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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단편소설] 오해
작성일
2020.05.27

[대상 - 단편소설 부문]


오해

(Misunderstanding)


이태경 / 카자흐스탄



남자의 이야기-1
내가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는 30대 초반이었다. 어린 나이도, 그렇다고 많은 나이도 아니었던 그녀는 마치 한 떨기 프리지어꽃 같았다. 그리고 남자인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녀에게서 나는 상큼하고 부드러운 꽃향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그 향기의 정체가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향수라는 것을 알고는 조금 실망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단지, 향기만으로 그녀를 ‘프리지어꽃 같았다’라고 표현했다면 좀 과한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그날, 그녀가 우연히도 샛노란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그녀가 서 있던 뒤편으로 봄 햇살이 비추고 있었다면, 내 표현이 과장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얀 그녀의 얼굴을 화사하게 받쳐주고 있던 원피스는 과하리만큼 노랬고, 내 눈동자가 중심을 잃고 흔들릴 만큼 봄바람에 이리저리 하늘거렸다. 그녀는 눈이 부시도록 빛났다. 생각을 더듬어보면 그녀는 그저 나를 스쳐 갔던 여성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만이 내 곁에 남아 있는 유일한 여성이 되었다.


그녀와의 첫 나들이에서 먹었던 돈가스는 지금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다. 그녀는 돈가스를 먹을 때, 긴 머리를 고무줄로 질끈 묶고, 양 볼 가득 돈가스를 넣은 후 힘껏 씹었다. 그게 얼마나 복스럽게 보이던지. 나도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지만, 돈가스를 먹을 때는 그녀같이 양 볼 가득 돈가스를 넣고 씹어 먹는다.


우리의 데이트 장소는 정말 소박했다. 재래시장도 좋았고, 동네 작은 골목길을 걷는 것도 좋았다. 그녀는 나와 걸을 때면, 혹시나 나를 잃어버릴까, 따뜻하고 보드라운 손으로 내 손을 꼭 쥐었다.


그녀가 즐겨 입던 옷은 원피스였으며, 그녀가 즐겨 사던 것은 퍼즐이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를 위한 그녀만의 사랑표현이었다. 나와 함께 있을 때, 그녀의 얼굴은 늘 미소로 가득했고 아름다웠다.


나는 세상의 모든 여자가 나의 첫사랑, 그녀와 같은 줄 알았다.
나와 그녀의 첫 이별은 내가 군대에 갔을 때고, 두 번째 이별은 내게 그녀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 여자가 생겨서였다. 그녀는 첫 번째 이별도 그리고 두 번째 이별도 나를 담담히 떠나 보냈다. 하물며 따뜻하게 포옹까지 해줬다. 그녀에게서 슬픈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난, 이별이라는 게 다 그렇게 담담한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나도 이별이란 것을 겪어 보니, 그것만큼 아프고 견디기 어려운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녀의 그 반응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였을까? 우리의 인연이 여기까지인 것을 알아서였을까? 시간이 지난 후, 많은 생각을 해 봤다. 


노트북 화면에‘배터리 충전’이라고 뜨자, 남자는 책상 위 어지러워져 있는 책들을 한쪽으로 치우며 충전기를 찾기 시작했다. 책상 밑에 떨어져 있는 충전기를 집어 노트북에 연결했다. 남자는 노트북에 써 놓은 글이 ‘혹시 날아가지나 않을까.’ 저장 버튼을 여러 번 눌러 저장했다.


손가락이 피곤했는지 열 손가락을 개구리가 헤엄칠 때 뒷다리를 펼치듯 ‘짜~악’ 폈다 오므리기를 여러 번 하고는 머리 위로 팔을 올려 기지개를 켰다. ‘투두둑’ 관절들이 소리를 냈다.


그가 앉아 있는 회전의자는 가죽이지만, 이미 오래전 낡아 버린 의자였다. 멋진 가죽 빛깔은 찾을 볼 수 없었다. 회전을 담당하는 부품에서는‘키-끼익, 키-킥’ 회전할 때마다 괴이한 소리를 냈다. 오래되고 커다란 책상 위에는 어울리지 않는 신형 노트북이 충전되고 있었다.


목이 말랐던 남자는 회전의자에서 힘겹게 일어나 침대 옆 작은 테이블로 갔다. 물이 반쯤 남아 있는 종이컵에 생수를 가득 더 붓고서 한 번에 다 마셔버렸다.


목구멍으로는 물이 넘어가고, 시선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여자에게로 내려꽂혔다. 종이컵을 소리 나지 않게 구겨 휴지통에 조용히 넣었다. 다시 돌아가 앉아야 할 회전의자에 그는 앉지 못했다.


‘앉을 때마다 나는 회전의자의 괴이한 소리, 잠들어 있는 여자를 깨우지나 않을까?’ 남자는 의자에 앉기를 포기하고 몸을 벽에 기대고 살며시 앉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작가인 남자는 소설을 쓰고 있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침대에 누워 있는 남자의 어머니였다. 소설을 쓸 때, 그는 코끝 어딘가에서 프리지어 꽃향기가 풍기는 상상을 했다. 상상은 길지 않았지만, 방안 가득 채워져 있는 오래된 어떤 냄새들로부터 남자를 어머니와 함께했던 어린 시절, 과거로 데려다줬다.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꿈에서도 한 적 없었던 남자가 작가가 된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방송작가를 하고 있던 옛 여자친구는 마감 날짜로 허둥거렸고, 여자친구를 돕겠다며 몇 자 적은 글이 남자를 이 길로 접어들게 했다. 남자는 글을 써 보니 재미가 났고, 재미가 나니, 더 많은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리고 책을 냈고, 몇 권의 책을 쓰고 나니, 인기 작가가 되어있었다.


경제학과에 보내 남자를 CEO로 만들려 했던 어머니의 계획은 연기처럼 사라져버린 것이다. 물론, 남자는 경제학과를 졸업했지만, 작가가 되어있었다. 현명한 어머니는 뜬금없이 작가가 되어버린 아들을 말리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남자가 웬만한 중소기업 사장보다 돈을 더 버는 유명 작가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남자의 어머니는 남자가 매달 건네는 많은 용돈을 꼬박꼬박 세워봤지만, 아들이 쓴 책은 한 번도 읽어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이 마치, 남자에게는 어머니의 작은 반항같이 보였다. 하물며 자신을 글 쓰는 작가가 아닌, 중소기업 사장이라며 지인들에게 말하는 것도 들은 적 있었다. 모두가 아는 거짓말이었다.


어머니의 행동을 보며 남자는 둘 중 하나려니 생각했다. CEO가 되기를 원했던 엄마의 꿈을 이루어주지 않은, 아들에 대한 소심한 복수이거나, 죽음 남편처럼 글 쓰는 재주가 있는 아들이 꼴 보기 싫어서였다.


남자의 아버지는 지금 남자의 나이보다 15년이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주름도 없고, 흰 머리도 없는 젊고 패기 가득한 청년의 모습으로 세상에서 사라졌다. 남자는 나이 들어 우연히 어머니 서랍 안에 있는 젊고 잘 생긴 흑백사진의 남자를 본 적이 있었다.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내 아빠구나! 참 치사한 일이다! 아들은 이렇게 희끗희끗 흰머리가 나고 노인이 되어 가는데, 아빠라는 사람은 아직도 청년의 모습 그대로라니.’


남자는 아버지가 글쟁이였다는 이야기를 고모에게서 들었다. 유일하게 남자가 작가가 된 것이 아버지의 재주를 물려받은 까닭이라고 말해주는 사람이었다. 남자를 5살 때까지 키워줬던 착한 고모였다.


남자의 어머니가 꽃 같다면 고모는 마치 소나무 같았다. 고모는 단단하고 큰 뼈 위에 건강하고 까무스름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남자가 간직하고 있는 고모에 대한 어릴 적 기억은 자신이 늘 고모의 뒤를 졸졸 따라다닌 것과 어머니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 고모가 자신의 엄마인 줄 믿었다는 것이었다.


국숫집을 하는 할머니를 대신해 18살이었던 고모는 오라버니의 아들인 남자를 키웠다. 가족 중에서도 가장 많이 좋아했던 둘째 오라버니를 꼭 닮은 조카는 고모에게는 둘째 오라버니였다. 가난 때문에 밀려간 외국에서 돈도 벌고, 공부도 해낸 똑똑한 오라버니였다. 고모에게는 잡지에 실린 여느 영화배우보다 더 잘 생긴 둘째 오라버니였다. 고모는 남자에게는 기억조차 없는 아버지를 느끼게 해 주는 존재였다.


남자가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지금은 이혼한 아내를 데리고 고모에게 인사차 찾아갔을 때, 고모는‘자신에게까지 찾아와 인사할 필요는 없다.’ 하며 손사래를 쳤었다. 그리고는 조카와 조카며느리의 손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와 쓰다듬으며‘불쌍한 이 남자를 잘 부탁한다’하며 남자를 인계하는 비슷한 모양새를 했었다. 남자는 그 상황이 하도 민망해, 애꿎은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결혼반지만 만지작거렸었다.

남자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휴~휴’ 쉰 소리를 내며 자는 어머니의 흐트러진 이불을 매만졌다.
‘그 어려웠던 시절, 신여성이라 불리며 듣도 보도 못한 나라를 다니며 공부했던 여성이 맞는가? 지금은 어디에서도 그 패기와 영특함은 찾아볼 수 없다. 어머니를 위해 쓰는 내 소설의 마지막 장을 다 쓸 때까지, 어머니가 살아 있어 주기를 바라는 내 마음을 어머니는 알까?’


새로운 소설을 시작할 때마다 늘 첫 시작이 고민이었던 남자는 이번 소설의 첫 부분을 어머니를 다시 만났던 5살의 어느 봄날로 결정했다.


남자는 조용히 회전의자에 다시 앉았다. 그리고 노트북 자판기를 다시 치기 시작했다. 

남자와 남자의 어머니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살기 시작한 지는 이제 한 달이 되어간다.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남자는 어이없는 어머니의 고집스러움을 수용해 드렸다. 50세의 아들은 그렇게 어머니를 져드렸다.


80세 노모를 모시고 이국땅으로 가겠다고 했을 때, 남자의 지인들은 모두 ‘제정신이 아니다.’라고 했다. 나이 든 부모를 대형병원과 가까운 곳에 모시려는 자식은 많아도 언어, 문화가 다른 곳으로 모시고 나가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그러다 외국에서 노인이 아프기라도 하면 어쩌고, 혹여나 죽기라도 하면 그런 불효는 없다며 다들 말렸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이 불효자가 되는 것 따윈 상관조차 없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결정한 일을 꼭 하는 사람이었다.


80세 노인을 혼자 보낼 수 없어 남자는 어머니와 함께 짐을 쌌다. 그래서 자신이 출강하고 있는 강의를 그만둬야 했고, 출판사와의 계약도 바꿔야 했다. 살고 있던 집도 전세를 주었다. 남자는 어머니의 결정으로 자신의 삶에 많을 부분을 포기하고 정리해야 했다. 이혼해 지금은 혼자인 남자는 자신이 혼자라는 게 다행이라 여겼다.


남자의 어머니는 20대 초반 이곳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대학을 다녔다. 그리고 여기서 남자의 아버지를 만났다. 대학교에서 청소부로 일하던 가난한 한국 남자와 가난한 나라에서 온 부잣집 신여성은 한국이었다면 서로 마주칠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이곳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달랐다. 러시아인들에 비교해 작은 키,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은 그들 둘뿐이었다. 노란 머리, 갈색 머리에 섞여 있는 검정 머리는 당연히 눈에 띄었고, 그 두 사람은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석처럼 서로에게 끌렸다.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한 위로가 되었다.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두 사람은 함께 살게 되었고 아이를 갖게 되었다. 남자의 어머니는 아이를 가진 상태에서 학교를 졸업했고,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아이를 출산했다. 출산 후, 아이가 한 살이 되던 해, 남자의 어머니는 아이를 아이의 아버지 고향 집으로 보냈다. 만약, 남자의 아버지가 죽지 않았다면, 남자가 어머니를 다시 만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를 배려해 남자는 1층에 방 2개짜리 아파트를 빌렸다. 일단은 6개월을 계약했다. 이곳에서의 생활비는 남자의 어머니가 부담하기로 했다. 어차피 남자에게 남겨질 유산도 아니었다. 자신의 재산을 절반은 사회에 환원하고, 나머지는 자신이 다 쓰고 죽을 거라고 했었다. 남자의 어머니다운 결정이었다.


어머니의 젊음이 녹아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시간은 남자에게는 단조로움 그 자체였다. 그러나 이 단조로움이 가끔은 남자의 창작적 감성을 깨우기도 했다.


어제 늦게까지 글을 쓰고 잤던 남자는 다음날 어머니의 인기척에 눈을 떴다. 남자의 어머니는 매일 일어나자마자, 소금물로 입가심을 한 후 발성 연습을 하는 것으로 아침을 시작했다.


“일어나셨어요?”
“응”
“오늘은 날씨가 어때요? 어젯밤에 바람이 차가웠어요!”
“여기는 늘 그렇지. 지금은 날씨가 좋네. 오늘은 나랑 같이 음악회에 가자!”
“네”
특별히 할 일도 없는 남자는 음악회에 안 갈 이유가 없었다. 이곳에 머문 한 달 동안 남자와 남자의 어머니는 적어도 일주일에 2번은 음악회에 갔었다. 예술의 도시답게 셀 수 없이 많은 공연과 연주회가 있었다.


오늘 공연은 작은 지하 소극장에서 하는 피아노와 비올라 연주였다. 아직 대학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의 연주라 실력이 수준급은 아니었다.


어머니의 눈치를 살피며 남자는 어머니의 귀에 속삭였다.
“어때요? 너무 어린 학생들이에요!” 아마추어라는 말이었다.
“......”
“안 피곤하세요? 일어날까요?” 어머니는 조용히 남자의 손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계속 연주를 감상했다.


한 시간 반의 연주가 끝나자, 힘들었는지 남자의 어머니는 남자에게 부축해 달라며 남자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이 소극장을 나왔을 때 거리는 한산했다. 50대의 아들과 80대의 노모는 서로를 의지해 익숙지 않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밤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남자는 넵스킨의 밤거리를 좋아했다. 왜냐하면, 낮에 보였던 더러운 것들을 어둠이 가려주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걸음에 맞춰 느리게 걷고 있던 남자는 배가 고팠다.
“집에 먹을 것도 없는데, 어머니 식사하고 들어가죠!”
남자의 어머니는 아들을 데리고 넵스킨 거리 모퉁이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마치, 여러 번 와 봤던 식당인 듯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두 사람은 창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남자는 돈가스를 먹고 싶었지만, 있을 리가 없었다.


남자의 어머니는 예전 배웠던 러시아어를 기억하고 있었고, 그것은 이곳 생활에서 꽤 도움이 되었다. 남자의 어머니는 음식을 주문했다.


남자는 어머니가 주문한 음식이 모두 마음에 들었다. 맛있는 음식들이었다. 따뜻한 수프와 무겁지 않은 샐러드 그리고 감자와 곁들여 나온 스테이크. 배가 고팠던 것도 있었지만, 어머니의 선택은 늘 실패가 없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단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온 것만 빼고.


식사를 마친 후 두 사람은 디저트를 사이에 두고 오랜만에 긴 시간을 마주 앉아 있었다.
창밖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은 조용히 조용히 도시를 덮고 있었다. 그리고 남자에게 용기를 내라고 말하고 있었다. 남자는 오랫동안 묻고 싶었던 질문을 어머니에게 했다.


“어머니! 왜 여기서 살고 싶었어요?”
‘프리지어 꽃처럼 아름다웠던 어머니가 다 시들어가고 있다.’
“고맙다. 함께 와 줘서.”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말에 남자는 쑥스러워 홍차와 함께 나온 케이크만 바라봤다. 기대한 적도 없는 어머니의 말이었다.
“살면서 이곳에 있던 2년의 세월이 엄마에게 가장 가치가 있었어. 미치도록 외로웠고, 죽도록 행복했어. 그래서 이제 여기서 숙제를 마치려고…….그게 맞는 것 같아서.”


남자 어머니의 손은 쪼글쪼글했다. 남자의 어머니는 오랜 수전증 때문에 떨리는 손으로 케이크를 집어 입에 넣었다.
“여기 대학교에 제출하지 못한 숙제라도 있나 보죠? ”
남자가 웃자고 한 이야기에 남자의 어머니는 웃지 않았다.
그리고 남자는 한 번쯤은 하고 싶었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말을 건넸다.
“어머니는 여기서 아버지를 떠났죠. 난 어머니가 이해가 가요.” 남자의 이해한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어머니에 대한 아무런 원망이나 힘든 마음은 없었다. 남자의 어머니는 늘 당당했고,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일은 해냈다. 음대 교수로 40년을 일했고, 남편 없이 아들을 키우면서도 한 번도 기죽지 않았었다. 남자는 자신에게 없는 이런 어머니의 모습을 동경했었다.


남자의 어머니는 아들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눈이 더 많이 내리기 시작했다. 남자는 집으로 돌아갈 길이 걱정됐다.


남자는 자신이 어머니에게 무슨 말을 했었는지도 잊은 채, 눈이 쌓인 길을 헤치고 집으로 돌아가 길이 까마득했다. 더 늦기 전에 집으로 나서야 했다.


두 사람이 집으로 돌아오는 눈 내리는 거리는 정말 고요했다. 300년이 넘은 고혹적인 건물들은 이 고요함과 잘 어울렸다. 눈은 내렸지만 바람은 차지 않았다. 남자는 어머니의 손을 꼭 쥐었다. 두 사람이 하얀 눈 위를 걸을 때마다 ‘사~각 사~각’ 눈은 소리를 냈다. 쌓인 눈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크리스마스를 알리는 음악 소리가 들리고 대형 트리가 광장에 세워져 있었다.


집에 돌아와 보니 밤 11시가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오늘 오랜 시간 밖에 있었던 어머니가 남자는 걱정됐다. 지쳐 쓰러져 있는 어머니를 정성스레 남자는 마사지했다. 굳어가는 어머니의 팔다리를 주무르는 것은 남자가 하는 매일의 일과였다. 남자도 나이 들어 성한 곳이 없었지만, 어머니 앞에서 남자는 젊은 청년이었다. 점점 더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가는 어머니의 몸을 만질 때면 남자는 소설 쓰기에 속도를 더 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남자는 어느새 잠들어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바라봤다. ‘어머니는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작정일까? 아들놈을 기어코 불효자를 만들려는 걸까?’ 남자는 마음이 무거웠다.



여자의 이야기
오늘 여자는 아들의 메모를 봤다. 아들이 새로 소설을 시작했는지, 소설에 필요한 자료들이 여기저기 적혀있었다. 여자는 작가인 아들의 글을 한 번도 읽은 적이 없었다.


자신에게 용돈을 아끼지 않는 것을 보고, 배고픈 가난한 예술가는 아니라는 생각을 했었다. 가끔 들렸던 서점에서 아들의 얼굴이 인쇄된 책을 봤을 때, 여자는 책 표지만 정성스레 쓰다듬었을 뿐이었다. 어떨 때는 아들의 책이 다른 작가들의 책을 제치고 가장 상단에 전시되어있기도 했다.


아들이 쓴 책을 왜 읽지 않았는지 묻는다면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구태여 찾자면, 아들의 글을 읽는 것이 쑥스러웠다. 아들의 속내를 다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내가 낳은 아들이고, 키운 아들이지만, 아들의 속내를 어떻게 다 알 수 있겠는가? 여자가 모르고 있는 아들의 속내를 구태여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럴 권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들에게 어미로서 반칙행위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남들이 그게 무슨 반칙행위냐고 해도, 여자는 그게 아니었다. 그냥 아들의 세계에 침범하고 싶지 않았다.
여자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간다고 했을 때, 아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따라와 주었다. 함께 가자고 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함께 와주었다.


여자의 인생 중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시간은 가장 찬란했던 순간이었다. 뛰어나게 노래를 잘 부르는 것도 아닌데도 여자의 부모는 딸이 천재라고 믿었고, 부모를 실망케 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던 여자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나라로 유학이라는 것을 왔었다.


여자가 도착한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너무도 아름다웠고 그래서 여자의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미치듯이 외로웠다. 그래서 미친 듯이 공부를 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글 잘 쓰는 가난한 한국 남자를 만나 아름다운 사랑을 했고, 살림을 차렸다. 물론, 여자의 부모는 이 사실을 알 리 없었다. 부모와는 3개월에 한두 번 주고받는 편지가 전부였다.


두 사람은 아무도 자신들을 모르는 아름답고 고혹적인 도시에서 낭만적인 사랑을 했다. 그리고 여자가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시기가 되자, 미련 없이 남자는 여자를 놔주었고, 여자도 당연한 듯, 당당히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들의 헤어짐은 사랑이 식어서가 아니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여자의 시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이미 배 속에 있던 아이를 시키기 위해 여자는 죽을 힘을 다했다. 그리고 여자는 아이를 지켜냈다. 조건은 아이가 한 살이 될 때까지만 함께 있는 것이었다. 여자는 그 약속을 지켰다.


다행 중 불행인지, 불행 중 다행인지 갑자기 아이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게 되고 그제야 5살이 된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아들을 다시 만나던 그 날, 급하게 빌려 입은 노란 원피스가 여자는 마음에 들지 않아 신경에 거슬렸고, 평소엔 잘 하지 않던 화장을 한 탓에 얼굴은 하얗게 들떠 있었다. 그러나 아들을 보는 순간, 여자는 있는 힘을 다해 웃었다. 여자는 미친 듯이 행복했었다. 자신의 품으로 돌아온 아이는 아빠를 똑 닮아 있었다.
아들과 함께 처음 돈가스를 먹던 그 날, 아이들은 모두 돈가스를 좋아한다는 말에 여자는 아들의 손을 잡고 경양식집으로 갔었다. 돈가스를 좋아하는 아들을 위해 못 먹는 돼지고기를 꾸역꾸역 빨리 씹어 넘겼다.


여자는 아들이 자라는 동안 그 흔한 말썽 한번 부리지 않고 커 준 것이 고맙기보다는 안쓰러웠다. 어떻게 해야 아들이 행복할지 몰라, 여자는 계속 퍼즐만 사 줬었다. 가난 때문에 자신의 꿈도 펼치지 못한 아들의 아버지가 생각이 나, 여자는 아들은 무조건 돈 많이 버는 일을 하길 원했다. 똑똑했던 아들은 여자의 꿈을 이뤄주는 듯싶더니 글을 쓰기 시작했다. 시대가 변해 작가도 돈을 벌 수 있어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어느 날은 결혼한 아들이 이혼했다는 말을 해 왔을 때, 여자는 마음이 어렵기보다는 잘한 일이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며느리가 꼭 자신과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오늘 아들과 함께 대학생들이 연주하는 졸업연주회에 가려는 계획을 세웠다. 예전 이곳 대학 다니던 생각이 나서였다. 약간은 어설퍼도 풋풋하고 생기있는 그들의 음악을 듣고 싶었다. 연주회가 끝나면 저녁 먹을 시간이 되고, 그럼, 아들과도 자연스럽게 외식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이곳에 온 지 한 달이 되어 가지만, 아들과 단둘이 외식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연주는 아마추어였지만, 아들이 옆에 있어 여자는 좋았다. 공연이 끝나고 아들과 함께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아주 오래된 식당이었다.


여자가 유학 시절 와 보고 싶었지만, 돈이 없어 들어 와 보지 못했던 곳이었다. 여자는 이 식당에 아들과 꼭 와 보고 싶었다. 그래서 미리 주문할 음식도 결정하고 러시아어로 주문 연습도 했다.


여자가 이 식당에 오고 싶었던 이유는 알렉산드르 푸시킨 (1799-1837 /시인, 소설가) 이 자주 왔던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푸시킨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들려 차를 마신 곳이기도 했다. 아내의 불륜을 모욕한 군인과의 결투를 위해 결투장으로 출발하기 전이었다. 그는 몰랐을 것이다. 그 잔이 살아서 마시는 마지막 잔이 되리라고. 결국, 그는 결투에서 총상을 입었고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이카 강변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두며 자신의 서재에 꽂혀 있던 책들을 향해 ‘나의 친구들 안녕’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세계적인 문학가는 한 발의 총성과 함께 사라졌다.


‘결투장으로 떠나기 전 그는 이 식당 창가에 앉아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을까?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알렉산드르 푸시킨 (1799-1837) 시인, 소설가


결론을 본다면 그의 삶은 그를 속인 셈이 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쓴 시처럼 삶이 자신을 속였지만 슬퍼하거나 노하지 않은 것 같다.’


여자는 디저트를 먹으며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푸시킨은 자신에게 죽음이 가까이 온 것을 느꼈을까? 만약 나에게 죽음이 갑작스럽게 찾아온다면 나도 그처럼 슬퍼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여자는 자신에게 죽음의 시간이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자는 아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듣지 못했다. 이제 80살이 된 여자는 숙제를 마무리할 때라는 것을 알았다. 자신에서 많은 시간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남자의 이야기-2
남자는 오늘 몸이 더 좋지 않은 어머니를 혼자 집에 두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의 성화에 집 밖으로 쫓겨나갈 수밖에 없었다. 남자가 집에서 쫓겨 난 이유는 단, 하나였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 오라는 것이었다.


거리에는 눈이 쌓여있었고 상당히 추웠다. 남자는 어머니께 드릴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크다는 갈릴레이 백화점을 찾아갔다. 추운 날씨에도 백화점 안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선물을 고르는 일은 남자에게 글쓰기보다 몇 배는 더 어려운 일이었다. 백화점 2층에 도착하자, 매장 한 가운데 전시되어있는 옷이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고민하지도 않고 남자는 노란색 스웨터를 샀다. 요란하지 않은 우아한 노란색이 남자의 마음에 딱 들었다.


선물을 사고 돌아오는 길에 남자는 도스토옙스키의 박물관이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남자는 집에 혼자 있을 어머니가 마음에 걸렸지만, 백화점에서 10분도 채 안 걸리는 박물관을 지나치고 싶지 않았다. 도스토옙스키는 남자가 좋아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이었다.


도착한 도스토옙스키의 박물관(1821-1881 소설가)은 작가가 생을 마감한 집이기도 했다. 아내와 아이들과 단란한 시간을 보냈던 곳, 많은 문인과도 만났던 곳이었다. 오랜 지병을 앓고 있던 도스토옙스키는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그는 자신에게 곧 죽음이 닥칠 것을 알았고, 미리 죽음을 준비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어린 자녀들은 아빠가 죽던 그 날을 기억하기 위해 아빠가 사용하던 종이 담배 상자 위에 날짜를 적어두었고 그것이 전시되어있었다.


‘내게도 아이들이 있었다면, 또 다른 세상을 살았겠지?’
남자는 갑자기 자신에게 아내도, 자식도 없는 것이 외로웠다. 그리고 그처럼 자신도 죽음을 미리 알고 준비할 수 있다면 그것도 참 행복하리라. 생각했다.


도스토옙스키의 마지막 작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를 집필했던 책상 위 탁상시계도 그가 죽은 날짜와 시간에 멈춰 있었다.


그가 사용했던 의자, 책상, 그의 필체가 남아 있는 원고들, 그가 다니던 복도, 그가 바라봤을 창문, 이 모든 것이 남자의 마음에 파고들었다. 자신이 도스토옙스키처럼 세계적인 작가는 아니었지만, 박물관을 방문 후 소설가가 된 것이 잘한 결정이란 생각이 남자에게 들었다.


남자가 집에 돌아와 보니, 그새 남자의 어머니는 잠들어 있었다.
시간 대부분을 침대 위에서 보내는 어머니의 모습은 남자의 마음을 아리게 했다.

세월이 지나 내가 이별이란 것을 당하고 나니, 그녀가 생각났다.
나에게 이별을 당한 그녀는 참으로 담담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원망하는 말 한마디도 없었고, 드라마 이별 장면에 흔히 등장하는 눈물도 없었다.
떠나 보내는 사람의 감정은 좀 다른 것일까? 


남자는 글을 쓰다 말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 나도 도스토옙스키의 아이들처럼 어머니의 돌아가신 날과 시간을 적어 기념하리라. 내가 어머니를 위해 쓴 책 위에.’ 



그들의 이야기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이었다. 어머니에게 드릴 선물을 남자는 네바강이 보이는 창가에 올려두었다. 남자의 어머니도 언제 준비했는지, 아들에게 줄 선물을 창가에 놓았다.


크리스마스이브는 두 사람에게 너무 길었다. 선물을 교환하는 크리스마스이브 밤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겐 다 그럴 것이다.


두 사람은 오랜만에 한식을 만들어 먹었다. 이혼하고 혼자 지낸 시간이 길었던 남자에게 요리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단지, 이곳에서는 재료를 구하는 것이 어려울 뿐이었다. 남자는 시장을 다녀와 한국에서 가져온 양념으로 된장찌개와 불고기를 만들었다. 남자가 가장 자신 있는 음식들이었고, 남자의 어머니도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남자의 어머니는 맛있다며 좋아했다. 그건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늦은 점심을 먹은 후, 어머니는 클래식을 듣고 아들은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음악은 흘렀지만, 남자의 어머니가 음악을 듣고 있는지 잠들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남자의 컴퓨터 자판기 소리가 어머니가 듣고 있는 클래식 음악 소리보다 크게 방안을 울리고 있었다.


어느새 늦은 밤이 되자, 어머니는 아들을 창가 곁으로 불러 선물을 건넸다. 그리고 남자도 준비한 선물을 어머니에게 건넸다. 둘만 하는 선물 교환식은 조금은 초라하고 허전했다. 다행히도 창밖 트리들에 매달려있는 전구들이 열심히 불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먼저 선물을 열어 본 사람은 남자의 어머니였다. 선물은 본 어머니의 얼굴은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 그리고 아주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는 수줍음이 묻어져 있었다. 남자의 어머니는 받은 노란 스웨터를 남자가 보는 앞에서 입어 보였다.


“어때? 나한테 잘 어울리지?”
스웨터는 남자의 어머니에게 컸다! 남자의 어머니는 그사이 더 말라 있었다.
“아주 잘 어울려요.” 남자는 어머니를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고급스럽고 화사한 노란 스웨터는 더는 어머니의 얼굴을 화사하게 만들어 주지 못했다. 나이 들어 쳐지고 쭈글쭈글한 어머니의 얼굴은 이제 더는 봄에 피는 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초라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시들어갈 뿐이었다.


남자도 어머니가 준비한 선물을 열었다. 낡고 오래된 책이었다. 진한 남색의 헝겊으로 싸여있는 나무표지였다. 겉표지엔 아버지의 이름이 황금색의 한자로 박혀있었다. 남자의 아버지가 쓴 책이었다.
“아버지 이름 맞아요? 이거 아버지 이름이죠?”
고향에서나 유명했던 아니, 고모가 유일한 애독자였던 아버지에게 책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다.
“아버지가 쓴 글을 모아서 내가 만들었어. 많이는 만들 필요가 없겠다 싶어 2권 인쇄했는데 지금은 이거 한 권 남았어. 너에게 주려고 남겨놨다.”
종이는 누렇게 변해 있었다.
“언제 인쇄했는지 모르겠지만, 참 일찍 주시네요.”


남자는 어머니가 자신을 속인 것 같아 약간은 퉁명스레 한 마디 던졌다. 그냥 봐도 오래된 책이었다. 깨끗하게 보관된 것이 한눈에 보였지만, 세월의 흔적은 가리지 못했다.


진작에 자신에게 주지 않은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답을 듣는다 한들, 자신에게 지금 무슨 의미가 없을까 싶어 입을 다물었다.
“지금이 너에게 줄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어머니의 이 말에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남자가 이리저리 책을 살펴보니 많은 분량의 책은 아니었다. 아버지라는 사람이 쓴 책을 손에 쥐었는데도 남자는 기쁨, 설렘, 애틋함과 같은 느낌은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의 기억 속에 희미하게 존재하고 있는 아버지는 단지, 어머니가 가지고 있던 사진 속 어떤 남자일 뿐이었다.


어쩌면 죽은 아버지보다 훌쩍 나이 들어 있는 자신이, 자신보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사람을 아버지라고 하는 것이 어색했는지도 몰랐다. 아버지라는 존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고모의 말처럼 자신이 글쟁이가 된 이유가 아버지 때문이라는 말도 남자는 믿지 않았었다. 헛소리로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남자는 살아오면서 한 번도 아버지란 존재 앞에 서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아버지의 책도 실제 같지 않았다. 아버지를 외면하고 싶었다.


남자의 어머니는 자신이 건넨 선물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남자를 그저 바라만 봤다.
약간은 쓸쓸하고 미묘한 선물 교환식이 끝난 후, 남자의 어머니는 노란 스웨터를 입은 채, 남자는 아버지의 낡은 책을 외면한 채, 크리스마스이브의 밤은 잠들었다. 


다음 날, 많은 사람의 걱정은 걱정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아침이 되었지만, 어머니의 발성 소리는 남자에게 들리지 않았다. 남자는 자타공인 불효자가 되었다. 남자의 어머니는 그토록 오고 싶었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눈을 감았다.


어제 크리스마스이브 밤이 어머니에게 아들과의 마지막 밤이 된 것이다. 남자에게도 어머니와의 마지막 밤이 되어 버렸다.


어머니는 노란 스웨터를 입은 채로 작고 노란 새처럼 침대 위에 잠들어 있었다.
남자는 어머니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머니와의 이별을 준비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갑작스레 찾아올 줄은 몰랐다. 남자의 소설 속 주인공은 남자를 이곳에 혼자 남겨 둔 채 떠났다.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훌훌 새처럼 떠난 것이다.


남자는 사랑했던 어머니의 죽음 앞에 울지 못했다. 아니, 울지 않았다. ‘영원한 이별이라는 게 있을까?’ 남자는 영원한 이별은 없다고 믿고 싶어졌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예전 자신과의 이별에서 보였던, 담담하고 따뜻한 이별로 어머니를 보내드리고 싶었다. 남자는 늘 어머니에게서 떠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남자가 떠나보내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어머니의 시신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며칠을 기다려야 했다. 남자는 어머니가 떠난 빈방에 홀로 앉아 아버지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말했던 것처럼 지금이 아버지의 책을 읽어야 할 때라는 생각에서였다. 인쇄날짜는 1974년이었다. 몇 편의 단편 소설과 시로 엮어진 책이었다.


읽기 시작한 부분은 소설이었다. 아버지의 문체는 부드럽고 따뜻했다. 한 여인을 그리워하며 자신과 다른 운명에 대한 초연함이 소설 곳곳에 표현되어 있었다. 남자는 소설 속 주인공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아버지에게 어머니는 붙잡을 수 없는 영원한 여인이었다. 누가 누군가를 버린 것이 아니라, 서로를 보내주는 사람이었다. ’


아버지가 만약 더 긴 삶을 사셨다면 더 많고 훌륭한 글을 썼을 것이 분명했다. 아버지는 훌륭한 글쟁이였다. 아버지를 닮아 글을 잘 쓴다는 고모의 말은 남자에게 과분한 칭찬이었음을 남자는 깨달았다.


아버지의 책을 다 읽은 남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책 겉표지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짜와 시간, 그리고 어머니의 이름을 적었다. 단지, 어머니의 죽음을 기념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50년 세월을 띄어 넘어 두 사람이 다시 만났음을 기념하고 싶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 완성하려 했던 남자의 소설은 끝마치지 못했다. 그러나 남자는 그 소설을 영원한 미완성으로 남기기로 했다.


어머니가 아들이 쓴 소설 속 주인공으로 남기보다는, 함께 하지 못했지만, 영원히 사랑했던, 아버지의 소설 속 주인공으로 남아 있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네바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들어왔다. 한참, 추운 겨울의 바람인데도 남자에게는 참으로 따뜻하게 느껴졌다. 마치, 봄이라도 온 것처럼. 그리고 그 바람을 타고 프리지어꽃 향기가 방 가득히 퍼졌다. 남자는 5살이던 그때처럼 미소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