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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시] 잿빛 대부
작성일
2020.05.06

[시 - 가작]



잿빛 대부

 


정선자 / 이집트




 

잿빛 먼지 풀풀 날리는 황량한 도시

투둑투둑 반갑게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타는 목마름으로 메말라버린 영혼까지 적셔주는 단비

회색빛 세상을 걷어내려고 기다린 하늘에서 내려온 선물

 

풀도, 나무도, 꽃도, 건물조차도 재색으로 덮여있는 잿빛 나라

갑자기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에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반갑게 마중 나가는 이들

긴 사계절을 돌아 우리만의 하늘아래서 마주한 눈물의 해후

해바라기가 되어 한 해 동안 하늘만 바라보며 기다렸던 속절없는 시간

 

흙먼지만 날리는 갈라진 땅도, 기다림에 지쳐 말라버린 마음도 다독이며 살아가던 숨 가쁜 삶

긴 기다림 끝에 찾아온 겨우 고개만 내밀다마는 비 그림자

무엇이 그리도 바쁠까

무엇이 그리도 인색할까

 

달리는 자동차 너머로 반짝 흐르는 빗물이 그저 안타까울 뿐

사라져가는 빗방울 소리에 성큼 달려 나가서 하늘을 향해 악수를 청해보는 애절한 마음

탁 탁 탁, 톡 톡 톡 잿빛 나라에 내리는 재색 비와의 황홀한 사랑의 인사

회색 하늘조차도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시간

 

비에 쓸려 밀려나는 잿빛 먼지를 한 꺼풀 벗어보니 보이는 그리운 세상

새 단장을 마치기엔 턱없이 부족한 녹색 팔레트

싱그러운 대지의 푸르른 젊음이 보일 듯 말 듯 그려지네

우중충한 회색 도시가 짙은 단비에 젖어 낭만의 파리로 변해가네

 

불같은 갈증을 겨우 축인 사막나라의 잿빛 수목들

짧은 만남 속에서도 온몸으로 화답하는 비루한 초목들의 우레 같은 환영

장밋빛 도시보다도 더 큰 행복을 주는 잿빛 단비

두근두근 설렘 속에서 가슴 벅차게 다가오는 잿빛 대부와의 뜨거운 만남

 

오늘만 살 것처럼 망부석이 되어, 하늘에서 내리는 단비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는 나

온기어린 찻잔을 입에 대며, 세상을 품고 있는 마른 대지를 적시는 잿빛 단비를 느껴보는 나

이 물 저 물에 흠뻑 취한 체 빗방울들의 행진 소리에 빠져 달콤한 행복에 젖어드네

입가에 한가득 미소 담고 둘러보는 고즈넉한 풍경소리 너머로 사랑이 퍼져나가네

 

 

 

나를 깊이 보듬어주는 따스한 차 한 잔보다도 

찰나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차디찬 빗방울이 더 좋은 것은 무슨 이유일까

사랑이 다가오는 모습이 비가 내리는 모습으로 보여서일까

잠시 나 혼자만의 독백 속에 빠져드네

 

잿빛 단비에 물든 푸스스한 무채색 도시를 바라보며

텅 빈 찻잔에 아름다운 평화를 담아 삼켜 보리

작별인사도 없이 허둥지둥 떠나는 냉랭한 그 뒷모습

슬픔에 젖은 초라한 나를 위로하며 빗물 같은 눈물이 고이는 나

 

오늘도 갑작스레 말없이 내리던 꽃잎 비처럼 아름다웠던 잿빛 단비를 바라보며

식은 찻잔에 뜨거운 사랑을 담아 들이켜 보리

올 수 없는 먼 곳에서 돌아오는 사랑하는 임을 만나는 것처럼 마음이 애달 펐던 시간

하늘을 향해서 솟아오르는 분수처럼 마음가득 사랑이 피어나는 계절

 

이리저리 갈라진 내 마음도 뜨겁게 하나로 이어준 차가운 대지의 대부

그 잿빛 대부가 방문하는 행복한 날

사방에서 후드득거리는 그 발자국 소리에 경이로운 장엄함까지 느껴지네

지친 우리 세상을 위로해주는 잿빛 대부의 그 큰 사랑이 참 고마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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