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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단편소설] 좋은 날
작성일
2020.07.01

[우수상 - 단편소설 부문]



좋은 날



김미영 / 스웨덴




노랗게 물든 자작나무 잎들이 도로 위에서 나풀거렸다. 순영이 차창 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오늘 같은 날은 무슨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지 않아요?”


집에서 출발하면서부터 굳어 있던 경수의 표정은 운전을 하는 삼십여분 동안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었다. 순영이 몇 번이고 혼잣말을 하는 동안 아무 대꾸가 없던 경수가 쇼핑몰 주차장으로 들어설 때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렇게 멀리까지 물건을 사러 오는 것이 과연 경제적인가 생각해 봐야 해.”


순영은 경수의 다음 말이 어떻게 이어질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순영이 좀처럼 움직이려 하지 않던 경수를 몇 번이고 졸라 이곳으로 오자고 했을 때 순영도 경수와 마찬가지로 이런 외출이 낭비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경수의 아파트에는 비록 낡은 것들이기는 했지만 세 식구가 살았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 순영이 그곳에 짐을 풀었을 때부터 무게나 값이 나가는 물건으로는 딱히 더 필요한 것도 없었다.  오늘 설사 무엇을 산다고 해도 식료품이거나 작은 생활용품들일 텐데 동네 슈퍼마켓에서도 살 수 있는 그런 것들을 이렇게 먼 곳까지 와서 산다면 어느 정도 할인을 받는다 해도 그건 낭비임에 틀림없었다.


순영이 알고 지내는 사람들 중에는 더러 순영에게 이왕 나이 든 사람과 재혼할 것이면 좀 더 부유한 사람과 했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린 시절부터 익숙했던 가난이 스웨덴에 왔다고 해서 갑자기 못 견딜 일이 돼 버리는 것은 아니라 순영에게 이곳에서의 생활이 크게 불편할 것은 없었다. 그러나 가끔 순영은 경수가 경제적인 문제를 염두에 두는 것에서 어쩌다 한 번쯤은 자유로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불필요할 정도로 내내 굳히고 있는 경수의 표정으로 봐서는 쇼핑몰 안에서 점심 식사를 하는 것도 어려울 것 같았다. 


순영이 오늘 남편 경수와 아들 상현과 함께 집을 나서고 싶었던 것은 며칠 동안 이어진 너무 좋은 날씨가 순영에게 공연히 평소와 다른 것을 기대하게 하고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스웨덴에서 가을을 처음 맞이하는 순영으로서는 이토록 청량한 날씨라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티끌 하나 없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단풍에 물든 나뭇잎이 투명하게 일렁이고 나무와 잔디와 꽃은 물론이고 건물과 사람들까지 햇빛을 반사하며 빛나 보이는 때 순영은 이런 날을 어떻게 보내야 좋을지 몰라 오히려 안절부절못하겠는 심정이 되고 말았다. 며칠 내리 빨래를 해서 말리고 이불을 내다 널어도 좋은 날이 계속되자 어디로든 집 밖으로 나서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렇다고 갈 만한 곳을 딱히 아는 것도 아니라서 어제부터 거실 소파 위에 놓여 있던 전단지 광고에 보이는 새로 생긴 쇼핑몰로나 가보자고 했던 것이다.


’ 은숙 씨와 이전 같았더라면…….’


은숙이라면 이렇게 좋은 날에 순영이 의욕 없는 남편의 눈치를 살피면서  고작 쇼핑몰로나 향하기 전에 이미 돗자리와 보온병 그리고 도시락 등을 차에 싣고 순영의 집을 향해 출발했을 것이고 차 안에서 순영에게 전화를 걸어 서둘러 외출 준비하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면 순영은 서둘러 상현이를 준비시켜 아파트 앞에 서 있다가 매끈한 은숙의 차에 재빠르게 올랐을 것이다. 그래서 상현과 지섭이 자동차 뒷자리에서 재잘거리고 은숙과 순영은 앞자리에서 한국의 최신 유행 가요를 들으며 함께 흥얼 대면서 가을 풍경 속을 달렸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바다나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자리를 깔고 앉아 한가로이 가을 햇살을 쬐며  아이들 노는 모습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아마도,라고 순영은 생각했다.


은숙은 개학이 시작된 지 한 달이 지나도록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고 순영은 은숙이 순영 자신 때문에 학교에 오지 않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면서도 은숙에게 연락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집에서 출발할 때부터 순영이 앉아 있는 자리 아래쪽에서 들리던 털털거리는 소리는 쇼핑몰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는 동안 더욱 크게 들렸다. 경수가 차를 주차하는 순간 맞은편 주차 자리에  눈에 익은 날렵한  은색  BMW가 미끄러지듯 멈추어 섰다. 경수가 쯧 하고 혀를 찼다.


”하필이면!”


맞은 편 은색 BMW에서 은숙이 내렸다. 은숙은 웨이브 진 긴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순영이 타고 있는 차 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러게 오지 말자고 했잖아.”


경수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주차 시간표를 꺼내 시간을 맞춘 다음 계기반에 던지듯 올려놓고 차에서 내렸다. 은숙이 경수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웃어 보였고 경수는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은숙의 앞을 휑하니 지나가 버렸다.


상현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이모” 하며 은숙을 향해 폴짝폴짝 뛰어갔다. 은숙이 크게 웃어 보이며 두 팔을 벌려 상현을 꼭 안았다. 상현이가 은숙에게 지섭이는 어디 있는지 물었고  은숙이 지섭이는 피아노 선생님과 함께 있다고 대답했다. 은숙과 상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순영이 상현의 곁으로 다가가 상현의 손을 잡았다. 상현이 다른 쪽 손을 은숙에게 내밀었고 은숙이 상현의 손을 잡고 걸음을 맞추며 순영에게 말했다.


 ”너무 오랜만이네요. 전에 한 번 연락했었는데 답이 없었지요?”  


순영은 은숙의 질문에 대답을 하는 대신 은숙이 무슨 이유로 그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았는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은숙의 질문에 대답을 하거나 은숙에게 질문을 하는 대신 은숙을 슬쩍 보며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요 며칠 동안 순영 씨에게 연락해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 바람이 컸나 이렇게 딱 마주쳐 버렸네요.”


여느 때처럼 은숙은 말 끝에 잔잔하게 웃었다.


저만큼 앞서 가던 경수가 뒤돌아 보며 소리쳤다.


 ”빨리 안 오고 뭐 하고 있어?”


얼떨결에 순영이  걸음을 빨리 하려 하자 상현의 다른 쪽 손을 잡고 있던 은숙의 걸음도 빨라졌다.


”오늘 이렇게 만난 김에 우리 얘기 좀 해요. 솔직히 순영 씨 나한테 불편한 것이 있지요? 만약 그렇다면 풀어 주기 바래요 . 내가 그날 문자를 보냈는데 읽지 않은 것 같아서….. 그날은 내가 너무 미안했고…..”


문자를 보냈었다고 하는 은숙의 말이 순영의 마음에 걸렸다. 쇼핑몰의 회전문 입구로 들어설 때에도 은숙이 상현의 손을 놓지 않으려고 해서 회전문 한 칸 안에 셋이 끼듯이 비좁게 서서 가까스로 빠져나오게 되었는데 건물 안으로 먼저 들어가 있던 경수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또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쯧쯧 당신이 그렇게 물렁해 보이니까 개나 소나 당신을 우습게 보는 거야.”


은숙이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경수를 바라보았다.


”혹시 그 개나 소가 저는 아니겠지요? 아닐 거예요. 그리고 순영 씨는 누가 그렇게 우습게 볼 사람이 아니잖아요¬¬?”


순영은 짧은 순간 불만이 담긴 눈빛으로 경수를 바라보았다. 가끔 순영은 경수의 무례한 말투를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 순간 순영에게 은숙도 못마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은숙은 이전에도 경수와 더러 부딪힐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경수 앞에서 굽히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따박따박 잘 꺼내 놓았다. 그런데 왜……


순영의 눈총 세례를 받고 나서도 경수는 은숙을 향한 불평을 멈추지 않았다.


”은숙 씨와 은숙 씨 남편이 우리에게 얼마나 함부로 했는지 그걸 잊어버려서 지금 그렇게 웃고 있는 겁니까?”


은숙이 무안한 표정으로 경수와 순영을 번갈아 보았고 순영이 상현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는 경수 쪽으로 상현의 등을 살짝 떠밀었다.


”나 잠깐만 얘기하고 갈게요. 당신은 상현이 데리고 먼저 들어가 계세요. 아주 잠깐이면 돼요.”


상현이 경수의 곁으로 가서 쭈뼛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은숙이 살짝 붉어진 얼굴에 여전히 미소를 띠며 상현에게  말했다.


”그래 상현아, 엄마는 이모랑 잠깐 커피 마시고 들어가실 거야. 상현이 먼저 들어가서 재미있는 거 구경하고 있어. 나중에 이모가 피자 사 줄게.”


경수가 상현의 손을 잡고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가게들을 향해 돌아서는 것을 보고 나서 은숙이 카페를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순영이 빠른 투로 말했다.


”아니, 카페에 앉아 있을 시간이 없을 거예요. 나 빨리 상현이한테 가 봐야 하고요.”  


은숙은 항상 그렇듯 여유 있는 표정으로 순영을 보았다.


”상현이가 새아빠랑 친해질 수 있도록 둘이서 시간을 좀 보내게 둬도 좋지 않을까요?”


은숙이 순영의 처지를 드러내 놓고 말하는 것이 순영에게 새삼 불편하게 느껴졌다.


”벌써 팔 개월이나 됐는데요 뭐. 지금은 많이 친해졌어요. 은숙 씨 굳이 그런 것까지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은숙이 금세 풀이 죽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순영을 바라보았다.


”순영 씨는 정말 나하고 말하고 싶지 않은가 보네요. 우리집에서 저녁 식사했던 날 이후로 내가 보낸 문자도 안 읽고….. 시간이 지나면 마음이 풀리겠지 했는데……벌써 두 달이나 지났잖아요. 순영 씨와 경수 씨 모두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화가 나 있는 거였네요. ”


순영은 지난 두 달 동안 대체 은숙의 잘못이 무엇이길래 자신이 은숙에 대하여 마음이 맺혀 있는지 몇 번이고 생각해 보았었다. 은숙의 잘못이라는 것은 사실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순영은 어쩌면 그동안 자신이 울고 싶은 대신 화를 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조금 전 주차장에서 은숙이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았을 때 순영은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로 반가웠다. 그런데 그 반가움을 감추고 굳이 상대에게 불편한 내색을 하고 있는 것은 그날 저녁 무참히 내려앉았던 자존심을 그렇게라도 지탱해 보려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앞으로 다시 받게 될지도 모르는 상처로부터 미리 도망치려는 것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숙 씨, 나로서는 할 말이 별로 없어요. 우리가 지금 대화를 나눈다 한들……저나 남편이나 기분이 많이 상했던 것은 사실이에요. 경수 씨도 만만치 않았으니 기분이 상했던 것은 은숙 씨네도 마찬가지였겠죠. 그런데 그 상한 기분이 풀어진다고 한들 우리 사이에 달라질 것이 뭐 있겠어요? 나는 그런 생각이 드는데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순영은 자신의 목 안으로 뭔가 묵직한 것이 밀고 올라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은숙은 말하자면 순영에게 스웨덴에서 만난 최초의 지인이자 친구였다. 순영은 은숙을 처음 보는 순간부터 은숙이 자신과 생활수준에서 차이가 많이 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은숙이 자신과 순영의 경제적인 차이를 염두에 두지 않았으므로 순영도 그런 것들을 마음에 두지 않으려고 했다. 가끔 은숙이 너무 세상 물정 모르는 것 같은 소리를 해서 순영의 속을 헤집어 놓을 때도 있었지만 순영은 그런 것들을 그저 고생이라고는 모르고 살아온 은숙의 천진함에서 비롯된 것들이라고 가볍게 여기곤 했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가까워졌다. 학생들의 수준에 따라 몇 학급으로 나누어져  있는 스웨덴어 학교를 통틀어 한국인이라고는 순영과 은숙 두   사람뿐이었으므로 두 사람이 가까워졌던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했다. 순영은 스웨덴에 도착하자마자 스웨덴어를 무조건 배워야 한다는 경수의 주장대로 집에서 슈퍼마켓까지 가는 길조차 제대로 익히지 못한 때부터 스웨덴어 학교로 향해야 했다. 반면에 은숙은 스웨덴에 온 지 십 년이나 되었지만 이제 처음으로 스웨덴어 기초 과정을 배우기 시작했다. 순영의 스웨덴어를 배우는 목적이 빠른 취업이었다면 은숙은 아이를 어느 정도 키우고 난 후 슬슬 무료해지기 시작한 시간을 나름대로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  대학원을 시작하기 위한 준비로써의 언어를 공부하는 것이었다. 은숙에게서는 삼십 대 후반에 이미 순영의 얼굴에 새겨진 수많은 고민과 생활고의 흔적 같은 것을 아예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어려움 없이 살고 있는 사람이 가지고 있음 직한 여유와 배려가 있었다. 서로 간의 많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순영에게 은숙은 좋은 친구였다.


순영이 스웨덴에 오고 나서 만났던 몇 안 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 은숙의 남편을 비난했다. 사람들은 한결같이 은숙의 남편이 무척 거만하고 뻔뻔해서 다른 사람들을 자주 불쾌하게 만든다고 했다. 말 많은 사람들이 말 끝에 꼭 덧붙였던 것은 정말 미스테리한 존재는 바로 은숙이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거만하고 탐욕스러운  사람 옆에서 세상 순수하고 천진난만해 보이는 은숙도 알고 보면 그 밥에 그 나물로 언젠가는 오만한 본색을 드러낼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중에 경수도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경수는 다른 이유로 은숙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은숙 남편의 잦은 출장 때문에 은숙은 아들 지섭을 데리고 순영의 집에 놀러 올 때가 많았다. 경수는 은숙이 눈치 없는 사람이라고 자주 말했다. 경수가 아무 때나 자신의 집으로 불쑥 찾아오는 은숙 모자를 달갑지 않아하며 꼬부장한 눈으로 볼 때도 있었지만 은숙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은숙은 순영이 차려 주는 밥상을 좋아했다. 경수는 몇 번 은숙이 그렇게 자주 아들을 데리고 와서 좁은 식탁에 끼어 앉아 식사를 했으면 자신의 집으로도 한 번쯤은 초대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을 했다. 경수의 바람대로 은숙은 스웨덴어 학교가 여름 방학을 하고도 한참 지난 팔월에 순영 가족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은숙의 집은 멜라렌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있었다.  그것은 집이라기보다는 작은 성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았다.  순영은 은숙의 현관문 앞에서 자신이 마치 비현실적인 세계로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이런 집에 살고 있는 은숙이 스톡홀름 변두리 자신의 아파트로 드나들며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잠깐 생각해 보았다. 은숙의 남편 기철은 듣던 것과 다를 바가 없이 처음 마주치는 순간부터 거들먹거리는 태도를 보였다. 그냥 보아도 경수가 기철에 비해 열 살은 족히 많아 보이는데도 기철은 한쪽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경수에게 건성으로 악수를 건넸다. 기철은 은숙이 주방에서  상을 차리는 동안 몇 번이고, 나 같은 사람에게 안내를 받다니,라고 말하며 순영과 경수에게 집을 구경시켜 주었다. 은숙의 집은 대체로 박물관과 성을 절반씩 섞어 놓은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기철은 자신의 집에 있는 모든 것이 그렇지만 특히 벽에 걸려 있는 그림 몇 점은 각각이 시내 아파트 한 채 값은 족히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미로처럼 방과 복도가 이어져 있는 지하에서 삼층까지 둘러보는 동안 순영은 기철의 설명에 진지하게 귀 기울였고 심지어 어떤 부분들은 기억하려고 애쓰기까지 했다. 사람이 생활하고 있는 곳으로써 그런 수준의 집을 처음 보기는 경수도 마찬가지라 가끔 경수의 입에서 절로 감탄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순영은 사람을 대하는 기철의 태도에 대한 말을 심심찮게 들어 왔기 때문에 그가 시종일관 순영 부부를 얕잡아 보는 것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문제가 터졌던 것은 식탁에서였다. 식사를 하던 중에 기철이 갑자기 순영이 사는 동네를 거론했다.


”내가 전 세계를 다니면서 집을 사고파는 사람이라는 건 들어서 알고 있었죠? 다른 나라를 다니다 보면  스웨덴만큼 지역 간 격차가 적은 나라가 정말 드물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렇지만 스웨덴 안에서도 확실히 차이가 있기는 있죠. 지금 사시는 동네 말이에요.”


조심스럽게 식사를 하던 순영이 잠깐 젓가락질을 멈추고 기철을 바라보았다.


”아, 상현이네 그 동네 산다는 얘기 집사람 통해서 들었어요. 상현 엄마,  아이를 위해서라도 그 동네에서 빨리 벗어나야 할 거예요. 지금 사시는 곳이 스웨덴에서 가장 학군이 안 좋은 지역이라는 거 알고는 있지요? ”


순영은 스웨덴에서 생활한 지난 몇 달 동안 학군이라는 단어 자체를 잊고 있었다는 걸 그 순간 깨달았다. 한국에 살 때조차도 감히 학군 같은 것을 염두에 둘 여유는 없었다. 순영으로서는 그저 상현을 대학까지 무사히 공부시키고 싶다는 마음뿐이었고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한 눈에도 알아보겠는 경수를 소개받았을 때 이제 앞으로 상현이 공부시키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겠다는 생각만 했었다. 순영에게 나머지는 중요할 것이 없었다.


모욕감 때문이었는지 경수의 목소리가 살짝 떨려 나왔다.


”스웨덴에 학군이 좋고 나쁘고가 어디 있습니까? 여기에서 그런 걸 따질 필요가 있겠습니까? 우리 아이들 둘 다  지금 우리가 사는 동네에서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다녔지만 좋은 대학에서 좋은 성적으로 아주 잘 다니고 있습니다.”


기철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번졌다


”여기는 대학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학과가 중요한 거고요. 내 직원들은 그 동네를 게토라고 불러요. 우리는 거기는 건드리지도 않거든요. 아무리 번드르르하게 수리해 놓으면 뭐해. 투자 가치가 아예 없는걸. 상현 엄마, 얼른 그 게토에서 스톡홀름 좋은 구역으로 이사하세요.”


경수는 아예 젓가락을 상 위에 내려놓았다.


”제 아이들 학과 좋고요 우리 동네 사는데 아무 문제없을 뿐만 아니라 이사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도 아니지요. 하루가 다르게 올라가는 스톡홀름 집값을 무슨 수로 따라잡겠어요? 그렇지 않아도 점점 인구가 몰리는 데다……집으로 장난질 치는 사람들이 이렇게 있는 마당에”


경수는 이미 벌게진 얼굴에 숨소리도 거칠게 나올 지경이었지만 기철은 오히려 재미있는 듯 빙글거렸다.


”그게 부자와 가난뱅이의 차이거든요. 부자들은 그런 걸 기회로 이용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계속 앉아서 불평만 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순영은 좋은 집의 훌륭한 식탁에 모여 앉아 서로에게 이토록 공격적인 대화를 주고받는 두 사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순영이 도움을 구하는 눈빛으로 은숙을 보았을 때 은숙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황인 것처럼 예의 우아하고 평온한 자태로 식사를 계속하고 있었다. 경수와 기철은 그러고도 몇 마디 말을 더 주고받았다. 경수는 불필요할 정도로 자신이 이 사회에서 공짜나 불로소득 바라는 법 없고 타인에게 손해 끼치는 일 없이 얼마나 착실하게 일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강조했다. 경수가 사회 구조에 대한 자신의 이상에  대해 말했을 때 기철은 그렇게 공평 공평하다가 다 함께 망하는 수가 있다고 했고 경수는 기철에게 이기적인 자본가들 때문에 서민들 등골이 더 빠진다는 말을 했다. 순영이 일상적인 화제로 대화를 돌려  보려고 몇 번 애를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경수는 화가 단단히 나 있었고 기철은 사람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악취미가 있는 사람처럼 계속해서 경수를 자극했다.


은숙이 다과를 준비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기철이 말했다.


”뭐 더 나눌 얘기가 없을 것 같은데. 별 재미도 없고.”


쫓겨나는 것 같은 기분으로 은숙의 집에서 나와 기철이 게토라고 부르는 순영의 동네로 돌아오는 길에 경수는 쉬지 않고 기철을 욕했고 순영은 내내 고개를 돌리고 앉아 밤 아홉 시에 겨우 어두워지기 시작한 창 밖을 내다보았다.


은숙이 순영에게 팔짱을 끼듯이 하며 순영을 살짝 끌었다.
”그래도 우리 여기 서서 이럴게 아니라 어디 잠깐 들어가요.”


순영이 손을 내밀어 자신의 팔에서 은숙의 손을 떼어 내었다.


”나 정말 가 봐야 해요. 우리가 얘기해도 달라질 것이 없다고 좀 전에 말했잖아요. ”


”그럼 차라리 우리 밖으로 나가요.  오늘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지금은 그냥 뭔가 가슴을 탁 트이게 하는 곳이 필요할 것 같아요.’


”아뇨. 고집부리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나중에 시간이 나면 좀 더 여유 있게 얘기해요.”


순영이 잠깐 생각하는 듯하다가 다시 말했다.


”그런데  나중에라도 정말로 난 할 말이 없을 것 같아요…… 미안하지만 그만 가 볼게요.”


순영은 은숙을 뒤로하고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경수에게 전화를 걸며 걸음을 옮겼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상현이 몇 번이나 은숙 이모가  피자 사 주기로 했는데 왜 그냥 가는 거냐고 물었다. 운전을 하던 경수가 시무룩해져 있는 순영을 곁눈으로 보면서 말했다.


”그냥 집에 있었으면 그 사람들 때문에 다시 기분 상할 일 없었잖아. ”


순영의 목소리가 느닷없이 높아졌다.


”집에 있었으면 집에 있었으면! 아 그래요 앞으로는 꼼짝도 하지 말고 날이 좋든 말든 집에만 콱 처박혀 있자고요! 누구 만나지도 말고 절대 어디 가지도 말고! 그놈의 기름값도 너무 아까운데.”


울컥한 심정에 급하게 화를 내고 나서 순영은 뒷자리에 앉아 있는 상현을 재빨리 돌아보았다. 경수는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하는 표정으로 잠깐잠깐 고개를 돌려 순영을 보았다. 순영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경수를 주방으로 불렀다. 경수에게 할 말이 있을 때면 언제나 그렇듯이 순영은 냉장고에서 야채를 꺼내 수돗물을 틀어 놓고 씻기 시작했다. 그러고도 순영은 거실에서 놀고 있는 상현이에게 말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최대한 목소리를 낮췄다.


”두 달 전에 말이에요. 우리가 은숙 씨 집에서 돌아왔던 날, 당신이 내 핸드폰 가져가서 은숙 씨를 내 카톡에서 차단해 버렸었죠. 당신 마음대로 전화 주소록에서 이름도 삭제하고.”


”그 얘기를 새삼스럽게 왜 해?”


”당신은 아무 생각도 안 들어요? 당신의 행동에 대해서?”


”아 글쎄 그 얘기를 지금 왜 하냐고? 차단한 거야 나중에라도 풀면 되는 거지.”


”차단 풀어도 지나간 메시지는 다시 읽을 수 없다는 거 몰라요? 앞으로는 제 것 마음대로 가져가서 그렇게 하지 마시라고요. ”


”그런 사람 차단하는 게 뭐 어때서 그래? 알고 지내봐야 골치만 아프지.”


”그런 결정은 제가 해야 하잖아요.”


경수의 언성이 높아졌다.


”그래서 그게 당신만의 문제가 됐어? 나한테까지 영향을 줬던 거 아니냐고?”


순영도 물러나지 않았다.


”목소리 높이지 마시고요. 그때는 나도 정황이 없어서 당신 행동을 보면서도 그냥 넘어갔지만 다시 한 번 내 영역을 침범해서 함부로 하면 그때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어야 해요.”


”부부 사이에 니 영역 내 영역이라는 게 어딨어? 그러게 나가지 말자니까 괜히 졸라서 나가 가지고는 공연히 나한테 화풀이야 화풀이가.”


경수가 주방을 나가려던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경수가 순영을 돌아보며 말했다.


”혹시 그 눈치 없는 여자가 쳐들어 온 거 아니야? 그 여자라면 당장 쫓아버릴 거야.”


순영이 주방을 나서려는 경수의 팔을 잡고  빠른 속도로 말했다.


”당신, 그 눈치 없는 여자는 내가 이 낯선 곳에서 힘들어 하는 동안 나에게 위로가 돼 줬던 유일한 사람이라고요.”


”이 사람이 보자 보자 하니까 오늘 왜 이래 정말?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그럼 나는 당신한테 뭐였단 말이야? 그리고 그 여자가 정말 당신이랑 잘 지낼 생각이었으면 문자 몇 번 하고 말았겠어? 전화라도 했겠지. 안 그래?”


순영이 한숨을 크게 한 번 내쉬고 나서 말했다.


”어쨌든…… 만약 정말로 은숙씨가 온 거라면 오늘은 제발 좀 가만히 계셔 주세요. 제가 부탁할게요.”


순영이 빠른 걸음으로 현관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은숙이 현관문 앞에 서 있었다. 은숙이답다고 순영은 생각했다. 은숙은 세 개의 피자박스를 들고 있었고 지섭이 은숙의 곁에서 방실방실 웃고 있었다. 순영이 지섭에게 다가가 지섭을 안았다.


”아유 우리 지섭이 못 보는 새 많이 컸네. 어디 한 번 보자. 아이구……”


순영이 지섭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는 동안 상현이 달려 나왔다. 상현과 지섭은 공연히 깔깔 웃으며 마주 보고 소리를 질렀고 지섭이 순식간에 신발을 벗어던지고 상현을 따라 거실로 뛰어 들어갔다. 은숙이 피자박스를 그대로 들고 서서 말했다.


”불쑥 찾아와서 미안해요. 아까 상현이한테 피자 사 주겠다고 했던 약속을 지켜야 하겠어서……. 아이들이 만나니 저렇게나 좋아하네요”


순영이 현관을 향해 나오는 경수를 돌아보았다. 은숙이 미안한 표정을 과장되게 짓고 경수를 보며 말했다.


”저…… 죄송한 부탁을 좀 드려도 될까요? 제가 순영 씨랑 잠깐 나갔다 들어 오려고 하는데요 아이들 좀  봐줄 수 있으세요?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


경수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은숙이 들고 있던 피자 세 판을 받아 들고는 마지못한 듯 말했다.


”그러지요 뭐”


경수가 피자를 들고 아이들이 놀고 있는 거실로 갔고 순영이 주방으로 들어가 주방 의자 위에 걸쳐두었던 스웨터를 재빨리 들고 나와 현관문을 나섰다. 


두 사람은 아파트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아파트 밖으로 나오자 은숙이 자동차 리모컨을 눌러 트렁크를 올렸다. 은숙이 자동차로 다가가더니 트렁크 안에서 바구니 하나를 꺼내 순영에게 내밀었다.


”여기에서 도보로 오분도 안 걸리는 곳에 숲이 있거든요.”


순영이 엉겁결에 받아 든 바구니를 다시 은숙 쪽으로 밀었다.


”이걸 들고 뭘 하라고요?’


”날이 너무 좋아서요. 이런 날을 그냥 보내기는 아깝잖아요.”


은숙이 아파트를 올려다보며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순영이 돌아보자  순영의 주방 유리창 앞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웃는 상현과 지섭의 모습이 보였다.  경수의 얼굴마저 나타난 후에는 세 얼굴이 모두 창가에서 사라졌다. 순영이 은숙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은숙이 바구니 하나를 더 꺼내고 나서  자동차 트렁크를 내린 다음 한 손으로 해를 가리고 서서 웃었다.


”그냥 숲에 들어가서 잠깐 걸어요. 걷다가 버섯을 보게 되면 따는 거고요.”


순영이 바구니 속을 들여다보았다. 한쪽 끝에 솔이 달린 작은 칼이 바구니 안에 놓여 있었다.


”순영 씨는 아직 버섯 따기 안 해봤지요? 그게 생각보다 아주 재미있어요.  뭐 꼭 버섯 때문이 아니더라도 바구니 하나 들고 숲에 가서 걷다 보면 마음이 좀 더 편안해질테니 그냥 절 따라와 보세요.”


순영은 아파트 도로 건너 띄엄띄엄 놓여 있는 건물들 뒤쪽으로 보이는 숲으로 들어서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다. 제멋대로 자란 나무들 사이로 나 있는 좁은 입구 앞에 섰을 때에는 은숙에게 그냥 돌아가자고 말하고도 싶었다. 그런데 좁은 길을 따라 잠시 걷다가  모퉁이를 돌고 나자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풍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숲 속에 호수가 있었고 그 호수를 중심으로 산책로가 단정하게 조성되어 있었으며 길 가로 가로등까지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져 있었다.  


’이 동네 사람들이 이 숲에서 산책도 하고 조깅도 하고 그럴 거예요. 길이 평평하고 넓게 잘 닦여 있잖아요. ”


순영은 이 동네에서 살기 시작한 지 팔 개월이 지나도록 바로 길 하나 건너 이런 숲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는 것이 스스로 놀라웠다. 이곳에 눈길을 준 적도 별로 없었고 눈에 띌 때마다 그저  방치해서 내버려 둔 땅이 저렇게 있나 보다고만 생각했었다. 자신은 그렇다 치고 오랫동안 이 동네에서 살았던 경수가 이렇게 호수가 있는 숲을 가까이 두고도 이곳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것 역시 납득하기 어려웠다.  


”이런 길을 어떻게 알았어요? 나는 코 앞에 두고도 몰랐는데”


”놀랄 것 없어요. 동네마다 이런 숲이 한두 개쯤은 있으니까 그냥 겉에서만 봐도 대강 알 수 있는 거죠.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스톡홀름은 그냥 숲과 호수와 바다잖아요. 그렇게 보면 사람들은  자연 속에 그저 좀  깃들어 사는 존재일 뿐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렇게 아둥바둥 살고들 있지만.”


단풍 든 나뭇잎들이 바람에 나부꼈다. 은숙이 기분이 좋은 듯 들고 있는 바구니를 앞 뒤로 흔들며 흥얼거렸다. 은숙의 곁에서 생각에 잠긴 듯 길을 걷던 순영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정작 은숙 씨는 아둥바둥 산다는 게 어떤 건지도 잘 모르는 사람이잖아요.”


나뭇잎들이 나선을 그리며 천천히 떨어져 내릴 때 은숙이 손을 내밀어 떨어지는 나뭇잎을 잡는 시늉을 했다.


”생명 가진 존재 치고 아둥바둥하지 않는 게 어디 있겠어요? 다들 제각각의 형태로 그렇게들 살고 있겠지요. 그리고……그날 일은 다 내 잘못이에요. 이제 그만 용서해 줘요.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순영 씨에게 문자 보냈었는데 아직도 확인을 안하고 있더라구요.”


은숙이 손에 들고 있던 바구니를 팔목에 걸치고 외투 주머니에서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더니  무엇인가를 찾아 순영의 눈앞에 내밀었다.


”이거 봐요 이거. 내가 이렇게 문자를 보냈는데 이 일 자가 아직도 그대로 서 있잖아요 이렇게 선명하게.”


순영은 핸드폰 화면에 떠 있는 메시지를 재빨리 읽어 내렸다.


순영 씨, 오늘 기분 많이 상했지요? 남편이 그렇게 제멋대로 말하는데 말리지도 못하고…..내가 무능한 사람이라서 순영 씨에게 정말 미안해요. 부디 용서해 주시고 우리 이전처럼 잘 지내요. 


순영의 입에서 픽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 이게 뭐야. 무능한 사람인 것을 용서하라니요? 무슨 말이 이렇담. 은숙 씨가 무능한 사람이라면 나 같은 사람은 뭐예요 대체?”


”순영씨는 유능한 사람이잖아요. 잘하는 것이 얼마나 많아요? 난 밖에서는 그렇지 않은데 남편 앞에서는 나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하고 살아요. 남편이 잘못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나서지도 못하고……우리 집에서 나 사는 걸 누가 들여다본다면 저 여자는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인가 할 거예요. 한심한 일이죠.”


순영이  아무 말없이 몇 걸음을 더 걷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날  아무 말도 안 들리는 것 처럼 하고 있는 은숙씨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그래서 화가 났다기보다는……우리가 생활 환경의 차이도 너무 많이 나고……여러 면에서 친구가 되기 어려운 사람들이라는 걸 그날 너무 분명히 알아버린 것 같아서……그래서 화가 났던 걸 거예요. 사실은 화가 났던 게 아니라 슬펐던 것이었지만 말이에요.”


순영이 말을 하는 동안 생각에 잠긴듯 묵묵히 걷던 은숙이 말했다.


”우리는 원래 그런 경제적인 차이가 분명히 있었던 사람들이잖아요. 새삼스러웠던 게 아니죠. 그런 차이가 있었지만 아무 문제 없이 잘 지냈는데요 뭘. 그날 우리집에 와 봐서 알겠지만 우리집의 그 썰렁함이란……난 순영 씨 집이 좋더라구요. 경수 씨가 날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따뜻한 밥상과 몸에 꼭 맞는 집 그런 게 너무 좋아서 모르는 척 그렇게 다녔던 거예요. 그리고 순영 씨 말대로 나는 부유한 사람이지만 우리 두 사람 관계에서는 내가 순영씨 도움을 더 많이 받고 사는 셈이죠.”


”에이, 그렇진 않죠.”


”정말 그래요. 사실은 미국에 가 있는 동안도 순영 씨 생각 많이 나고 음식도 그리웠어요.”


순영이 놀란 표정을 짓고 은숙을 보았다.


”언제 미국에 다녀 왔어요?”


”미국에서 돌아온 지 일주일도 안 됐어요. 순영 씨 우리 집에 왔다 가고 나서 며칠 안 있다 남편 출장 갈 때 동행했었죠. 거기 음식점이 얼마나 많아요. 한인식당도 수두룩하고.”


”나야 모르죠.”


은숙이 소리내어 웃었다.


”아무튼 그렇더라고요. 그런데 그 맛들에는 순영 씨 음식에 깃들어 있는 깊은 감동과 정서가 없는 거예요.”


순영이, 아니 뭘 또 그렇게까지 라고 말하며 웃었다.


산책로에서 연결된 좁은 오솔길에서 앞장 서 걷던 은숙이 뒤에서 걷고 있는 순영에게 들리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미국에 갈 때에는 남편이랑 같이 갔는데 올 때에는 지섭이와 둘이만 돌아 왔어요. 남편의 탐욕은 끝도 없고, 남편은 어느새 가족보다도 사업이 더 중요한 사람이 되어 버렸어요. 일을 하고 돈을 벌 때에는 그 목적이 있어서 그러는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냥 돈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린 거죠.  미국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정말 많은 생각을 했어요. 남편 하나 믿고 스웨덴으로 온 건데 막상 나는 언제나 혼자고……순영씨마저 내게서 멀어지면 나는 여기서 그냥 섬처럼 혼자 떠 있는 거예요. 사람들이 기철씨나 나한테 거부감이 많다는 거 나도 잘 알고 있거든요.”


앞서 걷던 은숙이 무엇을 발견했는지 오솔길에서 벗어나 빠른 걸음으로 소나무 숲을 향해 걸었다. 순영은 이끼 사이로 무릎 높이까지 자라 있는 블루베리 가지에 바지가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은숙의 뒤를 따라 걸었다. 순영이 걷는 동안 이끼의 푹신한 감촉이 신발 밑에서 전해졌다. 은숙이 소나무 한 그루 앞에 쪼그리고 앉아 두 손으로 버섯의 밑동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갓이 두툼하고 밑동이 튼실한 버섯이 기다랗게 달려 올라왔다. 버섯 하나를 발견했을 뿐인데 은숙의 얼굴이 눈에  띄게 환해졌다.


”이걸 한국에서는 그물버섯 아재비라고 한대요. 여기 이름은 칼 요한인데 그 이름의 왕이 좋아했던 버섯이라고 하더라고요.”


”확실해요? 괜히 이거 먹고 나서 거품 물고 실려 가는 것 아니에요?”


은숙이 아무 걱정 마시라구요 라고 말하며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 바구니 속에 있던 작은 칼을 꺼내어 버섯의 아랫부분을 잘라내  버섯을 뽑았던 자리에 눌러 놓았다.


”이렇게 해 줘야 이곳에서 다시 버섯이 자라거든요. 내년에 다시 찾아와도 이 버섯이 이 자리에 있을 거예요. 그런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하고 든든해지지 않아요?”


은숙은 손질한 버섯을 순영이 들고 있는 바구니에 담고 기분이 좋은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햇빛을 받아 더욱 선명해진 초록의 이끼는 숲 전체를 아늑하게 덮고 있었고 넉넉한 간격을 두고 서 있는 나무들은 하늘에 닿을 듯 시원하게 뻗어 있었다.


”은숙 씨, 이제 버섯 하나 땄으니 그만 돌아 가요. 점심도 못 먹고 걸었더니 배도 좀 고프고.”


”점심 나도 같이 먹어요?”


”그걸 말이라고!”


은숙이 어린아이처럼 손뼉을 치며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아아 이제야 살 것 같네요 하하”


숲에서 나오면서 순영은 날이 너무 좋은 탓에 자신에게 며칠 동안 계속되었던 초조가 지금은 말끔하게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대낮의 햇빛은 나뭇잎에 부딪히며 사방으로 빛을 뿌렸고 오늘 같이 좋은 날 아침부터 공연히 기대되었던 좋은 일은 이것으로 이미 충분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