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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체험수기] 적도의 땅 말레이시아에서 날개를 펴다
작성일
2020.09.02

[가작 - 체험수기 부문]



적도의 땅 말레이시아에서 날개를 펴다



김희정 / 말레이시아



1. 새로운 삶을 향하여


“어머니, 안녕하세요? 말레이시아로 곧 가신다면서요? 너무 서운하네요.” 


아파트 단지내를 걸어가고 있는데 우리 찬희 태권도 사범님이 건네시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네~에?” 


“찬희가 말레이시아로 떠난다고 말하더라구요.” 


“아~~ 지금 생각 중에 있어요.”


우리 큰 아들이 유치원 선생님, 태권도 사범님 그리고 친구들한테 모두 소문을 내버린 것이다.


말레이시아에서 새로운 삶은 어떨까하고 고민하던 중에 여행 차 대만하고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프르 여행을 2주동안 갔다왔었는데 찬희는 말레이시아가 마음에 꼭 들었었나보다. 한국에 오자 마자 동네방네 소문을 다 내고 돌아다니고 있으니 말이다.


새로운 땅에서 시작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서 망설이고 망설이던 중이었는데 아들 녀석의 결단이 우리가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한 큰 원동력이 되었던 것 같다.


난 한국에서 중고등학생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었기 때문에 한국 교육에 많이 지쳐있었던터라서 우리 아이들을 좀 더 자유로운 환경에서 공부시키고 싶었기때문에 외국으로 나갈 계획을 시작했었다.


캥거루가 뛰어다니는 나라 호주는 어떨까? 


영어 발음은 미국이지~~ America Dream


캐나다는???


많은 생각이 들었고 인터넷에서 많은 정보를 찾아보았지만 결론은 NO... 왜냐하면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더 큰 세계로 향하는 건 좋은데 현실적으로 경제적인 부분에서 너무 힘들 것 같고 아이들과 행복한 삶을 누리며 살 수 있을 것 같지 같아서 이 나라들은 탈락시켰다. 


눈을 한 단계 낮춰서 동남아시아는 어떨까?


필리핀은 너무 위험해서 안 될 것 같고 싱가폴은 비싼 물가와 한국보다 더 심한 교육 스트레스가 있다는 정보의 영향으로 탈락시켰다.


진짜 어디로 가야하지? 매일 저녁 남편과 머리를 맛대고 상의하던 중에 우연히 텔레비젼에서 ‘말레이시아 소개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다.


우리 둘 다 동시 다발적으로 외쳤다. “여기다~~.


2007년 그때까지만해도 한국에서의 말레이시아에 대한 정보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대형서점에 가서도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책은 한 두권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런지 이 나라에 대한 궁극적인 호기심이 더 발동했고 매력적인 점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물가수준은 한국의 3분의 1 수준이고 국민들이 말레이어, 영어, 중국어, 그리고 타밀어등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무엇보다 좋았던 점은 안전한 치안과 국제학교 학비가 다른 나라에 비해서 매우 저렴하면서도 좋은 환경이라는 점이었다.


말레이시아로 확실하게 결정을 내린 후 부터 모든 절차들이 정말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빨리 진행되었다.


살고 있던 아파트를 전세로 내놓기 무섭게 하루도 안되서 계약이 되버렸고 해외포장이사도 척척 진행되었고 여름에 답사 겸 여행 갔을 때 만났던 한국 분의 도움으로 KL에서 살 만한 집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불과 2-3개월만에 모든 준비가 끝나버린것이다.


다행히 양가 부모님들도 크게 반대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축복해주셔서  2007년 11월, 기쁜 마음으로 말레이시아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하지만 비행기 안에서 만감이 교차되어 눈물이 쏟아졌다.


정말 잘 결정한 것일까? 잘 해낼 수 있을까?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이 들었지만 우리의 최대 무기인 무한 긍정과 강한 믿음으로 이겨 낼 수 있으리란 확신으로 잠깐 약해졌던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여행 목적으로 도착했던 말레이시아의 냄새와 살기위해 도착했던 냄새는 사뭇 달랐다.


이제 시작이다.


Are you ready? Yes, we are ready.


진짜 준비됐다. 




2.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가자


도착했다는 설레임도 잠시 첫 날부터 모든 일들이 우리에겐 어려움으로 다가왔다. 무엇보다 언어가 안되니깐 정말 쉬운 일이 하나도 없었다. 


‘내가 왜 이렇게 바보같지?’ 라는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한국에서 영어학원을 다녔어도 막상 실전에선 말이 안나오고 간단한 의사소통도 힘든 우리의 상황에 화도 많이 났다.


말레이시아 공항에 도착했을 때 쿠알라룸푸르에서 홈스테이 하시는 분이 우리 가족을 픽업나오셨다. 한 2주정도는 홈스테이하면서 집을 계약할 계획이었지만 이미 배로 보낸 이삿짐이 우리 보다 일주일이나 먼저 도착해있다는 소식을 받았기에 더 마음이 조급해졌다. 늦은 밤에 숙소에 도착해서 대충 짐 정리를 한 후에 자리에 누웠는데 잠이 오질 않았다.


이젠 시작인데 어떻게 해야하지?  막연한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하지만 옆에서 새근 새근 예쁘게 자고 있는 아이들을 보니깐 뭔지 모를 힘 아니 책임감이 솟아나고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아빠, 엄마를 따라와서 여기까지 왔는데 잘 키워야지..


걱정없이 티없이 예쁘게 말이다.


다행히 며칠 후에 집 계약을 했고 서둘러서 이사를 할 수 있었다. 한인교회에 등록하여 한인들의 도움으로 찬희 학교 입학, 가디언 비자 그리고 자동차 구입까지 감사하게도 잘 해결되었다.


우리 남편은 한국에서 증시 만평웹툰작가, 온라인 마케터 그리고 웹사이트 디자이너로서의 일을 겸하고 있어서 경제적인 고정 수입이 한국에서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생활이 많이 힘들지는 않았지만 장기적으로 계획을 했을 때는 여러 가지로 고민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에서 무엇을 하면서 살 수 있을 까에 대한 고민에 종종 빠져있곤 했다.


너무 서두르지 말자고 서로에게 다짐했다.


그래도 우린 감사하게도 한국 일을 꾸준히 할 수 있지 않은가?


이것 만이라도 우리에겐 큰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사하고 감사하자. 그리고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도전해보자.


다 사람사는 곳인데 뭐 얼마나 특별하겠어? 


마음 속으로 다시금 마음을 다잡아보았다. 할 수 있다고 별거아니라고...




3. 스리가든 스쿨 일학년 G반 첫째아들 전찬희


대부분의 한국 부모님들은 국제 학교에 아이들을 입학시킨다. 


심사숙고 끝에 국제학교가 아닌 현지 사립학교인 스리가든스쿨을 선택했다. 스리가든은 말레이시아에서 명문 학교로 등록금이 국제 학교에 비해 조금은 비싼 편이지만 대부분의 수업을 영어로 하고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매우 잘 가르친다는 주변 분들의 조언에 힘을 입어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우리 부부의 교육 철학은 어릴 적에는 공부 보다는 뛰어노는 놀이 수업과 체험 학습 위주의 수업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열심히 놀게 했고 더 많은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특별히 영어수업은 한 적이 없었고 한글은 내가 가르쳐서 쉬운 한글 책은 읽을 수 있었다.


영어는 알파벳만 아는 정도여서 말도 못하고 읽지도 못하고 쓰는 건 꿈도 못꾸는 그런 상황으로 말레이시아에서 초등학교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천만 다행인 것은 스리가든 1학년 선생님들은 친절하게 아주 천천히 처음부터 차근 차근 가르쳐주셨다. 특별히 찬희 담임인 나단 선생님은 영어 과목을 담당하셔서 찬희를 더욱 잘 챙겨주셨다.


찬희가 영어를 전혀 못했기 때문에 친구들과 어떻게 소통할 까 참 고민이 많이 됐다. 매일 6시에 일어나서 찬희를 준비시키고 아침 먹여서 7시 30분 까지 학교에 데려다줘야했다.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출근 시간에는 정말 많은 오토바이 속을 뚫고 운전을 해야해서 정말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거기에다가 교통 체증이 얼마나 심한 지 학교까지 보통 20분 거리인데  한 시간 가까이 걸렸다.


찬희는 아빠와 엄마가 아침 출근 지옥에서 끙끙 거리고 있을 때 뒷자석에서 회장님처럼 세상 모르고 꿀잠을 자고 있었다.


학교에 도착하면 눈을 비비고 자기 몸 보다 더 큰 책가방을 질질 끌며 교실로 향하는 뒷 모습을 바라봤을 때 참 안쓰러웠다.


얼마나 답답하고 힘들까... 하고 싶은 말도 못하고 친구들 말을 못 알아들으니까 눈치껏 행동해야하니 얼마나 긴장될까..


마음이 많이 아팠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교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차에 태워서 집으로 향했다. 차안에서 항상 오늘 어땠냐고 물어봤고 찬희는 항상 정말 재미있다고 말했다. 진짜 그런 줄 알았다.


나중에 시어머니한테 들은 얘기다. 친구들하고 재밌게 놀고 싶은데 아이들이 어디론가 가버려서 친구들 못 찾고 혼자서 뛰어다니기도 하고 혼자 그림도 그렸다고.. 엄마가 학교 끝나면 항상 재밌었냐고 물어봤는데 엄마 걱정할 까봐 그냥 정말 재밌었다고 얘기했다고...


그말 듣고 정말 많이 울었다. 도리어 엄마 걱정까지 하고 있었다니 말이다. 말이 안통하니 친구들 얘기하는 걸 못 알아듣고 잘 따라하지 못하니깐 아이들이 놀이에서 찬희를 제외시키고 자기들끼리 놀러가버렸었나보다.


그땐 참 많이 슬펐고 속상했지만 다행히 시간이 흐르고 찬희가 잘 적응해가기 시작했다.


일본 친구하고 영국, 말레이시아등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과 재밌게 놀기 시작했고 나 또한 그 아이들을 우리 집으로 초대해서 함께 놀 수 있도록 맛있는 간식과 놀이 프로그램을 준비해놓았다.


그래서인지 찬희의 학교 생활이 차츰 행복해지기 시작했다.


주말에는 친구들 생일 파티에도 초대받아서 친구들과 어울려서 재밌게 놀았다. 비록 유창하게 영어로 표현하는 건 아직까지는 힘들지만 그래도 아이들만의 통함이 있나보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깔깔거리고 웃으며 함께 뛰어노는 걸 보면 말이다.


찬희가 잘 헤쳐나가리라 믿었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매일 격려해주면서 힘이 되어주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4. 말레이시아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가기


스리가든에서 우리 찬희의 학생비자를 만들어주면 그 학생비자와 필요한 많은 양의 서류들을 가지고 말레이시아 이민국에 가서 가디언비자를 신청할 수 있었다. 말레이시아의 이민국은 정말 너무 힘든 곳이었다 왜냐하면 시스템이 정말 느리고 행정처리가 한 번에 깔끔하게 끝낸 적이 없어서 1년 비자를 받기 위해서는 이민국을 서너 번을 방문해야만했다. 그리고 1년에 한 번씩 비자를 갱신해야하는 것도 보통 스트레스가 아니었다.


우리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외국인들이 비자 때문에 고생을 했다.


문득 한국에 살았을 때 아프리카 남자와 국제 결혼을 한 친구의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그 친구의 남편이 매년 비자 때문에 한국 이민국에 가는 데 참 힘들고 기분이 안좋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생각났다. 무엇보다 국적이 아프리카라서 그런지 무시하는 행동 때문에 상처를 많이 받아서 온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남편한테 많이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했었다.


그땐 그 얘기에 크게 공감하지 못했었다.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이젠 알겠다. 친구 남편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백배 공감이 되었다.


만약 영어든 말레이어든 유창하게 했다면 그렇게 많이 힘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때론 우리가 제대로 이해 못하고 실수해서 심사에서 탈락된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언어의 벽때문에 쉽게 해결할 수 있었던 일도 더 힘들게 진행되었던 일들이 많았던 것 같다.


외국에서 살면 영어도 빨리 늘고 잘 할거라고 예상했던 거와는 달리 우리의 영어실력은 하나도 향상이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말레이시아의 작은 한국에서 한국 사람들과만 소통하고 살았기 때문이다. 처음 살기 시작했을 때는 빨리 언어를 배워야지 했다. 둘째 준희가 어려서 어떻게 영어학원을 다니나... 애가 조금 크면 해야지 하고 영어 공부 못하는 이유를 합리화하곤 했다.


남편도 한국 쪽 일을 하다 보니 별로 영어가 필요치 않았던 것도 있었고
이렇게 계속 미루다보니 현실에 서서히 안주해버린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쩌다가 학교에 가서 선생님과 상담하거나 관공서에 가야 할 때는 영어 잘하시는 분들께 부탁해서 함께 가곤 했었는데 참 지금 생각해보면 한심스러운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이럴려고 한국에서 나온 건 아닌데... 


한국에서 나름 진취적이고 자기 주도적으로 살았다고 자부했었는데 여기선 왜 이렇게 살고 있지? 라는 반문이 시작됐다.


좀 바뀌고 싶었다. 그리고 이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답답했다. 정말 많이~




5. 또 하나의 시작


어느 날 찬희가 학교에서 가정통신문을 가져왔다. 사전을 동원해서 찬찬히 읽어보니 말레이시아 정부가 과학과 수학을 영어로 수업했는데 이 수업들을 말레이어로 수업 한다는 정책으로 바꿔서 말레시이시아 현지학교의 말레이어 수업 비중을 높이겠다는 내용이었다.


찬희 학교는 현지 사립학교였지만 영어 비중이 높은 학교였기 때문에 다른 일반 국제학교보다 더 끌림이 있어서 이 학교를 선택했었는데 말레이어 비중이 높아진다고 하니 이 학교를 계속 보내야 하나 라는 고민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시 우리에게 또 한번의 결정의 순간이 다가왔다.


이번에는 생각보다 쉽게 결정이 내려졌다.


남편과 매일 얘기하면서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르에서의 삶에 회의감을 많이 느꼈기때문이었다. 우리의 새로운 결정은 말레이시아의 말라카로 이사를 가는 것이었다. 한인교회 부목사님 가정이 말라카라는 지역에 한인교회를 세우셨기 때문에 그분들의 도움으로 말라카에 이사할 수 있었다. 말라카는 한국의 경주와 같은 역사도시이고 말레이시아의 첫 수도였던 유서깊은 곳이었다. 물가도 쿠알라룸프르보다 훨씬 저렴해서 더 좋은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고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점은 집과 매우 가까운 국제학교는 정말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이 함께 공부하고 있었다.


미국, 영국, 네덜란드, 독일, 일본, 한국, 필리핀등 정말 우리가 원했던  인터내셔날 학교여서 대만족이었다.


찬희도 입학하자마자 개교기념일 학교 행사인 ‘나이팅게일’이라는 뮤지컬에 합류하게 되면서 찬희의 영어 실력이 일취월장 향상되었다.


찬희의 역할은 비록 작은 역할이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매일 연습하면서 다른 친구들의 노래와 대사까지도 외울 정도로 열심을 다하는 모습에 정말 놀랐다. 학생들은 물론이고 선생님들 그리고 학부모들까지 모두 뮤지컬 준비에 심혈을 기울였다. 홀리데이인 호텔에서 뮤지컬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주인공이든 주인공이 아니든 학생들 한 명 한 명이 얼마나 최선을 다해서 연기하던지 눈물이 핑 돌 정도로 감동을 받았다.


참 이곳으로 이사하기 잘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감사했다.


아이들이 행복해했고 우린 더 더욱 행복했다.


말라카 생활은 정말 외국 생활 같았다.


주말에는 찬희 외국 친구들 생일 파티에 함께 초대를 받아서 그들과 포트락 파티(Pot-luck party)를 하면서 새로운 외국 문화를 경험할 수 있었다.


비록 영어가 많이 부족했지만 준비해간 한국 음식을 나누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행히 한국 음식을 처음 먹어보는 친구들도 내가 준비해간 김치, 부침개, 잡채 등 다양한 음식을 먹어보면서 맛있다고 감탄했고 정말 순식간에 접시가 비워졌다. 


찬희는 말라카의 새로운 학교에서 정말 열심히 공부했고 한국에서 첫 돌잔치를 마치자 마자 엄마 아빠를 따라 온 둘째 준희도 자연스럽게 영어 유치원부터 차근 차근 시작해서인지 형 보다 훨씬 적응을 잘 해나갔고 유치원 재롱잔치에서 지휘자로 또 백마탄 왕자님으로 모든 주인공은 도맡아서 할 정도록 똘똘하게 생활했다.


감사한 일들만 넘쳐나서 행복했다.




6. 다시 돌아가야하나?


5년 정도 정말 평화롭게 외국 생활을 만끽하면서 때론 골프도 치면서 여유롭게 말라카 생활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영어는 향상되고 있었지만 우리의 영어실력은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말라카에 와서도 한인교회를 다녔고 쿠알라룸프르에서 살았을 때 처럼 한국 사람들하고만 만나고 있었으니 말이다. 


우리 가정에 급박한 변화가 생겨버렸다.


남편의 한국 쪽 일들이 하나 하나 정리가 되어버렸기때문이다.


한국 쪽 수입원이 줄어들다보니 어려움이 밀려왔다.


2011년 7월, 정말 모든 한국의 수입이 끝이났다. 


이럴 수도 있나 싶을 정도로...


참 힘든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신기한 일을 경험했다.


2011년 4월에 한인교회에서 띠오만 아일랜드라는 아름다운 섬으로 여행을 갔었다. 그때가 바로 저가항공사에서 한국 첫 취항 기념으로 엄청나게 싼 가격으로 프로모션을 한 것이었다.


띠오만에서 우리 가족 한국행 왕복 비행기표를 살 수 있었다. 그때는 우리의 암흑같은 미래에 대해선 까마득히 모르고 정말 싸게 비행기표를 산 것에 대해서만 기뻐했었으니깐...


그래서 우리 가족은 그 비행기표로 8월에 한국에 들어갈 수 있었다. 


참 우연인지 아니면 필연인지…


한국에서 우린 또 다시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했다.


정말 지금 생각해도 식은 땀이 흘러 내릴 정도로 참 막막했다.


한국에서 다시 살아야하나 아니면 말레이시아에서 다시 시작해야하나...


심사숙고 고민 끝에 우린 말레이시아로 다시 향하기로 했다. 힘듦이 있겠지만 그래도 다시한번 부딪혀보자는 마음으로 말이다.




7. 터닝포인트


이제부터 진짜 외국생활이 시작됐고 우리 가족에겐 많은 변화가 필요했다.


어떻게 여기서 먹고 살아야 할 것인가? 아이들을 잘 키워내야하는데…


어떻하지? 어떻하지? 참 생각이 많았다.


남편과 의논 끝에 말라카에 IT회사를 오픈하기로 결정을 했다.


한국의 IT기술은 말레이시아보다 앞서있고 남편의 경력이 밑거름이 되어서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함께 다니면서 사무실을 직접 알아보았고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보기위해서 셀프 인테리어를 했다.


페인트도 다시 칠하고 멋지게 벽화도 그리고 사무실의 모습이 멋지게 갖춰지기 시작했다. 회사 오픈 식때는 쿠알라룸프르와 말라카의 지인분들이 많이 오셔서 축복해주시고 격려해주셨다.


비자도 가디언 비자에서 사업 비자 (워킹 퍼밋)로 바꿨다.


회사가 말라카에 있었기 때문에 일주일에 쿠알라룸푸르를 두 번 이상 다녔고 미팅을 위해 싱가폴도 정말 수시로 가서 고객을 만났다.


참 열심히 동분서주하는 남편을 돕기 위해 말레이시아에서 전업 주부였던 나도 함께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내가 할 수 있는 부분들을 도왔다.


하지만 처음 수 개월 동안 아무런 성과가 없었고 몇 달 동안 수입이 없다보니 지치고 힘들었다. 솔직히 그땐 정말 포기하고 한국으로 들어가고 싶었던 마음이 여러 번 들었다. 하지만 한국에 들어간다고 해도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라서 더 열심히 뛰어보자는 마음을 더 강하게 다잡았다.


열심히 노력했기에 하나 하나씩 계약이 성사되었다.


처음에는 한국 업체들위주로 계약이 성사되었다가 사업을 시작한 지 일년이 넘은 후에 말레이시아에서의 큰 대형 병원의 모바일 앱과 병원 홍보동영상 및 캐릭터 디자인등 다양한 일들을 맡아서 진행했고 현지 회사들의 웹사이트도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정말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면서 회사의 인지도가 조금씩 알려지게 되었다.


남편이 워킹 퍼밋으로 바꾸면서 우리 아이들도 현지 홈스쿨 학교로 옮길 수 있게 되었다. 이 학교의 수업방식은 자율주도 학습 방습이기 때문에 적응 기간이 좀 힘들지만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가 매우 높아서 졸업생들이 좋은 대학을 갈 수 있었다.


예전부터 이 학교에 보내고 싶었지만 가디언 비자로는 우리 아이들을  입학 시킬 수 없었다. 다행히 이번 기회에 아이들 학교를 옮길 수 있었고 학비도 국제학교보다 훨씬 저렴해서 우리에게 큰 이득이 될 수 있었다.


매일 매일 감사하며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하나의 큰 변화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항상 한인교회만 고집했고 한인들만 만나왔던 우리 가족은 큰 결단을 내렸다. 한인교회를 나와서 현지 로컬 영어예배를 드리는 교회로 옮기게 되었다. 목사님 설교를 하나도 알아듣지도 못하고 성도님들과 소통하기 조차 매우 힘들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정말 친절한 현지 교회 친구들이 많이 도와줘서 한 발짝 한 발짝 진짜 말레이시아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언제까지 말레이시아아의 작은 한국에서 살거냐’고 항상 반문했던 터라 이번 도전은 우리에게 물러설 수 없었던 큰 숙제였던 것 같다.


교회를 다녀오면 두통이 너무 심해서 집에 오자 마자 한 두시간씩 누워 있어야만했다. 우리 남편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그래도 한 주도 빠지지 않고 현지 교회에서 열심히 예배드리고 수요일이나 금요일에는 성경공부와 그룹 모임에도 참석하면서 그들과 어우러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한국인이기 때문에 그 친구들은 우리에게 더 친절하게 잘 대해주었던 것 같다.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조금씩 그들과 소통하는 것이 즐거워지기 시작했고 서로의 집을 왕래하면서 각자의 나라의 음식도 함께 나누고 김치 담그는 것도 그들에게 가르쳐주고 다양한 문화 교류를 통해서 정말 힘듦까지도 나눌 수 있는 진정한 친구가 되어가고 있었다.


얼마나 감사하고 감사한지 모른다.


말레이시아에서 5년을 살면서도 영어를 한마디도 못 했던 우리들의 영어가 조금씩 조금씩 향상되고 있음을 우리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8. 꿈틀거리는 꿈을 발견하다.


나는 한국에서 국어선생님이었고 학생들과 함께 할 때 큰 행복을 느꼈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말레이시아에 살면서 내 삶의 행복이었던 것을 잠시 잊고 살았었다.


언제부터인지 다시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문득 들곤했다.


하지만 접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없었으니깐... 여긴 한국이 아니니깐...


‘내가 여기서 뭘 할 수 있겠어?’스스로 반문하고 ‘그렇지, 난 못해.’ 


스스로 대답해버리고 닫아버렸었다.


우연히 대학교수인 한 친구가 나에게 제안을 했다.


“한나(현지 영어이름), 우리 대학에서 한국어 교수 채용하는 데 이력서 한번 내봐. 너 잘 할 것 같은데.. 도전해봐. 내가 담당자 연락처 줄께.”


정말 뛸 뜻이 기뻤다 하지만 무서웠다.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많은 고민과 갈등 끝에 한번 도전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력서와 졸업증명서등 여러 가지 서류를 준비해서 대학 담당자에게 메일을 보냈다.


한 달, 두 달, 세 달... 연락이 없었다. 그럼 그렇지... 나같은 아줌마가 뭘 할 수 있겠어. 많이 슬펐고 자신감이 나락으로 떨어져버렸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고 내가 더 노력해서 당당하게 시작해보겠다는 강한 의지가 생겼다. 그래서 더 열심히 영어 공부를 했고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수업 강의를 들으면서 꾸준히 공부한 결과 한국어 교원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었고 남편의 응원에 힙입어 회사의 미팅 룸에서 저녁 시간에 한국어 수업을 열었다. 특별히 광고는 하지 않았고 그냥 소셜페이지를 만들었다. 


정말 신기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했다.


처음엔 10명이 모였다. 그 다음  달은 20몀, 그 다음 달은 30명이 되었다.


이럴 수가 있을까?


더군다나 그들이 내 한국어 수업을 너무나 좋아하지 않는가?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행복했다. 정말 최선을 다했고 그들과 즐기며 재미있는 한국어 수업을 하기위해 노력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 생각된다.


그렇게 4개월이 흐르고 정말 뜻밖의 메일을 받게 되었다.


이력서를 보냈던 대학에서 파트 타임으로 한 학기 강의를 맡아주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바로 할 수 있다고 답변을 보내자마자 인터뷰 미팅 날짜를 잡게 되었다. 지금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오싹할 정도록 흥분된다.


한국의 KPOP과 드라마를 좋아하는 많은 학생들이 수강신청을 해서인지 한 클래스에 60명씩 3 클래스의 수업에서 180명을 가르쳤다. 


한 학기를 멋지게 최선을 다해서 마칠 수 있게 되었고 정말 감사하게도 교수평가제에서 거의 만점을 받았다.


행복한 마음으로 학생들을 가르쳤고 학생들 또한 정말 행복한 미소를 띄우며 날 봐라봤다. 그 큰 에너지를 받아서인지 하나도 힘들지 않았고 오히려 매 순간 순간 힘이 났다.


대학 측에서도 학생들 반응과 내 수업에 관해 여러가지를 고려했었는지 한 학기 수업을 더 진행해달라고 요청했다.


내 나라 내 땅이 아닌 타국에서 인정받은 느낌이 이렇게 좋을 수가 있으랴... 진짜 행복했다. 날아갈 듯이~~


두 학기를 무사히 잘 마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고 남편 회사에서 한국어를 꾸준히 가르쳤고 일주일에 한 번은 대학의 한국문화동아리 학생들의 요청으로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기초 과정과 중급반인 한국어 능력시험 (TOPIK) 대비반을 오픈해서 가르쳤다.


나의 삶은 180도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찬희 엄마에서 한나 선생님으로 말이다. 


그리고 대학측으로부터 또 다시 믿기지 않는 소식을 받게 되었다.


정식 한국어교수로 채용하고 싶다고 말이다.


정식 채용 인터뷰 때는 희망 급여와 직원 복리등도 꼼꼼히 체크해서 더 자신감있게 내 의견을 말 할 수 있는 여유까지 생겼다.


감사하게도 현재까지 이 대학교에서 정식 한국어교수로 재직 중이고 한국어와 한국 문화 수업을 하고 있고 특별히 주말에는 대학생 사물놀이팀을 결성하여 한 달에 두번 씩 한국의 전통 사물놀이를 가르치고 있다. 또한 내가 가르친 많은 학생들이 한국어능력시험 (TOPIK)에 합겨해서 한국어자격증까지 취득해서 정말 큰 성취감을 느꼈다.


다양한 한국 문화 행사를 진행했고 특별히 작년에는 한국 KPOP팀을 우리 대학으로 초대해서 멋지고 화려하게 KPOP콘서트를 했고 내가 직접 가르친 현지 대학생 사물놀이팀도 KPOP 콘터트 오프닝 공연때 솜씨를 발휘할 수 있었다.


한국의 위상이 점점 높아짐으로 인해 한국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날이 늘어나고 있음에 자부심을 느끼며 매일 매일 살아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나의 베스트프랜인 우리 남편은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었다. 


그림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사람이었지만 가족의 생계를 위해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살았었다. 하지만 그는 사업을 하면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고 틈틈히 그림을 그렸기에 지금은 세계 유네스코에 등록된 말라카의 정코스트리트에서 그의 벽화를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말라카의 대형 병원인 오리엔탈 병원 로비에는 그의 대형 작품이 5개나 걸려있다. 각 그림마다 Korean artist Peter Chun 전성규라는 사인이 새겨져있다. 많은 병원 방문객들이 그 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고 그 장소는 제법 유명해지고있다. 때론 내 친구들이 남편 그림 앞에서 사진을 찍고 나한테 인증샷을 보내면서 드디어 너의 남편 그림 봤다고 하며 메세지를 보내곤 한다. 말레이시아에서 아트의 꿈을 이룬 우리 남편이 정말 자랑스럽다.


아이들도 정말 바르고 건강하게 잘 자라주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큰 아들 찬희는 작년에 영국의 중고등과정(IGCSE)을 좋은 성적으로 통과해서 현재 쿠알라룸프르에 있는 대학에 그래픽디자인과에 입학했다.


말레이시아 대학의 가장 큰 장점인 트위닝 프로그램으로 공부하고 있어서 3년은 말레이시아에서 1년은 해당 트위닝과 연계되어진 영국에 있는 대학에서 마치게 될 것이고 졸업장도 그 영국의 대학에서 받게 된다.


그래서 더 열심을 다해서 공부하고 있고 우리 귀염둥이 막내 준희는 홈스쿨 인터네셔날 스쿨에서 Year 8 한국으로 하면 중 2과정을 공부하고 있다.


한국보다 1년이 빠른 과정으로 공부하고 있고 형 처럼 IGCSE 시험을 치르고 트위닝 프로그램으로 미국에서 멀티미디어를 공부하고 싶어한다.


아이들이 한국에서 살았다면 이렇게 꿈을 가지고 자유롭게 살 수 있었을까 생각을 해본다. 말레이시아에서 벌써 12년이 흘렀다. 희노애락과 수많은 좌절로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래도 사랑하는 가족이 함께 있었기에 함께 꿈을 꿀 수 있었다.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질문한다. 왜 말레이시아에 왔냐고 그리고 말레이시아 어떠냐고..


그럼 난 대답한다. 운명처럼 말레이시아에 오게 됐고 우리의 제2의 고향이라고...  앞으로 찬란하게 더 빛날 우리의 미래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