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역사는 절대 되풀이 되어서도, 잊혀서도 안 된다"
‘위안부, 흩어진 조선 여인들’ 사진전 부에노스 아이레스 구 ESMA에서 개최
지난 3월 14일 오후 6시. 아르헨티나는 62년만의 때 아닌 폭염이 2주 넘게 지속되는 가운데 곳곳에서 물 부족과 정전사태가 빚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더위를 무색케 할만큼의 열정으로 가득한 곳이 있었습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 Núñez 지역에 소재한 ‘기억과 인권을 위한 공간’ (Espacio Memoria y Derechos Humanos, ex ESMA) 내 ‘정체성을 위한 집’ 내부 ‘오월 광장 할머니들을 위한 방’이 그곳입니다. 체감온도 40도에 육박하는 더위지만 냉방시설도 없는 이곳에 입추의 여지도 없이 참석자들이 몰려 들어 복도와 뜰까지 선 채로 강사들의 발언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바로 ‘위안부, 흩어진 조선여인들’ 이라는 사진전이 개막하는 순간으로 에스뗄라 데 까를로또 오월광장 할머니회 대표의 단호한 마지막 말에 참석한 모든 이들이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사진전은 여성과 기억의 달인 3월을 맞이하여 현지 비정부 인권단체 ‘오월광장 할머니회’, 위안부에 관하여 현지 최고의 전문가로 꼽히는 마리아 삘라르 알바레스(CONCET, 국가과학기술원 연구원) 및 파울라 산소네 큐레이터, 생존 위안부들을 위한 ‘나눔의 집’ 역사박물관 직원이자 사진작가인 야지마 츠카사, 재아한인회 등 한∙아∙일 3국의 민간단체 및 현지 인권단체가 공동으로 기획하였고 한인기업 피보디 社(대표 최도선)의 후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위안부에 관하여 피해당사국인 한국, 위안부의 존재를 공식 부인하고 있는 가해당사국 일본, 제 3자인 아르헨티나 국적을 가진 민간인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전시회로 사정에 밝지 못한 현지인들로서는 다소 난해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권은 국가, 인종, 성별, 종교를 초월하여 인류가 추구해야 할 공통의 과제이며 반인권 행위는 국가이익을 위한 일일지라도 결코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주최자들 사이에 형성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야지마 츠카사는 청년기부터 현재까지 삶 전체를 일본군들에 의해 저질러진 포로학대 사건을 조사하고 알리는데 전념해 온 일본인 사진작가로 생존 위안부들의 평범한 일상에 포커스를 맞춰서 피해자로서의 어둡고 침울한 삶이 아닌 평범한 이웃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사진전에는 이수단, 박서은, 박우득, 김의경 할머니들의 노년의 삶이 담겨 있는데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의 모습을 통해 역설적으로 전쟁이 한 인간의 삶에 남기는 비인간성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동아시아 근대사에서 은폐됐던 위안부할머니의 존재를 찾아 오랫동안 사진으로 기록했으며 한국, 중국, 필리핀, 대만 등을 가리지 않고 흩어져 살고 있는 잊혀진 여인들의 모습을 되살리는데 주력했습니다.
“나는 11명 자식 중 막내였다. 대부분의 형제들은 어린 시절 사망했고 가족을 돌보기 위해 식당에서 일을 했는데 가족이 직업소개소에 나를 팔았고 결국은 중국에 위안부로 오게 됐다. 전쟁 후 한국으로 돌아가기를 원했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다”. 1937년 위안부로 강제로 납치된 이후 꿈에 그리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중국 훈춘에서 사망한 박서은 할머니의 말입니다. “아직도 나는 중국음식보다 한국음식이 더 좋다. 하지만 한국말은 잊어 버린지 오래다”고 이수단 할머니의 고백입니다. 그는 18세이던 1940년에 일본군에 의해 납치되어 중국 시멘수에 성노예로 끌려간 후 영영 고국 땅을 밟아보지 못했습니다. 전시된 사진 중에 손수건으로 얼굴을 덮은 여인의 사진이 있는데 고국이 그리워 우느라 흐르는 눈물을 훔치던 이수단 할머니가 주인공입니다.
이날 개막식에 참석한 이들은 재아한인회, 한국학교(ICA) 등 한국인들도 적지 않았지만 현지인들이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했습니다. 아르헨티나 언론인들, 인권단체 관계자들, 한국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위안부, 성노예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며 이런 역사가 어떻게 묻힐 수 있는가 의아해 하며 일반에 적극적으로 알려져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았습니다. 아르헨티나는 1976-1983년 군부독재로 무고한 인명이 납치, 감금, 살해, 고문당한 과거가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인권에 대한 감수성이 유달리 높은 나라에 속합니다. ‘오월 광장 어머니회’, ‘오월 광장 할머니회’가 있고 이들은 아르헨티나에서 벌어지는 인권유린 행위 규탄에 앞장서 온 단체들입니다.
‘오월 광장 할머니회’는 지난해 11월 25일 ‘세계여성 폭력추방의 날’을 맞이하여 2차 대전 때 일본군대의 성노예로 희생되었던 조선인 여성 피해자들을 상징하는 ‘평화의 소녀상’을 ‘기억과 인권을 위한 공간’ 대지에 설치하려 했으나 일본정부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에스뗄라 대표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에 반드시 ‘평화의 소녀상’을 세우겠다”고 결연한 의지를 내비쳤습니다. 그는 이번 사진전을 통해 지우려 했던 위안부 성노예의 만행이 일반에 알려지는 것을 시작으로 목표에 조금씩 다가가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기억과 인권을 위한 공간’은 과거 해군사관학교로 군부독재 기간 저질러진 전체주의와 억압의 상징으로 국가에 의해 저질러진 공포정치의 명백한 증거이자 살아있는 고발장이기도 합니다. 현재는 기억의 공간으로 변모하여 인권과 민주주의 문화를 공고히 하기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하였습니다.
전시회는 3월 15일부터 5월 31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기억과 인권의 장소’ 내 (구 ESMA, AV. Libertador 8151), ‘정체성을 위한 집’ (CASA Por la Identidad)에서 개최되며 입장료는 무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