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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수필] 할머니의 간장
작성일
2022.12.12

일반산문 부문(수필) 가작


할머니의 간장
하 선 영 (중국)


만둣국을 끓인다. 조선간장을 두어 숟가락 넣는데 할머니 생각이 난다.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담그셔서 중국에 갈 때 가져가라며 페트병에 가득 담아 주셨던 간장이다. 짜고 꼬릿한 냄새가 싫어 양념 칸 안쪽 깊숙이 밀어 두었다가 깊은 맛이 필요할 때면 꺼내 들게 되는 간장이다.

한국의 장이란 것은 정말이지 신통하다. 한두 숟갈 떠 넣고 휘휘 저어주면 금세 국이 되고 요리가 되고 음식의 정체성이 완성된다. 담백한 쌀을 맛있게 먹기 위한 우리 선조들의 수천 년 고민의 산물이 바로 장(醬)이라고 한다. 진수의 삼국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에서 동이족(고구려인)은 ‘장 담그는 솜씨가 훌륭하다’, ‘발해의 명물은 책성에서 생산되는 된장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고대부터 우리 민족은 장을 만들어 먹었고 이 음식문화가 고려, 조선을 거쳐 현재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한국의 전통 장 문화가 등재신청 중이라고 하니 장은 한국음식의 맛과 문화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요소인 듯하다.
예전 할머니 댁 마당 한쪽은 반질반질한 겉면에 때가 껴 있는 크고 작은 장독들로 가득했다. 무엇이 들었을지 가늠하기 힘든 외향의 그 장독들은 볕이 잘 드는 곳에서 할머니의 바람이 가득 담긴 채로, 지긋이 마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울 한복판에 여전히 재래식화장실과 마당과 구멍 뚫린 모기장이 창마다 붙어있던 그 집. 재개발로 사라진 집의 그 장독들은 지금 어디에 가 있는 걸까.

작년 2월, 코로나19로 이동이 어렵던 그 시기 할머니는 9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다. 갑작스런 대상포진으로 고생하는 중이셨고, 마지막 날 하신 말씀도 “너무 아프다, 아파.”였다고 한다. ‘중국의 제로코로나 정책으로 해외유입자에게 3주간 강제되는 격리의무 때문에’, ‘아들이 학기 중이기 때문에…’ 같은 변명으로 나는 할머니의 장례식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리고 한 주 동안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슬픔에 찬 어머니가 전해주는 회한과 감정, 장례식의 모습들과 가족들에 대한 걱정이 버무려져 안개 속을 걷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할머니는 나에게 특별한 존재였다. 어린 시절 맞벌이로 바쁜 어머니를 대신해 할머니가 나를 돌봐주셨다. 그때 날카로운 선반장식에 다친 흉터도 아직 이마에 남아있다. 항상 지척에 할머니가 사셨고 방학과 휴가를 맞아 모처럼 한국을 찾으면 할머니는 늘 간장이나 된장, 얇게 저민 감자 튀긴 것, 다시마 부각 따위를 싸주셨다. 류머티스 관절염으로 휘어진, 그 모습이 마치 주인의 손가락처럼 생긴 할머니의 무말랭이는 시장에 파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맛이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 사후에 두 번, 내가 사는 중국으로 여행을 오셨다.
할아버지는 해방 후 중국과 일본을 다니며 일을 하셨다고 하는데 그때 지내던 곳이 만주와 중국의 봉천(지금의 심양)으로, 당시의 생활과 그즈음 민족의 현실에 대한 각성과 개척정신으로 무장했던 젊은 시절 할아버지의 이야기를(다소 부풀려졌을지도 모를) 듣는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기억이었다.
할아버지가 말년에 암으로 투병하시던 중 휴가를 내고 일부러 찾아온 나에게 “너희 할머니는 꼭 중국 구경시켜 드려라.”하고 말씀하시던 기억이 그에 대한 마지막 기억인데, 실제로 ‘중국 사는 손녀 집 방문’은 할머니의 첫 해외여행이 되었다.
평생 고향을 떠나지 못하고 살아온 어르신들이 타지에 가면 그러시듯 할머니도 도착 후 삼일부터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셨다. 아파트를 낯설어하는 그녀를 달래어 부러 그 도시의 유명사찰과 관광지를 돌아보고 맛집에 가는 것도 그저 그런 반응을 보이며 “대충 봤으니 마, 고마 집에 가자.” 라며 일침했다. 동네 시장 구경과 알알이 자두만큼 큰 거봉을 사는 것만이 그녀의 큰 기쁨이었다. 할머니가 2주간의 중국생활을 뒤로하고 귀국하실 때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가 함께 있는 것, 그것 채로 여행이지.
그 후 할머니의 두 번째 방문에서 나는 조금 힘을 빼고, 멋진 구경거리와 진귀한 음식을 맛보여드리려 애쓰기보다 삶을 느리게 여행하는 지혜를 배우고, 할머니가 살아온 시간들을 천천히 이해해가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당시의 나는 20대의 끝자락을 향해 앞만 보고 달려가는 중이었다. 유학과 졸업, 취업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남보다 빠르게 앞서나가려 단거리 육상선수처럼 뛰어가고 있었다.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따위의 문구를 책상과 모니터에 붙여 놓고 잠을 줄여가며 쉼 없이 공부하고 일했다.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라는 듣기 좋은 말은, 꿈을 말하는 순간과 그것이 실현되는 순간 사이의 시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도 되는 진공의 나날이 아니기에, 나는 끊임 없이 계획하고 실망하고 세상에 나를 확인시켜주고 싶어 했다.

81세에 나의 공간으로 불쑥 찾아온 할머니와의 시간은 그래서 특별했다.
일상의 속도를 늦추니 섬세한 삶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글을 모르는 할머니께 한글을 가르쳐 드린 그 주, 열심히 이면지에 한글을 연습하시던 할머니가 내심 뿌듯했는데, 퇴근 후 돌아와서 할머니가 시장에서 사 오신 마른멸치를 가루 내어 국 끓일 때 넣으라며 빈 병에 넣어두신 것을 보았다. 병 가운데에 삐뚤빼뚤 글씨로 쓴 ‘미르치’란 글자를 보며 먹먹해지는 마음을 나는 애써 크게 웃어 보였다.
할머니는 음식을 만들 때 언제나 간장으로 간을 하셨다. 국이며 나물마다 보기 싫게 까맣게 변하는 것을 보며 소금을 권해드렸더니 할머니는 되려 “간장을 무으면 죽을 때 근이 더 나간다케!” 하며 간장을 고수하셨다.
“할머니! 근이 많이 나가면 뭐해, 운구하는 사람들만 무거워서 힘들지!”하고 대거리를 하곤 했다. ‘근(斤)’이 더 나간다는 것은 할머니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그것은 삶의 무게를 덜어버리고 가볍게 훨훨 날고 싶어 하는 우리네들의 바람에 얼마나 반(反)한 것인가. 무겁다는 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쌓이는 것, 감추어진 비밀을 토로하지 않는 것, 비읍으로 끝나며 발음할 때 약간의 긴장과 일시 정지 느낌을 내는, 허투루 판단하고 결정하지 않겠다는 진중한 제동이 아니었을까.

예로부터 종갓집 종부들은 대대로 장맛이 이어지도록 그 집안만의 씨간장을 항아리에 따로 보관하고 또 별도의 담을 두르고 대문에 빗장까지 걸어 두며 지켰다고 한다. 씨간장에 담긴 그 집안만의 맛의 역사, 맛 좋은 씨간장을 올해 만든 새간장에 섞어 올해 간장 맛을 더 맛있고 깊게 유지해가는 것이다. 할머니의 씨간장도 그 집 장독대 어딘가에 놓여 있었다. 할머니의 장독대는 그 집 마당에서 제일 바람도 잘 통하고 볕이 잘 드는 곳에 있었다. 가족이 아니면 장독대에 함부로 드나들지도 못하게 하셨다. 장독대는 할머니의 신당(神堂)이고 자식들에 대한 사랑이 발효되어 가는 신성한 공간이었다. 종갓집은 아니지만 할머니가 간직하던 작은 항아리의 씨간장이 자식 중 누군가의 아파트 베란다에 아직 보관되어 있다. 할머니는 가시고 안 계시지만 그녀의 정성과 사랑과, 신앙과, 자연과 우주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된 유산이 그 안에 남아있다. 나는 이렇게 운이 좋게도, 할머니와 지냈던 20대 마지막의 그 시간을 말랑한 여운으로 껴입고 있다.
서로를 향해 떠났던 여행의 시간, 40대인 지금에도 나의 찬장에 짭짤하고 꼬릿하고 구수한 맛으로 남아 또다시 힘든 시간이 찾아올 때 매일 나를 다시 일어서게 한다.
그리고 나는 할머니가 걸어온, 혹은 뛰어왔던 그 시간을 언제고 응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