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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글짓기 중・고등 부문] 누구에게나 겨울은 있다
작성일
2022.12.12

청소년 글짓기  중・고등 부문 최우수상


누구에게나 겨울은 있다

최 찬 아 (카자흐스탄)


13년 동안 카자흐스탄의 땅에서 살아온 내게 겨울은 그 무엇보다 긴 계절이었다. 러시아의 하단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 덕분에 10월부터 외투를 꺼내입는 건 물론이고, 종종 5월에도 눈이 내리는 진풍경을 구경할 수 있다. 그에 대한 나의 감상은 몇 년 사이 가파르게 변해갔다. 어릴 적 신기하고 예쁘게만 보였던 눈은 시간이 지날수록 거슬리는 존재가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고 싶지 않은 학교의 등굣길을 더 지루하고 복잡하게 만드는 녀석이었다.


5학년 때 어려워진 집안 사정으로 인해 다니던 국제학교를 갑작스럽게 그만두어야 했다. 급하게 전학 온 공립 학교는 내게 쉽사리 적응할 틈을 주지 않았다. 외국인이라는 편견을 내게 덧씌우고 다가오는 친구들, 영어도 한국어도 아닌 낯선 러시아어로 진행되는 수업. 퉁명스러운 표정의 선생님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무서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중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시간은 수학이었다. 번역이 필요하지 않은 숫자를 마주할 때면 모두와 같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수업 내용을 알아듣지 못했던 다른 과목과 달리, 수학 시간의 나는 다른 아이들과 동등한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싫은 것도 존재했다. 수업 중 어쩌다 질문을 받은 내가 서툰 러시아어로 더듬더듬 대답하면, 다른 과목의 선생님들은 그 기다림을 귀찮아하며 다음부터 내게 질문을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오히려 갈수록 수업에서 배제당하는 것을 편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런데 과묵한 성격의 수학 선생님은 내가 아무리 답답하게 굴어도 질문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일어나 입을 열기 시작하면 몇몇 아이들은 저들끼리 키득대며 내 발음을 놀리곤 했다. 시선이 집중되는 것이 느껴져 얼굴은 새빨개지고, 그렇지 않아도 잘 움직이지 않는 혀는 더 굳어갔다. 그래도 선생님은 왜인지 내 말을 중간에 멈추지 않고 끝까지 기다려주셨다. 철없던 나는 그게 감사하기보다 원망스러웠다.


노력을 거듭해 6학년이 되어서는 수업의 절반 정도를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학교생활에 큰 변화는 생기지 않았다. 어떤 아이들은 어차피 알아듣지 못한다며 바로 내 앞에서 험담하기도 했다. 화를 낼 용기가 없었던 나는 바보처럼 정말 알아듣지 못하는 척을 하며 아이들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때는 러시아어를 열심히 배워왔던 시간이 모두 헛수고가 된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수학 선생님은 말없이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고 계셨던 것 같다.


다음 학기. 내게는 청천벽력 같은 말이 전해졌다. 수학 선생님의 아침 보충 반에 내가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한 시간이나 이르게 등교해 7시부터 수업을 들어야 했다. 나는 반에서 누구보다도 수학 성적이 좋은 편이었기 때문에 보충수업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선생님이 외국인인 나를 미워해 이런 불합리한 결정을 내린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억지로 도착한 교실에는 나 말고도 다섯 명 정도의 아이들이 있었다. 생각보다 적은 인원에 어색하게 눈동자를 굴리고 있자, 먼저 도착해 계시던 선생님이 교실 한편에 놓인 전기 주전자에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모두에게 일회용 컵에 차 한 잔씩을 나눠주신 선생님은 첫날이니만큼 곧바로 수업을 진행하지 않겠다고 했다. 대신 한 학기 동안 같이 보충 수업을 들을 친구들과 친해지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겠다는 말을 덧붙이셨다.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 문제를 푸는 것이 훨씬 더 쉬웠던 나는 습관처럼 ‘쿵쿵’ 뛰는 심장을 느꼈다. 초조하게 눈치를 보고 있는데 옆자리에 앉은 여자아이가 돌연 말을 건네왔다.


“안녕?”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아이들도 우리처럼 짝을 지어 대화하고 있었다. 나는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눈 후, 그 아이는 자신이 옆 나라인 우즈베키스탄에서 왔다며 내 고향을 물었다. “한국에서 왔어.”라고 대답하자 그녀는 놀란 눈으로 말했다. “정말? 신기하다. 러시아어를 잘해서 몰랐어.” 그 애는 다른 반이었고, 러시아어를 전혀 알지 못하던 작년의 나를 모르고 있었다. 나 역시 얼떨떨한 얼굴로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나는 어쩌면 그동안 나 자신에게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지 몰랐다. ‘나는 러시아어를 못하니까. 나는 멍청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먼저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보충수업 반의 친구 중에는 나처럼 수학 성적이 나쁘지 않았던 아이들도 한둘 포함되어 있었다. 어쩌면 선생님은 우리 모두에게 친구를 만들어주고 싶어 그런 시간을 마련해주신 건 아니었을까. 나는 한 학기 동안 즐겁게 아침 보충수업을 들었다. 가끔은 졸림과 추위로 유달리 힘든 날도 있었지만, 어차피 학교에 가면 매일매일 우리에게 따뜻한 차를 대접해주시는 선생님의 수업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괜찮았다.


6학년의 졸업식 날이었다. 선생님들의 연설이 이어지고 수학 선생님 역시 단상에 올라가 목을 가다듬으셨다. 선생님의 입에서 흘러나온 건 내가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었다. 선생님은 점점 나빠지는 건강 탓에 올해를 마지막으로 교직을 그만두게 되셨다고 했다. 이제야 선생님의 진심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는데, 앞으로 선생님의 수업을 듣지 못한다니. 충격받은 귀에는 선생님의 말씀이 ‘웅웅’ 울리듯 들려왔다. 선생님이 단상에서 내려오시는 순간 나는 용기를 내 선생님에게 다가갔다.


나도 모르는 사이 눈물이 나오고 있었다. 나를 발견한 선생님은 말없이 팔을 벌리며 말을 건네셨다. 부끄럽고 아쉬운 일이지만, 그때 나는 진심이 담긴 선생님의 작별 인사를 전부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동시에 이해할 수 있었다. 무언가 나를 감싸는 듯한 목소리로 끊임없이 건네는 위로. 다정하게 어깨를 쓸어내리는 손길. 가끔은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깨달았다.


다음 해 수학 교실에는 선생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지만, 내 바람이 현실이 된 듯 그 장소에서 만든 추억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가끔 외국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너무도 힘들 때 나는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처음부터 한국에 살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선생님을 만난 후부터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가 한국에 살았다면 외국인으로서 많은 차별과 힘든 학교생활을 경험하지 않았을지 몰라도,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의 내 삶은 나의 선택으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어린 나이의 이민은 내가 내린 결정이 아니었지만, 내게 과거를 바꿀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것을 잡지 않을 것이었으므로. 그때부터는 ‘만약에’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삶의 순간마다 나의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2년 전 나는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선생님이 투병을 시작하신 해부터는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에 병문안을 할 수 없었고,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도 가족이 아니라면 어려웠다. 선생님의 죽음을 확인할 방법은 고작해야 휴대폰 액정 속의 몇 글자였다. 그때는 다시 러시아어가 서툴렀던 5학년으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오래 슬퍼했다. 그 슬픔에 갇혀 다시는 벗어날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며칠을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다 바깥 공기를 쐬러 나간 날이었다. 때마침 내리기 시작한 눈이 세상을 고요하게 만들며 내 손바닥 위에 내려앉았다.


누구보다 차가운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내려오는 눈은 손 위에서 녹아가며 가장 따뜻한 결말을 맞이한다. 나는 그걸 보며 내가 마지막으로 안겼던 선생님의 품을 떠올렸다. 이 세상 모두에게는 각자의 겨울이 있다. 인도네시아의 누군가에게 겨울은 낯선 단어일 것이고, 한국의 누군가에게는 시린 한파를 연상시키는 단어일 것이다. 카자흐스탄의 나에게 겨울은 유독 길고 혹독한 인내의 시간이었다. 이곳에서 보낸 학창 시절이 내게 추운 겨울이었다면, 앞으로 화사한 봄이 펼쳐질 것이라는 미래를 멋대로 상상해도 될까. 어쩌면 내가 모르는 사이 꽃봉오리는 이미 피어오르고 있는 걸까. 선생님과의 이별 후, 학교에서 나는 여전히 조용한 아이였다.


그러나 전과는 분명 달라진 점이 존재한다. 졸업 후 한국 대학 진학을 계획하고 있는 내가 헤어짐을 언급하게 될 때면 ‘어어’ 하며 탄식을 내뱉는 친구들이 생겼다. 그럴 때면 나도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미래를 약속해 본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만나러 오겠다고. 올해 또 한 번의 겨울이 지나갔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떠나보낼 수 있는 계절은 앞으로도 무수히 반복될 것이고, 내게는 금방 다시 아픔이 찾아올지 모른다. 하지만 선생님이 내게 쥐여주신 차 한 잔의 온도를 기억하는 한겨울은 내게 영영 따뜻한 계절일 것이다. 나는 추위를 사랑하는 법을 배워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