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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체험수기] 케세라세라・희망은 늘 과제와 함께
작성일
2020.03.18

[가작 - 체험수기]



케세라세라・희망은 늘 과제와 함께

 


이홍매 / 일본


 


“엄마 층계가 마지막이야”

 

내발이 다음 계단에 닿을 3초쯤전에 귀띔해주는 아들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헛발질 할가바 걱정임이 틀림없었다. 언제부터인지 반보쯤 뒤에서 늘 이것저것 살피는듯 한 아들과의 동행이 늘었다. 물론 타박도 늘었다. 

 

“방금 그 발음은 좀 이상하네…” 

“엄마 무거운건 택배로 해요…”

 

그러다가 간혹 하는 “어머니 밥주쇼”라는 우리 연변말을 들을 때면 어릴때 익혔던 그 뉴앙스가 변함없는 것에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내가 우리말을 하면 일본어로 대답하는 아들이다. 가끔 하는 우리말속에 중국어가 섞여도 아무런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그는 일본인들속에 끼여 제2, 제3 외국어로 한국어와 중국어를 공부하면서 이제 어엿한 직장인이 되었다. 지난 일들이 꿈이냐 싶게 이젠 엄마의 심리상담 담당자이기도 한 아들이다.

 

1990년대초 결혼한지 1년만에 임신소식을 알렸더니 시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은 딸을 낳아야 좋단다”었다. 그말에 조금은 안심이 되었지만 반대로 ‘아들이면 안되는가?’라는 걱정도 생겼다. 결국 아들애가 태여났고 시어머니는 아들애일 경우에는 집안사람이 아닌 남한테 이름을 지어 받아야 된다는 사주풀이를 받아 가지고 오셨다. 농장지희(弄璋之喜 )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들을 낳으면 한소리할수 있다는 세상편견속에서 조금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기도 했다. 하여 수없이 부탁을 받고 남들한테 이름을 지어 주시는 우리말연구자이신 외할아버지를 제치고 한국어와는 인연이 옅은 아빠회사의 사장님이 소곤(啸坤)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셨다.  ‘넓은 땅우에서 울부짖다’라는 큰 뜻이 담긴 이름자었다.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해서 우리말 동요를 좔좔 외우기 시작했던 해인 1996년에  유학공부로 일본에 온 아빠를 따라 일본에 오게 된 곤(애명)이다. 도착한 하루만에 아파트아래집 녀자애와 친해진 곤이는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데도 깔깔 웃어대며 같이 눈사람을 만들기도 했고 숨박꼭질에 시간가는줄을 모르는 것 같았다. 겨울방학이 지나고 동네애들이 유치원에 가기 시작하자 유치원에 보내달라고 매일같이 떼를 썼다. 귀가 어리버리해지고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것 같아서 전혀 안착을 못하는 엄마와는 정반대로 곤이는 앞으로 정진을 시작하고 있었던것이다.

 

8,90년대 중국 동북의 아이들은 영하 25도를 넘는 한겨울에는 호랑탄자의 세례를 받으면서 컸다. 그래서 혼수함에는 호랑탄자가 첫 순위로 들어가 있어야 했다. 적어도 2,3킬로쯤 되는 탄자에 이미 두터운 옷을 입힌 애기를 둥쳐 싸서 업고 밖에서 이동을 해야 했다. 번마다 엄마와 아이가 물오리마냥 땀을 줄줄 흘렸지만 딱히 다른 방한대책이 없었다. 역효과로 아이는 자주 감기에 걸리고 엄마는 어깨가 물러나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감각에 지치고…그렇게 키운 곤이를 령하 5도의 날씨에 맨다리에 짧은 바지를 입힌 채 겨울코트 하나만 걸치게 하어 유치원버스에 올려 보낸 첫날, 하루종일 안달이었던 나다.

 

남편이 일본류학을 떠난 뒤 2년을 고민하고 내린 결정이 일본에서 같이 사는것이었다.  아이가 아빠를 찾기 시작했고 나역시 부부가 떨어져 사는게 버겁게 느껴졌었다. 아이를 함께 키워야겠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일본땅에 발을 내려 놓았던 나는 앞으로 몇년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구체적인 미래도를 그리지도 않았다.  마치도 가는곳이 천당인것처럼…가기만 하면 모든 것이 뜻대로 이루어 질 것처럼 겁없이 바다를 건넜다.

 

제일 추운 2월에 맨다리로 유치원제복을 입어야 하고 때로는 말라붙은 눈물자욱으로 돌아 오군 했지만 한번도 유치원에 안간다고 떼를 쓴적이 없었던 곤이었다. 여태 살던 곳과는 눈에 담기는 경물도 다르고 먹는 음식도 다르고 걸려 오는 말들도 달랐지만 당황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갓 익히기 시작한 ‘집안말’이 불뚝불뚝 튀여 나오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지체없이 일본어로 바꾸어 대처했고 그런 날들로 반년이 지나고 나니 아예 일본어가 아들 곤이의 머리를 점령해 버리고 마는것 같았다. 

 

만 5세좌우에 완성된다는 기본적인 언어발달능력, 일본에 온지 무려 다섯달만에 대화를 거침없이 하는 아들애를 보면서 놀랐다. 다섯살난 아들애한테 있어서 모어였던  한국어가 일본어로 대체되는 그 시기를 지켜보면서 인위적인 환경에 지배받는 언어적응의 과정이 아이들한테는 생각보다 너무 간단함을 느꼈다. 다행이 다년간 한국케블테레비를 집에 들여 놓은 덕에 아들애의 귀에는 한국말이 생소하지 않았다. 중국인이 왜 비싼 돈을 주면서 한국테레비를 보는지, 왜 고추장, 김치를 아무 위화감없이 매일 먹는지, 거기에 대한 의문을 가질 여지도 필요도 없이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의 운명적인 공존속에서 살게 된  아들애었다.

 

곤이가 초등학교3학년쯤 되었을 때었다. 여느 지인이 국적을 바꿨다는 이야기를 남편이 나한테 한적이 있었다. 말귀를 알아 들은 곤이가 국적이 뭐냐고 물어 왔다. 곤이입에서 그런 질문이 나오리라 예상을 못했던 나는 아홉살난 애가 쉬이  이해할수 있는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한채 한동안 생각을 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복잡함을 느꼈다. 초등생에게 국적을 어떻게 이해시켜야 하는가? 앞으로 곤이한테 국적은 어떤 의미로 존재하게 될가.

 

그러던 어느날, 아이를 이끌고 동네 공원벤치에 앉았다. 작은 아파트공간보다 훨 틔운 하늘을 바라보며 마이너스이온의 세례를 받으며 해야 할 이야기인것 같았다.

 

“조선이라는 나라 알고 있지?”

“응?”

“우리가 살았던 연변과 가까운 나라…”

 

1930년 초봄, 첫돐이 지난 큰 고모를 업고 이불 한채와 쪽바가지를 차고 두만강을 건너온 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이야기를 나는 흑백영화속의 어둡고 침침한 화면처럼 떠올리며 어린 곤이에게 들려줬다. 차디찬 얼음구멍에 빠진 할아버지가 할머니가 뿌려 주는 헌 이불과 막대기의 힘을 빌어 겨우 얼어붙은 강위로 올라왔다는 우리조상의 눈물겨운 두만강 옛이야기가 어린 곤이에게 그렇게 전해졌다. 

 

힘겹게 건너와 발붙인 첫 정착지가 길림성의 훈춘이었고 외할아버지가 거기서 태어났다는 이야기. 광복을 맞은 후 술 공장에 나가게 된 외할아버지의 아빠, 그리고 떡장사로 시장바닥을 누벼야 했던 외할아버지의 엄마는 여섯 자식의 배를 굶기지 않기 위한 고달픈 삶을 살았다는 옛말을 해줬다. 이해할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지만  또릿또릿한 곤이의 눈동자에 뭔가를 전달해 줘야할것 같은 사명감같은것이 내마음을 욱박지르는 것 같았다.  그렇게 광복이라는 말을 처음 접했던 곤이었다. 곤이한테는 세상에서 제일 큰 힘을 가진 분이 대학교 교수인 외할아버지었다. 그런데 그런 할아버지가 어린시절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남들이 먹다 버린 과일을 주어 먹기도 했었다는 말에 아이가 엉엉 울기 시작했다. 하여 그만 옛말을 멈추고 말았다.

 

“외할아버지 국적은 뭐예요?” 

 

중단된 이야기속에서 뭔가를 느낀것이었을가 곤이가 당돌하게 물었었다.

 

“중국” 

 

“난 외할아버지랑 같은 걸로 할래요” 

 

어린 아들 곤이에게 국적은 그런것으로 이해되었다.  ‘조선’은 뭐고 중국사람인데 왜 조선말을 하게 되었을가에 대해 어린 곤이는 생각을 해본적이 있었을가.  그점에 대해 한번도 확인한 적은 없지만 국적은 할아버지와 같은 것이어야 하고 가족은 다른 국적일수 없다는 그 갸륵하고 이쁜 주장은 그후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변함이 없었다.

 

여태 일본에서 살면서 특별히 신경을 쓴 이방인의 자세같은 것은 없었다. 다만 어릴 때부터 익혀  왔던 순기자연(顺其自然)에 집착했던것 같다.  순리대로 살자는 이념이 되려 ‘산에 가면 산노래, 들에 가면 들 노래’에 맞추기 위한 모지름이었을지도 모른다. 밖에서 이런 저런 구속에 시달리다가 집안에서 한국어로 식구들끼리 이야기를 할때면 마음이 후련해지군 했다. 대답을 일본말로 하군 하는 곤이도 외할아버지와 통화할 때면 평소에 귀에 저장해 두었던 엄마아빠의 대화내용을 되색이며 힘겹게 한국어를 번지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사실 요즘과는 달리 그때는 일본사람들의 귀에 중국어나 한국어나 다 일본어가 아닌 외국어로 들릴뿐 명확하게 이건 중국어요 저건 한국어요 라는 구별이 잘 되지 않았다. 하기에 집식구들끼리 한국말을 할 경우에도 그들은 우리가 중국어로 대화하는 줄로만 아는것이다.  구태여 중국사람인 우리가 왜 한국말을 하는지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었다. 중국이 다민족국가라는 자체를 잘 알지 못하는 일본인들이 많았던 그때 우리가 일본인이 아닌 수많은 외국인들중의 한부류인 중국사람이라는 인식외에  다른 무언가로 또다른 구분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한편 당시는 2차세계대전이후 중국에 남겨졌던 잔류고아들에 대한 조사와 귀환사업이 한창이었다.  전패로 중국에 남겨졌던 일본인자식들을 키워 준 중국인들에 대해 일본인들은 감사의 마음을 품고 있었다. 얄팍한 삶의 지혜라 할가 우리는 중국에서 온 조선족이라는 한층 복잡한 설명을 아예 하지 않은채 순수 중국인신분으로 당분간을 살았던 것이다. 

 

곤이가 중학교를 졸업하던 날 담임선생이 “소곤이가 앞으로 중국,한국,일본을 넘나들며 활약할수 있는 방면으로 나가길 바란다”고 나에게 말했다. 나는 내심 깜짝 놀랐다. 마치도 호주머니 깊숙한 곳에 숨겨 둔채 아직 세상에 공개하지 못한, 대대로 내려온 가보의 존재를 들키운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할가… 후에 안 일이지만 아들 곤이는 친한 친구들한테 자기는 중국사람이지만 조상은 한국사람이라고 ‘출생의 비밀’을 말해 왔던것이다. 담임선생님께 내가 들려 주었던 두만강 옛이야기를 했더니 흥미를 가지더라는 말도 그때 들었다.  이름처럼 당당한 아이로 크게 키워야겠다는 목표만을 세우고 조선족이라는 면이 도대체 아이한테 도움이 되겠냐를 두고 네가티브적인 생각으로 늘 고민하고 있었던 나는 아들앞에서 부끄러웠다. 일본사람들앞에서 내가 왜 내 뿌리를 두고 주춤했을가…

 

나의 적관지는 중국길림성 연길시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나는 따뜻한 온돌의 푸근함을 작은 몸으로 느끼며 자랐다. 생의 첫마디가 “엄마”었고 맛을 알기 시작해서 부터는 물에 씻은 김치쪼각이 없으면 밥을 먹지 않았다 한다. 한복에 대한 애착이 유명했던 엄마가 명절때면 늘 하얀 저고리에 까만색 치마를 입으셨던 모습이 너무 이쁘셨다. 어렸을때 엄마가 나에게 지어줄 색동저고리감을 사오셨는데 초등학생이었던 오빠가 군공메달을 만든다고 엄마몰래 저고리감을 가위로 베어낸 탓에 엄청 혼났던 기억이 즐겁게 머리속에 남아 있다.  왜서일가라는 의문같은걸 떠올린적이 없었고 지구상 모든 사람들이 나와 비슷하게 사는줄로만 알았다. 내아들 곤이처럼 국적에 대한 해석도 부모님한테 들은적이 없었고 국적이란 개념을 어른이 다 된후에야 알게 되었다. 중국말과 한국말을 섞어 쓰는 일상이었는데 부모님주장때문에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한국어중심으로 마친 나는 결국 한국어를 무기로 하는 직업을 선택하게 되었다. 중국에 살면서 중국어보다 한국어가 더 편하고 더 능한 아이러니속에서 나는 연변이라는 작은 울타리를 세상의 전부라고 착각하며 살아 왔다.

 

90년대초 생의 첫 외국행으로 한국에 가 봤을 때의 놀라움은 상상보다 컸다. 또다른 맛의 김치와 비빔밥을 알았고 내가 몸 담그고 살았던 정통의 깊이가 아직 많이 부족함을 감지했다. 그때까지 듣기만 했던 ‘족보’라는것의 실제존재에 놀라게 되었고 ‘전주이씨’라는 정체성외에도 갈래갈래 뻗어져 있는 뿌리의 관계성에 생소함을 느꼈다. 피를 나눈 사이, 같은 문화로 살아 가는 사이, 끈끈한 정을 이어가는 사이…가 커다란 강과 같은 간격을 가지고 있음에 슬펐다.  갑자기 중국사람이면서 진정한 중국사람이 아니고 조선민족이면서 제대로 된 조선인이 아닌것 같은 소외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럼 대체 나는 누구일가. 일개 민족의 문화인으로 산다고 자부했던 자신이 여태 몸에 배어있던 당당함에 주저하게 되는걸 어쩔수 없었다. 내가 보는 세상이 다가 아니고 내가 알고 있는것이 전부가 아님을 느끼며 새로운 무언가를 갈망하게 되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내각이 내린  “유학생 10만명 계획”의 물결을 타고 남편이 일본땅에 유학을 온지 2년만에 아이를 데리고 나는 일본땅을 밟았다. 솔직히 남편이 유학공부를 마치고 돌아가면 아름다운 현실이 기다리고 있을수도 있는 때었고 나 역시 공들여 쌓아 온 실적들의 혜택도 받으면서 편안히 살수 있었다. “그대로가 좋았을가…”요즘 늘 하는 생각이지만 아들애의 장래를 위해 무언가 변혁을 가져 오고 싶었던 그때었다. 적어도 나를 훨씬 초과하는 인생을 살도록 해 주고 싶었다. 

 

우리한테 새로운 거점은 아직 네살이 좀 넘은 곤이한테는 첫 시작이 되겠지. 두가지이상의 아이덴티티가 인정을 받는 요즘세월과는 달리 복잡한 해석이 되려 의문을 일으켰던 그때에는 될수록이면 담백한 관계속에서 아이를 키우고 싶었다. 우선은 어느 하나의 언어와 문화, 그리고 인간관계를 완벽하게 구축시켜 주고 싶었다. 적어도 중국에서 태어 나고 자란 조선문학전공자라 하지만 중국문학과 조선문학의 중심에 다가서지 못하고 있는 변두리에 머물러 있는 나처럼, 밑바닥에 흐르는 민족적인 문화적소양에 부족함을 느끼는 오늘의 나처럼 키우고 싶지 않았다. 하여 처음 10년을 거의 옅은 막을 치고 살았다. 겉과 속의 비율을 날마다 피부로 느끼면서 자식의 앞날에 필요한것만 보면서 선택의 삶을 살았던것이다.  애써 노력하는 삶이었다. 

 

그런 엄마를 아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가.

 

초등학교때부터 축구바보었던 곤이는 축구대 대장을 연임하었고 늘 선두에서 뭔가를 하는 애었다. 중학교시절에는 선거로 1년간 학교학생회 회장직을 맡았고 엄마의 소원대로 명문고중에 입학하었다. 그 연장선을 타고 우리가 사는 지역에서는 드문 명문대 대학생으로 된 곤이는 여기저기 청하는데도 많았다. 우리가 사는 시교육청에서 지역내 중학교축구대 코치를 해달라는 부탁이 왔고 성인절기념대회에서 신성인대표발언을 해달라는 청탁도 들어 왔다. 일개 외국인이 몇백명에 달하는 신성인을 대표하여 무대에 올라 대표발언을 하다니 여태 없었던 전례라고 한다. 축하하러 온 시의 의원들을 향하여 “일본이 정말로 이대로 괜찮겠습니까?”라는 물음을 던져서 의원들의 의아한 눈길을 받았고 “당신은 동일본대지진 현장에 가보았습니까?”라는 질문을 하면서 2011년 대지진 피해상황을 가서 본대로 설명했었다. 장내를 메우는 박수소리가 곤이에 대한 인정이고 기대인것 같아서 감격한 나머지 나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아들 곤이의 성장을 위해 힘을 합쳐준 주위의 일본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었고 무엇보다 내마음속의 모든 걱정을 가셔 주듯이 무사히 자라준 당찬 곤이가 자랑스러웠다. 그 시각만은 내가 이방인이라는, 그것도 약간은 복합적인 이방인이라는 생각을 잊고 말았었다.

 

일본에서 사는 우리에게 국적은 자주 거론되는 존재는 아니었다.  같은 동양인이라는 점과 언어구조적으로 발음이 일본어와 비슷하여 우리가 하는 일본어가 일본사람들에게 본능적인 거부감을 주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때로는 동질적으로도 이해가 되는 문화적인 접근이 이외로 적지 않다는 점으로 하여 일본사람으로 오해받기 일쑤이다. 참의원선거때 자민당에 한표 넣어 달라고 부탁하러 왔던 선거활동중의 일본인 지인도 있었다. 한표 넣어드리고 싶은데 일본국적이 아니어서 미안하다고 했더니 “아참! 그렇지”하면서 쑥스럽게 돌아 섰다.  그의 뒤모습에서 20여년을 살면서 이사람들 마음속에서 변해가는 우리의  형체성을 느끼기도 하였다. 

 

아들 곤이가 절실하게 국적에 대해 재확인한것이 대학교 2학년때와 3학년때었다. 북경대학에 교환유학생을 보낸다는 기쁜소식에 첫인자로 신청을 했지만 국적이 중국이어서 유학생으로는 될수 없다는 답복을 받고 실감을 했던것이다. 3학년때 영국유학수속을 하면서 또 한번 절실히 느꼈던것은 적관지에 대한 증명을 중국에 가서 직접 떼어 와야 한다는 요구때문이었다. 초등학교때 채 듣지 못했던 국적에 대한 엄마의 설명을 그렇게 성인이 된 후에야 피부로 이해하게 된 곤이었다. 행정적이고 경제적인것을 물론하고 자신들의 이주가 어린 아들의 장래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게 될가를 늘 걱정하면서 우리는 조심스러운 이방인의 삶을 살았다. 드디어 아들의 취직을 앞둔 대학교 3학년때에 가정회의가 열렸다.

 

여러 선배들의 경험담을 들은 아빠가 본격적으로 아들 곤이의 국적문제에 대해 고민한 끝에 결론을 내렸던것이다. 희망하는 회사에 취직하는데 국적이 문제로 되면 안되지 않는가. 이미 성인이 되었으니 부모와 상관없이 국적을 바꾸면 어떨가…였다. 나는 대뜸 그렇게 하자고 했다. 같은 출발선에서 같은 과정을 거쳐 온 아들애가 국적이 다르다는 차별점으로 ‘손해’를 보면 되겠는가가 제일 큰 이유였다. 일본의 국민선거에 한표를 넣게 하고 싶어서도 아니고 앞으로 사는데 편리한 점이 많게 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다만 아들의 장래에 무형의 시선을 탄 좌절이 기다릴것만 같아서 그것을 피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20여년전, 갓 일본에 왔을 때의 복잡했던 마음이 잠시 되살아 나기도 했다. 어릴때 책속에서 읽었던 일본이라는 땅에서, 영화속에서만 보았던 잔인한 일본인들의 후손들과 같이, 아무 일 없었던 듯이 살고 있는 자신을 두고 “과연 내가 이대로 일본에서 살아도 괜찮을가?”라는 고민을 한동안 했었다. 그러던 내가 아들 곤이의 장래를 두고 하는 생각은 지극히 엄마적이고 자사적인 고민인것 같았다.

 

“국적을 념두에 두고 나같은 인재를 안 뽑으면 자기네가 손해지…” 예상했던바이지만 우스개로 넘겨 버리는 곤이가 안타깝기도 했다. 어린애도 아닌 그를 다그칠수도 없었다. 국적때문에 나를 꺼리는 회사에는 내가 안간다고 다시 한번 정색하여 말하는 곤이었다. 

 

드디어 취직을 위한 준비와 함께 매일매일 긴장한 시간들이 흘렀다. 본인은 물론이고 부모인 우리도 한순간에 세평(世評)을 받는 순간인 것만 같았다. 하지만 면접관과의 예측할수 없는 상성(相性)관계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당사자들간의 전쟁과 같아 보였다. 하여 부모인 우리가 아들 곤이에게 해줄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명문대가 아니면 원서조차 낼수 없다는 대기업들에 일단 엔트리가 된 곤이는 기업설명회에 다니느라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발품을 팔았다. 매일 기진맥진해서 집에 들어서는 얼굴표정에서 그날 있은 일들에 대한 궁금증을 풀군 했던 나였다.  중국에서 자란 우리 부부는 국가의 혜택을 받으며 대학을 마쳤고 자유분방하고 경쟁이 치열한 취업경과를 거치지 못한터라 취업활동의 고달픔과 냉엄함에 대한 세부적인 요해가 없었다. 하여 조언과 충고따위는 접어두고 아들에게 모든것을 맡긴채 좋은 결과만을 기다리는 조마조마한 석달간이었다 해도 무방하다.

 

또 한번 무사히 고비를 넘겼다. 내가 생각해 온 것처럼 막힌 세상은 아니었다. 가슴에 옹이 질 정도로 걱정하면서 조심조심 살아 온 나에게 보란듯이 아들 곤이는 대답을 가져다 주었다. 수없이 보아 온 취직면접에서 곤이는 자기의 복잡한 정체성을 조심스러워 할 대신 되려 ‘나만의 독특성’으로 기발처럼 내세웠다 한다.  “나는 중국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란 조선족입니다. 제일 잘하는 언어가 일본어이고 그 다음은 영어, 한국어, 중국어입니다. 앞으로 나와 깊은 인연을 가지는 일본, 중국, 한국, 영국 이 4개 나라에 은공을 갚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복잡한것 같은 아이덴티티는 면접관들의 의문으로부터 흥미로 바뀌여 졌으며 질문사항의 요소로도 되었다고 한다. 면접에서 질문을 받는 것만큼 흥분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다른 경쟁자들보다 독특한 대답을 할수 있는 기회가 우선으로 주어지기 때문이라고 요즘엔 지난 일을 즐겁게 추억하기도 한다.

 

곤이는 이미 직장생활 5년차에 들어섰다. 또다른 환경에 적응하기 위하여 모지름을 쓰는 시기도 지났고 배워도 배워도 끝이 없는 현실을 충실히 살고 있다. 이미 안정을 찾은 자리인둣 하지만 책임이라는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지고 있는 사회적인 어른이 된것 같아서 나는 여태 짊어지고 살았던 부모로서의 걱정과 불안에서 해방을 받게 되었다.

 

부질없는 걱정이었다. 아이들은 우리보다 훨씬 높은 차원에서 세상을 내려다 보고 있었고 미래를 내다 보고 있었다. 부모세대가 수없는 가시밭길을 헤치며 걸어 온 현실에 떳떳하게 서서 길게 뻗어 있는 평탄한 길에 대한 안일한 적응을 초월하여, 잠재되어 있는 가능성과 필연성에 되려 주어 진 환경을 이용하고 귀속시키려는 새로운 창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청출어람, 쪽빛보다 더 푸른 다음 세대에 기탁하는 마음이 어쩌면 이렇게 즐거울리가…

 

시어머님이 아들 곤이의 근성을 살리려 사주를 받아 오신것이 틀림없다. 약한 부모맘때문에 흔들리는 삶을 살지 않도록 어머님이 미리 방토를 해주신것 같은 느낌이 든다.

 

다만 현실은 현실적으로 다가 오고 있다. 급히 잡히는 해외출장이 비자의 제한성에 아우성을 치는 경우에 부딪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깊고 소중한 인연이 있는 네개 나라에 마음 바쳐 일을 하려는 젊은 청춘은 그 국한성과 제한성을 어디까지 견뎌 낼수 있을가. 

 

삶은 희망이며 과제임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