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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체험수기] 꽃핀
작성일
2024.01.25

체험수기 우수상


꽃핀

안미혜(미국)



다시 시애틀로 돌아왔다. 타코마 공항은 여전히 붐비고 있었지만 마음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컨베이어 벨트가 토해 낸 캐리어들은 초과 중량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꽉꽉 채워져 있다. 어머니는 가방 구석에 손가락 들어갈 틈이라도 있으면 김 한 장이라도 더 넣어 주려고 땀을 흘렸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보다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아빠, 제발, 그만! 이러다 공항에서 캐리어 터지면 어떡해?”
“그래? 그럼 그만 넣자.”

집에 도착해서 가방 여기저기서 나오는 자질구레한 것들을 발견할 때면 가슴이 먹먹해졌었다.
가득 채운 가방 두 개를 얹은 카트를 힘껏 밀고 가느라 겨드랑이가 후끈거렸다. 공항 내에서 엘리베이터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나서야 겨우 택시를 탈 수 있었다.

택시 기사는 키가 작고 얼굴이 까무잡잡한 중년 남자다.
내 여행 캐리어를 힐끗 보더니 어디로 가는지 물었다. 처음엔 내 말소리를 못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내가 다시 크게 “시애틀 다운타운!”이라고 말하니 알았다는 미소를 지었다. 택시 기사는 무거운 여행 캐리어 두 개와 작은 백을 트렁크에 싣고 내 옆으로 와 뒷문을 열어 주었다. 뒷자리에 앉아 벨트를 매고 택시 기사를 보니 두터운 플리스 점퍼 차림이었다. 한국으로 떠날 때는 늦여름이었는데 두 계절이 지나가 버린 모양이다. 택시 기사는 다시 자세한 주소를 물었다.

“2401 3rd Ave, right?”

투박한 인도식 억양이었다. 나는 운전기사의 특유의 써드 발음이 낯익고 편안했다.

“Yes.”

나는 억지로 입 꼬리를 살짝 올리며 대답했다. 택시 기사는 신이 난 듯 내비게이션도 안 켜고 출발했다. 기사에겐 익숙한 동네인 모양이다. 녹녹한 몸을 택시 의자에 묻고 창밖을 바라봤다. 라디오에서 편안한 재즈 음악이 나오고 있었다. 경쾌한 색소폰 선율이 가슴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귓전에서 맴돈다.

입안에 뜨거운 침이 가득 고여서 꿀꺽 삼키는데 기어이 두 뺨 위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나는 미동도 없이 창밖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시애틀 하늘은 비행기에서 본 것과 달리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흐린 날씨가 낯설었다. 시애틀에서 출발해서 다시 시애틀로 돌아오는 길인데도 처음 와 보는곳 같았다. 풍경도 냄새도 거리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길도 나무도 하늘도 익숙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한국의 높은 하늘과 사람들, 음식들이 벌써 그리웠다. 그리움 저편에는 언제나 지친 딸을 보듬어 주시는 부모님이 계셨다.

몇 년 전, 한국 방송을 보다가 한국에 새로 유행하는 감자칩을 돈을 줘도 사기 힘들 정도라는 뉴스를 들었다. 그때 마침 남편이 한국 출장을 가게 되었는데 아버지는 항상 그러하셨던 것처럼 ‘남편 편에 뭘 사서 보낼까’ 하고 전화를 하셨다.

나는 철없이 ‘뉴스에서 본 감자칩이 한번 먹어 보고 싶다’ 고 말했다. 아버지는 미국에 사는 딸보다,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더 모르고 계셨다. 그런 게 있었냐며 알아본다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아버지가 영원히 내 옆에서 든든한 나무가 되어 주실 줄만 알았다.

출장에서 돌아온 남편이 깜짝 선물이라며 이민 가방을 거실에 풀었다. 커다란 이민 가방 안에서 노란색 감자칩 봉지가 하염없이 나와 바닥에 쌓였다. 나는 깜짝 놀라서 아버지께 전화를 했다.

“그까짓 감자칩이 뭐 대단한 것이라고 가게에서 한 사람당 하나씩 밖에 안 판다니. 내가 공장까지 찾아가 사정해서 겨우 한 박스 구해왔다.”

핸드폰을 통해 들려오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웃음을 깨물고 계신 환한 얼굴이 겹쳐졌다.

“그냥 한번 말해 본 건데…. 아빠는. 뭐하러 힘들게 공장 까지 찾아가?”
“네가 그게 얼마나 먹어 보고 싶었으면 부탁을 했을까.궁금해서 나도 엄마랑 한 봉지 뜯어 먹어 봤다.”
“아빤 참….”
“애들이랑 실컷 먹어. 주변 사람들도 한 봉지씩 나눠 주고.”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택시는 알려 준 주소 의 아파트 정문에 도착했다. 아파트 1층 모퉁이에 중국 여자 가 운영하는 작은 카페가 보였다. 비로소 집에 왔다는 느낌 이 들었다. 택시 기사는 트렁크의 캐리어를 모두꺼내 정문 앞에 나란히 놓아 주고 내가 건넨 지폐를 받아들고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떠났다. 전화를 걸자 재택근무 중인 남편이 아파트 정문으로 내려왔다.

“고생 많았지?” “
일하는 중이지?”
“응, 회의하다 내려왔어.”
“난 우리 집이 몇 호인지도 까먹었어.”

아파트 로비 한쪽 유리 벽 안으로 아파트 관리인 토니가 나를 보고 손을 들어 보인다. 나는 시애틀에 도착
해서 처음 으로 소리 없이 웃어 보였다.

집에 들어가서 샤워를 하는데 아버지 생각이 나 또 울었다. 아버지는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들어오는 여느 가족과 다름없는 한 가족의 가장이었다. 선생님으로 근무하는 사십 년 동안 한 번도 결근을 안 하신 분이셨다. 아버지의 퇴직을 축하하러 간 나는 수십 년 세월이 엄숙하게 응집되어 있는 퇴임식장의 분위기를 느끼지 못했다. 퇴직하면 섭섭하기는 하겠지만 앞으로 누릴 여유 시간이 아버지에겐 좋은 일이 아
닌가 생각했다.

퇴임식 날 이후, 어머니가 외출하신 대낮에 아버지를 우리 집에 오시게 해서 같이 점심을 먹은 적이 있었다. 몇 주 사이에 아버지는 십 년은 더 늙어 보이셨다. 항상 힘이 들어가 있던 어깨가 축 처지셨고 총기가 사라진 두 눈엔 한 번도 보지 못한 슬픔이 서려 있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던 크고 까랑까랑하던 목소리도 힘없이 나긋나긋했다. 점심을 드시고 가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왜소해 보여 마음이 아렸다. 그날 이후, 가족들에게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을 아버지의 슬픈 뒷모습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해외에 나와 정신 없이 사느라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마음에서 서서히 옅어졌다. 그래도 달리는 기차 안에서 갑자기 훌쩍 내려 손을 흔들며 떠나실 줄은 몰랐다. 눈물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샤워를 끝내고 오후 두 시부터 계속 잠을 잤다. 잠속에 빠져 있는 일주일 내내 비가 내렸다. 쉬지 않고 종일 내리는 날도 있었고 오다 안 오기를 반복하는 날도 있었다. 잠에서 쉽게 깨지 못하는 건 시차에 적응되지 않았던 이유도 있겠지만 시애틀의 겨울 날씨도 한몫했다. 하루도 해가 쨍한 날이 없이 잠이 들 때도 깨었을 때도 똑같이 캄캄한 밤중이었다.
해가 나는 것 같으면 아파트 옥상에 잠깐 나갔다가 다시 침실로 들어가서 계속 잠에 빠져 지냈다. 비타민도 먹어 보고 커피도 마셔 봤지만 쉽게 깨어나지 않았다. 옥상에서 서성거리다 추워지면 다시 침대로 기어 들어갔다.
일주일 내내 정신 못 차리던 중 주말에 남편이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에 씨푸드를 먹으러 가자고 했다. 남편의 성의를 생각해서 겨우 따라나서는 내 몸이 물먹은 솜이불처럼 무거웠다.

석 달 전,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급하게 서울행 비행기를 탔다.

아버지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모든 검사는 끝난 상황이었다. 나를 진료실로 조용히 부른 의사는 최선을 다해 보겠지만 아버지의 남은 시간이 길어야 3개월 정도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의사가 왜 저런 소리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의사라 해도 어떻게 저렇게 빠르게 판단할 수 있나 의아했다.

주치의는 아버지의 암 진행 상태를 보려고 찍은 펫시티 영상 판독기 앞에 가족들을 불러 모았다. 거무스름한 육신의 모양의 대부분은 빨간색이 점령해 있었다. 의사는 진지한 얼굴로 빨간 부분은 이미 암세포가 전이된 곳이라고 말했다.
수술은 불가능하지만 항암치료를 원한다면 해볼 수는 있다고 했다. 가족들은 아버지에게 3개월이라는 말은 생략하고 하루라도 빨리 항암치료를 시작하자고 설득했다. 치료가 시작되자 오빠는 일상으로 돌아갔고 아이들이 미국 대학교에 다녀서 비교적 시간이 많은 내가 한국에 남았다. 아버지의 금식 기간이 끝나고 이젠 음식을 먹어도 좋다는 간호사 얘기에 뭐가 젤 드시고 싶으시냐고 물었다.

“함박스테이크….”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음식이었다. 평생 아버지와 함께 함박스테이크를 먹어 본 기억은 없었지만 머릿속에 아버지가 말한 함박스테이크의 선명한 그림이 그려졌다. 커다란 접시에 노란 옥수수와 봉곳이 올라온 흰 쌀밥과 마카로니 샐러드가 가지런히 함께 나오는 함박스테이크. 갈색 소스에 덮인 고기가 하도 부드러워 씹기도 전에 목으로 꿀렁 넘어가는 함박스테이크. 며칠을 굶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음식이 아버지에게는 함박스테이크였다. 나는 아버지에게 얼른 나가서 사 오겠다고 말하고 병원 문을 나섰다. 명동 한복판 평소에 그 많던 경양식 식당들이 막상 찾으니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저기 뛰어다니다 발등이 욱신거려 둥근 대리석 돌에 걸터앉아 곰곰이 생각했다. ‘어디로 가면 함박스테이크를 사 갈 수 있을까.’

번뜩 도시락 전문집이 떠올랐다. 언젠가 친정집 대문에 붙은 도시락 체인점 전단지에서 계란 프라이가 얹어진 함박스테이크 사진을 본 기억이 났다. 핸드폰을 검색해 주변에 제일 가까운 도시락 가게를 찾았다. 종로 3가에 자리한 유명한 외국어학원 바로 옆에 도시락 가게가 있었다.

나는 아픈 발도 잊고 벌떡 일어나 길을 따라 뛰는 듯 걸었다. 을지로 3가에서 종로까지 인도를 따라 몇 개의 신호등을 지났더니 어학원 옆에 도시락 가게 간판이 보였다. 기쁜 마음에 얼른 함박스테이크 한 개를 포장해서 다시 병원으로 뛰어갔다. 오는 길에 보니 셔츠 차림의 회사원들이 빌딩에서 거리로 우르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함박스테이크를 사서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병원에서도 점심 배식이 시작되고 있
었다.

내가 사 온 함박스테이크를 아버지의 식판에 올려 드리고 병원 식사로 나온 쟁반의 동그란 반찬 뚜껑을 열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병원 접시에도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함박스테이크가 얌전히 올려 있었다.

“아빠, 오늘 점심 반찬이 함박스테이크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어디 봐.”

아버지는 도시락 안의 함박스테이크를 드시며 병원 식판을 흘끗 쳐다보셨다.

“그건 가짜야. 두부로 만든 거네 뭐. 그리고 계란이 없잖아.”
“맞아. 함박스테이크는 계란 프라이랑 먹어야 진짜지.”

아버지의 암 말기 진단 후 첫 식사는 함박스테이크를 먹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아버지가 맛있게 드시는 걸 보니 땀이 나도록 뛰어다니며 도시락을 구해 온 것이 뿌듯했다.
집에서 알뜰하게 챙겨온 틀니를 잇몸이 아파 끼지도 못한 채, 딸이 사 온 함박스테이크를 잇몸으로 오물거리며 웃음 짓는 아버지를 더 보고 싶었다. 이제 드시고 싶은 거 얼마든지 사다 드릴 수 있으니, 무엇이든 말씀만 하시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날 이후, 아버지는 드시고 싶은 음식이 더 생각나지 않는다고 하셨다.

시애틀은 시월 중순부터 다음 해 삼월까지 춥고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잠깐 깨었을 때, 아파트 거실 통유리로 보이는 3가의 거리는 하루하루가 같은 듯 달랐다. 길 건너 오른편에는 이사 올 때부터 있었던 빨갛고 긴 크레인이 우뚝 서있었다. 한국으로 떠날 땐 건물 바닥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꽤 높이 올라와 11층 눈높이에 새 빌딩이 닿아 있었다.

매일 높아지고 있는 빌딩과 반대로 나는 조금씩 작아지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 있을 때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봤다.배가 고프면 토스트 조각이나 시리얼 몇 수저를 먹는 둥 마는 둥 입에 넣고 또 잤다.

남편이 자는 한밤중에는 정신이 말똥말똥해서 한국 드라마를 찾아봤다. 나는 텔레비전이 재미가 없는데도 열심히 봤다. 남편이 침실로 들어와서 어깨를 흔들었다. 그때 나는 아버지와 집으로 가는 골목을 걷고 있었다. 어른이 된 딸과 노인이 된 아버지의 걸음은 정지한 듯 빠르게, 달리는 듯 멈추기를 반복했다.

“왜 이렇게 계속 잠만 자?”
“어? 지금 몇 시야?”
“나 일 끝났어. 저녁 먹어야지.”
“어머, 벌써 그렇게 됐네.”

남편은 저녁으로 간단한 파스타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내리 잠만 자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적당히 익은 스파게티 국수를 씹으면서도 계속 잠이 왔다. 나는 깨고 싶지 않아서 잠을 쫓으려 하지 않았다.

하얗게 나온 한 줌의 뼛가루를 백자 단지에 넣어 납골당에 모신 후 자그마한 꽃묶음을 유리장 안에 넣어 둔 것으로 아버지 죽음에 대한 모든 의식은 끝이 났다.

장례의식은 생각보다 짧고 간단했다. 가족들은 아버지의 의자에 어머니가 앉아 있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대하며 밥을 먹으며 가지볶음이 더 있느냐고 묻기도 했다. 어머니도 괜찮아 보였다. 아니 모두 괜찮았다. 다 같이 동주민센터에 가서 유산 상속에 대한 명의이전을 깨끗하게 정리했다. 아무도 어머니의 결정에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중에 어머니한테 들었는데 사람들이 그것도 어머니 복 이라고 말했다 한다. 자식 네 명이 아버지 임종을 지킨 것도 어머니 복이라고 했다. 너무 춥지 않은 날 숨이 끊어져서, 발인하는 날에 눈이 안 와서, 오랜 시간 병을 질질 끌지 않고 돌아가셔서 등등 아버지의 임종에는 많은 복들이 함께 딸려 와 있었다. 슬픔에 잠겨 있는 가족들을 위로하려고 하는 말인 줄은 알지만, 자꾸 들으니 어떤 것들은 정말 그렇기도 한 것 같았다.

지구 반대편에서 한 달씩 휴가를 내고 달려왔던 언니와 동생이 각자 제자리로 떠났다. 언뜻 보면 팔 년 전, 남동생 결혼식 할 때와 별반 다를 게 없는 분위기였다. 오로지 아버지만 그 자리에 계시지 않을 뿐이었다. 명절 마지막 날 아침 같기도 했다. 출국 날짜를 미룬 나는 한국에 남아 어머니와 집안 물건 정리를 거들었다. 집에서 어머니와 일을 하다 해가 뉘엿뉘엿 졌을 때, 그제야 집안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공기가 무거웠다. 그리고 고요했다.

어머니가 주무시는 동안 나는 아버지가 쓰시던 건넌방 침대에 가 누웠다. 천천히 둘러보니 방 전체가 물건으로 가득 차 있었다. 침대 맞은편 벽으로 바짝 붙여 놓인 짙은 호두색 책장에는 책이 빽빽이 꽂혀 있었고, 책이 꽂힌 채로 남은 앞쪽 여유분에는 아버지가 모아 온 고물 카메라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바닥부터천정까지 칸마다 두 겹 혹은 세 겹으로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책 앞의 카메라들 사이사이에 삼각 깃발, 아프리카 목각 인형, 책장 위에는 여러 가지 모양의 가방들이 서로를 구긴 채 얹혀 있었다. 침대에서 왼쪽으로 놓인 작은 유리 장식장에는 수석이라고 불리는 돌덩이, 그 위에는 목각을 조각한 담배 파이프들이 하얗게 먼지를 쓰고 앉아 있었다. 장식장 옆에는 회색 책상, 그 위에 컴퓨터와 또 다른 책꽂이가 놓여 있었다. 겹치고 겹쳐져 안쪽엔 뭐가 있는지 잘 보이지도 않았다. 책꽂이 앞쪽에 비닐봉지에 넣어 봉인해 놓은 노란색 머리핀이 빼꼼하게 보였다. 초등학교 입학식 날 부모님과 찍은 사진 속에 있는 꽃핀이었다. 얼마 동안 머리에 꽂고 다닌 기억은 선명한데 그 후로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머리에 꽂고 다니다 방바닥에 흘렸거나, 마당에서 줄넘기를 하다 떨어뜨 렸는지도 모른다. 기억도 가물거리는 오래된 꽃핀을 아버지 자리에서 발견했다. 아버지는 애지중지 쌓아둔 물건들을 다시는 쓰다듬거나 만져보지 못한다. 주인 잃은 물건들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태연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중 유일하게 꽃핀만 자리를 옮겨 내 주머니로 들어왔다.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나는 처음으로 긴 시간 동안 혼자인 시간을 가졌다. 어쩌면 그동안에 꺼내기 어려운 자신의 불안함과 죄책감을 처음 마주하는 시간인지도 몰랐다. 깊은 수렁으로 빠져드는 것 같은 몸과 마음을 무기력하다는 단어를 빌어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무기력의 늪은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다음 날은 더 아래로, 그다음 날은 더 아래로 내려가 도대체 바닥이 어딘지 알수 없었다. 머리는 점점 멍해져 가고 기억력은 흐릿하고 한번 잠이 들면 쉽게 깨어날 수 없었다.

아버지가 꿈에 나오기도 했다. 사춘기 시절, 아버지에게 가장 가슴을 후벼 팔 못된 말을 골라 하고 충격에 할 말을 잃은 아버지의 얼굴이 지나갔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힘껏 어머니를 무시하고 쌀쌀맞게 대하는 모습도 생각났다.

과거의 모습 중에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을 떠올리고 고개를 흔들며 외면하고 못난 자신을 맘껏 짓이기고 심지어 없애려 들었다. 아무리 묻어 두려고 해도 슬쩍슬쩍 보이는 과거의 진짜 모습을 완전히 부정하고 싶었다. 가끔 누군가의 미소와 손짓에 일어나 밖으로 나가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한번 수렁에 빠지면 마치 유일한 안식처인 양 자꾸 그곳에만 머무르려고 했다. 하루빨리 어딘가 숨어 있는 작은 서로를 찾아 함께 손잡고 나와야 하는데 그들은 서로 숨바꼭질하며 밖으로 나오길 미루고 피했다. 오래 머물면 머무를수록 나가기 힘든 그곳에 자신을 숨기고 가라앉혔다.

나는 그곳에 갇혀 내 존재를 완전히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몸뚱이가 진흙 속에 박혀 두 눈을 가리고 귓속을 메우고 끝내 아무것도 볼 수도 들을수도 없는 모습을 상상했다.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세상 그 어디보다 깊고 어두운 늪이었다.

그곳에서 빠져나오려고 힘껏 발버둥 쳐 봤지만 홀로 걸어 나올 수가 없었다. 정리되지 않은 많은 생각이 머리를 떠돌아 다니며 괴롭혔다. 허우적거릴 힘조차 내기 힘들었다. 죄에 대한 형벌이라면 하루빨리 그 대가를 치르고 싶었다. 자신이 저지른 순수하지 못했던 말과 행동, 이중성, 무례함과 조롱, 무시와 허세와 거짓과 모략과 그 외에 알지 못하는 나의 모든 잘못을 다 꺼내 누군가에게 용서받고 싶었다. 마음을 부서뜨리는 작은 상처들이 비워져 완전히 순수하고 자유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었다.
나는 간절히 원했다. 내 영혼이 완전히 파괴되기 전에 누군가가 제발 나를 이곳에서 끌어내 주기를.
밤낮으로 잠만 자다 새벽 5시에 눈을 떴다. 배가 고팠다.
냉장고에서 그릭요거트를 꺼내 블루베리와 시리얼을 넣어 커다란 수저로 퍼먹었다. 마침 잠에서 깨 나를 본 남편이 눈이 휘둥그레져 한마디 했다.

“이제 시차 적응했나 보네. 무슨 잠을 그렇게 오래 자.”
“그러게. 오늘은 일어나지네.”

하늘이 주는 선물처럼 날씨까지 말갛게 개었다.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에 가 보기로 했다. 거울 안으로 보이는 얼굴이 푸석하다. 문득 아버지 방에서 가져 온 꽃핀이 떠올랐다. 고무줄로 머리를 뒤로 묶어 올리고 옆머리에 노란 꽃핀을 꽂으니 한결 생기가 있어 보인다.

거리의 가로수는 아직도 울긋불긋 단풍이 들어 있었다.
주변을 돌아보며 최대한 천천히 걸었다. 점심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거리에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어디선가 코를 찌르는 쑥 냄새 같은 게 마스크를 뚫고 역하게 풍겨 왔다. 막다른 길에 항구를 보며 서 있는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에 도착했다.

나는 평소처럼 커피 한 잔을 사서 호수가 보이는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 오랜만에 호수를 비추는 따뜻한 햇빛이 내 마음속에도 한 뼘 들어온 것 같았다. 반짝이는 수평선 위에 소파 위에서 등을 보이고 누워 계신 어머니의 작은 몸짓이 보였다. 미국으로 떠나온 날, 새벽부터 빗줄기가 부슬부슬 내렸지만 어머니는 빗소리를 듣지 못했다. 축축한 날씨가 오히려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것 같았다. 물끄러미 앉은 어머니를 뒤에 두고 팽팽해진 이민 캐리어를 한번 들어 보았다. 석 달을 한국에 머물면서 모인 잡동사니와 옷가지들이 어린애 몸무게를 훌쩍 넘었다. 딸에게 뭐라도 하나 더 넣어 보내고 싶어 하시는 어머니 덕에 넣었다 뺐다 하는 작업을 여러 번 한 후에 겨우 가방 문을 닫았다.

‘엄마, 나 그냥 여기서 엄마하고 살까?’

나는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속마음을 들킬까 봐 어머니를 똑바로 보기 싫었다. 아랫입술을 꽉 물고 있는 어머니를 두고 그냥 문을 나설 수가 없어 깊은숨을 안으로 삼키고 어머니의 작은 몸을 안았다. 남편의 자리를 비워 둔 어머니는 하얀 털을 덮고 갓 태어난 작은 새 같았다.

나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두 눈이 아른아른 흔들렸다. 마치 세상에 나온 지 얼마 안 된 새가 세상의 끝을 보고 있는것 같았다. 나는 그대로인데 어머니는 점점 작아지다 결국 아버지처럼 사라질 것 같아 가슴이 아려 왔다.

“엄마, 건강해야 해. 금방 또 올게. 밥은 꼭 챙겨 드셔야해.”
“알았어. 너도 건강해.”

평소에는 서로 잘 하지 않던 인사말이었다. 나는 고인 눈 물을 들키지 않게 캐리어를 끌고 얼른 대문을 나왔다. 밖에 나오자 비는 그치고 한 줄기 햇살이 목덜미에 슬그머니 내려앉았다.

“이거 당신 건가요? 참 예쁜 머리핀이네요.”

멋진 은발의 할머니가 웃는 얼굴로 노란 해바라기 꽃핀을 내 앞으로 내밀었다. 어머! 할머니의 손에 들려 있는 아버지의 꽃핀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고맙습니다. 저한테 아주 소중한 물건이거든요.”

하마터면 꽃핀을 잃어버릴 뻔했다는 생각에 눈물을 그렁 대며 꽃핀을 받았다.

“그렇게 소중한 물건이면 마음속에 간직하세요. 그럼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을 겁니다.”

머니는 금방 내 눈물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나는 미국 할머니의 말에 가슴속으로 밀려들어 온 바다를 토해 내며계단에서 일어났다. 엉덩이에 묻은 모래를 툭툭 털어 내고 집이 있는 3가 쪽으로 용감하게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