지역 대학이 제공하는 1일 한국 문화 워크숍을 찾았다. 당시 엄마는 우리 학교에서 일하는 직원이었고, 그래서 교수였을 것 같은 한 중년의 한국 남성이 가르치는 이 워크숍에 가기 위해 엄마와 나 모두 학교를 하루 쉬었다. 그가 날 어떻게 생각했을지 궁금하다. 그가 한글을 가르치던 방식을 기억한다. 자음 모양에 영어 단어를 짝짓는 방식이었다.
ㄱ, 건(gun), G발음
ㄴ, 노즈(nose), N발음
ㄷ, 도어(door), D발음
지금까지도 나는 ㄹ에서 강(river)을 떠올리고, ㅁ에서 네모 모양으로 만든 입(mouth)을, ㅂ에서 아기의 턱받이(bib)를, ㅅ에서 슬라이드(slide)를, ㅈ에서 점프(jump)하는 사람을, ㅇ에서 링(ring)을 발음할 때의 발음을, ㅎ에서 모자(hat)를 쓴 사람, ㅋ에서 열쇠(key), ㅌ에서 삼지창(trident), ㅍ에서 파이프(pipe)를 떠올린다(그가 ㅊ이 무엇처럼 생겼다고 말했는지 잊어버렸다. ㅊ처럼 생긴 것이 별로 없다).
그는 우리 팔을 모음 모양대로 내밀게 하며 모음을 춤으로 가르쳤다. 엄마도 내 옆에서 함께 배웠다. ㅏ는 한 팔을 오른쪽으로, a발음. ㅑ는 두 팔을 오른 쪽으로, ya발음. ㅓ는 한 팔을 왼쪽으로, ea발음(슈와(중성모음)와 같은 소리다). ㅕ는 두 팔을 왼쪽으로, yeo발음 등등, 팔을 위로 (o와 yo 발음), 아래로 (u와 yu 발음). 두 팔을 모두 위로 뻗으면 i.  두 팔을 넓게 벌리고 거인에게 밟힌 것처럼 이를 악물고 소리를 내면 euh 가 되었다.
그날 마치기 전에 그는 바스락거리는 화선지에 붓과 잉크로 수업에 온 모든 이의 이름을 적어주었다. 엄마와 나는 그에게 내 한국어 이름을 말해주었다. 내가 태어날 때 받은 이름인 “Lee Young-il”이었다. 그가 손목을 과감하게 휘두르자 원과 선의 서예적 춤이 반짝이는 검은 색으로 나타났다. 이영일이라고.

하지만 나는 어떻게 읽는지 몰랐다. “응이 응영 응일”이라고? 어떻게 발음할 수 있지? 종이에 보이는 것을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지에 대해 그가 세세한 부분을 설명해주지 않아 나는 여전히 음절의 시작 부분에 있는 ㅇ을 소리 내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다. 글자를 블록 형태로 배열하는 법도 몰랐다. 내 영어 이름을 한국어로 써보려고 했고, 그 결과는 이러했다. ㅅㅍㅔㄴㅅㅔㄹ (그때도 이것이 잘못 쓴 것임을 알았다). 한국인들은 한글의 단순하면서도 논리적인 면에 자부심이 커서 종종 한글의 올바른 사용법이 실제로 얼마나 복잡한지 간과하기 쉽다. 오랫동안 워크숍에서 가져온 한글에 대한 책자를 사용하여 전자제품 설명서에 있는 한국어를 발음해보려 했지만 헛된 노력이었다. 받침의 ㅅ은 T와 같은 소리가 난다는 것을 몰랐고, ㄲ 이나 ㅃ 과 같은 이중 자음을 올바르게 발음할 줄 몰랐다. ㄴ 앞에서 ㅂ이 m과 같은 소리로 발음되는 것을 몰랐고, 그래서 오랫동안 “감사하브니다”, “안녕하시브니까”라고 말하고 다녔다. 더 이상 워크숍이 없었기 때문에 이 한계를 어떻게 넘어서야 할지도 몰랐다.
고향의 작은 교회 학교에서 8학년을 마친 후, 부모님의 권유로 한 마을 너머의 훨씬 더 큰 공립 고등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결국엔 그 학교를 좋아하게 되었지만 첫해에는 외로웠다. 많은 전학생이 그렇듯 점심시간은 특히나 힘들었다. 점심시간에 역시 혼자처럼 보였던 내 또래의 한 한국인 교환학생과 친구가 되기 위해 무척 애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보민이라는 이름의 그 학생은 아주 조용한 성격이었다. 지금의 나는 보민이 겁에 질려있었음을 안다. 중3의 한 한국인 소녀가 갑자기 미시간 서부의 어느 시골 마을 한가운데에 떨어지게 된 것이다. 내가 아는 한국어 몇 마디를 해보려 했지만 그리 성공적이진 않았다. 보민에게 영어로 질문을 하면 보민은 응 혹은 아니라고 고갯짓을 할 뿐이었다. 우리는 같은 인종이라는 점 외에는 공통점이 별로 없었다.
그해 말에 우리가 알고 지내던 한국 아이를 입양한 또 다른 가족이 한 한국인 여성을 맞이했다. 입주 가정부거나 가족의 친구였던 것 같다. 우리는 그들을 두어 번 본 적이 있었는데, 엄마는 “그 여자한테 한국어를 배울 수 있겠다!”고 제안했다. 나는 희망을 품고 그렇게 했지만, 한편으로 두렵기도 했다. 그 가족 친구는 확고한 성격으로, 즉시 내 한글에 대한 지식을 새롭게 하면서 단어와 소리를 가르쳤다. 그녀는 내가 단어의 의미를 기억할 수 있도록 한글 위에 작은 그림을 그렸다. 사과, 배, 아이(마침내 나는 소리 나지 않는 o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가서 이것들을 공부해” 그날 밤이 끝날 무렵 그녀가 말했다.
그래서 나는 공부했다. 하지만 그 뒤 그녀를 한 번 더 볼 수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녀는 명사만을 가르쳐주고 문법은 가르쳐주지 않아 나는 의미 있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문장을 구성하는 능력이 없어서, 한국어 단어는 곧 빠르게 잊혔다.


5.

우리 마을의 작은 공립 도서관에는 한국어 교재는 없었지만, 세계 각국의 자장가 책은 있었다. 한국어 자장가가 하나 있었는데, 단조의 계속 머릿속을 맴도는 멜로디로 나는 음차된 한국어를 발음하려 애쓰며 음표 하나하나를 피아노로 연주했던 것을 기억한다. 노래는 이러했다. 사에야, 사에야. 파란 사에야. 녹두 바테이 안키 마라. 15년도 더 지난 후에야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다. 새야, 새야. 파란 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ㅐ(ae)를 라틴어처럼, ㅈ(ch)을 이탈리아어처럼 잘못 발음했었다). 내가 위탁되어 있었을 때 누군가가 이 노래를 내게 불러줬을지, 아니면 내가 한국에서 자랐다면 이 노래를 배웠을지 궁금했다.  많은 입양인과 마찬가지로, 나도 입양되지 않고 한국에서 자랐다면 내 삶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한국의 학교는 엄격하고 까다롭다는 막연한 간접적인 생각이 있었다. 한번은 반 친구의 아버지가 기업가 정신에 대한 수업인 '주니어 어치브먼트'라는 주간 수업을 가르친 적이 있다. 그는 전에 한 번 일 때문에 한국을 가본 적이 있다고 했다. 내가 신나서 서울이 어떤 곳인지 묻자 그는 “어, 좀 더러웠어. 그래도 물가는 쌌어”라고 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는 어느 정도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돌아보면, 입양아에게 하기에는 이상한 말이었다. 아니, 대체 무슨 소리야).
내 입양 기록은 비정상적으로 상세해서 부모님과 나는 내 입양을 둘러싼 상황들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이름, 출생일뿐만 아니라 내 친부모의 키와 혈액형까지 알 수 있었다. 친엄마가 4남매 중 맏이로 강원도에서 자랐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부모님은 친엄마가 아이를 홀로 키우기엔 너무 어려서 나를 입양 보냈을 것이라고 수년 동안 이야기했다. 문서에 의하면 친엄마는 남자친구와 동거 중이었지만(내 친아빠다), 그는 친엄마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갑자기 사라졌다고 한다. “아기는 결혼 없이 태어났고, 생모는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혼자 아기를 잘 돌볼 수 없어서 좋은 집으로 입양 보내기를 원했다”고 사회 복지사는 영어로 적어 놓았다. “입양은 아기와 생모의 안정적 미래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 될 것으로, 미국 가정으로의 입양을 추천한다.” 때로는 내가 프랑스나 사우디아라비아, 혹은 브라질 가정으로 입양되었다면 내 삶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궁금해질 때가 있었다(당시에는 사우디아라비아나 브라질에서는 국제 입양이 드물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나는 언어에 관심이 있었고, 고등학교 때 언어학에 대한 책을 많이 읽었기 때문에 사피어-워프 가설에 대해 알게 되었다. 20세기 초의 두 언어학자는 일부 언어가 추상적인 개념을 매우 다른 방식으로 시각화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 주목했다. 예를 들어 한국어와 영어에서는 과거를 “뒤”로, 미래를 “앞”으로 생각하지만, 다른 언어들에서는 그 반대 이미지다. 언어학자들이 주장하기로는 호피어(Hopi)와 같은 일부 언어는 시제와 같은 기능이 없어 시간에 대한 개념이 다를 수 있다. 이후 연구는 사피어-워프의 가설을 대부분 반증했지만, 당시에는 영어가 아닌 한국어를 모국어로 배웠다면 내 생각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궁금했다. 영어를 쓸 때보다 더 친근하거나 의심스럽고, 더 슬프거나 웃겼을까?
알지 못하는 언어로 생각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상상할 수 없다. 한국어를 알지 못하면 한국어로만 할 수 있는 생각이 무엇일지 말할 수 없다. 서울 어딘가에서
홀어머니와 한국어로 대화하며 컸다면 어땠을까 상상해 보았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고 배척당했을까? 삶이 다른 면에서 힘들었을까?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한다고 한국말로 말하는 것이 어떨지 궁금했다. 사랑해요. 영어에서는 이 음절들에 특별한 의미가 없다. 내 양부모에게는 그 어떤 감정적 공명도 일으킬 수 없는 것이다.  
고등학교 때 인류학 수업에서 구조주의 언어학 개념인 “기호의 자의성”에 대해 배웠다. 소리와 형태, 또는 단어 구조(혹은 다른 상징)나 그것이 나타내는 의미 사이에는 아무 특별한 관계가 없다는 뜻이다. “러브Love”든 사랑이든 어느 것도 그 근본적인 개념과 더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아무르amour, 아이aì, 리브 Lieb 등 다른 언어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한 언어가 다른 언어보다 개념을 더 세밀하게 구분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나는 교회에서 그리스어에는 다양한 사랑의 종류를 나타내는 단어들이 있다고 수없이 들었었다. 에로스(로맨틱한 사랑), 필리아(우정이나 호감), 필라델피아(형제자매간의 사랑), 아가페(자선) 등이다. 또한, 프랑스어는 사실을 아는 것(savoir)과 사람을 아는 것(connaître)과 같이 영어에서는 구분 짓지 않는 개념을 구분한다는 것을 알았다. 한국어는 어떤 구분을 사용할지, 그리고 그것을 배우게 된다면 내가 어떻게 변할지 궁금했다. 영어를 포기하면 어떨지도 궁금했다.
입양아를 위한 한국에 대한 동화책 중에는 <한국에서 태어났을 때>라는 제목의 얇은 밤색의 하드커버 책이 있었는데, 한국의 아이들과 특히 엄마들에 대한 흑백 사진으로 가득했다. 그 메시지는 친부모가 왜 아이들을 입양 보냈는지를 아이들 연령에 맞는 방식으로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고, 나는 그것을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슬퍼졌다. 흑백사진은 잿빛으로 침울해 보였다. 어느 날 나는 지하실에서 그것을 읽고 흐느껴 울었다. 세계 반대편의 닿지 못하는 곳에서 친엄마가 겪었고 어쩌면 지금도 겪고 있을 고난을 생각하며 말이다. 친엄마를 만날 수 있다고 해도 '감사합니다, 사랑해요, 사과, 배, 아이' 외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6.

대학에 들어갔을 때, 새로운 언어를 시작할까 생각했다. 아랍어나 힌디어, 중국어를 배우는 것을 고려해보았다. 대학에는 정말 훌륭한 한국어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내가 일부러 한국어를 멀리했었다는 것을 말하기 부끄럽다. 나중에는 그때 한국어를 시작했어야 했다고 생각했지만 말이다. 사람들이 나를 고정 관념으로 바라보거나 더 심하게는 나를 불쌍하게 보지 않을까 걱정했었다. “당연하지. 저 입양아가 자기 뿌리를 찾고 싶어 하지”, “당연히 너는 한국어를 배우고 싶겠지. 잘됐어” 등등 말이다. 사람들의 동정을 받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경외와 존경을 일으키고 싶었다(몇 년 후, 뛰어난 정치철학자인 내 한국인 친구도 대학에서 비슷한 심경이었다고 말했다. “가장 백인적이면서도 가장 고전적인 위인들을 연구해야 사람들이 나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 같았어”). 나는 유럽 소설, 철학사, 천문학, 신경과학 및 음악 이론에 관한 방대한 연구 수업을 등록했다.  
내가 살았던 기숙사 같은 층에 한국계 미국인 여학생 E가 있었다. 우리는 잘 지냈지만 한 번도 가까운 친구 사이는 아니었다. 나는 E의 룸메이트와 꽤 친했는데, 나처럼 피아노를 치는 핑크빛 뺨을 가진 멍한 러시아계 미국인 여학생이었다. 어느 날 밤 그들의 방을 방문했는데, E는 스카이프로 한 한국계 미국인 남자와 이야기 중이었다. 어쩌다 나는 화면에 나오게 되어 “안녕”하고 인사했다.
“한국인이야?” 남자가 물었다.
“응, 근데 좀 복잡해.” 내가 대답했다. “한국어 할 줄 알아?”
“조금. '감사합니다'.”
남자는 조롱하듯 웃었다. “네 억양 정말 이상해.”
그 후 대학 생활 동안 다시는 한국말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7.

몇 년이 지났다. 대학을 졸업한 후 나는 영국에서 고전과 철학을 공부하며 몇 년간 지냈다. 그 과정에서 더 많은 언어가 축적되었다. 라틴어, 그리스어, 충분한 정도의 이탈리아어와 독일어가 생겼고, 일 년간 중국어 수업도 들었다. 영국에서의 생활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나를 스쳐 가는 느낌이 있었다. 한국어도 배워야 할 때라는 것이었다. 나는 시험을 마치고 취직한 후 내 삶을 이끌어줄, 탐구할 무언가를 원했다.
워싱턴D.C.로 이사해 한국 대사관을 통해 일주일에 한 번 한국어 수업을 들었다. 진행은 더뎠다. 모음 ㅓ를 제대로 발음하는 데 한 달이 걸렸다. 한국어를 배우는 모든 단계는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오래 걸렸다. 숫자와 색깔에서부터 반말과 존댓말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메뉴를 주문하는 것과 ATM 사용에서부터 뉴스 기사를 읽고 방송을 이해하는 것까지 말이다(실제로 나는 아직도 듣기 능력을 기르느라 애먹고 있다). ‘왜 한국어는 다른 언어들보다 훨씬 더 어렵지?’ 나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오랫동안, 내가 다른 언어에서 키울 수 있었던 의미와의 연결을 한국말로 가져오는 것이 큰 고통으로만 느껴졌다. 종종 한국어가 모국어인 사람들에게서 가장 따뜻한 격려와 동시에 가장 주눅 들게 하는 비판을 받는 것 같았다. 누군가가 내게 잘하고 있다고 말하거나 식사를 함께하며 이야기할 때는 처음으로 내가 완전히 살아있는 느낌이었다. 누군가가 내 억양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거나 놀리면, 내가 이 부담감을 지는 것이 맞는지 의심하며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았다.
미국에서 한국어를 배운 지 몇 년 후, 한국으로 가 일 년 동안 강원도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친엄마의 가족이 강원도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선택한 곳이었다. 나는 친부모를 찾으려 했고, 경찰이 이름과 생년월일이 일치하는 사람들을 찾았지만, 연락처는 알려주지 않았다. 경찰은 그들이 함께 사는 것 같다고 했다. 그들에게 내 형제일지도 모를 자녀가 있는지 궁금했지만 나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1, 2년 후에는 한국 문학을 재미로 읽을 수 있게 되길 바랐다. 실제로는 그 두 배의 시간이 걸렸다. 나는 그해 산에서 한국어로 읽으려 했던 첫 작품들을 기억한다. 채만식의 <이상한 선생님>, 황순원의 <소나기>, 윤동주의 <서시>였다. 한국인 친구가 친절히 시간을 내어 내가 조남주의 페미니스트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읽도록 도와주었다. 그해 이 소설은 특히나 인기 있고 영향력 있는 작품이었다. 우리 엄마도 지영의 엄마와 같은 삶을 살았을지 궁금했다. 두 명 다 1960년대 중반 군부 독재 시절에 태어나, 내가 태어났을 무렵의 민주화와 경제변혁을 목격한 세대다. 친엄마도 꿈을 포기해야 했는지, 성차별과 불평등의 압박을 느꼈을지 궁금했다. 내가 물어볼 수 있기를 바랐다.
한국 문학을 한국어로 읽는 것은 많은 면에서 지금의 나에게 끊임없는 기쁨의 원천이다. 내가 자라면서 경험할 수 없었던 한국 문화를 직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내 한국어 선사 시대는 이제 웃긴 일이 되었고, 또한 피할 수 있다. 더욱 많은 번역과 문학, 어린이들도 언어를 접할 수 있는 더 나은 자료들이 있는 이 세상에서 말이다. 이듬해 문학 박사학위를 시작했을 때 처음부터 한국어를 전공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아무리 내 실력이 너무나 부족하다 느껴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래에 한국인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세계 어디에 살든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현재 나는 한국 문학을 연구하고 있다. 내 친가족의 역사와 이야기를 결코 알 수 없겠지만 그 자리에 나는 한국의 역사와 언어를 두었다. 한국어는 내가 자라면서 사용했던 언어가 아닐 테지만 내 양모국어가 되었다. 내가 모르고 지나쳤을 많은 것들과 나를 연결해 주는 언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