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Main page
  2. 재외동포 광장
  3. 재외동포문학
  4. 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글짓기 초등 부문] 학교생활과 친구
작성일
2024.01.24

청소년 글짓기 초등 부문 장려상


학교생활과 친구

박경탁(카자흐스탄)


나는 카자흐스탄에 살고 있다. 엄마, 아빠의 말로는 내가 태어나 4개월이 되었을 때 이 곳으로 왔다고 한다. 여기 카자흐스탄에 산 지도 벌써 12년째다. 그래서 나는 현지 학교에 다니고 있고 러시아 말을 배우는 중이다. 지금 내가 다니는 학교는 127번 학교다. 이 학교는 현재 리모델링 중이어서 13번 김나지야 학교의 남는 교실을 빌려서 쓰는 중이다. 나는 작년 1년 동안 한국에서 지냈다. 한국에서 좋은 친구들
과 재미있고 신나는 시간을 보냈다

나는 원래 121번 학교에 다녔었다. 지금이야 잘 적응하지만 1학년 때 처음 입학했을 땐 말도 못하고 조용했다. 그때 예르볼랏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날 많이 도와줬다. 이해가 안 되는게 있으면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 내게 설명을 해 주었다. 예르볼랏을 따라 학원도 같이 다녔다. 숙제를 도와주는 학원이었는데 숙제가 빨리 끝나면 학교 가기전까지 놀 수 있었다(오후반일 때만). 이 곳 카자흐스탄은 오
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뉘어 있다. 그래서 오전반이면 오후에 학원에 가고 오후반이면 오전에 학원에 간다. 보통 홀수 학년은 오전반, 짝수 학년은 오후반이다. 오후반이면 학원에 다닐 때 점심을 학원에서 해결해야 해서 엄마가 매일 도시락을 싸 주셨다(오전반은 학교 매점에서 사 먹거나 간식으로 해결
했다.). 가끔씩 엄마가 도시락으로 김밥을 싸 주시면 학원 선생님이 하나씩 먹어 보셨는데 처음 먹어 보셨을 때에는 무슨 초밥이냐고 물으셨다. 나는 김밥이라고 했다(여기서는 김밥도 초밥의 한 종류라고 생각한다.). 또 어느 나라 음식이냐고 물으시길래 한국 음식이라고 했다. 김밥을 싸 간 날에는 모두
한 개씩 먹어 보고 싶어 해서 엄마가 따로 한 개를 더 싸 주시기도 했다. 예르볼랏은 엄청난 장난꾸러기이면서 공부도 잘하고 붙임성도 좋은 귀엽고 착한 친구였다.


하루는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같이 놀면서 장난치다가 교복이 찢어지는 일이 있었다. 주머니가 찢어져서 교복을 버렸다. 엄마 말로는 선생님이 엄마를 불러서 예르볼랏이 교복을 찢었다며 예르볼랏에게 새 교복을 다시 사 달라고 하라고 했다고 했다.
하지만 장난을 치다가 생긴 일이라서 따로 책임을 묻지 않았다. 이곳은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린다. 그래서 겨울에는 집된 것인데 맨손으로 눈을 뭉치면 더 잘 뭉쳐진다는 것이다(체온이 눈을 살짝 녹여서 눈끼리 잘 뭉쳐지게 하는 것이다.). 가끔씩 학원에서 모든 애들이 숙제가 끝나면 놀이터에서 단체로 놀았는데 술래잡기도 하고 그네도 타고 눈감술(술래가 눈을 감고 하 는 술래잡기)도 했다. 눈감술을 할 때는 미끄럼틀을 벗어나면 술래가 되기 때문에 술래에게 잡히지 않도록 원숭이처럼 여기저기 매달렸었다. 그리고 방금 막 쌓인 눈을 먹기도 했다. 나는 그냥 차갑기만 하지 달지도 않고 맛도 없어서 금방 뱉었다. 그런데 에르볼랏은 눈싸움 할 때 공처럼 눈을 잘 뭉치고 눈을 아이스크림처럼 먹어서 맛없지 않냐고 물어 본 적도 있다. 대답은…. 눈이 맛있다고…. 내가 오전반일 때 수업이 끝나고 학원 셔틀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기다리는 동안 학교 놀이터 철봉에서 즐겁게 놀았던 기억도 있다. 


2학년이 돼서는 오후반이었는데 오전에 학원에 가서 숙제를 끝내고 엄마가 싸 주신 계란 볶음밥을 맛있게 먹고 학교에 갔는데 쉬는 시간에 뛰다가 선생님한테 혼난 적도 가끔 있었다. 그러다 2학년 1학기가 끝날 무렵 예르볼랏이 전학을 갔다. 에르볼랏 덕분에 학교에 잘 적응할 수 있었다. 만약 에르볼랏이 없었다면 학교생활에 적응하는 것도 힘들고 그리 재미 있지도 않았을 것 같다. 나는 1학년 때는 말을 거의 못 하던 아이였는데 친구들의 도움으로 2학년 때부터는 차츰 입을 열기 시작했고 수업도 제법 잘 따라가기 시작했다. 2학년이 끝날 즈음에 코로나가 터졌다. 코로나로 인해 3학년 때는 집에서 줌으로 수업을 했다. 4학년 때는 코로나가 차츰 사그라 들어 학교에 다시 다닐 수 있었다. 오랜만에 선생님과 친구에서 장갑을 가져와 수업이 끝나면 눈싸움도 했다. 내가 눈을 잘 뭉치는 법을 몰라서 대충 동그랗게 만들고 던졌는데
그냥 허공에서 가루로 흩날렸다. 나중에 경험을 쌓아 알게 들의 얼굴을 보니 좋았다(물론 마스크를 써서 얼굴이 반쯤 가려 졌지만). 우리가 줌으로 수업을 하는 동안 학교에 건물이 하나 더 생겼다. 한 건물에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같이 있었는데 새로운 건물이 생기면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로 건물을 분리했다. 


우리는 새 건물로 반을 옮겼다. 역시 새로 지은 건물인 만큼 새 기운이 물씬 풍겼다. 전자 칠판이 생긴 뒤로는 친구들도 나도 칠판에 쓰고 싶어 안달이었다. 나는 주로 수학 시간에 나가 칠판에 문제를 풀었다. 새로운 친구가 전학을 왔다. 그림을 아주 잘 그리는 친구인데 내가 나는 한국 사람이라고 소개하자 자기도 한국인이라고 했다(고려인인듯). 이곳 카자흐스탄은 10만 명의 고려인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 친구와 친해졌고 그래서 집에 갈 때 위쪽 말고(나는 원래 위쪽으로 가서 집에 한 번에 가는 버스를 탔었다.) 아랫쪽으로 내려가서 친구를 배웅해 주고 버스를 탔다(집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없어서 버스를 갈아타는 건 덤). 나는 그렇게 무사히 초등학교를 졸업했고 현재 나는 5학년, 중학생이 되었다. 1년 동안 한국에서의 시간을 뒤로 한 채, 나는 다시 이곳 카자흐스탄에서 즐거운 학교생활을 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