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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단편소설] 루시, 너에게서 빛이 나
작성일
2022.12.13

단편소설 부문 우수상


루시, 너에게서 빛이 나

원 선 미 (헝가리)


주저 니니(아줌마)가 나를 찾아 왔다. 의외였다.
집시 아줌마가 우리 집 벨을 누르는 경우는 담밖에 버리려고 내놓은 전자제품이나 옷가지들을 가져가도 되느냐고 물을 때가 아니고는 벨을 누를 일이 없다. 무엇보다 할 얘기가 있다며 담장 안으로 들어오는 일은 이사 와서 15년이 넘었지만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주저 니니는 다른 집시 가정들과는 달리 이웃 헝가리 분들과 잘 지내고 평도 좋은 편이라서 나는 흔쾌히 앞 베란다에 있는 티 테이블로 안내를 했다. 나는 밖의 길이 다 보이는 앞 베란다의 그네 의자에 앉아서 저녁 노을 보는 것을 즐겼고 가끔 주저 니니가 대형 마트 비닐 가방을 여러 개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그럴 때면 돌아가신 큰이모가 떠오르곤 했다. 큰이모의 저녁 퇴근길이 ‘저렇게 지치고 발목에는 큰 쇳덩이가 묶여 있는 것처럼 다리를 들어 올리지도 못하고 질질 끌면서 걸었겠구나’ 싶으면서 가슴이 시려오곤 했었다.
언제였던가. 우리 집 강아지 미미가 우리 집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열린 문으로 집을 나가서는 안 돌아와 딸이랑 “미미~” “미미야~” 온 동네 찾아 헤맬 때 7살 루시가 3개월 강아지 미미를 안고 우리 집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루시는 자주 우리 집에 와서 미미랑 놀았다.
그런데 오늘 오후 루시의 할머니 주저 니니가 나를 찾아온 것이다. 요점은 이랬다.
주저 니니는 16살에 사촌 오빠와의 사이에서 첫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아팠단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폐아다. 그 자폐아 아들이 5살 되던 해에 어느 날 남편이 아들을 데리고 나가서 어딘가 시설에 맡기고 왔다고 했다. 거기가 어딘지 알 수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18살에 루시의 엄마 자스민을 낳았고, 21살 되던 해에 셋째 아들을 낳았는데 5살에 교통사고로 죽어서 자신의 아이는 루시의 엄마 자스민 하나라고 한다. 첫아들이 두 살쯤 되었을 때 정상이 아닌 것을 안 남편이 불같이 화를 내고는 주저 니니의 여동생을 두 번째 아내로 맞아들여 6명의 아이를 낳았단다. 집시들은 아내가 둘인 경우를 종종 보았고 성경에 나오는 야곱과 레아, 라헬처럼 자매를 아내로 두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너무 놀라서 믿어지지 않았었다. 21세기에 어떻게 자매가 한 남편이랑 살지? 이래서 헝가리 사람들이 집시들을 더 무시하고 업신여기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저 니니도 자매가 한 남편과 같이 살면서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이루었는데 9명의 자녀 중에서 3명만 정상이다. 두 번째 부인인 어니끄의 6명 자녀 중 4명은 지능이 낮아서 특수학교에 다녔고, 2명은 일반학교에 다녔단다. 과거형인 것을 보면 다니다 그만둔 것이 분명하다.
주저 니니는 자신에게는 딸 자스민 하나만 남았는데 그 딸이 초등학교 6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15살에 손녀 루시를 낳았다고 한다. 그런데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지금까지는 자신이 루시를 키웠고 자스민은 어쩌다 한 번씩 집에 들렀는데 그마저도 얼마 전에 마약으로 감옥에 갔다고 한다.
자기가 보니 루시는 똑똑한데 어떻게 하면 루시가 학교를 졸업할 수 있는지 물어본다. 주저 니니의 질문에 당황했다. 어떻게 하면 학교를 졸업할 수 있냐고? 매일 학교에 출석하면 졸업을 하지. 그 당연한 답을 나에게 묻는 것은 아닐 것이다.
“주저 니니, 주저 니니는 루시가 8학년 졸업을 하기를 바라는 거야?”
“아니 아니, 미미 딸처럼 졸업을 해야지.”
아, 김나지움 졸업을 말씀하시는 거구나.
우리 동네 사람들은 나를 그냥 미미라고 부른다. 내가 내 이름이 지혜라고 말을 하지만 금방 잊어버리고 기억하기 쉬운 우리 집 개 미미의 이름으로.
“주저 니니, 정말로 루시가 김나지움 졸업하기를 원해요?”
“응, 정말, 정말 김나지움을 졸업할 수 있을까?”
“매일 매일 학교에 출석하면 졸업하지요.”
당연한 대답을 하고 주저 니니를 응시했다. 지금까지 내가 들은 집시에 대한 정보는 다 부정적인 것들이었다. 그리고 많은 부분을 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잘 키우는 집시 가정도 많고, 성실하게 직장생활을 잘하는 집시도 많고, 어느 지방의 시장은 본인이 집시고 집시들의 환경과 생활을 개선시키고자 끊임없이 노력하시는 분도 있다. 남편 친구 마틴은 집시지만 바이올린 연주자로 활발한 활동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시에 대한 인식은 아직도 좋지 않다. 거짓말을 잘하고, 도둑질을 하고, 들켜도 절대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화를 잘 내고 폭력적이라는 것이다.
“미미, 나는 초등학교 3학년도 못 마쳤어. 자스민은 계속 남자친구랑 밖에서 살고, 루시를 학교에 보내고 데려오고 공부도 도와줘야 하는데 할 사람이 없어. 우리 집에서 일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기 때문에 나는 일을 해야 하거든.”
주저 니니 남편은 가끔 헝가리 사람 집의 정원 일을 해주면서 돈을 벌었지만 대부분은 집에 있었다. 여동생이면서 두 번째 부인인 어니끄는 내가 봐도 건강해 보이지 않았다. 뚱뚱한 몸은 그냥 비만이라기보다는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생긴 비만으로 보였고, 지능도 좀 낮은 편이어서 아이들 챙기는 것만으로도 벅차 보였다.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은 주저 니니였다.
그러니까 나보고 루시를 챙겨달라는 것인데….
“주저 니니, 학교에서 5시까지 봐주고, 오후에는 숙제도 학교에서 선생님이 다 도와주니까 학교에 5시까지 놔두면 걱정 안 해도 돼. 나도 헝가리어를 못 할 때 제니를 학교에 5시까지 놔뒀는데 선생님이 다 도와주셨어.”
난 확신이 안 섰다. 주저 니니의 말이 진심인지 그냥 순간적인 바람인지. 섣불리 그러자고 했다가 매일 베이비시터가 되어서 그 집 애들을 다 돌봐줘야 한다면 심란해지기 때문이다.
“루시가 네가 가르쳐 줬다면서 수학을 5점(A)을 받아왔어.”
며칠 전 루시에게 접시 10개를 꺼내 초콜릿을 가지고 구구단, 묶음의 원리를 가르쳐 줬었다. 이곳은 2학년부터 구구단을 하지만 루시는 3학년인데도 귀에 익은 몇 개만 알고 있었다. 그래서 구구단의 묶음 원리를 가르쳐 주니 바로 이해했다.
주저 니니는 손녀가 받아온 수학 5점이 너무 자랑스럽고 기특해서 이 손녀만은 꼭 학교를 잘 보내서 졸업을 시키고 싶은 마음이 들었나 보다. 아니 자신의 살아온 길을 똑같이 살아가는 딸을 보면서 진저리가 쳐졌는지도 모르겠다.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속임수야? 진짜야? 무슨 의도지?
그때 주저 니니가 작은 소리로 말을 한다.
“루시는 좋은 남편이랑 살게 하고 싶어. 때리지도 않고 욕도 안 하는 남편이랑.”
그 순간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그거면 충분했다. 한국에서 대학원에 다닐 때 매 맞는 여성들을 위한 쉼터와 여성의 전화에서 봉사를 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보았던 여성들의 신체적, 정신적 고통이 선명하게 떠오르고, 그 굴레는 혼자의 힘으로는 벗어나기 힘든 것이었다. 굴레였다. 더 지독한 것은 이 굴레가 세습되기도 한다는 거였다.
지금 주저 니니는 그 끊어내기 힘든 굴레에서 루시를 구출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내일 답을 주겠다고 하고 일단은 주저 니니를 돌려보냈다. 남편은 해보고 싶으면 해보라는데 일 년을 넘기기 쉽지 않을 것 같다고 했고, 한국에서 대학에 다니는 딸은 해보라고 한다.
“엄마, 해봐. 도와줘. 주저 니니 말대로 고등학교 졸업까지로. 하지만 9년이면 길긴 하지. 하다가 그만둔다고 해도 옆에서 누군가가 잘 챙겨주면 8학년은 졸업할 거 아냐. 엄마, 8학년만 졸업해도 다행이니까 엄마는 일단 8학년 졸업을 목표로 해봐.”
그래. 해보자. 천사처럼 예쁜 루시가 8학년은 졸업을 해야지. 어쩌면 주저 니니가 바라는 대로 김나지움도 졸업할지 모르잖아.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만약 주저 니니가 루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하기를 바란다고 했다면 난 거절했을 것이다. 그런데 때리지 않고 폭력적인 남편을 안 만나게 하고 싶다고 하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고등학교 졸업하면 안 때리고 젠틀한 남편을 만난다는 보장은 없다. 대학 아니라 대학원을 나온 사람도 아내를 때리고 업신여기는 남편도 있지 않은가. 또한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고 해서 폭력 남편을 만나는 것 또한 절대 아니다.
주저 니니의 말을 나는 이렇게 이해했다. 루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그래도 고등학교를 졸업한 남편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와 루시가 고등학교 졸업장으로 취직이라도 한다면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남편이 필요해서 결혼하지는 않을 거라는 기대. 그리고 어쩌면 루시가 자신을 보호할 능력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기대. 오죽 답답하면 나에게 찾아 왔을까. 그래 해보자.
‘만약 중간에 임신을 한다면… 상관없지. 고등학교 졸업이라고 한 거니까 아이를 낳아도 일단 고등학교 졸업을 목표로 하자’ 그리 맘을 먹었다.
다음 날 오후에 주저 니니를 만나서 도와주겠다고 이야기하면서 한 가지 절대로 결석은 안 된다고 다짐을 받았다. 출석만 해도 졸업은 가능하니까.
아침에는 주저 니니가 루시를 8시 전에 학교에 데려다주고 출근을 했다. 나는 오후 4시에 미미를 데리고 학교에 갔다. 가끔 내가 외출을 하거나 일이 생길 때는 전날 미리 루시에게 이야기했고, 옆집 안나 할머니에게 부탁을 했다. 루시는 안나 할머니가 자기를 데리러 오는 날은 싫다는 표현을 표정으로 했는데, 그건 안나 할머니랑 오는 날은 아이스크림 집을 안 들르고 빠른 길로 바로 집으로 오기 때문이었다.
3학년 루시는 다른 아이들보다 체구가 작았다. 긴 까만 머리에 다른 집시 아이들과는 달리 하얀 피부의 루시는 인형처럼 예뻤다. 주저 니니는 매일 루시의 긴 머리를 색색의 리본이랑 쫑쫑 땋고, 중국가게에서 산 유치한 공주 치마를 입혀서 학교에 보냈다. 오후에 학교에서 기다리면 루시는 나를 보고 환히 웃으면서 뛰어와서 안겼다. 3학년인데 어째 체구는 1학년처럼 작다. 그 작은 몸이 안길 때면 가슴이 뭉클했다. 그리고 주저 니니가 머뭇머뭇 작은 소리로 했던 말이 떠오르곤 했다.
“루시는 좋은 남편이랑 살게 하고 싶어. 때리지도 않고 욕도 안 하는 남편이랑.”
‘그래야지, 이 작고 작은 아이는 당연히 그래야지. 아니, 사람이기 때문에 그래야 하는 거야’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우리는 집으로 올 때는 길을 돌아 케이크 집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그 집은 이 지역에서 백 년이 넘은 오래된 케이크 집으로 제법 유명한 곳인데 어린 루시에게 하루 중 기분 좋은 일 하나를 선물로 주기 위해 매일 들르는 곳이 되었다.
콘 위에 아이스크림 한 덩이씩 받아서는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혀로 핥으며 루시는 재잘재잘 그날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 해주었다. 비가 오는 날에는 안에 들어가서 나는 커피를, 루시는 핫초코를 케이크 한 조각과 먹었다. 학교에서 화가 났던 일,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한 남자아이 때문에 모두가 웃었다는 이야기, 내가 청소하다 찾은 한국에서 사 온 과일 향 나는 사인펜을 루시에게 주었는데 그것 때문에 집에서 삼촌이랑 동생들이랑 싸움이 났던 일. 결국 그 사인펜은 동생이 모두 망가트려서 밤새 울었다는 이야기 등.
동양 중년 여자랑 집시 여자아이가 같이 있는 게 신기한 헝가리 아이들은 자꾸만 힐끔힐끔 쳐다보고, 어떤 아이는 아예 우리 옆에 서서는 빤히 쳐다보곤 했다. 처음에는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나 루시를 힐끗힐끗 쳐다보는 시선이 너무 불편했지만 루시가,
“미미, 너 때문에 사람들이 자꾸만 쳐다보잖아. 정말 신경 쓰여. 그래도 내가 미미 좋아하니까 괜찮아.” 하고 말하는 순간 웃음이 터졌다.
“고맙다. 나랑 같이 있어서 사람들이 자꾸 쳐다봐서 미안해.”
우린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난 당연히 루시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본다고 생각했는데 루시는 자기는 헝가리 사람이고 동양여자인 나 때문에 사람들이 자꾸 본다고 생각을 한 것이 너무 웃겼다.
그러고 보니 우린 둘 다 헝가리에서 이방인이었다. 난 루시에게 무언가를 선물로 주는 것을 극도로 조심했다. 루시가 사는 집에는 루시 말고도 많은 식구들이 있고 내가 주는 선물이 싸움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과일 향 나는 별것도 아닌 사인펜처럼 말이다. 다들 삶이 힘들고 팍팍하니 빌미 거리만 보이면 그걸 이유로 싸움이 되고 폭언이 되고 한풀이가 된다.
매일 머릿속에서 어떻게 하면 루시가 학교를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다닐 수 있게 할까 생각하고 생각하던 어느 날, 학교에 Zene Iskola(음악학교) 안내문이 붙었다. 새 학기 신입생 오디션에 관한 안내문이었다. 집에 오자마자 딸이 쓰던 물건을 담아 놓은 상자를 다 뒤져서 플루트를 찾았다. 그리고 루시에게 보여주었다.
“루시, 이거 알지? 제니가 3학년 때부터 배우면서 사용하던 거야. 4학년부터 제네이쉬꼴라에서 플루트를 배우면 어때?”
좋아할 줄 알았는데 루시는 시큰둥하다. 루시의 반응에 김이 빠지고 신청도 못 하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며칠 뒤에 루시가 속마음을 말한다.
“미미, 나는 플루트를 할 줄 몰라. 어떻게 소리를 내는지도 모르고, 애들이 이상한 소리를 낸다고 놀리면 어떻게 해, 제니는 잘했지?”
무서웠구나. 잘못해서 놀림 받을까 봐, 그리고 제니처럼 잘하지 못하면 내가 실망할까 봐.
“제니도 어떻게 하는지 몰라서 처음에는 이상한 ‘삑삑’ 소리만 냈지. 근데 선생님이 가르쳐주시는 대로 하면 음악이 나와. 이 플루트 안에서, 네가 만들어 내는 거지.”
“진짜?”
“응. 근데 나는 도와줄 수 없어. 모르거든. 그러니까 음악학교에 가서 배워야 해.”
“미미가 나 데리러 올 거야?”
“그럼, 끝나는 시간에 데리러 가지.”
그렇게 루시는 4학년 때부터 학교에서 플루트를 배우기 시작했고 플롯을 하면서 신기하게도 자신감이 생기고 자존감도 높아졌다. 루시도 철이 들면서부터 헝가리 아이들 속에서 집시라는 열등감이 있었고 그 열등감 때문에 어느 날은 풀이 죽고, 어느 날은 불같이 화를 내곤 했는데 플루트를 배우면서 자기의 손가락과 입술로 멜로디를 만들어내는 놀라운 경험을 한 것이다.
4학년을 마치는 종업식에서 루시는 4명의 학생들과 함께 헝가리 국가를 연주했다. 플루트를 배운지 1년이지만 고운 소리로 연주하는 루시는 작은 새가 되어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았다. 놀라운 소리가 루시의 입과 손끝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루시랑 한 약속이 있었다. 한 학년을 잘 마치면 여름 캠프를 보내주겠다고 했다.
헝가리 아이들은 두 달의 여름방학 동안 다양한 캠프에 참여한다. 그런데 그 비용이 생각보다 비싸다. 루시는 내가 캠프 하나를 보내주겠다고 하자 고민하더니 수영 캠프로 정했고, 이 지역 유일한 수영장에 등록했다. 캠프는 일주일 동안 진행이 되었고, 루시는 그곳에서 친구를 사귀었다. 우리 옆집의 안나 할머니 손녀 릴리였다.
릴리는 부다페스트에 사는데 얼마 전에 부모가 이혼을 하고 방학 동안 할머니 집에서 지내기 위해 온 것이다. 일주일 수영 캠프를 같이 하면서 친구가 없던 둘이 친구가 되었고, 여름방학 두 달 동안 둘은 매일 붙어 다니며 놀았다.
루시에게 단짝 친구가 생긴 것이다. 오전에 안나 할머니 집에서 놀면 오후에는 우리 집으로 와서 TV를 보거나 종이접기를 가르쳐 달라고 하고는, 둘이 머리를 맞대고 까르르까르르 웃으면서 꽃도 접고, 새도 접으면서 놀았다. 우연히 딸이 간직했던 소녀시대, 카라, 2PM 뮤직비디오를 보더니 두 소녀는 한국 아이돌의 팬이 되었고, 많은 시간을 한국 아이돌 가수의 춤을 연습하면서 보냈다.
두 달의 방학은 빠르게 지나갔고, 릴리는 엄마에게로 돌아갔다. 5학년이 된 루시는 생각보다 학교에 잘 갔다. 다행히 루시의 집시 친구들도 학교를 그만둔 아이들이 없었고 플루트를 배우는 기쁨이 점점 커지는 루시는 오후면 우리 집에 꼭 들러서 연습했다.
어느 날, 루시가 플루트 연습을 하는데 대학 졸업을 앞둔 딸이 전화를 했다.
“잘하지? 너보다 잘한다. 이제 2년 되어 가는데 아주 잘해.”
딸이 까르르 웃으면서 “잘하기는 잘하네. 엄마가 루시한테 신경 쓰느라 나한테 매일매일 카톡하고 어디냐, 빨리 들어가라, 누구 만나냐 안 해서 좋아.”
“헐. 딸, 항상 조심해야지. 졸업 준비는 잘하고? 엄마가 졸업식에 갈까 하는데.”
“아냐, 엄마, 오지 마, 누가 요즘 대학 졸업식에 오냐? 그리고 졸업식 미룰 거야. 수료로 남겨 두고 일 년 정도 헝가리에서 인턴하면서 취업 준비할까 봐.”
그리고 정말 딸이 왔다. 봄이 오는 3월에. 딸이 오니 남편도, 루시도, 나도 우리 모두 활기가 넘쳤다. 제니랑 루시랑 남편은 저녁이면 보드게임을 자주 했다. 루시를 위한 제니의 배려였다. 웃음소리와 ‘안 돼, 악’ 하는 소리가 온 집안에 가득했고, 루시는 평범한 가정의 모습을 경험할 수 있었다.
“제니, 넌 왜 남편이 없어?”
“응? 난 결혼을 안 했으니까.”
“우리 엄마는 15살에 나를 낳았대.”
“그래?”
“근데 왜 제니는 결혼 안 해? 남자친구가 없어?”
딸이 제니의 질문을 받더니 소리 내서 웃는다.
“루시, 난 결혼은 아주 늦게 하고 싶어. 지금 일하는 게 좋거든. 재밌고.”
루시는 제니의 말이 아직은 이해가 안 가는지 가만히 쳐다본다.
“루시, 잠깐 기다려”
갑자기 딸이 일어서더니 자기 방으로 가서는 한 아름 앨범을 들고 나왔다.
“루시, 내 사진 같이 볼래?”
둘이 머리를 맞대고 제니의 앨범을 보기 시작한다.
제니 앨범의 첫 사진은 우리 결혼사진이다. 그리고 큰 콩 같은 초음파 사진이 있고, 신생아 제니의 사진, 백일 사진, 돌 사진,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한 사진을 한 장 한 장 보여주면서 제니가 루시에게 설명을 한다. 루시는 궁금한 것을 질문하면서 같이 앨범 10여 개를 다 본 뒤에 제니가 루시에게 말을 한다.
“난, 내가 엄마가 되어서 내 아이랑 행복할 수 있을 때 결혼하고 싶어. 지금은 내가 일하는 게 더 좋아서 만약 지금 결혼을 하면 남편이랑 많이 싸울 수도 있고, 아이가 생기면 예쁘고 감사하고 좋기도 하겠지만 내가 일을 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속상해서 아이한테 자꾸 화를 낼지도 몰라. 지금은 결혼하고 싶지 않아.”
“제니는 벌써 나이가 많잖아.”
그 말에 딸이 큰소리로 웃으면서
“난 이제 겨우 24살이야.” 한다.
내가 대학 졸업할 때는 결혼 적령기라는 것이 23~26살이었다. 지금은 너무 많이 변했다. 그런데 집시 사회는 크게 변하지 않았나 보다. 24살의 우리 딸이 너무 나이가 많다고 생각이 되니 말이다.
“루시, 공부하는 게 재밌고, 지금은 대학을 졸업했으니까 일을 해서 내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데, 일하는 게 너무 좋아. 월급을 받으면 뭘 할까 생각하고, 휴가 때 어디로 여행 갈까 생각하는 게 좋거든. 그리고 일하면서 또 여행하면서 새로운 좋은 친구를 많이 만나는 게 난 좋아.”
루시는 저 작은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할까. 자기 주변에 있는 어른들과는 너무 다른 생각을 말하는 제니를 가만히 쳐다본다. 딸이 1년을 머물다가 취직이 되어 한국으로 돌아갈 때 자기가 사용하던 스마트폰을 루시에게 선물로 주고 갔다. 그리고 약속을 했다. 만약 8학년 졸업을 하게 된다면 졸업 선물로 새 핸드폰을 사주겠다고.
그리고 루시는 그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게 보였다.
6학년을 마치면서 나는 더 이상 루시를 데리러 학교로 가지 않아도 되었고, 루시가 학교에서 우리 집으로 와서는 숙제를 하거나 한국 드라마를 보다가 집으로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 나한테도 한국말 가르쳐 줘.”
나를 미미, 니니라고 부르던 루시가 지금은 엄마라고 부른다. 제니가 나를 엄마라고 부르자 루시가 물었다. “엄마가 미미 이름이야?”
그 말에 딸은 배를 잡고 웃더니 “루시, 미미는 우리 집 개 이름이고, 엄마 이름은 지혜야. 그리고 헝가리 말로 어녀(Anya)가 한국말로 엄마야.”
그 말을 들은 루시는 그때부터 미미가 아니라 엄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사실 그때 알았어야 했다. 루시도 엄마가 그립고 엄마가 필요했다는 것을. 난 그때는 미처 몰랐다.
“왜?”
“그냥. 배우고 싶어.”
“이제 제니랑 한국말로 루시 흉 못 보겠네. 루시가 다 알아들을 거 아냐?”
내 말에 루시가 낄낄낄 웃는다. 나는 집에서 한글을 가르치지 않고 내가 한국어를 가르치는 세종학당에 루시를 데리고 갔다.
“오늘은 내 딸이 같이 왔어요. 베이비시터를 못 구했거든.”
내 말에 학생들이 웃었다. 아닌 걸 알지만 다들 어린 루시에게 친절했고 루시는 헝가리 여학생, 남학생, 베트남 남학생, 몽골 여학생들과 함께 한국어를 배웠다. 일주일에 한 시간씩. 루시는 한국 회사에 취업하려고, 드라마를 한국어로 보고 싶어서, 한국으로 여행가고 싶어서 등 다양한 이유로 한국어를 배우러 오는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는 시간을 즐거워했다.
그렇게 루시는 8학년 졸업을 했고, 주저 니니가 그렇게도 바라던 김나지움에 들어갔다. 딸은 한국에서 루시에게 약속했던 것처럼 루시가 갖고 싶어 하는 스마트폰을 선물로 사줬다. 아니 나랑 루시랑 같이 가서 사고 딸은 내 통장으로 돈을 넣었다.
“엄마, 엄마랑 제니, 초이(남편)는 하나님이 나에게 보내준 천사야.”
새 핸드폰에 기분이 날아갈 듯 좋은 루시가 나를 꼭 끌어안고 뿌쉬뿌쉬(볼에 뽀뽀해주는 것)를 한다. 3학년이었던 루시가 8학년을 졸업하고 김나지움에 입학했는데 감동도 컸지만 앞으로 4년을 잘 보낼 수 있을까 걱정도 앞섰다.
“엄마, 괜찮아. 4년 잘 보낼 거야. 시간 빠르잖아. 공부가 어려워지니까 그게 좀 걱정이긴 한데. 필요하면 학교 선생님한테 부탁해서 어려운 과목은 한 번씩 과외를 시켜줘 봐.”
“그러든가 해야겠다. 앞으로 4년을 잘 보내야 할 텐데.”
막연한 불안이 사라지지 않았다. 사춘기 때는 마침 딸이 헝가리에 와있어서 루시와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잘 넘긴 거 같은데 막연한 불안이 어디에서 오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루시는 더 이상 작은 꼬마 여자아이가 아니었다. 김나지움 1학년이니까 한국으로 치면 중학교 3학년이지만 루시는 사내 녀석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히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이었다. 그게 나를 불안하게 했다. 그런데 나의 불안함은 엉뚱한 곳에서 현실이 되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루시 엄마 자스민이 출소를 한 것이다.
루시는 조금씩 주말마다 바빠졌다. 자스민이 루시를 데리고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크리스마스는 항상 우리와 같이 보내곤 했었는데 루시는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맞이하는 실베스타(12월 31일 밤)도 자스민과 파티에 갔다. 처음에는 걱정이 되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걱정보다는 서운함이 컸다.
아마도 딸이 헝가리에 와서 일 년을 같이 지내고 간 뒤에 루시는 나와 더 가깝고 딸 제니처럼 내 울타리 안에 있다고 생각을 했나 보다. 분명 루시는 집시지만 우리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집시의 색이 옅어졌다고 오만하게 그리 생각했었나 보다. 루시에게는 내가 꼭 필요하고 내가 옆에 있어야만 루시가 다른 집시들과는 다르게 정직하고 책임감 있는 아이로 잘 자랄 수 있다고, 내가 없으면 안 된다고 믿고 있었나 보다. 그런데 루시는 자스민과 함께 있으면서도 결석은 하지 않았고 전보다 자주는 아니지만 우리 집에 들러서 드라마도 보고 이야기도 하고 숙제도 했지만 뭔가 내 속에서는 자꾸만 서운함이 쌓이고 나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렸다.
9학년 새해가 지났고 봄이 올 때쯤 시내에 있는 웨스텐드 백화점에 갈 일이 있었다. 통신사 계약을 새로 하고 봄옷이나 하나 볼까 천천히 걷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탈리아 식당 옆에 있는 스타벅스에 루시랑 자스민이 활짝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맞다. 봄 방학이구나. 요즘 루시가 자주 오지 않아서 봄 방학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루시의 환한 웃음을 보며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나를 볼 수 없는 것에 ‘다행이다’ 라며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뒤통수를 한 대 크게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루시가 많이 웃기는 했지만 나와 같이 있을 때와 짓는 웃음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뭐랄까. 더 눈부시게 환하게 웃고 있었다. 행복하게. 아니다. 편안하게.
‘맞다. 자스민은 루시의 엄마야. 루시는 엄마가 그리웠던 거야. 왜 내가 그걸 몰랐을 까. 루시가 ‘엄마, 엄마’라고 부르니까 내가 진짜 루시 엄마라도 된 듯 착각을 했나 보다’
난 루시 옆에 자스민이 있으면 루시가 위태롭고 분명 루시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아서 무의식적으로 자스민을 나와 루시 사이에서 밀어내고 있었다. 자스민에게 만나자고 연락을 했다. 주저 니니를 통해서.
루시랑 자주 가던 아이스크림 가게에 좀 일찍 가서 커피를 마시고 있으니 자스민이 약간 긴장한 듯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자스민이 먼저 말을 꺼냈다.
“루시한테 이야기 들었어. 고마워.”
“무슨 얘기?”
“나 없을 때 루시 챙겨줘서. 루시가 나보고 한국 엄마가 나보다 더 진짜 엄마 같다며, 미미한테 좋은 엄마가 되는 법을 좀 배우라고 했어.”
루시의 그 말에 울컥하면서 그동안 혼자 서운하고 배신감 느꼈던 내가 부끄러워지면서 미안함이 올라왔다.
“자스민, 주저 니니한테 혹시 들었어? 주저 니니랑 내가 약속한 일?”
“루시 김나지움 졸업시키는 거? 응.”
“자스민은 어떻게 생각해?”
“뭘”
“루시가 계속 학교에 가고 졸업하는 거.”
“당연히 좋지. 그래야 직장도 생기고. 좋은 남자도 만나고.”
자스민의 말에 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다고 좋은 남자를 만나는 건 아니야. 하지만 자스민 말대로 일은 할 수 있지. 근데 앞으로 3년을 더 학교에 다녀야 해.”
“가면 되지.”
내가 자스민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무슨 의미인지 알고 대답하는 걸까?
“미미, 나도 김나지움 졸업하고 싶었어. 6학년 때 그만뒀지만. 맘은 그랬어.”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창밖을 가만히 보더니 말을 계속한다.
“나도 김나지움 졸업하고 싶었어. 근데 나보고 학교에 꼭 가라고, 그래야 한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어. 내가 공부가 재미없고 친구들이랑 놀러 다녀도 아무도 나를 혼내거나 왜 학교에 안 가냐고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어. 친구들도 안 가니까 학교에 안 가도 되는 줄 알았어. 내가 루시를 임신했을 때 다들 축하해줬어. 내 친구들도 비슷하게 임신을 했거든. 그래서 재밌었어. 다 그런 줄 알았거든. 우리는 다 이렇게 살고 엄마도 할머니도 다 별문제 없이 그냥 다 이렇게 사는 줄 알았어. 그런데 루시를 낳았는데 돈이 없는 거야. 매일 케빈이랑 싸우고 욕하고 엄마한테 맨날 돈 좀 달라고 하고. 난 일을 할 수 없었고, 케빈은 몇 번 일했는데 돈을 많이 못 받았어. 근데 그 돈을 자기 신발 사고 루시 옷 사고 나니 없는 거야.”
가슴이 답답해 왔다. 15살, 17살이 아이를 낳고 자스민은 그녀의 집에서, 또 케빈은 그의 집에서 살았다고 했다.
“그러다 루시 동생이 생겼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주저 니니도 몰랐었나?
“루시가 2살 때 임신을 했는데 너무너무 힘들고 싫었어. 루시 하나도 힘든데 또 아기가 생긴 게 화가 났어. 내가 케빈한테 피임하라고 했었거든. 그런데 싫다며 나더러 하라고 했어. 그러다 임신을 했는데 울고 보채는 루시도 밉고 뱃속 아기도 너무 싫고. 그래서 그랬는지 아프더니 아기가 떠났어.”
자스민이 울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그랬다.
유산을 하고 아기 루시 아빠 케빈과 자주 다투다가 케빈이 떠났다고 했다. 돌아오겠지 생각하고 기다렸지만 돌아오지 않았고, 돌아오지 않는 케빈에 대한 화풀이로 루시를 집에 놔두고 친구들과 놀러 나갔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다 잘 살고 행복해 보이는데 왜 나만 항상 가난하고 불행한지 우울해졌고, 좁은 집에서 북적대며 사는 시끄러운 집이 너무 싫어서 자꾸만 친구들과 밖에서 생활하다가 마약인 줄도 모르고 마약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했다. 클럽에서.
지금은 정말 마약을 끊었고, 루시가 김나지움을 다니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면서 루시가 김나지움을 마치고 졸업하기를 원하는 주저 니니처럼 자기도 간절히 원한다고 말을 한다. 그럼 됐다.
나는 자스민에게 부탁을 했다.
“자스민, 루시가 김나지움을 졸업하려면 남자친구는 괜찮지만 임신하면 곤란해. 알지?”
“응. 나도 알아. 근데 임신하고 아기 낳고도 다닐 수 있어.”
“물론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자스민 너도 루시 임신해서 알잖아. 루시 임신했을 때 케빈이 힘들었어? 자스민이 힘들었어?”
“당연히 내가 힘들었지. 케빈 그 자식은 하나도 힘들지 않고 아빠가 됐다고 자랑만 했지.”
“임신하고 아이 낳고 그러면 다시 학교에 돌아가서 공부하는 건 좀 힘들어. 자스민은 왜 루시 낳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서 공부 안 했어? 주저 니니한테 루시 부탁하고 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졸업하면 됐을 텐데. 공부도 싫었겠지만 아기를 두고 학교에 가서 공부할 수 없었잖아. 루시도 그럴 거야. 케빈도 17살에 아빠가 된 거니까 어렸기 때문에 자스민이랑 사랑하는 건 좋지만 아빠나 남편이 될 준비가 안 되었기 때문에 힘들어서 계속 싸우게 된 거야. 어려서 엄마, 아빠가 되면 누구나 힘들거든.” 자스민이 고개를 끄덕인다.
“루시가 만약 임신을 했다고 해. 자스민 네가 아기를 잘 돌봐 준다고 해도 루시는 힘들 거야. 그러니까 내 생각에는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임신을 하면 몰라도 학교 다니는 중에 임신하고 아기 낳으면 대부분 학교는 그만두거든. 엄마인 네가 옆에서 그러지 않게 좀 도와줘.”
“미미. 지금 남자친구는 루시의 남편이 되지는 않을 거야.”
“자스민, 루시는 너무 예쁘고 매력적이야. 그래서 많은 남자들이 루시랑 사랑하고 싶어 하지. 자스민이 15살에 루시를 낳았지? 지금 루시가 15살이야. 자스민이 15살 때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기억나? 뭘 했고 뭘 좋아했고, 친구들이랑 무슨 이야기를 하며 놀았는지 생각해 봐. 루시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거란 말야. 자스민이 루시를 낳고 예쁜 아기라 행복하고 좋았지만 루시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속상했지? 15살에 엄마가 되니까 친구들과 놀고 싶어도 놀 수도 없고, 일할 수도 없으니까 돈이 필요한데 엄마한테 계속 도와달라고 해야 했잖아. 루시랑 이런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하면 좋겠어.”
“알았어. 나도 루시가 김나지움 졸업하는 게 좋아. 근데 루시는 8학년을 졸업했잖아. 내 친구들 중에 8학년 졸업한 아이들은 거의 없어. 루시가 똑똑해.”
“맞아. 네 딸 루시는 똑똑하고 특별한 아이야.” 내가 말했다.
“근데 주말에는 루시랑 같이 다녀도 되지?”
“당연하지, 네가 엄마잖아. 루시는 엄마가 와서 너무 좋은가 봐. 자스민이랑 같이 있을 때 루시는 엄청 행복해 보여. ”
루시가 자기랑 같이 있을 때 행복해 보인다는 말에 기분이 좋은지 웃는다.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바이러스가 시작되었다. 루시가 10학년이 되었을 때는 헝가리 정부는 강력한 지침을 내렸다. 음식점, 카페 등 어디에서도 실내, 실외에서 음식을 먹을 수 없고 포장만 가능하며, 애완동물 산책도 집에서 2km로 제한했다. 식료품점을 제외한 모든 상점은 문을 닫아야 했으며 식료품점도 12시 이전에는 60세 이상이, 12시 이후에는 60세 이하가 장을 볼 수 있었다. 남편은 12시 이전에 물건을 살 수 있고 나는 12시 이후에 마트에 갈 수 있는 이상하고 요상한 생활이 지속되었다.
내 한국 일정도 취소되었고, 남편의 출장도 전부 취소되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루시에게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모든 수업이 온라인으로 바뀌니 인터넷이 없는 루시는 우리 집에서 수업을 들었다. 루시가 우리 집에서 온라인수업을 하던 어느 날 자스민이 튀김기를 빌리러 왔다가 내가 남편 바지단을 줄이려고 꺼내 놓은 재봉틀을 보았다.
“미미, 재봉틀 할 줄 알아?”
“응, 간단한 것만. 옷은 못 만들어.”
재봉틀을 눈여겨보던 자스민이 다음 날 아침에 루시를 따라 우리 집에 왔다.
“미미, 나 재봉틀 조금 할 줄 아는데 나 좀 가르쳐 줘.”
“응? 난 가르쳐 줄 정도는 안 되는데?”
나는 전에 사 놓은 천을 주면서 하고 싶은 것을 만들어 보라고 했다. 자스민은 가방을 만들까 하고 샀던 천이라는 것을 듣고는 루시가 수업하는 동안 거실에서 재봉틀로 간단한 에코백을 만들었다. 그런데 제법 괜찮았다. 아주 깔끔하게. 내가 만든 것보다 완성도가 높은 가방이었다.
“자스민, 멋지다.” 내 표정과 칭찬에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는 자스민.
“내가 가르쳐 줄 수는 없고 유튜브를 보면서 좀 연습해 봐. 그래서 우체국 건물 1층에서 옷 고쳐주는 유딧 니니 있지? 유딧 니니처럼 자스민도 돈을 받고 옷을 고쳐주거나 예쁜 것을 만들어서 팔 수도 있잖아.”
그날부터 자스민은 매일 매일 우리 집에서 재봉틀로 도시락 주머니도 만들고, 식탁에서 사용할 냅킨, 의자 커버 등을 만들기 시작했다. 자스민이 만들면 내가 만든 값을 지불하고 만든 것들은 우리 집에서 사용했다. 유튜브로 알 수 없는 것은 우체국에 관리비 내러 가던 날, 마침 유딧 니니를 만나 자스민을 좀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일 년이면 끝날 줄 알았던 코로나바이러스는 백신 접종이 3차까지 늘어나면서 2년을 넘겼다.
루시가 12학년이 되던 가을에는 백신 접종을 2차까지 한 뒤여서 학교에서 수업을 들었고 식당이나 카페 등은 영업이 정상화되었다. 마스크는 착용해야 했지만 그래도 외부 모임과 활동이 자유로워졌다. 드디어 봄이 되었을 때 헝가리 정부는 마스크 착용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발표했고 국경도 열었으며 코로나19 이전의 시간으로 돌아갔다.
헝가리는 김나지움 졸업 때 아이들이 두 달 정도 3곡의 춤을 배워서 12학년 전체가 춤을 춘다. 코로나19 때문에 못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정부가 3월에 모든 규제를 풀었고 루시는 썰러거버또(Szalagavato: 졸업 무도회로 리본을 달아 준다는 의미)를 준비했다. 아이들이 의논해서 춤과 드레스 색을 정하고 두 달 동안 춤을 연습하면서 루시는 김나지움 4년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잘 몰랐던 친구도 알게 되고 무엇보다 두 명의 좋은 친구가 생겼다.
루시의 반은 검정 드레스, 빨간 드레스 그리고 12학년 전체가 입는 하얀 드레스 이렇게 3개의 드레스로 결정을 했고, 자스민은 그중에서 빨간 드레스를 자기가 만들겠다고 했다. 그동안 모은 돈으로 천을 사고 비즈를 샀다. 나는 아예 내 재봉틀을 자스민에게 선물했다.
“자스민, 내 재봉틀은 쓸데없이 기능이 너무 많아. 나는 그냥 간단한 게 좋거든. 이거 자스민이 써.”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자스민은 진심으로 고마워하면서 내가 남편에게 오래전 결혼 기념 선물로 받은 재봉틀을 가지고 집으로 갔다. 그리고 그 재봉틀로 일도 하고 루시의 드레스를 만들었다.
검정 드레스와 하얀 드레스는 자스민과 루시, 그리고 내가 시내의 드레스 대여점을 돌고 또 돌면서 우리 셋 모두가 한마음으로 감탄한 드레스로 결정을 했다. 루시의 드레스 대여비는 남편이 루시에게 주는 졸업선물이었다. 한국에서 딸은 진짜로 졸업이 현실이 되었다며 루시의 구두를 사주라고 돈을 보내왔고 루시는 하얀 비단구두와 까만 하이힐을 샀다.
5월의 햇살 좋은 오후, 우리 모두 정장을 하고 루시의 썰러거버또에 참석을 했다.
첫 춤은 까만 드레스를 입고 경쾌한 리듬에 맞춰서 삼바였다. 경쾌한 스텝을 받는 루시는 빛이 났다. 루시의 이름처럼. 두 번째 곡은 하얀 셔츠의 첫 단추를 푼 남학생들이 춤을 추면서 담임선생님을 모시고 나타났고, 빨간 드레스를 입은 여학생들이 사방에서 춤을 추며 무대 가운데로 모였다. 루시는 자스민이 만든 드레스를 입었다. 짧은 치마 위에 속이 들여다보이는 빨간 망사로 겉치마를 만들어 붙이고 뒤에 큰 리본을 단 화려한 빨간 드레스였다. 남학생들이 원을 그리듯 뒤로 물러나고, 여학생들 한 명 한 명이 돌아가며 노신사와 짧게 춤을 추었다. 올해를 마지막으로 은퇴하시는 선생님을 위해 춤을 준비한 아이들의 마음이 귀해서 가슴이 뭉클하고, 이 자리에 루시는 엄마가 만든 드레스를 입고 담임선생님의 손을 잡고 춤을 춘다. 안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하고 올라왔다.
마지막 춤은 12학년의 모든 여학생들이 화려한 오픈 숄더의 눈부신 하얀 드레스를 입고 멋진 턱시도를 입은 파트너와 함께 춤을 추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루시는 키가 큰 남학생의 손을 잡고 춤을 추는데, 나비처럼 살포시 구름 위를 날듯이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학생들의 모든 순서가 끝나자 학부모들이 무대 아래로 내려가 축하의 춤을 추었다. 루시는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다 해주고 싶어 하는 할머니랑 첫 춤을 추었다. 주저 니니는 루시의 손을 잡고 춤을 추면서 계속 우셨다.
두 번째 춤은 내 남편과 추었다. 남편은 기분 좋은 표정으로 손녀 같은 루시의 손을 잡고 어색하게 앞으로 옆으로, 뒤로 스텝을 밟았다. 마지막으로 엄마 자스민의 손을 잡은 루시는 흰 드레스 자락을 휘날리며 어린아이처럼 빙글빙글 돌면서 기쁨을 마음껏 표현했다. 둘은 ‘까르르’ 웃으면서 빙글빙글 돌고 서로를 돌리고 또 돌렸다. 나는 카메라로 쉼 없이 셔터를 눌렀다.
우리의 계약은 이제 끝났다. 루시가 정말로 김나지움을 졸업했다.
고등학교 졸업을 했다고 해서 루시의 앞날에 탄탄대로가 열리는 것도 아니고, 고등학교 졸업장이 루시가 원하는 삶을 선물로 안겨주지도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루시가 고등학교 졸업을 했다고 해서 만나는 사람들이 집시인 루시를 특별하게 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여전히 편견의 시선을 감내해야 한다. 분명 좌절하고 분노하며 힘들 때도 있을 것이다. 모든 인생이 그렇듯이. 하지만 집시인 루시에게는 더 힘든 시간일 것이 분명하지만 쉽게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루시는 자신의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자신을 존중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계속 성장할 것이다. 이제 루시는 자신의 결정을 책임질 수 있는 성인이 되었고 나는 언제든지 루시가 힘들 때면 어깨를 빌려줄 것이다. 잠시 쉬어 갈 수 있도록. 그리고 말하겠지.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너는 잘하고 있어.” 라고.
“엄마, 나 꿈이 생겼어.” 하면,
“그래, 잘할 수 있을 거야. 멋지다.” 응원을 하겠지.
루시야. 너에게서 빛이 나. 환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