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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체험수기] 함께 걷기
작성일
2020.06.24

[우수상 - 체험수기 부문]


함께 걷기


박성일 / 호주




“지금 가지지 못했다면, 지금 내게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방송을 마친 후 한인 학생회가 주최한 ‘청춘 콘서트’에 출연하기 위해 급히 짐을 챙겼다. 준비한 강연 내용을 다시 읽고 학생들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정리하며 서둘러 기차에 몸을 실었다.


“지금 호주에서의 제 모습은 이민을 준비하며 계획했던 그 모습이 아닙니다. 제가 준비한 계획들은 사실 이민을 온 후 뜻대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준비된 첫 문장은 문자 그대로 사실이었다. 30대 후반 이민을 결정할 때만 해도 나의 소박한 꿈은 “외국에 살며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작은 카페의 주인장”이었다.


한국에서 10년간 모아둔 돈들이, 이민 정착 자금으로 여겼던 4억 원의 돈이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질 줄은 한국을 떠날 당시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강연에 온 학생들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청춘 콘서트에 온 학생들에게 소개된 내 모습은 무척이나 화려해 보일 것이 분명했다.


“이민 2세대이거나, 호주에서 좋은 대학을 나온 엘리트인 줄 알았어요”


이 같은 학생들의 선입관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호주 공영방송국의 프로듀서로서, 영사관이 주최하는 멘토 세미나에 4년째 멘토로 활동하고 있고, 대학생들을 위한 ‘청춘 콘서트’에서 마이크를 잡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계획한 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내가 꿈꿔 보지도 못했던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나기도 하는걸요”


호주에서 새로운 도전을 하며 유학 생활을 펼치는 대학생들에게 과연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무엇이 있을까? 친구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한마디는 “절망의 순간이 끝이 아니라는 것, 희망을 현실로 바꾸기 위해 노력할 때 새로운 기회가 찾아온다’는 것이었다.


호주에서 힘들 때마다 나를 붙들어 준 한 직장 상사의 격려가 있었다.


“지금 가지지 못한 걸로 속상해하지 마세요. 지금 당신이 무엇인가를 가지지 못했다면, 그것은 지금 당장 당신에게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받는 남편, 존경받는 아버지 


어린 시절 초등학교를 6번이나 옮겨 다닐 만큼 나는 이곳저곳에서 떠돌이 생활을 많이 했다. 아버지가 직업 군인이냐는 질문도 많이 들었지만, 아버지는 사업을 하는 평범한 소시민이었다. 손대는 일마다 도통 운이 따르지 않았던 아버지는 서울과 충주를 옮겨가며 사업을 벌이셨지만 벌이는 늘 신통치 않았다.


연이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더 이상 가족의 힘을 의지할 수 없었을 때,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고 직장을 다니며 모아둔 1천만 원을 들고 사글세로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나의 어릴 적 꿈은 “사랑받는 남편, 존경받는 아버지가 되는 것”이었다.


“아내와 자식을 고생시키지 않고, 평범하지만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소박한 꿈” 그것은 내가 꼭 이루고 싶은 평생의 작은 소망이었다.


방송국 프로듀서를 거쳐 대기업 홍보실에 이르기까지 십년 이상을 한국에서 일하며 열심히 돈을 모았다. 맞벌이에 나선 아내 역시 쉴 틈 없이 일하며 함께 돈을 모았다.


아이를 가졌을 때와 일산에 분양받은 25평 아파트의 대출금을 모두 갚았을 때의 기쁨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첫 주택의 대출금을 모두 갚아본 경험 때문이었을까? “여기에서 조금 더 무리해 보자”라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 아니었을까 싶다.


25평 아파트를 4억 원에 팔고, 8억 원을 주고 45평 아파트를 새로 구입했다. 은행에서 4억 원을 대출받았지만, 대출 비율이 아파트 가격의 50% 라면 “한번 해 볼만하다”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아내는 결혼 후 한 번도 자신의 돈으로 화장품을 사 본 적이 없었다. 처가댁을 갈 때마다 장모님이 구입한 유명 브랜드 화장품의 샘플을 한 보따리 챙겨오던 아내였다. 알뜰한 아내와 성실한 남편이 만들어 가는 도전이 아름답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새 집을 구입한지 얼마 되지 않아 행복한 가정을 담보로 한 이 막연한 ‘신화 만들기’ 수업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가 깨달아졌다.


새벽 5시에 집을 나서고 밤 12시가 되어야 다시 얼굴을 맞대는 맞벌이 부부. 주말도 없이 일만 하던 우리를 위해 앞집 할머니가 딸을 맡아 주셨고, 당연히 우리 소득의 상당 부분은 아이 양육비로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부모가 모두 바쁘니 아이 역시 영어 유치원, 발레, 수영, 피아노로 빡빡한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빼곡한 개인 교습들로 바쁜 일과를 마친 아이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앞집 할머니 집으로 향했고, 저녁을 먹고는 그곳에서 잠을 청하곤 했다. 자정 전에라도 퇴근을 하는 날에는 잠든 아이를 찾으러 할머니 집에 갈 수 있었지만, 많은 경우 “오늘도 아이를 재워달라”라는 부탁을 서슴지 않던 일상이었다.


당연히 부부의 대화는 줄었고, 아이 얼굴 한번 보는 것조차 힘겨운 ‘고단한 서울의 삶’이 이어졌다.


어릴 적 꿈 “사랑받는 남편, 존경받는 아버지”는 먼 나라 이야기일까?


언제나 되뇌던 마법과 같은 주문 “내 가족이 살아갈 보금자리를 마련해야 해. 한 푼이라도 젊을 때 더 모아야 해.”


하지만 악착같이 달려온 나의 달음질로 인해, 나의 오랜 꿈은 오히려 우리 가족에게서 더욱 멀어져만 간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꽃들에게 희망을


그러던 어느 날 책장에 꽂혀있던 한 권의 어른 동화 “꽃들에게 희망을”이 아내와 나의 마음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미국의 동화 작가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은 애벌레 기둥에 올라서기 위한 애벌레들의 치열한 경쟁을 묘사하며 물질문명사회를 비판하고 있다.


어디를 향하는지도 모른 채 다른 애벌레들의 뒤를 쫓고 있는 호랑나비 애벌레는 다른 애벌레들을 밝고 꼭대기를 향해 달려가지만, 자신이 달려간 기둥 꼭대기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뒤늦게 발견하게 된다.


가족을 위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실상은 가족을 뒤로한 채 알 수 없는 또 다른 욕망을 향해 달려가는 내 모습을 본 순간, 돌아서야 한다는 내면의 외침이 들리기 시작했다.


“여보, 우리 저기 가서 살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호주 여행 다큐멘터리를 함께 보던 아내가 꺼낸 이 한마디에 이미 나도 한마음이었다.


이민 이야기를 꺼낸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아내와 나는 이민 준비를 시작했다.


10년이 넘는 직장 경력 덕택에 호주 기술 이민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됐고, 영어 성적만 있다면 영주권에 도전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하지만 한국에서 직장을 다니며 영어 성적을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어 공부만 하다 자칫 도전도 못해보고 지쳐 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아내에게 거침없는 제안을 했다.


“기술 승인은 받았으니 무조건 호주로 갑시다. 2년 안에 영어 성적(아이엘츠 7.0)을 받으면 된다고 하니 내가 그곳에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영어 점수를 받을게요”


그리고 정확히 한 달 안에 회사에 사표를 내고 호주로 모든 짐을 부쳤다.


아직 영주권이 나온 것은 아니니 일단은 학생 비자를 받고 호주로 향했다.


이런 상황에서 몇 개월 전 8억 원에 산 아파트는 당장 처분하지 않기로 결정을 했다.


아파트를 구입한 몇 달 전에 비해 이미 가격이 조금 떨어져 있었고, 집을 팔아 그 돈을 모두 호주로 가져간다면 영주권이 나오기도 전에 있는 돈을 다 써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들었기 때문이다.


“호주에서 영주권을 받으면 그때 집을 팔면 돼요. 전세금은 어차피 되돌려 줘야 하는 돈이니 비싸게 놓을 이유도 없어요. 1억 원에 전세를 놓고 영주권이 나오기 전까지는 그 돈으로 버텨보죠. 지금은 부동산 시세도 안 좋잖아요? 영주권을 받고 집을 팔 때가 되면 집값이 다시 오를 거예요”


8억짜리 아파트를 1억 원에 전세로 내놓으니 일주일 만에 바로 아파트가 나갔다. 그리고, 2009년 5월 1일 아내와 딸과 함께 호주 멜번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멜번으로 향하던 그날 나의 이민 계획은 “호주에서 2년 안에 영어 성적을 받고, 영주권을 받고, 한국에 있는 집을 팔고, 그 돈을 가져와 호주에서 작은 카페를 연다. 그리고 가족들과 오손도손 행복하게 산다”였다. 



예상치 못했던 미지의 세계


인천 공항을 떠난 지 11시간이 지난 후 한국과는 지구 반대쪽에 위치한 남반구 도시 멜번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려 첫발을 내디딘 멜번 공항에는 상상치도 못했던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고 있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까? 태양이 작열하는 해양 도로와 야자수를 꿈꿔온 나였지만, 우리 가족이 대면한 멜번은 매서운 겨울 도시의 모습 그뿐이었다.


주어진 시간 안에 영어 성적을 받아야 한다는 압박감도, 외국에서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도 내가 느꼈던 스산함에 한몫을 했던 것 같다.


편하게 영어 공부만 할 수 있는 처지는 못됐기에 한국 사장님이 운영하는 식당에 나가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며 호주 생활을 시작했다. 새벽 3시까지 청소를 하고, 설거지를 했지만 피곤한 기색은 내지 못했다.  


문제는 주어진 시간이었다. 2년 안에 영어 성적을 받지 못한다면 우리 가족이 선택한 일생일대의 모험은 자칫 큰 위기에 봉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갈수록 재정적인 압박이 커져만 갔다. 처음 통장에는 전세금으로 받은 1억 원이 있었지만 호주에 와 있는 2년 동안 매달 200만 원의 돈이 은행 대출 이자로 자동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2년 동안 은행 대출 이자로 나간 돈이 6천만 원에 달하니, 나머지 4천만 원으로 딸과 내 학비, 생활비를 감당해야만 했다.


비록 힘들고 지친 일상이었지만 가족과 함께 호주에서 꾸려 갈 작은 카페에 대한 소망은 나를 더욱 강하게 이끌었다.


“조금만 더 참으면 돼. 영주권을 받으면 집을 팔고 그 돈을 가져와서 작은 카페를 할 수 있어. 그 카페에서 나는 빵을 굽고 아내는 커피를 내리고... ”


그리고 10번이 넘는 영어 시험 후 2년이 조금 안된 마지막 시험에서 드디어 원하던 영어 성적이 나왔다. 그로부터 6개월 후 우리 가족은 그토록 원하던 호주 영주권을 손에 쥐게 되었다.

 


결핍은 실패가 아닌 축복이다.


하지만 호주 영주권이 나오면 모든 고민이 해결될 것이라는 나의 기대감은 몇 주가 지나지 않아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영주권을 받으면 한국에 있는 아파트를 팔고 그 돈으로 호주에서 작은 식당을 차리겠다던 소박했던 나의 꿈도 사라지고 말았다.


아내와 딸을 멜번에 남겨두고 아파트를 팔기 위해 홀로 한국으로 갔을 때, 8억 원에 구입했던 아파트 가격이 5억 원까지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호주에 와서 처음에는 인터넷으로 아파트 시세를 종종 확인했지만, 매달 떨어지는 집값을 보고 있는 것이 두려워 어느 순간부터는 인터넷을 멀리해 온 것이 화근이었다. 영어 공부에 집중할 수 없다는 이유로 한동안 부동산 시세를 확인하지 않았던 것이다.


반 토막 난 아파트를 팔기 위해 홀로 고국에 돌아온 초라한 40대 가장의 모습은 영화와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었던 바로 그 장면 그대로였다.


문제는 5억 원에 집을 내놓아도 아파트가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가난한 부모에게 손 벌릴 처지도 못됐고, 더 이상 대출 이자를 낼 여력도 없으니 흉물을 끼고 앉아 있을 수도 없는 처지였다.


폭락한 부동산 시장에서 우리 집을 사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침 일찍 부동산에 나가 사장님이 건네주는 커피 한 잔을 마시고 2시간을 앉아 있었다. 그러다 시내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다녀오는 것이 하루 일과의 전부였다.


매일매일 버스 뒷좌석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울어야 했다.


“평생을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힌 적도 없는데...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작은 욕심밖에 없었는데,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2년 안에 영어 성적을 받아야 한다는 절박함보다 빨리 집을 팔고 아내와 딸이 있는 호주로 돌아가야 한다는 절박함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그렇게 모든 문이 닫힌 상황에서 아내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서울에 있는 전화번호 하나를 알려주며 윤선생님에게 빨리 전화를 걸어 보라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우리의 딱한 사정을 전해 들은 호주 한인교회의 장로님 한 분이 한국에 있는 남편에게 우리 집 구입을 부탁하신 것이었다.


다음날 새벽 일찍 일어나 선생님이 운영하시는 병원으로 찾아갔다. 처음 보는 초췌한 40대 가장을 반갑게 맞이해 주신 윤선생님의 온화한 표정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 집은 저희가 구입하겠습니다. 걱정 말고 호주로 돌아가셔서 가족들과 행복하게 사세요. 그동안 고생 많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나중에 제가 집을 되팔아 이득을 보게 되면 제가 그때 박 선생님에게 더 갚아 드리겠습니다”


윤선생님은 내가 부동산에 내놓았던 시세보다 오히려 500만 원을 올려주시며, 호주로 돌아가는 여비에 보태 쓰라고 말씀하셨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윤선생님은 이 아파트를 돼 파시며 손해를 보셨다고 한다. 아파트 가격이 그 후에도 계속해서 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분은 우리 부부에게 그런 이야기조차 하시지 않으셨다.


비록 호주에서 정착하는데 사용하려던 거금은 잃었지만, 평생 잊지 못할 은인을 얻게 됐다. 그래서 우리 가족에게 “결핍은 실패가 아닌 축복”이다. 


한국에서 하던 일, 호주에서도 할 수 있을까?


가까스로 집을 팔고 호주로 돌아왔지만 고민은 계속됐다. 영주권은 받았지만 이제 호주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고민거리였다.


집을 판 5억 원으로 은행 대출 4억 원을 갚고, 전세금 1억 원을 돌려주고 나니 통장 잔고는 제로가 됐다.


40대 초반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무일푼으로 인생을 다시 설계해야 했다.


사실 이민 계획을 세울 때부터 나는 단 한 번도 호주 직장에 취업하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한국에서 나의 강점이라면 방송국 프로듀서와 기업체 홍보실을 거치며 익힌 ‘글발과 말발’이 아닌가?


한국 직장에서 갈고닦은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나의 날선 검은 영어권 국가에 오는 순간 가장 큰 약점이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다.


“기획, 홍보, 소통 업무를 내가 어떻게 영어로 할 수 있겠어?”


처음 이민을 준비할 때 아내는 “호주에 이민 가면 그곳에서 현지 직장을 알아보는 건 어때요?”라고 제안했지만 나는 오히려 화를 내며 단호히 거절한 바 있다.


하지만 작은 카페를 열겠다던 나의 꿈이 아파트 가격 폭락과 함께 물거품이 된 이상 다른 선택은 불가능해졌다. 한 푼의 사업 자금도 없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호주 직장을 얻는 것, 호주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것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멜번에 위치한 ‘복스힐 공립 기술대학(TAFE)’을 알게 됐다. 이 대학은 외국에서 직장 경험이 있는 이민자들이 호주 현지 회사에 취업할 수 있도록 돕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4개월 프로그램으로 이력서 작성법을 알려주고, 모의로 면접 연습을 시키고, 마지막 4주 동안 호주 회사에서의 업무 실습 기회를 제공했다.


내가 업무 실습을 나간 곳은 이 프로그램이 운영되던 ‘복스힐 공립 기술대학’의 마케팅 부서였다.


나를 맞아 준 마케팅 디렉터 제니는 너무나 친절했다. 하지만 처음 본 학생에게 그리 큰 관심은 없는 눈치였다.


“4주 동안 무슨 일을 시켜야 할지 모르겠네요. 이곳에서 해보고 싶은 일이 있나요?”


첫 미팅에서 디렉터가 던진 한 마디에 나는 서슴없이 답했다.


“한국에서 방송, 홍보, 마케팅 업무를 십여 년 했습니다. 제게 책상 하나와 학생들 자료만 주신다면 홍보 마케팅 기획서를 하나 작성해 드리고 싶습니다. 지난 십 년 동안의 각 과별 학생 등록 현황과 이들의 출신 국가를 담은 자료를 제게 주실 수 있을까요?”


다소 당돌할 수 있는 나의 제안에 디텍터는 ‘좋다’라고 답했다. 4주 후면 떠날 귀찮은 학생에게 회사 업무를 가르치는 것보다는 디렉터 입장에서도 이일이 훨씬 더 수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움의 손길, 천사의 손길


4주간의 업무 실습 기회!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실력을 보여준다면 혹시 아는가? 혹시 모를 취업의 기회가 올 수도…”


하지만 업무 실습 첫날 직원들에게 들은 이야기는 나의 사기를 꺾어 놓기에 충분했다.


공립 기술대학인 이 학교는 정부의 지원금이 가장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그런데 정부에서 공립대학의 지원금을 올해부터 대폭 삭감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1,200명에 달하는 현재 교직원 수를 800명으로 구조조정하고, 향후 몇 년 동안 신규 채용은 없다는 총장의 발표가 뒤따랐다.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말했다.


“그래, 그냥 최선을 다하자. 이곳에서 취업이 안 된다 해도 여기에서 최선을 다하고 나면 다른 직장을 구할 때 큰 힘이 될 거야”


더 큰 어려움을 이겨냈기에, 다시금 마음을 잡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그리고 주어진 4주 동안 전교생의 데이터를 분석하고, 출신 국가 별로 등록 현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출신 국가 별로 유학생들이 어떤 학과를 선택했는지? 전공 별로 어느 정도 비율로 영주권을 획득했는지? 영주권을 받지 못하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의 경우 출신 국가의 직업 분포는 어떤지? 현재 코스를 마친 후 학사, 석사, 박사 등 다음 코스로 연결되는 비율은 어떤지?”


그리고 분석한 데이터를 모아 100페이지에 달하는 영문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저녁에는 호주인 친구를 찾아다니며 내가 작성한 영어 보고서를 읽고 수정해 달라고 부탁했다.


월급을 받는 것도 아니었지만, 업무 실습을 나온 40대의 아저씨는 그렇게 며칠 밤을 새우며 보고서를 완성했다.


작성한 보고서를 디렉터의 손에 넘기고 회사 문을 나서며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 취업은 힘들겠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했어요. 많은 분들이 저를 도와주셨어요. 제 부족한 영어 실력을 덮어 주시기 위해 함께 밤을 새워주셨죠. 호주 회사에서 일해 본 지난 4주간의 기억은 평생 잊지 못할 행복한 추억이 될 것 같아요”



문이 닫혀야 또 다른 문이 열린다.


4주간의 업무 실습을 마친 다음날 디렉터에게서 연락이 왔다.


“실습으로 2주 동안 추가로 일해 보면 어떨까요?”


제니 디렉터는 내가 만든 100페이지 보고서를 이번에는 20페이지 내외의 발표 자료로 요약하고 사람들 앞에서 이 내용을 발표해 달라고 부탁했다.


2주 동안 다시 회사에 나갈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흥분이 되어 바로 “좋다”라고 답했다.


파워 포인트 자료를 만들고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하는 것은 한국에서 내가 가장 자신 있어 하던 일이 아닌가?


하지만 이번에는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야 발표 자료가 미비해도 소위 ‘말발’로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었지만 이곳에서는 영어로 말하며 그렇게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굳이 영어로 설명하지 않아도 스크린만 보고 알 수 있는 직관적인 발표 자료가 필요했다.


“영어로 발표를 해야 해. 말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발표 자료를 만들어야 해”


스스로에게 내린 가장 큰 숙제였고, 준비 기간 동안 도표, 그래픽 작업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약속된 2주의 시간이 되었을 때 디렉터는 각 부서의 책임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회의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긴 설명이 없음에도 발표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 차릴 수 있었다.


“분명히 앞으로 몇 년 동안은 신규 채용이 불가능하다고 했는데…”


모든 문이 닫힌 것 같았지만 발표를 마친 다음날 디렉터는 나에게 3개월 비정규직 계약서를 내밀었다.


“총장님이 말하더군요. 자기는 평생 이런 보고서를 받아 본 적이 없다고요. 우리 학교가 정규 직원을 뽑을 형편은 안 되기 때문에, 당신에게 비정규직(캐주얼) 기회를 주기로 결정했습니다”


눈물이 쏟아졌다. 하지만 한국에서 버스 뒷자리에 앉아 흘렸던 그 절망의 눈물과는 분명히 다른 눈물이었다.


3개월 동안의 비정규직 계약을 마친 후에는 4개월 연장 계약서를 받았고, 다시 6개월 연장 계약, 또다시 1년 연장 계약을 이어가며 복스힐 공립 기술대학에서의 2년 직장 생활을 행복하게 마칠 수 있었다. 


내가 살아온 삶은 여전히 호주에서도 경쟁력을 갖고 있다.


영어 실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한국에서의 경력이 호주에서 무용지물이 될 것이라는 걱정은 분명히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부족한 영어 실력을 메울 수 있는 다른 능력들을 내 스스로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어 실력 부족이 내 장점을 가릴 것”이라는 이 같은 걱정이 내게서 완전히 사라진 데는 다음 직장에서 만난 프랭크 총장님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복스힐 공립 기술대학에서 더 이상 계약 연장이 어렵다는 통보를 받고 다음 직장을 찾던 중, 멜번 대학교의 기숙사 대학 중 한 곳인 위틀리 대학에서 마케팅 업무를 겸할 ‘지역 관계 매니저’를 채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매니저에 지원한 후 면접 날짜가 잡혔고 면접 자리에서 총장님을 직접 만나게 됐다.


“당신의 약점은 무엇입니까?”


면접에서 만난 프랭크 총장님의 이 같은 질문에 나는 고민의 여지도 없이 대답했다. 마케팅 매니저에 지원한 나의 약점이라면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영어 소통 부족이 아니겠는가? 면접을 하며 내 영어 실력을 이미 간파했을 테니 숨길 일도 아니었다.


“커뮤니케이션 업무를 담당할 매니저를 찾고 계신 걸로 압니다. 저는 호주에 이민 온 지 몇 년 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영어 소통 능력이 부족합니다. 하지만 기획력이 뛰어납니다. 해당 분야에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어도 곧 향상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영어가 부족하지만 다른 장점이 많습니다”


이 말에 프랭크 총장님은 의아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기획력과 다른 장점이 많다면 영어 좀 못하는 게 왜 단점인지 저는 잘 모르겠군요. 본인이 이야기 한 것처럼 호주에 이민 온 지 얼마 안 된 사람이 영어 실력이 부족한 건 당연한 것 아닌가요? 이곳은 호주 대학입니다. 박 선생님 빼고 나머지 직원들은 모두 호주 사람입니다. 영어를 당연히 잘하죠. 박 선생님이 기획력이 뛰어나고 다른 장점이 많다면 나는 당신을 고용할 겁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일을 하게 된다면 모든 호주 직원들이 당신의 부족한 영어를 도와줄 겁니다.”


돌이켜보면 면접에서 이뤄진 대화치고는 매우 당황스러운 내용이다. 내가 생각했던 ‘영어 실력 부족’이 나의 최대 단점이 아니라고 말해준 호주 대학의 총장님.


프랭크 총장님은 나를 매니저로 뽑아 주셨고, 그곳에서 일하는 2년 동안 내가 작성한 영어 기사와 잡지 기고 글을 직접 수정해 주셨으며, 충고와 조언의 말씀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리고, 호주에서 직장 경력 4년 차가 되어갈 즈음 이번에는 호주의 공영방송국인 SBS의 한국어 방송 프로듀서로 채용이 됐다.


한국에서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프로듀서를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먼 훗날 호주로 이민을 와 이곳에서 방송 일을 계속하게 될 줄은 상상치도 못했었다.
 


함께 걷기


청춘 콘서트를 마칠 때 한 학생이 질문을 던졌다.


“호주에서의 생활이 생각보다 순탄치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힘든 순간 선생님을 지켜 준 힘은 무엇인가요?”


나를 지켜준 힘…


돌이켜보면 호주에서 우리 가족을 지켜준 힘은 “함께 걸어온 내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이었다.


방송국에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하고, 기사를 작성할 때마다 내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을 되뇌곤 한다.


“삶이 무너졌다 느껴질 때 아무런 대가 없이 우리 집을 구입해 준 윤선생님 부부, 100페이지가 넘는 영어 기획서를 꼼꼼하게 읽어가며 오탈자를 모두 고쳐준 사랑하는 친구, 나의 재능을 발견하고 호주에서 첫 직장을 갖게 해 준 제니 디렉터, 보스가 아닌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던 프랭크 총장님. 그리고 하나하나 열거할 수 없는 수많은 내 곁의 소중한 사람들”


오늘 청년들을 만나 “당신의 꿈을 응원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들 소중한 사람들의 도움을 통해 내가 일어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전부입니다. 당신 곁의 소중한 사람들과의 인연을 가볍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함께 걷고 있는 당신 곁의 사람들이 여러분의 가장 큰 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