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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분석] 말레이시아 의원, 청소년 자살 이유는 “한국드라마·영화”...누리꾼 황당한 반응
구분
사회
출처
KOFICE
작성일
2021.10.25

최근 말레이시아 국회에서 한국 드라마와 영화가 청소년 자살을 조장한다는 주장이 제기돼 누리꾼들이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지난 10월 13일 말레이시아 국회에서 인민정의당(PKR) 파드흐리나 시덱 의원은 청소년 정신 건강 문제가 심각하다고 발표했다. 시덱 의원은 국제연합아동기금(UNICEF) 보고서를 인용하며 “말레이시아 13세~17세 청소년의 18.3%가 정신 건강 문제를 지니고 있다”며 “청소년의 자살은 국가적 차원에서 큰 손실이다”고 말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말레이시아 청소년의 사망원인 2위는 자살이며, 15~18세 사이에 자살률이 51%로 가장 높다.

 

그러자 범말레이시아이슬람당(PAS) 모하드 아판디 상원 의원은 “한국 드라마와 한국 영화가 청소년 자살에 영향을 끼친 것에 동의하느냐”고 발언했다. 그는 “(한국 드라마와 영화) 모든 이야기에 자살에 대한 줄거리가 있다...동의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실패했을 때 자살한다. 실패, 그리고 나서 자살. 한국 드라마가 청소년의 자살을 조장한 것 아니냐?”고 질문했다. 이에 의사 출신인 시덱 의원은 “자살 원인은 다양하다”며 다른 요소들을 배제할 수 없다고 답했다. 하지만 “자살에 대한 미디어의 묘사는 강력한 전파력을 갖고 있기에 세계보건기구(WHO)의 기준을 지켜야 한다”고 덧붙였다.


<모하드 아판디 상원 의원의 국회 발언을 기사화한 현지 언론 - 출처: 'Free Malaysia Today'>

<모하드 아판디 상원 의원의 국회 발언을 기사화한 현지 언론 - 출처: 'Free Malaysia Today'>


모하드 아판디 의원의 발언에 말레이시아 누리꾼들은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한 누리꾼은 “국회에서 청소년 자살 예방 대책을 마련한 것이 아니라 한국 영화나 드라마를 엮어 본질을 흐렸다”고 비난했다. 또 다른 트위터 사용자는 “청소년들이 대인관계, 학업, 가족 간 갈등 등의 문제를 겪고 있지만 이에 대해서는 언급도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누리꾼들은 한국 드라마가 오히려 청소년 정신 건강에 도움을 준다고 반박했다. 누리꾼 A씨는 “한국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는 정신 건강의 중요성을 강조한다”고 했고, 누리꾼 B씨는 “2006년에 제작된 <찌짝맨>을 보고 난 뒤에 도마뱀이 됐다”고 말했다. 찌짝은 말레이어로 도마뱀이라는 뜻으로, 시청자들이 영화나 드라마를 본 그대로 따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꼬집은 것이다. 또한 누리꾼 C씨는 “나는 <사이코지만 괜찮아>를 보며 힘든 시기를 이겨냈다”고 했고, 누리꾼 D씨는 “<도깨비>의 공유와 이동욱 덕분에 내가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이다”고 트윗을 남겼다.


<한국 드라마가 정신 건강에 도움을 줬다고 반박하는 누리꾼 - 출처: 'Says'/트위터(@hmetromy)>

<한국 드라마가 정신 건강에 도움을 줬다고 반박하는 누리꾼 - 출처: 'Says'/트위터(@hmetromy)>


누리꾼들만이 아니라 동료 의원들도 모하드 의원의 발언을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민주행동당(DAP) 켈빈 이 의원은 “도대체 모하드 의원은 어떤 한국 드라마를 본 것이냐”며 “의원의 발언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에 문제를 단순화하여 축소할 뿐이다”는 트윗을 남겼다. 자살은 가볍게 다룰 주제가 아니라는 지적도 이어졌다. 누리꾼들은 “아무런 근거나 통계자료 없이 자살 문제에 대해 발언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며 “이러한 사람들이 권력을 갖게 되면 말레이시아는 끝장이다”고 비난했다

<모하드 아판디 상원 의원의 국회 발언에 대한 누리꾼들의 부정적인 반응 - 출처: '하리안 메트로' 공식 트위터(@hmetromy)>

<모하드 아판디 상원 의원의 국회 발언에 대한 누리꾼들의 부정적인 반응 - 출처: '하리안 메트로' 공식 트위터(@hmetromy)>


그동안 자살에 대한 미디어의 묘사가 자살 충동을 자극하는 ‘베르테르 효과(Werther effect)'를 유발할 수 있다는 점은 사회적 문제로 지적돼왔다. 대표적으로 2017년 넷플릭스 드라마 <루머의 루머의 루머>가 방영된 이후 미국 내 10대 청소년의 자살 건수가 급증했다는 연구가 발표됐다. 연구에 따르면 드라마 방영 1개월 후 190명의 청소년이 자살해 19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 기간에 자살한 청소년들이 실제로 이 드라마를 시청했는지, 자살에 영향을 준 요소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은 말레이시아 10대 청소년들이 한국 드라마를 시청했는지 드라마와 자살률의 직접적인 인과관계 역시 연구된 바가 없다. 오히려 전문가들은 코로나 장기화에 따른 우울증과 정신 건강 부문에 대한 지원 부족으로 청소년 자살이 증가했다고 분석한다. 말레이시아 경찰청(PDRM) 자료에 따르면 2019년 1월부터 2021년 5월까지 집계된 자살 건수는 1,708건으로 이 중 51%인 872명이 15~18세 청소년이다. 2019년 기준 자살 건수는 월 평균 51건에 불과했지만, 코로나19가 발생한 이후인 2021년 1월부터 5월 사이에는 자살 건수가 월 94건으로 2019년 대비 84.31% 증가했다.

 

말레이시아 청소년들의 정신건강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지만, 예산과 치료기관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국제연합아동기금의 2019년 조사에 따르면 정신질환을 경험한 말레이시아 아동 및 청소년 숫자는 42만 4천명으로 집계됐다. 이 중 절반이 14세부터 정신 질환이 생겼고 75%는 20대 중반까지 발병했다고 답했다. 하지만 말레이시아 전체 보건 예산 중 정신건강 분야 예산은 약 1%에 불과하다. 이는 다른 국가 평균인 2.8%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치다. 또한 세계보건기구는 인구 1만명당 정신과 전문의 1명이 필요하다고 권장하고 있지만, 말레이시아의 정신과 전문의는 2018년 기준 410명으로 인구 10만 명당 1.27명에 불과하다. 

 

전 세계적으로 한류 열풍이 지속되고 있지만 한류 콘텐츠를 경계하는 움직임도 여전하다. 특히 상업적이고 자극적인 문화를 경계하는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한류에 대한 거부감이 나타난다. 이에 말레이시아에서도 일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한류가 동성애를 조장하고, 청소년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해왔다. 모하드 아판디 의원이 소속된 범말레이시아이슬람당(PAS)이 이슬람 원리주의 정당이라는 점에서도, 그가 명확한 근거 없이 한국 드라마와 영화가 자살을 조장한다고 발언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다만 한국 미디어의 자극적인 묘사가 청소년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염두에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넷플릭스 측은 드라마가 자살을 조장한다는 지적에 자살을 묘사한 장면을 삭제하고, 자살예방 상담전화 등을 안내하는 등 다양한 대비책을 마련했다. 이처럼 한국 미디어도 연출 장면들이 일부 청소년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폭력, 자살 등의 위험 행동을 묘사하는 방식을 신중히 할 필요가 있다. ‘파파게노 효과(Papageno effect)'에 따르면 미디어가 자살을 전하는 보도방향만 신중하게 바꿔도 자살을 예방할 수 있다고 알려졌다. 미디어는 자살을 미화하거나 조장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사회적 문제에 주목하게 만들 수 있다. 미디어의 영향력으로 청소년들은 우울증이나 자살 등 주제로 대화를 시작할 수 있고, 사회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 미디어들의 역할이 커진 만큼 위상에 걸맞는 사회적 책임감이 필요하다. '나 자신을 사랑하라(Love Myself)'고 외친 방탄소년단이 전 세계 청소년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친 것처럼, 사회를 더 긍정적으로 바꿔줄 한국 드라마와 영화의 등장을 기대해 본다. 


※ 참고자료

《Says》 (21. 10. 14.) <PAS Senator Implies K-Dramas Lead To High Suicide Rate Among Teens In Malaysia>, https://says.com/my/news/pas-senator-implies-k-dramas-may-lead-to-high-suicide-rate-among-teens-in-malaysia

《Free Malaysia Today》(21. 10. 14.) <PAS senator draws flak for linking teen suicides to K-dramas>,https://www.freemalaysiatoday.com/category/nation/2021/10/14/pas-senator-draws-flak-for-linking-teen-suicides-to-k-dramas/

Unicef. (21. 7. 1.) <Statement on deaths by suicide among children>, https://www.unicef.org/malaysia/press-releases/statement-deaths-suicide-among-children

《New Straits Times》(20. 10. 10.) <Almost 500,000 Msians depressed; nearly 500 suicide attempts this year>, https://www.nst.com.my/news/nation/2020/10/631154/almost-500000-msians-depressed-nearly-500-suicide-attempts-year


홍성아

  • 성명 : 홍성아[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말레이시아/쿠알라룸푸르 통신원]
  • 약력 : 현) Universiti Sains Malaysia 박사과정(Strategic Human Resource Manag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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