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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체험수기] 뿌리 깊은 나무처럼
작성일
2022.12.13

일반산문 부문(체험수기) 대상


뿌리 깊은 나무처럼

전옐레나 (카자흐스탄)


“할머니 이것 보세요. 예쁜 화분을 가져왔어요.”
“뭘, 이런 걸 다! 이 조그만 화분에서 나무가 잘 자라겠나?”


퇴근길에 화원에 들러 식물을 좋아하는 할머니를 위해 석류나무 화분을 사다 드렸다. 할머니는 화분을 보고 반색하셨지만, 이내 잘 자랄 수 있을지 걱정하기 시작하셨다. 화분에서 키우는 관상용 나무라고 설명했는데도 텃밭에 옮겨야 한다고 고집을 피우셨다. 예전에 꽃을 사다 드린 적은 많았지만 나무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가게 앞에 진열된 자그마한 석류나무를 본 순간 무언가에 이끌린 듯 화분을 살 수밖에 없었다. 특정한 향이나 사물을 보고 옛날 기억이 떠오르는 현상을 프루스트 효과라고 한다는데, 이 석류나무가 할머니와 나를 우리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데려다 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은 석류, 포도, 복숭아, 모과, 호두나무가 가득했던 할머니 집 텃밭에서 시작된다. 그중에서도 석류나무에 꽃이 필 때, 그리고 보석처럼 작고 빛나던 열매가 열릴 때 왠지 모를 신비감에 젖었던 기억이 난다. 그 후로 벌써 30년도 더 지났지만 지금까지도 석류의 향을 맡을 때면 할머니의 시골집에서 보냈던 그 시간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맞벌이로 바빴던 부모님 때문에 나는 할머니 집에서 살았다. 할머니는 늘 삐쩍 마른 나에게 미숫가루를 우유에 개서 주시곤 했다. 이후로 한동안 잊어버렸던 그 맛을 20년도 더 지나 이역만리 한국에서 유학할 때 다시 맛보게 될 줄을 그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내 기억으로 대략 6살 무렵부터 나는 할머니와 동네 아주머니들을 따라 산으로 들로 시금치를 캐러 다녔다. 산에 올라가면 초록의 싱그러운 나물 사이에서 붉디붉은 예쁜 양귀비꽃이 피어 있었는데 그 강렬한 이미지는 어린 내 눈에도 잊을 수 없는 장면으로 남아있다. 나물을 캐러 산에 다녀와서는 구들 위로 올라가 동생이랑 소소한 장난을 하며 놀았다. 어느 날은 할아버지가 어린이용 체스를 가져와서 가르쳐주셨다. 이걸 배우면 머리가 똑똑해진다는 말씀에 졸린 눈을 비벼가며 열심히 배웠던 기억이 난다. 저녁에는 타다 남은 장작 위에 감자를 올려서 구워 먹기도 했다.

언뜻 들어보면 한국의 어느 시골마을의 풍경과 다름없어 보이지만 우리가 살았던 곳은 깎아내린 듯 높은 산과 넓고 푸른 초원이 이색적인 ‘수르홉’이라는 마을이었다. 타지키스탄은 중앙아시아의 산악국가로 불리지만 이곳은 타지키스탄에서도 오지 중 오지였다. 지금은 할머니를 포함한 모든 가족이 이웃 나라인 카자흐스탄의 알마티에 살고 있지만 내 어린 시절 기억의 8할은 바로 이 산속 마을에서 시작한다. 그만큼 나에게 이 마을은 특별하다. 산 고개를 넘으면 판지강이 흐르는 아프가니스탄이 보이는, 국경과 닿아있는 지역이었다. 이 마을은 다른 타지키스탄 지역과는 달리 고려인이 집성촌을 이뤄 살고 있던 마을이었다. 마을 이장과 학교 교장도 모두 고려인이었다. 이는 소련시절 벼농사에 특출났던 고려인들을 이곳에 집단 정착시켜 이 험준한 땅을 농경지역으로 만들려고 했던 중앙정부의 정책 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할머니, 어떻게 해서 타지키스탄에 가게 되셨어요?”
“한국과 가깝기도 하고 아버지가 가르치는 일도 하시고 연해주에서 살다가 1937년에 강제이주로 중앙아시아로 가게 되었지.”


할머니는 러시아에서 태어났지만 1937년, 할머니가 5살이었을 때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하면서 유라시아 넓은 초원에 뿌리내리게 된 고려인 1세였다. 1937년에 할머니 가족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였던 홍범도 장군을 비롯해 고려극장, 고려일보 등 모든 고려인이 강제로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할머니 가족이 처음 도착한 곳은 카자흐스탄 남부 크즐오르다주의 ‘바이가쿰’이라는 마을이었다. 이곳은 나무가 잘 자라지 못하는 척박한 땅이었고 주변에 물을 구하기조차 힘들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당시는 원주민인 카자흐스탄 사람들 역시 대기근에 시름하고 있던 시기였다. 할머니의 가족은 어렵사리 폐가를 구해 그 마을에서 2년 정도를 버텼지만 결국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이웃나라인 우즈베키스탄에 가면 고려인 집성촌이 많고 농사지을 땅도 충분하다는 소문에 할머니의 조부께서 먼저 그곳으로 가셔서 작은 집을 지으셨다. 그리곤 다시 돌아와 온 가족을 데리고 새 보금자리인 우즈베키스탄을 향해 450km가 넘는 길을 걸어서 이동하셨다고 한다. 그때 할머니는 고작 5살이었고 할머니의 어머니는 임신한 상태였기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끝도 없는 길을 걷고 걷다 해가 지면 모르는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 잠깐의 휴식을 청했다. 생면부지의 남의 집에서 쪽잠을 청한 대가족은 날이 밝으면 다시 길을 떠났다. 가다가 배가 고프면 노상의 ‘차이하나(중앙아시아 전통찻집)’ 들려 빵과 차로 허기를 달랬다고 한다. 그렇게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에 도착하니 정말로 인근에 고려인 마을이 많이 형성되어 있었다. 고려인들은 새로운 정착촌에 ‘노브이 푸티’, ‘폴리트오트델’ 등 과거 연해주에서 살던 마을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했다. 할머니의 가족은 ‘스베르드로프’ 마을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뜨락토르(견인차)일을 잘하셨지. 벼농사를 지으면 수확이 좋아서 창고에 보관할 자리가 없을 정도였어. 넘쳐난 것은 마당에 두었지. 날마다 방앗간에서 벼를 찧었고 밤낮없이 부지런히 일을 해서 현지인들한테 칭찬을 많이 받았어. 농사가 잘되기도 했고 아버지가 착해서 우리 집엔 10명이 넘는 우리 가족 외에도 다른 친척들도 함께 살았단다. 그리고 타지키스탄은 처음엔 갈 생각이 없었지. 대가족이어서 내가 그토록 하고 싶었던 공부는 비록 하지 못했지만 우즈베키스탄에서 젊은 시절을 다 보내고 결혼도 하고 아이 셋을 낳았지. 양가 부모님 집도 가깝고 형편이 좋았거든. 근데 어느 날 타지키스탄에 먼저 간 시누이가 오라고 해서 가게 되었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자식들과 함께 타지키스탄 수르홉 마을에 도착하자 마을 관리자는 농사지을 땅을 배당했다. 할머니, 할아버지, 큰아버지, 아버지, 작은아버지는 새로운 삶의 터전에 뿌리내리기 위해 모두 다 벼농사에 매달렸다. 수르홉 마을은 겨울에도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 적이 없고 여름에는 기온이 영상 45도까지 올라가는 고온 건조한 지역이었다. 할머니는 새벽부터 논에 나가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저녁에 집에 돌아오시면 쉴 틈도 없이 밥을 안치고 닭을 백 마리가량 사육하던 커다란 닭장을 청소하고 나서야 간단하게 늦은 저녁을 드셨다. 그리곤 건너편에 있던 작은 영화관에 가 표 파는 일까지 끝내고 나서야 집에 돌아와 몸을 누이셨다.


그렇게 고된 노동으로 빠듯했던 삶이었지만 할머니와 나는 때때로 산에 올라가서 나무에서 피스타치오를 따 먹거나 가을이 되면 마당에 자라는 석류와 감을 따서 먹기도 했다. 행복했던 기억으로 가득한 나의 어린 시절, 시골에서 할머니와 보냈던 그 시간이 오래된 영화의 필름처럼 내 기억 속에 그대로 남아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타지키스탄에서의 행복했던 어린 시절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1991년에 소련이 해체된 직후인 1992년, 타지키스탄에 내전이 터졌기 때문이다. 모든 마을에 외출 통제가 있어서 정해진 시간 외에 집 밖에 나서면 무장한 군인들이 무조건 총을 쏘았다. 실제로 이렇게 죽은 사람의 수가 적지 않았다.


우리가 살던 마을은 아프가니스탄 국경 근처에 위치했기 때문에 상황은 더욱 위험했다. 우리는 어디로든 급히 떠나야만 했다. 전쟁의 화마를 피해 쫓겨나듯 떠나야 했기에 행선지를 고를 여유조차도 없었다. 그 당시 다른 구소련 공화국들과 마찬가지로 타지키스탄에도 여러 민족 출신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었는데, 그중 카자흐스탄계 사람들은 카자흐스탄으로, 러시아계 민족들은 러시아로 떠났지만 갈 곳 없는 고려인들은 친척이나 친구들이 살고 있는 곳을 찾아 각자 도생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조종사 공부를 위해 카자흐스탄 알마티로 떠난 큰아버지가 그곳에서 가정을 꾸리고 정착해 있었기 때문에 우리 가족은 알마티로 떠날 수 있었다. 일촉즉발의 위험한 상황이라 온 가족이 함께 출발하지는 못하고 어머니와 동생이 먼저 큰아버지 도움으로 알마티로 향했다. 항공사에서 조종사로 일하셨던 큰아버지가 표를 구매하지 못해 비행기 짐칸에 어머니와 남동생을 태웠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나는 후발대로 마을을 떠나게 되었다. 우리는 기차를 타고 알마티로 갔는데 어린 나의 뇌리에 깊게 새겨진 흔들리던 기차의 소음과 창문 밖으로 쉴 새 없이 변하던 풍경들을 떠올리면 여전히 가슴 한쪽이 아릿해짐을 느낀다.


가장 늦게까지 타지키스탄에 남았던 것은 아버지였다. 행복한 추억들이 가득한 집을 그대로 버려 놓고서는 절대로 떠날 수 없다고 고집을 피우신 터였다. 그렇게 아버지는 1년 정도 더 남아 결국 집을 팔 수 있었고, 모든 재산을 정리한 뒤 기차에 몸을 실었다. 상황이 상황이었던지라 아버지는 돈을 옷 여기저기에 나눠 숨겨놓은 채로 기차를 타셨는데, 기차 안에서 무장강도를 만나 목숨을 잃을 뻔했다고 한다. 강도들은 긴장한 아버지에게 긴 총을 들이대며 돈을 내놓으라고 위협했다. 그 순간, 돈을 다 주면 알마티에 있는 가족들이 굶을까 걱정되고, 그렇지 않으면 총에 맞아 이 자리에서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고 한다. 정신을 차린 아버지는 한쪽 주머니에 있던 돈을 내주며 이게 전부라고 사정했고 믿어준 척한 건지 실제로 믿었던 것인지는 모르지만 다행히 강도들은 아버지가 준 돈을 쥐고 사라졌다고 한다. 그렇게 절체절명의 위기를 넘긴 아버지는 1993년 우리 가족들과 눈물겨운 상봉을 이룰 수 있었다. 당시 우리는 큰아버지가 먼저 빌린 돈으로 집을 구해서 살고 있었는데 그해 가을, 독립 후 2년 된 카자흐스탄이 자체 화폐를 도입하며 화폐개혁을 단행한 결과 기존의 소련 루블은 그야말로 종이조각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아버지가 목숨을 걸고 지켜온 돈이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사라지고 만 것이다. 당시 우리 가족은 난민 신분이었고 국적도 없었다. 국적을 취득하려면 5년을 기다려야만 했다. 국적을 얻기 전에는 좋은 일자리를 꿈꿀 수조차 없었다. 할아버지는 경비원을 하고 아버지는 건설 현장에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용접을 하게 되었다. 할머니는 농사를 짓고 수학 교사였던 어머니는 채소와 과일을 팔러 다녔다.

나는 알마티에서 초등학교 2학년부터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공항 근처라 공항 직원이나 엔지니어의 자녀들이 주로 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학교 친구들은 대부분 러시아계 출신이었는데 똑똑하고 예쁘고 키가 큰 친구들을 보며 나는 괜스레 주눅이 들곤 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나는 어머니가 장사하는 곳에 가서 일이 끝날 때까지 함께 앉아 있었다. 어머니는 주로 공항이나 학교 주변에서 채소를 팔았다. 나는 늘 어머니와 같이 다녀야 했는데 혹시나 친구들이 볼까 봐 항상 창피하고 두려웠다. 장사가 잘 안되는 날이면 어머니는 나에게 배와 사과를 담긴 양동이를 쥐여주고 본인은 다른 장소에 가서 채소를 팔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학교 친구들이 지나다니는 길에서 과일을 팔 수밖에 없었는데, 너무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어머니가 올 때까지 몇 시간을 울었던 기억이 난다. 시간이 지나서 우리는 국적도 취득하고 부모님도 공항에 취직해 상황이 좋아졌다.


하지만, 학창 시절 나는 친구들이 출신을 물어볼 때 가장 곤혹스러웠다. 핏줄은 한국인이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러시아 태생이며, 부모님은 우즈베키스탄 출신인데 나는 타지키스탄에서 태어난 고려인이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이해시키기란 쉽지 않았다. 내가 그들처럼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하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사실은 나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는 친구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더 치열하게 공부했다.


그 당시 내가 살던 동네와 학교에는 고려인뿐만 아니라 아시아계 친구들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고려인의 뿌리라는 것에 대해 크게 관심 갖지 못한 채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는데, 그 무렵 우연히 집에서 ‘레닌기치(현재 고려일보)’라는 신문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그것은 한국어로 적힌 신문이었는데 물론 당시에는 한국어인지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나는 뭐라고 쓰여 있는지 알고 싶다는 강렬한 호기심에 사로잡혔다. 마치 피가 당긴다는 우리 속담처럼 말이다. 내용도 알 길 없는 신문을 훑어보며 웬일인지 나는 마음속의 피가 조금씩 뜨거워짐을 느꼈다. 그날 이후 나는 할머니를 졸라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가르쳐준 대로 글자를 익히고 단어를 러시아 단어와 대조하면서 읽어보았다. 그렇게 하루 이틀 쌓여갔고 어느 순간 내가 읽고 있는 게 이해되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전혀 생소했던 외국어인 한국어였지만 하나의 열정만으로 빠른 속도로 습득해나갔고 나는 결국 고등학교 때부터 줄곧 생각해온 전공을 포기하고 카자흐스탄 국립대학교 한국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학부 4학년 때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통해 처음으로 나의 역사적 조국, 한국에 갈 수 있게 되었다.

벌써 이십 년이 가까이 된 일이지만 나는 아직도 인천공항에 처음 내린 가슴 벅차오르던 그 순간을 기억한다. 꿈에서조차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나라, 한국어를 배우기 전까지 어디에 위치하는지조차 몰랐던 이 생소한 나라에 첫발을 내디딘 스무 살 초반의 앳된 나에게 이것이 가슴까지 벅찰일 일까 싶지만 실제로 그랬다. 150년 만에 멀고 먼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것만 같은 편안함을 느꼈다. 나의 조상님께서 사셨던 이곳, 언제나 돌아오고 싶어 하셨던 그리운 고향에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치 그분들의 꿈을 대신 이뤄드리는 기분마저 들었다.


늘 내 주변에는 나와 다른 모습을 한 친구들뿐이었는데 이곳에서는 어디를 둘러봐도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낯설면서도 신기했다. 한국에 온 후 며칠 동안은 두리번거리며 주변의 사람들을 구경하느라 바빴다. 하지만 비슷한 생김새와는 다르게 한국어는 유치원생보다 서툴렀던 나였기에 지금 생각하면 얼굴 붉어지는 에피소드도 많이 생겼다. 친구들과 사람들이 많은 장소에 가면 소음 때문에 가뜩이나 어려운 한국어가 거의 들리지 않는 수준이었다. 분명히 배워서 알고 있는 쉬운 말도 입 밖으로 꺼내기가 힘들었다. 언어에 대한 자신감을 한 번 잃게 되니 나중에는 한국어를 시작하려고만 하면 울렁증이 생길 정도였다. 한 번은 신촌에 가야 하는데 발음을 잘못하는 바람에 신천에 가게 된 일도 있었다. 다른 도시에 사는 고려인 친척 아주머니는 내 한국어 울렁증을 알고는 “버스터미널 매표소에 가서 말로 하지 말고 주소를 종이로 써서 보여 주면 된다”고까지 말씀하기도 했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그동안 실력이 형편없다는 핑계로, 혹은 부끄러움을 당할까 봐 모든 것을 시도조차 하지 않고 포기하려 했던 내 모습을 마주하게 되었다.


다행히 한국에서 만난 친구들은 내가 고려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나를 더 많이 챙겨주었다. 귀찮을 수 있는 일도 하나씩 알려주고 어디를 가든 이것이 한국어로 무슨 뜻인지 친절하게 가르쳐주었다. 아프면 약과 죽을 집으로 가져다주고 내가 서툴게 말을 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 주었다.


어느 날은 두통이 심했는데 아는 한국 아주머니가 ‘내 손이 약손이다, 아프지 말아라’며 나를 쓰다듬어 주셨던 적이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눈물이 울컥 차올랐다. 한국어를 잘 몰랐던 어린 시절 내가 어디 아플 때마다 할머니가 다가와 나를 어루만져주시며 똑같은 말씀으로 쓰다듬어 주셨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평생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쓰며 살아왔고 유일하게 한국어를 조금이나마 들을 수 있었던 통로는 오로지 할머니와의 대화뿐이었다. 하지만 할머니를 통해 들었던 모든 한국어들은 내 기억 속에 단단히 자리 잡아 한국에서 할머니에게서 들었던 말을 듣게 되면 마치 할머니의 손길을 느끼는 것처럼 마음이 따뜻해졌다. 이렇게 한국 친구들의 따뜻한 배려 덕분에 말은 통하지 않았어도 마음은 통할 수 있었다. 그제야 나는 한국어를 못 한다는 사실이 부끄러운 게 아니라 한국어를 학습의 대상으로만 생각했던 내 태도가 부끄러운 일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한국어에 대한 벽을 허물자 그 이후부터는 금방 늘었다. 차차 생활이 익숙해지며 친구들도 많이 사귈 수 있었고 어느 순간부터 내가 타국에서 왔다는 느낌조차 잘 느끼지 못했다.


교환학생 프로그램으로 나는 한국어학당을 다닐 수 있었다. 학부 수업은 한국인 친구들과 듣고 어학당에서는 다양한 나라에서 온 외국인이나 다른 재외교포들과 수업을 들었다. 반 친구 중에는 미국, 일본, 스페인, 중국 교포 친구들이 있었는데 나와 비슷한 배경을 가진 친구들을 사귀면서 ‘나만 복잡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었구나’라는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나와 같은 고시원에 살고 수업도 함께 들었던 재일교포 박마의 언니와 아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부엌에서 함께 밥을 먹을 때면 나는 중앙아시아에 사는 고려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언니는 일본에 사는 재일교포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처음으로 나는 한국을 떠난 재일교포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들의 복잡다단한 역사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그것은 나 개인의 문제라고만 생각해온 재외동포의 정체성 문제를 보다 넓은 시각에서 바라보게 된 계기가 되었다. 내가 재일동포사에 관심을 많이 보이자 나중에 그 언니의 어머님께서 일본에서 작은 선물과 함께 옛날 영화 포스터 몇 장을 보내주시기도 했는데 당시에는 그게 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언니의 어머님이 일본에서 위안부 할머니들의 스토리를 카메라에 담고 ‘아리랑의 노래’, ‘침묵, 일어서는 위안부’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드는 재일교포 감독인 박수남 씨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언니는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자주 하곤 했다.


“들려주는 사람이 있어야 언젠가는 사람들의 귀에 그 이야기가 들린다.”


언니가 입버릇처럼 했던 그 이야기는 오랫동안 내 귓가에 남아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교환학생 과정이 끝난 뒤에는 카자흐스탄으로 돌아가 학부를 졸업하고 한 뒤 한국에서 더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한국의 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원 전공은 국어학을 선택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선택이 조금은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내 전공을 ‘국어학’이라고 밝히면 대부분 ‘러시아어학’이라고 받아들였고, 그게 아니라 ‘한국어학’이라고 대답하면 자연스럽게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과’라고 생각하는 식이었다. 사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반응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지도 않는 내가 한국어를 학문으로 깊이 있게 연구한다는 것이 어쩌면 어불성설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재일교포 박마의 언니의 말이 떠오른다. “들려줘야 듣게 된다”고 했던 그 언니의 말처럼 나도 한국어로 우리 가족의 역사를, 고려인들이 살아낸 치열한 삶의 장면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떳떳하게 알리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 것이다.


부족한 언어실력에도 불구하고 동포 관련 공모전에 계속 도전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나의 한국어가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다른 해외동포들의 그것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나의 마음속 ‘모국어’인 한국어를 통해 외국인이 아닌 한국사람과 동등하게 경쟁하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도전 자체로 의미가 깊다.
지금은 과거에 비해 많이 알려지기는 했지만 이삼십 년 전만 해도 한국에는 고려인 역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고려인에게 역시 한국은 커튼으로 가려진 미지의 세계, 역사의 흐름 속에 끊어진 테이프나 다름없었다. 사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께서 옛날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으셨다. 어린 나에게 이야기해주기에는 지나치게 슬프고 힘겨운 시절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에 남을지 아니면 가족이 있는 카자흐스탄으로 돌아갈지 많이 고민했다. 결국 나는 연로한 할머니의 곁을 좀 더 지켜드리기로 결심하고 다시 알마티로 돌아와 할머니와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덕분에 할머니와 함께 지내며 그동안은 어리고 무관심해서 잘 몰랐던 고려인의 역사와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더 알기 위해 종종 할머니를 졸라댄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께서는 귀찮은 손녀의 인터뷰 요청에도 싫은 내색 없이 조각조각 흩어진 본인의 기억의 숲을 더듬곤 하신다.

할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우리는 집 앞 화단에 작은 석류나무를 함께 심었다. 관상용이라 더 크게 자랄 것 같지는 않았지만 할머니는 갑갑한 화분을 벗어나 땅에 심은 이 석류나무가 훨훨 깊게 뿌리내릴 거라는 생각에 못내 흐뭇해하셨다. 이것은 어쩌면 역사의 폭풍우 앞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야만 했던 자신을 비롯한 다른 고려인의 굴곡진 운명을 이 작은 나무 하나가 보호해주기를 염원하는 마음이었을지 모르겠다.


나무를 심으며 어린 시절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시골집이 떠올라 한동안 추억에 잠길 수 있었다. 추억 속의 석류나무가 나와 할머니를 행복한 시절로 데려다준 것처럼 할머니와 증조할머님에게도 각각 연해주와 한국에서 보낸 유년 시절의 추억을 연결하는 저마다의 ‘나무’가 분명 있을 것이다. 나의 증조할머님과 할아버지는 결국 이역만리 타국에서 눈을 감을 때까지 꿈에 그리던 고향 땅을 밟지 못하셨지만 고향에 얽힌 행복한 순간들을 떠올리며 운명의 연속성을 느끼곤 했을 것이다. 지금 내가 이 ‘나무’를 통해 할머니와의 연대감을 이어가듯이 말이다.


되돌아보니, 나도 다양한 나라 출신인 동포친구들도 역시 뿌리가 같은 ‘나무’를 떠올리며 우연인 듯 운명같이 한국을 찾아가게 된 것이고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무야, 무럭무럭 잘 자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