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외동포기자 24시

답답한 듯 명랑하고 속 깊은 필리피노의 대표 음식 " 레촌"
작성일
2021.06.14

답답한 듯 명랑하고 속 깊은 필리피노의  대표 음식 " 레촌"


답답한 듯 하지만 명랑하고 속 정 깊은 필리피노의 반전 매력

바삭한 껍질에 육즙과 풍미 가득한 레촌과 어울려!


가깝게 지내는 한 필리피노 의사에게 물었다.
그는 젊은 필리피노이면서 수 년간 한국인들을 아주 많이 진료한 베테랑이다.
자신도 중산층 이상이지만 집안도 빠지지 않아, 이런 사람들이 필리피노와 한국인을 어떻게 비교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에게 한국인의 특징과 필리피노의 특징을 딱 한 단어 씩으로 정의해 보라며 웃었더니, 평소 늘 하고 있었던 생각이라며, 한국인은 ‘빨리빨리’, 필리피노는 ‘Talkative’라고 말한다.


십 수 년간 필리핀에서 살면서 나 역시 이 나라 사람들에게 느낀 가장 큰 장점은 정말 명랑하다는 것이다.
잘 웃고 시끌벅적하고 또 수다스럽다.
늘 흥겹고 음악과 노래, 춤을 사랑하고 끼도 많다.
지금이야 코로나19 때문에 필리핀에서도 많은 모임이 축소되고, 미뤄지곤 한다.
하지만 필리핀에서 지내다 보면 사소한 가족모임이라도 스무 명 정도는 가볍게 모이고, 회사나 직장에서도 ‘Team Building’이라는 워크숍 비슷한 모임으로 먹고 마시는 모임이 아주 흔하다

.

그리고, 이렇게 모이는 크고 작은 모임이나 잔치에서 꼭 빠지지 않는 것이 있다면 Lechon(레촌)이다.
회사에서 직원들에게 Team Building을 위한 예산을 짜라고 맡겨 놓으면, 전체 예산이나 식비 예산과 아예 별도로 Lechon비용을 따로 떼어 놓기도 한다. 꼭 필요하니 비용을 들여 준비해야 한다는 뜻이다.


필리핀 세부의 대표음식 "  레촌 "

필리핀 세부의 대표음식 "  레촌 " 


레촌은 특히 세부지역의 것을 필리핀 내에서도 으뜸으로 친다.
작년 크리스마스 즈음 마닐라에서 지인이 굳이 떡을 해서 선물로 보냈다고 그래서 공항 카고에 픽업을 하러 갔는데, 무려 200마리 이상의 레촌이 종이 포장에 말려 마닐라행 비행기 탑승을 대기하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크리스마스 같은 특수 기간에는 세부에서 레촌만 실어 나르는 항공편이 별도로 마련된다고 해서 정말 놀랐다.

세부는 마닐라와 같은 대도시에 비하면 한참 변방에 지방도시이지만, 필리핀 최고의 레촌을 언제라도 맛볼 수 있으니 이런 점은 행운이라 해야 할까.


필리핀 세부의 대표음식 "  레촌 "  오랜시간과 공이 드는 슬로우 푸드 " 레촌 "

오랜시간과 공이 드는 슬로우 푸드 " 레촌 " 


레촌은 가장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통돼지 바베큐이다.
요즘은 레촌 전문점도 생기고 킬로당 잘라 파는 집도 여럿이고, 푸드판다나 다른 배달 서비스를 이용하면 집에서도 간단히 접할 수 있지만, 사실은 오랜 시간과 공이 드는 슬로우 푸드이다.


잔치가 있기 이틀 전쯤이면 호스트는 레촌을 구울 준비를 해야 한다.
필리핀은 돼지 사료로 쓸 여물도 비용이 들기 때문에 돼지를 크게 키우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덕분에 필리핀 돼지고기는 어디보다도 늘 맛이 있다.
레촌에 쓰는 돼지 역시 생후 2주~6주된 어린 돼지를 사용한다.
그래서 지방은 적고 고기는 아주 연해지는가 보다.



전통방식으로 굽고 있는 통돼지 구이  " 레촌"

전통방식으로 굽고 있는 통돼지 구이  " 레촌" 


전통적인 방식은 통돼지 몸통에 굵고 기다란 대나무 막대를 꽂아 넣는 것이다.
대나무 막대를 안쪽으로 질러 넣기 전에 구우면서 갈라지지 않도록 돼지의 배꼽 부분을 자른다.
그리고 돼지의 앞발과 뒷발을 대나무에 잘 묶어 단단히 고정시킨다.
집집마다 비밀의 레시피가 있는 소금, 향신료, 허브, 코코넛 등을 준비해 발라가며 굽게 된다.
내장과 피를 빼고 텅 빈 돼지의 뱃속에도 레몬그라스와 같은 허브와 향신료를 잔뜩 집어 넣는다.
필리핀에서는 다른 어떤 연료보다 석탄이 흔한데, 석탄은 그냥 봉지봉지 담아 소분하여 팔기도 한다.
레촌은 이런 석탄의 은근한 불 위에서 최소한 5시간이상 돌려가며 고루 익힌다.

가정의 뒷마당에서 굽다보면 12시간 굽는 일도 흔하다.
레촌을 굽는 사람은 석탄에서 50센치미터 가랑 들어 올려진 장대에 꿰인 돼지를 종일 땡볕에서 숯불의 열기를 견뎌가며 천천히 돌린다.
껍질이 먹음직스러운 갈색이 되어 바삭바삭해지면 돼지 내부에 온도계를 넣어 온도를 확인하고 보통은 차림 상에 통째로 얹어 내게 된다.
그러면 레촌을 배분하도록 역할을 맡은 이가 참석자들에게 머리를 먼저 자른 레촌을 조각조각 잘라 접시에 담아 주게 된다.



필리핀 세부의 대표음식 "  레촌 "

레촌을 받기 위해 줄을 서는 이들은 저마다 껍질을 더 달라, 이쪽 부위를 달라 하며 하하호호 즐겁고 시끌벅적한 잔치 분위기를 즐긴다.
역시 가장 인기가 있는 부분은 레촌의 바삭한 껍질과 뼈째 붙은 갈빗살 부위이다.

돼지 한 마리 분량의 레촌이 행사나 모임이 끝날 때까지 제공되다보면, 아무래도 퍽퍽한 살 부위나 머리, 발 등은 남기 마련이다.
그래서 또한 필리핀에는 남은 레촌을 이용한 다양한 요리들이 발달하기도 했다.
레촌 카왈리, 레촌 팍시우, 레촌 아사도 등이 레촌을 이용한 또 다른 요리가 되어 잔치 다음날 상에 오른다.  



필리핀 세부의 대표음식 "  레촌 "
통돼지 바비큐는 사실 특별할 것이 없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전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음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필리핀의 레촌은 스페인 식민시대를 겪으면서 스페인식 통돼지 바비큐를 필리핀 오랜 전통의 방식으로 조리하며 인가와 맛을 더한 훌륭한 요리이다.
필리핀이나 세부를 방문해 새로운 친구를 만났다면, “당신이 알고 있는 레촌 맛집은 어디입니까?”라고 물어보자.
필리핀 사람이라면, 그리고 진정한 세부아노라면 자기만이 알고 있는 레촌 맛집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지금 글을 쓰는 기자의 머리속에도 통돼지 레촌이라면 어디어디, 킬로로 잘라 파는 레촌을 먹어야 한다면 어디어디 라며 손꼽아지는 레촌 맛집의 목록이 있다.
레촌의 바삭한 껍질과 함께 육즙이 꽉 잡힌 갈빗살 부근의 촉촉하고 연한 고기를 꼭 맛보시는 행운이 있기를 바란다.


김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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