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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체험수기] 나에게 인도네시아란?
작성일
2024.01.25

체험수기 가작


나에게 인도네시아란?

김형석(인도네시아)



1992년 5월 11일 설렘과 걱정 반으로 인도네시아행 비행기에 올랐던 날을 생각하면 30년이란 세월을 인도네시아에서 보내고 있는 나는 인도네시아와의 인연이 한 편의 예정된 인간 극장이라 생각한다.

피천득 시인은 ‘어리석은 사람은 인연을 만나도 몰라보고, 보통 사람은 인연인 줄 알면서도 놓치고, 현명한 사람은옷깃만 스쳐도 인연을 살려낸다.’라고 그의 저서에서 언급하였다.
이제 나에게 인도네시아는 어떤 인연이 있었나를 뒤돌아보며 타국에서 살며 겪은 그동안의 삶을 진솔하게 살펴보려고 한다

나는 호남평야의 작은 농촌 마을에서 낳고 자라 초등학교 시절을 시골에서 보냈다. 멀리서 완행버스가 흙먼지를 날리며 신작로를 달리는 것을 보면 버스만 타면 세상 어디든가는 줄 알던 때도 있었고 멀리 보이던 신태인의 교회 종탑이 제일 높은 걸로 알았다. 또한 친구 삼촌이 베트남전에 갔다 왔다고 파인애플 통조림과 바나나 맛을 보여 준 꿀맛 같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렇게 지내던 시골촌놈이 초등학교 6학년 때 전주로 전학 가서 학업을 시작하게 되었고 그 당시 유행하던 해외 펜팔을 통해서 영어 공부에 집중하게 되었으며 점점 더 외국에 관심을 키워 갔다. 언젠가는 나도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해외에 꼭 가겠다고 생각하던 중 1982년 고등학교 1학년 여름 무주에서 제8회 아태-잼버리에 보이 스카우트로 참여하였다. 아시아 각국에서 참가해서 다양한 잼버리 활동을 마치고 퇴영식 날에 친선행사로 선물 교환이 있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인도네시아를 직접 접하게 되었다. 나의 선물교환 대상자는 인도네시아에서 스카우트 대원을 인솔해 오신 여 선생님이었다. 난인삼차와 태극부채를 선물했고 선생님은 인도네시아 스카우트 관련 우표와 지폐, 빤짜실라(인도네시아 건국 이념 5대 원칙) 독수리 배지(Badge)를 선물로 주셨다. 직접 받아 본 첫 해외 선물이 인도네시아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지금도 그 추억의 기념품들을 잘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흘러서 1989년 서울에서 무역 관련 업체에 입사하게 되었다.
난 대학에서 산업미술을 전공해서 카펫 디자인 관련 업무를 맡아 일을 시작했고 해외 바이어와 디자인과 관련한 일을 볼 때는 영어로 대화를 해야 하다 보니 영어 회화 능력이 필요했다. 처음엔 능숙하지 못했었지만 계속하다가 보니 실력은 자연스럽게 조금씩 늘게 되었다. 그 후에는 디자인 외에도 자재관리와 공장 생산 관련 검사 업무까지 하게 됐고 이른 나이에 대학 친구의 소개로 사귀던 아내와 결혼도 하게 됐다. 1992년은 근무 중인 회사에서 그동안 국내 생산에 어려움이 많아 카펫 생산기지를 인도네시아로 옮겨 공장을 가동하게 되었다. 그래서 1982년 잼버리에서 인도네시아 선생님을 만나고 10년이 지난 19 92년에 첫 해외 출장을 인도네시아로 가게 된 또 한 번의 인연이었다. 하지만 당시 인도네시아는 저개발국으로 다들 해외 파견 근무를 피하려는 시기였고 나 또한 갓 결혼했을 때라 아내를 혼자 두고 가는 것이
매우 부담스러웠다. 그렇다고 다들 가는데 피할 수도 없어서 경험이라고 생각하고 인도네시아어 용어집 하나 달랑 들고 첫 3개월 파견 근무를 시작했다. 현지 공장에 도착해서 업무를 하다 보니 먼저 온 생산직 분들과 이런저런 갈등도 겪고 서울 본사와 마찰도 점점 많아지고 현지인과의 언어소통,기후, 음식도 적응이 쉽지 않아 서울 갈 날만 기다리며 참고 지냈다. 그렇게 1년에 2번, 최소 6개월을 있다 보니 이젠 더
견디기 힘들다는 생각도 들고 계속 있다간 빠르게 변화하는 한국에서 남들보다 뒤처지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해서 불안한 마음이 더해 2번째 파견 때는 몸무게가 20kg 가까이 빠져 공항에 마중 온 아내가 몰라볼 정도였다. 파견 근무를 마치고 한국 본사로 돌아갈 때마다 인도네시아 공항에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악담을 하고 한국으로 갔다. 하지만 이런 생활은 2년 넘게 진행됐다. 결국 이런 맘으로 일을 계
속할 수 없어 이직도 생각해 보고 여기저기 알아보기까지 했다.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아내와 어린 아들과 떨어져 지내는 것이었다. 결국 회사에서 최종적으로 가족과 함께 인도네시아로 발령내 주는 것으로 허락받아 단기 파견이 아닌 정식 주재원으로 19 95년 9월 30일 가족과 함께 출국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부랴부랴 살림을 정리하며 주위 친지나 친구들에게 인사하며 준비할 당시 인도네시아에 가서 가족들과 잘 지낼 수 있을지 애처로운 눈빛으로 걱정해 주었다. 그분들 중에는 인도네시아와 인도를 제대로 구분 못 하는 사람들이 많던 때이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새로운 삶이 기다리는 인도네시아로 향했다.

하지만 당시의 인도네시아 공장 상황은 도착해서 알고 보니 1년 정도 더 운영해보고 별 진전이 없으면 회사 내부에서 카펫 사업을 중단하려 고민하고 있었던 터였다. 주 거래처인 북미 바이어가 수입 기반을 중국으로 전환하겠다고 통보해 온 것이다. 하지만 가족과 함께 한국 살림까지 정리하고 온 상황에서 나는 어디로도 피할 수 없었다. 내게는 부모님으로 부터 물려받은 위기에 강인한 한민족(韓民族)의 피가 몸 안에 오롯이 흐르고 있지 않은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나는 이 말의 가치가 내 일터에서 반드시 실현될 거라는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 독한 마음으로 임했다.
발령받은 초기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존폐위기 앞에 실오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상황에서 싱가포르 에이전트로부터 알게 된 생소한 나라 브루나이(Brunei)라는 작은 도시국가의 카펫 수입업체로 연락을 했고 얼마 후 답신이 왔다, 싱가포르에 있는 큰딸이 자카르타에 잠시 가니 한번 만나는 보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상담만이 아니라 단한 컨테이너 오더라도 받아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상담은 짧은 방문으로 자카르타 하얏트 호텔 커피숍에서 하게 되었고 나의 간절함을 봤는지 그날 그 자리에서 바로 시범 오더 20피트 한 컨테이너 물량을 손에 쥐게 되었다. 하지만 소량 수주를 윗선에서 바라보는 시선은 그저 내가 살아 남으려고 발버둥치는 나약한 몸짓으로만 보았다. 그래도 브루나이 거래 업체는 그 후 작은 시장이긴 해도 수익성과 상거래에서 신사적인 관계로 중국과의 경쟁에 밀려 잃게 된 미
국 시장 밖에서 항상 나에게 용기와 회생의 불씨가 되어 주었다.

나는 가족과 함께 공장 사택에서 해외 거주를 시작했다.
그해 19 95년 12월 크리스마스 전날 독일 하노버에서 열리는 카펫 박람회 참관을 위해 회사에 각고 끝에 마지막 기회라 는 조건으로 출장을 허락받았다. 그때 당시 현지 총괄 법인장님이 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절실한 기회였다. 무거운 맘으로 첫 유럽 출장길에 올랐고 난 하노버 박람회에 행사가 시작하는 첫날, 전시관으로 들어서자 대학 합격자 발표 게시판에 내 이름이 없는 걸 보고 창피해서 뒷걸음 했던 때가 생각날 정도로 난감하고 부끄러웠다. 지금 내가 담당하고 있는 카펫에 대한 전반적인 실력 격차가 너무 큰 현실을 알고 보니 과연 현실의 장벽을 감당할 수 있을까 두려웠다. 답답한 맘으로 3일이라는 시간을 유럽 최대 규모의 전시관들을 그저 다람쥐처럼 주변을 맴돌며 돌아가서 뭐라고 보고해야 할까 걱정에 한숨만 나왔다. 회사에서는 내가 돌아오면 특별한 이변이 없으면 카펫 업은 중단 절차로 진행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날 3일을 다람쥐처럼 돌다가 전시 제품이 우리 제품과 유사한 벨기에 카펫 수입상 전시 부스(Booth)에서 명함 한 장만 가지고 돌아오며 다짐했다.
오늘 나는 빈손으로 되돌아가지만 곧 유럽 시장에 반드시 진출할 수 있을 거라고. 귀국 후 현지 법인장님은 나를 보고 아무런 말씀 없이 어깨만 도닥여 주셨다. 듣지 않아도 내 입장과 심정을 헤아려 주신 것이다. 몇 개월 후 명함 한 장만으로 시작한 일면식도 없는 바이어와 견본만 서로 보내고 받으며 추진하다가 마침내 직접 공장을 방문하러 오게 되었다.
수카르노 하타 공항 국제선 대기실에서 바이어를 기다리던 심정은 기대감과 앞으로의 전개될 일로 만감이 교차했다. 입사 당시 카펫 디자이너로 시작한 내게는 상담이 서로가 쉽게 이해하고 생산에 바로 반영할 수 있다는 것이 타 업체와 큰 경쟁력이 되었다.

‘궁즉 통(窮則通)’,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은 나의 신념이었다. 그래서 불가능에서 ‘불’은 없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고 유럽을 거점 시장으로, 중동, 동남아시아 외에도 한국, 일본, 대만, 호주, 뉴질랜드까지 아메리카 지역 밖으로 힘있게 진출해 나갔다. 그러다 19 9 7 년 말부터 조짐이 보이던 세계적 외환 위기가 인도네시아 또한 IMF 사태라는 위기가 엄습했고 당시 만연한 인도네시아의 부정부패와 현지인과 화교들의 오랫동안 쌓여 온 갈등까지 동시에 폭발해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유혈사태가 이어지며 치안이 극도로 불안했다.
인도네시아에 진출해 있던 여러 국가에서는 자국 기업 근로자와 교민을 특별 항공기까지 동원해 탈출시키는 최악의 시기를 겪기도 했었다. 반면에 한국 진출 기업은 동반가족만 대부분 일시적으로 귀국시키고 한국인 책임자들은 현지 근로자와 협력해 공장을 지키며 생산을 멈추지 않았다. 수출 컨테이너 차량이 습격을 받기도 하고, 일부 교민들은 차량 이동 중에 테러를 당하기도 했지만 어려움을 감내하며 일터를 끝까지 지켰다. 나는 해외 출장에서 인도네시아로 복귀하는 과정에서 폭동 세력이 고속도로까지 점거하는 상황이 발생해 공항으로 다시 돌아와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하루를 꼬박 지내야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와서 되돌아 보니 아찔한 순간이 참 많았었다. 이와 같은 세계적인 불황 속에서도 카펫은 당시 쿠알라룸푸르에서 가장 큰 바이어가 우리의 월수주물량의 50%까지 차지하는 최대 규모였는데 다행히 말레이시아 국가에서 고정 환율 정책의 성공으로 외환 위기를 잘 버텨 주어 타격 없이 납품을 계속할 수 있었고 유럽의 유로화가 강세여서 벨기에 바이어는 오히려 생산량을 높여야 하는 고민까지 했었다.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이때가 가장 보람이 컸고 수출 실적도 가장 많았던 시기였다.

그렇다고 하는 일이 계속 잘 될 수만은 없었다. IMF 사태 이후 자재비 폭등, 인건비의 가파른 상승과 중국의 지속적인 저가 공세에 10년간 가동해 온 카펫 공장을 최종 중단하고 함께 운영하던 스웨터 생산 공장으로 전환하기로 2001년 서울 본사에서 결정을 내린 것이다. 나의 인생에 또 중대고비가 찾아온 것이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하루에도 수십 번 마음이 흔들렸다. 회사에서는 나를 스웨터 부서로 옮겨 근무하면 된다며 카펫은 잊고 이젠 스웨터를 배우라는 것이다. 나는 회사와 논의를 거듭해 결국 회사에서 부담이 되는 카펫 직원 모두를 데리고 퇴사하는 것으로 하고 카펫 관련한 일체를 정산하여 인수하기로 결정이 났다. 함께 해 온 현지 카펫 직원들도 믿고 따라 나오라는 이야기를 듣고 처음은 불안했겠지만, 제안과 설득을 받아들여 다행히도 잘 해결되어 나와 함께 근무했던 직원들 모두와 2002년 1월부터 첫 개인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인도네시아 생활 10년 차에 그렇게 오기 싫어했던 인도네시아에서 이젠 내가 직접 사업을 끌고 나간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다. 공장 장소도 카펫 생산 중단 결정이 난 후 스웨터 부서 지원 업무를 병행하며 일할 때 지금의 공장 앞으로 여러 번 지나다녔던 곳이다. 그럴 때마다 이런 허름한 곳이라도 임대한다면 좋겠다고 속으로 말하며 지났었다. 그런 맘이 통했는지 내가 바라던 곳에 공장 이전을 하게 되었고 또 일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여러 도움의 손길과 응원으로 기울었던 사업을 다시 세워 나가게 되었다. 혼자서 영업과 생산관리를 다 해야 했다. 그렇게라도 해서 끌고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은 지칠 틈 없이 또다시 생기를 얻었고 독수리처럼 비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생산하는 카펫은 중국 제품과 해외 시장에서 해를 더할수록 치열한 경쟁을 지속하면서 인건비 상승과 자재 비용 인상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또다시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고 한계점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품목을 찾으려고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는 사이에 컴퓨터 자수를 알게 되었고 새롭게 도전하게 됐다. 그 당시는 한국 대형 의류 수출업체 공장이 인도네시아로 대거 이전을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일의 비중이 점점 카펫에서 의류 자수로 옮겨가게 됐다. 2012년에 결국 카펫을 내 손으로 내려놓게 됐다. 그 대신 컴퓨터 자수가 빨리 자리를 잡도록 관련 시설을 보강 확장하고 오더를 확보하기 위해 나의 일상이 또다시 일 중독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사업의 특성상 24시간 기계가 돌아가는 업종으로 카펫과는 체질상 다른 품목이라 긴장하지 않으면 대형 불량 사고가 날 수 있는 예민한 업종이다. 결국 일에 빠져 살던 내게 2013년 말 급성 당뇨와 고혈압이 와서 급히 한국으로 치료를 받으러 가게 되었다. 한 달 사이에 20kg 넘게살이 빠져 다른 큰 병에 걸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겁도 났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지나온 인도네시아의 삶을 떠올려 보니, 나는 앞만 보고 달린 것이었다. 다행히 다른 합병증 없이 병원 치료를 잘 받고 한 달 후에 다시 인도네시아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 후 나는 공장 운영에 대한 전반적인 조정을 통해 물량 위주의 생산에서 수익성 위주로 전환하였다. 조정 후 사업 채산성이 점점 개선되고 보다 수월한 공장 운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개인적 삶의 질도 많이 개선되었다. 2014년은 10년 넘게 임대로 있던 공장을 수년간 추진 끝에 최종 매입을 하게 되었고 인도네시아 국적 취득과 관련해서도 진행 과정이 복잡했지만 1년 반 정도 걸려 2019년 5월에 큰 어려움 없이 받게 되었다. 이제 난 재외 교민에서 아직은 소수인 인도네시아 재외동포가 된 것이다. 그렇게도 오기 싫어했던 나라 인도네시아! 뭐랄까? 인도네시아는 내게 강한 자석과도 같이 끌어당겼던 것은 아니었나, 내가 인도네시아를 선택하기 전에 이미 오래전 역으로 선택된 것은 아닐까?

지금은 수카르노 하타 공항 신청사를 이용해 한국을 오가지만 과거는 지금의 2청사를 통해서 오갔다. 처음 오갈 때는 출입국장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로 머리가 아프기까지 했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그 냄새의 주인공은 당시 청사내에서도 현지 공항 직원들이 담배를 피우던 끄레텍(Kretek)이라는 정향이 섞인 현지인들이 피우는 담배의 향이었다. 그런데 오랫동안 살다 보니 묘하게도 해외 출장을 마치고 인도네시아로 돌아올 때 공항에서 이 냄새를 맡으면 오히려 긴장이 풀리고 맘이 편안해진다. 현지에서 알고 지내는 다른 한국분들도 같은 기분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오래 머물다 보니 냄새도 정감이 가나 보다.

누구나 일생에 세 번의 기회가 온다는 얘기가 있다. 내게는 인도네시아로 오겠다는 결정, 직접 내 사업을 인도네시아에서 하겠다고 한 결정, 인도네시아 국적을 취득하겠다는 결정이 아닌가 싶다. 이런 결정이 당시에는 쉽지 않았지만 함께한 아내가 곁에 있어 큰 힘이 되었다. 이 글을 쓰며 고맙다고 꼭 말하고 싶다.

나에게 인도네시아는 삶의 터전이 되어 주었고 세계로 뛰면서 일할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내 청춘의 뜨거운 열정을 품어 주었다. 이제 인도네시아는 30년 전 내 나이 28세에 처음 봤던 경제적으로 빈약한 불모의 뜨겁기만 했던 열도의 나라가 아니다. 풍부한 천혜 자원과 세계 4위의 인구를 갖고 있으며 또한 젊은 노동 인프라, 치안과 정치적으로도 안정되고 있어 아시아 여러 나라들 가운데에서 앞선 성장을 가속화하고 있다. 2023년 올해는 한-인니 수교 50주년이다. 양국 간 교류가 다양한 분야에서 밀접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국민 정서적으로도 상호 친밀감이 더욱 확대되고 있다.지난 9월 5일은 윤석열 대통령께서 인도네시아를 방문하여 양국 간의 우호 관계를 더욱 단단하게 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젠 인도네시아에서 한국산 스마트폰을 들고, 자동차와 전기자동차를 타며 가전제품 사용하고, K푸드를 즐겨 먹고 K콘텐츠를 즐기는 현지인들이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어 한류 열풍은 잠시라도 인도네시아에 머물다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방산 산업 또한 어느 나라보다도 지속적인 협력을 이어 가고 있으며 인도네시아 미래를 이끌게 될 새 수도 누산따라(Nusantara) 이전과 관련한 협력 및 진출도 가시화되어 가고 있다. 바라기는 우리 대한민국의 젊은 세대가 코리안 디아스포라를 이끌며 기회의 나라 인도네시아에 더 많은 관심과 열정을 가진다면 내가 보낸 청춘보다 더 큰 꿈을 이루리라 확신한다.

이제 나는 인도네시아에서 짧지 않은 세월을 살면서도 발리 한번 제대로 못 가 본 일벌레의 허물을 벗고 작은 나비처럼 자유롭게 소소한 행복과 감사한 삶을 제2의 고향 인도네시아에서 계속 이어 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