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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단편소설] 여름은 짧을수록 좋다
작성일
2020.02.19

[단편소설 - 가작]



여름은 짧을수록 좋다

 


이미화 / 미국


룩 앳 댓 이디엇!

 

그렇게 하면 죽어도 못 들어가.

꽁무니를 오른쪽으로 내밀고 후진을 하던 빨간 포드가 허리까지 잘 집어넣는다 했더니 이번에도 차머리를 그대로 둔 채 멈춰버렸다. 핸들을 반대로 풀어야지, 반대로. 운전석에 앉은 여자가 얼굴을 돌려 잠시 위쪽으로 시선을 주는 순간, 창문 앞에 서 있던 나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유리창에 바싹 얼굴을 대고 오른손 주먹을 왼쪽으로 빙빙 돌리며 원을 그렸다. 내 손동작을 못 본 것이 틀림없다. 포드는 후진하면서 왼쪽으로 펼쳤던 부채를 오른쪽으로 접으며 처음 자리로 돌아왔다. 벌써 세번째였다. 

페럴렐 파킹에 익숙하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빡빡한 공간이 더 문제였다. 포드가 들어갈 자리 뒤에 주차된 검정색 토요타가 뒷차와의 간격을 널직하게 띄어놓고 대신 포드 자리에 앞범퍼를 걸쳐놓았던 것이다. 여자는 그리 개의치않는 듯했다. 포드 꽁무니에 다시 노란불이 들어오고 여자는 오른쪽으로 상체를 틀었다. 나는 얼음이 잔뜩 들은 냉커피를 꿀꺽 삼켰다.

나라면 진작에 다른 곳을 찾았다. 아니 애초에 저렇게 앞뒤 여유없는 곳에다 차를 주차시키겠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처음과 똑같은 표정으로 후진을 시도하고 있는 그녀를 보면 차를 집어넣기 전에는 자리를 뜨지 않을 것 같다. 

 

포드 운전석에 있는 저 여자는 내가 살고 있는 스튜디오 바로 옆 218호에 산다. 자기보다 

키가 30센티쯤 더 크고, 몸무게는 두 배쯤 더 나갈 것 같은 남자와 함께. 내가 한여름 

수박만큼이나 흔한 빨간색 포드를 십분이나 넘게 지켜보고 있는 이유다. 

         그녀와 별나게 내세울만한 친분은 없다. 꽤 가까워질 수 있었던 기회가 한 번 있었지만 말 그대로 그저 기회였을 뿐, 그녀와 나는 서로의 이름도 모르는 채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이웃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지낸다. 물론 땅 넓은 미국에서 같은 주, 같은 도시, 같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인연이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나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고 있는 그녀는 나처럼 한국 여자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그냥 외워지는 얼굴이란 뜻이다. 그만하면 인연으로 이어질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이다. 원한다면 말이다.   

         

         달려오던 자동차 한 대가 후진하는 그녀의 포드를 보고 속도를 줄이며 다가오다가 중앙선 

쪽으로 머리를 기울인 채 멈췄다. 반대편 차도에는 차들이 줄지어 달려오고 있다. 포드의 엉덩이가 굼뜨게 움직이는 동안 기다리는 차는 세 대로 늘었다. 그 사이 반대편 차도에 차가 뜸해졌다. 기회를 놓칠세라 재빨리 노란 중앙선을 넘어 포드를 추월한 차들은 다시 중앙선을 넘어와 포드에 막혀 한산해진 도로를 달리며 멀어져갔다. 그녀는 브레이크를 밟은 채 꼼작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이제 그만 그녀가 안쓰러워진다. 미국에서 운전면허증을 취득한 후 익숙치않은 패럴렐 파킹 때문에 진땀을 흘렸던 기억 때문이다. 책에서 보고 외운대로 그대로 따라해 보아도 어찌된 영문인지 차는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걸핏하면 도로변 턱에 뒷바퀴를 올려놓았고, 운좋게 차를 집어넣은 때에도 다른 차들과 함께 일직선을 그리지 않고 몸통이 삼분의 일이나 튀어나와 도로에 요철을 그려놓았다. 주위에 사람이 없을 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후진등이 들어온 내 차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차들이 있을 때는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빨리 차를 주차시켜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평소보다 더 허둥대기 일쑤였다. 기다리면서 경적 소리도 내지 않는 그 느긋함이 더 부담스러웠다. 

언젠가 한번 그런 일이 있었다. 그 당시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던 42번가 블럭에서 일주일에 한두번씩 차선 하나를 막아놓고는 했는데, 그날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스타벅스커피를 들고 공사장 앞을 지나는데, 룩 앳 댓 이디엇! 하는 소리가 들렸다. 바리케이드 앞에 모여서 잡담을 하고 있던 공사장 인부들이었다. 그들은 턱짓으로 누군가를 가리키며 큭큭거렸다. 그 턱을 눈으로 따라가 보니 어떤 운전자가 직진과 후진을 번갈아 하며 차머리를 돌리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트래픽콘으로 만들어 놓은 임시 차선을 무시하고 원래 차선을 따라가다가 길이 막혀서 결국 돌아나와야 했던 것이다. 우연일지는 모르지만 그 운전자가 아시안이었기에 나는 내가 모욕을 받은 것처럼 불쾌했었다. 운전자는 어쩌면 트래픽콘으로 그려놓은 차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을 지도 모른다. 그때도 경적을 울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이다. 나는 차가 들어갈 자리 앞뒤로 충분한 여유가 있지 않는 한 그곳에다 차를 주차시켜 보겠다는 모험 따위는 하지 않는다. 경적을 울리지 않는다고 해서 소리가 안 나는 건 아니다.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손짓으로 차 한 대를 보낸 후 그녀는 차를 앞으로 조금 빼내었다. 얼음이 녹아 싱거워진 커피를 홀짝거리며 나도 그녀를 포기하지 않았다. 

         

         도로변에 있는 차를 주차시키는 걸 보면, 아파트 주차장에 빈자리가 없는 모양이다. 

그녀는 분명 대기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올려 놓고 주차장에 자리가 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도 이사온 지 육개월이 지나서야 겨우 자리를 얻었다. 아파트 주차장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월세에다 추가로 90달러를 더 지불해야 했다. 하지만 시간마다 주차 

미터기에 꼬박꼬박 동전을 넣어줘야 한다거나, 주차할 자리가 없어서 몇 불럭 떨어진 곳에다 차를 세워야 하는 불편함을 생각한다면 그리 과한 금액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건 곧 패럴렐 파킹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했다. 이 아파트를 택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 육개월이 아니라 일 년이라도 기다릴 수 있었다.

         전에 살던 곳은 햇볕이 잘 들어 창가에 화분을 놓아두면 파란 잎이 쑥쑥 올라오고 아파트 

입구에 장미와 라벤더가 무더기로 피어있는 아담한 3층짜리 주택이었다. 공동세탁실이 일층에 있어서 빨래바구니를 들고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이 성가스러웠지만 오래된 예쁜 집이었다. 마음에 들어 몇년간은 이사를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일층에 도둑이 들었다. 두 번이나. 불안해서 자다가 자꾸 잠이 깨었다. 재계약을 하면 현재 월세에서 50달러를 깍아주겠다고 집주인이 말했지만 사양했다. 근처에 주립대가 있어서 아파트는 많이 있었다. 하지만 막상 이사를 하려고 하니 마음에 드는 아파트를 찾기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나도록 이사갈 곳을 구하지 못해서 슬슬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그날은 며칠째 내리던 비가 그쳐 모처럼 하늘이 맑은 날이었다. 나는 인터넷에서 찾아낸 임대중인 아파트 주소를 들고 아침 일찍 집을 나왔다. 첫번째, 두번째 모두 신축 아파트였지만 이상하게 내키지가 않아서 세번째 아파트를 찾아가려던 참이었다. 횡단보도 건너편에 있는 한 낡은 듯한 아파트 입구에 붙어 있는 ‘임대중’이라는 사인이 눈에 들어왔다. 기대없이 들어가 보았다. 입주자 대부분이 학생들입니다. 특히 유학생들이 많아 조용합니다. 지은 지 30년이 넘었지만 멀쩡하지요. 나이 많은 아파트 매니저가 말했다. 갑자기 어디선가 곰팡이 냄새가 나는 듯해서 나는 큼, 하고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매니저를 따라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선 나는 내 키만한 창문으로 가득 쏟아져 들어오는 햇볕을 보고는 단번에 계약을 했다. 새로 지은 근처 아파트보다 500달러나 싼 월세에 이미 반쯤 마음이 기울어져 있던 터였다. 게다가 아파트에 딸린 주차장까지 있다는데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월세가 100달러쯤 더 비쌌더라도 주저없이 계약했을 것이다. 

         

         그녀의 포드에 다시 노란등이 켜지고 그녀가 비스듬히 상체를 틀었다. 바로 그때였다. 검정색 토요타 주인이 마치 백마의 기사처럼 깜짝 등장해서는 자신의 흑마를 몰고 말밥굽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한자리에서 미련스럽게 버티다 보면 저렇게 행운이 찾아오기도 하기에 선조들은 우물을 파려면 한 우물을 파라는 속담을 남겼는 지도 모른다. 덕분에 주차 공간은 갑자기 두 배로 넓어졌고 그녀는 미꾸라지처럼 매끄럽게 그 빈자리로 들어갔다. 한 우물을 파는데 성공한 그녀는 만족한 얼굴로 차에서 내려 미터기에 동전을 넣은 뒤 네 개의 쇼핑봉지를 양손에 나눠들고 횡단보도를 건넜다. 

         패럴렐 파킹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을 볼 때마다 동변상련의 안타까움을 느끼는 나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더구나 그녀는 다른 사람도 아닌 218호 여자가 아닌가. 일주일 전쯤인가 느닷없이 찾아와서는 라면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간 바로 그녀.

 

경주마가 아플 리가 없다.

 

그녀가 이사를 오던 날, 나는 빵도 우유도 다 떨어지고 냉기만 있는 냉장고에 먹을 것을 넣어주기 위해 길 건너에 있는 슈퍼마켓을 가려고 막 나선 참이었다. 아파트 현관문을 잠그고 돌아서는데, 종이박스를 양손으로 들고 배가 불룩 튀어나온 가방을 어깨에 엇걸어 맨 그녀가  엘리베이터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나는 그녀가 한국인임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반가움과 어색함이 섞인 그녀의 눈길이 순식간에 내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그녀 역시 내가 점심에 데워먹은 김치부침개 냄새를 맡았을 것이다. 서로가 공유한 웅녀의 흔적을 확인한 후 시선을 외면하기까지는 눈 깜빡할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를 비껴가는 내 시선 속으로 서너걸음 뒤에서 그녀를 따라오던 남자가 들어왔다. 남자는 어깨에 더플백을 걸치고 양손에 큰 가방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싶은 순간, 하이! 하고 남자가 인사를 건넸다. 남자의 귓밥에 매달린 은빛 고리가 반짝였다. 하이! 무빙 인? 나는 으례적인 인사에다 이사오는 이웃에 대한 친절함까지 덤으로 보탰다. 남자의 눈이 웃고 있었으므로 나도 조금 웃어주었다. 세 달 전에 그녀와 나는 그렇게 첫 대면식을 치루었다. 

         그녀는 전체적으로 가늘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에 군살없이 홀쭉한 몸매다. 얼굴은 볼살이 없어서 광대뼈가 도드라져 보이긴 하지만 선이 갸름해서 그녀의 서늘한 눈빛과 잘 어울린다. 스키니진이 헐렁할 정도로 볼품없는 그녀의 엉덩이를 보면 잠깐 기분이 좋아지지만, 소매 밖으로 빠져나온 그녀의 매끈한 팔뚝을 볼 때마다 울퉁불퉁 살이 찐데다가 탄력없는 날개까지 달고 있는 내 팔뚝이 떠올라 언짢아진다. 저렇게 말랐다니, 어디 아픈거 아냐? 하고 뾰족한 눈으로 흘겨보았지만, 턱을 치켜들고 빠르게 걷는 그녀의 걸음걸이는 ‘켄터키더비’에 참가한 늘씬한 경주마를 연상시킨다. 아플 리가 없다. 

         거리를 따라 줄지어 들어선 신축 아파트도 많은데 굳이 이곳을 택한 걸 보면 그녀도 커다란 유리창에 몸을 비비다가 비눗방울처럼 영롱하게 부서지는 햇볕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녀의 아파트는 거리로 향한 창문이 하나지만 내가 살고 있는 스튜디오는 복도 끝에 있어서 남쪽과 서쪽으로 면한 벽 모두에 창문이 있다. 해가 지고 난 뒤에도 푸르스름한 빛이 가득 들어와 한여름에는 저녁 늦게까지 불을 켜지 않아도 환하다. 무엇보다도 마음에 드는 건 고개를 움직이는 대로 밖의 풍경이 훤히 보인다는 것이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소소한 재미는 물론이고, 듣기에도 민망한 욕이 오고가는 싸움이라도 벌어지는 때에는 창너머로 그 광경을 훔쳐보며 한낮의 졸음을 쫓아내기도 한다. 옆 블럭에서 주말마다 열리는 ‘스트릿마켓’을 구경하는 재미는 더욱 쏠쏠하다. 팦업 레스토랑에서 새우꼬치와 테리야끼치킨으로 점심을 먹은 후, 얇은 밀가루 반죽으로 코끼리 귀를 만들어 기름에 튀겨낸 엘리펀드 이어를 손으로 떼어먹으며 갖가지 수공예품들을 구경하다 보면 혼자 있는 오후도 금방 지나간다. 그녀와 스트릿마켓에서 마주친 적은 없지만 어쩌면 그녀도 코끼리 귀를 떼어먹으며 예전 시골 장터에서 사 먹었던 꽈배기를 그리워할 지도 모른다.  

 

         우울할 때는 김치에 밥을 비벼 먹었다.

         

         218호 여자가 이 아파트로 처음 이사오던 날도 그랬지만, 그 후로도 나는 그녀와 인사를 나눌 기회가 없었다. 물론 같은 층에 살고 있기에 한 달이면 서너번씩 얼굴이 마주치기는 했다. 하지만 어쩌다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게 되는 경우에도 멋쩍은 침묵을 견디기 위해 층수를 가리키는 노란 불빛을 신경질적으로 쳐다보고 있다가 엘리베이터가 멈추면 둘 중 한사람이 눈치껏 먼저 내려서는 화난 사람처럼 뒤도 안 돌아보고 걸었다. 모처럼 눈꼬리에 힘을 풀고 눈인사를 하려다가 그녀가 눈길을 피하는 바람에 머쓱해진 뒤로는 눈이 마주치기 전에 내가 먼저 피했다. 하지만 그 일 자체는 그렇게 신경쓸 만한 것이 못된다. 일주일이면 두세번씩, 218호로부터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들. 내가 궁금한 것은 그 소리의 정체였다.        

베니어 합판으로 내벽을 처리한 이 아파트는 옆집 텔레비전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방음이 형편없다. 이사와서 한동안은 청각만 발달한 새처럼 예민해져서 잠을 설쳤다. 덕분에 위층 317호에 살고 있는 커플이 새벽 다섯시면 일어나고 매주 금요일이면 밤늦게 욕조에서 물을 빼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래층 117호에 살고 있는 아파트 매니저도 내가 한밤중에 화장실 가는 습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218호는 주로 스포츠 채널을 틀어놓았는데, 특히 텔레비전에서 야구경기라도 보여주는 날이면 갑자기 터지는 함성 소리에 깜짝 깜짝 놀랐기에 핑계김에 악-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나는 쿠션으로 입을 틀어막고 괴성을 질렀다. 

         나는 야구경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풋볼이나 아이스하키처럼 순식간에 공격과 수비가 바뀌는 긴장감도 없고 선수들끼리 벌이는 격렬한 몸싸움을 구경하는 재미도 없으니 금방 지루해진다. 한때 거액의 연봉을 주고 한국에서 영입된 야구선수가 있다길래 잠깐 눈여겨 보기는 했지만 곧 시들해졌다. 수백억이라는 돈은 내게는 짐작조차 안되는 액수이기에 숫자로만 다가올 뿐이어서 지루한 야구경기가 재미있어지는 건 아니었다. 30평 정도하는 서울의 아파트 한 채 가격이 십억이나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너무 놀라서 언제 그 많은 돈을 모으나 하고 근심스러웠던 적은 있다. 동그라미 10개가 넘어가면 비현실적인 액수가 되니 그만큼 상대적인 상실감도 덜 느낀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날도 저녁 내내 218호 남자가 내지르는 환호성을 들으며 나는 무기력하게 귀를 내놓고 경기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순간 갑자기 쿵! 하는 짤막한 그러나 제법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그 소리를 정확하게 들을 수 있었던 것은 퍽! 소리와 함께 218호 남자의 목소리가 벽 너머로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단순히 뭔가 바닥으로 떨어진 거려니 했다. 소리가 그렇게 큰 것도 아니었고, 218호 남자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사라진 것만으로도 기뻐서 다른 것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그 소리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불규칙하게 지속적으로 쿵, 쿵, 주방벽을 때렸다. 218호에서 보자면 거실벽이었다. 그쳤는가 싶으면 또 

다시 벽을 울리는 그 둔탁한 소리는 결국 서서히 내 신경줄을 조이기 시작했다. 

이런 경우 흔히들 하듯이 벽을 두세번 두드려 주의를 줄 수도 있었지만 왠지 내키지 

않았다. 218호 여자가 어떤 성격의 소유자인지도 모르는 데다, 혹시 말다툼이라도 벌어진다면 그녀 뒤에 버티고 서 있을 218호 남자의 단단한 어깨가 떠올라 지레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도 벽을 때리는 소리는 몇차례 더 계속되었고, 내가 그들의 예의없음에 화를 내는 대신 소리의 정체가 궁금해지기 시작할 무렵 어느 순간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끝내 소리의 정체를 파악해내지 못한 채 잠이 들었다. 

         그리고 정확히 이틀 뒤, 예의 그 낮고 둔탁한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번에는 주방벽이 아닌 그들의 거실 한가운데쯤인 것 같았다. 다시 이틀 뒤, 삼일 뒤. 정체불명의 소리는 일주일이면 두세번씩, 늦은 밤 그렇게 주방벽을 뚫고 들어와 내가 보는 앞에서 부서졌다.  

         한번 들리기 시작하면 오분에서 길게는 십분 정도 계속되는 그 소리는 벽에 못을 박는 소리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막연히 218호 여자와 남자가 부부싸움을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악을 쓰는 소리라든지 우당탕탕 하고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 같은 건 들리지 않았다. 방음처리가 형편없는 이 아파트에서 부부싸움을 들키지 않고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두 사람이 싸우고 있을 거라는 상상은 그리 신통한 게 못되었다. 이웃에 대한 배려를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벽 너머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썩 유쾌하진 않았지만 그 불쾌감은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흐지부지 사라졌고, 나는 서서히 무뎌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바로 일주일 전쯤, 나의 느슨해진 신경을 날카롭게 후비며 기습처럼 그녀가 들이닥쳤던 것이다. 

 

         열두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다. 레인지에 물을 올린 뒤에 1달러 99센트인 신라면 봉지를 뜯어 스프를 꺼내고 냉장고에서 시들어가는 파와 양파를 꺼내어 썰어 놓고는 꼬불꼬불한 라면 부스러기를 집어먹으며 물이 끓기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누군가가 아파트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파트 매니저인가? 하고 잠깐 생각했지만 그는 아파트에 관한 모든 업무는 이메일로 처리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후 이즈 잇?”

문 밖에서는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약간 긴장한 상태로 문 앞에 서서 문구멍에 눈을 붙이고 내다보았다. 렌즈 안에 들어온 사람은 뜻밖에도 218호 여자였다. 

그녀는 내가 렌즈를 통해 내다보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들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마치 그녀가 온다는 것을 내가 깜박 잊은 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나는 한 손으로 손잡이를 쥔 채 얼굴이 보일 만큼만 문을 열었다. 

“나 알지요? 218호.” 

당연하다는 듯이 한국말이었다.

“무슨 일이시죠?” 

이런 식의 예기치 않은 방문을 좋아하지 않는 내 목소리는 퉁명스러웠다.

“아니,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니구…… 아직 점심 전이면 같이 밥 먹으면서 얘기나 할까 

하구요.”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비닐봉지에 SAKURA 란 글자가 찍혀 있다. 전에 가 본 적이 있는 식당이다. 상호를 보고 일본식당인 줄 알았는데 막상 들어가보니 오징어볶음과 불고기, 고등어등을 구워 파는 한국식당이었다. 그녀가 내미는 비닐봉지를 받지 않은 채 나는 잠시 멍한 채로 있었다. 그 동안 그녀와 나는 수차례 얼굴을 마주쳤지만 형식적인 눈인사조차 나누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점심을 같이 먹자구? 얘기를 하자니? 편치 않은 속마음과는 달리 손잡이를 단단히 쥐고 있던 내 손에서 슬쩍 힘이 빠지려고 했다. 하지만 완전히 긴장을 풀어버리기에는 뭔가 미심쩍었다. 나는 손잡이를 쥔 손에 불끈 힘을 주었다. 씨애틀의 한 낡은 아파트에서 나란히 붙어 살고 있는 한국 여자들 이라는 그럴싸한 인연이 있을 뿐, 그녀와 나는 아직 서로의 이름조차 모르지 않는가?

         “얘기요?” 

         “그냥 한국말이 하고 싶어서요. 이사와서 아직 인사도 못 나눴고…… 아까 그쪽이 

아파트로 들어오는 거 창문으로 봤어요.” 

         말을 마친 그녀는, 들어가도 되겠어요? 하는 표정으로 여전히 의심쩍어 하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가까이에서 본 그녀의 눈빛은 의외로 순했다. 거절할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한 나는 어정쩡한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하긴 이해못할 것도 없다. 나도 그랬으니까.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아무라도 

붙들고 되는 대로 떠들고 싶은 그 채워지지 않는 갈증. 그건 체면이나 내숭 따위의 의례적인 겉치레를 미처 따져보기도 전에 찾아오는 참기 힘든 욕구였다. 미국에 살고 있는 한인들의 가장 구체적인 모임 장소인 교회조차 나가지 않았던 내가 한국말로 수다를 떨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입 안에 가득 고여있는 한국말을 토해내질 못해서 미칠 것 같다가 우울해졌고 그럴 때면 냉면그릇에 김치를 잔뜩 넣고 밥을 비벼 먹었다. 변기통을 붙잡고 토하는 나를 보며 제이슨은 도대체 뭐가 문제야? 라고 물었다. 영어가 서툴게나마 입에 붙기 시작할 무렵이 되서야 불쑥불쑥 찾아오던 수다에의 욕구가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던 것이다. 

난데없이 불쑥 찾아와서는 얘기를 하고 싶다는 218호 여자도 가슴속에 쌓여가는 말의 무게를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워 나를 찾아왔을 거라는 생각에 나는 처음보다 한결 마음이 누그러져 있었다. 그녀와 함께 살고 있는 남자가 할 줄 아는 한국말이라고는 십중팔구 ‘안녕하세요?’가 고작일 것이다. 제이슨도 마찬가지였다. 안녕하세요? 내 이름은 제이슨입니다. 갈비 좋아합니다. 제이슨은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그렇게 인사를 했다. 한국어로 세 문장이나 말을 했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제이슨의 한국말 실력은 거기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않았다. 내가 영어를 익히려고 아둥바둥하는 동안 제이슨은 한국어 세 문장으로 한국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를 이해하는데 그 세 문장이면 충분하다고 믿었던 제이슨이 나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다. 

         “여기 앉으세요.”

         나는 그녀에게 소파를 권하고는 얼른 주방으로 갔다. 냄비뚜껑이 들썩거릴 정도로 

라면물이 펄펄 끓고 있었다. 나는 냄비에 라면 한 개 분량의 물을 더 붓고 나서 다시 

거실로 나와 그녀에게 물었다. 

         “라면 드시겠어요? 라면을 끓이려던 참이었거든요.”

         “그래두 되나요? 저, 라면 좋아해요.”

         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리자 그녀는 소파에서 일어나 내 뒤를 따라와 주방으로 왔다. 거실에서 주방으로 자리를 옮겼다고는 불과 서너걸음에 불과하다. 

         “별로 준비할 것도 없어요. 그냥 앉아 계세요.”

         그러자 그녀는 주방 앞에 있는 식탁 의자에 앉아 잠시 실내를 둘러보았다.  

         “여기는 창문이 두 개 있어서 훨씬 더 좋네요.”  

         “네.”  

         나는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고 젓가락을 챙겼다. 컵에 찬물을 따라 그녀 앞에 놓아주었다. 그깟 라면도 음식이라고 거한 손님상을 차리는 것처럼 마음이 바빴다. 다시 물이 끓어오르자 나는 냄비 속에 라면 두 개를 넣고 도마 위에 썰어둔 파와 양파를 넣었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줄곧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꼬들꼬들 삶아진 라면을 그릇 두 개에 나눠 담아서 식탁으로 가져왔다.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이 봉지 속에서 테이크아웃 박스를 꺼냈다. 김밥과 떡볶이었다. SAKURA에서 이제 김밥하고 떡볶이도 파는 모양이었다.

드세요, 라고 하자 그녀는 나와 눈을 한번 마주친 다음 젓가락으로 라면을 건졌다. 라면을 먹는 동안 그녀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먹는 데만 열중했다. 가끔 깁밥을 집어 입에 넣은 뒤 국물을 마셨고 매운 떡볶이를 먹으면서 연신 물을 들이켰다. 나는 처음의 어색함도 잊어버리고 떡뽁이 소스에 김밥을 찍어 먹으며 오랫만에 먹는 김밥이 맛있다는 생각을 했다. 마치 허물없는 사이처럼 그녀와 나는 라면을 먹던 젓가락으로 떡볶이를 집어 소스에 뒹굴렸고 그녀가 사온 김밥을 한 줄씩 나눠먹었다. 같이 살고 있는 사람은 누군지, 미국에 온 지는 얼마나 됐는지, 뭐 그런 사소한 것들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녀는 내게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다짜고짜 물어볼 수는 없었다. 나는 그녀가 먼저 말을 꺼내주길 기다리며 그녀와 보조를 맞춰 젓가락을 놀렸다. 배가 고팠었는지 그녀는 빠르게 그릇을 비워갔다. 그릇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라면 부스러기까지 알뜰히 다 먹고 나서야 그녀는 젓가락을 놓았다. 김밥과 떡볶이가 들어있던 테이크아웃 박스도 깨끗이 비워졌다. 다 먹고 나서 보니 꽤 많은 양이었다.  

         “덕분에 잘 먹었어요.” 

마지막으로 물컵을 비우고 나서야 그녀가 말문을 열었다. 그녀는 빈 그릇과 젓가락을 들고 싱크대로 향했다. 미처 말릴 틈도 없이 그녀는 벌써 거품이 잔뜩 묻은 스펀지를 손에 쥐고 있었다. 나는 빈 테이크아웃박스를 비닐봉지에 담고 키친타월로 식탁을 닦았다.   

         “나 이번 가을이면 영주권 나와요. 말 그대로 진짜 영주권.”

         “그럼 지금은……?”

         “왜 있잖아요, 이년 짜리 영주권. 그게 이번 가을에 정식 영주권으로 바뀌거든요. 

그때까지만 여기서 살다가 엘에이로 갈 거예요. 거기서 아는 언니가 식당을 크게 하거든요. 주방에서 일할 사람이 필요하데요. 여기 네일샵에서 받는 돈보다 더 많이 주겠데요.” 

         “……”    

         “참, 나 네일샵에서 일하는 거 모르죠? 아는 사람 소개로 찾아간 건데, 월급이 너무 

적어서 틀렸어요. 손님들이 팁을 주기는 하지만 내가 전부 갖는 것도 아니구. 여기 오기 전에도 그것보다 더 많이 벌었거든요. 남들은 일주일에 하루 쉬니까 좋다고들 하는데, 좋을 것도 없어요. 쉬면 뭐 어디서 돈이 생기나요? 통장에 있는 돈 까먹기나 하지.”   

         그녀는 빠른 솜씨로 설거지를 끝내고는 바지 엉덩이께에다 물 묻은 손을 슥슥 문지르며 식탁 앞에 와 앉았다. 커피라도 끓이고 싶었지만 아침에 커피통 바닥까지 탈탈 털어 비운 터였다. 뭔가 디저트 할 만한 게 없을까, 하고 냉장고를 들여다 보니까 그녀가 눈치를 챘는지 배 불러서 더 이상 아무것도 못 먹는다,고 손을 저었다.            

         “내가 주책이지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불쑥 찾아와서 점심까지 얻어먹고 이렇게 주절대고 있으니 말예요. 나 가끔 그런 짓 잘해요. 아무나 붙잡고 되는대로 떠들고 싶을 때. 그게 다 여기 와서 생긴 병이에요. 지난 번에도 김치 사러 가서는 가게주인 붙들고 실컷 떠들다 왔어요. 갑자기 그놈의 병이 또 도진 거지요 뭐. 영주권 나오면 죤하고 그만 살 거예요.”

         “네?”

         “내 남편 말예요, 죤. 그쪽도 얼굴 봤잖아요, 왜? 여기 오기 전부터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어요. 영주권 나오면 헤어지기로. 그 동안 생활비는 내가 내고, 서로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고 피임은 철저히 할 것. 그게 죤이 나를 미국으로 데려와 주는 조건이었어요. 다른 건 바라지 않는다구. 내가 좋아서 내가 원하는 걸 해주고 싶다구…… 미국에 오자마자 2000달러짜리 빚 하나를 갚아줬는데 너무 고마워 하더라구요.”

고마워하는 죤의 얼굴을 상상해보았지만 그의 귓밥에 매달려 있던 은빛 고리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영주권을 받고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아 제이슨은 혼자 한국으로 영어강사 자리를 찾아 떠났다. 육개월만에 돌아온 그에게서는 낯선 냄새가 났다.    

         “그깟 것도 정이랍시고 그 남자 요새 같이 살자고 부쩍 조르는데, 난 싫어요. 살아보니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술만 마셨다 하면 완전히 딴 사람이 되거든요. 밖에서 여자들하고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구. 모르죠 뭐. 오로라 도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스트립클럽이 널렸던데 거기서 노는 건지…… 어차피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만, 그러다 괜히 몹쓸 병이라도 옮으면 나만 손해잖아요, 안 그래요?” 

         죤에게서 성병이 옮을까봐 걱정이라는 말을 하면서도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스트립클럽에 가 본 적은 없지만 남자들이 춤을 추는 스트립퍼에게 지폐를 뿌린다든지, 스트립퍼가 거의 알몸인 채로 남자의 무릎에 앉아서 춤을 추기도 하는 곳이란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녀의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 위로 죤의 얼굴이 오버랩되었고 그래서 나는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었다. 드러내놓고 호기심을 보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녀와 똑같이 무심한 얼굴을 가장할 수도 없어서 나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듯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가끔 우리 집에서 시끄러운 소리 들리지 않아요?” 

         “네?” 

         “밤중에 무슨 소리 들리지 않냐구요. 저번에 매니저가 와서 주의를 주고 갔어요. 사람들이 

계속 전화를 한대요, 시끄럽다구. 이웃에게 계속 피해를 주면 임대규정에 의해 퇴거해야 

한다고 경고를 하더라구요. 여기서는 잘 안 들리나 보죠?”

         “......” 

         “죤이 술주정하는 거예요. 내가 방금 얘기했죠? 그 남자 술만 마시면 이상해진다구. 술 취하면 눈에 띄는 대로 집어던지는 바람에 깨질만한 건 이제 다 깨졌어요. 손지껌 안하는 거 보면 신통하다니까요. 전에 살던 아파트에서도 사실은 쫓겨난 거나 다름없어요. 옆에 살던 사람들이 매니저에게 얼마나 전화를 해댔던지 나중에는 매니저가 사정을 하더라구요, 제발 나가 달라구. 가을까지는 여기서 눌러있고 싶은데…… 어차피 그때쯤이면 엘에이로 떠나야 하거든요.”  

         그녀는 식탁 위에 놓인 책상달력을 쳐다보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말한 여기라는 곳이 그녀에게 같이 살자고 조르는 술버릇 나쁜 죤이 있는 218호인지, 아니면 지금 그녀가 앉아 있는 식탁 앞인지 나는 잠시 궁금해졌다. 그녀는 가을까지 그렇게 내게 계속 수다를 늘어놓고 싶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이 쏟아놓고 있는 말의 홍수를 멍청하게 흘려보내고 있는 내 얼굴을 보며 가을까지 머무르는 것은 무리라는 것을 깨달은 걸까. 

“점심 잘 먹고 가요. 내가 너무 실례를 했나 봐요?”

“아니에요, 덕분에 저도 맛있게 먹었어요.”           

그녀가 가고 나자 나는 삽시간에 피곤이 몰려와 침대에 누웠다. 그녀가 버리고 간 말더미에 짓눌려 체했는지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했다.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을 만큼 막역한 사이도 아닌 사람 앞에서 어떻게 그렇게 솔직해질 수 있는지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하긴 그녀에게 나는 철저한 타인이었기에, 즉 마음만 먹으면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지나쳐 버릴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열흘만에 다시 218호 여자를 보게된 것이다. 

 

당신을 가정폭력법에 의거해 체포할 수도 있습니다.

 

쾅! 딸깍! 218호 여자가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는지 문 닫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후 여섯시가 넘었지만 창문으로는 여전히 뜨거운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가 빨간 포드를 몰고 다니며, 나만큼이나 패럴렐 파킹이 서툴다는 사실을 나는 오늘 처음 알았다. 기말시험 준비 때문에 지난 일주일 내내 강의노트를 들고 끙끙거렸던 나는 그 동안 218호 여자에 대한 생각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녀의 바람둥이 남편 죤에 대한 궁금증도, 가을이면 나온다는 그녀의 영주권도, 시험에 대한 긴장으로 잔뜩 부풀어 있는 내 머리 틈을 비집고 들어올 수는 없었다. 

         주방벽 너머로 물소리가 들리고 그녀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어제로 모든 시험이 

끝나고 육주간의 방학이 시작되었다. 테이크아웃으로 일찌감치 저녁을 때운 나는 

유명작가가 삼 년만에 내놓았다는 소설을 들고 소파에 길게 누웠다.              

         218호에서 문 닫는 소리가 다시 들리고 곧 이어 텔레비전 소리와 함께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름이 죤이라는 218호 여자의 남편이 들어온 것이다. 218호 여자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들리지 않았다.  

         무거운 발자국 소리가 머리 위로 지나가고, 문 밖에서는 열쇠뭉치가 절거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218호에서 켜놓은 텔레비전 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왕왕거리고 무언가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자주 들렸지만 이제 내막을 알기에 예전처럼 신경이 쓰이진 않았다. 그리고 한 시간 아니 두 시간쯤 지났을까? 소설속 주인공이 연인에게 독설을 퍼붓는 장면에 흠뻑 빠져있던 나는 익숙한 소음들 사이로 들리는 낯선 목소리에 스프링처럼 발딱 상체를 일으켰다.   

         “씨애틀 폴리스! 오픈 더 도어!”

경찰이라구? 무슨 일이야? 나는 재빨리 현관문 앞으로 다가가 문구멍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짙은 감색 경찰복을 입은 두 남자가 218호 문 앞에 서 있었다. 테이저가 매달려 있는 허리춤에 한 손을 올려놓고 여차하면 전기충격을 가할 만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까닭없이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복도에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사람들 서너명이 나와 있었다. 그들처럼 복도로 나가서 대놓고 구경하기에는 나는 소심했다. 그렇다고 궁금증이 없는 건 아니었기에 보조열쇠체인을 걸어둔 채 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218호 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쾅쾅쾅! 쾅쾅쾅!

         “씨애틀 폴리스!”

얌전하던 노크 소리가 거칠게 바뀌었다. 

         “도대체 누구야?” 

         벌컥 문이 열린다 싶더니 218호 남자의 예의 그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들렸다. 텔레비전 소리도 성난 벌떼처럼 따라 나왔다.  

“씨애틀 경찰입니다. 여기 사십니까?” 

“원하는 게 뭐요?”

술기운이 묻어있는 남자의 목소리는 경찰의 방문이 마뜩찮은지 한껏 비틀려 있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죤. 죤 후리맨.”

“저 사람이 당신의 아내입니까?”

“그렇소.” 

         218호 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구경군이 늘어났는지 사람들 웅성거리는 소리가 잠깐 들렸다.  

“아주머니, 티브이를 꺼주시겠습니까? 감사합니다.” 

         키가 작은 대신 어깨가 다부진 경찰이 218호 여자에게 말했다. 공손하고 정중한

목소리였지만, 허리춤에 있는 테이저에 손을 올려놓고 있는 그의 목소리는 위협적인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복도는 쥐죽은듯이 조용해졌다. 누군가 두어번 마른기침을 했을 뿐, 사람들은 218호 남자와 경찰이 나누는 얘기를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침 삼키는 소리도 내지 않았다.

“이웃에서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두 사람 싸웠습니까?”  

“천만에! 내가 왜 아내와 싸운단 말이요?”

죤의 말을 받아 적고 있는 경찰의 각진 어깨는 죤의 대답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절차상 물어본 것에 불과했는지 각진 어깨의 관심은 곧 218호 여자에게로 향했다.

“아주머니 잠깐 복도로 나와주시겠습니까? 영어를 할 줄 아십니까?”   

그녀의 모습이 곧 눈에 들어왔다. 각진 어깨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녀의 영어가 형편없는 건 아니었다.

고무밴드로 엉성하게 머리를 묶은 그녀는 레깅스에 양말을 신고 있었다. 

“남편하고 싸우고 있었나요?”

“아니오.”

         “남편이 당신에게 폭력을 휘둘렀습니까?” 

“아니오.”

         “밀었다든지 뺨을 때렸다는지 했으면 폭력을 쓴 겁니다.”         

         “…… 아니오.”

         미리 준비라도 해놓은 듯 판에 박힌 목소리로 물어오는 경찰에게 그녀는 아니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남편이 때리지 않았다고 말할 때에는 잠시 머뭇거리는 듯 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그 어떤 낌새도 없었다. 

         그녀의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각진 어깨는 상체를 기울여 218호 안쪽을 들여다 보았다.  

         “뭐 그렇다면 좋습니다. 그런데 저 파편들은 뭡니까? 당신이 부순 겁니까?” 

         218호 안쪽을 기웃거리던 각진 어깨가 죤에게 물었다. 아마도 218호 여자가 말한 대로 

술버릇 나쁜 죤이 또 뭔가를 집어던져 난장판을 만들어 놓은 모양이다. 

“그래, 내가 그랬소.”

         “왜 그랬습니까?”

         “왜냐구? 저 년이 내 속을 뒤집는 바람에 열이 뻗쳐서 그랬소, 왜? 이제 됐소?” 

         “진정하세요. 우린 당신을 가정폭력법에 의거해 체포할 수도 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알아들었습니다.”  

         무슨 이유에선지 단단히 화가 나있던 218호 남자는 가정폭력범으로 체포할 수도 있다는 

소리에 순한 고양이처럼 가지런히 발톱을 모았다. 

         “죤, 아내와 싸우다가 테이블을 부수고 그러다가 홧김에 당신의 아내를 때렸습니까?”

“아닙니다. 그건 절대 아닙니다!” 

         “당신 남편의 말이 사실입니까?” 

         “네.”

어느새 술기운이 싹 가신 음성으로 손까지 내저으며 허둥대는 죤의 곁에서 그녀는 

침착하게 서 있었다.

“당신들 말을 믿기로 하죠. 죤, 이제 그만 진정하고 잠을 자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더 이상 소란을 피웠다가는 당신을 데리고 가야할 지도 모르니까요.”

“아, 물론이죠. 나도 지금 막 자려던 참입니다.”

         “아주머니, 죤하고 아무 문제도 없는 거죠?”

         “네.”

218호 여자에게 다짐을 한번 더 받은 경찰은 할 일을 다했다는 듯 손에 들고 있던 수첩을 주머니에 넣었다. 죤은 무엇이 고마운지 경찰에게 탱큐, 하면서 악수를 청했다. 경찰이 떠나고 복도를 향해 열려져 있던 문들이 하나, 둘, 닫혔다. 나도 문을 닫았다.

술버릇 나쁘다던 죤은 기어이 한밤중에 경찰의 방문을 받았다. 매니저에게 전화를 해댄다는 사람들이 이번에는 경찰에 신고를 한 모양이었다. 

이곳은 그랬다. 상호 이해가 어긋날 경우 당사자들끼리 서로가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기싸움을 하든지, 그러다가 감정이 격해지면 쌍욕을 날리며 멱살을 틀어쥐고 힘싸움을 한차례 한 뒤에 해결을 보는 우리식 방법보다는, 제삼자가 나서서 중재해 주는 쪽을 선호했다. 자신의 권리와 재산은 철저히 보호받아야 한다는 논리에는 예외가 없었다. 설혹 그것이 같은 건물 안에서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고 있는 이웃이라 할지라도. 이곳에 유난히 변호사가 많은 이유가 그래서인 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건 이곳 사람들 얘기다. 218호 여자와 무슨 일이 있었길래 죤은 그렇게 화가 났던건지, 남편이 폭력을 썼냐는 질문에 왜 218호 여자는 잠깐이나마 머뭇거렸는지, 나는 그런 것들이 궁금했다. 

텔레비전 소리도, 죤의 우렁우렁한 목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경찰의 충고대로 죤은 잠자리에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나는 건성으로 책을 펼쳐놓은 채 갑자기 찾아온 고요가 낯설어서 자꾸만 주방벽으로 귀를 모았다. 한밤중에 

갑자기 218호 여자가 문을 두드리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뜬금없는 걱정에 나는 가까운 경찰서 전화번호를 찾아 포스트잇에 적어서 냉장고에 붙였다.  

 

아직은 여름이다.     

         

         경찰이 다녀가고 이주일쯤 지난 뒤에 218호 여자와 죤은 짐을 꾸려 떠났다. 그녀가 떠나던 날, 나는 창문 앞에 서서 박스를 옮기고 있는 218호 여자와 죤을 지켜보았다. 아쉬움도 후련함도 아닌 묘한 감정이 울컥, 치밀었다. 트렁크 문을 닫고 차에 오르기 전에 그녀가 고개를 들어 아파트를 올려다보는 순간 나는 엉겁결에 뒷걸음질을 했다. 쫓겨나듯이 떠나는 모습을 내가 보았다는 것을 그녀가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구월이다. 이제 여름이 다 끝났다고 하는데 믿기지 않는다. 어제만 해도 여전히 기세당당한 여름이 화씨 구십도의 뜨거운 입김을 하루종일 불었고 새들은 그늘에서 나오지 않았다. 텔레비전 뉴스를 본 사람들은 이게 다 지구온난화 때문이라고 한마디씩 했다.     

         더위라면 질색이기에 여름이 지나간다고 하니 어쨌든 반가운 일이다. 더운 것도 더운 거지만 여름과 관련해 그다지 좋은 기억이 없다. 여름 바닷가에서 물놀이를 하다가 다리에 쥐가 나서 소동이 벌어졌던 적이 여러번 있었기에 여름이면 누구나 좋아한다는 물놀이도 시큰둥하다. 첫직장에서 해고된 날, 여름비를 쫄딱 맞으며 청승을 떨다가 개도 안 걸리는 여름 감기를 호되게 앓은 기억도 있으니 여름이 좋을 리가 없다. 세 줄의 한국말로 나를 키운 한국의 모든 것을 안다고 믿었던 제이슨과 끝내 헤어진 것도 여름이었다. 김밥과 떡볶이를 들고 나를 찾아왔던 218호 여자도 여름에 떠났다. 

         여름은 짧을수록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