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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수필] 친정
작성일
2024.01.25

수필 가작


친정

백경혜(미국)



친정에 다녀왔다.

아버지는 선물로 들고 간 간식들을 좋아하셨다. 그중 몇가지는 방으로 가져가 숨겨 두셨다. 치매 증세 중 하나인 줄 알았지만, 아버지 방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간식 봉지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언니가 먼저 사다 놓은 간식 옆에 내 선물이 나란히 놓였다. 구순을 넘긴 아버지는 기억력이 조금 흐려지셨지만, 소통에는 아직 문제가 없었다. 어머니는 여러 종류의 나물을 밥상에 올리셨다. 두릅, 미나리무침, 쑥갓무침, 머
위무침과 쑥국은 한국의 봄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향긋한 나물로 차려진 풀빛 밥상을 보니 내 나라에 돌아온 실감이 났다. 미국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들이라 더 귀했다.

나는 나물을 잘 구별하지 못한다. 데쳐서 무쳐 놓으면 거의 다 녹색으로 늘어진 모양새를 하고 마니, 맛과 향만으로는 이름을 기억할 수 없다. 유난히 맛있는 것은 이름을 물어보지만, 그 이름도 머리에서 머물다 사라지기 일쑤이다. 조리해 먹을 것 같지 않다고 무의식이 알아서 기억을 삭제하는 모양이다. 어머니 음식이 기다리는 친정이 없다면 나물 이름을 더 열심히 외우게 될지도 모르겠다.

부모님은 재개발을 기다리는 낡은 주택에서 살고 계신다.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새로 지어 들어갔으니 사십 년 된 집이다. 그곳에서는 시간의 일부가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인다. 벽에 걸린 액자 속엔 어린 세 남매 사진이 있다. 사진 속 나는 단발머리 초등학생인데, 세발자전거 뒷자리에 동생을 태우고 장난스럽게 웃고 있다. 자전거를 빙 둘러 그리운 동네 친구들과 언니가 서 있다. 아버지 환갑 기념 가족사진도 있다. 몇 해 전 결혼한 조카가 돌 지난 아기로 할아버지 품
안에 안겨 있다. 환갑 때 아버지는 너무 젊어서 낯설기까지 하다.

어머니는 오래된 내 물건들을 정리하라고 하셨다. 장롱에는 이십 대에 구입한 내 캐시미어 코트가 아직도 보관되어 있었다. 살펴보니 여기저기에 좀이 쏠아 작은 구멍들이 보였다. 오래된 가방의 스웨이드 안감엔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못 쓰게 된 내 옷과 소지품들을 쓰레기봉투에 넣으니 멈추어 있던 시간의 한 부분이 스러져 가는 것 같았다. 카페에 갈 때마다 기념으로 모아 놓은 작은 성냥갑들은 끝내 버릴수 없었다. 가지각색 성냥갑 위에 프린트된 카페 이름을 보니 젊은 시절의 추억과 인연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것들을 일순간에 버릴 수는 없었다. 비행기로 가져올 수 없으니 아버지 방 수납장에 다시 넣어 두었다.

친정에서의 처음 며칠은 마냥 반갑고 즐겁지만, 기간이 길어질수록 조금씩 힘들어진다. 다 커서 독립한 새가 좁은 어미 새 둥지로 다시 비집고 들어온 꼴이리라. 귀국한 다음 날부터 부모님의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추우니까 옷을 더 입어라.”
“친구들은 왜 그렇게 많이 만나고 다니느냐.”
“저녁에 일찍 일찍 들어와라.”
근래에 누구도 하지 않던 간섭을 받으니 당황스럽고 나이 오십을 훌쩍 넘긴 딸 어디가 아까워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두 분만 적적하게 지내던 중에 모처럼 집중할 대상이 나타났으니, 그것은 재미가 진진한 부모 역할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옷을 더 껴입으라는 성화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는 갱년기 딸내미의 목덜미를 보여 드리고 나서 그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어머니는 양심대로 행동하는 분이며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사셨다. 다른 사람을 해롭게 하거나 부끄러운 일을 할 사람이 아님을 평생 지켜 보았다. 어머니가 자주 얘기하던 외할머니는 좋은 가문의 기품 있는 분이었는데, 어머니께 큰 영향을 미친 것 같았다. 자식도 당신의 소견대로 살기를 바라시니 도리에 어긋난 행동을 하면 자잘한 잔소리를 듣기 십상이었고 기준이 높아 인정받기 어려웠다.

어머니는 나를 물가에 내 놓은 어린애 같다고 하셨다. 상대적으로 나는 현실감이 결여된 자유주의자라서 어머니 눈에는 평생 미덥지 않은 자식으로 비쳤을 것이다. 잠시 귀국해 함께 지내는 동안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런저런 일로 부딪혔다. 잘못을 훈계할 때는 받아들여야 했지만, 시대에 맞지 않는 행동을 강요하실 때는 말문이 막혔다. 지난 추억을 얘기하며 웃다가도 섭섭했던 것이 나오면 쉽사리 눈물 바람이 되었다. 삼십 년 이상 세대 차이가 나고, 한국과 미국에서 십여 년을 떨어져 살았으니, 가치관이 서로 다른 것은 어찌할수 없었다.

팔십 대 중반쯤부터 부모님은 해가 갈수록 눈에 띄게 노쇠해지신다. 아버지는 올해로 구십일 세가 되셨다. 윗니가 여섯 개밖에 남지 않았는데 틀니를 싫어하셔서 앞니로만 음식을 씹으셨다. 아랫니도 성치 않아서 여러 개를 발치해야 하는데 당뇨가 있어서 맘대로 빼낼 수도 없다고 하셨다. 어머니가 무른 음식으로 식사를 준비하지만, 다양한 음식을 드시지 못하여 작년보다는 좀 야위었다. 몇 해 전 찾아온 뇌경색으로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데, 병세가 최근 호전되어 하루 몇 시간씩 주간보호센터에서 시간을 보내고 계셨다. 아침에 조반을 드시고 나면 현관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얌전한 아이처럼 센터에서 운영하는 셔틀버스를 기다리셨다. 아버지의등이 작년보다 더 조그마해졌다.

친정집은 너무 낡았지만, 부모님은 이사하기를 몇 년째 거절하셨다. 익숙한 동네를 떠나기가 싫고, 이사하기에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하셨다. 집안 내부는 손볼 곳 투성이었다. 오래된 물건들이 쌓여 있고 벽지와 마루도 낡아서 환기해도 특유의 묵은 냄새가 사라지지 않았다. 목욕탕 하수구에서는 쾨쾨한 냄새가 올라오는데 청소해도 해결되지 않았다. 이사를 꺼리는 마음을 이해하지만, 오랜 시간 냄새나 얼룩에 익
숙해져 있는 두 분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머니는 텔레비전 트로트 프로그램을 즐겨 보셨다. 귀가 어두워서 보청기를 사용하지만, 집에서는 불편한 보청기를 빼고 계셨다. 트로트가 쿵작쿵작 요란하게 울리는 집안에서 대화하려면 우선 볼륨을 줄여야 했다. 낮에는 그래도 괜찮은데, 어머니가 새벽에 듣는 유튜브 트로트 소리는 말 그대로 자다가 날벼락이었다. 옆 방에서 자다 깨어나 다시 잠들기 힘들면 나도 유튜브를 큰소리로 켜고 보았다. 어차피 내가 내는 소음도 못 들으시니 그런 거지만, 누군가 본다면 요샛말로 웃픈 상황일 것이다.

트로트 프로그램은 재방송을 많이 했는데, 보고 또 봐도 재미있어하셨다. 옆에서 함께 보면 더 좋아하셔서 억지로 앉아 있다 보니 요즘 인기 있는 트로트 가수 이름을 줄줄이 꿰게 되었다. 더 오래 있다가는 취향이 바뀔지도 모를 일이었다.

친정(親庭)은 시집간 여자의 친부모가 사는 집이라는 뜻이지만, 그 한자를 살펴보면 ‘가까울’ ‘친할’ 친(親)자에 ‘정원’ ‘뜰’ 정(庭)자이다. 친근하게 찾아가 쉬었다 올 수 있는 정원 같은 곳이라는 뜻일까. 내게 친정은 언제 찾아가도 환영받고, 무엇을 달라고 해도 기꺼이 내어 주는 너그러운 곳임에 틀림이 없다. 그럼에도 기거할 집이 아니고 정원 정(庭)을 쓴 이유는 출가한 여인이 마음을 접고 시집간 가정에 집중하
라는 뜻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 풍조가 바뀌어 핵 가족화된 지금도 그 오래된 한자어의 의미는 퇴색되지 않았다. 부모님 뜰은 잠시 쉬었다 가는 곳일 뿐, 성인이 되어 떠나간 자식과 부모는 그렇게 분리되어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약하디약한 두 분을 두고 그곳을 떠나왔다. 안 보면 잊어 버리고 또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나에게는 아직 뒷바라지가 끝나지 않은 자식이 있고 내가 해야 할 일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사는 것은 잔인한 일이다.

이젠 나이를 먹어 가는지 출장을 겸해 한국을 방문하는 것이 매년 조금씩 더 힘들다. 이번엔 할 일이 많아 유난히 분주했다. 몇 주 동안 집을 떠나 언니 집과 친정을 오가며 짐을 풀었다 다시 싸기를 반복하고, 시장에 나가 새 거래처를 만들거나 물건을 구매하는 것이 고달파서 내년엔 한 해쉬어 볼까,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날 아침에 아버지가 위태로운 걸음으로 대문 밖까지 따라 나오셔서는 “이번에 보는 게 마지막인 것 같은데….” 하시고 말끝을 흐리셨다.속내를 들킨 것 같아 돌아오는 발길이 무거웠다.

내 하나뿐인 ‘친근한 뜨락’은 점점 더 작아지고 쇠퇴해 간다. 나물 이름 따위는 외우지 않으려는데 우리 어머니는 자꾸만 집에 있는 물건들을 정리하신다. 가족으로 얽혀 산 세월의 길이만큼 회복되지 못한 상처도 남아 있지만, 스러져가는 부모님의 인생을 생각하면 후회 없이 사랑만 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아버지가 눈에 밟혀 내년 이맘때는 또 비행기 티켓을 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