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좌표 없는 이방인의 나라
작성일
2022.01.12

단편소설 - 가작

좌표 없는 이방인의 나라

최 승 현 [러시아]


그는 모국어를 썼다. 작은 목소리로 흥얼거리던 찬송을 멈췄다. 맥주를 홀짝이는 나를 흘긋거리며 식료품점으로 들어갔다. 검은 비닐봉투를 든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 다. 어렴풋이 가사가 기억났다.


‘주 말씀 성경에 찬란히 빛나고 내 길에 등불 되니 늘 찬송하리라’


광고성 스팸 메시지 사이에 그가 보낸 문자가 있었다. 메신저 아이디는 맛디아, 프 로필 배경사진은 십자가였다. 마지막 문자 발송일은 2019년 7월 3일. 2018년 초 한 국에 간다고 안부 전화가 왔었다. 잊고 지냈던 이름 림호철. 그는 해외 파견 북한 건 설 노동자로 러시아에서 난민 지위를 인정받고 한국에 정착한 탈북민이었다.


2018년 3월 14일
‘최 형 잘 지내지요? 남녘은 봄인데 모스크바는 아직 겨울이지요? 두드키노 동무들 은 일 없지요?’


그는 상당한 시간 간격을 두고 띄엄띄엄 문자를 보내왔다. 억양 강한 북한 말투가 귓속에서 맴돌았다. 임시 망명 신분으로 2년을 모스크바에서 거주했다. 2016년 입국 사증 발급을 러시아 한국 공관에 신청했지만 한 달 후 러시아와 북한이 ‘북러 불법체 류자 송환 협정’을 체결하면서 외교적 마찰을 우려한 대사관은 북한 난민에 대한 사증 발급을 무기한 연기했다. 림 씨는 공식 망명 체류 기간을 포함 2년간 모스크바에서 체류했다.


나와 림 씨는 두드키노에서 3개월간 함께 지냈다. 두드키노는 다차(별장)와 다가 구 주택이 즐비한 전원 마을이었다. 모스크바 남부 지역 순환도로 옆에 숲으로 둘러 싸인 이 빌리지에는 모스크바 상류계급 인사들의 주말용 고급 별장과 다가구 주택이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공동주택에는 에스엔게(CIS•독립국가연합) 외국인 노동자들 이 거주했다. 방 한 칸을 세 얻어 사는 부부 단위의 이주민이 많았다. 20대 초반의 젊 은이들은 2~3명이 같은 방을 썼다. 휴일이면 에스엔게 출신 외국인들은 식료품 가게 에 옹기종기 모여 맥주를 마시거나 점포주 내외를 통해 고국으로 돈을 송금했다. 루 블 뭉치를 건네면 모바일 뱅킹을 통해 삽시간에 솜, 숨, 텡케가 가족 계좌로 입금됐 다. 이들은 식료품점 난간과 계단에 걸터앉아 쎄미치키(해바라기 씨)를 씹으며 모국 어로 지인과 통화했다. 해거름녘이 되면 자리를 털고 일어나 한 칸짜리 세간으로 뿔 뿔이 흩어졌다.


방이 열 개인 3개 층 코티지(Cottage) 주인은 한국 사람이었다. 91년 소련이 개방 되면서 모스크바에 유학 온 한인 1세대였다. 이 씨는 현지인 여성과 결혼해 정착한 50대 후반의 교민 언론 사장이었다. 이 집에 세 든 것은 2017년 6월이었다. 러시아 회사에서 해고된 이후 수입이 없었다. 비자 만료는 1년이 채 남지 않았고 독채 아파트 를 임대한다 해도 현지 주인은 거주지 등록을 꺼렸다. 무엇보다 다달이 지불해야 할 월세가 만만치 않았다. 반면 이곳은 거주지 등록이 가능했다. 하늘에 마름꼴로 달아 놓은 수직 회전창이 마음에 들었다.


두드키노 에스엔테 162번지. 파란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석판으로 된 널찍한 차양 이 하늘을 가리고 있어 입구는 어두컴컴했고 여름에도 서늘해 현관 안쪽은 동굴 같았 다. 거실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문간방이, 오른쪽에는 자바라 칸막이가 쳐져 있었다.

문간방은 이 씨의 작업실로 각종 서적과 집기류, 간이침대, 사무용 인쇄기가 보였다. 칸막이 뒤에서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났다. 거실 안쪽에는 방 두 개가 나란히 붙어 있었 다. 주방 창문에서 들어오는 햇빛이 두 개의 방문을 어슷하게 썰었다. 눅눅한 습기를 가득 머금고 있는 집은 마구간 같았다. 빛만이 동서남북의 방향을 가늠케 하는 유일 한 나침반 역할을 할 정도로 채광이 좋지 않았다.


유난히 비가 많이 왔던 2년 전 여름, 지붕과 2층 화장실을 잇는 우수관 부식으로 1 층 천정에서 빗물이 샜고 벽지에 얼룩이 졌다. 집주인 이 씨는 배관공을 불렀다. 해 머드릴 타공 소음이 집 안 구석구석을 두들겨댔다. 2층 화장실 바닥 타일이 뜯겨졌고 구멍이 난 1층 천장 내부의 나무 구조물이 을씨년스러웠다. 공사비를 두고 이 씨와 인 부는 옥신각신했다. 이 씨는 초과 비용을 지불할 수 없다고 항변했고 남자는 작업이 까다로워 두 배의 노임을 달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다시는 부르지 마라.”


그는 앉아 있던 의자 팔걸이를 주먹으로 내리친 후 힘껏 몸을 일으키더니 우즈베키 스탄 말로 소리 높여 따졌고 이 씨는 한국말로 욕지거리했다. 몸을 돌려세운 남자와 마주쳤다. 자글자글한 주름과 구릿빛 피부. 핏발 선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힌 그는 노인이었다.


“왜 그래요?”
“뭘 왜 그래? 돈 더 받아내려고 앙탈 부리는 거지.”


남자는 두드키노에 사는 에스엔게 이주노동자들의 주택만 수리하는 개인 사업자 였다. 전문 업체보다 인건비가 싼 반면 전문성은 떨어졌다. 과거에 몇 번 보수 작업 을 의뢰했는데 같은 에스엔게 출신 외국인들에게는 저렴하게 수리해 주는 반면 자신 에게는 두 배 이상 보수비를 요구한다며 투덜댔다. 2층에 사는 아스메트를 통해 들은 바로는 작업을 마친 이후 늘 수리비 문제로 둘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이 씨는 노 인이 부르는 값에 4분의 1만 지급했다. 그러면서도 호출이 있을 때마다 이 씨의 집을 찾았다. 거절하느니 한 푼이라도 버는 게 남자 쪽에서는 이득이었다. 이날 남자는 반 나절을 허비했고 이 씨는 공사가 커진 만큼 노인이 제시했던 금액보다 몇 배는 더 돈 을 쓰게 됐다. 승자 없는 싸움의 피해는 국적이 다른 13명 세입자의 몫이었다.


어느 날 이 씨는 나를 불러 세우고는 흐뭇한 표정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구멍 난 천 정은 깔끔하게 마름질돼 있었고 화장실도 새 타일을 깔아 말끔했다.


“1층에 새로 이사 온 친구 솜씨야. 탈북자인데 기가 막히지?”


이 씨의 작업실 외 건물과 뒤뜰이 연결된 방 하나가 더 있었다. 이 방에는 4개월 월 세가 밀린 아르촘과 보나라가 살았다. 이 씨는 야반도주를 염려해 부부의 거처를 안 채로 옮기라고 지시했다. 보나라는 방에서 자주 아르촘에 언성을 높였다. 아르촘은 작달막한 키에 목을 앞으로 길게 빼고 굽은 허리로 어기적 걷는 모양새가 유인원 같 았다. 그는 다른 동거인들과 달리 술을 마시지 않았고 담배도 안 피웠다. 그의 유일한 취미는 쉬는 날 거실 소파에 앉아 공유 플랫폼에 올라오는 개그 동영상을 보는 것이 었다.


무표정한 그는 이때만큼은 홍연대소했지만 거실이 어두워 웃는 표정을 보지는 못 했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둘은 법적인 부부 사이는 아니었다.


아르촘은 아제르바이잔 출신이었고 보나라는 우즈베키스탄 여자로 농산물 시장에 서 만나 동거하는 사이였다. 보나라는 자신의 수입을 우즈베키스탄에 송금하면서 생 활비 대부분을 아르촘에게 받아썼다. 그녀는 월세를 받아 화장품이나 장신구, 옷을 사는 등 자신을 치장하는데 썼다. 여자는 남자에 우즈베키스탄 식솔에 부칠 돈을 요 구하며 삿대질과 잔소리를 했지만 아르촘은 단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았다. 웃는지 우 는지 모를 특이한 표정으로 인상만 살짝 찌푸렸다. 키가 아르촘보다 큰 보나라는 이 목구비가 뚜렷했다. 짙은 눈썹과 쌍꺼풀, 날렵한 콧날에 얼굴은 갸름했다. 하지만 외모와 달리 수다스러웠고 타인을 자주 헐뜯었다.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거나 부풀려 집 주인 이 씨와 이웃을 이간질했다. 때에 따라 누구의 편에 서는 것이 자신에게 이로운 지 잘 알았다. 단체로 집주인에 불만 사항을 건의할 때면 보나라는 뒤로 빠졌다.


그녀의 잠적은 예정된 시나리오였다. 아르촘의 벌이가 나아지질 않자 이 씨의 아이를 낳아 줄테니 함께 살자고 제안했다. 이 씨는 손사래를 쳤고 그녀는 우즈베키스탄 에 보름 정도 다녀온다며 캐리어를 쌌다. 주방에 있던 나에게 다가와 돌아와서 보자 며 눈인사를 건넸다. 아르촘 역시 메모 한 장을 남긴 후 나흘 후 집을 나갔다. 종이에 는 ‘이즈비니쩨, 야 빠똠 베르누 젠기(미안합니다. 돈은 다음에 갚겠다)’라고 적혀 있 었다. 아르촘과 함께 있는 메신저 프로필 사진은 다른 남자와 정답게 찍은 사진으로 바뀌었다


이 방의 새 주인이 림 씨였다. 이렇게 공동주택은 방 한 칸에 세 든 세 명의 20대 타지키스탄 청년 아흐메트, 아비케, 라수르와 우즈베키스탄 부부인 아스메트, 굴리나 라.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우그르백. 키르기스스탄에서 온 카라백과 질로라. 이 씨의 러시아인 장모 제냐 할머니. 집을 관리하며 신문을 배달하는 나이지리아 출신 흑인 막스. 한국인인 나와 탈북민 림 씨 등 12명의 다국적 노동자들이 거주하는 기숙사가 됐다.


림 씨는 방문을 열어두는 법이 없었다. 낮에는 텃밭이 있는 뒤뜰에서 직접 제작한 제재기로 목재를 다듬었고 저녁에는 방에서 종종 기타 반주에 맞춰 찬송가를 불렀다. 가끔 대중가요 비슷한 노래를 흥얼거렸는데 보천보전자악단 출신 공훈가수 리경숙의 ‘언제 만냐랴’였다.


어젯밤 꿈속에서도 당신을 그려 봤어요/ 아득한 하늘가 멀리 애타 게 불러 봤어요/ 언제 만나랴 언제 만나랴 기다려 타버린 마음/ 돌아 오세요 돌아오세요 아~ 고향의 품에


그는 원곡 노랫말 가운데 ‘조국’을 ‘고향’이라고 바꿔 불렀다. 그에게 고향과 조국은 동의어가 아니었다.


림 씨가 들어온 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자바라 칸막이가 있던 자리에 슬라이딩 붙 박이장이 설치됐고 다용도 신발장을 들여놓은 후 수십 켤레의 신발과 잡동사니로 어 수선했던 현관 안쪽이 말끔해졌다. 목공용 대패기의 앙칼진 쇳소리가 멈추자 제냐 할 머니가 키우는 닭들이 제재기 쪽으로 모여들어 바닥에 떨어진 대팻밥을 쪼았다. 요란 한 엔진 톱 소리에 묻혀 있던 비행기 활공 소음이 귀청을 때렸다.


“직접 제작하신 거예요?”


제재기와 슬라이딩 테이블쏘를 손으로 가리키며 묻자 고개를 들어 비행기를 쳐다 보던 그가 내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이쯤한거야 뭐, 톱날이 무디어서 고저, 잘 잘리지가 않네요. 남조선 분이 계시다 고 들었는데, 선생님인가 봅네다?”


러시아 언론사에서 북한 번역가와 함께 일한 경험이 있었고 한국에 있을 때 북한이 탈주민 취재를 했었다. 림 씨가 낯설지 않았다.


“어디 교회 다니셔요? 담임 목사님이 아는 분인가 해서요?”  
“로시야 장로신한교회라고… 잘 모르실 겁니다. 툴라에 있는데….”


툴라는 모스크바에서 200km 떨어진 소도시로 톨스토이 고향이었다. 관광지로 한 국인들에게도 제법 알려진 곳이었다. 그는 다른 탈북민 소개로 6개월 정도 교회에서 숙식하며 일을 봐줬다. 돈벌이를 위해 며칠 전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매 주일 마다 툴라로 예배를 다녔다. 일요일 아침 첫 기차로 갔다 저녁에 돌아왔다. 그의 눈은 시야에서 사라지는 비행기를 쫓고 있었다.


“북조선에 갈 수 있는 날이 올지 모르겠어요. 비행기가 하루에도 수 십 번을 왔다 갔다 하는 데 싱숭생숭 하구만….”


림 씨는 모터 전원을 다시 켰다. 원형 톱니에 밀어 넣은 각목이 두 동강 났다. 두드 키노에서 남쪽으로 10km 떨어진 곳에 활주로가 있었다. 도모데도보 국제공항은 유 럽과 중동,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취항 노선을 운항했다. 에스엔게 이주노동자들은 국제 열차나 이 공항을 통해 모스크바에 왔다. 일자리가 턱없이 부족했고 300달러 안 팎의 월급으로는 가족을 부양하기 힘들었다. 수입 대부분은 고향에 남아있는 가족들 에 부친다. 식비와 주거비를 지불하면 남는 게 없다. 이주 생활에 마침표는 없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가까이 있거나 조금 떨어져 있을 뿐 도돌이표는 언제나 이들 생 의 악보 한가운데 있었다. 이주 계기나 명분이 다를 뿐 나 역시 외국인 노동자였다. 뚜렷한 목적 없이 왔으니 돌아갈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렇게 8년이 흘렀다.


나보다 다섯 살 위인 그는 함경북도 길주 출신으로 고난의 행군 시절을 군에서 보 냈다. 전방 2군단 5사단 소속 공병부대를 끝으로 13년의 군복무를 마쳤다. 고향에 돌 아왔을 때 처는 그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세 명의 자녀 중 10살 된 장남 은 꽃제비 생활을 하다 시장에서 건달들에 맞아 죽었고 막내는 6살 때 장티푸스로 목 숨을 잃었다.


림 씨는 북한에 있을 때 길주 인민위원회에서 가구 제작 근로자로 일했다. 벌이가 변변치 않자 2012년 러시아 벌목 파견 사업에 신청서를 냈다. 그를 포함한 30여 명 북한 노동자들은 하바롭스크의 산림 지역으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2년, 러시아 극동 아무르에서 1년을 벌목공, 공사장 용접공으로 일했다. 하바롭스크에서 고려인 목사를 만나면서 탈북을 결심했다. 림 씨가 꺼내 보인 성경책의 표지는 오래 품고 다닌 듯 손 때가 묻어 반질했다.


“하나님을 만나면서부터 죽은 자식들이 꿈에 나타나지 않았어요. 남조선에서는 굶 어 죽는 사람이 없다고 들었습네다. 모든지 열심히만 허믄 집도 장만하고 아이들 외국에서 공부도 시키고…. 북조선에서는 스스로 돕는 자를 돕지 않습네다. 부자가 되 고 구원 받으려면 남조선에 가야 합네다.”


성경에 나오는 세리자 삭개오가 떠올랐다. 부자가 되기 위해 바리새인들에게 욕을 먹으면서 유대 사회에서 로마의 앞잡이가 된 삭개오는 체면을 무릅쓰고 돌무화과나 무에 기어 올라가 지나가는 예수를 바라봤다. 삭개오는 회심했고 영생의 축복을 받았 다. 림 씨는 구원을 받기 위해 부자가 되고 싶은 건지도 몰랐다. 얼마나 오랫동안 기 다려야 할까, 구원이라는 게 실로 존재하는 것인지 무신론자인 나는 알 수 없었다.


2018년 6월 23일
‘최 형, 강원도 화천 하나원입니다. 내일 퇴소합니다. 이곳에서 청평사 광조 스님을 만났습니다. 아시는 분인가요? 중생은 인간이고 구제는 구원인 거죠? 경기도 안성으 로 갑니다. 한국에 오면 연락하세요.’


남조선이란 낱말 대신 한국이라고 적었다. 모스크바에 오기 전 내가 불교계 신문사 에서 근무했다는 것을 기억했다. 30대 초반 다니던 신문사에 사표를 내고 온 곳이 러 시아였다. 데스크는 종교법인 선학원에 대한 비판 기사를 쓰라고 지시했다. 당시 선 학원은 출입 기자는 나였다.


“파사현정(破邪顯正)과 정론(正論)을 위한 건데 어쩔 수 없잖아?”


대학 선배가 선학원 기관지 불교저널 편집장이었다. 선학원은 불교계 장자 종단인 조계종과 심한 갈등을 겪었다. 분종을 두고 조계종과 선학원의 양분된 주장은 첨예하 게 대립했다. 탈종의 위법과 적법성을 두고 두 단체는 팽팽한 대립각을 세웠다. 신문 사는 이해관계 속에서 홍위병 역할을 했다. 그곳에 부처님의 발우는 없었다. 밥그릇 만 있을 뿐. 내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선배의 밥그릇을 발로 찰 수 없었다.


퇴사 후 구직 활동을 했지만 지방 삼류대 인문학과 출신인 나를 뽑아주는 회사는 없었다. 갑을 노동의 한국 사회에서 알량한 자존심 하나는 지키고 싶었다. 을이 되지 않으려 찾았던 일이 소화물 배송이었다. 그러나 사고가 잦았고 특수고용직 특성상 산 재보험이 적용되지 않았다. 인적, 물적 피해의 책임은 내 몫이었다. 사고 처리가 더 뎌 보험회사를 통해 해결하는 게 불가능했다. 배송 시간 맞춰 전달하는 게 퀵이었다. 3개월 만에 그만뒀다. 1분 1초를 다투는 퀵서비스는 교통법규 위반이 불문율이었다. 목숨을 담보로 한 고개 운전만이 능사였다. 불가능의 벽을 뛰어넘는 돈의 묘기를 선 보일만한 실력을 갖춘 라이더만이 경쟁에서 살아남았다.


다국적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점에 입사했다. 배달원에 대한 교통법규 준수와 안 전 배달 최우선이라는 바이크 캐리어에 붙은 스티커 문구를 믿었다. 가맹점이 아닌 직영점이었다. 메이트 원부터 시작해 점장이 된 김미선은 나와 동갑이었다. 4대 보험 가입도 의무사항이었다. 몇 달 동안 업무는 수월했다. 4명의 라이더 중 누군가 무단 결근하지 않는 한 ‘30분 이내 배달 완료’는 지켜졌다. 알바생들과 어울리는 재미도 쏠 쏠 했다. 한 부모, 조손 가정의 아이들이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방과 후 시간제 알 바를 겸하는 고등학생들이었다. 학업에 취미가 없어 일찍부터 취업 전선에 뛰어든 미 성년자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몇몇은 점장으로 승진해 본사 직원이 되는 게 꿈이었 다.


배달량이 부쩍 많아진 것은 같은 쇼핑몰센터에 경쟁업체가 체인점을 오픈 한 이후 다. 점장도 바뀌었다. 서지연 점장은 경기도 부천점에서 부점장으로 근무하다 승진해 원미점으로 발령받았다. 20대 후반으로 고3 때 메이트 원으로 알바를 시작해 27살에 점장을 단 젊은 여자였다. 그녀는 이름에 존칭을 썼던 김 점장과 달리 나를 라이더 최 라 불렀다. 카운터 티오를 줄이고 주방 인원을 늘렸다. 자신이 직접 주문을 받았다. 층 낸 숏커트 밑으로 하얀 목덜미가 유난히 두드러져 보였고 귓 선이 보이도록 귀밑 머리를 말끔히 실핀으로 고정했다. 고객 앞에선 하얀 치아가 드러나 보이도록 웃었지 만 직원들 앞에선 무표정했다.


경쟁업체 영향 탓인지 점포 매출이 줄기 시작했다. 반면 시간당 배달 건수는 갈수록 늘었다. 라이더가 비번인 경우 30분을 훌쩍 넘기는 사례가 빈번했다. 급기야 원 코스 포, 파이브 포인트를 커버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마지막 배달지에 2시간이 지난 후 도착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인력을 충원하지 않아 발생하는 운영과 관리상의 문제였지만 클레임 감당은 라이더의 몫이었다. 본사에서 라이더 운영 지침과 관련한 공문이 하달됐다. 난 배달 중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 서명을 마친 후였다. 스태프 한 명이 본사 발신의 ‘라이더 운영 지침 추가의 건’이라는 공문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정호 씨 이거 그냥 형식적인 거래요. 특별한 것은 없는데 라이더 안전을 위해서라 네요.”


꼼꼼히 서류의 내용을 훑어봤다. 내용 가운데에는 ‘교통법규 위반에 따른 교통사고 는 당사자가 책임을 진다’는 조항이 있었다. 원 코스 트리 포인트 배달을 마치고 돌아 온 참이었다. 중앙선 침범과 인도 주행, 횡단보도 주행, 신호 위반, 짐작 가는 위반만 네 건이었다.


“이거 사인할 수 없어요. 배달하면서 교통법규 지키는 거, 그거 지금 상황으로는 물 리적으로 불가능한 거 아시잖아요? 대책을 세워 주시던지요. 이거 라이더가 일부러 위반하는 게 아니라…….”


말을 잇는 사이 ‘삐삐’ 소리를 내며 배달 전용 포스 단말기가 울렸다. 주문이 여덟 게나 밀려있지만 바이스(VICE)인 인선이가 콜 주문을 접수했다. 홈서비스 시스템은 콜센터에서 주문을 받으면 고객 거주지와 점포 위치의 거리와는 상관없이 30분 내로 배달이 가능한 매장에서 억셉트하는 방식이었다. 10개까지는 무조건 주문을 받으라 는 점장의 지시가 있었다고 했다.


“다들 서명했는데…….”

“잠깐 만요. 점장님하고 이야기 좀 하고요.”


카운터 포스에서 손님의 주문을 받고 있던 서 점장에 면담을 요청했다.


“본사 지침이에요. 라이더 안전을 위한 조치입니다. 라이더 최님은 교통법규를 철 저히 준수하시는 것 압니다. 다른 점포에서 교통법규 위반 사례가 자주 목격되는 모 양입니다. 회사 이미지에 큰 타격을 주는 위법 행위라는 거 아시잖아요? 방지 차원이 라고 유념하시면 됩니다.”


그는 구어체보다는 문어체를 쓰려고 애썼다. 연필 심 부러지듯 ‘뚝’ 소리 나는 말투 였다.


“포스를 봤는데 배달이 밀린 상태에서 왜 주문을 계속 받는 겁니까?”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나이에 비해 눈가에 주름이 많았다.


“준수 사항을 지키시면 됩니다. 30분 내 배달! 교통법규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배달 지연을 걱정하는 것은 회사가 아니라 4명의 라이더였다. 내가 지침을 준수하면 동료 라이더들의 업무량이 배가되고 그들이 따르면 내가 지침 을 어겨야 했다. 딜레마였다.


“일하지 말라는 이야기네요?” 

“선택을 하시라는 말입니다.”


말을 끝낸 서 점장은 배달 포스가 있는 사무실에 들렀다 카운터 포스로 돌아갔다.

배달 주문은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다. 라이더 모집 공고가 나간 후 이틀간 세 명이 면접을 보러 왔다. 50대 중년 남성과 대학 휴학생, 고등학교 자퇴생이었다. 점장은 가장 나이 어린 친구를 선발했다.


매일같이 직장을 그만두는 수만 명의 사람들과 달리 난 이직이 아닌 국경을 넘었 다. 지인들이 지금까지도 소련이라 부르는 러시아였다.


2018년 8월 9일
‘답장이 없네요. 한국은 정말 덥습니다. 모스크바는 시원하지요? 결심을 명백히 가 지고 살고 있습니다. 모스크바에서 선교하시던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이창곤 사장을 알던데. 잃어버린 돈은 찾았나요?’


그는 3개월 만에 두드키노를 떠났다.
약속과 달리 집주인은 림 씨에게 일거리를 알 선해 주지 않았다. 건물 유지 보수 이외에 텃밭의 모종판 거치대나 차광막 제작 등 요 구 사항이 늘었다.


이 사장에 대한 림 씨의 불만은 점점 쌓여갔다. 텃밭 옆 빈터에 별채를 지어서 살라 는 말을 했을 때는 혀를 찼다고 했다.


“떠날 사람에게 집을 지으라니… 바보가 아니고서야 그 의미를 모르겠습니까?”


같은 날 저녁에 발생한 아비케와의 시비에 림 씨의 마음은 완전히 돌아섰다. “


너 뭐라고 했네?”


방정맞고 이죽거리기를 좋아하는 아비케는 세입자 가운데 가장 어렸다. K 홀딩스 러시아 법인장의 운전기사로 일했다. 그의 어머니는 사할린에서 이주한 고려인 4세 였다. 한국말을 제법 했다. 림 씨는 여느 때처럼 이른 저녁 식사 중이었다. 다른 때와 달리 일찍 귀가한 아비케는 림 씨 옆에 다가가 반팔 옷소매 끝을 잡고 김치 냄새가 난 다고 킁킁거리며 빈정거렸다.


“간나 새끼 어디서 함부로 입을 놀리네?”


아비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과민반응을 보이지 말라는 제스처를 취하며 뒤로 물러섰다. 아비케의 행동은 림 씨의 화를 더욱 북돋았다. 같은 에스엔게 세입자들에 게는 건방을 떨어도 이 씨와 내 앞에서는 공손했다. ‘주몽’같은 사극과 K-POP을 좋 아한다고 했다. 부러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고개 숙여 인사하는 시늉을 해 보이기도 했다. 그런 아비케의 행동을 림 씨도 언젠가 먼발치서 본 적이 있다. 갑질 횡포를 당 하는지 언젠가는 법인장의 흉내를 내며 자신의 정강이를 발로 차고 뺨을 때린다면서 욕지거리를 따라 했다


“웃지 말라! 네 애비한테도 그러네? 맛 좀 볼래?”


림 씨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먹을 불끈 쥐고는 이를 악물며 화를 삭였다. 난 진 정하라면서 그의 어깨를 잡았다. 현관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동거인들이 일을 마치고 귀가한 모양이었다. 림 씨는 방으로 들어갔다. 식지 않은 국과 콩밥. 계란 프라이를 얹은 묵은 김치가 담긴 종지 그릇. 조촐한 밥상이었다.


“북조선 출신이라고 무시당한 게 한두 번이어야지요. 조런 아새끼들 공사판에서 수 도 없이 만났습네다. 아들놈 나이밖에 안 되는 철웁는 것들이 고저 북조선에서 왔다 하면 비웃습네다. 미안합네다. 나도 막 욕이 나가서……”


“아비케가 심성이 나쁜 아이는 아닙니다. 림 선생님하고 친해지고 싶어서 그런 걸 거예요. 그리 생각하시고 화 푸세요.”

“아새끼가 미워서 그랬간디요… 내가 날 때린 거지.”


림 씨나 아비케나 매일 마주치고 살아야 하는 처지였다. 앙금이 있어야 서로 불편 할 게 뻔했다.


“리 사장과는 일 못하겠습니다. 부리는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이따위 집 나가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기거할 곳은 있으세요?”
“모스크바에 있는 목사님께 도움을 좀 청해 보려 합네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했다. 림 씨는 떠날 채비를 마쳤다. 이 씨에 통보만 하면 그뿐이었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사건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자가용을 중고차 딜러 에 판매하고 신형 컬러 인쇄기를 구매하기 위해 이 씨가 사무실에 보관해 뒀던 4000 달러가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집에 사는 모두가 용의자 선상에 올랐다. 림 씨가 나가면 100% 범인으로 몰릴 게 뻔했다. 이 씨는 일주일 내에 돈을 제자리에 갖다 놓지 않으면 모두 내 쫓을 것이라며 엄포를 놓았다. 세입자 모두 근심의 눈초리로 나를 쳐다봤다. 그들 대부분 한 달에서 많게는 5개월의 월세가 밀려 있었다. 도난이라는 명백한 근거는 없었다. 이 씨가 다 른 곳에 두고 기억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었다. 세입자들은 서로 의심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이 식사 후 주방에 두고 간 세재나 식용유, 두루마기 휴지를 사용하거나 가 져가는 일은 있었지만 냉장고에 보관한 이웃의 식료품에 손대는 이는 없었다. 돈을 훔칠 만큼 손버릇이 나쁜 사람은 떠오르지 않았다. 예순이 넘은 우그르백이 한국인인 나에게 문제 해결을 부탁했다.


“뜨이 줴 즈나예쉬, 바크루크 녜트 따끼흐 류제이(너 알잖아, 우리 가운데 그런 사 람은 없다.”

“카녜쉬나, 야 빠니마유(저도 압니다).”


늦은 시간인데 사무실 불이 켜져 있었다. 맥주 몇 캔을 들고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땀 크또?(거기 누구야?)
“저 정호에요.”


술을 마시는 날 그는 아파트가 아닌 두드키노에서 밤늦도록 신문을 편집했다. 맥주 를 따라주며 혹시 다른 데다 두고 착각한 것은 아닌지 물었다.


“야!, 자동차 넘기고 여기서 돈 받아 여기, 여기에다 꽂아 두었다니까.”


이런저런 잡다한 서류 묶음과 낡은 서적들 사이에서 러시아어판 성경을 꺼내 보였 다. 표지에는 러시아 정교회 십자가가 그려져 있었다.


“이게 내 금고야. 월세 받으면 여기 적어두고 종이 같은 거 주문하면 여기서 빼서 줬다고.


한글 발음으로 적어놓은 에스엔게 사람들의 이름과 방 번호인 듯한 숫자가 적혀 있 었다. 두꺼운 입출금 거래 장부처럼 보였다.


“여기 돈 집어넣는 걸 누군가 본 거겠지. 차 팔고 인쇄기를 바로 주문해서 그냥 여 기에 두었다고… 누군지 짐작 가는 애 없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다음날 저녁 주방에서 회의를 소집했다. 림 씨를 제외한 세입자 모두가 같은 시간에 모인 것은 처음이었다. 여섯 명이 앉을 수 있는 식탁에는 우그르백을 포함한 남자들이, 앉은뱅이 의자에는 여자 둘이 앉았다. 젊은 친구들은 서서 경청했다. 림 씨는 방에 있었다. 거실과 주방 사이 선반에 카메라가 내장된 곰 인형의 머리가 모터 소리를 내며 좌우로 회전했다.


“온 빠다즈례바예트 까즈도바 이즈 나스. 우 나스 아스딸로씨 똘까 치뜨리 드냐. 예 스찌 똘까 아드노 바즈모즈노스찌……. 남 누즈나 빠모치 미스테루 림(이 씨는 우리 를 계속 의심한다. 4일 밖에 남지 않았는데 방법은 하나다. 림 씨를 도와주자).”


2주일 전 교당에서 림 씨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고 한 교도가 사무실을 큰 평수로 이전하는데 맞춤 가구 제작을 그에게 부탁할 수 있느냐고 물어 온 적이 있었다.


이 씨에 한 달간 여유를 달라고 했다. 그의 선전 포고에는 월세 미납 세대의 체불 문제를 해결하려는 계산이 있었다. 잃어버린 4,000불은 차치하고 몇 개월간 밀린 월 세를 일 주 일만에 받을 수 있을 거라고 그도 기대하지는 않는 눈치였다.


“림 선생님이 여기 사람들 좀 도와주시죠. 구원이 신만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제가 하느님도 아니고 아무것도 없는데 누굴 도와 줍네까…. 다른 사람 찾아 보시라우요.”
“어차피 돈을 찾지 못하면 선생님도 이곳에서 나갈 수 없어요. 난민 신분이신데 이 씨가 신고라도 하면요.”


그는 방 문턱에 걸터앉아 컴컴한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아무르 공사판에서 일할 때도 이런 일이 있었어요. 거기 여러 외국 애들하고 일했 는데 러시아 십장이 우리 북조선 동무들을 의심하더군요. 죄라면 북조선에서 태어난 건데….”

한참 뜸을 들인 후 그는 말을 이었다.


“뭘 내놓으란 말입니까?”


낮이고 밤이고 제재기 돌아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아비케는 목공소에 일하는 고향 친구에게 나사나 경첩 피스, 접착 스토퍼, 사이드댐퍼, 마감캡 등 조립에 필요한 부속품을 조달했다. 우그르백은 벌목 회사를 운영하는 지인에 도움을 요청했다. 자동 대패기나 밀대, 테이블 톱, 복학기, 페더보드 같은 목공 기계를 무상으로 빌렸고 천연 목재, 파티클보드, 합판 등 목재를 구해 왔다. 이삿짐센터에서 일하는 아스메트는 일 이 없는 날 아그잠과 함께 목재를 짐차로 실어 왔다. 막스는 림 씨의 보조 역할을 자 처했다. 굴리나라는 밀대와 자동대패로 각재와 판재를 다듬은 후 무늬목을 붙이거나 퍼티를 칠했다. 미장 경험이 있는 질로라는 조립이 완성된 가구에 페인팅 후 셀락을 발랐다. 난 완성된 가구를 아르케와 함께 사무실로 옮겼다. 이 씨와의 약속 기한이 며 칠 남지 않은 어느 날 가구를 주문한 박 씨가 미리 잔금을 계산해 줬다. 4,000달러가 조금 넘는 3십만 루블이었다.


“돈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저희끼리 모은 거니 받으세요.” 이 씨는 내 얼굴과 돈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슬그머니 돈을 받아 사무실로 들어갔다.


2019년 3월 28일
‘최 형, 야간 신학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 다 - 고린도후서 6장. 하느님과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림 씨가 두드키노에서 거처를 옮긴 후 난 러시아 정부 국가 장학생에 합격해 늦깎 이에 석사 과정에 입학했다. 비자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학교에서 아내를  만났고 두드키노에서 동거를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전 졸업했다.


누군가는 떠나갔고, 누군가는 남았다. 또 누군가는 새로 이사 왔다. 아내는 임신 6 개월째였다. 눈에 띄게 배가 불러왔다. 이곳을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 식 탁 의자는 여섯 개고 중간중간 앉은뱅이 의자가 여기저기 놓여있다. 투박한 접시와 밥그릇, 이가 나간 포크, 때 묻은 나무젓가락. 모든 게 그대로다. 밥을 펐다. 냉장고 에서 김치용기를 꺼낸다. 한 끼 분량이다. 김치를 종지에 담는다. 기름때가 범벅인 프 라이팬 바닥면 코팅이 심하게 벗겨져 있다. 식용유를 듬뿍 쳤지만 계란이 계속 눌러 붙는다. 계란 프라이를 김치 위에 얹는다. 어머니가 모바일 메신저로 문자를 보내왔 다.


2019년 6월 3일
‘아들 언제 오니? 이제 집으로 돌아와야지’


지붕 위로 비행기가 좌표를 따라 날아간다. 식탁이 삐걱거렸고 놋그릇에 숟가락이 부딪히며 자꾸 징징 소리를 냈다.