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통신원 소식

머나먼 충칭 치장 독립운동가 이동녕 선생의 흔적을 찾아
구분
사회
출처
KOFICE
작성일
2021.08.26

코로나19의 여파로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 총사령부 등의 시설이 9일부터 잠정 폐관됐다. 광복절을 앞두고 현재 코로나19 감염 확산을 우려해 공식적인 행사도 취소된 가운데, 통신원은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한국인에게는 무척 의미있는 곳을 소개하고자 치장(綦江, 기강)으로 떠났다. 치장취(綦江区)는 충칭 중심지역으로부터 70-80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충칭시의 남부에 속한다. 치장은 장창(长江) 상류의 남안지류(南岸支流)로 꾸이조우성(贵州省)과 충칭시에 걸쳐져 있다.


<언덕 도로 옆 편 공터에 오랜 옛 모습으로 남아있는 이동녕 선생의 생가는 현재 내부에 아무것도 없는 폐가이다.>

<언덕 도로 옆 편 공터에 오랜 옛 모습으로 남아있는 이동녕 선생의 생가는 현재 내부에 아무것도 없는 폐가이다.>


<치장의 임시정부는 이미 개발로 인해 철거 되었고 이동녕 선생 생가는 철거위기를 모면하긴 했지만 갈 길은 아직 멀어 보인다.>

<치장의 임시정부는 이미 개발로 인해 철거 되었고 이동녕 선생 생가는 철거위기를 모면하긴 했지만 갈 길은 아직 멀어 보인다.>


<2019년 충칭 한인상회 회장과 운영진의 건의와 노력으로 만들어진 기념비. 하지만 그 외에도 수많은 정비계획이 필요해 보였다.>

<2019년 충칭 한인상회 회장과 운영진의 건의와 노력으로 만들어진 기념비. 하지만 그 외에도 수많은 정비계획이 필요해 보였다.>


<가까이 가서야 누군가 이미 이 멀고 찾기 힘든 곳을 방문하여 헌화한 것을 알고 감동과 고마움을 느꼈다.>

<가까이 가서야 누군가 이미 이 멀고 찾기 힘든 곳을 방문하여 헌화한 것을 알고 감동과 고마움을 느꼈다.>


이곳에 바로 대한민국 독립운동에 있어 우리가 꼭 기억하고 감사해야 할 이동녕 선생의 생가가 있다. 석오 이동녕 선생은 1869년 현재 충남 천안시에서 교육자 이병옥의 장남으로, 양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근대적 사상을 갖춘 인물로서 이동녕은 계몽운동의 필요성을 느끼고 광성학교에서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1896년 독립협회에 합류하여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의 길을 걷게 된 이동녕 선생은 기독교 정신에 입각하여 YMCA 운동을 시작했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대한문 앞에서 일제를 규탄하는 농성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동녕 선생은 20여 년 동안 임시정부를 이끌고 김구, 안창호 등과 함께 임시정부의 여당인 한국독립당을 창당하는 등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쳤다. 1940년 해방을 보지 못하고 지병인 천식이 폐렴으로 악화되어 순국하였다. 선생은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민족단결을 강조하여 임정 산하의 정당을 통합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고, 선생의 유언에 따라 임정 산하의 정당들이 하나로 통합되었다.


<치장박물관은 국가 3급 박물관이다.>

<치장박물관은 국가 3급 박물관이다.>


치장에서 대한민국 독립의 흔적을 더 찾아보기 위해 치장박물관을 방문하였다. 치장박물관은 종합박물관으로 2층은 치장의 지질학적 연구 자료를 전시하고 있고, 3층은 치장의 역사에 대한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총 9,967㎡의 면적, 건축면적은 3,700㎡의 비교적 소규모 박물관이지만 3층의 역사관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활동에 대한 사진 자료들을 비교적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이곳에서 현재는 치장구의 개발로 사라진 치장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련 전시는 별도의 공간에서 전시되고 있었다. 왼편의 큰 사진이 지금은 볼 수 없는 철거된 치장의 임시정부 건물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련 전시는 별도의 공간에서 전시되고 있었다. 왼편의 큰 사진이 지금은 볼 수 없는 철거된 치장의 임시정부 건물이다.>


<충칭은 지질학적으로 연구가치가 높은 곳이 많다. 2층의 치장 지질전시관>

<충칭은 지질학적으로 연구가치가 높은 곳이 많다. 2층의 치장 지질전시관>


이동녕 선생의 생가는 본래 철거 위기에 있다가 지방정부와 대한민국 정부 및 민간단체들의 여러 노력으로 현재 보존 되어 있는 상태이며 충칭 한인회장을 비롯한 운영진들의 노력으로 생가 앞에 조그만 기념비를 세워놓아 이곳이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희생한 이동녕 선생의 생가임을 증명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 이미 한차례 변화를 겪었던 이곳은 현재 다시 재개발이 일어나고 있다. 이동녕 선생의 생가는 언덕길 아래 치장 옆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 양옆으로는 이미 지어진 지 오래된 빈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이동녕 선생의 생가 주변과 앞에 길들은 주차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여러 대의 차들이 어지럽게 주차되어 있었다.

 

현재도 주변에 재개발 중임으로 이 지역 또한 재개발 얘기가 다시 나올 확률이 많아 보였다. 주변으로 잡초가 우거지고 쓰레기가 방치된 것으로도 치장구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음도 알 수 있었다. 분명 중국 지방정부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곳이 현존할 수 없었을 테지만 그것에만 의존한다면 언젠간 치장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같이 철거되지 말란 보장도 없을 것이다.

 

광복절이 되면 매년 항상 곳곳에서 많은 행사들이 열린다. 이런 행사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잊고 있었던 것 혹은 점점 잊혀져 가는 곳을 다시금 찾아보고 점검해보는 것도 중요할 것 같다.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당연한 듯 같지만 많은 선열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졌다. 역사의 흔적은 코로나19로 모두가 힘든 시기, 끈기와 인내에 도움을 줄 것이다.


※ 사진 출처 : 통신원

※ 참고자료
국가보훈처 공식 블로그 :  https://blog.naver.com/mpvalove/222091904254
綦江博物馆_百度百科 :  https://mbd.baidu.com/ma/s/8xYIw5E7


한준욱

성명 : 한준욱[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중국(충칭)/충칭 통신원]
약력 : 현)Tank Art Center No41.Gallery Director 홍익대 미술학과, 추계대 문화예술경영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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