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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수필] 오늘도 맛있게
작성일
2024.01.25

수필 대상


오늘도 맛있게

김태진(파나마)


“저기 있잖아….”
남편이 어렵게 입을 뗐다.

“…. 그런 이유로 이번 달은 돈이 다 떨어졌어.”
달력을 보니 아직 10일. 월급이 들어오려면 아직도 보름은 더 있어야 한다. 보름 동안 돈 없이 남편과 나, 그리고 아이 둘까지 먹고살아야 한다는 얘기다.

괜찮았다는 건 아니다. 울컥 화도 치밀었고, 좀 서럽기도 했다. 원망은 왜 안 했겠나. 그래도 내 가족을 굶길 수는 없지 않나. 정신을 차려야지. 어차피 그동안 늘 넉넉하게 지내왔던 것도 아니고. 결정적으로 이곳은 친정이나 시댁의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는 지구 반대편이지 않나.

일단 밑반찬을 만들어 놓기로 했다. 맛깔난 밑반찬 몇 개면 한 며칠 버틸 수 있다. 즉시 뒤뜰에 자라고 있는 빠빠야 베르데(그린파파야) 몇 개를 땄다. 일부러 심은 것도 아닌데,이 나라는 빠빠야나무가 참 흔하다. 평소라면 그냥 떨어져 썩어 버리던 빠빠야인데, 지금은 참 소중한 밑반찬거리이다. 수확한 빠빠야 베르데는 필러칼로 껍질을 까고 속을 파낸 후 채칼로 잘 채쳐 둔다. 작은 아이가 또마떼 체리(방울토마토)를 좋아하기에 몇 달 전에 몇 그루 심어두길 잘했지, 또마 떼 체리도 몇 개 수확한다. 책상 위, 서랍 속, 가방 속을 잘뒤져 보면 동전이 나온다. 몇 개를 모아 단지 내 마트에 가서 까마론 쎄꼬(마른 새우)를 한 봉지 산다. 집까지 걸어오면서 단지 입구에 자라고 있는 리몬나무에서 리몬(레몬)을 하나 딴다. 리몬나무는 가시가 길어서 조심해야 한다

이제 재료가 다 모였다. 아이가 있으니 매운 고추는 빼고, 마늘만 빻아 준다. 리몬즙을 짜서 넣고 피시소스도 넣는다. 까마론 쎄꼬는 한국의 마른 새우와 달리 단단하니까 물에 불렸다가 물기를 빼고 쓴다. 또마떼 체리는 반으로 갈라준다. 이것들을 잘 빻은 후 미리 채쳐둔 빠빠야 베르데와 잘 섞는다. 이렇게 쏨땀이 완성된다. 우리 가족이 사는 이곳 빠나마(파나마)는 동남아와 기후가 비슷해서인지 식재료도 많이 비슷하다.

십여 년 전 빠나마에서 근무 중인 남편과 결혼하면서 이곳에 왔다. 새롭고 낯선 환경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언어를 배우고 운전을 하며 동네를 누비고 다녔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아이는 좀 나중으로 미뤘다. 한국에 있을 때에도 엑스뜨랑헤로(외국인)처럼 살다 보니 빠나마에 왔다고 해서 문화 충격을 받거나 적응이 힘들어서 고생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잘 지내다가 아이를 갖게 되었다. 낯선 환경, 문화 충격, 적응…. 이런 단어들은 빠나마가 아니라 아이와 함께 시작되었다. 아이가 생기기 전에는 성격이 잘 안 맞는 남편과 크고 작게 싸우곤 했는데, 아이가 생기고 나니 그때 싸웠던 것들은 그야말로 소소한 일이 되어버렸다. 운전을 하고 동네를 누볐던 경험은 생존을 위한 훈련이 되었다. 식구가 늘어난다고 해서 수입도 늘어나는 건 아니어서 아끼는 생활이 기본이 되었다.

아이 둘이 학교를 다닌다. 아침 등교는 남편이 출근하면서 시켜 주고, 3시 정도 하교는 내가 간다. 아이들은 차만 타면 배고프다며 뭐라도 사 먹자고 성화이다. 배고플 때이고, 배고플 시간이지. 주머니 사정이 괜찮을 때는 뭐라도 사 먹이고 돌아오곤 했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지 않나. 돈이 없으면 몸을 좀 더 부지런히 움직이면 된다. 등하굣길에는 큰길로 통하는 골목을 빠져나가야 하는데, 그 골목에 쁠라따노(바나나같이 생겼으나 생으로 먹을 수 없음) 나무가 꽤 있다. 쁠라따노는 익은 정도에 따라 마두로(노란색, 잘 익음)와 베르데(초록색, 익기 전)로 나뉜다. 골목에 있는 쁠라따노 나무는 주인이 없어 보이기에 차에서 잠깐 내려서 베르데 몇 개를 딴다. 쁠라따노 베르데는 껍질이 두꺼워서 칼집을 내야 껍질을 깔 수 있다. 그다음 2센티정도 두께로 잘라 놓고 돌멩이로 하나씩 눌러서 으깬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빠나마 가정집에서는 쁠라따노 베르데를 돌멩이로 으깬다. 그래서 부엌에 돌멩이가 하나씩 있다. 으깨진 쁠라따노 베르데를 기름에 튀기고 가는소금을 살짝 뿌려주면 맛있는 빠따꼰(쁠라따노 튀김)이 된다. 식사로도 간식으로도 많이 먹는 음식이다.아이들도 군말 없이 먹는 몇 안 되는 간식 중에 하나다. 남겨둔 쁠라따노 베르데는 며칠 지나면 노랗게 익어 마두로가된다. 마두로는 적당한 두께로 편 썰어서 기름에 구우면 이또한 맛있는 간식 및 반찬이 된다.

아이 둘이 다니는 학교는 우리 단지에서 1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인터내셔널 스쿨이다. 사실 돈이 다 떨어진 이유도 이 학교의 비싼 학비 때문이다. 수도에 있는 인터내셔널 스쿨보다야 저렴하지만 이 동네에서는 가장 비싼 학교이다. 남편이 이 나라에서 일자리를 구하고 있을 때, 사립 학교에 면접을 보러 간 적이 있었다. 공립보다 좋은 교육환경이라고 자랑하는 사립학교여서 나름 기대를 하고 갔었다는데, 수업하는 모습을 보고는 그야말로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교실에 에어컨만 달아 놓으면 무얼 하나, 교사는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교실을 뛰어다니든 말든 판서하고 설명하는 걸로 자기 월급값을 다했다는 듯했다. 아이가 생기기 전에도 남편은 빠나마가 발전하려면 교육이 우선돼야 하고 공교육이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면서 걱정했었고, 아이가 생기고 나서는 우리 아이들을 그런 교육 환경에는 도저히 넣을 수 없다며 걱정했다. 그래서 나는 아이가 한 살도 안 되었을 때부터 학교나 커리큘럼들을 알아보러 열심히 다녔고, 지금의 학교를 찾게 되었다. 첫째 아이가 네 살이 되어 그 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그 학교의 최초이자 유일한 한국 아이였다. 그리고 곧, 대부분의 재외국민 자녀가 그러하듯 그 학교에서 가장 똘똘한 학생이 되었다. 아이들은 잘하고 있으니 이제 부모인 나만 잘하면 된다. 돈 없는 문제를 해결하면서 말이다.

이렇게 돈이 없을 때야말로 냉장고를 털어 먹기 좋은 때이다. 이 나라는 닭고기가 저렴한 편이라서 미리 사서 얼려 놓곤 했는데, 냉장고를 뒤지다가 전에 얼려 놓은 닭고기를 발견했다. 남편은 텃밭을 정리하다가 냐메(마) 덩굴을 발견하고는 뿌리 쪽을 파헤쳐서 냐메를 하나 캤다. 사실 평소에는 덩굴이 나무를 감고 올라가는 것을 싫어해서 냐메인 것을 알면서도 텃밭 정리할 때마다 끊어버리곤 했다는데 지금은 식재
료 하나하나가 소중하다 보니 냐메를 수확했다는 것이다. 또한 텃밭 구석 해가 잘 안 드는 곳에서 나는 냄새를 찾아가서 꿀란뜨로(고수)를 발견하고 수확해 왔다. 닭고기와 냐메, 꿀란 뜨로가 있으면 소파 데 뽀요(닭고기수프)를 만들 수 있다. 식재료들을 잘 씻고 다듬어서 물에 잠기도록 넣고 푹 끓이면 된다.  마소 르 까 (옥 수수)도 넣으면 좋은데, 그건 심어 놓은 게 없으니 나중에 월급 들어오면 사서 다시 한번 요리하기로 했다. 아직 아이가 생기기 전, 그나마 좀 넉넉하던 시절에 이집을 구매했다. 작은 잔디밭이 있는 집이다. 잔디밭은 곧 파헤쳐지고 텃밭으로 변해 지금은 각종 나무가 자라고 있다.

망고, 아 구아까테(아보카도), 빠빠야, 유칼립투스 같은 큰 나무도 있고, 리몬, 파프리카, 또마떼 체리, 깻잎 같은 키 작은나무도 있다. 고구마도 한쪽 칸을 덮고 있고, 수박이나 멜론, 냐메 같은 녀석들은 따로 심지 않고 씨나 냐메 조각을 버려 두기만 해도 곧 싹을 틔워 잘 자란다. 마이스(옥 수수)를 심어 키워 보고 싶은데 이건 늘 실패를 한다. 식물이 잘 자라는 만큼 잡초도 잘 자라서 부지런히 정리하지 않으면 곧뱀이 나올 지경이 된다. 실제로 뱀이 나온 적도 있다.

집도 식구가 늘어남에 따라 필요한 공간이 늘어나서 계속 증축을 해 가며 살고 있다. 남편은 바쁘고 시간을 내기힘들어서 내가 구상하고 업자도 구하고 재료도 사 나른다.업자나 재료의 수준이 별로 대단할 게 없다 보니 증축한 곳은 물론이고 집 전체적으로 손볼 곳이 자꾸 생긴다. 어차피 돈 들여서 업자를 구해도 손이 가는 건 매한가지이니 남편과 나는 집수리에 전문가가 되어 간다. 돈이 늘 넉넉한 게 아니다 보니 돈이 생길 때마다 재료도 사 놓고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방법을 강구하면서 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채워 간다

그렇게 월급날까지 잘 버텼다. 월급이 들어온 주말은 다음 한 주 먹거리를 사러 마트에 간다. 남편이 세르도 몰리도 (돼지고기 다짐육)와 까르네 몰리도(소고기 다짐육)를 좀 골랐다. 중국 마트에서 두부와 프리홀 나시도(숙주나 물)도 골랐다. 마트에 가기 전에 당면을 물에 담가 두고 만두피를 냉장실에 내려놓았다면서 그것들로 만두를 해 먹자고 했다. 식재료들을 깨끗하게 다듬고 소를 만들어 놓은 후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아이들은 어느새 자라서 만두를 빚을 줄 안다.남편은 찜통을 준비하더니 만두가 빚어지는 대로 쪄냈다. 우리 식구들은 누가 만든 만두인지 맞춰 가면서 갖 쪄낸 만두를 맛있게 먹었다.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맛난 것들 해 먹으며 잘 지내고 있다.

이렇게 돈이 없을 때마다 느끼는 건데, 돈이 없으면 생활 하는 게 참 쉽지 않다. 그렇다고 불행하게 살고 싶지는 않다. 돈이 많으면야 행복하겠지. 그렇다고 돈이 많아질 때까지 불행하게 살아서야 되나. 지금은 아이가 하나 더 생겨 세 명이다. 돈이 없을 때가 더 많겠지. 그럴수록 더 부지런히 움직여야겠고 더 다양한 방법을 찾아야겠지. 난 행복하게 살기로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