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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단편소설] 스왈로우
작성일
2022.01.12

단편소설 - 가작

스왈로우

배 수 영 [미국]


박 노인이 시애틀 근교 병원의 응급실로 실려 가게 된 것은 삼킴 장애 때문이었다. 보통 사람들에게 음식을 삼키는 일은 자연스럽다 못해 거의 자동으로 이루어지지만, 한 달 전 무렵부터 박 노인은 단지 삼키기 위해 사투를 벌여야 했다. 식사 도중 자주 기침했고 음식물이 코로 역류하거나 입에서 침이 줄줄 새기도 했다. 물을 포함해 무 엇이건 삼키는 게 고역이라 끼니를 거르다 탈수증까지 생겼다.


허기와 갈증이 극에 달한 어느 날, 뜨신 국물과 면 생각이 간절해진 노인은 팔팔 끓 인 물을 스티로폼 용기에 부었다. 통통하고 매끈한 면이 무탈하게 인두와 식도를 거 쳐 위장으로 내려가기를 바라며 두어 줄기를 호로록 빨아들이다가 호흡 곤란이 왔다. 때마침 도착한 간병인이 신속하게 응급 처치를 해서 다행이었다. 간병인은 기도를 열 기 위해 박 노인을 뒤에서 껴안고 명치에 여러 차례 압박을 가했다. 기침과 함께 불어 터진 우동 줄기와 미역 건더기가 목구멍에서 힘차게 튀어나왔다. 기력을 소진한 노인 은 그 자리에서 혼절했고 즉시 911 차량이 출동되었다. 한때는 힘깨나 썼을 듯 다부진 기골의 노인을 들것 위로 옮기기 위해 구급 대원 서넛이 동원되어야 했다.


통역 에이전시의 호출을 받은 서연은 문자에 찍힌 주소를 보고 응급실로 달려갔다. 의료진과 환자 간의 소통을 돕는 것이 그녀의 임무였다. 환자의 모국어가 영어가 아 닌 경우, 의학 용어나 복약 지도를 잘 못 이해하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의료기관 측에서 언제나 통역사를 부르게 되어 있었다. 박 노인은 삼킴 장애 여부를 판단 하기 위한 비디오 투시 검사와 흉부 엑스레이를 찍고 독방 형태의 응급 진료실에 막 도착한 참이었다. 휠체어에 구부정하게 앉은 노인은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듯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그의 들쑤셔진 은빛 머리칼이 잔기침을 할 때마다 미세하게 떨렸 다. 서연은 간병인과 묵례를 나누고 노인과 의사의 중간쯤 되는 지점에 섰다. 의사는 모니터에 엑스레이 결과를 띄운 뒤, 모두에게 잘 보이도록 화면을 돌려주었다.  갈빗 대 사이로 희뿌연 솜뭉치가 엷게 흩어져 있었다. 그 솜뭉치가 폐렴이 퍼진 부분이라 고 했다. 음식물이 기도로 들어가면 입속의 박테리아가 폐로 이동하여 염증을 일으키 기 때문에 삼킴 장애는 대개 폐렴을 동반한다고도 했다. 의사는 노인과 간병인, 그리 고 서연을 번갈아 바라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고령의 환자분들에게 흔한 증상입니다. 식도와 기도 주변 근육이 약해진 탓인데 노화 현상 중 하나이지요. 뇌졸중 병력이 있으신 것도 원인이고요.”


‘흔한’ 증상이라는 말에 경직되어 있던 노인의 어깨가 살며시 누그러졌다. 의사의 사무적인 태도가 오히려 노인을 안심시킨 듯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눈을 맞추며 위 로하듯 설명했다면 덜컥 겁이 났을 터였다.


“나으실 때까지 계속 죽을 드셔야 합니다. 그리고 안전하게 삼키는 방법을 매일 훈 련하셔야 해요. 오늘은 입원하시고, 내일부터는 간호사가 댁으로 직접 방문해서 가르 쳐드릴 겁니다. 질문 있으세요?”


노인은 대답 대신 낮게 그르렁댔다. 질문이 없다는 뜻인지 죽만 먹기는 싫다는 뜻 인지 모호했지만, 의사는 노인의 ‘그르렁’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팽팽하 게 부푼 노인의 발을 조심스레 눌러 본 의사는 양말을 헐렁한 것으로 바꾸라고 일러 준 뒤 진료실에서 나갔다.


다음 날, 서연은 간호사 방문 진료를 통역하기 위해 박 노인의 아파트로 향했다. 저 소득 노인 아파트가 대개 그렇듯, 박 노인의 아파트도 번잡스러운 차이나타운 한복판 에 있었다. 안 그래도 좁은 도로는 빈틈없이 주차된 차들의 행렬로 더욱 운행 폭이 줄 어 있었다. 반대 방향에서 오는 차와 마주칠 때마다 옆으로 바짝 붙어 비껴가며 근처를 빙빙 돌던 서연은 결국 세 블록이나 떨어진 곳에 차를 댔다. 팔 전체에 문신한 남 자가 건물 벽에 기대어 추적추적 내리는 비 사이로 담배 연기를 뿜어댔다. 서연은 차 문을 제대로 잠갔는지 여러 번 확인하고 패딩 재킷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쓴 채 힘껏 뛰었다.


낡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15층에 올라가 초인종을 누르려고 보니 현관문이 이미 열 려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더운 김이 서연의 얼굴을 훅 덮쳤다. 히터의 열기와 가습기가 토해내는 증기로 집 안은 사우나처럼 무더웠다. 정면으로 보이는 벽에는 군 사 정권 시절의 대통령 사진이 화려한 금빛 액자에 끼워져 있었고, 바로 아래에 그가 대통령이 된 건 하늘의 뜻이요 운명이라는 찬양 시가 걸려 있었다.


“아직 간호사님이 안 오셨으니까 앉아서 조금 기다리세요.”


어제 응급실에서 만났던 간병인이 접이식 의자를 펴서 서연 앞에 놓아주었다. 조심 스레 의자에 앉자 서연과 노인이 마주 보는 구도가 되었다. 서연이 인사를 하려 했지 만, 노인은 소파에 기대어 앉은 채 줄곧 눈을 감은 채였다. 헐렁한 양말 위로 드러난 그의 발목은 여전히 퉁퉁 부어 있었다. 벽에는 큼지막한 글씨로 약 복용법과 비상 연 락망이 적힌 메모가 붙어 있었다.


초인종이 울렸다. 간호사는 활기찬 목소리로 자신을 헬렌이라고 소개하고 간병인 과 서연에게 악수를 청했다. 소란스러운 그녀의 등장에 박 노인은 실눈을 떠서 누가 왔는지 확인하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헬렌은 노인의 호흡이 가쁘지는 않은지, 거동 은 어느 정도 가능한지, 배변 및 수면 장애는 없는지 등을 확인했다. 헬렌이 묻고 서 연이 통역하면 간병인이 대답하는 식이었다. 간병인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만 노인을 돌본다고 했다. 와서 환자가 약을 제대로 복용했는지 확인하고, 점심을 차 리고 식사를 거들며, 아파트 복도에서 걷기 운동을 시켜드린다고 했다.


헬렌은 오늘 노인이 섭취한 음식의 종류를 물었다. 내내 시큰둥하게 듣고 있던 박 노인이 음식 이야기에 갑자기 화색을 띠며 말했다.


“난 라면이나 짜장면을 좋아해요. 그런 걸 먹어도 되는지 좀 물어봐 주시오.”


의치라 발음이 새긴 했지만, 그는 충혈된 눈을 반짝이며 분명하게 의사를 전했다.


마치 이 질문을 하기 위해 온 힘을 그러모은 것 같았다. 서연은 노인의 말을 그대로 통역했고 헬렌은 고개를 저었다.


“국수 면발은 길어서 위험해요. 지난번처럼 기도로 들어갈 위험이 있어요. 지금으 로선 죽처럼 되직한 음식을 드시는 게 안전합니다.”


“도무지 맛이 없어서 말이오.”
노인은 헬렌이 허락해 주길 바란다는 듯 재차 물었다.


“어떻게 좀 안 되겠소? 매일 죽만 먹으려니까 아주 사람이 죽겠습디다.”
노인의 호소에 헬렌은 애처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드시고 싶은 걸 못 드시는 괴로움은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그녀가 말끝을 흐린 것에 희망을 걸기라도 한 듯 다음 말을 기다리는 노인의 얼굴 에서 기대와 불안이 동시에 아른거렸다. 잠시 머뭇거리던 헬렌은 무언가 결심했다는 듯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실 환자분 연세면, 이젠 삶의 질을 고려하셔도 되긴 합니다. 치료와 목숨 연장을 위해 위험 요소를 철저히 제거하며 불만족스럽게 살 것이냐, 아니면 리스크가 있더라 도 자신이 원하는 걸 하며 남은 시간을 보낼 것이냐의 문제거든요. 물론 제 입장에선 국수를 드시지 말라고 권하고 싶지만, 환자분이 잠재적 위험을 충분히 인지하는데도 그걸 드시겠다고 결정한다면, 그럴 권리도 분명히 있습니다. 결국 환자분이 어떤 선 택을 하느냐에 달린 거지요.”


이 말을 그대로 전하자 노인이 껄끄러운 표정으로 입을 오물거렸다. 그가 듣고 싶 은 대답이 아닌 게 분명했다. 가끔 또는 조금씩 드시는 건 괜찮아요, 라는 대답을 원 했을 것이고, 라면과 짜장면이 ‘먹어도 되는’ 음식 범주에 들어가길 바랐을 터였다. 하 지만 불행히도 그는 라면과 짜장면이라는 흔한 메뉴를 두고 사느냐 죽느냐를 결정해 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노인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간병인은 죽을 최대한 맛있게 조 리하기 위해 푹 익힌 채소와 참기름을 가미하겠다고 덧붙였다. 헬렌은 좋은 생각이라 며 간병인에게 엄지손가락을 올려 보였다.


“자, 잘 보세요. 음식이 기도로 들어가지 않도록 허리를 똑바로 세운 뒤 고개를 약간 앞으로 숙여 턱을 당긴 자세로 먹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노인은 대답 대신 마뜩잖은 표정으로 먼 곳만 응시했다. 머쓱해진 헬렌은 가방에서 청진기와 혈압계, 옥시미터를 꺼내 바이털 사인을 잰 뒤, 다른 질문이 있느냐고 물었다.


“주치의를 바꿔주시오.” “주치의를요?”


“가정주치의가 뭘 알아. 난 심장 전문의가 필요하다고. 삼 개월마다 가정주치의를 보러 가는데, 내가 해준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 적고 약 리필해 주는 것 외엔 따로 특 별한 조처를 해주는 게 없어.”


헬렌은, 심장 전문의는 주치의 개념이라기보다 우려되는 증상이 생겼을 때만 만나 는 스페셜리스트에 해당하며, 언제든 문제가 생기면 예약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 한, 노인의 심장 문제는 노화에 의한 것이기에 약을 바꾸거나 수술을 한다고 낫는 질 환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는 똑같은 불만을 반복해서 토로했다. 마치 자신 에게 차도가 없는 것이 가정주치의 탓이며 심장 전문의를 주치의로 삼으면 상태가 호 전될 것으로 믿는 눈치였다.


“병원이란 데가 말이오.”

그의 목소리가 다소 격양되어 있었다.


“사람이 입원을 더 해야 하는데도 하루 이틀만 지나면 나가라고 쫓아냅디다. 비용 이 들어서 그러는지 병실이 부족한지, 아직도 여기저기 아프고 불안한데 자꾸만 이제 괜찮다고 집에 가래요.”


노인이 한시라도 빨리 퇴원하고 싶어 하리라 생각했던 서연은 적잖이 놀랐다. 그러 고 보니 간병인이 노인의 집에 머무는 시간은 오후 두 시까지로, 이후엔 적막한 아파 트에서 혼자 밥을 먹고 우두커니 텔레비전을 보는 게 일과의 전부가 아닌가. 밤이 되 면 묵직한 고요 속에 자신의 기침 소리가 공명하고 한숨 소리는 두 배로 증폭되어 들 릴 것이다. 어느 날 빈집에서 홀연히 쓰러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그의 무뚝뚝한 턱 아래서 꿈틀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입원실에서는 팔에 부착된 혈압 밴드가 매시간 부풀어 오르고 심박 수의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는 모니터가 간호사를 호출해 주기 도 한다. 수액을 확인하기 위해 잠시 들른 간호사와 하이, 하우아유필링, 아임오케이, 라는 뻔한 인사말이라도 주고받는 게 환자들에게 얼마나 큰 기분 전환이 되는지 서연 은 잘 알고 있었다.


노인은 계속해서 헬렌이 어쩌지 못하는 병원 시스템이나 주치의에 대해 이런저런 불만을 쏟아냈다. 간병인은 민망하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고, 헬렌은 아이 다루듯 친 절한 미소를 띠고 서연의 말을, 아니 노인의 말을 경청했다. 그러나 증상과 관련 없는 질문으로 노인이 계속 시간을 끌자, 이제는 가야 한다며 주섬주섬 서류와 청진기를 챙겼다.


“좀 더 상세한 삼킴 훈련이 필요하니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헬렌은 내일 같은 시각으로 약속을 잡고 현관에서 구두를 신었다. 서연이 한국식으 로 허리를 굽혀 인사하자 헬렌도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서연이 안녕히 계세요, 하자 그녀도 어니언히 게우스요, 했다. 박 노인은 소파에 그대로 앉은 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몸을 뒤로 돌려 우리의 인사를 받아주려면 간병인에게 의지하여 자세를 바꾸는 번거로운 수고를 들여야 하니 못 들은 체 하는 것을 택했을 수도 있다. 현관 문을 닫 으려는 찰나, 눈동자를 정면으로 찌르는 눈부심에 서연은 잠시 멈칫했다. 어느새 먹 구름과 비가 걷히고 노인의 어깨 너머 유리창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마침 새가 한 마리 지나갔고 우두커니 앉은 노인의 뒷모습이 고목 나무처럼 보였다.


초등학교 3학년인 딸 하은이를 픽업하여 집으로 가는 일은 서연에게 즐거운 일과 였다. 차 안에서 쉴 새 없이 조잘대는 아이 덕에 누구와 친하고 오늘 무엇을 했는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엄마! 오늘도 클로이랑 점심 먹었는데, 한 시간 내내 똑같은 얘기를 들어줘야 했어!”


“무슨 이야긴데?”


“네이뜬이라고, 클로이가 좋아하는 남자애야. 만나기만 하면 그 애 얘기를 정말 끝도 없이 해. 운명의 첫사랑이라나.”


서연이 건네준 쿠키를 먹으며 눈알을 굴리던 하은이는 손가락에 묻은 부스러기를 빨아먹다가 체념한 듯 한숨을 쉬었다.


“엄마. 그래도 내가 들어줘야겠지? 클로이가 이런 얘기 할 사람, 나밖에 없잖아.” 

서연은 백미러에 비친 딸을 흘깃 보며 미소 지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언제고 나눌 수 있는 관계야말로 일상의 무게를 버틸 은근한 힘을 실어준다는 것을 요 꼬맹 이는 벌써 아는 걸까.


“그래, 들어 줘. 너희 둘, 소울메이트라며.”


또래보다 말이 늦어서 언어 치료사를 찾아다니며 걱정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 딸과 이런 대화까지 나누고 있다니. 서연은 아무리 생각해도 하은이가 신통했다.


어느새 곧게 뻗은 침엽수가 늘어선 마당에 도착했다. 하은이는 차에서 뛰어내려 쏜 살같이 제 방으로 올라갔다. 서연은 스파게티 면을 익힐 물을 올리고 샐러드에 넣을 상추를 송송 썰었다. 노인의 집에서 나올 때 잠시 비추던 햇살은 벌써 먹구름 뒤로 자 취를 감추고 없었다. 아랫배가 불룩한 먹구름은 당장이라도 쏟아져 내릴 듯 위태로워 보였고, 구름 밑 축축한 공기가 시큼한 이끼 냄새를 강하게 끌어올렸다. 꽃향기처럼 달고 은은하진 않지만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싱싱한 냄새였다.


‘참. 깜빡했네.’


서연은 급하게 비타민D 한 알을 입에 털어 넣었다. 일조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 애틀에서 비타민D 섭취는 필수였다. 알약을 먹지 않아도 스스로 비타민D를 합성할 줄 아는 심해 바닷물고기 같은 능력이 있다면 좋으련만. 알약을 입에 넣은 채 컵에 물 을 따르려고 보니 정수 필터 주전자가 텅 비어 있었다. 주스나 우유라도 마시려고 냉 장고를 뒤졌지만 오늘따라 아무것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수돗물을 컵에 담으려는 순간, 혀뿌리에서 놓친 알약이 서연의 의지와 상관없이 목구멍으로 미끄러졌다. 바짝 마른 식도 벽에 알약이 달라붙었다. 서연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컥컥거렸다. 급하게 수돗물을 들이킨 후에도 여전히 식도를 죄는 듯한 이물감이 남아 있었다. 전기밥솥을 열고 밥을 한 숟갈 크게 퍼서 우걱우걱 씹어 넘겼다. 서너 숟갈을 더 삼키고서야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었다. 서연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가슴을 부여잡고 있는데 냄비에서 물이 끓어올랐다. 어느새 퇴근한 남편이 배가 고프다며 부엌을 서성거렸다. 정신이 번쩍 든 서연은 마른국수를 끓는 물에 던져 넣고 양파와 송이버섯을 달달 볶아 토마 토소스를 만들었다. 잠시 후 식탁에 셋이 둘러앉았지만, 그녀는 좀처럼  스파게티를 목구멍으로 넘길 수가 없었다.


목에 무언가 걸린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서연은 어릴 적부터 수분기 적은 음 식을 잘 삼키지 못했다. 식도가 좁아서인지 목에 물기가 적어서인지 고구마나 밤 등 을 삼키면 질식할 듯 목이 메어왔다. 가로세로 1cm 이상인 알약도 자주 목에 걸려 곤 욕을 치러야 했다. 특히 길쭉하게 생긴 약은 삼키기 전에 심혈을 기울여 혀뿌리에 세 로로 배치해야 했다. 목구멍을 향해 조준한 상태에서 삼켜야 걸리지 않고 넘어가기 때문이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물만 넘어가고 약이 그대로 혀 위에 있는 경우가 종 종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혀가 긴장해서 알약을 꽉 잡고 있었던 것이다. 몇 차례 시 도해도 물만 넘어가 물배만 잔뜩 차서 결국 약을 크러셔에 넣어 빻아 먹은 적도 있었 다. 하지만 약을 빻아 먹으면 맛도 쓰고 가루가 식도 벽에 달라붙어 조직을 자극할 위 험이 있어서 물을 평소보다 더 많이 마셔야 했다. 그것도 괴로운 일이었다.


서른 초반의 어느 날, 그러니까 하은이가 아직 서연의 뱃속에 생기기도 전이었다. 그날따라 그녀는 유난히 멍했고 비현실과 현실의 경계를 부유하고 있었다. 마땅히 울 었어야 했지만 울지 않았다. 그녀를 둘러싼 모든 상황이 그녀와 분리된 것처럼 느껴 졌다. 인형만 한 아이가 화장로에 누워 있었다. 아이는 지겨운 환자복 대신 드레스를 입고 꽃신을 신고 아끼던 곰 인형을 옆구리에 끼고 불구덩이에 들어갔다. 정말 어이 없게도 서연은 그런 순간에 마땅히 휘몰아쳐야 할 비통함 대신 어떤 자세로 서서 어 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옆에 있는 가족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따위를 고민하느 라 마음이 수십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서연을 가장 혼란스럽게 한 건 눈물의 부재였다. 오열하거나 다리에 힘 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기라도 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 가지로 이름 붙일 수 없게 뒤엉킨 감정 중 어떤 것에 먼저 반응해야 할지 결 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다만 그녀 주위에 어떤 보호막이 둘러쳐졌다는 사실만은 확 실히 알 수 있었다. 이 보호막은 견고한 방탄유리 같아서 분명히 총을 맞은 것 같은데 몸에 아무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몸을 관통하지 못한 총알들이 어정쩡하게 서 있는 서연의 발 앞으로 툭 떨어졌다. 피를 한바탕 흘리는 것을 무기한으로 보류한 채 언제까지고 유리관 속에서 안온한 일상을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도 서연은 잘 지냈다. 그녀에겐 서른 중반의 한 시기일 뿐이지만 아이에게는 전 생애 였던 그 2년이 마치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이.


때로는 보호색을 입고 잠복해 있던 망각이란 놈이 엉뚱한 데서 지뢰를 터뜨리기도 했다. 육아와 살림 사이에 일을 잘 버무려 넣은 평범하고도 바쁜 하루를 살다가 별안 간 숨이 턱 막힌 적이 있었는데, ’terminal(터미널)’이라는 단어를 우연히 맞닥뜨릴 때였다. ‘제거하다’를 뜻하는 ‘terminate’에서 유래한 형용사로, 아이의 진단서에서 ‘terminal disease(죽음에 이르는 병)’라는 문구를 처음 마주친 순간의 날카로운 충격 은 서연에게 트리거로 장착되어 있었다. 그 후로 그녀가 이 단어를 마주칠 때면 어디 선가 탕! 하고 방아쇠가 당겨졌다. 방탄유리에 싸여 있어서 죽지는 않았지만 정적을 가르는 총성이 아득하게 메아리쳤고, 유리 벽을 들이받고 자살한 총알이 전해준 진동 은 호수 밑바닥에 모래바람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자비라곤 없는 금속의 파열음. 삭막하고 단호한 ‘ㅌ’ 소리가 울리면 심연에 가라앉은 기억들이 부웅 떠올라 해초처럼 넘실댔다. 그럴 때면 깊은숨을 몰아쉬어 기도를 느슨하게 열어야 호흡이 진정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날 밤 서연은 기괴한 꿈을 꾸었다. 소화되지 못한 국수 가락이 서연의 배에 뿌리 를 내리고 나무로 자라는 꿈이었다. 나뭇가지는 점점 길어져서 목구멍을 통해 몸 바 깥으로 뻗어 나왔다. 뿌리는 서연이 누운 침대와 서연을 함께 묶어 칭칭 감아버렸고, 더 많은 곁가지가 땀구멍과 눈물샘을 통해 솟아올랐다. 마침내 천장과 지붕을 뚫고 치솟은 가지 위로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았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새였다. 너 의 삶도 저랬어야 하는데, 하고 잠에서 깬 서연은 중얼거렸다. 힘겹게 살과 뼈를 뚫고 나와 가지를 하늘로 뻗어야 하는 나무가 될 게 아니라, 날다 힘들면 튼튼한 가지 위에 앉아 쉬고, 전깃줄 위에 조로록 선 새들과 재잘대다가, 풀밭에서 지렁이를 쏙 뽑아 먹 기도 하는 지극히 평범한 새였어야 하는데.


다음 날, 서연은 약속한 시각에 맞추어 박 노인의 아파트를 방문했다. 초인종을 누 르고 한참 기다려도 대답이 없었다. 그때 문자 알림이 울렸다. 노인이 또 응급실에 실 려 갔다는 에이전시의 문자였다. 서연은 비상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 병원은 멀지 않았지만 증축 공사로 정문 입구가 막혀 있었다. 우회 표지판을 따라 병원 뒤에 차를 세우고 응급실로 갔지만 노인은 이미 입원실로 옮긴 뒤였다. 기나긴 복도를 거쳐 엘 리베이터를 두 번 갈아타고서야 입원실을 찾을 수 있었다. 박 노인은 침대에 비스듬 히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간병인이 상황을 설명했다. 이번에도 자신이 오기 직전에 혼자 컵라면을 드시다가 다시 기도가 막혔다는 것이다. 라면이 뭐라고, 좀만 참으시 지, 라고 말하는 간병인은 지쳐 보였다.


실려 오지 않았다면 집에서 연하 식이요법대로 만든 음식을 간호사의 지시에 따라 삼키는 훈련을 하고 있을 터였다. 노인은 안전한 감옥 대신 위험한 자유를 택한 걸까. 먹고는 싶은데 살고도 싶어서 일부러 간병인이 올 시간에 맞추어 모험을 감행한 거라 고 보는 건 무리일까. 환자복을 입고 있어서인지 노인은 전날보다 더 수척해 보였다. 환자복은 몸에 바늘을 꽂고 전극을 부착하고 드레싱을 갈기에 최적화된 디자인이라 앞은 벙벙하고 뒤는 휑하게 뚫려있게 마련이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이런 볼품없는 옷까지 걸치고 즐거울 리 없다. 노인은 여전히 서연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독백인 지 대화인지 모를 이야기를 시작했다.


“울 어머니는 다른 집 어머니들처럼 자잘한 잔소리나 간섭을 안 하셨다오. 장가간 뒤에는 일 년에 겨우 두어 번 뵈러 갔는데, 항상 이렇게만 물으셨지. ‘살만하냐’. 난 경제적인 상황을 물으시는 걸로 생각했다오. 그때 난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악에 받 쳐 있었거든. 그래서 차차 나아지겠죠, 라던가, 그럭저럭 먹고는 살아요, 라고 대답하 곤 했는데. 지금 와 생각해 보니 그 질문은 행복하냐는 질문이었던 것 같아.”


노인은 가래가 잔뜩 낀 목을 그르렁대면서도 말을 계속했다. 누가 듣든 말든 상관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울 아버지가 항상 밖으로만 쏘다니는 양반이라 어머니는 평생 외롭게 살았소. 육 이오 때 이불 홑청을 찢어 만든 끈을 자식들 허리에 동여매서 한 명도 잃어버리지 않 고 피난시킨 분이지. 전쟁 통에 어머니가 목숨 걸고 식구를 건사하는 동안 아버지는 어디 있는지 소식도 없었소. 그런데도 어머니는 우리가 장난치고 노는 걸 보면서 ‘살 만하다’는 말을 자주 하셨어. 후회 같은 게 무슨 소용이냐 마는. 제일 후회되는 게 있 다면 좀 더 만족하고 살지 못했다는 거요. 생각해 보면 우리 어머니에 비해 나는 가진 게 참 많았는데. 그걸 모르고 늘 힘들다고 생각했지.”


다 큰 어른은 어떻게 위로해야 할까. 젊은 사람이 하는 위로 따위 노인에게 도움이 안 되는 걸까. 아이가 놀이터가 아닌 침대에서 삶의 전부를 보낼 때 지인들이 해준 위 로의 말이 조금도 서연의 마음을 가볍게 해주지 못한 것처럼.


노인 옆에서 성경을 펼쳐놓고 졸던 간병인이 부스럭대며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서연에게 내밀었다.


“좀 들어요. 오늘 새벽에 쪄낸 거라 맛있어.”


스티로폼 용기 위에 가지런히 놓인 경단이었다. 서연은 자기도 모르게 박 노인을 곁눈질했다. 마음껏 삼키지 못해 이 자리까지 온 노인 앞에서 무언가를, 그것도 ‘맛있 는’ 것을 먹는 게 미안하게 느껴졌다. 간병인이 괜찮다는 신호로 서연의 팔을 쿡쿡 찔 렀다. 서연은 할 수 없이 검은깨 고물이 뿌려진 것으로 골라 입에 넣었다. 서연이 떡 을 씹느라 입을 우물대는 사이에 의사와 간호사들이 차례대로 다녀갔다. 그들은 노인 을 진심으로 걱정했고 다정하게 대했지만, 그러한 친절은 역설적으로 노인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드러낼 뿐이었다. 아픈 사람이 누리는 특권은 그가 누군가의 보호 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노인이 무언가를 손에 꼭 쥐고 있는 게 서연의 눈에 들어왔다.


“들고 계신 건 뭐예요?”


노인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폈다. 엄지손가락 길이만 한 몽당연필이었다.


“집사람하고 쪽지 주고받을 때 쓴 거요. 집사람은 새벽에 나가 종일 김치를 담그고 오후 2시에 퇴근했고, 나는 오후 4시부터 야간 청소를 했지. 하루에 식구들 얼굴 마 주치는 시간이 한 시간도 안 됐었소. 그때는 핸드폰이니 문자니 하는 것도 없어서 할 말 있으면 쪽지를 냉장고에 붙여놓고 다녔지. 그런 식으로 20년 가까이 살면서 애들 을 키웠다오. 그러다 애들이 대학 졸업할 때쯤 되니까 집사람이 암으로 죽었고, 아들 들은 군의관이 되어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사니 얼굴을 못 본다오. 구십 평생을 살았 는데, 갈 때 되니까 내 곁에 이거 하나 남네.”


그는 헛헛, 하고 웃었다. 사는 게 헛되고 헛되다는 듯이. 박 노인 가족의 삶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고 그들 사이에 오간 최소한의 대화를 아는 존재가 몽당연필이라니. 죽음에 다가간다는 것은, 살면서 중요하다고 믿었던 수많은 요소 중 핵심만 추려내는 필터링 작업일 것이다. 서연은 문득 궁금해졌다. 군더더기를 제하고 남을 그녀의 진 액은 무엇일까, 하고. 검버섯이 피어오른 노인의 손이 천천히 펴졌다. 그는 꼭 쥐고 있던 연필을 서연에게 내밀었다.


“나 대신 버려줘요.”
“버리시려고요? 이거, 할아버지께 소중한 거잖아요.” 

“이젠 필요 없소. 어차피 곧 만날 텐데, 뭘.”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고 노인은 고개를 돌렸다. 간호사가 들어와 이제 퇴원해도 좋 다고 했다. 퇴원 후 지침 사항 및 추가된 약 목록이 적힌 종이를 받은 서연은 가방에 서 형광펜과 볼펜, 포스트잇을 꺼냈다. 중요한 부분은 밑줄을 긋거나 노란색으로 칠 했고, 주의 사항을 한글로 번역하여 빈칸에 큼지막한 글씨로 적었다. 약병마다 하루 몇 회, 몇 알이라고 적은 포스트잇도 붙여 두었다. 서연이 정리한 내용을 간병인에게 보여주며 간단한 설명을 덧붙이는 동안, 박 노인의 눈은 어딘가 다른 곳을 헤매고 있 었다. 그는 복약 지도나 의사의 지시 사항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통역도 끝나고 더는 머물 이유가 없어 서연은 노인과 간병인에게 인사를 했다. 노인은 서연을 등진 채 창밖 풍경만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이제는 끝을 통과할 준비를 해야지.”


노인은 왜 ‘통과’한다는 표현을 썼을까. 통과도 ‘ㅌ’으로 시작되는 단어이지만 ‘terminal’처럼 무시무시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통과는 뚫고 나감이고 투과이며 연결 이다. 노인에게 생의 끝은 천 길 낭떠러지가 아니라 다른 곳으로 통하는 ‘문’일지도 몰 랐다. 말랑말랑한 젤리로 만들어져 있어서 몸으로 부딪치면 뚫리는 문. 햇살 한 줄기 가 투과할 수 있는 문. 그 투명하고 부드러운 문 너머 펼쳐진 또 다른 길. 그 위에 서 면 누구나 뽀얗고 말간 어린이가 되어 삶이라는 걸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노인이 이 길과 저 길의 문턱을 통과하는 날, 드레스를 입고 꽃신을 신고 곰 인형을 옆구리에 낀 두 살 반짜리 여자아이를 마주칠지도 모를 일이다.


하은이가 울면서 달려왔다.


“엄마, 블루제이가……” 


“블루제이가 왜?”


하은이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을 보니 작은 어항에서 기르던 파란색 베타 물고기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며칠 전에도 어항에서 튀어나와서 식탁 위에 있었거든. 그래서 내가 다시 넣어줬 는데. 그땐 괜찮았는데…… 오늘은 아예 바닥에 떨어져 있어서 못 보고 시간이 이렇 게 지나 버렸어…… 어떡해, 엄마.”


서연은 울먹이는 하은이를 진정시키고 블루제이를 조심스럽게 헝겊에 쌌다. 며칠 연속으로 내린 비 때문에 발이 푹푹 빠지는 잔디밭을 건너 화단 귀퉁이에 블루제이를 묻었다. 하은이는 쪼그리고 앉아 조약돌을 모으더니 블루제이 묻은 곳을 중심으로 둥 그런 울타리를 만들었다. 봄에 허브를 심을 때 썼던 나무 팻말에 R.I.P. 라고 써서 깊 숙이 꽂아주기도 했다.


“엄마. 블루제이는 자살한 걸까?”

“뭐? 자살을 왜 해.”

“요새 자꾸 어항에서 튀어나왔었잖아. 어항 속에만 있는 게 답답했을 거 아냐. 한 마리 더 넣어줄 걸 그랬어. 그랬으면……”

“물고기는 그런 거 모른대.”


“정말?”


“응. 물고기들은 기억력이 좋지 않고 단순해서 좁은 어항에서도 잘 산대.”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나도 블루제이의 심정을 알 길이 없었다. 하은이를 재우고 검 색을 해 보았다. 물고기는 산소가 부족하거나 포식자를 피할 때, 혹은 피부에 이물질 이 묻었을 때 몸을 날려 물 밖으로 튀어 나간다고 한다. 블루제이에 해당하는 경우는 아마 세 번째일 것이다. 피부병에 걸리면 어차피 오래 살지 못할 것을 물고기들은 직 감으로 아는 걸까. 그래서 안전한 물에서 바깥으로 뛰쳐나가 스스로 삶을 마치는 걸 까. 아니, 아니야. 서연은 고개를 저었다. 물고기들은 그저 몸에 붙은 이물질을 떼어 내려고 온 힘을 다해 뛰어오른 것일 뿐, 물 밖으로 나가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지도 모 른다. 어항이 아니라 바다에 있었다면 이 정도 점프로 물 밖으로 벗어나지는 않았을 테니. 블루제이는 그의 조상 물고기들이 하던 것처럼 몸을 세차게 흔들어 살아보려고 한 거다. 마지막까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서연은 어릴 때부터 좀 별난 아이였다. 세수할 때 고개를 숙이면 왠지 누군가에게 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일부러 고개를 빳빳이 들고 세수를 했다. 그래서 서연이 세수하고 난 세면대 주위엔 언제나 요란하게 물이 튀어 있었다. 사람들 앞에서 가련 하게 고개를 파묻고 흐느끼는 행위 역시 해본 적이 없었다. 친구들은 서연이 센 척하 는 유형이라고 했다. 하지만 서연은 슬픔의 순간에 누군가의 동정을 받고 비극의 주 인공이 되고 싶지 않았다. 자기의 슬픔은 누구의 어깨에도 기대지 않고 오롯이 혼자 감당할 것이므로. 슬픔은 서연에게 알약 같은 존재였다. 알약은 입에 계속 물고 있을 수 없으며 언젠가는 삼켜야 한다. 삼키려고 애를 쓰면 오히려 입안에 남게 된다. 그저 물과 함께 자연스럽게 삼켜야 하며, 그래도 목에 걸린 느낌이 있을 때는 밥을 몇 숟갈 삼켜주면 된다. 알약이 슬픔이라면, 물과 밥은 일상이다. 그런 면에선 매일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상에게도 장점 하나쯤은 있는 셈이다.


서연은 알약을 무심히 삼키듯 일상을 꾸역꾸역 삼키는 일을 반복하면서 슬픔을 조금씩 증발시키고 있는지도 몰랐다. 슬픔이란 색도 향도 없어서 눈에 보이지 않지만, 풀처럼 끈적이는 성질이 있어서 몸과 물건에 달라붙어 있다. 나무가 꽃가루를 떨구듯 몸을 활발히 움직이면 슬픔도 각질처럼 떨구어져 어느새 공중분해되고 만다. 받아들 인다는 것은 ‘잘될 거야, 힘내’라는 말을 스스로에게 그만하는 것이다. 잃어버린 사실 을 원통해 하기 보다 함께여서 행복했던 순간을 기억하기로 선택하는 것이다. 서연은 슬퍼하거나 슬퍼하지 않을 수 있다, 순전히 그녀의 선택으로.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가 서연을 깨웠다. 부스스 일어나 마루로 나가니 하은이는 주 말에만 허락한 게임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남편은 소파에 누워 스마트폰에 열중하 고 있었다. 서연은 잔소리하려다 그만두었다. 이 순간도 강물처럼 지나가리라 생각하 니 괜히 아까웠다. 서연은 아일랜드 앞 스툴에 앉아 부녀의 모습을 찍었다. 부엌 창문 으로 보이는 목련 가지가 빗방울에 흔들렸다. 한 가지에 필 꽃, 피는 꽃, 시든 꽃이 다 붙어 있었다. 서연의 몸도 가랑비 흩뿌리듯 매일 조금씩 사멸하고 있을 것이다. 잠깐 의 화려한 섬광을 제외하고 삶이 대체로 자질구레한 일의 연속인 까닭은, 아마도 죽 음을 향해 조금씩 소멸해가는 순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연습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서연은 재활 센터나 진료실, 초음파실 등 병원의 이곳저곳을 돌며 통역을 계속했 다. 사실 그녀가 만나는 환자 중 영어를 전혀 못 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이곳에 정착 하여 삶을 꾸리고 자녀를 키우면서 터득한 요령으로 어느 정도는 알아듣고 대답도 할 수 있었다. 설령 못한다 해도 소통 실력이 좀 더 나은 배우자나 자녀를 데리고 오는 일이 잦았다. 그러나 경미한 일시적 증상이나 정기 진료가 아니라 수술이 필요하거 나, 합병증이 있거나, 치료 옵션이 여러 가지인 경우에는 의사의 설명이 길어지면서 환자들이 혼란스러워했다. 서연은 자기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비단 언어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긴장과 불안을 애써 감추며 차례를 기다리는 환자들은 대기실에 서 서연을 만나면 반가워했고 휴대폰을 열어 자식이나 손주의 사진을 보여주며 흐뭇 한 미소를 짓곤 했다.


사명감이란 건 처음부터 가지고 있을 수도 있지만 별생각 없이 그 일을 시작해서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생기는 경우도 있다. 큰 병을 앓았던 아이를 키워 본 엄마들 중, 아픈 이들을 도우며 살겠다는 봉사 의지를 불태우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서연 은 소명이나 신념 때문에 이 일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아이가 학교를 다니기 시작 하면서 비로소 종일 육아에서 벗어났기에 무언가를 하고 싶었고, 돈을 벌고 싶었고, 지금 상황에서 그녀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게 이 일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가벼운 마 음으로 시작한 서연과 달리, 사람들은 서연을 가벼이 여기지 않았다. 환자들은 의외 로 서연에게 기댔고 많은 이야기들을 털어놓았으며 그녀와 계속 친분을 쌓고 싶어 했 다. 딸 갖다주라며 초콜릿 한 봉지를 챙겨주는 환자도 있었다. 서연은 차츰 이 일의 의미를 깨달아 갔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났지만, 서연은 아직도 노인의 안부를 모른다. 연락처도 모를 뿐더러 환자에게 개인적으로 연락하면 안 되기 때문에 서연은 그저 그를 가끔 떠올리 며 궁금해할 수밖에 없다. 오늘도 먹고 싶은 것을 참으며 열심히 삼킴 훈련을 하고 있 을까. 아니면 마지막 라면을 정말 맛있게 끓여 먹고 별빛 아래 거목처럼 쓰러졌을까.


잠든 남편의 코 고는 소리가 부엌까지 들려왔다. 내일은 남편이 평소보다 일찍 출 근하는 날이다. 서연은 재킷 주머니에 넣어둔 몽당연필을 꺼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요, 라고 꼭꼭 눌러 쓴 메모지를 반으로 접어 남편의 휴대폰 아래 놓아두었다. 그 러고 보니 통역도 ‘ㅌ’자로 시작한다는 것을 깨닫고 서연은 잠시 멍해졌다. 스포트라 이트처럼 한 곳을 집중해서 비추던 마음속 무언가가 스르르 녹아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