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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단편소설] M. I. A.
작성일
2022.12.13

단편소설 부문 가작


M. I. A.

이 지 혜 (미국)



새로 이사 온 집에서의 짐 정리가 대충 마무리되자 미영은 필립에게 뉴욕타임즈를 사다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신문 말하는 거야?”


필립은 의외라는 듯이 물었다.


“응. 퇴근하는 길에 터미널에서 매일 좀 사다 줄 수 있어? 지난번에 보니까 가판대가 많더라구.”


“차라리 어플을 설치하는 건 어때? 요즘 누가 종이 신문을 본다고. 그거 사려고 시간 뺏기고 그러느니 그냥 어플로 결제해서 읽는 게 나을 거 같은데? 당신이 정말 읽고 싶다면 말야.”


매일 신문을 사오는 것이 굉장한 헌신이라도 되는 듯 필립이 난색을 하며 말했다. 소호의 한 회사에서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 필립은 매일 뉴저지에서 맨해튼의 소호까지 출퇴근을 했는데 두 시간 반씩 길에 시간을 허비하고 나면 녹초가 되었다. 그런데다 신문을 사기 위해 가판대에 들러 계산을 기다리면서 초과될 시간을 생각하니 영 귀찮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좀 부탁할게. 핸드폰으로 보면 눈이 아파서 그래.”


필립은 말없이 남은 스크램블 에그를 포크로 집어서 입으로 가져갔다. 남은 베이컨 조각을 먹고 잔에 담긴 커피를 비웠다. 냅킨으로 입을 닦은 후 빈 접시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치우는 것은 미영의 일이었다.


“근데 당신 한국에서도 신문 읽었어?”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매만지며 필립이 물었다. 마치 한국에서도 안 보던 신문을 미국에서 읽으려는 미영의 모순적인 행동을 지적이라도 하듯이.


“당연하지.”


필립의 입을 다물게 하고 싶어서 미영은 거짓말을 했다.


“그래? 당신이 그렇게 사회문제에 관심이 있는지 몰랐네. 알았어. 있다가 퇴근하는 길에 사 올게.”


마지못해 알겠다고 한 필립은 현관 앞에서 미영과 가벼운 포옹을 나누고 집을 떠났다. 필립이 정작 뉴욕타임즈를 사 온 건 연거푸 이틀이나 잊고서 부탁한 지 삼 일째 되던 날이었다. 그는 모든 지 잘 잊었다. 미영에 대한 사소한 것들은 물론이고 본인이 무심코 어딘가에 둔 물건도 어디에 뒀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필립은 미영을 추궁했다. 필립의 문제는 자신이 잘 잊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었다. 그런 점은 둘 사이에서 쉽게 언쟁으로 번졌다.

두 사람은 소개를 통해서 만났고 작년에 한국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미영은 초혼이었고 필립은 재혼이었다. 결혼하면 한국을 떠나 낯선 나라에서 살 수 있다는 점이 미영에게는 꽤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둘 사이에 끓어오르는 열정적인 애정은 없었지만 서로에 대한 확신은 충만했다. 격정적이고 변덕스러운 연애에 익숙했던 미영은 차분하고 진중한 성격의 필립이 안정적으로 느껴졌다. 뜨겁고 자극적인 음식만 먹다가 정갈하고 삼삼한 건강식으로 몸을 보양하는 기분이었다. 일 년간의 장거리 연애동안 필립은 단 한 번도 미영을 조바심 나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결혼까지 이어졌다. ‘결혼이란 이렇게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거구나’ 인생의 새로운 챕터로 접어들면서 미영은 과거의 연인과의 사이에서 결혼에 목매던 자신을 자책했다.


필립은 민감한 기질을 가지긴 했지만 전반적으로는 수더분한 편이었다. 소변을 볼 때 앉아서 봤으면 좋겠다는 미영의 요구에도 별다른 어려움 없이 그렇게 했다. 결혼 생활에 실패했던 이력이 있던 필립에게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사명감이 있었다. 경기도의 소도시에서 공무원으로 평생을 살아온 아버지와 가정주부인 어머니 아래서 특별한 어려움 없이 인생을 살아온 미영의 배경과, 서울 변두리의 한 회사 인사팀에서 오랜 시간 일한 경력, 자신의 주장보다는 상대의 의견에 맞추려고 드는 그녀의 성격은 특히 그의 마음에 들었다. 그녀에게는 일생을 안달하고 몸부림치며 살아온 사람 특유의 날 서고 거친 느낌이 없었다. 어떤 것에도 욕심내지 않고 느긋하고 편안한 성격이 좋았다. 미영은 민들레 잎처럼 순하고 소박한 여자였다.


그들은 미영의 퇴직금과 결혼자금을 보태서 리지우드라는 동네에 집을 사서 이사를 했다. 학군이 좋아서인지 높은 비중으로 한국인들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필립이 출근을 하고 나면 미영은 방대한 시간 앞에서 길을 잃는 기분이 들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를 가야 좋을지 막막했다. 그런 여유는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집 주변을 가볍게 산책하다가 운전에 익숙해지면서 행동반경이 아주 조금씩 넓어졌다. 그것은 미영이 미국생활에 적응해가는 속도와 비례했다.


미영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리지우드 기차역 앞의 스타벅스였다.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미영은 그곳에서 영어 이름을 만들었다. 커피를 주문할 때마다 직원이 이름을 물었고 직원은 미영이라는 발음을 어려워했다. 미영은 얼굴이 빨개진 채 모기 만한 소리로 스펠링을 알려주려고 입을 뗐다.


“M.I…”
“It’s okay. Do you need a receipt?”


직원은 손사래를 치며 스펠링 따위에는 관심 없다는 듯 굴었다.


“No….”


미영은 다른 사람들 틈에서 커피를 기다렸다. 제시카, 애나, 롭 이름들이 차례대로 호명되었고 사람들이 웃으며 커피를 받아서 나가는 것을 지켜봤다.


“Small Ice americano!”


미영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쭈뼛쭈뼛 앞으로 나아갔다. 좀 전에 미영의 주문을 받은 여자가 미영을 향해 커피를 건넸다. 자신만 이름이 아닌 주문 내역으로 불린다는 게 어쩐지 자존심 상했다. 그래서 미영은 영어이름을 만들었다. 미아. 발음하기에도 쉬웠고 M.I.A 스펠링도 간단한 이름이었다.


늦은 오후가 되면 미영은 리지우드 기차역으로 향했다. 야외 플랫폼의 벤치에 앉아 햇빛을 받으며 꽤 오래 앉아 있었다. 오후 시간의 기차역은 늘 한산했다. 기차는 이십 분에 한 번씩 종소리를 울리며 승강장에 도착했다. 적게는 한두 명, 많게는 열 명 가까이 기차에 타고 내렸다. 기차의 문이 닫히기 전에 제복을 입은 승무원이 플랫폼에 내려서 미처 타지 못한 사람이 없는지 확인을 했다. 한 번은 벤치에 앉아 있던 미영에게 이 기차를 탈 거냐고 물어본 적도 있었다. 미영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노, 땡큐.”라고 말했다. 아임 파인이라고 했어야 했나. 미영은 두고두고 자신의 말을 곱씹었다.


미영은 대부분의 미국 사람들로부터 알 수 없는 위축감을 느꼈다. 처음에는 자신이 영어를 잘하지 못해서 쓸데없이 긴장하는 탓이라고 생각했다. 미영이 길거리에서, 스타벅스에서, 또는 기차역의 승강장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여유가 있었고 당당함이 느껴졌다. 행동이나 말투, 심지어 걸음걸이에서도 세련됨이 느껴졌다. 한국에서 만나는 노인들은 어쩐지 동정심이 느껴지는데 비해 이곳의 노인들은 자신감이 넘쳤고 지혜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동네를 통틀어 목적 없이 돌아다니는 사람은 미영 혼자뿐인 것 같았다. 그러다가 오후 여섯 시가 되면 집으로 돌아가 저녁을 준비했다. 미영의 유일한 일정이었다.

필립이 뉴욕타임즈를 사 온 다음 날, 미영은 신문을 가방에 넣고 스타벅스로 향했다. 미아라는 이름으로 커피를 주문하고 창가 테이블에 앉았다. 두툼한 신문안에 빽빽하게 실린 뉴스들이 마치 미영이 읽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속에 담긴 많은 뉴스를 읽어야 한다니. 할 일이 생긴 것 같아서 미영은 설레었다. 신문의 1면에는 며칠 전 벌어진 뉴욕 지하철 총기 난사사건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형광펜으로 모르는 단어에 표시해가며 읽어 내려갔다. 빽빽한 글씨와 쉼 없이 달려드는 모르는 영어 단어를 보고 있자니 눈이 피곤해졌다. 잠시 눈을 감은 채 숨을 고르고 있는데 근처에서 익숙한 언어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니 한국 여자 네 명이 옆 테이블에 앉아서 한국어로 수다를 떨고 있었다. 미영의 나이보다 약간 많거나 비슷한 또래의 여자들이었는데 한껏 꾸민 차림이었다. 미영은 테이블에 올려둔 여자들의 명품 가방을 힐끔 쳐다봤다. 그리고 자신의 에코백과 뉴욕타임즈를 내려다봤다. 묘한 우월감이 들었다. 아이들 교육 문제에 열을 올리고 있는 여자들의 대화를 무시하며 다시 신문을 펼쳤다. 사회면에는 최근 실종된 가족에 대한 뉴스가 크게 실려 있었다. 브루클린에 살던 젊은 부부와 다섯 살 아들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내용이었다. 기사에 집중해서 읽을수록 미영은 자신을 향해서 힐끔거리는 옆 테이블 여자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럴수록 더욱 신문에 집중하는 척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Excuse me.”


옆 테이블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그중 가장 의욕적으로 대화를 주도해나가던 여자가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은 채 미영을 보고 있었다.


“네?”


미영은 한국말로 대답했다. 지금껏 여자들이 한국어로 대화하던 것을 들어서 은연중에 튀어나온 걸 수도 있었지만 뉴욕타임즈씩이나 읽고 있는데 대화 몇 번에 미천한 영어 실력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어머. 한국분이세요? 어쩐지. 우리끼리 한국분일 거 같다고 얘기했었는데.”


여자가 호들갑을 떨며 반가워했다. 자신에게 쏟아진 시선들이 부담스러워서 미영은 어색하게 웃었다.


“다름이 아니라 그 앞에 의자 안 쓰시는 거면 저희가 써도 될까 해서요.”
“그럼요.”
“고마워요. 그럼.”


여자는 미영의 앞에 놓인 의자를 끌어갔다. 미영은 여자들이 자신에 대해서 한국사람 일 것 같다고 얘기했었다는 말이 거슬렸다. 혹시 외모가 아니라 자신의 태도 때문에 그렇게 추측한 것은 아니었을까. 낯선 장소에 와서 혼자 주변에 신경을 곤두세운 채 어색하게 구는 한국인 특유의 그런 모습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곧 새로운 일행이 옆 테이블에 도착해 그 의자에 앉았다. 미영은 다시 신문을 읽기 시작했다. 집중하려고 했으나 옆 테이블의 소란스러운 대화 소리가 거슬렸다. 곧 가방을 들고 신문을 옆구리에 낀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영이 스타벅스에서 그 여자를 다시 만난 건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어머. 지난번에 그분 맞죠?”


뉴욕타임즈를 읽고 있던 미영은 고개를 들어 여자를 올려다봤다. 지난번에 의자를 가져가도 되겠냐고 물었던 그 여자였다. 이번에는 여자 혼자였다. 여자는 한 손에는 커피가 든 종이컵을 다른 한 손에는 노트북 가방을 들고 있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어머. 또 만나네요. 반가워라.”
여자는 화색을 띠며 미영이 앉은 옆 테이블에 앉았다.
“이 근처 사시나 봐요? 여기 자주 오시네요?”
“네. 집이 이 근처에요.”
“저도 여기 자주 와요. 여기서 혼자 일도 하고 사람도 만나구요.”


여자는 곧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 일과 관련된 이야기를 시작했다. 미영은 여자의 통화 내용을 엿들었다. 여자의 영어가 유창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자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저 정도 영어는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미영은 생각했다. 여자는 자신의 영어 실력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발음을 정확히 하려 애썼다. 주눅 들지 않는 그 모습에 미영은 도리어 자극을 받았다. 전화를 끊은 여자가 미영 쪽으로 몸을 돌려서 다시 말을 걸었다.


“혹시 무슨 일 하세요?”
“저요?”
“네. 요즘 종이 신문 읽는 사람 드문데 열심히 읽고 계신 게 인상적이어서.”
“아, 이거요. 이건 그냥 재미로 읽는 거에요.”
“그렇구나. 다음에 여기 또 언제 오세요? 그때 같이 커피 한 잔 할까요?”
“저 내일도 올 거예요. 비슷한 시간에.”
“연락처 교환할까요? 전 레이첼이에요.”
“전 미아에요.”

미영은 사람들에게 쉽게 마음을 여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처음 보는 여자가 친근하게 먼저 다가와 준 것이 고마웠다. 게다가 커피숍에 오면서 고급 레스토랑에 가서 식사를 해도 될 정도로 갖춰 입는 그녀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사실 한국에서도 미영은 친구가 별로 없었다. 미영의 결혼식에도 얼굴을 비춘 지인은 회사 동료 몇 명이 전부였다. 애들 때문에, 직장 때문에, 시댁 때문에, 미영이 결혼식에 참석했었던 친구들은 갖가지 이유로 미영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딱히 마음 가는 친구가 없었던 것도 미련 없이 한국을 떠나올 수 있는데 한몫하기도 했다. 미영은 문득 한국에서의 삶이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한 회사에서 7년 넘게 일했었다는 것이 꼭 다른 사람의 과거처럼 느껴졌다.

주말에 미영과 필립은 외식을 했다. 분위기 좋고 맛있는 레스토랑을 발견해서 자신만의 맛집 목록을 채워나가는 것은 미영의 즐거움 중 하나였다. 그럴 때만큼은 자신이 능동적인 존재가 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공원에서 산책을 하거나 영화를 보러 갔다. 가끔 어려운 영어 단어가 나오면 필립이 미영의 귀에 대고 그 뜻을 설명해줬다. 미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관람했다.


“그 브루클린에 일가족이 실종된 사건 알아?”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미영이 물었다.
“아니? 그런 일이 있었어?”
“응. 며칠 전에 신문 보니까 나오더라구. 아직도 행방이 묘연하대.”
“그래? 갑자기 어디로 사라졌대?”
“모르나 봐. 젊은 부부랑 다섯 살짜리 남자아이래.”
“신문 읽는 거 재밌어?”
“재미라기 보단 겸사겸사 읽고 있어. 세상 돌아가는 것도 알고, 영어 공부도 하고. 그런데 매일 신문 사오는 거 귀찮진 않지?”
“괜찮아. 어차피 오는 길인데 뭐.”
“그래. 고마워.”
“당신은 호기심이 많아서 영어도 금방 늘 거야.”


필립이 미영의 옆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내가 호기심이 많은 사람인가? 미영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뉴욕타임즈를 읽는 여자는 동경이자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굳이 그 신문을 고집했다. 신문에 담긴 영어의 수준은 미영에게 버거울 정도로 높았지만 그래도 신문을 놓지 않았다. 읽는 척이라도 했다. 그 순간만큼은 자신이 뭔가를 하고 있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면서 막연한 불안감을 지워버릴 수 있어서 좋았다.
어쨌든 나는 시도라도 하고 있잖아. 미영은 스스로를 변호했다.

“미아 씨는 앞으로 계획이 뭐에요?”
“먼저 여기 생활에 좀 더 적응하구요. 그 다음에 찾아봐야죠.”
“이미 적응 잘하고 계신 거 같은데요?”


레이첼이 빙긋이 웃었다.


“아닌데…”


미영이 겸연쩍은 듯이 답했다.


“관심 있는 분야 있어요? 어쩐지 미아 씨는 학구적인 것에 끌릴 것 같아요.”
“아니에요. 여기서 뭘 해야 좋을지 저도 찾고 있어요.”
“잘됐네요. 지난번에 여기서 저랑 같이 만나던 여자분들 있죠. 그분들 다들 남부럽지 않게 잘 사는 분들이에요. 그런데도 부수적인 수입을 창출하려고 저랑 함께 일하고 있어요. 한 분은 저랑 일 년도 안 돼서 한 달 수입이 벌써 직장인 못지않구요. 미아 씨도 관심 있으면 다음 모임에 참석할래요?”
“…어떤, 모임인데요?”
“요즘 세상은 전부 마케팅이잖아요. 더군다나 요즘은 디지털 노마드 시대라서 일정한 사무실 없이 내가 가는 곳이 사무실이 되는 세상이구요. 한마디로 인맥을 이용한 마케팅이라고 보시면 돼요.”


대화를 나눌수록 미영은 자신과 레이첼의 공통점이 미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이라는 것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개인 대 개인으로 만나 친목을 맺는 자리라기보단 좋은 먹잇감을 찾은 일방적인 레이첼의 설교가 이어지고 있었다. 미영은 겉으로는 듣는 척 고개를 끄덕였지만 실제로는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한바탕 마케팅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레이첼은 냅킨을 펼쳐놓고 그 위에 가방에서 꺼낸 알약들을 쏟았다. 크기도 모양도 다양한 알약 열 몇 개를 손바닥에 올리더니 두 번에 걸쳐서 꿀꺽 삼켰다.


“무슨 약을 그렇게 많이 드세요?”


레이첼의 행동이 하도 희한해서 미영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 이거. 몸에 좋은 약.”


레이첼은 나머지 알약들을 입에 털어 넣고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미소지었다.


“이게 다 역할이 있는 영양제거든요. 비타민 D, C, 철분, 마그네슘, 루테인, 코큐텐, 칼슘, 엽산, 유산균, 오메가3 뭐 그런 거예요.”
“그걸 전부 따로 드세요?”
“그럼요. 전부 역할이 다른걸요. 이것 좀 보세요.”


레이첼은 가방에서 팸플릿을 꺼내 건넸다. 다양한 영양제에 대한 광고가 실린 팸플릿이었다. 미영은 찬찬히 살펴봤다.


“이게 전부 거기 적혀있는 회사 제품인데 난 정말 이 제품 만나고 나서 몸이 달라진 걸 느끼잖아요. 사람들이 이 제품이라고 하면 무슨 다단계라고 생각해서 거부감부터 드는 모양인데 그냥 제품만 보면 사실 시중에 있는 제품하고는 비교가 안 돼요. 특히 먹을거리에 까다로운 미국에서 제품이 괜찮지 않으면 절대 시중에서 판매할 수가 없죠. 미아 씨는 따로 먹는 영양제 있어요?”


“아뇨.”


미영이 팸플릿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내가 영양제 몇 개 줘볼게요. 한 번 먹어봐요. 진짜 몸이 달라지는 게 느껴진다니까요. 미국에서 이 회사가 창립 60년이 돼가는데 여태까지 말썽 한번 없잖아요. 자. 이거.”


레이첼은 가방에서 따로 포장된 영양제 샘플과 팸플릿을 귀한 물건인 양 건넸다. 미영은 그것들을 받아들고 살펴보는 척하면서 시간을 확인했다. 생기를 띄는 레이첼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처음부터 자신에게 호의적으로 다가오던 레이첼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잠시나마 그녀와 좋은 인연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게 씁쓸함이 느껴졌다.

레이첼과 헤어지고 미영은 기차역으로 향했다. 벤치에 앉아 읽다 만 신문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로컬 뉴스 섹션에서는 얼마 전 실종된 브루클린의 젊은 가족에 대한 것이 실렸다. 부부와 친하게 지냈던 지인들의 인터뷰가 실렸는데 소제목에


[They’ve been M.I.A for few days now]


라고 적힌 문구가 눈에 띄었다.


“미아?”


미영은 자신의 영어 이름과 스펠링이 같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어서 구글 검색을 했다. M.I.A는 약어로 ‘Missing In Action’이라는 뜻이었다.

사실 퇴근길마다 미영의 신문을 사는 일이 필립에겐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필립은 매일 여섯 시에 사무실을 나섰고 여섯 시 십 분에 Spring 스테이션에서 지하철을 탔다. 십오 분 뒤 그랜드센트럴역에 내려서 복잡하고 번잡스러운 터미널을 통과해 기차가 도착하는 승강장으로 도착했다. 약간의 지체되는 시간 없이 빠른 걸음으로 움직여야지 여섯 시 삼십오 분 기차를 탈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일곱 시 십오 분까지 기다려야 했다. 미영에게 뉴욕타임즈를 사다주면서부터 필립은 여섯 시 삼십오 분 열차를 포기해야만 했다. 고작 그 신문을 사기 위해서 퇴근길에 쓸데없는 시간을 허비해야 한다니. 필립은 굳이 뉴욕타임즈만을 고집하는 미영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근데 왜 굳이 뉴욕타임즈야? 뉴저지 로컬 신문은 당신도 쉽게 살 수 있잖아.”
“스타벅스에서 로컬신문 들춰봤는데 내용은 별로 없고 전부 광고더라구.”

어쩔 수 없이 매일 뉴욕타임즈를 사면서 곧 미영이 신문 읽는 일을 그만두게 될 것이고 금세 싫증 낼 것이라고 믿었다. 요즘 세상에 누가 종이 신문을 읽는단 말인가. 그래도 그는 이곳에 적응하려는 미영의 노력을 도와주기로 했다. ‘그 최초의 시도가 신문을 읽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미국 생활을 좋아하지 않아서 일 년의 반을 한국의 친정집에서 보내던 전 아내와의 갈등을 생각하면 오히려 미영의 그런 노력이 감사하기도 했다.


필립이 신문을 사는 곳은 티켓 발권기 앞의 가판대였다. 그 가판대는 신문 외에도 I Love N.Y 같은 문구가 적힌 머그컵이나 열쇠고리, 후드티 같은 다양한 기념품들을 팔았다. 필립은 늘 같은 점원-젊은 아시안 여성-과 마주쳤다. 다른 가판대도 많았지만 굳이 그곳만 고집한 이유는 점원의 상냥한 태도 때문이었다.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 점원이 혹시 한국 사람이냐고 물어왔다. 필립이 그렇다고 하자 점원은 해사하게 웃으며 자기도 그렇다고 한국말로 대답했다.


“신문 보시는 거 좋아하시나 봐요. 요즘 종이 신문 잘 안 팔리는데.”
“집이 뉴저지라… 시간 때울 겸 기차 안에서 읽어요.”


필립은 자신이 왜 그런 거짓말을 한 건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아내의 심부름이라는 말이 왠지 입 밖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매일 그곳에서 신문을 사면서 필립은 점원과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다. 날씨나 그날의 화제가 되는 뉴스들로 시작한 잡담들은 곧 사적인 대화들로 이어졌다. 그녀의 이름이 제니퍼라는 것과 중저가 브랜드 회사에서 가방 인턴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녀는 필립 역시 인테리어 디자이너라는 사실을 알고서 더욱 친근하게 대했다.


“실은 우리 이모가 여기 주인이거든요. 최근에 일하던 알바가 갑자기 그만둔다고 해서 사람 구해질 때까지 도와주는 거예요. 대타로.”
“피곤하시겠어요. 투잡이잖아요.”
“돈도 벌고 좋아요. 아시잖아요. 여기 렌트비 비싼 거.”
“이 근처 사세요?”
“멀진 않아요. 이스트빌리지 쪽이니까.”

처음에 필립은 신문을 산 뒤 간단한 잡담 몇 마디를 나누고 곧바로 기차가 도착하는 플랫폼으로 떠났다. 그러다 점점 그 가판대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나중에는 기차가 오기 직전까지 그 가판대에 서서 제니퍼와 수다를 떠는 것이 퇴근 후의 일과가 되었다. 가끔 음료수를 사거나 매대에 놓인 후드티를 만지작거리는 손님이 나타나면 필립은 대화를 멈추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간혹 무례한 손님들이 나타나면 제니퍼는 필립과 눈을 마주친 채 눈썹을 치켜올리면서 황당하다는 사인을 보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필립은 슬며시 웃으며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둘 사이의 대화는 주로 디자이너로 일하는 직업적 고충에 대한 것이었다. 대학을 마치고 미국으로 유학을 온 필립의 경우처럼 제니퍼도 성인이 되어서 유학을 왔다고 했다. 제니퍼는 자신이 네이티브가 아니기 때문에 채워지지 않는 언어에 대한 갈증, 그로 인해서 회사에서 일정 직책 이상은 승진하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 같은 것들에 대해 털어놓았는데 필립은 깊이 공감했다. 둘 사이에 사적인 질문이나 대화는 없었다. 필립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보고도 제니퍼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단골손님과 점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언제 시간 되시면 제 포트폴리오 좀 봐주실래요?”


한 달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필립은 어려울 것 없다는 생각을 했지만 어떤 방법으로 봐달라는 건지 궁금했다.


“그러죠. 지금 가지고 있어요?”
“노트북 가져왔어요. 여기 들어와서 좀 봐주실래요?”


필립은 망설임 없이 계산대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천장이 유독 낮아서 상체를 한껏 숙이고 들어가야 했다. 게다가 매우 비좁아서 어쩔 수 없이 가까이 붙어 앉아야만 했다. 제니퍼는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무릎 위에 올렸다. 그녀에게서 나는 좋은 향기가 어떤 종류의 향일까 생각하며 필립은 그녀의 노트북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녀가 습관처럼 바르던 핸드크림 냄새일까, 아니면 평소에 뿌리는 향수 냄새일까.


“이거에요.”


제니퍼가 노트북을 넘겨주며 말했다. 화면 가득 그녀의 포트폴리오가 떠올라 있었다.


“이제 인턴 기간이 끝나가서 다른 회사도 좀 알아보려는데 이게 좀 걱정돼서요. 필립 씨는 저보다 경험도 많으시니까 이런 거 잘 보실 거 아녜요. 좀 봐주세요.”
필립은 신중하게 포트폴리오를 살펴봤다. 딱히 고쳐야 할 것도 조언해 줄 만한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잘 만드셨네요. 오히려 제 포트폴리오를 봐주셔야 할 거 같은데요?”
“하하. 그런가요? 이거 왠지 으쓱해지는데요?”
“정말이에요. 지금 이대로도 좋아요.”


제니퍼가 만족한 듯 함박웃음을 지었다. 좁은 공간에 앉아 있기가 어색해진 필립은 괜히 신기한 듯 주변을 둘러봤다.


“이 안이 이렇게 생겼었군요.”
“형편없이 좁죠? 제가 이렇게 비좁은 곳에서 일한답니다. 일 끝나고 스트레칭이라도 안 하면 정말 몸이 굳어버릴 거 같아요.”


제니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푸념했다. 그리고 선반에 놓여 있던 물병을 집더니 뚜껑을 열어 서너 모금 삼켰다. 그녀의 까무잡잡하고 가느다란 목덜미에 보송보송한 잔털이 시선을 붙잡았다.


“뭐 마시고 싶은 거 있어요? 내가 살게요.”


제니퍼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녀가 일어나자 필립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녀의 허리에 닿았다. 크롭톱을 입고 있어서 잘록한 허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배꼽에는 반짝이는 큐빅이 달린 앙증맞은 피어싱이 달려 있었다. 필립은 시계를 보는 척하며 시선을 피했다. 곧 기차가 도착할 시간이었다.


“아니에요. 이제 곧 가봐야죠.”
“봐주셔서 고마워요. 다음엔 제가 꼭 커피라도 살게요.”
“별것도 아닌데요 뭐. 괜찮아요.”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필립은 제니퍼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맹세코 이성적인 감정은 없다고 자신했다. 그녀는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같은 한국인이자 같은 직종에서 일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단지 자립심이 강하고 밝은 그녀의 성격이 퇴근길의 필립에게 활기를 줄 뿐이었다. 늘 웃음기를 머금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필립의 사소한 말에도 ‘푸하하’ 하고 쉽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럴 때마다 약한 바람에도 폴폴 날아가는 민들레 홀씨가 떠올랐다. 집의 뒷마당 잔디에 피어 있는 민들레를 볼 때마다 필립은 발로 툭 건드려서 홀씨를 몽땅 날려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었다. 그 싱그럽고 터질 것 같은 에너지의 파장에 자신이 영향을 받는 거라고 생각했다. 제니퍼를 상대하면서 필립은 잊고 있었던 자신의 20대 시절을 자주 떠올렸다.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되어서 자신만의 브랜드를 갖겠다는 야심으로 가득 찼던 지난날의 자신이 생각났다. 먹고 사는 문제와 결혼과 이혼이라는 인생의 대소사를 겪어내면서 세월의 갈피에 닳아 퇴색된 자신의 야망이 불현듯 떠올랐다. 필립은 잊고 있었던 삶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고작 그런 것으로 삶의 영감을 받는다는 사실이 우스웠지만 정말 그랬다. 아침에 눈을 떠서 출근 준비를 하는 일이 어느덧 필립에게는 설레는 일이 되었다. 신경 써서 옷을 고르고 머리를 손질했다. 집을 나서는 발걸음은 가벼웠고 그랜드센트럴역에 내려 제니퍼가 일하는 가판대 앞을 지날 때면 ‘혹시 출근시간에도 그녀가 자리를 지키고 있지 않을까’ 신경 쓰였다. 퇴근길에는 오히려 더 활기에 차서 제니퍼가 일하는 가판대로 한달음에 달려갔고 그곳에서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가끔은 일곱 시 기차를 놓치고 여덟 시 기차를 탈 때도 있었다. 두 달이 조금 지났을 무렵 미영은 더 이상 신문을 사 올 필요가 없다고 했다.

“왜?”
“좀 쉬려구. 영어가 느는 것 같지도 않구.”
“원래 영어라는 게 빨리 늘 수가 없어. 당신이 매일 매일 신문을 읽고 단어를 공부하는 행위가 가랑비에 옷 젖듯이 나중에 보면 엄청난 차이가 있을 거라구.”
“아냐. 좀 쉴래.”
“무슨 일 있어?”
필립은 미영의 기색을 살피며 물었다. 요즘 들어 말수가 적어진 것이 괜히 마음에 걸렸다.
“아니. 왜?”
“별일 없는 거지?”
“응. 왜 자꾸 물어?”
“아냐. 별일 없으면 됐어.”


필립은 미영이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는다는 것에 안도했다.

동석에게 메일이 온 것은 뜻밖이었다. 가볍게 안부를 묻는 것으로 시작한 그의 메일은 학회 세미나로 뉴욕에 오게 되었고 시간이 된다면-미영만 괜찮다면- 점심을 같이 하지 않겠냐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미영은 동석의 메일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의도를 알 수가 없는 여섯 줄짜리 간단한 메일이었다. 동석은 미영과 삼 년 동안 사귀던 사이였지만 결혼에 대해서만큼은 미온적이었다. 결국 미영이 먼저 이별을 통보했고 동석은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아침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사연이었다. 미영이 결혼을 해서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는 소식은 서로 아는 지인들을 통해 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동석은 뉴욕이라는 특수한 공간에 와서 과거의 애인에게서조차 향수를 느끼며 일시적으로 감상적인 마음에 빠져든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이유로 동석의 메일은 아무런 의도가 없는 것일 수 있다고 미영은 생각했다.
‘아무런 의도가 없는 만남이 무슨 의미가 있지? 막상 만나면 무슨 얘길 하지?’
설령 의도가 있다면 어쩔 것인가. 동석의 의도가 무엇이든 미영은 그것에 순순히 따라주지 않을 것이다. 그저 동석 앞에서 미국 생활에 잘 적응하며 잘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자신을 아는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낯선 나라에서 이렇게 잘 지내고 있다고.

두 통의 간단한 이메일이 더 오가고 미영은 동석과 약속을 잡았다. 금요일 오후 한 시, 브라이언파크 정문에서 만나기로 했다. 필립에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필립이 퇴근하기 전까지 집으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미영은 간만에 화장을 하고 신경 써서 옷을 골랐다. 스타벅스에서 만났던 그 여자들처럼 공들여 머리를 하고 결혼 선물로 받았던 명품백도 들었다. 이제 더 이상 사 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도 필립은 계속 신문을 사 왔다. 시위라도 하는 건가? 계속해서 쌓여만 가는 신문을 내려다보며 미영은 생각했다.


“왜 자꾸 신문을 사 오는 거야? 필요 없다고 했잖아.”


미영이 물었을 때 필립은,


“당신 신문 사다주면서 읽어보니까 읽을 만하더라고. 나한테도 도움도 되고.”


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필립이 퇴근길에 들고 오는 신문은 몇 장 넘겨보지도 않은 빳빳한 새 신문 그대로였다. 미영은 제일 위에 놓인 신문을 둘둘 말아 가방 속에 넣고 집을 나섰다.

공원 입구에 서 있는 동석을 한 눈에 알아본 미영은 그의 변한 모습에 약간 당황했다. 그는 몇 년 전보다 말랐고 피곤해보였는데 시차 적응 때문인지 낯선 곳에서 특유의 예민한 기질이 발동해서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폴로 반팔 셔츠와 바지 단이 얌전하게 떨어지는 청바지 차림의 그는 핸드폰 화면을 연신 들여다보며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무테안경 너머로 번잡한 길거리를 둘러볼 때는 미간에 주름이 깊게 잡혔다. 세상의 이치를 너무나 잘 알게 되어서 모든 것에 자신만의 기준이 확고하게 잡힌 깐깐하고 예민한 중년의 남자. 미영이 몇 년 만에 만난 동석의 이미지는 그랬다.


“오랜만이네! 넌 그대로다.”


미영은 자신의 얼굴을 꼼꼼히 살피는 동석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그대로긴. 잘 지냈어?”
“응. 나야 똑같지 뭐. 식사 안 했지? 어디 아는 데 있어?”
“스테이크 먹을래?”
“좋아. 어디든 가자.”


다섯 블록 떨어진 레스토랑으로 걸어가는 동안 동석은 일주일 일정으로 뉴욕에 왔다는 것과 이번이 두 번째 뉴욕 방문이라는 것, 한국 사람들이 가진 환상에 비해 뉴욕이라는 도시는 여러 가지 면에서 한참 뒤떨어진 곳이라는 것 등을 떠들었다. 미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그가 하는 말을 들었다.


“남편은 뭐 하는 사람이야?”
“디자이너야. 인테리어.”
“남편이 인테리어 디자이너라서 편하겠다. 여자들 집 꾸미는 거 좋아하잖아. 너네 집은 잡지에 나오는 그런 집처럼 꾸몄겠어. 안 그래?”
“그렇지도 않아. 그냥 평범해.”


미영은 동석이 필립에 대해서 떠드는 것이 불편했다.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한때 친했던 친구 대하듯이 구는 게 어쩐지 언짢았다. 시간이 흐른 지금이야 웃으면서 서로 얼굴을 마주할 수 있지만 그때를 기억하면 여전히 괴롭고 힘들어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동석의 메일을 그냥 무시했어야 했나. 미영은 약간 후회했다. 곧 서버가 다가와 메뉴판을 주면서 뭘 마시겠냐고 물었다.


“진토닉 한잔할래?”


동석이 물었다.


“그래.”


서버는 곧 두 잔의 진토닉을 가지고 왔고 맛이 괜찮은지 동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때? 여기서 사는 거?”
“좋아. 여유롭고.”
“뉴저지는 그래도 미국 같은 분위기가 나겠어. 어휴. 여긴 너무 정신없고 지저분해. 약간의 자기 암시가 있어야지 여기 살 수 있을 거 같아. 그래. 여기가 뉴욕이다. 여긴 세계 경제의 중심이다. 이 정도 지저분함과 불편함은 감수해야 한다. 뉴욕이니까.”
동석은 자신의 말이 꽤 재치있다고 생각했는지 피식거렸다. 미영은 대답 없이 진토닉을 넘겼다.
“그래서 그 세미나는 잘 마친 거야?”


동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스테이크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형식적인 거지 뭐. 세상 돌아가는 게 그렇잖아. 새로운 거 하나도 없고 남들 다 하니까 해야 하는 거. 구색 맞추기.”
“그러는 너는 남들 다 하는 결혼은 왜 안 하니?”


미영이 농담처럼 불쑥 물었다.


“그러게.”


미영은 힐끔힐끔 시간을 확인했다. 식사가 끝나면 바로 일어설 생각이었다. 중년을 향해가는 동석은 예민하고 냉소적인 기질이 더 심해지면서 대화 상대를 기운 빠지고 지치게 하는 경향이 있었다.


“학기 끝나면 학생들이 교수 평가하잖아. 너도 그거 확인하니?”
“가끔. 왜?”
“주로 어때? 내가 교수라면 그거 엄청 신경 쓰일 거 같거든.”
“난 그런 거 신경 안 써. 주관적인 거잖아. 꼭 성적 잘 안 나온 애들이 그런 건 잘하더라.”

계산을 마치고 일어나면서 동석이 미영의 가방을 힐끔거렸다. 돌돌 접어놓은 신문이 약간 삐져나와 있었다.


“너 신문도 읽어?”
“어. 그냥 뭐.”
“뉴욕타임즈네?”
의외라는 듯 동석이 미영을 쳐다봤다.
“신문이라도 안 읽으면 뇌가 멈출 것 같아서.”
미영이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이야. 그래도 멋진데? 뉴욕타임즈를 읽는 여성. 하긴. 넌 한국 가요도 안 들었잖아.”
“내가 그랬어?”
“기억 안 나? 내 친구 민식이는 가끔 너 안부 물으면서 그 얘길 아직도 해.”
“어떤 거?”
“그 한국 가요 안 듣는 네 전 여친은 잘살고 있냐고 말야.”


미영은 그 말이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민식이라면 동석의 가장 친한 친구로 그와 사귀는 동안 여러 번 같이 술자리를 한 적이 있었다. 가요가 시끄럽게 흘러나오던 어느 술집에서 미영이 시끄럽다고 인상을 쓰자, “왜요, 좋잖아요.” 라던 민식의 불쾌해진 얼굴이 떠올랐다. 가요를 즐겨 듣지 않는다는 미영의 말에 민식은 그럼 뭐 팝송이라도 듣냐며 핀잔하는 투로 대꾸했던 일화가 떠올랐다.


“고맙네. 내 안부도 물어주고.”


미영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레스토랑을 나와 잠시 걷다가 동석이 커피 한잔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별로 내키진 않았지만 밥값을 동석이 냈으니 커피라도 사야겠다는 생각에 가까운 스타벅스로 들어갔다. 미영은 미아라는 이름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주문했다.


“미아?”


아메리카노를 받아든 동석이 컵 홀더에 적힌 주문 이름을 보고 중얼거렸다.


“왜?”
“너 영어 이름이 미아야?”
“그냥 스타벅스용 이름이야. 여긴 주문할 때 이름을 묻잖아. 그래서 하나 만들었어.”
“이름 좋은데? 영어도 못하는데 제시카나 레이첼 이런 이름보단 낫잖아.”


동석이 실실 웃으며 농담처럼 말했지만 미영은 그 말이 당황스러웠다. 영어를 못하는 건 사실이지만 동석의 말에서 무시하는 뉘앙스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무슨 뜻이야?”
“뭐가?”
“너 이름 말야. 무슨 뜻이 있어?”
“영어 이름에 무슨 뜻이 있어. 그냥 부르기 쉬운 이름이지.”


동석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창밖의 풍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 사람들 말야. 도대체 뭐가 특별하다고 이 앞에서 사진을 찍는 걸까?”


동석이 빈정대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그러게.”


지하철역 앞에서 동석이 어색하게 악수를 건넸다. 맞잡아주기를 기다리며 허공에 불쑥 떠 있는 것 같은 동석의 손을 가만히 내려 보다가 힘없이 손을 내밀어 잡아주었다. 동석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곧 맞잡은 손이 풀리고 미영이 먼저 뒤를 돌아섰다. 미영은 망설임 없이 지하철역으로 사라졌다.


그랜드센트럴역에 도착한 미영은 가판대 앞에 서서 신문들을 바라봤다. 뉴욕타임즈 외에도 다양한 신문이 진열되어있었다. 신문을 사갈까 고민하던 미영의 시선을 붙잡은 건 I LOVE N.Y이라는 글씨가 적힌 머그컵이었다. 오목한 컵받침과 세트인 빨간색 머그컵이었다. 무심결에 머그컵을 만지작거리던 미영은 자신을 바라보는 점원의 시선과 마주쳤다. 젊고 예쁘장한 아시아계 점원이었다. 포니테일 스타일로 머리를 질끈 묶고 크롭톱에 레깅스 차림인 점원에게서 젊고 활기찬 기운이 느껴졌다. 점원은 미영을 향해 반사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무해하고 호의적인 그런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