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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글짓기(중고등)] 그 날의 함성을 기억하며
작성일
2020.03.04

[장려상 - 글짓기(중고등)]



그 날의 함성을 기억하며

 


유다은 / 태국


 

  “쎈세, 소지 오와리마시타.” (선생님, 청소 다 끝났습니다).

“소오? (그래...?) 닷타라 고모도타치니 이에니모돗데모 이이떼 유노 “(그럼 아이들에게 집에 가도 된다고 전해줘라) 

“하이, (네.) 아리가또 고자이마쓰.” (네. 감사합니다) 

 

     내 이름은 가네사끼 준데이, 사냥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난 이렇게 선생님께 청소 보고를 마치고 영림이와 함께 손잡고 신나게 노래를 부르며 집에 돌아왔다. 일본어를 제일 잘한 덕분에 반장이 된 나는 이렇게 선생님께 보고를 드리고 나면 참 뿌듯하고 기분이 좋았다.

 

  으스대며 힘껏 대문을 여니 동생의 울음소리가 들렸고 긴 일본도를 차고 있는 일본 순사에게 아빠는 끌려 나오고 있었다. 엄마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었고 으르렁대는 사자 앞의 연약한 사슴처럼 온 몸을 사시나무 떨 듯이 바들바들 떨고 만 있었다. 그렇게 아빠는 경찰서로 끌려 가셨고 며칠 뒤에 온 몸에 매질을 당해 멍투성이와 피범벅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셨다. 

 

  강경에서 제법 크게 농사를 짓고 있던 아빠는 쌀을 공출이라는 명목으로 다 뺏길 수는 없어 조금 따로 숨겨 놓았다가 그게 발각되어 고초를 당하신 거였다. 누군가가 일본 순사에게 아빠가 숨겨놓은 사실을 일러주었다며 엄마는 분함에 어쩔지를 몰라 하셨다.

 

 며칠동안 끙끙 앓으시던 아빠의 모습에 이제는 더이상 내가 일본말을 잘 하는게 자랑스럽지 않다. 일본인에게 쌀을 다 빼앗겨 풀죽으로 먹는 것도 지긋지긋하고 비행장 건설한다고 숟가락부터 놋그릇, 양철 지붕까지 빼앗아가는 일본 순사의 얼굴은 마치 조그만 거 하나라도 더 찾으려고 눈빛을 번뜩이는 비열한 하이에나 같았다

 

  왜 이렇게 학교에서 일본말만 해야 하고, 일본 선생님 밑에서 공부를 배워야 하는지 잘 모르지만 일본 순사는 어찌나 무서운 저승사자 같은 지 울보인 막내 마저도 일본 순사 온다는 말에 울음을 딱 그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른들이 라디오 있는 집으로 수군대며 삼삼오오 모였고 일본 천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어른들은 만세를 부르며 큰 거리로 뛰쳐나갔으며 나도 덩달아 강경시내까지 만세를 부르며 같이 행진하였다. 해방이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말씀이 이제 우리나라를 되찾았으니 더 이상 일본순사를 무서워할 필요도 없고 쌀도 빼앗길 필요도 없다고 하셨다.

 

 내 나이 12살 그렇게 난 대한민국의 광복을 온 몸으로 느끼며 역사의 현장에서 환호성을 지르고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올 해 86살이되신 외할머니의 어린 시절 이야기이시다.  외할아버지 또한 일본에 의해 강제로 창씨개명을 해 ‘하리모도 냉고’라는 이름을 가지고 계셨으며 일본어를 못 하면 관공서 출입도 하지 못해 어른들은 어려움이 참 많았다고 하셨다. 그렇게 일본은 ‘민족 말살 정책 ‘이라는 이름아래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고향이 강경이신 외할머니는 김구 선생님이 방문하신다는 소식에 직접 태극기를 들고 환영 인사를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며칠 뒤 암살당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학교에서 접하고 친구들과 책상을 치며 원통함과 슬픔에 울음을 터트리셨다고 하셨다.

 

   난 평소에도 역사적으로 궁금하게 있으면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께 전화를 드려 여쭈어 본다. 두 분의 이야기 보따리는 언제 들어도 재미있고 지루할 틈이 없었다.  마치 한편의 장편 소설을 읽는 것 같았다. 일제 강점기 시대부터 광복, 6.25 전쟁을 거치고 남북의 분단, 그리고 이어지는 할아버지와의 러브스토리는 항상 흥미 진진하였다. 나에게는 살아있는 역사와 다름이 없다. 특히 올 해는 3.1운동의 100주년이 되는 특별한 해이기에 일제 강점기 시절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 전화를 건 나에게 들려주신 두 분의 이야기는 직접 겪었다고 하기에는 믿기 힘들 정도로 충격적이어서 전화를 끊고도 한참을 멍하게 앉아있었다.  

 

  처음에는 너무 오래된 이야기라   들쑥 날쑥 이였지만 조금 지나지 않아 침착하게 하나씩 기억들을 끄집어내셨다. 두 분은 어린시절이었지만 어제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셨다.  차분한 목소리로 시작된 이야기는 이내 애절함과 비통함으로 점점 더 격앙되어지고 있었다. 나 역시 두 분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분함과 억울함에는 마음속으로 따라 울고, 기쁨에는 같이 웃었다.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져줘서 고맙다 하시며 할아버지, 할머니가 머리속이 하얗게 지어져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기전에 자주 전화해 달라는 말씀에 죄송함과 감사함에 어찌할지를 모르고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역사의 한 복판에 서 계셨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이야기는 목소리로만 전해 들어도 나라 잃은 슬픔과 억울하게 당해야만 했던 아픈 기억들, 그리고 나라를 되찾았을 때의 기쁨까지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떠났던 두 분과의 시간여행은 그런 모진 세월을 희망으로 극복해내신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에 대한 숙연함과 감사함으로 3.1운동을 비롯해 임시정부 수립까지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역사는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바꿀 수가 있다”고 하였다. 또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는 없다”라고도 했다. 우리가 정확히 역사를 알고 공부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100년 전 이 땅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일까?

우리나라는 1910년에 일본의 강제적인 한일합방에 나라를 빼앗긴 지 근 10년이 되던 해였고 세계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해였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라는 ‘민족 자결주의’를 제창하셨다. 이런 세계 열강의 분위기는 일본군의 억압과 핍박에 시달리던 우리민족에게도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주었고 1919년 1월에 급사하신 고종 황제의 독살설이 퍼지면서 우리민족의 울분은 극에 달해 있었다. 

 

  그 해 2월 8일 최팔용, 김도연, 송계백 등 일본 유학생들은 일본의 심장인 동경 YMCA 회관에서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를 일본이 따라줄 것을 요구하는 만세시위 운동을 벌이게 된다. 이 사건으로 국내에 있는 33인의 민족 대표들은 최남선 기초에 한용운 선생님이 추가한 독립 선언서를 제작하고 고종 황제의 장례식 이틀 전인 3월 1일에 3.1운동을 계획한다. 종교계와 학생들로 이루어진 대표들은 탑골 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로 하였으나 너무나 많은 군중으로 인해 무력 충돌이 일어날까 봐 음식점인 태화관에서 독립 선언문을 낭독한 후 일본 경찰에 자진 신고해 잡혀간다.  

 

   한편 탑골 공원에서 기다리던 학생들은 민족 대표들이 나타나지 않자 한 학생이 앞에 나서 “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 라는 기미 독립 선언서를 낭독한다. 낭독이 끝나자 마자 우리 민족은 설움과 울분을 되새기며 목이 터져라 “대한 독립 만세” 라고 외쳤고. 억눌러있던 독립에 대한 열망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3월1일 7개 도시에서 시작된 만세 운동은 3월 중순에는 지방 중소도시로 번지기 시작했고 4월에는 전국으로, 이어서 만주, 연해주, 미주 등 세계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온 나라가 평화로운 시위로 세계 만방에 독립에 대한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은 3.1운동이 분수령이 되어 3.1운동 전과후가 다른 양상을 보일만큼 역사적 의의가 크다.

첫째, 한민족의 의지와 일본의 무자비한 만행을 세계에 알리는 기회가 된다.

둘째, 독립 운동의 주체가 일반 대중으로 확대되어 국민이 주인이라는 주체 사상인   

      공화주의의 기틀을 잡게 된다. 

셋째, 인도 간디의 비폭력주의와 중국의 5.4운동등 다른 약소국의 독립 의지에도 영향을 

      끼친다.  

넷째, 독립운동에 대한 자신감을 얻은 독립 운동가들과 민중들에 의해 국외에서는 

      다양한 외교적 활동, 무장 투쟁과 더불어 국내에서는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운동이 일어난다. 

다섯째, 3.1 운동을 계승하기위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된다. 

여섯째, 무단 정치로만 일관하던 일본의 통치 형태에서 회유와 기만 등으로 완화된 형태의 문화통치로 바뀌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렇듯 많은 희생과 상처를 딛고 함께 일어난 3.1운동은 남녀노소, 지위, 지역에 상관없이 모든 국민들의 독립에 대한 희망과 열망을 세계 곳곳뿐만이 아니라 지금 현재의 우리에게도 보여주는 어둠속의 한줄기 빛과 같은 것이었다.

 

  이제 3.1운동은 100년전에 있었던 단순히 과거로 지나간 역사가 아니다. 제대로 된 지도부 체계 없이 학생, 종교계인사들이 주축이 되었던 운동이 점차적으로 노동자, 농민으로 확대되어 온 국민이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 하나에 똘똘 뭉친 우리 겨레의 공동체 정신이다. 일본의 무단 정치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투쟁하며 세계만방에 알린 우리 민족의 숭고한 얼이다. 

 

  이제 우리는 3.1운동 정신을 계승하여 서로 포용하고 화합하여 선조들이 피땀과 목숨으로 지켜낸 이 대한 민국을 세계속의 대한민국으로 우뚝 세워야 할 것이다.

 말로만 외치는 나라 사랑이 아니라 나보다 겨우 2살 많았던 나이로 3.1운동때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 잡혀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면서도 3.1운동 1주년 만세 시위를 벌이시다 순국하신 유관순 열사의 정신을 난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 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라고 말씀하신 유관순 열사처럼 정의로운 일 앞에서는 두려워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도 유관순 열사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독립 운동가들, 그리고 우리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처럼 평범하시지만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고 인고의 세월로 나라를 지켜 내신 분들을 위해 나라 사랑을 다짐하며 그 분들의 고귀한 정신을 가슴 깊이 새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