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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최초로 한반도의 하늘을 날았던 비행사 안창남
작성일
2020.05.08

한국인 최초로 한반도의 하늘을 날았던 비행사 안창남

1922년 12월 10일... 서울 인구1/6이 모여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한국인 최초로 한반도 하늘을 날았던 안창남의 곡예비행을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의 비행은 일제 강점기 암울한 우리 민족에게 긍지와 희망을 불어넣었습니다.

안창남의 비행 인생은 그의 나이 16살 때 미국인 아트 스미스의 곡예비행을 본 후로 시작되었습니다. 용산에서 한국최초로 곡예비행을 선보인 아트스미스 나도 비행인생을 살 테야!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1919년 도쿄 아카바네 비행기 제작소 기계부에서 비행 조정 기술을 배운 뒤, 도쿄 오쿠리 비행학교에 입학하여 3개월 만에 졸업하는 뛰어난 실력을 보였습니다.

일제강점기, 조선사람이 비행사가 되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20세기 과학 문명의 자랑거리인 비행기에 대해서 우리 조선 사람으로 첫 이름을 날린 사람은 당년 20세의 청년으로 귀신같은 재주를 가진 안창남군이라.  -1921년 7월 11일 동아일보 기사 中- 하지만 안창남은 뛰어난 비행실력으로 1921년 일본 민간 비행사 시험을 1위로 통과했고 민간항공대회에서 2위로 입상하며 세간에 이름을 알렸습니다.

그의 활약이 알려지면서 고국에서는 그를 직접 보고 싶다는 열망이 솟구쳤습니다. '안창남 모국방문 대비행회'개최 소식이 발표되었고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은 기대와 희망으로 들썩였습니다. 경성의 하늘! 경성의 하늘! 내가 어떻게 몹시 그리워했는지 모르는 경성의 하늘! 이 하늘에 내 몸을 내리울 때 내 몸은 그저 심한 감격에 떨릴 뿐이었습니다. (중략) 참으로 일본서 기두(機頭)를 서천(西天)으로 향하고 보이지도 않는 이 경성을 바라보고 오고 싶은 마음에 가슴을 뛰노이면서 몇 번이나 눈물을 지웠는지 알지 못합니다. -비행 후 안창남이 쓴 '공중에서 본 경성과 인천' 中- 1922년 12월 10일. 안창남은 비행기 '금강호'를 타고 한국인 최초로 서울의 하늘을 날았습니다.

그러나 안창남은 단순한 비행사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에서 재일 조선인의 학살을 지켜봐야 했던 그는 한가지 큰 결심을 하게 됩니다. 관동대지진 당시 사진 오쿠리 비행학교가 파괴되자 국내 신문들은 안창남의 사망설을 크게 보도하기도 했다. 자신의 뛰어난 재능인 비행 기술을 항일독립운동에 바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1925년 중국으로 망명한 안창남은 대한독립공명단에 가입했고 비행대 설립을 위한 자금을 쾌척하기도 했습니다. 운남항공학교 훈련기 사진 또한, 중국 군벌 옌시산 휘하에 들어가 항공중장과 산서 비행학교장으로 비행기술을 가르치며 조국 독립을 열망했습니다.

29세의 짧은 생을 살았지만 조국광복을 열망하던 동포들에게 한 줄기 희망이 되었던 안창남. 치열했던 삶과 조국의 독립운동이라는 묵직한 발자취를 남긴 그는 우리 가슴속에 오랫동안 기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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