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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수필] 꽃 파는 남자
작성일
2024.01.25

수필 가작


꽃 파는 남자

임하나(미국)



다 타 버릴 것 같은 뜨거운 여름을 살짝 지나서 캘리포니아에도 가을이 왔다. 할 수만 있다면 넓은 푸른 하늘로 뛰어 들고 싶다. 성큼 다가온 싸늘한 밤 기온이 열기를 식혀 주니 위로가 된다. 톡 하며 코끝을 자극하는 알싸한 한국의 가을 아침 공기와는 사뭇 다르다. 짧은 가을이 아쉬워서 자주 바깥나들이를 하곤 한다. 프리웨이를 타기 위해 차선을 바꿔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앞에 서 있는 차들 사이로 누군가
분주하게 운전석 주변을 누빈다. 무슨 일인지 살피느라 고개를 돌려 가며 두리번거렸다.

“아하! 꽃 파는 남자.”

차선 분리대 위에 양동이가 몇 개 보인다. 그 안에 꽃들이 싱숭생숭한 자리를 부여잡고 자동차의 매캐한 매연을 흘려보낸다. 생생한 에너지를 그러모아 알록달록 꽃더미가 내게 달려오는 듯하다. 꽃뭉치 옆에는 오렌지를 뺑뺑하게 끌어 안은 그물자루가 쌓여있다. 꽃만 파는 게 아니라 달콤한 오렌지도 팔고 있다. 오렌지카운티 아니랄까 봐.

길가의 꽃장수는 크레딧 카드는 안 받을 테니 나는 서둘러 주머니를 뒤진다. 운전석 옆 글로브박스에 보관했던 현금을 손에 쥔다. 앞 차에게 거절당한 히스패닉 아저씨는 어정쩡한 미소로 내 차 앞으로 다가왔다. 외면하는 사람들에게 받은 피로가 얼굴에 묻어 있다. 따가운 햇볕에게 당한 고초도 보였다. 검게 그으른 거친 느낌과 다르게 쑥쓰러워 보이는 환한 미소를 실어 웃는다. 그에게 위로를 주고 싶어 소박
한 스페니쉬로 얼마냐고 묻는다.

“부에노스 디아스, 꽌또 에스따?

당연히 길가에서 파는 물건이라 값은 기대 이상으로 싸다. 꽃과 오렌지까지 사고도 남은 거스름돈을 기쁘게 선물했다. 적은 투자로 기쁨을 한가득 받은 느낌이다. ‘그라시아스.무차스, 그라시아스.’ 몇 번을 되뇌는 말이 귓가에 여운으로 남는다.

신호를 받고 들어선 프리웨이를 예쁜 꽃과 함께 달린다.
가을 하면 떠오르는 국화가 섞인 꽃다발을 힐끔 바라본다.부케라고 하기는 좀 모자라는, 길에서 휘뚜루마뚜루 만든 꽃다발이 내게 전해주는 특별한 메시지가 있다. 꽃다발이 내 옆자리에 앉아서 다정한 평화를 퍼뜨린다. 그중에 내가 아는 꽃 이름이 무엇인가 헤아려 본다. 국화, 해바라기, 장미, 백합, 이름 모를 초록 잎사귀. 여러 가지 색의 꽃이 대비를 이루며 마치 한 가족을 꾸민 듯이 보인다. 멋진 부케는 아니지
만 섞여 있는 꽃들이 싱그럽게 살아서 나를 바라본다. 삶의 절정을 내게 헌정해 주는 순간 아닌가. 순수한 경외감이 저절로 생겨난다. 집에 도착하면 꽃꽂이를 해서 식탁 위에 놓아 보리라.

꽃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말을 건다. 사실 나는 살아 있는 식물을 잘 키워 본 적이 없다. 맘에 들어 사거나 선물 받은 식물의 생명을 지켜주지 못했다. 그나마 조금 생명이 남아 있을 때 그린 떰(Green Th umb)인 친정엄마에게 이사를 보낸다. 마지막으로 거룩한 생명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이다. 엄마는 식물계와 소통하는 사람이다. 물을 주거나 부엌에서 나온 어떤 영양분을 부지런하게 나눠 먹인
다. 여행이나 외출 뒤에 집에 돌아오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있다. 그들에게 물을 주며 안부 인사하듯 정겨운 대화를 한다. 덕분에 엄마의 손아귀에 들어온 친구들은 그야말로 새 삶을 살거나 장수한다. 꽃의 나라가 친정일지 모르는 엄마가 4남매를 키우며 빠듯한 살림을 꾸려 나가기 위해서였을까. 졸업식에 미처 꽃을 준비하지 못했을 때 ‘그거 알지? 마음의 꽃다발’이라며 짜장면과 탕수육으로 꽃의 존재를 대신 표현
하기도 했다.

살아가면서 꽃을 받는 것은 어린 시절 머리 쓰다듬어주던 엄마의 손길 같다. 등을 밀어 응원해 주듯 불끈 용기가난다. 삶에 위로요 격려이다. 첫 데이트나 플럼 파티에 가기 전 코사지를 준비하는 설레는 소년의 마음이 떠오른다. 결혼을 앞두고 프로포즈할 때 꽃은 신랑감이 준비해야 할 필수품목이다. 사랑을 고백하거나 생일파티에서도 역시 꽃이 기쁜 에너지를 그러모은다. 어떤 축하의 자리나 공연장에도 반드시 꽃이 등장한다. 이별의 슬픔을 느껴야 하는 장례식에도 모든 허망을 감싸주듯 꽃이 있다. 우리는 항상 꽃의 후원을 받는 상속자이다. 젊은 시절에는 보이지 않던 들꽃이나잔디 사이에 핀 작은 꽃이 보이기 시작했다. 말로 드러낼 수 없는 마음을 전달해 주는 것이 꽃의 본분이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 삶에서 비언어적 소통을 위해 꼭 있어야 하는 매개체 중에 하나이다.

딸이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하면서부터 시작된 일이다. 딸 과 절친한 친구, 스테파니는 서로의 엄마에게 잊지 않고 생일에 맞춰 꽃을 보내 준다. 해를 거듭할수록 감동이 두터워지고 자연스럽게 스테파니는 둘째 딸로 등극했다. 서로 문화가 다르고 인종이 다르지만 두 딸의 속 깊은 배려는 크다.
두 엄마의 자존감을 높여 주고 딸 키운 보람을 두 배로 알게 해준다. 뭉클한 기쁨은 엄마라는 긍지를 굳건히 세워준다.

십여 년 전, 혼기가 찬 딸이 남자 친구를 가족에게 소개 하기로 했다. 그때 내 마음은 이랬다.

‘괘씸하게 내 딸의 마음을 훔치다니’ 할 수 있다면 퇴짜를 놓고 싶었다. 심통을 어깨에 가득 싣고 첫 대면을 하는 날. 오만한 권력을 휘두르고 싶은 심술을 꾹 참아 눌렀다. ‘내가 어떻게 키웠는데’라며 딸 가진 유세를 부리고 싶었다. 과연 어떤 녀석이 나타날까, 궁금증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멀리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딸이 미리 언급했던 생김새, 됨됨이, 믿음이 그대로 실려 있었다. 긴장된 표정과 성실한 태도가 나를 안심시켰다. 얼굴에 천생연분이라 씌여진 사실을 부인할 수 없으면서, 그래도 여전히 ‘소용없어’라며 단절의 벽을 쳤다. 그런데

“아 뿔싸.”

‘저’하며 건네는 가슴 먹먹해지는 부드러운 꽃 부케. 양손에 정성을 담아 인생을 건 듯한 꽃 세례. 언젠가 남편이 내 나이만큼 전해 주던 장미 다발에 이 정도로 감동했던가. 가정을 꾸린 후에 이민 길에 오른 우리는 모든 이민자처럼 양 쪽 문화와 언어장벽에 치이면서 살았다. 외국에서 자식을 키운 노고는 어쩌면 눈물겨운 일이다. 오늘을 위한 노력이라고 말해 주듯 꽃이 크나큰 선물이 되어 가슴에 안긴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예쁜 부케의 황홀경 속에서 세상에 가장 소중하고 유일한 딸의 결혼을 허락했다. 기쁘게.

길에서 산 꽃다발을 들어 꽃냄새를 맡는다. 긴 숨을 들이쉬니 꽃향기는 마중물이 되어 옛 추억을 끌어당긴다. 우리 4남매를 친구처럼 키우신 아버지는 그 시절의 가장과는 좀 달랐다. 혼자 먹기 아까워 잠든 우리를 깨워 살얼음이 낀 식혜를 먹게 해 주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 달콤하고 시원한 겨울밤의 식혜는 세상에 다시 없을 맛이다. 김장김치가 쉬어 갈 때쯤 밀가루 반죽으로 놀면서 자기 마음대로 빚어놓은 만두를 삶아 내기가 무섭게 잘도 먹어 치웠다. 콩 단백질이 몸에 좋다며 집에서 두부를 만든 적도 있다. 간수를 만난 콩국물이 뭉글거리며 속삭이면 순두부, 눌러 주면 두부가 되는 요술을 직접 보았다. 집 벽과 담 사이에 물을 채워 여름 선물로 수영장을 만들어 주어 신나는 여름을 보내기도 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아버지는 특유의 판소리를 읊듯이 신문을 읽어 주었다. 어릴 적에 가족 나들이로 남한산성에 갔을 때 일이다. 청나라에 쫓겨 항복한 인조의 굴욕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김훈의 ‘남한산성’을 읽을 때 오래전 내 눈높이에 맞춰 얘기해 준 아버지의 목소리가 느껴졌다.

아버지 기일에 온 가족 20명이 모였다. 가정을 꾸린 4남매는 엄마와 함께 각자 기억하는 옛날이야기를 주섬주섬 꺼낸다. 아버지는 시험 봐서 공무원이 된 자부심이 컸다. 뇌물 없이 공평하게 실력으로 겨루는 세상이 좋다고 하셨다. 수출이 살길이라 외치던 시절에 친구와 동업을 했고 부도가 나서 결국 공장문을 닫았다. 여러 가지 사업을 시도했지만 결국 엄마를 고생시켰다. 가족이 모이면 말하게 되는 그늘진
가족사였다.

드라마에서 매번 사업하다 망하는 찌질한 인물처럼 세상 물정과 사람에 약한 아버지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사춘기를 지나던 나는 한 없이 올려다보던 아버지를 혐오하는 데 모든 에너지를 소비했다. 명분을 따지는 불합리한 태도가 미워 반 항심으로 가득 찼다. 퉁명스럽게 대답하거나 못 들은 척하면 아버지는 더 엄한 어른 행세를 했다. 그 시절 고까운 마음은 심하게 안으로 파고 들었다.

오래 기다린 미국 이민 비자는 우리 가족에게 방향 전환을 위한 신호등이었다. 아버지만 먼저 이민 가방을 꾸렸다. 미국에 도착하고 시차 적응도 없이 기다렸다는 듯이 몇 가지 일을 시작했다. 딸의 무시하는 눈초리가 채찍이 되었을까. 낮에는 미용 재료상에서, 밤에는 빈 사무실을 청소하는 소위 밤 청소를, 주말에는 페인터 헬퍼로 일당을 벌었다. 남의 눈치 안 보고 자유롭게 일할 수 있어 좋다고. 빨리 자리 잡아서 가족이 함께 살아야 한다는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세상에 모든 가장의 헌신은 눈부신 사랑의 표현이리라.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이민사가 떠올랐다. 기반을 다시 쌓기 위해 힘겨운 노동을 기쁘게 해냈지만 아버지의 나이가 50이 훌쩍 넘어 있었다. 어느 날 과로가 원인이 되어 낯선 땅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잃어버린 시간을 빈손으로 급하게 메꾸느라 건강의 적신호는 느끼지 못했나 보다.

우리의 얘기를 듣던 엄마가 또 다른 모습의 아버지를 기억해 낸다. 새로운 모색을 하려고 뉴욕으로 잠시 자리를 옮긴적이 있다. 자본이 넉넉하지 않아 겨우 꽃 장사를 했단다. 봄에 있는 발렌타인스 데이와 마더스 데이를 겨냥했다. 아버지는 감사한 마음과 희망을 품고 초라하지만 창피를 무릅썼다.아버지는 행상인이 되어 길거리의 꽃 파는 남자가 되었다.

제법 장사가 잘 되었고 하필 지인의 아들까지 동원해서 장사하던 날. 위엄있는 미국 경찰인 NYPD 여러 명에게 꽃을 압수당했다. 법을 전공한 아버지의 기분이 어땠을까. 라이센스를 받아야 한다는 것도 모르던 초급 이민자. 경찰 앞에서 범죄자 취급을 당해 자존심을 짓밟힌 날. 미국의 이민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교육비를 톡톡하게 지불한날. 자본금은 잃었지만 지인의 아들에게 수고비를 줄 수 있어 다행이라고 한숨을 돌렸다는 얘기까지.

화려한 대도시, 뉴욕의 맨하튼 찻길에서 꽃 파는 남자이기도 했던 아버지를 생각한다. 체면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적응해 나간 용기 있는 분. 가족 곁을 떠날 때까지 일하는 모습을 보여 주신 근면성. 부자는 아니라도 이웃의 일이 내 일이 되어 도움과 나눔으로 풀어 내는 해결사. 너그럽게 자식들의 기반이 되어 주신 정다운 내 아버지.

할아버지가 된 아버지가 들려준 미국 건국사, 남북 전쟁,대통령들 에피소드 등 미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흥미진진한 표현법이 병자호란 이야기처럼 감칠맛 나는 목소리로 들려온다. 내 아버지는 꽃을 파는 남자였지만 알고 보니 꽃을 키운 사람이다. 아니 미래를 위해 우리에게 꽃을 피운 아버지로서 내 앞에 서 계셨다. 사랑의 꽃을 피운 이민 1세, 나의 아버지. 이제부터 아버지를 꽃 피운 남자라고 말하련다

프리웨이 입구에서 산 꽃이 식탁 위에 며칠간 잘 살아 있다. 꽃꽂이해 두었더니 자기들끼리 차례로 꽃을 피웠다. 시선을 끌던 장미는 시들기 시작했고 국화는 까딱하지 않고 그대로 서 있다. 해바라기는 해를 찾지 못해 목을 갸우뚱하게 세우고 나를 바라본다. 작은 나리꽃 정도로만 알았는데 백합꽃이 활짝 얼굴을 내밀며 우아한 인사를 한다. 아버지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산 꽃들이 내 마음을 보드랍게 만들어 준다.
추가로 우체국 업무를 하며 밤잠을 설치는 고된 노동이 계속 되었다. 눈물겨운 고군분투를 들으며 아버지와 주고 받은 편지는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작은 치유가 되었다 엄마가 합류하고 주말에 스와밋 장사를 하며 조금씩 자리잡아 갔다. 동생들도 미국 이민 길에 올랐고 각자의 자리에서 앞날을 개척해 나갔다. 아버지는 더운 여름 아웃도어스와밋 장사하다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다리가 불편한 후유증이 남았지만 강한 재활 의지와 엄마의 정성 어린 간호로 많은 회복을 한 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내게 해 주시던 미국에서 생존 방법을 듣곤 했다. 이기적이고 불평등한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지만 우리가 몰랐던 합리적인 부분도 인식하게 되었다. 당신에게 새로운 인생의 가능성을 열어 주었던 미국의 법률과 문화가 합리적이라는 주장도 했다. 커브길에서 속도를 정해 놓은 건 안전을 위한 최상의 선택이다. 사거리 스탑에서 양보하는 게이기는 거다. 아마 라이센스 없이 꽃 장사하다 꽃을 압수당한 덕분에 미국을 이해하고 이민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깊이 깨달은 사건이었나 보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